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비 전투(2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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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2.1. 합비 공략의 명분과 이유를 설명한 제갈각
2.2. 내외의 반대
3. 전개
3.1. 합비신성을 포위하다
3.2. 90일 간의 합비신성 공성전
3.3.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20만의 대군
4. 외전: "제갈각은 몰락할 것이다!"
4.1. 장집의 예언
4.2. 등애의 예언
4.3. 섭우의 예언
5. 후일담: 몰락을 재촉하다
6. 평가
7. 매체


1. 개요[편집]


253년에 위나라오나라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손오가 합비를 공격한 것은 이번이 다섯번째이고 합비 신성을 공격한 것은 세번째이다. 제갈각이 주도하였기에 제갈각북벌이라고도 한다.


2. 배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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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화가 예슝(葉雄)이 묘사한 제갈각

2.1. 합비 공략의 명분과 이유를 설명한 제갈각[편집]


손권 사후 손량을 옹위하며 손오에서 집권하여 동흥제 전투에서 사마사에 승리하고 돌아온 제갈각은 즉시 오나라의 오랜 숙원이었던 합비 재출병 의사를 밝혔다. 물론 오나라 내부에 멍청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자주 출병하면 군이 피로하다는 이유로 여러 대신들이 제갈각에게 한 목소리로 반대했지만 제갈각은 이를 듣지 않았다. 중산대부 장연이 고집을 꺾지 않고 끝까지 제갈각에게 반대하자 제갈각은 그를 부축시켜 밖으로 끌어보내고 '논하는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유시했다.

"무릇 하늘에는 두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마리의 이 없다. 된자가 천하를 겸병하는 일에 힘쓰지 않고 그자리만을 후세에게 남기려 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없었다. 옛날 전국시대의 각 제후들은 스스로 강력한 병사와 광범위한 영토에 의지하여 서로 구원하였는데, 이와 같은 정권은 충분히 대대로 전할수 있고 사람들이 위태롭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방종되게 하고 노고를 꺼려 진나라로 하여금 점점 강대하게 하면 결국에는 그들을 병탄시키는데, 이것은 과거의 사실이다. 근래에는 유경승[1]

형주에서 병사 1만명을 가지고 있고 재물과 식량은 산만큼 있지만, 조조는 아직 미미하여 그와 힘을 다투지 않고 그의 세력이 강대해져 여러 를 병탄하여 멸망시키는 것을 좌시하고 있다. 북방이 전부 평정된후 조조는 30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형주를 향해 왔다. 그 당시는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었지만 또 계획을 만들어 낼수 없었다. 그래서 유경승의 아들이 어깨를 교차시켜 투항을 요청해 결국 포로가 되었다. 적대 국가가 서로 병탄하려고 하는 것은 원수가 서로 제거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원수가 있다고 하여 힘을 축적한다면 화는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에게 있게 되니 멀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옛날 오자서가 말하기를 "월나라가 10년간 백성들을 양육해서 모으고 10년간 훈련시키면 20년후에는 오나라가 전쟁에서 패하여 소택지가 될것이다." 라고 하였다. 부차는 오나라의 강대함에 의지하고 있으면서 이 말을 들었는데 이 때문에 오자서를 주살시키고 월나라에 대비하는 마음이 없었다 싸움에 패하여 후회함에 이르러서는 어찌 미치는 것이 있었겠는가? 월나라는 오나라에 비해 작았지만 여전히 오나라의 화근이 되었으니 하물며 월나라 보다 강대한 나라는 어떻겠는가? 옛날 진나라는 단지 관서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오히려 육국병탄하였으며 현재 적들이 모두 진, , , , , 아홉주의 땅을 얻었다.

이 땅은 모두 전쟁용 말이 생산되는 곳이며 유능한 인재를 배출시킨 땅이다. 지금 위나라를 옛날 진나라에 비교하면, 토지의 수는 배나 되고 오와 을 고대의 육국과 비교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위나라를 대적할수 있는 까닭은 단지 조조시대의 병사들은 오늘 마침 힘을 다했고 이후에 출생한 자는 아직 성장하지 않아 바로 적군이 쇠약해지고 수가 적으며 아직 왕성해지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마의는 이전에 왕릉을 주살했고 이어서 그 자신도 죽었고 그의 아들은 어리고 약한데 독자적으로 대임을 맡고 있으므로 비록 지혜와 계책이 있는 선비가 있을지라도 임용할수 없을것이다. 응당 오늘 정벌해야 하며, 바로 그들이 액운을 만날때이다. 성인은 시기를 긴급히 붙잡는데 진실로 오늘을 말한것이다. 만일 사람들의 감정에 순응하여 편안함을 훔치려는 계획을 품고 있으면서 장강은 험난하여 대대로 전할수 있다고 주장하고 위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논의하지 않고 오늘의 상황으로써 그 이후의 변화를 경시한다면 이것이 내가 길게 탄식하는 까닭일것이다. 고대 이래로 위정자들은 사람을 낳아 기르는 일에 힘썼는데 현재 적의 백성은 해마다 달마다 증가하고 있으나 나이가 작아 아직 사용할 수 없을 뿐이다. 만일 또 10년이 지나면, 위나라 백성들은 틀림없이 현재의 배가 될것이고 우리 나라의 강인한 병사가 주둔해 있는 곳은 모두 공허하게 되어 오직 이런 사람들이 대사를 정함을 볼수 있을뿐이다. 만일 그들을 일찍 사용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늙게 하여 또 10년이 지나면 절반으로 감소할 것이며 이들 자제의 수가 부족함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적의 인구가 배로 증가하고 우리 병사가 절반으로 손실된다면 비록 또 이윤이나 관중이 계획할지라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오늘 멀리 생각하는데 이르지 못하는 자는 틀림없이 나의 이런말을 실지와 거리가 멀어 어두운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우환이 이르지 않았는데 미리 걱정하는것 이것이 진실로 사람들이 어둡다고 보는것이다. 어려움이 이르게 된 연후에 머리를 땅에 닿도록 굽혀 절하는 것은 비록 지혜가 있는 자일지라도 또한 방법을 도모할 수 없다. 이것은 고금의 병폐이지 오직 한 시대의 상황만은 아니다. 과거 오나라는 처음에 오자서의 견해를 어두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이르자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경승은 10년 뒤의 일을 생각할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을 남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 나 제갈각은 신하의 재능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위대한 오에서 소하곽광의 임무를 받았으며 지혜는 일반 사람들과 같고 생각하는 것은 먼 곳 까지 가지 못하지만 만일 오늘 국가를 위해 변방 지역을 개척하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나이를 먹을 것이고 그대 원수와 적은 더욱 강대해져 목을 잘라 잘못을 사죄하려고 해도 어찌 소용이 있겠는가? 오늘 사람들은 간혹 백성들이 여전히 빈곤하므로 휴식에 힘쓰도록 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크나큰 위험을 걱정할줄 모르고 작은 은혜를 베풀기 좋아하는것이다. 과거 한고조는 다행히도 삼진의 땅을 자신것으로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함곡관을 페쇄시키고 요충지를 지키며 직접 오락을 즐기지 않고 오히려 근거지를 나와 초나라를 공격하려다가 몸에 상처를 입고 갑옷에는 가 생겼으며 장수와 병사들은 어려움과 고통을 견뎠겠는가? 어찌 예리한 칼날이 부딪히는 것을 좋아하고 안녕을 잊었겠는가? 이것은 적과 우리가 끝까지 오랫동안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한 것일 뿐이다. 나는 언제나 형한이 공손술에게 출병하여 천하를 취하는 계책을 설명한 것을 보고 있으며 근래에는 집안의 숙부가 표를 올려 적과 천하를 다투는 계책에 관해 진술한것을 보았는데 일찍이 탄식하지 않았을 때가 없었다. 나는 밤이 되면 몸을 뒤척이며 이런것을 생각한다. 그래서 잠시 어리석은 생각을 적어 여러 군자들 곁으로 보낸다. 만일 하루 아침에 내가 죽는다면 지향하고 계획한 것은 실현될 수 없을 것이므로 후대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걱정한 일을 알게 되어 훗일을 생각할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2]


