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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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문신.
2. 생애[편집]
1669년(현종 1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년)에 문과 급제했다. 이후 성균관전적과 각 조의 낭관을 거쳐 대사간, 장예원판결사를 지냈다. 판결사로 재직 중 세조에게 쫓겨난 노산군의 복위를 주장하여 단종 복위를 성사시켰고 아울러 단종비 정순왕후의 묘를 왕비의 능으로 추봉하고 능을 조성하는 공사를 감독했다. 이후 형조판서를 거쳐 육조의 판서를 모두 지내고 1703년(숙종 29년)에는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어머니 상을 치른 뒤 병을 앓더니 몇 개월 지나지 않아 1704년(숙종 30년)에 사망했다. 향년 56세.[1]
졸기를 보면 숙종이 시킨 일들을 잘 처리해서인지 머리도 좋고, 능력도 좋은 편에 말주변도 좋아 숙종이 건강을 염려할 정도로 대접이 좋았다는 얘기가 있다.《숙종실록》 40권, 숙종 30년 12월 18일 갑신 3번째 기사 하지만 소론이 보충한 《숙종실록보궐정오》에서는 "임금의 총애를 받은 건 사실이지만, 아첨만 잘하고 임금을 바로잡지는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다.《숙종실록보궐정오》 38권, 숙종 29년 12월 13일 갑신 1번째기사
3. 가족과 후손[편집]
그의 집안은 4대에 걸쳐 6명의 정승을 배출한 집안이기도 하다. 영의정이 된 김재로는 그의 아들이며, 좌의정에 올랐던 김치인은 김재로의 아들이자 김구의 손자이다. 또한, 정조 때의 서인 노론의 거두 김종수는 김구의 아들 김희로의 손자, 즉 김구에게 증손자가 된다. 동생 김유는 대제학을 지냈고, 김유의 아들로는 사도세자를 공격했던 영의정 김상로, 좌의정 김약로와 이조판서 김취로가 있다. 또한 독립운동가 김규식은 그의 동생 김무의 7대손이었다.
4. 묘역[편집]
현재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내에 그의 무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올림픽공원(서울)/시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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