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각/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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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1.1. 어렸을 때의 일화들
1.1.1. 제갈자유지려[1](諸葛子瑜之驢)
1.1.2. 숙부가 더 현명한가, 아버지가 더 현명한가
1.1.3. 장소와의 1차전: 연회장 사건
1.1.4. 신동 초딩을 상대로 거둔 장승의 재치
1.1.5. "촉한은 오나라의 마구간입니다!"
1.1.6. 태자 손등의 말똥드립
1.1.7. 비의와의 재치대결
1.1.8. "촉(蜀)의 글자는 어떻고 오(吳)의 글자는 어떻소?"
1.1.9. "말의 귀를 상하게 했으니 미덕도 상하지 않았겠는가?"
1.1.10. 장소와의 2차전: 이것은 무슨 새인가?
2. 손권 시대 (234년~252년)
2.1. 단양을 평정하다
2.1.1. 234년: 순탄찮은 승인
2.1.2. 235년: 화려한 성공
2.1.3. 왜 제갈근은 제갈각의 단양 평정을 그리 경계했을까?
2.2. 위나라와의 잦은 충돌
2.3. 외전: 승상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다
2.4. 이궁지쟁: 아들을 희생하여 살아남다
2.5. 250년: 탁고대신(託孤大臣), 손권이 뒤를 맡기다
2.5.1. 외전: 노장 여대에게 오만함을 뽐내다
3. 손량-제갈각 시대(252년~253년)
3.1. 손량의 즉위: 연호는 건흥(建興)이다!
3.1.1. 외전: 손분에게 편지를 보내서 위협하다
3.1.2. 외전: 손화의 죽음을 초래하다
3.2. 사마사와의 대결
3.2.1. 252년: 동흥에서의 대격돌
3.2.1.1. 왜 동흥제의 재축조를 명한 것일까?
3.2.1.2. 사마사 측의 전략
3.2.1.3. 제갈각의 성공, 대승을 거두다.
3.2.1.4. 제갈량의 북벌 이상의 피해를 입혔지만...
3.2.2. 253년: 합비신성에서 몰락하다
3.2.2.1. 합비 공략의 명분과 이유를 설명한 제갈각
3.2.2.2. 여전한 내부반대
3.2.2.3. 합비신성을 포위하다
3.2.2.4.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20만의 대군
3.2.3. 외전: "제갈각은 몰락할 것이다!"
3.2.3.1. 장집의 예언
3.2.3.2. 등애의 예언
3.2.3.3. 제갈근과 장승의 예견
3.2.3.4. 섭우의 예언
3.3. 몰락을 재촉하다
3.4. 253년: 손준에 의한 주살
3.5. 사후
3.5.1. 외전: 제갈각의 시신을 수습하도록 요청하다
4. 손휴 시대 (258년~264년)
4.1. 258년: 복권되다


1. 초기[편집]


제갈각은 203년에 태어났다. 숙부 제갈량이 무려 46세의 나이에 제갈첨을 가진 것과 달리 제갈근은 고작(?) 29세에 제갈각을 봤다. 덕분에 제갈첨이 8살이었을 때 사별한 제갈량과 달리 제갈근은 제갈각이 장성해서 38살이 될 때까지 지켜봤다. 그러나 제갈근은 제갈각을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아마 제갈각의 오만한 성품이 원인일 것이다.

제갈각은 동생 제갈교와 더불어 어려서부터 이름이 알려졌다고 한다. 당대인들이 평하기를 제갈각이 제갈교보다 능력이 뛰어났다면 제갈교는 제갈각보다 인품이 뛰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제갈교는 숙부 제갈량의 양자로 삼아져서 그런지 기록이 별로 남지 않은 반면 제갈각은 빼어난 두뇌를 보여주는 일화를 어려서부터 매우 많이 남겼다.

약관의 나이[2]에 기도위로 임명되었으며 고담장휴와 함께 태자 손등을 모셨다. 손등과 도리와 육예에 대한 담론을 자주 했는데 덕분에 제갈각, 고담, 장휴는 손등과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 4명을 통틀어 일명 태자사우로 칭했다고 한다. 다 같이 한 침구에서 잘 정도로 친했다고 「손등전」에서 전한다.

『오록』에 의하면 제갈각은 7척 6촌(약 180cm)에 눈썹과 수염이 적었으며 코가 꺾여있는데다가 이마가 넓고 입은 크고 그와 걸맞게 목소리 또한 컸다고 한다. 8척 장신에 빼어난 미남으로 알려진 숙부 제갈량이나 얼굴이 조금 길되 용모를 갖추었다고 전해지는 아버지 제갈근에 비하면 외모가 상당히 특이했던 듯.

1.1. 어렸을 때의 일화들[편집]


어려서부터 재치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하기로 유명한만큼 수많은 일화를 선보이며 손권의 총애를 받았다.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가 범상치 않은데 손권이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을 보고서 “남전에서 옥이 나온다더니, 정말 빈말이 아니다.”라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있다.[3] 섬서의 남전현(藍田縣)은 미옥(美玉)의 생산지로 유명한데, 이후로 훌륭한 집안의 뛰어난 자손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다음은 그와 관련된 일화들 모음이다. 이중 몇 가지는 『삼국지연의』에도 실려있다.

1.1.1. 제갈자유지려[4](諸葛子瑜之驢)[편집]


파일:f7OSWmz.jpg
제갈자유지려 일화를 묘사한 그림[5]
제갈각의 아버지 제갈근은 얼굴이 길어서 마치 당나귀와 비슷했다고 한다. 이에 어느 날, 오나라황제 손권은 많은 신하들이 모인 연회 자리에서 당나귀 한 마리를 끌고 와 얼굴에 큰 봉투를 붙이고 제갈자유(諸葛子瑜-제갈근의 자)라고 쓰도록 시켰다. 이는 제갈근의 긴 얼굴을 놀리는 손권의 짓궂은 장난이었다.

그 자리에 제갈근은 물론 아들 제갈각도 있었는데 제갈각은 무릎을 꿇고 손권에게 요청했다.

"붓으로 두 글자를 더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손권은 허락하고 제갈각에게 붓을 주었다. 제갈각은 '제갈자유' 뒤에 지려(之驢)를 더 써서 '제갈자유지려(諸葛子瑜之驢)'로 고쳐, '제갈근의 당나귀'라는 뜻으로 바꾸었다.

두 글자만으로 뜻을 완전히 바꾼 제갈각의 뛰어난 재치에 좌중은 모두 즐겁게 웃었으며, 손권 또한 어린 제갈각의 기지를 영특하게 여겨 그 당나귀를 정말로 제갈근에게 하사했다. 여기서 손권이 제갈근에게 제갈각을 칭찬할 때 이렇게 말했다.

"남전(藍田)이 옥을 낳는다더니, 과연 허언이 아니구려."

이 말에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바로 남전생옥(藍田生玉)이다. 현명한 아버지가 재주 좋은 아들을 낳는다는 의미.

삼국지연의』에서도 등장하는 유명한 일화다. 그런데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려(驢)를 노새라고 오독해, 손권이 노새를 끌고 와서 장난친 것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노새는 생식능력이 없는 동물이라, 이렇게 오독하면 손권이 제갈근 부자의 면전에서 그대는 성불구자인데 저 아이는 누구 자식인가라고 조롱한 꼴이 된다. 얼굴 생김새를 짓궂게 놀린 정도의 일이, 자식까지 불러놓고 초대형 패드립을 친 일로 돌변한 것. 리동혁의 『삼국지가 울고 있네』에서 이를 지적한다.

1.1.2. 숙부가 더 현명한가, 아버지가 더 현명한가[편집]


손권이 제갈각을 만나자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네 아비와 숙부(제갈량) 중에서 누가 더 현명하냐?"

상당히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제갈각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신의 부친이 뛰어납니다."

손권이 이유를 묻자 제갈각은 답했다.