"무릇 적대국을 서로 삼켜버리려고 하는 것은 바로 원수들이 서로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이오. 원수가 있는데 그것이 자라나게 놓아둔다면, 화가 자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후세 사람들에게도 있게 되는 것이니 불가불 멀리까지 생각해야 할 것이오.

옛날 진나라는 단지 관서 지역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도 오히려 여섯 나라를 병탄하였소. 지금 위나라를 옛 진나라에 비교해본다면 땅은 몇 배나 되고, 오와 촉한을 가지고는 옛날 6국의 반도 될 수 없소. 그러나 이제 그들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조조 당시의 병사가 많았지만 오늘에는 다 없어지고, 그 후에 난 사람들은 아직 다 자라지를 아니하였으니 바로 적들은 쇠약하고 젊어서 아직은 왕성하지 못한 시기요. 더욱이 사마의가 왕릉을 먼저 주살하였고,[3]

뒤이어 자기 스스로도 죽었는데, 그의 아들은 어리고 약하지만 오직 저 사람이 담당하던 큰 임무를 맡았으니, 비록 지모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이를 시행하여 쓰지는 아니하였소.

오늘날을 맞아 가들을 정벌하는데, 이는 그들의 액운이며, 성인께서 시기를 따르는 것을 급히 하라고 하였는데, 정말로 오늘을 말하는 것이오. 만약 많은 사람들의 정리를 좇아 구차하게 편안히 지내려는 계책을 품고서 장강의 험한 것을 후세에 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논하지 아니하고서 오늘날의 현상을 가지고 드디어 후에 일어날 일을 가볍게 생각한 것이니 이는 내가 길게 탄식하는 까닭이오.[4]

오늘날 듣건대 많은 사람들은 백성이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한가하게 쉬게 하는데 힘쓰자고 하지만 이는 그것이 크게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고 조금 부지런히 할 것을 아끼는 것이오.

옛날 한나라의 고조는 다행스럽게 이미 스스로 삼진의 땅을 갖고 있었는데, 어찌 관문을 걸어 잠그고 험한 지역을 지키면서 스스로 즐기지 아니하였고, 공연히 나아가서 초를 공격하여 몸에 상처를 입고, 갑옷 속에 이가 가득 생기게 하며, 장사들이 곤고한 것을 싫어하는데, 어찌 칼날을 즐기며 안녕을 잊었다는 말이오? 장구한 세월에서는 둘이 함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오.

매번 형함이 공손술에게 나아가서 빼앗을 계책을 가지고 유세한 것을 볼 때마다, 최근에 우리 집안의 숙부께서 표문을 올려서 적과 더불어 경쟁하려는 계책을 진술한 것을 보니,[5]

일찍히 탄식하지 아니할 수 없었소. 밤새도록 몸을 뒤척이며 생각하였던 것이 이와 같으니 그러므로 즐겨 어리석은 말을 적어서 한두 명의 군자들에게 보내는 것이오. 만약에 어느 날 아침에 죽어서 뜻과 계획을 세우지 못하게 된다면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내가 염려하는 바를 알게 하는 것이니, 뒤에 가서 생각할 뿐이오."[6]


이 두 문장은 사람들의 반대에 충분한 명분을 쌓기 위해 작성한 제갈각의 논의로 흔히 뻘짓으로 이해되는 합비 공략을 왜 추구하게 되었는지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자료다. 제갈각의 주장 중 중요한 포인트를 몇개 간추리자면
1.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 두마리의 용이 없듯이 오나라는 결국 천하통일을 이뤄야 한다. 최종목표가 천하통일이었는지 현상유지였는지 갑론을박이 자주 벌어지는 손권과 달리 제갈각은 이 문장으로 오나라와 본인의 목표는 천하통일이라는 점을 명백히 밝혔다. 즉, 제갈각은 위나라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이전 시대 전략가인 주유노숙처럼 제갈각도 나름대로의 대전략을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7]
더군다나 오나라 자체가 호족연합체일뿐 천하통일의 대의명분이 영 부족했으며 호족연합이라 타 국가에 비해 체계적으로도 떨어졌다. 그나마 이 당시 동맹인 촉한은 내부적으로 체제가 튼실하기라도 했지 오는 황제는 어렸고 불과 얼마전까지 내부적인 홍역이 너무나도 심각했다. 이런 면에서 제갈각은 이런 논지를 통해 이제 막 새로 어린 황제(손량)가 즉위한 오나라라는 국가의 존속과 나아갈 방향성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8]
2. 힘을 축적하는 것은 오히려 적의 회복을 초래할 수 있다. 제갈각은 이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위나라의 국력과 촉오의 국력을 비교하는데 위는 전국시대진나라에 비해 "땅은 몇배나 되고" 촉한과 오는 "옛날 6국의 반"조차 못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현재 위나라를 적대할 수 있는 것은 조조가 죽고 세대교체가 원만히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9]이라 한다. 그런고로 이런 상태에서 10년이 지나면 위의 인구는 배가 되고 오의 군사는 반으로 줄어들지도 모르는데 기회를 노려야한다고 서술한다.[10] 제갈각은 아예 장강 방어선을 언급해서 험한 지형에 의존해 수세에 일관하자는 주장을 질타하기까지 한다.[11]
3. 결국 기회는 지금 뿐이다. 결국 2번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으로 동흥제에서의 대승이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공세를 취해야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지에는 딱히 다른 논리를 수반하지 않는다. 다만 위를 다시 치는 행위를 "그들의 액운"이라 직접 말하는 점이나 성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즉시 일를 치러야한다고 서술하는 것을 이 부분은 논리보다는 감성에 주력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4. 사마사는 나약할 뿐이다. 거의 대놓고 언급하는 부분으로[12] 나름대로 사마사의 약점을 정곡으로 찌르는 부분이다. 큰 업무를 담당하던 아버지 사마의가 막 죽어서 이를 승계한 아들내미에게 버거울테니 지혜로운 선비가 있더라도 쓰지 못할 것이라는 점인데 사마사 본인은 오히려 단호하고 유능한 편이지만 사마의를 곧 계승한 입장인데다가 본인의 경험과 공로가 적은 편이어서 선택지가 적다는 점은 나름대로 제갈각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분석이다.
5. 내가 나이 먹기 전에 일을 치러야 한다! 농담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제갈각이 직접 언급하는 부분이다.[13] 나름대로 겸손하게 말한답시고 "신하의 재능을 갖추고 있지 않"고 "지혜는 일반 사람들과 같"다고 말하지만 근본적으로 소하와 곽광의 임무를 받은 본인이 나이를 먹기 전에 대업을 이뤄야한다고 언급하는 것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글이다.
다만 이 부분은 제갈각의 가족력이 수반했을 가능성이 높긴하다. 아버지 제갈근은 67세에 사망함으로 오나라의 요절징크스를 고려하면 상당히 장수한 편이지만 숙부 제갈량은 54세에 사망했고 동생 제갈교는 불과 25세에 사망했다. 당시 제갈각은 무려 50세로 사마사에 비해 6년이나 연상이었는데 이 당시 노년으로 나이를 염려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를 나름대로 설득한답시고 쓴 문장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오만하다고 밖에 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제갈각의 '논하는 글'을 설펴보면 제갈각이 그냥 소위 "꼴려서" 합비 공략을 노린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전략적인 목표와 염려가 있었기에 그랬다는 것은 살필 수 있다. 나이먹기 전에 이뤄야한다는 등의 망발을 차치하고 여기서 눈여겨봐야하는 부분은 제갈각의 천하통일 지향성, 미래의 위촉오 간의 국력차에 대한 염려, 사마사의 약점에 대한 희망, 그리고 동흥에서의 승리를 등에 업어 공격하는 것은 위오간의 파워 밸런스를 뒤엎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관점이다.

