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코 동조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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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 도치기현 닛코시에 위치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신이 안장된 능. 린노지(輪王寺), 닛코 후타라산 신사(日光二荒山神社)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닛코의 신사와 사찰을 이루고 있다.
동조궁에 있는 8개의 건축물과 신사에 있는 2개의 검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외 수많은 중요 문화재가 있다.
2. 상세[편집]
1616년에 사망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죽기 전에 혼다 마사즈미, 난코보 텐카이, 곤치인 스덴(金地院崇伝)을 불러 자신이 죽으면 쿠노산(久能山)[4] 에서 장사를 치르고 장례는 조죠지(増上寺)[5] 에서, 위패는 다이쥬지(大樹寺)[6] 에 봉안한 후 1주기에 닛코에 작은 사당을 지어 그곳으로 이장해 신으로 모시면 간토의 수호신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실제로 1년 뒤 이에야스의 시신은 닛코에 지어진 작은 사당으로 이장되었다.[7]
이에야스의 사후 1년인 1617년, 천황으로부터 동조대권현(東照大権現)이라는 신호를 받고 이에야스가 신격화되자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 동조사(東照社)가 500곳 이상 세워졌다.[8] 1634년에는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3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할아버지의 사당에 참배한 후 장인 1만 5천 명과 인력 450만 명을 동원해 대규모 증축을 개시, 1636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춘 닛코 동조궁이 건립되었다. 1645년에는 궁호(宮号)가 내려져 동조사에서 동조궁(東照宮)으로 승격되었다. 원래는 지명을 붙이지 않고 그냥 동조궁이라 부르면 되지만 워낙 동조궁이 많기 때문에 구별을 위해 총본산 격인 이곳의 동조궁을 닛코 동조궁이라 부른다.[9]
참고로 에도 성 내부에도 동조궁이 있었고 에도에서 닛코 가도를 따라 동조궁으로 이어지는 행렬 행사인 천인무자행렬(千人武者行列)을 진행하였으나, 막부 말기를 겪으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10] 보신전쟁 때는 전란에 휘말려서 파괴될 뻔한 적도 있었다. 신정부군이 동조궁에 포격을 가하려 했으나, 명령을 받은 도도 타카유키(도도 다카토라의 후손)가 "다카토라 공이 곤겐(이에야스)께 입은 은혜가 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고.[11]
메이지 시대에는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으로 동조궁에서 린노지(輪王寺), 닛코 후타라산 신사(日光二荒山神社)가 분리되어 나갔는데, 원래는 하나의 거대한 성역이었기에 세 시설의 건축물들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섞였다. 그래서 동조궁, 린노지, 닛코 후타라산 신사를 합쳐서 2사1사(二社一寺)라고 부른다.
2.1. 조선의 흔적[편집]
지금의 화려한 동조궁이 막 완성된 1636년(인조 14년)은 4대 조선 통신사가 에도에 방문했을 때이다. 본래 통신사들의 기본적인 임무는 에도에 도착해서 쇼군을 만나 조선이 보내는 외교 문서인 국서를 전달하고 일본 측의 답서를 받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답서를 받으면 에도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 때는 답서를 받았음에도 막부가 굳이 닛코의 동조궁에 방문해달라고 강권하여 방문하였다.
4대 조선 통신사가 에도에 방문함은 표면적으로는 양국의 태평을 축하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은 쓰시마의 다이묘인 소 요시토시와 그 가신인 야나가와 일가 사이에 분쟁이 생겨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막부에 국서 조작(기유약조 참조)을 고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에 막부는 쇼군이 직접 재판을 연 끝에 소 요시토시의 편을 들었으나, 통신사행을 실현하여 외교적인 능력을 보일 것을 요구했다. 한편 조선 측으로서는 청나라의 위협으로 불안했기에[12] 일본의 사정을 자세히 알면 알수록 좋았으며, 이에 따라 정사 임광 등을 파견하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귀국을 서둘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조궁 방문이 갑자기 결정되었으니 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가, 결국 유람만 한다는 조건으로 방문했다.[13]
그렇게 동조궁에 간 통신사 일행은 이에야스의 사당에까지 들어가면 참배를 해야할 수도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 눈이 많이 온다는 이유로 그냥 내려와버렸다. 임광은 이 과정을 사행록 병자일본일기에 남겼는데 동조궁 방문은 사전 논의 없이 갑자기 이뤄진 일이었으므로 나중에 문책받을까 두려워 부정적으로 기록하고 묘사했다[14][15] . 임광 뿐 아니라 부사 김세렴, 종사관 황호도 마찬가지이며, 연구자들 중에는 세 사람의 사행록 내용이 서로 비슷비슷하므로 동조궁을 열심히 까자고 사전에 논의라도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그 후 1642년(인조 20년),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5대 조선 통신사의 방문에 앞서 막부는 사신을 보내 동조궁의 사당에 걸어 둘 어필과 시문(詩文), 범종과 서명(序銘)을 청했다. 인조는 이를 들어주기로 하였는데 조정에서 어필만큼은 보낼 수는 없다고 하여 대신 의창군 이광이 대필하여 일광정계창효도량(日光淨界彰孝道場)이라는 편액을 보낸다.[16] 한편 동종을 주조하게 하고 대제학 이명한(李明漢)이 서(序)[17] 를, 예조참판 이식(李植)이 명(銘)[18] 을 지은 후 행사직 오준(吳竣)[19] 이 동종에 글씨를 새겼다.
