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부여씨 (r1판)
편집일시 :
小妃 扶餘氏
생몰년 미상
1. 개요[편집]
백제의 공주이자 신라의 왕비. 성왕의 딸, 진흥왕의 소비(小妃, 작은 왕비).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2. 행적[편집]
백제가 신라에게 한강 하류를 빼앗긴 직후, 553년 10월, 백제 성왕은 딸(소비 부여씨)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냈고 진흥왕은 그녀를 소비(小妃)로 삼았다.[1] 이는 성왕이 한강 하류 영유권 문제를 문제삼지 않고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는 표현이었지만, 백제의 군사 동맹이자 지원군을 파병한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은 이미 553년부터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소비 부여씨는 전쟁을 준비할 약 1년간의 시간을 벌고 신라를 방심시키기 위한 희생양으로 비정하게 이용된 것이다.
결국 소비 부여씨가 신라로 시집간지 약 1년이 지난 554년, 관산성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아버지 성왕이 남편 진흥왕과의 전투 중 사망했고, 한때는 동맹이었던 두 나라의 관계는 이 때부터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소비 부여씨의 행적은 기록이 없다.
3. 여담[편집]
- 한국사에서 소비(小妃)라는 칭호로 기록된 유일한 인물이다.
-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명문에 기록된 위덕왕의 누이 공주와 동일인인지는 불분명하다.
- 견훤이 선조라고 주장했던[2] 진흥왕의 아내 백숭부인(白𪀚夫人)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우선 백제 계승을 내세운 견훤에게 있어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가장 좋은 인물이고, 더불어 신라의 정통성도 동시에 이어받은 셈이므로 삼한일통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한편 한자를 살펴봐도 백(白)은 오방색에서 서쪽을 뜻하며 숭(𪀚)의 부수인 융(戎)은 서융으로서 서쪽 오랑캐를 뜻하므로, 관산성 전투로 백제와 사이가 틀어진 신라 측에서 백제를 그렇게 생각했던 입장을 담은 호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2-07-15 14:08:31에 나무위키 소비 부여씨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