무모한 철부지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위의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위의 상황과 삼국간의 관계에 대한 제갈각의 분석은 상당히 정확하고 문제를 제대로 짚은 편이었다. 그나마 균형을 이루고 있는 현재의 위촉오 간의 국력차가 수 십 년 뒤에도 똑같이 유지되는 것은 오촉의 약한 국력으로 보나 위나라의 막대한 인구와 인재로 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위나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이점은 물량과 시간이었고 이를 파악한 제갈각의 분석은 그런 물량과 시간을 극대화해서 장기 둔전을 통해 동흥제 재축조를 분쇄하고자한 부하의 간언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므로 위가 세대교체가 막 이뤄져서 지휘관들이 아직 미숙하고[14] 사마사가 아직 사마의의 대업에 버거워하며 동흥제 전투로 큰 피해를 입은 호기를 노려서 공격하고자 한 제갈각의 전략 자체는 아주 틀렸다고 말하기 뭐한 편이다. 이후 오멸망전의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나름 제갈각의 통찰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갈각의 거시적인 관점과 달리 세병제둔전제로 대표되는 동오의 군사체제는 곧바로 제갈각의 즉각적인 군사작전을 수용할만큼 유연하지 못했다. 오나라에서는 사병을 인정해서 병력을 자손에게 세습하는게 가능했고 둔전이란 형태로 영지를 줘서 병력을 유지하도록 지원했다. 덕분에 오나라는 이권이 달린 수성전에는 거의 무적의 모습을 보인 반면 공격전에는 비교적 열의가 없는 모습이 보였고 사병이 동시에 둔전민이었다는 사실은 전쟁이 자주 벌어진다면 영지의 노동력 또한 줄어둘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열의를 더해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오나라는 군주와 세습군단을 이끄는 반독립적인 장군들간의 주종관계가 군주 한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는데 1대 황제인 손권 사후 각지의 토착호족들과 장군들은 어린 손량을 위시한 중앙정부의 명령을 따를지에 대한 문제가 불거짐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탁고대신인 제갈각이 한 차례 동흥제에서 대승을 거둠으로 일시적으로 중앙정부의 위상이 높아지는 최상의 결과를 낳았지만 반대로 군사적으로 대패를 겪는다면 위상을 그대로 말아먹는 희대의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각 병사가 장군들의 재산인 오나라에서는 패배에 대해서 촉위에 비해 훨씬 더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갈각이 손량을 어떻게 보좌하느냐에 따라서 불안정한 오나라의 미래가 좌지우지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제갈각의 전략적 분석은 틀린 말이라 할 수 없었고 오히려 이전시대 전략가들의 대전략을 계승하고 손씨 왕조의 기틀을 다지겠다고 천명한다는 의미에선 제갈각의 넓은 시야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갈각은 여러가지 이유로 조급증에 걸려 지나치게 서둘렀으며 이로 인해 당시 불안정한 오나라의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패한다면 어떤 후폭풍이 들이닥칠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로 동흥제 전투의 승리를 반복할 생각밖에 없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오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대전략을 위해서라도 제갈각은 훨씬 더 신중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지만 자제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동흥에서의 승리에 취해 분별력이 떨어진 채로 권위는 높아서 제지할 대신조차 한 명 없었다.

결과적으로 사실상 대승 하나가 사람을 망친 것이다.

2.2. 내외의 반대[편집]


제갈각과 잘 지내던 단양태수 섭우는 제갈각에게 편지를 보내서 합비 공략에 대해 충고했다.

"대행황제[15]

께서 본래 동관을 막을 계책을 갖고 계셨고, 계책을 아직 시행하지도 않았는데, 구적들이 멀리서 스스로 보내와서 장사들은 위엄 있는 덕에 의거하여 몸을 내어 목숨을 걸고 싸워서 하루아침에 대단한 공로를 세웠으니, 어찌 종묘의 신령과 사직의 복이 아니었겠습니까?

마땅히 또 병사를 누르고 정예부대를 기르다가 틈을 보아서 움직여야할 것입니다. 지금은 이러한 형세를 타고서 다시 크게 출동하려고 한다면 하늘의 때로 보아서 가능하지 않고, 만약에 왕성한 의지에 맡긴다고 하여도 나의 사사로운 마음으로는 불안하다고 생각됩니다."

제갈각은 '논하는 글'을 작성한 뒤 섭우에게 서신을 보냈다.

"족하께서 비록 자연스러운 이치를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직 큰 운수는 못 본 것 같으니, 이 논하는 글을 익히 살펴보시면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오."

제갈각은 거의 대놓고 "제 글이나 보세요."라고 섭우에게 답한 것이다.

제갈각과 사돈관계이자 같은 탁고대신인 태상 등윤이 제갈각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윤이나 곽광과 같은 부탁을 받으셔서 들어가서는 본 왕조를 편안하게 하시고, 나가서는 강적을 꺾으시어 명성이 해내에 떨쳤으니, 천하에 진동하지 않는 것이 없고 만백성의 마음은 그대의 은전을 입어서 휴식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노역[16]

을 치른 다음에 군사를 일으켜서 출정하면 백성들이 피곤하여 힘이 모자라게 되며, 멀리 있는 나라의 주군은 대비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성을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고, 들에서 노략질하여도 먹을 것을 얻지 못하면 이는 앞에서 수고하였던 것을 잃을 것이며, 뒤에 올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갑병들을 어루만지고 군사들을 휴식하게 하다가 틈을 보아 움직이는 것만 못합니다. 또한 군사적인 일은 큰일이고 일이란 여러 사람이 해결해나가는 것이니 여러 사람이 진실로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대 홀로 이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이에 제갈각은 답했다.

