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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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격제도(近代社格制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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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 명칭 및 사격은 근대사격제도가 폐지된 1946년 2월 2일 직전 기준
* 신사의 지리적 위치 순서로 나열(동북 → 서남 → 외지)
사격외
(社格外)



관폐대사
(官幣大社)

갓산 신사

카시마 신궁

카토리 신궁

아와지 신사

히카와 신사

히에 신사

메이지 신궁

미시마 신사

센겐 신사

스와 신사

아츠타 신궁

게히 신궁

히에 신사

다케베 신사

다가 신사

오미 신궁

히노쿠마 신궁

구니카카스 신궁

가메야마 신사

구마누니마스 신사

구마노하야타마 신사

니우츠히메 신사

가모와케이카즈치 신사

가모미오야 신사

이와시미즈 하치만궁

마츠오 신사

히라노 신사

이나리 신사

헤이안 신궁

야사카 신사

시라미네 신궁

오미와 신사

오야마토 신사

이소노카미 신궁

가스가 신사

히로세 신사

다츠타 신사

니우카와카미 신사 (나카샤 · 가미샤 · 시모샤)

가시하라 신궁

요시노 신궁

히라오카 신사

오토리 신사

스미요시 신사

이쿠쿠니타마 신사

미나세 신궁

히로타 신사

이자나기 신사

이즈모타이샤

아카마 신궁

카시이궁

무나카 신사

하코자키궁

우사 신궁

아소 신사

미야자키 신궁

우도 신궁

기리시마 신궁

가고시마 신궁

가라후토 신사(폐사)

대만신궁(폐사)

조선신궁(폐사)

부여신궁(미진좌)

관동신궁(폐사)

남양신사(폐사)


국폐대사
(國幣大社)

난구 신사

다도 신사

구마노 신사

오야마즈미 신사

고라 신사


관폐중사
(官幣中社)

가마쿠라궁

이이노야궁

가네가사키궁

미카미 신사

이타키소 신사

구마노나치 신사

우메노미야 신사

기후네 신사

오하라노 신사

요시다 신사

기타노 신사

이카스리 신사

이쿠타 신사

와타츠미 신사

나가타 신사

기비츠 신사

이츠쿠시마 신사

스미요시 신사

다자이후 신사

히코산 신사

야츠시로궁

대남신사(폐사)


국폐중사
(國幣中社)

시오가마 신사

시와히코 신사

오모노이미 신사

츠츠코와케 신사

이사스미 신사

닛코 · 우츠노미야) 후타아라야마 신사

누키사키 신사

오아라이이소사키 신사

사카츠라이소사키 신사

다마사키 신사

사무카와 신사

츠루가오카 하치만궁

아사마 신사

이쿠시마타루시마 신사

야히코 신사

이미즈 신사

시라야마히메 신사

와카사히코 신사

마스미다 신사

아에쿠니 신사

이즈모 신사

고노 신사

이즈시 신사

이와 신사

나카야마 신사

아니 신사

하야타니 신사

우베 신사

미즈와카스 신사

미호 신사

다마노오야 신사

고토히라궁

다무라 신사

이소노 신사

인베 신사

오아사히코 신사

도사 신사

사사무타 신사

다시마 신사

스미요시 신사

가이진 신사

스와 신사

닛타 신사


관폐소사
(官幣小社)

가마도 신사

시카우미 신사

스미요시 신사

나미노우에궁


국폐소사
(國幣小社)

고시오 신사

고마가타 신사

이데하 신사

유도노산 신사

지치부 신사

하코네 신사

오쿠니 신사

아사마 신사

오토시미오야 신사

간베 신사

이즈산 신사

도가쿠시 신사

호타카 신사

와타츠 신사

다카세 신사

오야마 신사

스고이소베 신사

츠루기 신사

미나시 신사

이나바 신사

도가 신사

츠시마 신사

오와리오쿠니타마 신사

기비츠히코 신사

기비츠 신사

누나쿠마 신사

오가미야마 신사

시토리 신사

히노미사키 신사

모노노베 신사

스사 신사

사다 신사

이미노미야 신사

지리쿠 하치만궁

유스하라 하치만궁

후지사키 하치만궁

츠노 신사

히라키키 신사

경성신사(폐사)

용두산신사(폐사)

대구신사(폐사)

평양신사(폐사)

광주신사(폐사)

강원신사(폐사)

전주신사(폐사)

함흥신사(폐사)