동종에는 재밌는 점이 있는데 이식은 숭정 임오 10월에 이 글을 썼다고 해두었다. 그런데 숭정은 명나라 숭정제가 반포한 연호로 1628년부터 1644년까지 사용했다. 하지만 조선은 이미 1636년에 청나라에 항복한 상태였다. 당시 청나라에 대한 반감으로 여전히 명나라의 연호 숭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제작해 타국으로 보내는 선물에까지 숭정을 사용했다는 것은 조선의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엿볼 수 있는 부분.[日光山鍾銘幷書]
이렇게 해서 동조궁에 처음 방문한 4대 조선 통신사(1636), 처음 참배한 5대 조선 통신사(1643)와 6대 조선 통신사(1655)까지 3번의 조선통신사가 동조궁에 방문 및 참배했다. 특히 5대 조선 통신사 때 동조궁에서 제대로 참배를 하게 되면서 다음에도 갈 때를 대비해 의주(儀註)[20] 를 만들기도 했다. 조선 통신사의 참배가 몇차례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동조궁에는 조선 통신사의 방문 흔적이 남았다. 현재도 양명문(陽明門) 앞에는 인조가 보낸 동종이 걸려 있으며, 이에야스의 시신이 안장된 청동탑 앞 삼구족(三具足)[21] 도 인조가 보낸 것이다.
5대 조선 통신사가 동조궁에서 참배를 하는 과정은 작자 미상의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에 잘 나왔다.
또 문 하나를 들어가니 동쪽과 서쪽에 누각이 있다. 동쪽에 있는 누각에는 악기(樂器)를 진열해 놓고 서쪽에는 금수레(金輿) 두 채를 놓아두었다. 이것은 이에야스(家康)가 살아있을 때 타던 수레이다.
또 한 문을 들어서니 이곳은 소위 권현묘(權現廟)다. 도주가 일반 관원은 제외하고 다만 사신만 안내해서 들어갔다. 뜰을 올라갈 때에 좌우에서 옷을 걷어주는 자는 모두 왜인 관리로서 공복(公服)을 입은 자였다. 정당(正堂) 밖에는 탁자를 놓고 물건을 벌여 놓았고, 또 평상(平床)을 놓아 사신이 예를 행하는 곳으로 했다.
뜰 가운데에는 좌우에 악당(樂堂)이 있고 여기에 봉두금반(鳳頭金蟠)을 차려 놓았으며, 악공(樂工) 50명이 모두 금관(金冠)에 수복(繡服)을 입었다. 승도(僧徒)들이 벌여 앉은 것도 역시 백 명이나 되는데, 모두 금으로 수놓은 옷을 입었다. 중 두 사람이 사당 문을 열자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하는데, 생황과 퉁소ㆍ종고(鍾鼓)의 소리가 자못 절조가 있었다.
사신이 평상 위에서 향을 피우고 축을 읽고서 전후 재배의 예를 행하니 도주와 집정들은 평상 밑에 서서 숨을 죽이고 엄숙한 얼굴로 감히 소리 내지 못했다. 예식이 끝나자 사당 뒤에서 수의(繡衣)를 입은 두 어린이가 봉두금절(鳳頭金節)을 가지고 앞에서 인도하고 나갔다. 그러자 주승(主僧)이 금관(金冠)과 금으로 수놓은 옷차림으로 동쪽 뜰로 내려가더니 사신들을 향해서 읍을 하므로 사신도 여기에 응답했다.