"신의 부친은 섬길 곳을 알지만 숙부는 모르기 때문에 뛰어난 것입니다."[6]

아버지숙부중 아버지야말로 섬겨야하는 사람을 알았기에 더욱 뛰어나다는 답변인데 사실상 답이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아버지 뿐만이 아니라 손권을 치켜세워 주는 답변을 내세운 것으로 제갈각의 뛰어난 재치를 엿볼 수 있다. 일화가 상당히 직관적이고 지금 읽어도 별 다른 지식없이 의도를 이해하기 쉬워서 그런지 제갈각의 일화들 중에서 제갈자유지려와 함께 상당히 유명한 편이다.

1.1.3. 장소와의 1차전: 연회장 사건[편집]


연회장에서 손권은 제갈각에게 여러 사람들에게 술잔을 돌리도록 명령했다. 여러 사람을 지나서 제갈각이 원로대신 장소 앞을 지났을 때 장소는 이미 취기가 심해 마실 수 없었다. 장소는 제갈각에게 말했다.

"이것은 노인을 공양하는 예의가 아니다."

그러자 손권은 제갈각에게 말했다.

"그대가 장공(張公)으로 하여금 말을 굽힐 수 있으면, 응당 마실 것이다."[7]

제갈각은 장소의 말을 반박했다.

"옛날 사상보(師尙父)는 90세 때도 깃발을 잡고 월(鉞)을 가지고는 여전히 아직 늙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군사적인 일에 있어서는 장군은 후방에 있지만, 술 마시고 밥 먹는 일에 있어서는 앞에 있으면서 어찌 노인을 공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까?"[8]


"옛날에 강상부(姜尙父-강태공)는 아흔이 되어서도 백모를 쥐고 황월을 들어 군사를 거느리면서, 자신이 늙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싸움에 나갈 때에는 선생께서 뒤에 계시고, 술을 마실 때에는 선생께서 앞에 앉으시는데 어찌 노인을 잘 모시지 않는다고 하실 수 있습니까?"[9]

할말이 없어진 장소의 술잔에는 술이 가득히 담겨졌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도 거의 그대로 등장하는 일화다.

1.1.4. 신동 초딩을 상대로 거둔 장승의 재치[편집]


이런저런 일화들을 뽐내며 이름을 떨치던 어린 제갈각을 두고 사람들은 매우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장소의 아들 장승은 그런 제갈각을 상대로 논쟁을 벌이며 끝내 여러차례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재미난 점은 장승은 178년생으로 174년생 제갈근에 비해 겨우 4살차 밖에 나지 않았고, 제갈각과 장승간의 나이차는 무려 25년이다.

물론 노신 장소를 완패시킨 제갈각의 재치와 말빨을 고려하면 승리를 거둔 장승도 나름대로 뛰어난 말빨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지만, 25년 많은 어른에게 대등한 말빨을 가진 제갈각의 비범함을 볼 수 있는 일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장승의 성격과 인물됨을 잘 파악한다는 기록, 제갈근과 친한 친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단순히 이겨보자고 이런 일을 벌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자의 기록을 감안하면 자신의 통찰력으로 제갈각의 문제점을 파악했을 수도 있고, 후자의 경우를 감안했을 땐 친구인 제갈근이 제갈각의 오만한 성격에 대해서 걱정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친구인 장승에게 관련 이야기를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친구 아들 성격 좀 죽여보려는 훈육차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그래도 『오서』 「장소전」에서 굳이 이 일화를 언급한 것을 봐선 제갈각의 재치와 말빨은 매우 뛰어난 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1.5. "촉한은 오나라의 마구간입니다!"[편집]


촉한의 사자가 오나라를 방문하자 손권은 사자에게 말했다.

"이 제갈각은 말타기를 매우 좋아한다. 돌아가서 승상에게 말하여 좋은 말을 보내오도록 하라."

제갈각은 무릎을 꿇고 손권에게 감사했다. 아직 말이 도착한다는 소식조차 없는데 먼저 감사를 청한 제갈각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손권은 제갈각에게 물었다.

"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감사해 하시오?"

제갈각은 즉시 답했다.

"촉나라는 폐하의 외부에 있는 마굿간[10]

인데, 오늘 은혜로운 조서를 내렸으므로 말은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어찌 감히 감사해 하지 않겠습니까?"

배송지 주석이 아닌 『오서』 「제갈각전」본전에서 전해지는 기록으로 일화 말미에 "제갈각의 재능과 민첩한 사고는 모두 이러한 류였다."고 기록했다. 말 한 마디로 자기 삼촌을 마구간지기로 만들어버리는 패기 뭐 동맹국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경쟁의식이 있었고, 손권이 가진 그 경쟁의식을 근거로 해서 적절한 타이밍에 후빨했다 할 수 있겠다.

다만 손권이 요청한 말이 왔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1.1.6. 태자 손등의 말똥드립[편집]


『제갈각별전』에서 전해지는 일화로 어느날 손등이 제갈각에게 조롱하며 말했다.

"제갈원손은 말의 똥이나 쳐드시오"

제갈각은 이에 답했다.

"태자께선 계란을 드시도록 하십시오"

그러자 손권은 제갈각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이 경에게 말똥이나 먹으라고 하였는데 경은 남에게 계란을 먹으라 하니 어찌하여 그리하오?"

제갈각은 이에 답했다.

"똑같은 곳에서 나왔을 뿐입니다"

손권은 이를 듣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손등이 뜬금없이 제갈각을 조롱할 정도라면 손등과 매우 친했다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특히 손등은 창작물에 의해 상당히 점잖은 이미지로 그려지는데 의외로 짓궂은 면모도 있는 듯하다.

1.1.7. 비의와의 재치대결[편집]


말빨 좋기로 유명한 비의와도 일화를 남겼는데 이 또한 『제갈각별전』에서 전해지는 일화다.

촉한의 사절로 오나라를 방문한 비의를 맞이하면서 손권이 칙명을 내렸다.

"사절이 올 것이니 엎드려서 먹고 일어나지 말라."[11]

비의가 오자 손권은 먹기를 멈췄지만 신하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비의는 이를 보고 오나라의 신하들을 조롱했다.

"봉황이 날아오자, 기린은 먹던 것을 뱉었는데, 당나귀는 무지하여, 예전처럼 엎드려 먹는구나"[12]

그러자 제갈각이 답했다.

"오동나무를 심는 것은 봉황을 맞이하려 함인데, 어찌하여 제비나 참새가 스스로 날아왔다고 하느냐? 활로 쏴버리지는 않을 것이니, 사절은 고향으로 돌아가시게!"

비의는 제갈각의 반격에 떡을 먹기를 그만두고 붓을 찾았다. 비의는 붓으로 '맥(보리)부'를 지었는데 제갈각은 또한 붓을 청하여 이에 응답하기를 '마(보리를 가는)부'를 지었다. 사람들은 두 인물의 재치를 두고 훌륭하다 칭찬했다.

『촉서』 「비의전」에 의하면 남정을 끝마친 제갈량이 비의를 오나라에 사절로 보냈는데 제갈각과 양도는 비의를 마구 힐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의는 의(義)를 따르며 이치에 의거해 답변하니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 일화를 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 재치가 뛰어나다보니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엎치락 뒤치락한 모양이다. 장승>제갈각=비의?

1.1.8. "촉(蜀)의 글자는 어떻고 오(吳)의 글자는 어떻소?"[편집]


배송지주로 인용된 『강표전』에서 소개된 일화로 『오서』 「설종전」 본전에 장봉은 비의 포지션에, 설종은 제갈각 포지션에 치환한 거의 동일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어느쪽이 원조인지 불확실하지만 아무래도 장봉과 설종간의 논쟁을 서술하는 본전을 신뢰하는게 옳을 것이다. 그래도 제갈각과 비의간의 논쟁 또한 이 항목에는 기재한다.

비의가 오나라의 사신으로 왔는데 손권을 만난 이후 공경대신과 함께 거하게 연회를 열었다. 비의는 제갈각과 서로 농담을 주고 받았는데 나중에는 촉(蜀)과 오(吳)의 글자까지 미쳤다고 한다. 비의가 제갈각에게 물었다.

"촉(蜀)의 글자는 어떻습니까?"

제갈각이 답했다.

"'水'가 있으면 탁(濁)이요 없으면 촉(蜀)이 됩니다. 눈목(目)이 누워있고, 몸은 꾸부정하고 굽어있고, 벌레가 그 몸속에 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비의가 또 다시 물었다.