"여러 사람들이 안 된다고 말했는데, 모두 계산한 것을 보지 못하고 구차스럽게 편안하게 있고자 하는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오. 그대도 다시 그러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내가 무엇을 바라겠소."

무릇 조방은 아둔하고 못났으며 정치는 개인의 수중에 들어가 있어서 저들의 신하와 백성들은 진실로 마음이 서로 떨어져 있소. 지금 내가 국가가 가지고 있는 자본을 이용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위엄에 의지한다면 어디들 간들 이기지 못하겠소?" 합비. 합비잖아

등윤의 상식적이고 정론적인 반박을 이따위반대하는 니들은 그냥 놀고싶을 뿐이잖아!로 반박하는 것을 보면 제갈각이 어지간히 오만에 빠진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지금 읽어도 얼척없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등윤을 비롯한 당대 오의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제갈각은 반대하는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합비 공략을 결정했다.

반대의견은 오나라 뿐만이 아니라 동맹인 촉한에서도 있었다. 촉한의 시중이자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이 제갈각의 사촌동생이었는데 장억은 황급히 제갈첨에게 서신 두 개를 보냈다.

"동쪽 오나라의 군주는 방금 붕어하였고, 황제는 사실 유약합니다. 태부 제갈각은 어린 군주의 위탁의 중책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또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황족으로써 빼어난 재능을 갖고 있던 주공(周公)에게는 오히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전파한 유언이 있었고,[17]

곽광(霍光)이 임무를 받았을 때에는[18] 또 연왕 단(燕王 旦)과 악읍개주, 상관걸 등의 음모와 반란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성왕, 소제의 명철함에 의지하여 이 재난을 면했습니다. 옛날부터 동쪽의 군주는 살생과 상벌의 권한을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항상 들었습니다."


"옛날부터 동쪽의 군주는 (손권은) 살생(殺生)과 상벌(賞罰)의 권한을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항상 들었습니다. 지금 또 생명이 위급할 때 갑자기 태부를 불러 훗일을 위탁하려고 하니, 진실로 걱정할 만합니다. 게다가 오와 초의 사람들은 사납고 급하다고 과거의 책에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태부는 어린 군주를 떠나 적지로 들어가니, 아마 훌륭한 계획과 뛰어난 계산에 기초한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비록 동쪽 나라는 기강이 엄숙하고 위와 아래가 화목할지라도 백 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실패가 있다면, 총명한 사람의 사려는 아니겠지요? 과거의 것에 따라 현재를 판단하면 현재는 과거와 똑같이 될 것입니다. 그대가 태부에게 나아가 중언하는 것을 제외하고, 누가 또 말을 다할 자가 있겠습니까! 군사를 돌려 농업을 발전시키고, 은덕을 베푸는 일에 힘쓰고, 수년 이내에 동쪽 오와 서쪽 촉이 함께 병사를 일으켜도 확실히 늦지 않을 것입니다. 깊이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내용을 보면 제갈첨에게 제갈각의 북벌을 말려야한다고 역설하는게 확연하다. 장억의 편지 중 말미구절의 "수년 이내에 동쪽 오와 서쪽 촉이 함께 병사를 일으켜도 확실히 늦지 않을 것입니다"를 참고하면 제갈각의 북벌 자체를 뜬금없어서 반대하기 보다는 현재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반대한다는 느낌을 팍팍 내는데 당시 대장군 비의한수에서 곽순에게 암살당한터라 촉한은 이전같은 대규모 병력운용으로 제갈각을 지원하기 어려워서 말리려한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있다.

제갈첨이 제갈각에게 서신을 보냈으리라 예상되지만 그 서신 전문은 커녕 보낸 여부 자체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한진춘추』에서는 제갈각이 비의의 뒤를 이은 강유에게 유세하면서 보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옛 사람이 말하길, 성인도 때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으나, 때가 이르면 또한 놓치지 않는다고 하였소. 지금 적의 정치가 일개 집안(私門=사마씨집안)으로 넘어가, 안팎이 (서로) 의심하고 있으며, 병사는 밖에서 꺾이고 백성은 안에서 원망하여, 조조 이래로 그 망하는 형세가 지금같은 적이 없었소. 만약 크게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벌하여, 오(吳)로 하여금 그 동쪽을 공격하게 하고, 한(漢=蜀)으로 하여금 그 서쪽을 공격하게 하면, 그들이 서쪽을 구원하면 동쪽이 빌 것이고, 동쪽을 중히 여기면 서쪽이 가벼워질 것이니, 단련된 군대로 적의 허하고 가벼운 틈을 탄다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소"

강유는 이를 따라서 같이 북벌나섰다.

3. 전개[편집]



3.1. 합비신성을 포위하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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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비신성의 위치.
253년 3월, 제갈각은 손오의 전 국력을 거국적으로 동원한 20만의 대군을 발동해서 위에 다시 쳐들어갔다. 등윤을 도하독으로 삼아서 유수의 업무를 장악하고 통솔하게 했다. 도하독이 건업에서 군사 업무를 장관하게 하는 직책임을 고려하면 후방을 사실상 등윤에게 맡긴 것이다. 촉한의 강유 또한 오군의 공격에 맞춰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석영을 나와서 적도를 포위했다.

「제갈각전」에 의하면 20만이나 징발했기에 백성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고 제갈각은 인심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군사적 위업과 선치로 쌓은 인기가 전초부터 뒤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출병해서는 본래의 계획마저 어그러뜨리고 만다.

애초에 제갈각은 회수 강역의 백성들을 몰아내기 위해 회남 깊숙이 진공했으나, 제장 중 한 명이 제갈각에게 간언했다.

"지금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로 깊이 들어왔으므로 이 강역에 있는 백성들은 반드시 서로서로 이끌면서 멀리 도망하였을 것이니, 군사들은 수고롭게 되고 공로는 적어질까 걱정입니다. 신성을 포위하는데 그치는 것만 못하니, 신성이 곤란하게 되면 구원병이 반드시 도착할 것이고, 도착하여 이를 도모한다면 이에 크게 승리할 것입니다.[19]

즉, 괜히 깊이 들어가 군사력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물량의 우세를 살려 가까운 합비신성을 집중 포위하면서 이를 구원하러 온 위군을 격파하자는, 최대한 안정적인 공략법을 피력한 것. 적이 신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20만의 대군에게 먼저 선공격을 하는게 필수인만큼 합비신성을 때맞춰 함락시켜서 반격을 펼친다면 확실히 좋은 전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이 전략은 두고두고 오군의 발목을 잡는다. 제갈각은 이 의견을 취해 회남으로 들어갔던 군대를 물려 신성을 포위했다(「제갈각전」).

전번에 제갈각의 자그마한 도발로 시작되었던 동흥제 전투와 대국 위나라조차도 20만을 동원하는 제갈각의 북벌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강유가 수만을 거느리고 적도를 포위하고 있었으며 20만의 대군은 위나라에서도 쉽게 동원하기 어려운 숫자였다. 『진서』 「경제기」에서는 이 혼란을 생생하게 기록했는데 위의 조정에서는 회수와 사수를 도강해 서주에 진입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강구마다 병력을 배치하자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그러나 대장군 사마사는 반대하고 다른 의견을 냈다.