주승은 나이 젊고 넉넉하고 명석하게 생겼다. 호를 비사문당(毗沙門堂)이라고 하는데, 지금 왜황(倭皇)의 사촌이요 죽은 왜황의 아들이다. 정당(正堂)의 제도를 보니 모두 기둥이 다섯이요, 집의 용마루와 기둥과 벽에는 모두 용과 봉이 날고 뛰는 모양을 금으로 칠해서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사당 안에는 이에야스의 목상(木像)을 봉안해 놓았고, 사당 뒤 산기슭에는 탑을 세웠는데 높이가 10여 장(丈)이나 되었다. 이 탑은 머리에서 허리까지 황금을 칠했는데 이에야스가 묻혀 있는 곳이라 했다.출처
쇼군은 참배를 마친 통신사에게 하사품을 내렸는데 5대 때는 정은(丁銀) 100냥, 무명 300장을 주었고 6대 때는 정은 500냥, 무명 900장을 주었다.
1655년(효종 6년),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6대 조선 통신사 때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사당인 다이유인(大猷院)에 걸어둘 어필을 요청했는데 효종은 글씨에 자신이 없었으나, 딱히 안 써줄 이유도 없어 조정과 상의하였다. 인조 시절에 대필을 해 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어필을 보내주는 걸로 결론이 나 채유후(蔡裕後)가 지은 영산법계숭효정원(靈山法界崇孝淨院)이라는 글을 효종이 직접 써 선물하였다.# 이 어필은 현재 린노지에서 보관 중이다.
이어 1682년(숙종 8년)의 7대 조선 통신사 때에는 막부에서 먼저 새로 취임한 쇼군(도쿠가와 츠나요시)도 아직 동조궁에 가보질 못했는데 외국의 사신들이 먼저 가는 것은 좀 그러니 이번에는 동조궁 참배를 지내지 않겠다고 하여 이때부터 조선 통신사의 동조궁 참배 및 방문은 없어졌다. 다만 에도에 지은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사당인 겐유인(厳有院)에는 참배를 하기로 하여 처음에는 여기에 걸어둘 어필을 요청했는데 나중에 이 참배도 안 하기로 하여 어필도 보내지 않았다.
이외에도 5, 6대 조선 통신사때 동조궁에 참배할 목적으로 등롱, 화병, 악기 등 선물을 꽤나 챙겨갔고 현재도 남아있다.
3. 동조궁의 내부 건물 및 장식물[편집]
3.1. 장식물[편집]
- 세 원숭이 (三猿)
- 잠자는 고양이(眠り猫)
동쪽 회랑에 있는 히다리 진고로(左甚五郎)의 작품으로, 닛코를 대표하는 상이기도 하다. 진고로는 고양이를 닛코와 이에야스의 정신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였으며, 해당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22]
- 상신고(上神庫) 코끼리 조각
에도 막부의 전성기에 재건된 만큼 각 건물의 처마, 기둥 등에 화려하고 정교하게 조각된 장식들이 많이 있으며 그중에서 코끼리 조각은 조각가가 실제 코끼리를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들은 얘기와 기록만 가지고 조각했다고 한다.
3.2. 내부 건축물[편집]
- 오중탑
1648년 쇼나이(庄内)의 다이묘 사카이 타다가츠(酒井忠勝)가 봉납한 것으로 1812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8년에 다시 지었다. 각 층은 땅, 물, 불, 바람, 공기 순으로 각 요소를 나타내었다. 신바시라(檫, 중심 기둥)가 내부에 있어 지진으로부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기능을 한다.
- 양명문(陽明門)
- 범종
- 오란다 도로(네덜란드 등롱)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능
잠자는 고양이를 지나 720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장소로, 우측에 있는 청동 그릇에 유해가 남아있다. 이때 이에야스의 시신이 안장된 청동탑 앞에 있는 삼구족(三具足)[23] 은 인조가 보낸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것은 아니며 1812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만든 것이다.
4. 찾아가는 길[편집]
닛코역이나 도부닛코역에서 이곳까지 운행하는 도부 버스 중 오쿠호소 - 닛코역 버스[24] 가 있으며 15분 정도 소요된다. 역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어서 도보 여행도 가능한데 이 경우 50분 정도 소요된다.[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