"오(吳)글자는 어떤가요?"

제갈각이 대답했다.

"입구(口)가 없으면 하늘천(天)이요, 있으면 오(吳)입니다. 아래쪽에 창해(滄海)를 아우르고 있으니, 천자의 수도라는 것입니다."

「설종전」에서 전해지는 장봉에 대한 일화는 오히려 장봉이 손권 앞에서 감택을 조롱하는 무례를 저지르는 것을 설종이 난입해서 쳐바르는 형식인 것에 비해 『강표전』에서 수록된 일화는 훨씬 더 훈훈한 분위기 속에 펼쳐진 제갈각의 뜬금없는 공격처럼 보인다.

다만 두 일화가 좀 묘한게 촉한의 국호는 어디까지나 한(漢)이었지 촉(蜀)이 아니었다. 이 시기 굳이 촉한을 촉이라 부름은 비하적 의미를 내포했다.

1.1.9. "말의 귀를 상하게 했으니 미덕도 상하지 않았겠는가?"[편집]


제갈각은 일찍이 손권에게 말을 바쳤는데 귀에 구멍을 뚫어놨다.

이 광경을 본 친구 범신은 제갈각을 놀렸다.

"말이 비록 큰 짐승이고, 하늘로부터 품성을 타고났지만, 지금 그 귀가 상했으니, 어찌 그 미덕(仁)이 상하지 않았겠는가?"

제갈각은 이에 답했다.

"모친은 여인 중에서도 은애가 지극한 사람인데, 귀를 뚫어 구슬을 걸은들, 그 미덕(仁)에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이에 대한 범신의 반응은 따로 기록되지 않았다.

"니 애미는 말(馬) 같은 년이다" 라는 패드립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는데 확대해석이고, 그저 '형태가 상한다고 본질도 상하겠냐?'는 일반론에 가깝다. 다른 일화와 같이 제갈각의 말빨을 보여주는 대화 한 토막. 게다가 정말 패드립이었으면 보통 사서에 촌평(물론 패드립 친 쪽을 까는 의미)이라도 붙는다.

1.1.10. 장소와의 2차전: 이것은 무슨 새인가?[편집]


「제갈각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달았던 『강표전』에서 전해지는 일화다.
파일:e2hfsbz.jpg
백두옹(白頭翁)의 사진
손권과 대신들이 궁전 앞의 정권에 있었는데 머리가 흰 새가 날라왔다. 새의 종류가 궁금했던 손권은 대신들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새인가?"

제갈각이 답했다.

"백두옹(白頭翁)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냥 평범한 문답이었지만, 장소가 이를 오해하면서 일이 커졌다. 백두옹은 풀이하면 '머리가 흰 영감'이라는 뜻이 되니, 당시 모여있던 대신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장소가 자신을 조롱하는 걸로 착각한 것이다.

장소는 이렇게 말했다.

"제갈각이 폐하를 속이는 것입니다. 백두옹이라는 새 이름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제갈각에게 백두모(白頭母: 흰 머리 어미)라는 새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이에 제갈각이 반박했다.

"앵모(鸚母)라는 이름의 새가 있는데, 이것과 대(對)를 이루는 새가 반드시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보오[13]

에게 앵부(鸚父)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그러자 장소는 답하지 못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웃었다고 한다.

장소도 명색이 오나라의 명신으로 찌질한 인물이 결코 아닌데 자신의 아들뻘만큼 어린 제갈각에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털린 것을 봐선 상성이 영 안맞는 듯하다. 앞서 장승이 저런 것도 우스운 꼴이 된 아버지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그런 걸지도.(...) 재미있게도 아들 장휴는 제갈각과 친구 사이다. 아마 그래서 제갈각이 유독 장소에게 강하게 나설 수 있던 것일지도.


2. 손권 시대 (234년~252년)[편집]



2.1. 단양을 평정하다[편집]



2.1.1. 234년: 순탄찮은 승인[편집]


234년 8월, 제갈각은 변방의 단양을 평정하고자 했다. 일찍히 오나라는 단양을 제대로 정비하고자 했으나 산이 험하고 주민들이 굳세고 사나워서 번번히 실패했다. 육손이 산월에 사는 주민들을 군사력으로 삼은 바가 있었지만 주민들이 더욱 깊숙히 들어감으로 제대로 평정하지 못했는데 제갈각은 여러차례 단양의 관리가 되겠다고 청구하며 3년이면 무려 4만의 군사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장담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제갈각의 단양 평정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생각했다.

"단양은 지세가 험하고 막힌 곳이고, 오군·회계·신도·파양 네 군과 인접하여 있고, 면적이 수천 리이며 산골짜기는 만 겹이나 됩니다. 그 깊은 산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일찍이 성읍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며, 장리를 보지도 못하고 모두들 들녘에서 무기를 쥐고 있으며 최후에는 수풀 속에서 늙어 죽습니다. 도망자나 오랫동안 사악한 행위를 한 자는 모두 함께 이곳으로 달아나 숨어 있습니다. 산 속에서는 구리와 철이 생산되므로 직접 병기를 주조합니다. 그곳의 습속은 무예를 좋아하고 싸움을 익히며 기력(氣力)을 높이 숭상합니다. 그들이 산을 오르고 험난한 곳을 넘으며 가시덤불을 뚫고 지나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연못 속에서 질주하고,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틈을 살펴 나와서 소란을 일으키고 약탈하여, 매번 병사들이 출정하여 토벌하려고 그들이 숨어있는 소굴을 찾습니다. 그들이 싸울 때는 벌이 이르는 것처럼 하고, 패배하면 새처럼 사방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그래서 이전 시대로부터 현재까지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제갈각의 아버지 제갈근은 제갈각의 단양평정책에 대해서 들었을 때 탄식하며 말했다.

"제갈각은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키지 못하겠구나. 장차 우리 집안을 싹 쓸어 버리겠구나."

그러나 제갈각은 단양평정책을 내세우며 호기롭게 반드시 이기리라 계속 이야기했다. 손권은 끝내 제갈각을 무월장군으로 삼고[14] 단양태수의 일을 겸양하게 해서 제갈각의 계책을 수행하게 했다. 손권은 더불어 제갈각에게 적흑색의 비단으로 싼 나무창을 지닌 기병 300명을 내렸다. 관직임명식이 끝난 이후 제갈각에게 위의를 갖추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행렬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명했다. 제갈각은 당시 32세에 불과했다.

2.1.2. 235년: 화려한 성공[편집]


임지에 도착한 제갈각은 오군(吳郡), 회계군(會稽郡), 신도군(新都郡), 파양군(鄱陽郡)의 장리들에게 문서를 보냈다. 문서에서 제갈각은 장리들에게 각영의 경계를 보호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세우며 귀화한 평민들을 모두 둔지[15]에 머물게 했다.

제갈각은 제장들을 지휘해 산월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병사를 벌려놓았는데, 방어하는 울타리만 수선할 뿐 교전을 엄금했다. 그리고 곡식이 익을 때마다 매번 수확해서 남겨진 곡식이 없게 하였다. 이렇게 하니 산에 사는 사람들은 보관된 곡식이 모두 떨어지고 나자 굶주리다 못해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제갈각은 다시 한 번 칙령을 내렸다.

"산에 사는 백성 가운데 악한 짓을 버리고 교화를 좇는 자들은 모두 마땅히 위무하고서 밖에 있는 현으로 이사시켜 내보내고, 혐의를 주어 구속하여 잡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 때 구양의 현장 호항이 이들 중 주유[16]라는 자를 잡아냈다. 그는 예전부터 백성들에게 악행을 저지르는 악질 범죄자였는데 제갈각의 계책으로 인해 사정이 어려워지자 잠시 나왔다가 호항에게 포박당한 것이다. 호항은 주유를 관부에 이송했다. 그러나 제갈각은 호항이 교지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목을 베고 여러 사람들에게 돌렸다.

아직까지 산에 틀어박혀 있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는 관부에서 그들이 오직 나오기만을 원한다는 것을 깨닫고 전부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갈각은 1여년만에 호언장담했듯이 수많은 병사를 모으는데 성공했다. 제갈각은 스스로 1만의 병력을 거느렸고 나머지는 제장들에게 나눠주었다.