“제갈각은 오나라에서 새로 정권을 얻었으니, 한 때의 이익을 구하고자 하여 합비(合肥)에 병사를 아울러서(모아서) 요행[萬一]을 바랄 것인데, 어느 겨를에 청주(青州)와 서주(徐州)의 근심이 되겠소. 또한 수구(水口)는 많으니[非一], 많은 곳을 지키면 군사를 많이 써야 하고, 적은 곳을 지키면 도적[寇-제갈각의 군사를 말함]을 제압하기에 부족하오.”

사마사는 제갈각이 곧장 강북을 침공하기보다는 합비를 먼저 공략하려 들 것이라 예견한 것이다. 그리고 사마사의 예견대로 제갈각의 대군은 합비신성을 포위했다. 인근 병력으로는 제갈각의 대군을 막아낼 수 없는만큼 사마사는 곧장 태위 사마부에게 20만의 대군을 맡겨서 합비로 향하게 했다.

사마사는 우송에게 물었다.

지금 동쪽서쪽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고 이 두 곳이 다급하게 되었는데, 제장들의 의지가 저하되어 있으니[20]

이를 어떻게 해야 하오?"

우송이 말했다.

"옛날에 주아부가 창읍의 성벽을 굳게 지키자, 오나라와 초나라는 스스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일에는 약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것이 있으니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제갈각은 그들의 정예부대를 모두 모아서 왔으므로 흉포하다 할 것인데, 가만히 앉아 신성을 지키면서 우리 군사를 끌어내어 한 번 전투를 하려고 할 뿐입니다. 만약에 성을 공격하여도 함락되지 아니하고, 전투하기를 청하여도 할 수 없게 되면 많은 군사들은 오래 있게 되어 피로해져서 형세로 보아 장차 스스로 달아나게 될 것이고, 제장들이 지름길로 가지 않는 것이 공에게 유리할 것입니다.

강유는 많은 군사를 가지고 있으나 현군[21]

으로 제갈각에게 호응하여 우리의 보리를 빼앗아 먹으려는 것이지 깊은 뿌리를 가진 구적은 아닙니다. 또 우리가 동쪽에서 힘을 모으면 서쪽이 반드시 텅 빌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로써 지름길로 나아간 것입니다. 지금 만약에 관중에 있는 여러 군대에게 배나 빨리 그곳으로 가게 하면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는데로 나가게 되어 거의 달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송은 오와 촉한의 양면공세로 조정이 혼란스러움에도 놀라울만큼 냉철한 분석을 통해 이 둘의 전략을 꿰뚫어서 거의 완벽한 파훼법을 생각해냈다. 비의사후 거의 급조된 강유의 북벌은 병력만 많지 군량이 적어서 오래 싸우기 어렵고 단지 제갈각에 모든 전력이 대오전선에 집중되어 있는 순간 습격한 것이었다. 우송은 오의 제장이 제갈각에게 말한 간언을 거의 그대로 옲은 셈인데 최종목표가 신성합비가 아닌 위의 주력과의 한타싸움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단지 지연전을 벌여서 오의 대군이 스스로 무너지도록 냅둬야한다는 의견을 냈다.

사마사는 우송의 간언에 감탄했다.

"훌륭한 말씀이오."

비교적 덜 알려진 간언이지만 동흥제 전투에 대한 훌륭한 대처법을 제시한 부하 또한 제갈각의 서주침공이 불가능함을 상기하며 제갈각의 동향과 목표에 대해서 말했다.

“회수와 바다(淮海)는 적군이 쉽게 병사를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또 옛날 손권(孫權)은 병사를 파견하여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풍랑으로 침몰하여 익사하였고, 거의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제갈각이 어떻게 근본이 되는 힘까지 기울여 운명을 용솟음치는 바다에 맡기고 승리를 얻기를 구했겠습니까? 제갈각은 평소 북과 수군의 별 볼일 없는 작은 장수만을 보내 바다에서 역류하여 회수(淮)로 들어가게 하여 청주와 서주(青徐)에 대해 시위운동을 하게하고, 제갈각 자신은 병사들을 모아 회남으로 향했을 뿐입니다.”

우송의 조언대로 양주 방면으로 곽회진태가 전력을 이끌고 강유를 대적하자 강유는 적도의 포위를 풀고 진태가 낙문에 도착하자 강유는 양식이 떨어져서 후퇴할 뿐이었다.

사마사는 관구검에게 칙령을 내려서 병력들에게 스스로 지키도록 명하고 합비신성은 오나라에게 맡겼다. 위와의 한타싸움을 노린 제갈각의 계획은 한껏 꼬이기 시작했다.

3.2. 90일 간의 합비신성 공성전[편집]


우송의 혜안은 뛰어났지만 합비신성 입장에선 매우 안좋은 점이 하나 있었으니, 저 말은 곧 지원군 없이 고작 3천의 병력으로 20만의 대군을 알아서 막아야 했다는 것이다. 당시 합비신성을 지키는 인물은 양주의 아문장 장특이었다.

그래도 합비신성이 천혜의 요새이긴 했는지, 장특은 저 병력으로도 어떻게든 오나라의 대군을 90여일간 막아냈다.[22] 하지만 당연히 그 3천의 병력조차 전사자가 절반이 넘고 병자와 부상자가 넘쳐났다. 게다가 제갈각이 토산을 쌓아서 성을 공격하자 장특은 더 이상 성을 보호할 수 없을 것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장특은 오나라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 나는 다시 싸울 마음이 없다. 그러나 우리 위의 법에는 공격을 받아서 백일이 넘었는데도 구원병이 오지 않게 되었다면 비록 항복을 하여도 그 집안 사람들이 연좌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적의 공격을 받은 이래로 90여 일이 지났고, 이 성 안에는 본래 4천여 명이 있었는데, 전사자가 이미 반을 넘겼지만 성이 비록 함락된다고 하여도 오히려 이 반쯤 남은 사람들은 항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돌아가서 서로 상의하여 좋은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해서 내일 일찍 명단을 보내겠고, 또한 인수를 버리는 것으로 신표를 삼겠다."

즉 항복할테니까 하루만 시간을 달라는 것. 그리고 그 증거로 인수를 던져서 오나라군에게 넘겼다. 오나라군은 장특의 말을 믿어주기로 하고 그의 인수는 줍지 않았다. 혹은 돌려주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항복한다는 건 장특의 페이크였고, 실제로는 밤을 새가며 집에 쓰던 나무까지 뜯어내가며 뚫린 부분을 메우고 이중으로 목책을 쌓아 성을 보수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나라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다만 싸우다가 죽을 뿐이다."

오나라군은 진격해서 합비신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킬 수 없었다.

때마침 큰 더위를 맞이해서 오나라 병사들은 피로해지고, 물을 마시고 설사하며 종기가 번져서 병든 사람이 군사중 반이 넘었다. 이중 죽거나 다친 사람이 땅에 즐비했다. 여러 군영의 관리들이 병자들이 많다고 제갈각에게 아룄으나 제갈각은 이들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 후로는 감히 제갈각에게 병자들에 대해서 보고하지 않았다.

