케빈 코스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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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배우.
2. 생애[편집]
1955년 1월 18일 출생. 미국 캘리포니아주 린우드에서 전기기사 윌리엄 코스트너와 사회복지사 샤론 라에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4] 독일인, 아일랜드인, 체로키족 혈통을 가지고 있는데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난 할아버지가 체로키족 혼혈이었다. 케빈 코스트너는 침례회를 믿었으며 가난해서 침례교회 성가대를 하며, 피아노를 배우고 시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 고등학교 졸업 후 경영대학인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풀레턴 대학교 재정학과 마케팅학을 전공했다.
《늑대와 춤을》 제작 당시 스스로 밝히길 아메리카 원주민계 혼혈이라고 한다. 물론 먼 조상 이야기이긴 하지만.
3. 배우 경력[편집]
마케팅학을 전공했지만 대학 때 연기에 관심이 생겨 연기 수업을 듣다가 후에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던 중 유명 배우 리처드 버튼을 만나 조언을 듣고는 전문적인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하며 이후 1980년대 여러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물론 초기에는 여러 단역을 거쳤는데 1983년작인 《빅 칠》에서 극중 죽은 시체로 말없이 누운 시체 역할로 장례식 장면에서 잠깐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 영화 감독인 로런스 캐스던[5] 눈에 띄게되어 1985년 1월 개봉작이자 케빈 레이놀즈가 감독한 서부물 《판당고》로 주연을 맡게 되었다. 사실 Sizzle Beach, U.S.A라는 1981년 에로틱 코미디 영화에 주연으로 나오기도 했는데 바로 트로마가 공동 배급한 영화였다. 흥행이나 자세한 정보는 거의 묻혀진 걸 보면 그에게도 거론하기 싫은 경력인 듯하다. 그밖에도 Shadows Run Black라는 1984년작 슬래셔 영화에서도 주연으로 나왔는데 한국에선 80년대 중순에 '검은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오아시스 비디오에서 출시했는데 케빈 코스트너에 대하여 일절 언급이 없다.
1987년 브라이언 드 팔마가 감독한 《언터처블》이라는 형사물에서 주연을 맡아 흥행하면서 미국에서 어느 정도 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한국에서는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노 웨이 아웃이, 서울관객 19만을 기록하며, 코스트너의 인지도를 감안하면, 당시에는 대박을 거둬 그가 알려지게 된다.
1990년 점점 상승세를 타던 코스트너는 서부극 《늑대와 춤을》에서 주연과 감독, 제작을 맡아 2,200만 달러의 제작비로 월드와이드 4억 2,400만 달러의 흥행 성적을 올리며 대박을 터뜨렸고, 그 해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휩쓸며, 할리우드 최고의 인기 배우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된다.
1991년에는 로빈 후드와 올리버 스톤 감독의 JFK가 흥행하며 성공가도를 달린다.
1992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한 보디가드는 비록 평론가들 평은 갈려도, 월드 와이드 4억 달러라는 세계적인 대박을 터뜨리며 많은 여성 팬을 확보한 미남 배우가 되었다. 앨범 또한 1,000만장이 넘는 판매고로 초대박을 쳤다.
1993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퍼펙트 월드에서는 뛰어난 연기로 상당한 호평을 받기도 한다.
1994년작인 로런스 캐스던이 감독한 서부극 와이어트 어프가 흥행에 참패하면서 조금씩 불안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이 무렵 본인의 외도로 인한 이혼을 하면서 막대한 이혼료[6] 를 부인 신디[7] 에게 지불하고, 형 다니엘과 함께 사업을 운영하면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성지를 개발하려는 시도로 《늑대와 춤을》 대박 및 스스로 원주민계 피가 흐른다고 하여 사이좋던 원주민들과 마찰을 빚은 걸 비롯해 잇따른 스캔들로 이미지에도 타격을 받았다.
1995년 1억 7,200만 달러의 막대한 제작비[8] 를 들인 영화 워터월드가 망하면서 헐리우드 최고 배우의 이미지를 완전히 말아먹게 되었다. 알려진 것과 다르게 영화는 어찌저찌 해외 흥행과 극장 이외 수익 창구의 호조로 손익분기점은 겨우 맞추긴 했으나 물에 관련한 영화, 즉 해양 블록버스터 영화는 망한다는 등식을 만들어낸 일등공신이 바로 이 영화이며 늑대와 춤을의 캐빈 코스트너는 더이상 없을 것이라는 치명적인 이미지 손상을 가져왔다. 그래서 아직도 캐빈 코스트너가 영화에 나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1996년 이듬해 골프 영화 《틴 컵》에서의 연기가 꽤 호평을 받으면서 안정적으로 회복세를 보이는 듯했다.