제갈각의 공로는 조금 과장섞어서 미니 남만정벌이라 할만큼 뛰어났다. 단양의 규모도 규모지만 산월의 반란으로 거듭해서 곤란해했던 오나라 입장에서는 제갈각만큼 수월하게 이들을 토벌한 예는 그리 많지 않았고 군사적 방법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을 썼기에 인력이나 물자소모 또한 비교적 적었을 것이다. 이렇게 제갈각은 말빨과 재치 뿐만이 아니라 행정가이자 지략가로써의 혜안도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해내며 성공가도의 첫 번째 관문을 돌파한 것이다.

손권은 제갈각의 공로에 기뻐하며 그를 위북장군으로 임명하고 도향후에 책봉하였으며 여강환구에 주둔하게 했다.

손권은 상서복야 설종을 보내 제갈각의 군대를 위로하도록 했다. 설종은 제갈각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의 업적을 크게 칭송했다.

"산월의 백성들은 험난한 지세에 의지하고 있어 복종시키지 못한 지 몇 해가 지났습니다. 그들을 느슨하게 하면 의심많은 쥐가 머리를 내놓고 관망하는 것처럼 하고, 급박해지면 이리같이 뒤를 돌아보며 두려워하였으므로 황제는 상당히 노여워하여 장수들에게 서쪽을 정벌하도록 했습니다. 신기한 책략이 조정 안에서 전해지고 군대의 무용은 먼 곳까지 진동시켰습니다. 병기에는 혈흔이 묻어있지 않으며, 갑옷은 땀으로 젖지 않았습니다. 원흉과 사악한 자의 목을 베어 내다 걸자 무리들은 정의로 뒤순했으며 깊은 산 속의 도적들은 소탕되었고 포로 10만 명을 바쳤습니다. 들에는 남은 도적들이 없고, 성읍에도 잔존하는 간사한 사람이 없습니다. 흉악한 자들을 소탕했을 뿐만 아니라 또 군대 비용을 충실하게 했습니다. 명아주와 강아지풀이 유익한 풀로 변했습니다. 도깨비는 다시 용감한 병사가 되었습니다. 비록 실제로는 국가의 위엄과 신령스러움이 더해졌을지라도 또한 확실히 원수가 직접 도달하여 조상한 것입니다. 비록 《시경》에서는 포로를 찬미하고 심문하고, 《역경》에서는 목을 벤 일을 칭찬했으며, 주왕조의 방숙(方叔)·소백호(召伯虎), 한왕조의 위청(衛靑)·곽거병(藿去病)을 어찌 나란히 논할 수 있겠습니까? 공적은 옛 사람을 뛰어넘고 공훈은 이전 시대를 초월합니다. 주상(主上)께서는 기뻐하며 먼 곳에서 감탄하고 있습니다. 《사두(四?)》편의 유전(遺典)에 감동하여 승리하고 돌아오는 병사들에게 연회를 내린 옛날 예의제도를 사모했습니다. 때문에 중대(中臺)에서 가까이 있는 관리를 파견해 장군을 영접하고 상을 내려서 위대한 공적을 빛내고 수고로움을 위로하도록 했습니다."

-『오서』 「제갈각전」에 기재된 설종의 편지


2.1.3. 왜 제갈근은 제갈각의 단양 평정을 그리 경계했을까?[편집]


흔히 제갈근이 제갈각의 안하무인 성격과 심하게 총명함을 과시하게 모습을 까면서 "제갈각은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키지 못하겠구나. 장차 우리 집안을 싹 쓸어버리겠구나."라 예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제갈각이 단양평정을 요청했을 때 저 말을 한 것이다. 물론 대부분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어려운 과제를 마냥 쉽게 생각하는 아들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는 있는 법이지만 "장차 우리 집안을 싹 쓸어 버리겠구나"같은 평은 결코 쉽게 할만한 말이 아니다. 마초가 용맹하다고 호평받으면서도 사가들에게 어김없이 까임받는 부분이 가문을 망쳤다는 것인데 다름아닌 아버지인 제갈근이 제갈각에 대해 내린 평가라면 이건 사가들 이상으로 가혹한 평이라 볼 수 있다. 도박과도 같은 북벌을 지휘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부 평정에 도움을 주겠다는 아들의 요청에 대해 이리 가혹하게 평한 것은 아무리 오만함이 걱정되었다곤 하나 과민반응으로 보아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이에 대한 추측 중 하나로, 제갈근이 진정하게 경계한 점은 단양 평정을 성공해서 아들이 사병을 거느리게 된다면[17] 제갈근 본인이 유지했던 손권의 직계관료 포지션이 아닌 주유육손같은 오나라 휘하의 군벌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는 것이 있다.[18]

특히 제갈각은 무려 1만의 병력을 사병으로 거느렸는데 오의 사성이자 명문이었던 육씨 가문의 수장인 육손이 21세에 확보한 병력이 8천 명이고 그의 아들 육항이 물려받은 병력이 4천 명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제갈각이 갑작스레 얻은 사병은 어마어마하다 평해도 무방하다. 제갈각은 세병제 덕분에 군사력을 독점하고 있던 오나라의 호족 세력에게 돌직구를 던지며 도전한 셈인데 외부인이 갑작스레 신흥 세력으로 도약한 셈이니 기존 호족 세력이 이를 탐탁찮게 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제갈각의 오만함에 대한 경계로 이해되었던 「육손전」에 기재되어 있는 제갈각에 대한 육손의 편지도 기존 호족 세력의 경고라는 측면으로 해석한다면 본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손권만 하더라도 이전의 기록을 보면 아들 손등의 친구로 붙여준다던가 제갈각의 재치에 크게 웃는다던가 훈훈한 일화들이 줄을 잇는다면 제갈각이 사병을 얻은 다음부터는 제갈각에 대한 태도가 바뀐 느낌이 강하다.

손권은 병상에 있게 되자, 뒷일을 누구에게 의탁하면 좋을지 논의하도록 했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제갈각에게 주의하고 있었는데, 손준이 표를 올려 제갈각의 기량은 군주를 보좌하여 정치를 하기에 충분하므로 큰 일을 맡길 수 있다고 했다. 손권은 제갈각이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여 일을 처리했으므로 그를 꺼리고 있었으나, 현재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그에게 미치지 못함이 확실하게 보증할 만하다고 여겼으므로 제갈각을 불렀다."

-『오서』


제갈각은 병사들을 인솔하여 여강(廬江)의 환구(喚口)에서 둔전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로 서현을 습격하여 그곳의 백성들을 체포하여 돌아왔다. 또 먼 곳으로 정찰할 사람들을 파견해 도로와 요충지를 관찰하도록 하여 수춘을 취하려고 도모했다. 그러나 손권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서』 「제갈각전」

이전까지 마치 친아들 대하듯이 촉한의 사자에게 말을 대령하라고 명령하는 등 훈훈한 모습을 보인 둘이지만 단양 평정 이후로는 상당히 경직된 느낌이 강하고 배송지가 주석으로 참고한 『오서』에서는 아예 손권이 꺼렸다는 언급이 나온다. 『오서』 「제갈근전」에 의하면 제갈각이 "스스로" 후작위를 얻었기에 제갈융이 제갈근의 작위를 이었다고 언급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면 뭔가 섬뜩하다.

결론을 짓자면 아버지 제갈근은 제갈각의 오만한 성품을 넘어 외부인 출신이라는 한계에 불구하고 사병확보를 통해 기존의 호족 세력에게 돌직구를 던지는 무모한 모습을 보고 계속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손씨 황가의 총애 외에는 확고한 기반이 없는 제갈씨 가문이 말 그대로 박살날 수 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 심히 걱정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이게 제갈근의 진정한 걱정이었다면 제갈근의 통찰력과 장기적인 안목은 실로 무서운 수준이고 제갈근의 예상 그대로 제갈각은 최후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대목을 위해 참고한 글의 출처. 읽기 위해 별도의 가입절차를 필요로 한다.

