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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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명칭
3. 역사
4. 형주의 전략적 중요성
5. 후한-삼국시대 형주의 여러 도시
5.1. 남양(南陽)
5.2. 남군(南郡)
5.2.1. 강릉(江陵)
5.2.1.1. 역사
5.2.2. 양양(襄陽)
5.3. 장사(長沙)
5.4. 강하(江夏)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荆州. 고대 중국행정구역 중 하나. 장강(양쯔강)의 중류에 위치하여 풍부한 수자원과 수운 활동으로 경제가 번성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삼국지시대의 화약고인 형주를 두고 여러 세력의 형주 공방전이 벌어졌다. 현재 후베이성 징저우 지명으로 남아있다.


2. 명칭[편집]


파일:1505011960686283.jpg

형주라는 이름의 유래는 초나라의 별명인 형(荊). 따라서 이 지역을 형초라고도 불렸다. 이는 진시황의 아버지 자초의 이름이 子'楚'라서 피휘를 하고자 한 것이다. 형주에는 강릉(江陵), 이릉(夷陵)처럼 '능(陵)'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은데, 이것들은 대부분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왕실의 묘역이 지명으로 굳은 것이다.


3. 역사[편집]


크게는 고대 왕 때 정해졌다는 중국 9주에서 이어져, 후한 시대 13주 가운데서 중앙에 위치했던 형주를 지칭한다. 작게는 옛 강릉성(형주 고성)을 부르는 의미다. 전통적 의미에서 형주라는 지명은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전체와 하남성의 일부를 포함한다.

후한 이후 형주는 여러 차례 분할과 병합을 거듭하여,[1] 남쪽이 영주(郢州) · 상주(湘州) 등의 이름으로 떨어져나갔다. 수대 이후, 형주의 둥팅 호 북쪽과 남쪽을 다른 행정구역으로 두는 것이 정해졌다. 형주의 이름을 계승한 쪽은 북쪽이며, 남쪽은 상 · 영ㆍ담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따라서 그 이후의 중국사나 중국지리의 관점에서는 형주는 거의 호북성 쪽만을 의미한다. 호북성에 형주시(荊州市)[2]라는 도시가 있을 정도였다.


4. 형주의 전략적 중요성[편집]


형주의 전략적 중요성은 어느 시대에나 강조되었다. 장강 중류의 영역으로서 물산이 풍부하고 인구가 상당했으며, 특히 남방의 정권이 북방의 정권의 침략을 막을 만한 군사적 거점이었다. 역으로 말하자면, 남방 세력이 북방을 도모하기 위한 최전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일찌기 서주 시절부터 장강 유역을 제패한 초나라는 그 자체로도 북방 중원 제국(諸國)에게 위협이었으며 주 천자도 원정 중 횡사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3] 관우의 형주 공방전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지만, 형주 세력이 북상하면 바로 맞닥뜨리게 되는 곳이 훗날의 허창인 허(許)나라였고, 그 바로 북쪽에는 정나라의 수도인 신정(新鄭)이, 그리고 신정에서 바로 서쪽 방면에는 낙양이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헤게모니를 잃고 약소국으로 전락한 정나라는 남방 세력과 북방 세력이 격돌하는 각축장이 되었으며 북방의 패자 진(晉)이 강할 때는 진나라에 붙고 초나라가 강할 땐 초나라에 붙는 대표적 박쥐 취급을 당했다.[4]

손권의 형주 침공도 평야지대인 서주 방면보다는 장강의 도움을 받은 형주 방면이 건업의 방위를 강화하는 데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권은 결국 형주 뒷치기를 하고서도 이 플랜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양양성을 점거 했으나 다시 조비군에게 내주고 만다 이는 후일 촉한이 멸망한 이후 파촉+양양루트로 쳐들어오는 침공에 오가 스무스하게 밀려버리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론상으로는 유수구 방면으로 침공하면 그대로 뚫리지만, 실제로는 유수구에 우주방어가 있어 쉽지 않다. 그렇기에 실제 오의 멸망 때 진의 침공 루트 중 하나인 두예의 루트도 양양을 통한 진공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5] 뒷날 남송의 장강 방어선에서도 수도 임안을 지키는 데 형주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술하는 양양 공방전이 괜히 5년을 끈 것이 아니고, 양양을 손에 넣자 몽골군이 바로 임안으로 진공하면서 남송이 멸망한다.

