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하라 사건
덤프버전 :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편집]
1993년 후지 테레비의 서울 지국장이었던 시노하라 마사토(40)[1] 가 1990년부터 1993년 7월 13일까지 국방정보본부에 근무중인 대한민국 해군 장교 고영철(40) 소령으로부터 군사기밀 자료 등 모두 27건의 군관련 정보를 빼내 당시 주한일본대사관 국방무관이었던 후쿠야마 타츠유키 등 일본 무관 2명에게 전달해 준 사실이 발각되어 구속된 군사 기밀 유출 사건.
2. 사건 정황[편집]
1990년 고영철은 진급에서 탈락하자 일본에서의 취업을 목적으로 후지TV 시노하라에게 2급 군사기밀을 넘겨주었는데 시노하라는 1990년 5월부터 공군 항공기 전력 배치 현황 등 2급 군사기밀 8건과 방공부대 편제표 등 3급비밀 3건 등 모두 11건의 군사기밀을 포함한 군 관련 정보 50건을 고 소령으로부터 빼내 이 가운데 11건의 군사기밀 등 27건을 일본 무관인 후쿠야마 등에게 정기적으로 전달해 왔다.
특히 1991년 12월부터 1992년 말까지 국방부 정보본부에서 정기적으로 작성하는 중요군사정보인 북한일반동향 등의 문건을 입수해 주일한국대사관에서 개최하는 특파원간담회에 참석해 후쿠야마 등에게 월 1∼2회 가량 보고해 왔으며 망원렌즈가 부착된 카메라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대한민국 국군 및 미군의 군사시설과 훈련 상황 등을 촬영해 슬라이드로 제작, 보관한 사실도 검찰의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더욱 대담해진 시노하라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 밀리터리 월간지 마루, PANZER에 '야사하라 마사사다'라는 필명으로 삼팔선을 둘러싼 남북 선전전쟁 최신사정 등의 군사논문을 2건씩이나 기고해 왔다.[3] 그러나 논문에서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였다는 것이 화근이 되어 일본주재 한국무관이 이를 발견하고 국방부에 통보하여 결국 고영철과 시노하라는 구속되었다.
시노하라의 자택을 압수수색한 결과 전환기 군사대비태세 계획(2급·1992년 9월), 남북공존시 및 통일후 전력대비연구 등 군 내부에서도 공개되지 않은 문서가 유출되어 소령급 몇 명이 추가로 구속되었다. 재판 결과 고영철과 시노하라는 징역 15년이 구형되었으나 1심에서 고영철은 징역 7년, 시노하라는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2심에서 고영철은 징역 4년, 시노하라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감형되었다.
시노하라는 영구 입국 금지를 조건으로 강제퇴거 조치되었으나 고영철은 상고하여 3심에서 4년 실형이 확정되었다.
1997년 만기출소한 후 고영철은 타쿠쇼쿠대학[4] 전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대형 사고를 치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와이드! 스크램블 2019년 8월 23일자에 출연해서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야 한다는 망언을 지껄여 욕을 먹었다.#
3. 여담[편집]
- 고영철은 한국통일진흥원 전임교수, 동경 타구쇼구대학 주임연구원, 객원교수, 국방정보본부 북한정보 분석관, 국방부 전문위원을 역임하였고 사건 이후에는 북한문제/안전보장 전문가, 칼럼니스트로 연구, 집필, TV해설 및 특강, 강연 활동으로 한일우호에 기여 중이라며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2020년에는 유튜브에 영상을 올려 북한 관련 생각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5 09:22:25에 나무위키 시노하라 사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