그나마 제갈근이 아들 제갈교를 제갈량의 양아들로 삼도록 한 덕분에 촉한에 남아있던 제갈교의 아들 제갈반이 동오 제갈씨 집안의 대를 이어 멸족의 화는 피할 수 있었다.[19]

2.2. 위나라와의 잦은 충돌[편집]


파일:KQvthtV.png
여강군의 지도
여강에 주둔한 제갈각은 환구(喚口)에서 둔전하기를 원했다. 제갈각은 경보병에게 서현을 습격해서 지역의 백성을 체포하게 했다. 제갈각은 사람들을 멀리 정찰하도록 파견해서 인근의 도로와 요충지를 관찰해 수춘을 도모하고자 했는데 손권은 이를 불가능한 목표라 여겼다.[20]

제갈각이 여강에 주둔한 238년에서 240년 사이까지 별 다른 기록이 없다. 아마 손권의 반대로 평화롭게 여강을 다스리면서 기회를 엿봤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241년, 은례손권을 설득하면서 오나라는 어린 조방의 즉위로 혼란스러운 위나라를 향해 총력전을 벌여야한다고 설득했다. 손권은 이를 채용하지 않았으나 비교적 소규모의 전쟁으로 선회했다. 전종은 회남을 공격해 작피의 둑을 터뜨렸다. 제갈각은 육안을 공격하고 주연은 번성을 포휘했으며 아버지 제갈근은 조중을 공격했다. 그러나 왕릉손례와의 교전에서 전종이 패배하고 5월에 사마의가 형주에서 반격을 지휘함으로 북벌은 끝내 실패했다. 「제갈각전」에서는 참전여부를 기록하지 않고 「오주전」에서만 제갈각의 참전이 확인되는데 중장랑 진황 등 10명의 장수가 죽었던 격전으로 기록하니 아마 활약이 적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241년 5월, 제갈각의 친구이자 오나라의 태자인 손등이 병사했다. 젊고 총명해서 아버지 손권을 비롯한 모두의 기대를 받고 있던 손등이지만 제대로 활약을 펼치기도 전에 죽은 것이다. 특히 제갈각 입장에서는 친구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친구의 즉위로 마음 편하게 능력을 펼칠 수 있었던 기회가 물건너간 셈이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손등의 죽음은 제갈각의 득세에 큰 도움이 된 이궁지쟁의 기폭제가 되었다.[21]

6월, 친구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버지 제갈근이 죽었다. 이미 제갈각은 후작위가 있었고 동생 제갈교는 제갈량의 양자로 갔다가 요절했으므로 동생 제갈융이 제갈근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243년 6월, 제갈각은 육안을 다시 습격해서 위나라의 장수 사순의 진영을 깨뜨리고 그의 백성들을 수용했다. 이 또한 「제갈각전」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오주전」에서만 확인되는데 비교적 소규모의 국지전으로 추측된다.

다만 『진서』 「선제기」에 의하면 제갈각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변경을 습격하며 도발을 감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각이 환현에서 주둔해서 지속적으로 변경지역을 괴롭혔다.[22] 어그로가 만만찮게 심했던 모양인지 제갈각의 습격을 중단시키기 위해 사마의는 몸소 출정해 공격하고자 했다.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적(賊)이 견고한 성에 의거해 곡식을 쌓아놓고 관병(官兵-위나라 군대)을 유인하고자 하는 것이며 지금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공격해왔으니 그들의 구원군이 필시 당도할 것이라 진퇴가 쉽지 않고 유리한 점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의는 반박했다.

“적(賊)의 장점은 물에서 싸우는 것이니 이제 그들의 성(城)을 공격해 그 변화를 살펴야 하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장점을 쓴다면 성을 버리고 달아날 것이니 이는 조정(廟)이 승리하게 되는 것이오. 만약 감히 성을 고수한다면 겨울이라 호수가 얕아 배가 다닐 수 없어 사세상 필시 물을 버리고 서로 구원할 것이니 이는 그들의 단점을 쓰는 것이 되어 또한 우리가 유리하오.”

243년 9월, 사마의는 몸소 제군을 이끌고 제갈각에게 향했다.

243년 12월,[23] 서현에 당도한 사마의군은 제갈각을 공격하고자 했다. 손권은 병사를 출동시켜 맞대응하고자 했으나 점을 쳐보니 형세를 살피는 자가 오히려 불리할 것이라 예견되었다. 그래서 손권은 제갈각을 시상으로 옮겨 주둔시켰다. 「선제기」에서는 제갈각이 비축한 군량을 불태워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고 서술하는데 아마 시상으로 옮기라는 손권의 명령으로 인한 행동으로 추정된다. 결과적으로 사마의의 예측이 맞았던 셈이지만 점쟁이의 도움을 통해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좀 미묘한 편이다(...).

다만 사마의의 서현 위협은 『자치통감』에서 기록되지 않고 6월의 제갈각의 육안 습격만 기록되어 있다. 물론 서현 위협 자체는 「오주전」을 통해 교차검증이 가능해서 의심할만한 기록이 아니다.

2.3. 외전: 승상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다[편집]


손권의 뜬금없는 행동으로 양국은 제갈각과 사마의의 대결이라는 대규모 교전을 회피했으나 계속해서 위나라를 도발해온 정황이 존재하는 제갈각은 고작 점 때문에 본인을 시상으로 옮긴 손권의 행동이 매우 거슬렸던 모양이다. 제갈각은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이를 항의했다.

편지의 전문은 「제갈각전」에 기재되어 있는데 워낙 장문이라 부분씩 끊어서 해석하는게 이롭다.

"양경숙[24]

[25](楊敬叔)이 고아한 이론을 강술하여 전했는데, 바야흐로 현재 인물들은 그것을 글로 새겼으며, 도덕과 사업을 지키는 자는 또 몇 명 없으므로 마땅히 서로 돕고 보조하여 위로는 국사(國事)를 일으키고 아래로는 서로 중히 여기고 아껴야 합니다. 또 세상 풍속이 서로 훼방하기 좋아하여 이미 성취한 것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중도에 손상을 입도록 하니, 장차 앞으로 나아가려는 무리들은 마음으로 즐거워하며 웃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일을 듣고 탄식했으며 진실로 혼자 손을 치며 격분하였습니다.

여기서 강조된 내용만으로도 제갈각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제갈각은 손권의 조치로 빡친 셈이고 별 연관없는 육손에게 좋게 보면 불평, 나쁘게 보면 화풀이하는 것이다. 마지막 두 문장은 제갈각이 편지를 쓰면서 감정을 말그대로 쏟아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군자는 한 사람에게 완전히 갖추기를 요구하지 않으며, 공자의 문하생 대략 3천 명 중에서 특별하게 돌출되는 72명, 자장(子張)·자로(子路)·자공(子貢) 등 70명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아성(亞聖)의 덕을 갖추고 있지만, 각기 단점이 있어 전손사(?孫師: 자장)는 편벽되고, 중유(仲由: 자로)는 법을 만들지 못했고, 단목사(端木賜: 자공)는 자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어찌 이들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결점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중니(仲尼: 공자)는 이런 제자들이 갖추고 있지 못함을 문제 삼지 않고 손을 이끌어 친구로 간주했으며, 사람들의 단점 때문에 그들의 단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갈각은 공자의 예를 들어서 단점에 불구하고 공자는 제자들을 모두 이끌었다고 말한다. 매우 직관적인 부분인데 공자가 이러한 제자들의 단점에 불구하고 모두를 수용했는데 왜 손권은 자기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는 인재를 채용함에 있어 마땅히 지난 옛날보다 관대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현재의 시세는 복잡하지만 훌륭한 인물은 적으며 국가의 각 부처의 관리들은 항상 충족되지 않아 고통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만일 성정이 사악하지 않고 재력을 다하려는 뜻이 있으면, 곧 임용을 장려하여 본래의 직책에서 재능을 발휘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작은 것에서는 취할 만한 재능이 있지만 개인적인 행동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모두 마땅히 너그럽게 용서해야지 하나하나 꾸짖어서는 안됩니다.

상당히 재미있는 대목으로 코에이삼국지 시리즈만 봐도 240년대가 되면 이전까지 무시당했던 능력치 70대, 80대의 인물들이 초특급 인재로 취급되는데 제갈각 또한 인재들이 줄어들고 있음을 주목한다. 그리고 능력이 있고 사악하지 않으며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당연히 임용을 장려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 언급하는 "능력있는" 인물이 누구일지를 고려하면 상당한 자뻑발언이라 할 수 있다. 거의 제3자식 주장으로 자신을 찬양하는 식인데 지금봐서는 상당히 귀엽다 평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인 육손으로서는 황당했을 듯.