제갈각은 속으로 실책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성이 함락되지 않은 것을 두고 수치스럽게 생각해서 분한 마음이 얼굴에 묻어났다. 주이가 군사문제로 제갈각의 기분을 거스르니 제갈각은 즉시 그의 군사를 빼앗고 건업으로 되돌려보냈다. 도위 채림은 군사계책을 제갈각에게 자주 설명했으나 제갈각은 이를 채용하지 않았다. 채림은 위나라로 도망쳤다.

보면 알겠지만 제갈각이 마냥 멍청해서 장특에게 속았다고 하긴 힘들다. 이미 전세는 자명해서, 누가봐도 설마 하룻밤 시간을 벌자고 저런 수를 쓰겠나 싶고 또 그렇다 해도 고작 하룻밤 가지고 뭘 하겠냐 싶었을 것이다. 그저 장특이 진짜로 하룻밤 새에 저런 기만술을 한 게 대단한 것일 뿐. 제갈각의 진짜 실수는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포기해야 할 때를 놓치고 만 것이라 할 수 있다.

3.3.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20만의 대군[편집]


위의 제장들은 제갈각의 군대가 피로한 것을 보고 비로소 문흠관구검이 이끄는 구원병을 진격시켰다.

253년 7월, 제갈각은 그제서야 현실을 직시하고 군사를 이끌고 퇴각했는데, 20만의 병력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보니 퇴각하라는 조서는 많은 반면 이동할 수 있는 전력은 한정되어 있었다. 덕분에 후퇴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이미 병들고 다쳐 스스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병사가 많았다. 결국 다른 병사가 옮기다가 뒤쳐지고 버려져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엄청난 피해에 죽은 사람, 산 사람 모두 애통하였고 어른, 어린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슬피 부르짖었다.

『오서』에서는 기술하지 않으나 「경제기」에 의하면 문흠은 합유를 점령해서 오군의 퇴로를 끊고 관구검에게 오군의 후방을 공략하게 했다고 한다. 제갈각은 두려워하는 마음에 조급히 후퇴하니 문흠이 제갈각군을 대파해서 무려 만명수급을 벴다고 한다. 순수한 사망자가 만명이라는 뜻은 사상자와 포로 등의 피해가 최소한 수만은 된다는 의미이다. 『자치통감』에서는 「경제기」의 다른 내용[23]을 인용했지만 문흠의 공격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으며, 「관구검전」은 물론 문흠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배송지주 『위서』조차도 해당 전공을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완전한 날조는 아니더라도 심하게 과장되어 있다고 볼 여지는 있다. 하지만 설령 문흠의 추격이 없었다 한들, 이미 신성 포위 시점에서 20만의 대군영 중 과반은 병 들고 죽은 자는 땅에 즐비했던 이 전쟁에서 제갈각이 역대급의 대패를 당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제갈각은 겉으로는 태연자약했다. 심지어 한 달간 장강에 있는 섬에서 머물다가 심양현에서 둔전을 일으킬 생각을 했다고 「제갈각전」은 전한다. 즉, 대패를 겪고도 여전히 물러나긴 커녕 계속해보려 한 것이다. 대체 어떤 맥락에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인지 열전의 한계상 알기 어려우나 하여튼 간에 제대로 된 전투조차 못해본 채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감조차 없던 것으로 추정된다. 덕분에 사람들은 실망뿐만이 아니라 아예 제갈각에 대한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몇개월 전의 인기가 합비신성에서의 참패로 무색하게된 격이었다.


4. 외전: "제갈각은 몰락할 것이다!"[편집]


당대에도 제갈각의 교만한 행보는 잘 알려졌던 모양인지, 제갈각의 몰락을 예견하는 일화들이 제법 된다. 장집의 경우에는 동흥제 전투를 기점으로 잡고 있고 아버지 제갈근은 아예 어린 시절'부터 집안을 망치리라 여겼다.

4.1. 장집의 예언[편집]


『위서』 「장기전」에 기재된 배송지주 『위략』에서 전해지는 일화다.

장집은 자주 위나라를 위해 촉오의 공격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어느 날 사마사와의 문답타임을 가졌는데, 제갈각이 동흥제 전투에서 이겼으나[24] 장집은 곧 살해될 것이라 예언했다. 사마사가 그 까닭을 묻자 장집이 말했다.

"위광은 그 군주를 떨치고, 공적은 한 나라를 덮고 있습니다. 죽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합비신성 전투에서 패하자 오나라에서 제갈각을 죽였다.

4.2. 등애의 예언[편집]


『위서』 「등애전」 본전에서 기록된 일화다.

제갈각이 합비신성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나라로 돌아갔다.

그러자 등애는 사마사에게 말했다.

"손권은 이미 죽었고, 대신들은 새로운 군왕에게 아직 의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나라의 명가와 호족은 모두 자기의 사병을 갖고 있으므로 병사의 세력에 의지하면 제위를 찬탈하기에 충분합니다.

제갈각은 방금 국정을 담당하였고, 내부에는 아직 걸주가 없습니다. 그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어루만져 근본을 공고하게 할 생각은 못하고 외부의 일로 바쁘며, 그 백성들을 잔혹하게 사용하고, 나라의 전 병력으로 위나라의 견고한 성을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여 죽은 사람이 만여 명이나 되고, 화를 싣고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제갈각이 죄를 받을 날인 것입니다. 옛날에 자서, 오기, 상앙, 악의 등은 모두 당시의 군주에게 임용되었지만, 군주가 죽자 실각했습니다. 더욱이 제갈각의 재능은 네 명의 현인에 미치지 못하고, 큰 재난에 대한 근심도 없으니, 그의 멸망은 기다릴 만합니다."

그리고 등애가 예견했듯이 제갈각은 곧 주살되었다.


4.3. 섭우의 예언[편집]


『오서』 「제갈각전」에서 전해지는 일화다.

합비신성 전투에서 패배한 제갈각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섭우는 제갈각이 곧 죽을 것을 알고 등윤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람이 세력이 강성할 때는 냇물과 산의 근본을 뽑을 수 있지만 하루 아침에 실패하여 곤경에 처했을 때는 사람들의 감정이 각양각색이 됩니다. 이런 일을 말하면 슬퍼 탄식하게 됩니다."

과연 제갈각은 섭우의 예언대로 손준에게 주살당했다.


5. 후일담: 몰락을 재촉하다[편집]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인데, 합비신성 전투에서 패한 제갈각은 동흥제 전투에서 패한 사마사와 정반대의 조치를 취한다. 바로 패배의 원인을 본인이 아닌 남에게 전가하는 것이었다.

253년 8월, 제갈각군이 끝내 건업에 돌아왔다. 병사를 배열해서 관소로 돌아온 제갈각은 중서령 손묵을 불렀다. 제갈각은 사나운 목소리로 손묵을 질책했다.

"당신들은 어떻게 감히 망녕되게도 몇 차례나 조서를 작성했소?"

