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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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제4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츠나
徳川家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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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1641년 9월 7일 ~ 1680년 6월 4일
신장
158cm[1]
원호
겐유인(厳有院)
재임기간
1651년 ~ 1680년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에도 막부의 제4대 쇼군.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장남으로 이에미츠는 겨우 얻은 아들 이에츠나를 태어날 때부터 이미 후계자로 작정했다고 한다.

이 시기는 무단 통치와 문치주의의 혼합기라 할 수 있다.


2. 생애[편집]


1651년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만 48세로 사망하자 불과 11세의 나이에 쇼군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어린 이에츠나가 쇼군직을 제수받음으로 인해 쇼군도쿠가와 가문이 대대로 계승한다는 원칙이 천명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에츠나가 불과 11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에츠나의 치세 초기에는 1651년(케이안[慶安] 4年) 막부 타도를 외친 유이 쇼세츠(由比正雪, 1605 ~ 1651) 등이 일으킨 '케이안의 변' 등으로 정정 불안이 있었다. 그러나 숙부인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2], 이에미츠의 신하였던 사카이 타다노부,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등 소위 "칸에이의 유로(寛永之遺老)"라 불리는 명신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정정 불안을 해소하고 이후 29년여동안 치세는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에츠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래로 내려오던 힘으로 누르는 정치에서 벗어나서 이에야스가 다이묘들을 억누르던 정책을 일부 완화했다. 다이묘가 갑작스럽게 사고 등으로 사망할 때 후계자가 없을 경우, 급하게 양자를 세울 수 있었던 <말기양자(末期養子) 제도>를 이에야스는 금지했으나 이에츠나는 이를 풀어주었다. 이로 인해 각 다이묘들은 후계자 계승에 안정을 기할 수 있었고, 갑작스런 주군의 죽음에 따른 영지의 몰수와 가신들이 낭인으로 떨어지는 것을 줄여주었다. 또한 주군이 죽었을 때 가신들이 자결하는 순사를 금하는 <순사금지령>을 강화하는 등 문치정치를 추구했다.[3]

치세 후기로 접어들면서부턴 이에츠나를 보좌하던 명신들이 하나둘씩 사망하거나 고령으로 은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츠나는 쇼군이 단독으로 의사를 결정하지 않고 대로들과 함께 상의하여 결정하는 방식의 정치를 정착시켰다. 또한 선대 이에미츠 시절에도 연결되는 칸에이 대기근의 교훈을 상기하여 기근 대책으로 농업을 중심에 두고 유통경제의 활성화에도 주력했다.

다만 말년까지 후계자가 없어 고심해야 했다. 정실인 후시미노미야 아키코 여왕(顕子女王, 1640 ~ 1676)에게선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고, 측실[4]이 임신을 해도 사산되거나 유산되는 불행이 있었다. 결국엔 이에츠나가 1680년 병으로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배다른 막내 동생인 타테바야시 번주 마츠다이라 츠나요시를 양자로 맞아서 후계자로 삼았으니, 그가 바로 이른바 쇼군(...)으로 불리기도 하는 도쿠가와 츠나요시였다. 그리고 이후 이에츠나는 40세(만 38세)의 젊다면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3. 여담[편집]


한국 한자음 한정으로 증조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동명이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徳川家康(덕천가강), 이에츠나는 徳川家綱(덕천가강)이다.

그의 치세는 조선효종, 현종 치세기와 거의 일치한다. 또 에도 막부의 기틀을 확립한 쇼군으로서 조선으로 치면 성종과 비슷한 타입의 통치자라고 볼 수도 있을듯 하다.

이전의 쇼군들과는 달리(?) 상당히 너그럽고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로 알려져있다. 인지도가 낮아서 그렇지 인품만 따지면 역대급 쇼군 중 하나라카더라 그의 인품과 관련된 일화가 몇 개 전해져오는데, 우선 쇼군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누군가가 망원경을 바치면서 천수각에서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면 어떻겠냐고 하자 이에츠나는 "나는 쇼군이지만 동시에 소년이다. 내가 천수각에서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기분 나빠하지 않겠는가."라면서 망원경을 손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5]

또 아버지 이에미츠가 신하들과 유배된 죄인들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을 때 이에츠나가 유배된 죄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느냐고 물었다. 신하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이에츠나는 "생명을 소중히 하려고 유배형을 내린 것인데 왜 먹을 것을 주지 않는가."라고 말했고, 이에미츠는 이에츠나의 말에 기뻐하며 "이런 말을 한 것은 이에츠나가 처음이다."라며 유배된 죄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할 것을 명했다고 한다.