그리고 재능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세미하게 논의하고 가혹하게 요구하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가혹하게 요구하게 된다면 옛날의 현인과 성인도 오히려 완미(完美)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들과 거리가 먼 사람들에 있겠습니까? 때문에 도덕으로써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곤란하며, 보통 사람의 표준으로서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쉽습니다. 이와 같으면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간에 알 수 있습니다.

뒷대목과 거의 동일한 의도성을 가졌는데 결국 "성격이 나쁘더라도 능력좋은 자신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왕조 말년 이래부터 사대부, 가령 허자장(許子將: 허소)의 무리들 중에서는 더욱 서로 비방했기 때문에 어떤 때는 화를 야기시키기도 했는데, 이 일이 일어나게 된 까닭을 살펴보면 크게 원수가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을 억제하는 예절은 다할 수 없으면서 오로지 다른 사람에게는 바른 도의로써 질책한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예의에 부합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복종하지 않습니다. 공정한 도의로써 다른 사람을 꾸짖으면 사람들은 참아내지 못합니다. 내심으로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복종하지 않고, 겉으로는 다른 사람의 질책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서로 원수가 안될 수 없습니다. 서로 한 차례 원수가 되면 소이들이 그 중간에 모이게 됩니다. 두 사람 사이에 모이게 되면 뜬소문이 여러 차례 전해지며 나날이 참언이 쌓여 혼란스럽게 뒤섞여 이르게 됩니다. 비록 지극히 현명하고 매우 가까운 사람이라도 이 말을 듣게 된다면 스스로 진위를 결정짓기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이미 틈이 생겼으며, 게다가 사리를 명백히 할 수 없는 자는 어떠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장이(張耳)·진여(陳餘)는 서로 피를 흘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소육(蕭育)과 주박(朱博)이 끝까지 좋은 사이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본래 이로부터 말미암은 것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작은 과실을 버리지 않고 미미한 일에서 서로 꾸짖으며, 이것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가가호호 원수가 되어 한 나래에 품행이 완전한 선비는 다시 없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초한쟁패기장이와 진여는 당대에도 우정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되었고 후한의 소육과 주박의 경우에는 서로를 천거하며 관직길에 오른 친구 사이였지만 한순간 틀어져서 다시는 화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자신을 중히 써달라고 요구하는 글에서 이 둘을 언급한 것은 "나를 안쓰면 둘도 없는 웬수가 될 수 밖에 없다"라고 협박하는 셈인데 육손 입장에서 이 편지는 둘도 없는 발암물이었을 것이다(이 편지에 대한 대략적인 해설).

평소에 온후한 성격을 가진 육손이지만 이런 발암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인지 「제갈각전」에 의하면 육손은 이 편지를 받은 후로부터 제갈각을 책망했다고 한다. 이에 제갈각은 육손의 취지를 칭찬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육손과의 관계회복을 위한 행위로 보인다.

"나보다 높은 관직에 있는 자에게 반드시 받들어 함께 승진하고, 나보다 낮은 관직에 있는 자는 도와줍니다. 지금 당신을 보니, 기세는 윗사람을 능멸하고 있고, 마음은 아랫사람을 멸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덕행의 기초를 안정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서』 「육손전」에 기재된 육손의 서신.

위의 단양 평정에 대한 가설과 달리 제갈각을 제갈각의 오만함을 비판하는 이 서신은 제갈각의 서신에 대한 답변내지 반응이라는 추측이 존재한다.

재미있는 점은 245년에 승상 육손이 화병으로 죽자 제갈각은 대장군으로 승진했으며 부절을 받고 육손을 대신해서 형주자사를 맡았다. 서로간 관계가 상당히 미묘한 시기에 제갈각이 거의 대놓고 육손을 승계한 셈이다. 「제갈각전」에서는 육손의 죽음을 다루며 "때마침"이란 표현이 등장하는데 어지간히 제갈각과 육손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약간 외전격 이야기로 「육항전」에 의하면 246년에 육항은 입절중랑장으로 승진하여 제갈각을 대신해서 시상에 주둔했다고 한다. 손권의 조치에 좀 많이 빡친 모양인지 제갈각은 시상을 그리 관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시상은 제갈각이 떠난 이후에 "매우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다고 한다. 임지에 도착한 육항은 모든 성벽을 다시 보수하고 집과 담장을 수리하며 오두막집에 살면서도 과일 나무와 뽕나무조차 훼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훗날 제갈각이 시상을 방문했을 때 모든 것이 달라보여서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2.4. 이궁지쟁: 아들을 희생하여 살아남다[편집]


242년, 손등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삼남이 손화가 태자로 세워졌다. 그러나 손권은 8월에 손패를 노왕으로 책봉했는데 손권은 손패를 워낙 총애해서 사실상 태자인 손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한다. 이에 오의 조정은 두 파벌로 갈라져서 손화를 지지하는 손화파와 손패를 지지하는 손패파로 나뉘어졌다. 제갈각은 육손과 함께 손화파였다.

사실 제갈각은 손화파 인물중 관직상 육손 다음으로 높은 인물이었고 손화의 본처 장비(張妃)의 외삼촌이었던만큼 손화파의 그 어느 누구보다 깊게 가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손화파와 손패파 막론하고 관여한 인물 대부분이 갈려나간 상황에서 거의 유일하게 멀쩡히 살아남은 것을 보면 제갈각이 처신이 굉장히 훌륭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오랫동안 변방에서 조용히 지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2차 매체에서의 막무가내 이미지와 달리 훨씬 더 간교한 측면이 있었다. 사마의 그늘 아래서 활동하며 독자적인 활약은 251년 이후에나 펼친 사마사와 달리, 홀로 매서운 오나라의 정치판을 헤쳐나간 것은 제갈각 본인의 능력이었다. 만약에 제갈각의 정치 능력이 조금만 부족했더라도 험악하고 살벌한 이궁지쟁을 헤쳐나가지 못하고 훨씬 더 일찍 죽었을 것이다.

워낙 조용히 지낸 탓인지 「제갈각전」에서는 이궁지쟁에 대한 기사가 별로 없고 거의 바로 손권이 후사를 부탁하는 기록으로 스킵한다. 「오주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제갈각에 대한 내용은 243년에 시상으로 옮겼다는 기사 이후에는 이궁지쟁이 끝난 시점인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다.

기록이 이렇게 적으니 그냥 쥐죽은듯 지내면서 운좋게 넘어간 것이냐는 말이 나올 수 있는데, 그게 결코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는 기록이 있다. 「제갈각전」에 의하면 제갈각의 아들 기도위 제갈작은 어느날 노왕 손패와 친근하게 굴며 손패파에 가담했다. 손권은 이를 보고 제갈각에게 아들을 재교육해야한다고 충고했는데 제갈각은 즉시 제갈작을 독살해서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을 잘 넘겨 손권의 눈밖에 나지 않았다. 처세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제갈각의 행동력과 재치를 보여주는 반면 뒤틀린 제갈각의 심성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2.5. 250년: 탁고대신(託孤大臣), 손권이 뒤를 맡기다[편집]


250년, 손화파와 손패파의 전쟁이었던 이궁지쟁의 최후 승자는 의외로 어린 황자 손량이었다. 손패파의 음모를 알게된 손권은 손패에게 자살하도록 지시했으나 손화를 총애한 것도 아니어서 손화를 폐하고 유배보냈다. 11월에 손권은 손량을 태자로 삼았다.

손권에게 중병이 생기자 제갈각은 대장군의 신분으로 태자태부를 겸임하도록 하고 중소령 손홍[26]은 태자소부를 맡아서 태자 손량을 보좌하도록 했다.

251년, 손권은 병상에 누웠다. 손량이 아직 8살에 불과함으로 의탁할 인물이 필요했는데 신하들 모두 제갈각을 추천했다. 황족 손준은 표를 올려서 제갈각의 기량이라면 황제를 보좌하며 정치를 하기에 충분하고 큰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27] 손권은 고집이 강한 제갈각을 좋아하지 않아서 스스로 멋대로 할 것이라 의심하며 그를 꺼리고 있었다. 손준은 말했다.