, 현대로 말하면 쓰촨 성 + 충칭 시 지방의 정권은 이곳을 소유한 적이 드물다. 그러나 이곳을 소유하면, 촉은 두 방향으로 중원으로 진격하면서 홀로 있는 지방정권의 한계를 뛰어넘으니 이것이 유비의 경우다. 그러나 이런 기간은 얼마되지 않았고 그보다는 형주를 소유한 남방 정권이 북방 정권과 형주 북부(양쯔강 이북)와 촉을 놓고 대결을 벌이는 일이 더 많았다.

오호십육국시대, 크게 보면 육조시대(위진남북조시대)에 형주는 남방 정권의 생명줄과 같았다. 동진 시기에는 수도가 위치한 양주(揚州)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인구와 자본으로 인해 유량의 영천 유씨 가문, 환온, 환현의 초국 환씨 가문과 같이 정권을 장악했던 권세가들의 핵심 세력 기반이 되었고, 군사력도 막강하여 성한 정벌이나 유량, 저부, 환온 등이 추진했던 북벌이 형주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다만, 동진 말기에는 환현 잔당 토벌이나 노순, 유의 등의 반란으로 형주 각지가 전쟁터로 변하면서 침체기를 겪었다.

이후 양나라가 들어서면서 강릉의 정치적 중요성을 강조했으나 그 때문에 얼마 안 가 다시 전란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당나라 시기에는 조정에 우호적인 순지번진을 바탕으로 당나라 조정의 주요한 재정적 기반이었고, 남송 역시 형주를 중심으로 원나라에 강력하게 대항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형주 자사[6]로는 대표적으로 유표와 사치로 유명한 석숭이 있다. 삼국시대 이후에도 형주는 번영하고 문화적으로 풍부한 땅이었다. 또한 곽위의 경우 출신지역인 형주의 세력으로 오대십국시대의 마지막 왕조인 후주을 세우는 데 성공한다.

5. 후한-삼국시대 형주의 여러 도시[편집]


파일:external/mlbpark.donga.com/1291715132.jpg

후한 당시 형주(형양)는 7군이었는데, 남양()[7], 강하, 남군(양양, 강릉[8])의 형북 3군과 무릉(12현), 영릉, 장사, 계양(11현)의 형남 4군이 있었다. 뒤에 형북 일부에 장릉군을 설치하여 8군이었다.

조조가 형주를 공략한 다음에야 남군을 갈라서 양양군을 설치하고, 또 남군 지강현 서쪽 지역을 임강군으로 삼고, 남양군을 나눠서 남향군으로 하였다. (형북 6군, 형남 4군)

적벽대전 뒤, 남군의 공안에 있던 유비가 형남4군과 임강군을 얻으면서 임강군의 이름을 고쳐 의도군을 설치했고, 같은 시기 손권이 장사의 일부에 한창군을 설치했다. 이후 익양대치 때 합의로 상강을 경계로 장사, 계양은 손권이 다스린다. 조조가 한중을 정벌한 뒤 한중에서 상용을 떼어 형북에 편입시켰다. 유봉맹달이 상용을 다시 빼앗았으나, 이후 맹달이 항복하자 신성군이 되었다가 맹달의 반란이 실패한 뒤에 다시 상용군으로 돌아갔다. 그 밖에 오가 일부 먹은 익주 땅에는 5개 현을 거느린 건양군이 나왔다.

강하는 형주 쟁탈전 이후 오가 상당 부분을 먹고, 일부분을 먹은 위도 군을 따로 설치했다. 강릉은 형주 쟁탈전 뒤 오가 병합하면서 형남 취급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른바 연의에서 쓴 형주 9군 42주 177현(또는 형양 9군)의 실체는 없다.

사실 형북(가운데 형산 이북)은 위나라가 분리한 이후 영주라고 불렀다.


5.1. 남양(南陽)[편집]


문서로, 현대 도시는 난양 문서로

장수의 거점이었고 제갈량이 수학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5.2. 남군(南郡)[편집]



5.2.1. 강릉(江陵)[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70px-Location_of_Jingzhou_Prefecture_within_Hubei_%28China%29.png

(옛 강릉성 징저우는) 후베이성 남쪽 후난성과 경계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우한(武汉, 무한), 서쪽으로 싼샤(三峽 : 장강삼협), 북쪽으로 징먼(荆门, 형문)과 접한다. 양쯔강 유역의 평야지대로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이며 호수와 강이 밀집된 지역이다.