신죽신사(폐사)

대중신사(폐사)

가의신사(폐사)


별격관폐사
(別格官幣社)

료젠 신사

동조궁

가라사와야마 신사

도키와 신사

고미카도 신사

야스쿠니 신사

동조궁

오야마 신사

후쿠이 신사

후지시마 신사

유기 신사

기타바타케 신사

고오 신사

다케이사오 신사

도요쿠니 신사

나시노키 신사

단잔 신사

아베노 신사

시조나와테 신사

미나토가와 신사

나와 신사

도요사카 신사

노다 신사

야마우치 신사

사가 신사

키쿠치 신사

데루쿠니 신사


관폐국폐사등외별격
(官幣國幣社等外別格)





파일:일본 황실.svg
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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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 개칭·창건 시기 순으로 나열

































1868년(게이오 4년) 신궁 개칭


1871년(메이지 4년) 신궁 개칭


1874년(메이지 7년) 신궁 개칭


1874년(메이지 7년) 신궁 개칭

















이자사와케(주제신) · 주아이 덴노(부제신)


1874년(메이지 7년) 신궁 개칭


1883년(메이지 16년) 신궁 개칭


1890년(메이지 23년) 창건


1895년(메이지 28년) 신궁 개칭


















1895년(메이지 28년) 창건


1913년(다이쇼 2년) 신궁 개칭


1918년(다이쇼 7년) 신궁 개칭


1920년(다이쇼 9년) 창건






조선신궁(폐사)


부여신궁(미진좌)












1925년(다이쇼 14년) 창건


1939년(쇼와 14년) 창립


1939년(쇼와 14년) 신궁 개칭


1940년(쇼와 15년) 창건








대만신궁(폐사)


관동신궁(폐사)










1940년(쇼와 14년) 신궁 개칭


1940년(쇼와 14년) 신궁 개칭


1944년(쇼와 19년) 신궁 개칭


1944년(쇼와 19년) 창건


















1954년(쇼와 29년) 신궁 개칭


1959년(쇼와 34년) 신궁 개칭


1964년(쇼와 39년) 신궁 개칭


1975년(쇼와 50년) 신궁 개칭









부여신궁
(((じん(ぐう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면
(忠淸南道扶餘郡扶餘面)
(신자체: 忠清南道扶余郡扶余面)
(現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제신(祭神)
오진 덴노
진구 황후
사이메이 덴노
덴지 덴노
사격(社格)
관폐대사(官幣大社)
창건
미진좌(未鎭座)
1940년(쇼와 14년) 6월 30일 착공
해체
1945년 11월 17일

1. 개요
2. 제신
3. 건축
4. 여담




1. 개요[편집]


부여신궁(扶餘神宮)충청남도 부여군 부여면에 창건될 계획이었던 신사이다. 사격은 관폐대사(官幣大社)로 예정되어 있었다.


2. 제신[편집]


제신은 오진 덴노진구 황후, 사이메이 덴노덴지 덴노로 정해져 있었다. 고대 일본이 백제와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옛 백제의 수도 부여에 한반도 삼국과 관계가 깊은 천황 및 황후를 신으로 모시는 신궁을 세우겠다는 계획이었다. 오진 덴노와 진구 황후는 서기 200년에 있었다는 이른바 '삼한정벌' 때문이었다. 사이메이 덴노와 덴지 덴노는 663년 백강 전투와 관련되어 있었다. 전부 한반도에 '군을 파병했던' 인물들이었다.


3. 건축[편집]


조선총독부에서는 전부터 백제의 도읍으로서 번영하였고 또 내지와 가장 인연이 깊어 많은 황실의 유적까지 있는 충청남도 부여의 땅을 선택하여 부여신사를 창립하기로 되었는데, 천황폐하께서 그 뜻을 들으시고 15일 특히 사호를 부여신궁, 사격을 관폐대사에 열하신다고 분부하셨다. 이 신궁은 오진 덴노, 사이메이 덴노, 덴지 덴노, 진구 황후를 모시는 것으로써…(중략) 백제의 고도인 부여의 땅에 약 20만 평의 신역에 본전 이하 제 건물의 조영에 착공할 예정이다.

관폐대사 부여신궁 작일 창립을 분부, 『매일신보』, 1939.6.16.