"현재 조정의 신하 가운데 재주로 제갈각에 미치는 자가 없습니다."

이에 손권은 무창에 있는 제갈각을 불렀다. 손권이 위독해지자 제갈각 등을 병상으로 불러서 침대 아래에서 조서를 받도록 했다.

손권은 조서에서,

"나의 병세는 절망적이다. 아마 여러분과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일을 여러분에게 부탁한다"

라고 말했다. 제갈각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 등은 모두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므로 응당 죽음으로서 조서를 만들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정신을 안정되게 하고 생각을 하여 외부 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손권은 관리들에게 조서를 내려 국가 시험 등외에는 모든 일을 제갈각에게 결재받도록 했다.[28] 또한 회계태수 등윤을 태상으로 삼았다. 등윤은 손권의 사위이자 제갈각의 아들 제갈송의 장인으로 제갈각과 사돈관계였다.

251년 4월, 손권이 세상을 떠나자 대장군 제갈각, 중서령 손홍, 태상 등윤, 장군 여거, 시중 손준를 침실로 불러 뒷일을 맡겼다.

손홍은 제갈각과 사이가 좋지 못해서 손권의 죽음을 은폐하고 거짓조서로 제갈각을 죽이려했다. 이를 포착한 손준은 제갈각에게 보고했다. 제갈각은 손홍에게 어떤 일에 대해 자문을 부탁하지만 손홍이 제대로 답하지 못하자 그 자리에서 주살했다. 그후 손권의 죽음을 선포하고 모두와 함께 상복을 입었다. 제갈각은 공안독 동생 제갈융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달 16일 을미시(乙未時)에 대행황제(大行皇帝)가 만국(萬國)을 버리고 떠나갔고, 지위의 높고 낮은 신하들은 슬퍼하며 애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우리 부자와 형제에 이르면, 한결같이 특별한 은혜를 받아 단지 평범한 신하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매우 슬퍼 간과 심장이 찢어지는 듯하다. 황태자는 정유일(丁酉日)에 황제의 지위에 즉위하니, 나의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며 공존해 취할 바를 모르겠다. 내 몸은 임종할 때 남긴 명령을 받아 어린 군주를 보좌하고 있는데, 스스로 사사로이 헤아려 보면 재능은 박육(博陸;?光)에 미치지 못하는데 희공(嬉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보좌하여 제후들의 알현을 받는 것같은 중임을 받아 승상이 한왕조를 보좌한 효과를 더하는 일을 두려워하고, 선제께서 중임을 맡긴 영명함을 손상시키게 될 것이 두렵다. 이때문에 걱정하며 두려워 매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위에 있는 자를 싫어하여 행동하면 주시를 받게 되는데, 언제나 이것을 바꾸겠는가? 현재 어리석고 노둔한 자질로 군주를 보좌하는 고관의 위치에 있으면서 어려움은 많고 지모는 부족하고, 임무는 무겁고 모략은 얕으니 누가 입술과 치아처럼 되어 돕겠는가? 가까이로는 한왕조의 시대에 연왕(燕王) 단(旦)과 개장공주(蓋長公主)가 결탁하여 상관걸(上官桀)이 곽광을 살해하려고 했던 변란이 있었다. 현재 나의 처지는 그때와 거의 같은데, 어찌 감히 편안히 머뭇거리고 있겠는가? 또 동생이 있는 곳은 적과 경계가 교차되어 있으니, 이러한 때에는 군수물자를 정돈하고 장수와 병사들을 격려하고 평상시보다 경계와 방비를 강화하고, 만번이라도 나와 함께 죽을 생각을 하여 한 번의 삶을 돌아보지 않음으로서 조정에 보답해 조상에게 부끄러움이 없어야만 한다. 또 각 장수들은 각기 자신의 지역을 수비하며 적군이 황제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임의로 침입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변방의 각 관소에는 이미 별도로 약속한 문서를 내려 수하의 독(督)이나 장(將)은 임의로 자신의 방위 임무를 버리고 직접 달려오지 못하게 했다. 비록 마음속에는 참지 못할 처참한 심정이 자리하고 있을지라도 공의(工義)로 사사로운 감정을 빼앗아 백금(伯禽)도 상중에 출정했던 것이다. 만일 공의를 어겼다면 단지 작은 잘못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의 모양으로 소원한 사람을 바로잡는데, 이것은 옛사람들이 분명하게 경계했던 것이다."

거의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육손의 화를 돋우던 이전의 편지와 달리 진심으로 손권의 죽음을 슬퍼했는지 상당히 진중한 내용으로 보인다. 실제로 손권은 어려서부터 제갈각과 이런저런 일화를 뽑아내며 놀던 친구 아빠이자 제2의 아버지와 비슷한 관계였을 것이다. 훗날 사이가 좀 미묘해진 후대의 기록들을 읽다보면 둘 사이가 허물없이 친했던게 확연해보이는 어렸을 때의 일화가 오히려 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할 정도.

2.5.1. 외전: 노장 여대에게 오만함을 뽐내다[편집]


손권의 호출로 무창으로부터 제갈각이 막 길을 떠나려 하던 참에 91세의 상대장군 여대가 경계하며 말했다.

"세상은 바야흐로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대는 매사에 반드시 열 번 씩 생각하십시오."

제갈각은 답하였다.

"옛날에 계문자(季文子)는 세번 생각한 다음에 실행하였고, 부자(夫子)는 이르기를 '두 번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라 이야기했는데,[29]

이제 그대는 저 제갈각에게 열 번 생각하라고 하니 저 제갈각이 열등하다는 것이 분명하오."

여대는 대답할 말이 없었고, 모두 그가 실언한 것이라 여겼다.

후대에도 이 일화를 어이없게 여긴 모양인지 우희는 아예 평론을 내렸다. 이 평론은 『자치통감』에서 발췌했다.

"무릇 천하를 가지고 부탁한다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신하로서 군주의 권위를 시행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 두가지 지극한 것을 겸하고서 만 가지의 기틀을 총괄하며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여후[30]

는 나라의 으뜸가는 기로인데, 뜻과 도량은 놃고 먼 곳에 있어서 겨우 열 번 생각하라는 말로써 그에게 경계하였으나, 열등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서 거절당하였다. 이것은 원손[31]의 소홀함이며 기민함과 영명함이 모두 찾추어지지 않은 사람임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에 열 번 생각하라는 뜻을 통하여 당시 해야 할 일에 대해 널리 자문을 구하고, 좋은 일을 번갯불보다 빨리 듣고, 간하는 소리를 바람이 옮기는 것보다 더 급하게 좇았다면, 어찌 전당에 엎드려져서 흉악한 녀석의 칼에 맞아 죽었겠는가?[32]

세상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말재주를 기이하게 여겼고, 급작스럽게 볼만하다고 하고, 여후가 대답하지 못한 것을 구차하였다고 비웃었지만 안전함과 위험한, 처음과 나중의 염려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봄기운의 번성함을 즐긴 것이며, 가을 열매가 입에 달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옛날에 위나라 사람들이 촉을 정벌할 때 촉 사람들이 방어하는데, 정병이 엄하게 갖추고 바로 출발할 즈음 비의는 바야흐로 내민과 바둑을 두었는데 속으로 싫어하거나 귀찮아하는 기색이 없었다. 내민은 반드시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고, 그는 밝은 전략을 마음속에 확실하게 정해놓고 있기 때문에 겉모양에서 아무런 근심하는 기색을 찾아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33]

하물여 장녕[34]

조차도 '군자가 일을 맡아서 다가갈 때 두려워하여야 꾀를 잘 내어 성공한다'고 하였으니, 촉은 풀 같이 작은 나라인데 바야흐로 큰 적을 향하여 계획하는 바가 있고 오직 지키며 싸우기만 한다고 하여도 어찌 자기를 자랑하고 여유를 가지며 편안히 하면서 근심이 없었겠는가!