아열대 몬순 기후로 사계절이 뚜렷하다. 연평균기온 섭씨 16℃이며 연강우량은 1200mm다.

고대왕국들이 번성했던 곳이니만큼 곳곳에 관련 유적들이 많다. 기원전 3세기경에 처음 세워 여러 차례 보수 및 증축 과정을 거친 고성의 성벽이 대표적이다. 현재 성벽은 청나라 때인 17세기 중엽 재건한 것으로 높이가 9m, 전체길이가 9.3km에 이른다. 곳곳에서 나오는 고대 왕국의 유물들이 징저우 박물관에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징저우시 문서로


5.2.1.1. 역사[편집]

파일:荆州古城宾阳楼.jpg

춘추전국시대에는 400여 년간 초나라의 수도였던 단양과 영이 이곳이다. 좀 더 서쪽 구석에 있던 단양에서 초 문왕 때 영으로 수도를 옮겼다. 뒤에 진이 백기를 보내 영을 점령하고 남군을 세웠다.

남군의 중심이던 강릉성(지강현 고성)은 형북을 조조가 점령한 이후 관우손오에 이어 형주의 중심성으로 기능했으며, 위진남북조시대를 걸쳐 형주가 더욱 잘게 나뉘는 와중에서도 이 부근만은 늘 형주의 이름을 유지했다. 그래서 삼국지에서도 종종 강릉성과 형주성을 혼용해 적곤 한다. 그냥 혼용해서 적으면 괜찮은데 형주성과 강릉성이 별도의 성으로 나오는 자아분열(?)을 보여줘서 독자를 혼돈에 빠트리기까지 한다. 삼국지의 화약고로 불릴 정도로 형주 쟁탈전에서 중요한 거점으로 취급받았고, 강릉 동쪽의 오림은 적벽대전이 일어난 그곳이다.

동진 시대에 권신 환온이 남군공으로 봉해져 환씨와 서부군의 거점이 되었지만 아들 환현의 난 때 환초의 수도가 되었다가 유유의 북부군에게 털리기도 하였다. 남북조시대의 남조 양나라도 강릉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이 때문에 전란에 역으로 휩싸이기도 했다. 후경은 투항 후 형주지방을 바탕으로 조정까지 세력을 떨쳤으며, 이 전란과정에서 강릉에 배경을 둔 황제 소역이 죽고 서위의 괴뢰 정권인 소찰의 후량 정권이 탄생했다. 소찰은 강릉 근교에서 대단히 불안한 정권을 유지했으나 아들인 소규 때는 괴뢰정권일지라도 북주진나라 사이에서 문화를 크게 꽃피우는 데 성공한다. 후량은 수문제의 즉위 이후 직할로 바뀌려 하자 진나라에 붙어서 저항하다가 덤으로 멸망했다.

5대 10국 시기에는 형남의 수도였다. 원나라(몽골)의 남침의 대표격인 양양전투 이전의 강릉대첩이 있었는데, 남송의 맹공이 몽골의 영채 24개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5.2.2. 양양(襄陽)[편집]


샹양 문서로

장강 가운데 가장 북단의 한수와 접한 형주의 북단에 있다. 남양을 차지한 원술과 대립했던 유표가 양양에 자리를 잡고 양양 지역의 주요 호족인 괴씨와 채씨 일족과 인연을 맺으면서 주요 거점으로 활용 했었다. 본래 전한 이후로 형주자사의 소재지는 무릉이었으며 양양은 중요한 거점이 아니었으나 후한 말 형주 자사인 유표가 양양을 본거지로 삼으면서 중국사에서 양양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후 동탁의 장안 천도와 중원의 환란으로 난민들이 형주에 몰려들면서 양양은 크게 발전하였고 삼국지 당시에는 위의 형주 방면 최전선으로서 오의 강릉과 함께 형주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양양은 강북-촉-강남의 교통을 잇는 유일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후 오호십육국, 남북조, 오대십국, 남송 등등 중국 대대로 강북과 강남의 왕조들이 세력 다툼을 할 때마다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곳으로서 중국 역사의 최요충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며 향후 이곳에서 중국사의 수많은 구국의 명장들이 탄생하기도 한다.