1997년에 제작과 감독, 주연을 모두 맡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 《포스트맨》이 8,000만 달러의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1763만 달러의 처참한 흥행성적을 거둬들이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설상가상으로 《포스트맨》은 《늑대와 춤을》의 재탕이라는 등 엄청난 악평 속에서 골든 라즈베리 최악의 배우, 감독, 영화, 음악 상 등을 수상해 버린다.[9] 참고로 《포스트맨》의 촬영을 시작할 무렵 《에어 포스 원》에서 원래 주연으로 캐스팅되었지만 본인이 이 영화를 선택하고 해리슨 포드에게 주연을 넘겨 버렸다. 본인이 엄청나게 후회할 만한 선택이었다.
2003년 몇 년간 암흑기를 보내며 골든 라즈베리상에서 난타당하던 코스트너는 비디오용 저예산 호러물까지 나오며 팬들에게 불안감을 보여주는듯 했지만, 서부 영화 《오픈 레인지》에서 다시 감독, 주연을 맡아 흥행과 비평 면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면서 예전만은 못하더라도 여러 출연작에서 연기로 호평을 받는다.
2007년작 《미스터 브룩스》에서는 성공한 사업가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연쇄살인마 역으로 전에 없던 섬뜩한 연기를 선보여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2012년에는 방영한 히스토리 채널의 《햇필드 앤 맥코이》라는 미니 시리즈[10] 에서 좋은 연기 덕분에 에미상 등 수십 개의 상을 수상했다.
2013년 맨 오브 스틸이 대박이 나면서, 제2의 전성기가 열리며, 건재함을 보였다.
2016년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히든 피겨스가 흥행 대박이 났다.[11]
2018년부터는 미국 드라마, 옐로우스톤의 주연을 맡고 있으며, 드라마가 크게 흥행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전성기 이후 최고 흥행배우 자리에서 밀려났지만, 흥행작이 꾸준히 나오고 있으며, 다른 할리우드 배우들처럼 망언, 범죄, 마약 중독 등으로 이미지를 크게 깎아 먹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다만 본인의 외도 문제와 아메리카 인디언 성지 개발 문제는 흑역사지만 아직도 이 배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고 나이 60세가 넘어서도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는 걸 보면 그렇게 큰 흑역사는 아닌 듯 하다.
2012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 휘트니 휴스턴의 장례식 추모사를 맡았다. 20년 전인 1992년 영화 보디가드에서 남녀 주연으로 출연한 인연으로 추모사를 맡았는데 휘트니 휴스턴의 유족들로부터 참석을 바란다는 정중한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케빈 코스트너가 휘트니 휴스턴의 유족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되어 주고 여러가지로 지원해 줬다고 한다. 그는 추모사에서 '눈물을 닦고 슬픔을 멈추고 가능하면 오랫동안 휘트니가 남긴 달콤한 기적을 기억합시다. 나는 한때 당신의 보디가드였지만 당신은 너무 빨리 가버렸습니다. 하지만 천국으로 가는 길에는 천사들이 보디가드가 되어 줄 것이며 신 앞에서 노래할 때도 당신은 충분히 잘할 것입니다.'라는 감동적인 추모사를 남겼다. 영상
4. 가족[편집]
크리스틴과 결혼할 때의 모습.
전 부인은 신디 실바(1956년생)였으며 현재 부인은 2004년 결혼한 모델 출신의 크리스틴 바움가트너(1974년생)이다. 자녀는 두 부인, 한 애인[12] 사이에서 4남 3녀가 있는데 신디와의 사이에서는 2녀 1남(애니, 릴리, 조[13] ), 크리스틴과의 사이에서는 2남 1녀(케이든, 헤이즈, 그레이스), 브리짓과의 사이에서 1남(리암)이 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자녀는 1984년생 애니, 나이가 가장 적은 자녀는 2010년생 그레이스다.