오군의 후퇴가 극악으로 느려진데 있어서 수많은 후퇴조서가 한꺼번에 도착해서 후퇴로가 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를 조율해야하는 임무는 총사령관인 제갈각에게 있는 바였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에도 결국 일이 꼬이니 손묵을 질책한 것이다. 손묵은 두려워하며 병을 핑계로 집으로 돌아갔다.

전투에서 돌아온 제갈각은 오히려 선조[25]에서 상주하며 임명한 관원들을 일제히 파면시키고 다시 선발했다. 본인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 제갈각은 관원들을 자주 책망하고 죄를 주기 일쑤였다. 제갈각을 만나는 사람마다 놀라서 숨을 죽이지 않는 인물이 없었다. 또한 숙위를 바꿔서 본인과 친한 인물을 임용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제갈각은 병사들을 다시 무장시키고 청주와 서주를 다시 공격하려고 했다. 선치와 동흥에서의 승리로 절정에 이르던 제갈각의 인기는 곤두박질치고 백성은 물론 대신들마저 제갈각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이 일련의 행동은 앞서 말했듯이 사마사의 행동과 상반된다. 사마사는 최종적으로 패전의 책임이 본인에게 있음을 인정해서 형식적인 것이었을지언정 자신의 작위를 한직급 강등하고, 동생 사마소를 처벌하는 것 외에는 부하들에 대한 처벌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덕분에 사마사는 부하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패전에도 불구하고 권위가 심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 비해 제갈각은 반대로 패전의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며 오히려 적반하장의 태세로 위엄을 되찾기 위해 죄없는 사람을 꾸짖고 오히려 친한 사람을 마음대로 임용하는 등 부정부패를 행한데다가 한 술 더 떠서 다시 전쟁을 준비했다. 본인의 잘못을 시인해서 스스로 관직을 깎거나 권위를 포기하는 행동을 보여도 지지도 하락은 피할 수 없는 부분인데 거의 자폭을 목표로 둔 듯한 제갈각의 일련의 행동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흔히 추측하기로는 성공가도의 인생을 살아온 제갈각이 합비신성의 패배를 결코 인정할 수 없어서 거의 일련의 멘탈붕괴 때문에 폭주하기 시작했고, 다시 한 번 동흥에서처럼 승리를 쟁취해서 지지도를 올리려 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게 실로 제갈각의 계획이었다면 교만해질대로 교만해진 상태에서의 대패는 정치인이자 사령관이자 지략가인 제갈각을 완전히 망가뜨린 셈이었다. 이궁지쟁을 살아남아서 베테랑 정치인으로의 기량을 증명하고 여러 번 날카로운 식견을 선보이며 동흥제 전투의 승리를 이끈 명신 제갈각은 이렇게 사라졌다. 끝에는 더 이상 처신이고 뭐고 할 생각없이 권위로 밀어붙이는 방법밖에 모르는 찌질이만이 남은 격이었다.

허나 대부분 호족들로 이루어진 오나라 조정은 외부인 제갈각의 폭주를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계속 밀어붙일 뿐인 제갈각의 폭주는 마치 꾹꾹 눌려진 스프링처럼 이제 반동을 맛봐야했다. 그 반동을 주도한 인물은 제갈각 본인을 탁고대신으로 추천한 손준이었다. 결국 제갈각은 합비신성 전투의 패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손준에게 주살된다.


6. 평가[편집]


제갈각은 분명히 동흥제의 승리를 기점으로 교만해져서 위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오군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각은 '논의하는 글'에서 위의 어려운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해서 기다리기보다 빠른 시일내에 침공하는 것만이 위를 심히 곤란하게 만들 것이라 예견해서 주위의 만류에 불구하고 침공을 강행했다. 제갈각의 예상대로 촉한과 오가 동시에 침공하자 위는 크게 당황했고 조정에서는 모든 강구에 병력을 두어야한다는 황당한 의견을 상당히 진지하게 제기했다. 그러나 제갈각에게는 불운하게도 우송부하가 제갈각이 위와의 한타싸움을 의도했음을 한눈에 꿰뚫어봤다. 제갈각은 사마사가 사마의의 나약한 아들이라 여겼지만 그가 우송의 간언에 따라서 제갈각 입장에서 최악의 전략을 제대로 택한 셈이었다.

거기다 하다못해 합비신성이라도 함락시켰으면 좋으련만 이마저도 장특의 필사적인 수비로 좌절되면서 아무런 성과없이 병력손실만 이루며, 결국 20만의 대군을 동원한 제갈각 희대의 도박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지략가로써의 제갈각은 당대 제일이었을지 몰라도 대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의 역할은 어울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합비신성 전투에서의 패배가 제갈각의 몰락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았다. 위의 사마사도 동흥의 패배에 불구하고 원만한 수습을 통해 합비신성의 승리를 거두지 않았던가? 그러나 성공가도의 인생을 살아오며 동흥제 전투로 교만해질대로 교만해진 제갈각은 이 패배를 곱게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 마디로, 대패도 대패이지만 대패 후에 보여준 리더로서의 책임감 부재야말로 그의 몰락의 기폭제였다. 결국 제갈각은 합비신성 전투의 패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적으로 변한 손준에게 끔살당하고 손오의 제갈 가문은 몰락하게 된다.


7. 매체[편집]



7.1. 진삼국무쌍 시리즈[편집]


합비신성 전투는 2편부터 나오는데 제갈각과 사마사가 싸우는 제3차 합비신성 전투는 6,7편에 등장한다.

6편에서도 동흥에서 위나라의 침공을 격퇴하고 역공을 가했지만 오히려 대패했고 이는 제갈각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7편은 다시 위 VS 오의 최종결전 스테이지로 복귀. 오나라 사실 루트에서의 최종 스테이지로 나온다. 거대한 성과 오버 테크놀로지스러운 함정들은 여전하다. 다만 여기서 오가 패해야하는 것이 맞는데 오 사실 루트 마지막인지라 오가 대승을 거두는 것으로 나와 논란이 일기도.[26] 하지만 이겨도 위는 건재한데다 조비는 잠깐 내주겠다고 했으니 머지않아 뺏길거란 복선을 남겼다.

한편 진 스토리에서도 등장. 6편과 같이 제갈각이 합비신성으로 쳐들어오고, 사마사가 지휘하는 위군으로 성 안까지 쳐들어온 오군을 몰아내는 전투다. 스테이지가 시작하면 성 내부의 대부분에 오군이 들어와있는데 이를 원격으로 성문을 닫아 성 외부의 오군과 분리시키고, 안의 오군을 각종 함정들을 작동시키며 섬멸해나간다음, 다시 성문을 열고 나와 제갈각을 잡아주면 클리어. [27]

7.2. 삼국전투기[편집]