일제는 1939년 6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에 의해 관폐대사 부여신궁의 사격과 이름이 정해진 것을 계기로, 부여군에 부여신궁을 짓기로 결정했다.[1] 1940년 5월에는 총독부 주관으로 부여신궁조영위원회가 열렸다. 여기에서는 본전 등의 형식을 확정하고, 공사비 3백만 원으로 22만 평의 부지에 학생과 청년, 관공서 직원 등 9만여 명을 동원하여 정지작업을 하기로 했다.

부여신궁은 백제사비 시대(538~660) 왕성 가까이 있는 부소산성 안쪽에 터를 닦았다. 1940년 6월 30일, 각지에서 청년들을 동원하여 근로봉사를 시작했다. 1941년에는 이광수, 김동환, 백철, 유치진 등의 문화예술인들이 근로보국대를 꾸려 근로봉사에 다녀와서는 일제의 프로파간다 성격을 띠는 기행문과 문학 작품들을 남겼다. 근로봉사로 포장된 노역에는 약 3년간 조선 전역으로부터 11만 명이 동원하여 1943년에 기초공사를 완료했다.

파일:byjingu01.jpg
부여신궁 완공 예상도

회랑으로 둘러싸인 중심 건물지의 규모는 7천 평가량이었다. 전체적인 구조는 교토의 헤이안 신궁과 비슷했고, 건물은 붉은 칠과 금칠로 장식해 장엄한 분위기를 낼 계획이었다. 건물에 사용될 목재는 일본에서 공수한 것을 강경에 있는 제재소에서 가공한 다음 현장으로 운반했다. 1944년 11월에는 상량식을 진행했다. 부여신궁 본전은 1947년 완공될 예정이었지만 일본의 패망으로 계획의 80% 정도에서 중단되었다.

당초 부여신궁 조영은 5개년 계획으로, 1939년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943년 10월에 신령을 자리에 모시는 진좌제(鎮座祭)를 열 예정이었다. 그러나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인력과 물자 모두 부족해지자 공사가 지연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신도(神都) 건설’이라 하여 부여신궁을 중심으로 부여군을 아예 광역도시로 만들고자 야심차게 공사를 시작했지만, 시대의 흐름은 부여신궁이 완공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한창 공사 중이던 부여신궁은 진좌제도 하지 않았으므로 1945년 광복 이후 신령을 돌려보내는 승신식 없이 바로 해체되었다. 만들다 만 부여신궁 건물은 부여청년동맹원들이 파괴하였다. 그 몇 해 전 충청남도청 이전에 든 비용이 당시 돈으로 16만 원이었는데, 부여신궁의 총공사비는 24만 원이었다. 오늘날 부소산 삼충사(三忠祠) 자리가 부여신궁을 짓던 터였다.


4. 여담[편집]


  • 부여신궁은 제관들의 생활공간과 제례공간이 언덕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두 공간은 지하도로 연결되었는데, 해방 후 지상 구조물은 파괴되었지만 이 통로는 남아 있다. 이 공간의 존치 여부를 놓고 부여군이 고민 중이다.80년 된 일제 신궁 잔재…철거 vs 존치 고민

  • 1942년에 부여에서 출발해 조선신궁까지 달리는 릴레이 마라톤 대회가 있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이자 이 대회를 주최한 매일신보가 내세운 취지는 한마디로 일제가 벌인 전쟁에 징집될 조선 청년들의 체력을 기르자는 것이었다. 각 도에서 대표로 나선 선수들은 4월 26일에 부여로 모였다. 첫날은 수련을 하고 둘째 날에는 부여신궁 공사에 근로봉사 명목으로 동원된 후, 셋째 날부터 1박 2일간 약 250 km를 나누어 달렸다. 구간은 부여~논산~대전~천안(1박)~오산~수원~영등포~조선신궁이었다. 대회 종료일인 4월 29일은 쇼와 천황의 생일(천장절)이었다. 이 대회는 이듬해인 1943년에도 열렸다.#

  • 부여신궁 건설과 더불어 부여군을 도시로 만들고자 정비작업을 하였다. 부여군 시가지 모습을 보면 규모에 비해 도로망이 바둑판 형태로 상당히 잘 정비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도로에 깔기 위한 석재들을 모았는데, 광복 이후 그 자재들을 처리하지 않고 한쪽에 쌓아두었는데, 1948년 당시 국립박물관 부여분관 홍사준 관장을 비롯한 학자들이 발견한 것이 사택지적비다.

[1] 식민지 업무를 담당하던 척무성(拓務省) 고시 제2호(1939년 6월 16일 발행 관보 37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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