쇼군이 된 이후에는 이에츠나가 식사를 하는데 우연히 이에츠나의 머리카락이 들어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시종이 당황하자 이에츠나는 "그릇을 비우고 한 그릇 더 가져오너라."라고 명했다. 국에 문제가 있어서 바꾸는게 아니라 한 그릇 더 먹는 것처럼 말해서 요리를 한 사람이 곤욕을 치루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고.

신하들의 의견을 많이 수용했는데, 그러다보니 정무를 신하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그리하거라." 하고 결재하는 일이 잦아져 그리하거라 님(左様せい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일화도 있다.

반면 상기한 성품과 거리가 먼 사건도 있었는데, 1653년에 키우치 소우고로(木内惣五郎)라는 사람이 과도한 세금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가 사형에 처해진 사건이 있었다. 이는 당시에 쇼군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는 행동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재위기 시절 이던 1666년 9월 4일 당시 조선에서 탈출한 헨드릭 하멜 일행이 탈출하여 나가사키 근처 고토섬에 도착하였고 그들을 심문하여 조선의 정세, 국제 관계, 나라 상황 등 국가현안뿐 아니라 문물, 풍습과 같은 부수적 분야를 포함한 총 54여개 항목에 대한 조사를 단 하루만에 진행하였고 이를 무기로 조선을 외교적으로 압박했었다.[6]

그의 치세 기간 중에 세키가하라 전투로 유배된 우키타 히데이에가 향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오래도 살았다

1655년에는 조선통신사를 맞이 했었다고 한다.


4. 대중매체[편집]


만화《오오쿠》에서는 이에미츠(치에) 뒤를 이은 딸로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그리하거라." 라고만 하는 일화도 나오고, 이에미츠와 다르게 정치와 후사에 관심없었지만[7] 어머니의 애첩 겸 새 아빠인 아리고토의 만류로 그나마 관심을 보인다. 사실 새아빠인 아리고토를 사랑했고 대화재 때 아리고토에게 고자여도 상관없다며 고백하지만 차인다. 아리고토가 떠나고 실연의 충격으로 정치와 후사에 다시 관심끊고 막부의 허수아비로 살다 후사없이 요절했다. 이에미츠나 이에츠나가 유배를 보낸 적도 없는데 어째서인지 유배된 사람들이 있다고 언급되며 유배 문제는 아기만 낳다 죽은 이에미츠가 아닌 아리고토와 해결하는 걸로 나온다.

1986년 성인 영화 오오쿠 18경 (大奥十八景) 에서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 역을 배우 아오이 테루히코가 맡았다.

마계전생에서는 당대의 쇼군으로 나온다. 그러나 아마쿠사 시로 토키사다의 사주를 받은 가라샤에게 홀려서 타락하고, 뒤늦게 그녀의 속셈을 눈치채지만 이미 때는 늦어 실랑이 끝에 성에 불이 나버리고, 무사들은 야규 무네노리에게 참살, 본인은 가라샤와 싸우다가 불속으로 추락해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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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패로 추정한 키.[慶安] 고코묘 덴노(後光明 天皇) 시절 연호이다.[保科正之] 3대 쇼군 이에미츠의 이복 동생으로 공처가였던 할아버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숨겨둔 자식이었는데, 이복 형인 이에미츠가 신임하여 중용했다. 생몰은 1611 ~ 1673[2] 참고로 호시나 가문은 다케다 신겐과 관련된 가문이었다[3] 여담으로 낭인의 경우 에도 막부의 큰 사회문제가 되었고 순사의 경우에는 순사자가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미 막부의 공식 금지령이 떨어지기 전에 자체적으로 금지한 번도 있었을 정도.[4] 아이가 없는게 워낙 고민이었는지 후시미노미야측에서 직접 측실을 추천할 지경이었다고 한다.[5] 망원경이 뭐 어떻냐고 할 수도 있지만 옛날 시대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이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6] 남은 일행들을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조선측에 외교문서를 보냈다고 한다.[7] 부하들은 오히려 정치에 관심없는거 보단 후사가 없는 걸 더 걱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