케빈과 신디는 무명시절 때 결혼하여 함께 성공을 이룩했지만 케빈이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후 잦은 스캔들과 영화 촬영으로 가족들과의 사이가 소원해 지면서 1994년 이혼했다. 크리스틴의 경우 케빈 코스트너와 나이 차이가 굉장히 커서 '트로피 와이프', '골드 디거'와 같은 비방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케빈 코스트너가 슬럼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14] 조강지처에 가깝다.
그러나 두번째 부인 크리스틴 바움가트너에게 이혼 소송을 당했고[15] , 결국, 2023년 5월에 이혼하며 18년 결혼생활을 끝내기로 했다.
5. 필모그래피[편집]
5.1. 영화[편집]
6. 작품 흥행성적[편집]
7. 여담[편집]
- 연기력보단 사람 좋은 인성과 이미지로 승부한다는 점에서 키아누 리브스와 비슷하다.
- 고등학생 때 키가 고작 5피트 4인치 (163cm)에 불과했으나 대학교 2학년 때 키가 185cm가 될 만큼 컸다고 한다.
[1]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지지했었다.[2] 1992년 갑자기 당적을 바꾸었다[3] 그래서인지 민주당원 정치인 앨 고어를 지지했다 또한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를 지지하였으며
2020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피트 부티지지를 지지하였다. [4] 큰형은 다니엘, 작은형은 마크인데 마크는 케빈보다 2년 전에 태어났지만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죽었다. 공교롭게도 케빈이 태어난 1월 18일은 마크가 죽은 날이다.[5] 스타워즈 시리즈 각본 및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각본으로 유명하며 바로 《보디가드》 공동 제작 겸 각본도 그가 썼다. 감독으로서도 작품성도 인정받고 흥행성으로도 인정받는 감독, 제작자, 각본가다.[6] 당시 재산의 절반인 무려 8,000만 달러였다.[7] 조강지처인데 케빈 코스트너가 가난하고 무명 배우 시절 때부터 성공할 때까지 함께 살았던 아내다. 한때 가난했던 케빈 대신 호텔 대실비도 내줬을 정도였다고 한다. 케빈과 이혼 후에는 재혼하지 않고 살고 있는 듯 하다.[8] 당시에 가장 돈을 많이 들인 영화였다. 게다가 이 1억 7,200만 달러라는 수치는 인플레이션을 계산하면 2014년 현재 2억 6,600만 달러로 아바타보다도 돈을 많이 들였다.[9] 3번째 수상이다. 1991년에 개봉하여 흥행만은 좋았던 《로빈 후드》에서 최초로 최악의 배우상을 수상했고 그 다음은 1994년에 나온 《와이어트 어프》에서 두번째로 최악의 배우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북미권 흥행 성적 위주로만 알려져 악명이 생긴 《워터월드》도 수상하지는 않았으나 후보에 있었으며 흥행과 작품성이 좋았던 《보디 가드》도 있었고 1999년에 출연했었던 《사랑을 위하여》와 《병 속에 담긴 편지》 두 편 전부 후보에 있었고 마지막으로 《3000 마일》에 후보에 오른 이후로 더 이상 라즈베리 시장식 후보명단에 오르지 않고 있다.#[10] 위에서 해고당했다는 친구 케빈 레이놀즈가 연출을 맡은걸로 봐서는 앞의 해고 건으로도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거나 다시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11] 평가가 극과 극인 맨 오브 스틸이지만 케빈 코스트너의 조너선 켄트는 다이안 레인의 마사 켄트와 함께 좋은 평가를 받았다.[12] 재벌가의 상속녀로 알려진 브리짓 루니로 1996년 아들 리암을 낳았다. 이후 케빈이 2004년 크리스틴과 결혼하자 결별하고 2005년 빌 코치라는 사람과 결혼했다.[13] 1996년 아버지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틴 컵에 나온 적이 있다.[14] 애초에 둘이 처음 만났던 당시 코스트너는 한참 죽을 쑤던 한물 간 배우였고, 크리스틴은 예쁜 부잣집 아가씨였다. 20살이나 어린 크리스틴이 아쉬울게 전혀 없던 상황이다.[15] 크리스틴 바움가트너의 주장으론 외도를 짚었지만, 케빈은 절대 외도를 하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했다.[16] 사진으로 출연[17] 첫 국내 개봉 흥행작이다. 비디오 잡지 출시 광고에서는 서울 관객 35만으로 기재했었는데 당시 무명이었던 케빈 코스트너를 생각하면 당시 이 정도 서울 관객은 대박이었다.[18] 원제 <Bull Durham>. 오로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승격만을 보고 살아가는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성공과 좌절을 다룬 영화다. 야구에 관심 있다면 볼만하다.[19] 그나마 해외 흥행 및 2차 시장 수익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20]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로 상당한 수작이다. 외교사에 관심이 있다면 보는 것을 추천한다.[21] 단역 출연한 '메이저리그의 꿈'이라는 영화까지 하면 야구 영화가 무려 4편이다.[22] 실제로도 케빈 코스트너는 소문난 야구광이고, 고등학생때는 학교 야구부원이기도 했다