남송기에 인후부로 바뀌면서 강남사천을 잇는 요충지로서 기능했고 쿠빌라이 칸원나라(몽골)군의 남진 과정에서 가장 치열했던 양양 공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번성은 양양을 지키는 주요 요새였다.) 남송 말 몽고군의 남하와 양양(襄陽) 번성(樊城)의 전투 사조영웅전의 주인공 곽정이 지키다가 죽는 곳이 바로 이 양양성이다. 이래서 사천의 성도와 양양이 징기스칸 4 파워 업키트에서 등장했다.


5.3. 장사(長沙)[편집]


삼국지에서 형주 남부 사군의 큰 형으로 거의 깡촌 취급받던 나머지 3군과는 다르게 예전부터 도시의 규모가 컸다. 문제는 그래서 그런지 주인이 자주 바뀌던 곳이다. 황건적의 난 당시에는 손견이 태수였다가 손견이 죽은 뒤에는 한현(그리고 황충위연이 나오는)이 태수였다가 이 시기에 촉한에 넘어갔다. 하지만 익양대치로 또 다시 오나라로 들어갔다. 손견이 오나라 황제인 손권의 아버지라는 점을 보면 결과적으로는 옛 주인이 얻은 셈이었다.

장사(長沙)는 현재에도 중국어로 비슷하게 "창사"라고 부른다. 삼국시대 이후에 담성(潭城)이라고 부르다가 명나라 때 이름을 회복했다. 후난성의 성도이자 가장 큰 도시로, 교통의 요충지다. 마오쩌둥의 고향이다.


5.4. 강하(江夏)[편집]


강하(江夏)는 강동으로 이어지는 요충지로 14개 현을 거느렸다. 원래 한나라 이전에는 남군에 속했다. 말릉이 건업(지금의 남경=난징)으로 바뀐 것처럼 강하 역시 의 마지막 황제 손호의 일시적 천도(264~266) 이후 서진 때부터 본격적으로 무창(武昌)이라고 불렀다.

재미있게도 무창은 후대에 명명한 이름이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이름이 나온다. 서량과 비슷하다.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이를 반영해서인지 무창이 안 나오는데, 정작 서량은 계속 나오다가 삼국지 13부터 사라졌다.

중화인민공화국 때부터 지금처럼 우한(武汉, 무한)으로 불렀다. 무창에서 북서쪽으로 한수 이북 지역인 한커우(汉口, 한구), 무창에서 남서쪽으로 한수와 장강의 합류 지점에 있던 한양(汉陽)과 합병하여 무창과 한구/한양에서 한 글자씩 따서 우한시를 만들면서 우한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아주 없던 이름은 아니고, 이 세 도시를 모아서 '무한삼진'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 때부터다. 그래서 지금도 우한 시는 지금도 시가지가 장강과 한수를 경계로 세 구역으로 나뉜다. 삼국지연의에서 조조에게 쫓겨 패주하던 유비가 패주하여 한동안 몸을 의지하던 곳이다.

삼국지 덕후나 역덕후 등이 많이 모이는 커뮤니티에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를 '형주 역병(荆州疫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침 우한시는 삼국지 시대 당시 이곳과 겹치기 때문이다. 링크 이곳 근처에서 적벽대전이 일어났을 때 조조군이 전염병으로 인한 사기 저하로 패전하기도 했다. 기사, 2020년 글. 이전부터 관우 관련 글이 인터넷에 돌고 있었다. 그런데 형주의 현대 이름인 징저우시에서는 형주역병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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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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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비, 조조, 손권이 모두 차지했던 곳이다.[2] 바로 삼국시대에 강릉으로 불렸던 도시이다.[3]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왜 주 천자가 직접 강을 건넜을까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4] 진과 초가 패자의 지위를 놓고 싸웠던 필 전투를 비롯한 여러 싸움들은 전부 이 부근에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5] 다만 육조시대의 진(육조)은 지나치게 이곳을 경시하다가 경구(京口)방면이 뚫리면서 건강(난징)이 그대로 떨어졌다.[6] 자사(刺史)란 중앙정부에서 지방으로 파견한 감찰관을 뜻한다.[7] 융중, 신야, 박망파도 여기 속했다. 38개현.[8] 그 밖의 장판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