제갈각이 동흥 전투에서의 승리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합비 신성을 공격하며 함락직전으로 몰아넣지만 장특의 거짓말에 속아 시간과 전력을 낭비하고, 관구검에게 공격을 받아 패퇴한다.
[1] 경승은 유표의 자.[2] 삼국지 『오서』 「제갈각전」에서 발췌한 발언으로 아래의 『자치통감』의 내용과 일맥상통해보이지만 더욱 길다.[3] 251년의 왕릉의 난을 언급한 것이다.[4] 호삼성은 이 구절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제갈각은 스스로 그 재주로는 충분히 위나라를 처리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적을 후순들에게 넘겨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을 숙부인 제갈량과 비교하여 어떠하다고 생각하였을까? 제갈량은 여러 번 군사를 내어 위나라를 공격하였지만 매번 한 (익주)를 가지고는 적과 오래 지탱하기가 어렵다고 말하였으며, 끝내는 성공하지 못하고 뜻을 품고 죽었다. 제갈각은 제갈량과 같은 재주를 못가진 채 그 백성들을 가볍게 이용하려고 하였으니 오나라를 강하게 만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죽고, 그 집안도 멸망시키기 충분하였다.' 권중달 교수의 번역으로부터 발췌했다.[5] 제갈량의 『후출사표』를 인용한 것이다. 이 구절은 『후출사표』 위작설의 가장 강력한 증거중 하나다.(...)[6] 『자치통감』에서 발췌한 제갈각의 문장으로 「제갈각전」의 내용과 전체적으로 유사하지만 더욱 간결하며 내용이 여러모로 편집된 느낌이 강하다. 객관성을 위해 둘 다 이 항목에 기재한다.[7] 주유는 실현 가능성은 둘째 치고 군사적으로 서촉을 쳐서 천하이분하려고 애썼고, 노숙은 대놓고 "전하께서 천하를 얻으시고 천자의 신분으로 절 맞이하여 주신다면 그때 만족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제갈각의 입장은 오래전 이들 오나라의 수뇌부가 내세웠다가 손권 후반기에 애매해졌던 천하통일의 의지를 다시 천명한 것이다. 오히려 오나라가 그냥 걸어잠그고 수비만 하면 되고 천하통일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게 행동했다고 착각하는거야말로 게임을 통해 중국 삼국시대를 접한 현대인의 시선일 뿐, 정작 당사자들은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셈이다.[8] 할거해도 꽤 간다는 예로 동진을 예시로 드는데 그때 오래간거야 오호십육국난세로 북쪽 국가들이 지들끼리도 싸우느라 정신없었거나 북쪽을 견제하느라 내부 역량이 없었기에 가능했던것이었다. 그런데도 비수대전처럼 멸망의 위기에 여러번 직면해야 했고 동진 역시 끊임없이 북벌로 이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이미 화북을 통일한 굳건한 하나의 왕조였던 위나라와는 상황이 여러모로 영 다르다. 그나마 가능했던게 본문에 제갈각이 언급한 조조 위공, 위왕 즉위 이후 위나라의 내란과 북방 이민족간의 연계인데 위가 무너지고 유비가 맹공세를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 오나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형주 공방전이릉대전으로 삼국의 구도를 고착시켰으니. 실제로 이후 촉이나 오가 몇번의 대규모의 원정을 강행한 이유도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위나라와의 격차는 더더욱 커진다"라는 예측 때문이고 중원을 먹지 못하거나, 대등한 힘을 갖추지 못하면 이게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지형의 이점이야, 나중에 오는 지형의 이점이 없어서 망했겠는가.[9] "그러나 이제 그들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조조 당시의 병사가 많았지만 오늘에는 다 없어지고, 그 후에 난 사람들은 아직 다 자라지를 아니하였으니 바로 적들은 쇠약하고 젊어서 아직은 왕성하지 못한 시기요"[10] "만일 적의 인구가 배로 증가하고 우리 병사가 절반으로 손실된다면 비록 또 이윤이나 관중이 계획할지라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11] "만일 사람들의 감정에 순응하여 편안함을 훔치려는 계획을 품고 있으면서 장강은 험난하여 대대로 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위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논의하지 않고 오늘의 상황으로써 그 이후의 변화를 경시한다면 이것이 내가 길게 탄식하는 까닭일 것이다"[12] "그의 아들은 어리고 약한데 독자적으로 대임을 맡고 있으므로 비록 지혜와 계책이 있는 선비가 있을지라도 임용할수 없을것이다."/"그의 아들은 어리고 약하지만 오직 저 사람이 담당하던 큰 임무를 맡았으니, 비록 지모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이를 시행하여 쓰지는 아니하였소."[13] "오늘 나 제갈각은 신하의 재능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위대한 오에서 소하와 곽광의 임무를 받았으며 지혜는 일반 사람들과 같고 생각하는 것은 먼 곳 까지 가지 못하지만 만일 오늘 국가를 위해 변방 지역을 개척하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나이를 먹을 것이고 그대 원수와 적은 더욱 강대해져 목을 잘라 잘못을 사죄하려고 해도 어찌 소용이 있겠는가?"[14] 근래에 만총, 왕릉, 손례 등 대오전쟁에서 활약한 지휘관들이 모두 죽어서 호준, 제갈탄, 왕창 등이 새로 부임한 상황이었다.[15] 죽은 지 1년도 넘지 않는 황제를 칭한다. 손권을 언급한 것이다.[16] 동흥제 전투 뿐만이 아니라 손권의 능묘를 만드는 노역을 말한다.[17] 주무왕(周武王)이 죽고 주공 단(周公 旦)이 섭정이 되자, 무왕의 동생인 채숙은 형제들인 관숙, 곽숙, 은나라무정과 함께 반란(삼감의 난)을 일으켰다.[18] 한무제(漢武帝)는 병이 위독하자 곽광(霍光)을 불러 새 황제를 보필할 것을 당부했다. 이후 어린 소제(昭帝)가 즉위했는데 당시의 조정 대사는 곽광이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상관걸은 곽광이 모든 권력을 쥐어 자신이 허수아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황제의 형인 연왕(燕王) 유단과 모의해 곽광을 모반죄에 엮으려 했고, 실패하자 또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모두 소제의 통찰력으로 인해 구원받게 되었다.[19] 권중달 교수에 의하면 제갈탄이 사마사에게 했던 간언과 맥락상 동일하다고 한다.[20] 어찌보면 타이밍 자체는 제갈각이 매우 맞췄다고 볼만한 부분. 제갈각의 북벌 이후 오나라가 위에게 이런 위협으로 다가온 순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21] 적지에 깊숙히 침입해서 보급로가 위태로운 상태의 군사를 칭한다.[22] 조방전에선 5월 포위~7월 퇴각이나 손량전에서 3월 출정~4월 포위~8월 퇴각에 위략 장특전에서 90여일이라 기록하며 통감 역시 90여일로 보고 있다.[23] 사마사의 혜안, 사마부의 20만 대군 인솔, 우송의 간언 등.[24] 본문에서는 변방에서 승리했다고 서술하는데 이는 동흥제 전투로 추측된다. 그러나 합비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봐서는 합비신성 전투에서 이룬 제갈각의 소규모 승리를 칭하는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항목에서는 동흥제 전투가 맞다고 가정하고 서술한다.[25] 관원을 선발하는 부서.[26] 촉 마지막 루트에서 오장원에서 승리를 거둬 사마의를 죽이기 직전까지 가지만, 그 때 제갈량이 죽어 급히 후퇴해 어느정도 연의를 반영한 것과는 대조적.[27] 합비신성의 모든 성문을 지키는 것이 IF 조건이며, 제갈탄이 이 전투에서 자기보다 더 혈족에 의해 개노답 본성을 보이는 제갈각을 보며 각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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