2020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피트 부티지지를 지지하였다. [4] 큰형은 다니엘, 작은형은 마크인데 마크는 케빈보다 2년 전에 태어났지만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죽었다. 공교롭게도 케빈이 태어난 1월 18일은 마크가 죽은 날이다.[5] 스타워즈 시리즈 각본 및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각본으로 유명하며 바로 《보디가드》 공동 제작 겸 각본도 그가 썼다. 감독으로서도 작품성도 인정받고 흥행성으로도 인정받는 감독, 제작자, 각본가다.[6] 당시 재산의 절반인 무려 8,000만 달러였다.[7] 조강지처인데 케빈 코스트너가 가난하고 무명 배우 시절 때부터 성공할 때까지 함께 살았던 아내다. 한때 가난했던 케빈 대신 호텔 대실비도 내줬을 정도였다고 한다. 케빈과 이혼 후에는 재혼하지 않고 살고 있는 듯 하다.[8] 당시에 가장 돈을 많이 들인 영화였다. 게다가 이 1억 7,200만 달러라는 수치는 인플레이션을 계산하면 2014년 현재 2억 6,600만 달러로 아바타보다도 돈을 많이 들였다.[9] 3번째 수상이다. 1991년에 개봉하여 흥행만은 좋았던 《로빈 후드》에서 최초로 최악의 배우상을 수상했고 그 다음은 1994년에 나온 《와이어트 어프》에서 두번째로 최악의 배우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북미권 흥행 성적 위주로만 알려져 악명이 생긴 《워터월드》도 수상하지는 않았으나 후보에 있었으며 흥행과 작품성이 좋았던 《보디 가드》도 있었고 1999년에 출연했었던 《사랑을 위하여》와 《병 속에 담긴 편지》 두 편 전부 후보에 있었고 마지막으로 《3000 마일》에 후보에 오른 이후로 더 이상 라즈베리 시장식 후보명단에 오르지 않고 있다.#[10] 위에서 해고당했다는 친구 케빈 레이놀즈가 연출을 맡은걸로 봐서는 앞의 해고 건으로도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거나 다시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11] 평가가 극과 극인 맨 오브 스틸이지만 케빈 코스트너의 조너선 켄트는 다이안 레인의 마사 켄트와 함께 좋은 평가를 받았다.[12] 재벌가의 상속녀로 알려진 브리짓 루니로 1996년 아들 리암을 낳았다. 이후 케빈이 2004년 크리스틴과 결혼하자 결별하고 2005년 빌 코치라는 사람과 결혼했다.[13] 1996년 아버지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틴 컵에 나온 적이 있다.[14] 애초에 둘이 처음 만났던 당시 코스트너는 한참 죽을 쑤던 한물 간 배우였고, 크리스틴은 예쁜 부잣집 아가씨였다. 20살이나 어린 크리스틴이 아쉬울게 전혀 없던 상황이다.[15] 크리스틴 바움가트너의 주장으론 외도를 짚었지만, 케빈은 절대 외도를 하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했다.[16] 사진으로 출연[17] 첫 국내 개봉 흥행작이다. 비디오 잡지 출시 광고에서는 서울 관객 35만으로 기재했었는데 당시 무명이었던 케빈 코스트너를 생각하면 당시 이 정도 서울 관객은 대박이었다.[18] 원제 <Bull Durham>. 오로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승격만을 보고 살아가는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성공과 좌절을 다룬 영화다. 야구에 관심 있다면 볼만하다.[19] 그나마 해외 흥행 및 2차 시장 수익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20]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로 상당한 수작이다. 외교사에 관심이 있다면 보는 것을 추천한다.[21] 단역 출연한 '메이저리그의 꿈'이라는 영화까지 하면 야구 영화가 무려 4편이다.[22] 실제로도 케빈 코스트너는 소문난 야구광이고, 고등학생때는 학교 야구부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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