이는 비의의 성품이 관대하고 간결한 것 때문이지만 세세한 것을 막지 않아서 갑자기 항복한 사람인 곽순의 해침을 당하게 되엇으니, 어찌 저쪽에서 징조가 보이고 이쪽에서 화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과거에 장녕이 비문위[35]

를 논평하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원손이 여후의 충고를 거역한 것을 보니, 두 가지 일은 같은 성질의 것이고 모두 세상을 위한 거울이 될만하다."

우희는 치졸한 제갈각이 여대를 거역한 것을 두고 가루같이 까며 반대로 한없이 관대한 비의가 오히려 관대함 때문에 곽순에게 암살당한 일을 언급하면서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같은 결말을 맞이했으니 둘 다 "세상을 위한 거울이 될만하다"는 평론을 내렸다.

하여튼 성공가도에 취한 제갈각은 노장 여대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36] 결국 이 일화는 후일 주살당하는 결말을 예고하는 복선으로 보이게 된다.

3. 손량-제갈각 시대(252년~253년)[편집]



3.1. 손량의 즉위: 연호는 건흥(建興)이다![편집]


252년 4월 태자 손량(孫亮)이 즉위했다. 손량이 즉위하면서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쳤는데 이는 숙부 제갈량촉한승상으로 군림하던 시절의 연호와 동일한 연호다. 유비의 탁고대신으로 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던 숙부를 의식하고 지은 연호로 보인다.

손량은 대장군 제갈각을 태부로 삼고, 등윤을 위장군으로 삼았으며, 여대를 대사마로 삼았다. 제갈각은 시청하는 제도를 혁파해서 교관을 철혜했다.[37] 또한 미납한 부세를 면제했으며, 관세를 받는 것을 없애고, 은택을 높였다. 제갈각의 조치로 인해 많은 백성들 중 즐거워하지 않은 이가 없으니 제갈각이 다닐 때마다 백성들은 제갈각을 보고 싶은 마음에 목을 늘렸다고 한다.

「위요전」에 의하면 위소를 태사령으로 임명하고 『오서』를 편찬하도록 했다고 한다.


3.1.1. 외전: 손분에게 편지를 보내서 위협하다[편집]


제갈각은 친왕들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거쳐하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제왕 손분을 예장으로 옮기고, 낭야왕 손휴를 단양으로 옮겼다. 손분은 거처를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자 제갈각은 손분에게 서신을 보내며 말했다.

"제왕(帝王)의 존귀함은 하늘과 같은 지위입니다. 이 때문에 제왕은 천하를 집으로 여기고 부모와 형제를 신하로 여기며, 사해(四海)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노복입니다. 원수이지만 선행이 있으면 추천하지 않을 수 없고, 친척이지만 악행이 있으면 주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천명을 이어받아 만물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국가를 앞에 두고 자신을 뒤에 두는 것으로, 아마도 성인이 세운 법도이고 백대에 바뀌지 않는 이치인 것입니다.

옛날 한(漢)왕조가 막 창립되었을 때, 많은 자제들을 왕으로 삼았으며, 이들의 세력이 매우 강하여 항상 불법적인 행동을 하였으므로 위로는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했고 아래로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비극으로 치달았습니다. 이 이후로 이 일을 인용하여 경계로 삼고 크게 꺼리게 되었습니다. 광무(光武) 이래부터 각 왕들에게 규제가 있게 되었는데, 오직 궁궐 안에서만 스스로 즐길 수 있을 뿐, 백성들과 접촉하거나 정사에 간여할 수 없게 했으며, 왕들과 왕래함에 있어서도 모두 엄격한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안전해지고 각각 자신의 복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전 시대의 성공과 실패의 실례입니다. 가까이로는 원소(袁紹)와 유표(劉表)가 각기 국토를 점유하고 있었으며, 토지는 협소하지 않고 사람들은 허약하지 않았는데,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 종묘의 제사를 끊어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천하의 어리석은 자든 지혜로운 자든 간에 공동으로 탄식하고 고통스러워한 것입니다.

고인이 된 황제께서는 옛 것을 보고 오늘날의 일을 경계하였고, 이러한 근심을 싹틔워 발전시킨 것은 천 년 후의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질병으로 누워있을 때, 각 왕들을 나누어 파견하여서 각기 일찍 봉읍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했으며, 조서는 매우 간절했고 법률은 매우 엄격했습니다. 그가 경계하여 명령한 것은 이르지 못하는 바가 없으며, 확실히 위로는 종묘를 안정되게 하고 아래로는 각 왕들을 보전하여 백대가 서로 이어지게 하며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후회가 없도록 하려고 한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위로는 주나라 시대의 태백(太伯)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고, 중간에는 하간헌왕(河間獻王: 유덕)과 동해왕(東海王: 유강)의 공경하는 기절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교만하고 방자하고 음란함을 눌러 경계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제가 듣기로는 당시은 무창(武昌)으로 온지 오래되지 않아, 여러 조서를 어기고 제도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독자적으로 많은 장수와 병사들을 동원하여 궁실을 보호했다고 합니다. 또 주위에서 항상 따르는 자들로 죄나 허물이 있는 자는 응당 표를 올려 보고하여 담당 관리에게 넘겨주어야만 하는데, 마음대로 사사로이 죽여 사건을 명백히 하지 않았습니다.

대사마(大司馬) 여대(呂岱)가 선제의 조서를 직접 받아 대왕을 보좌하여 인도하는 일을 맡았지만, 당신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쓰지 않았으므로 그로 하여금 근심하고 두려워하도록 했습니다. 화기(華錡)는 선제의 측근에 있던 신하로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정직한 사람이므로 그가 진술한 이치는 마땅히 받아들여 사용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의 의견을 듣고 화기에게 화를 내며 그의 말을 붙들어 매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중서(中書) 양융(楊融)은 직접 조서를 받았고, 그가 담당하고 있는 사무는 공경스럽고 엄숙한데도 당신은, ‘나 스스로 금령을 듣지 않는데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할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대, 크고 작은 관리들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으며 마음이 섬뜩함을 느끼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밝은 거울은 형체를 비출 수 있고, 옛 일은 현재의 일을 알 수 있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노왕을 경계로 삼아 그 행동을 바꾸어 조심하고 근신하며 진심으로 조정을 공경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당신은 구하여 얻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선제의 법제와 가르침을 버리고 있어서 경솔하고 오만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신하는 차라리 대왕을 저버리지 감히 선제께서 남긴 조서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고, 차라리 대왕에게 원망과 질시를 받지 어찌 감히 존귀한 군주의 위엄을 잊어버리고 조서를 하여금 번신(藩臣)에게 실행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고금의 정확한 도의이며, 대왕께서 명백히 한 것입니다.

복이 온 것은 원래 말미암은 것이고, 화가 오는 것은 과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재앙이 발전하는 과정 중에서 걱정하지 않으면 장래에는 후회할 가능성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노왕이 일찍 충직한 말을 받아들여 놀라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품었다면 복을 끊임없이 향유할 수 있었을 것이며, 어찌 멸망의 재앙이 있겠습니까? 좋은 약은 입에 씁니다. 오직 질병을 앓고 있는 자만이 단맛을 알 수 있습니다. 충성스런 말은 귀에 거슬립니다. 오직 통달한 자만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현재서 제갈각(恪) 등은 진심으로 대왕(大王)을 위해서 위태로움의 싹을 제거해 행복과 길상의 근원을 확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자신의 말이 분수에 넘음을 알지 못했는데, 세 번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손분은 이 편지를 받고 두려워하니 즉시 남창으로 이사를 갔다.

요약하자면, "옛부터 황족들이 군란을 일으키며 말썽을 부리니 그 싹을 자르려 하는데 만약 이에 저항한다면 죽일 수 밖에 없으니 빨리 이사가시는 게 나을 겁니다."가 되는데 이를 듣고 두려워하지 않는 황족이 어디에 있을까 싶다. 딱히 의미있는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거만한 제갈각의 행보의 예시로 봐도 무방하다. 하나 더하자면 저 마지막 문단에서 서술한 문제의 원인이 자신의 현재 모습이고, 결과는 결국 자신의 미래모습이 되었으니 어지간히 내로남불도 심했다고 볼 수 있겠다.

3.1.2. 외전: 손화의 죽음을 초래하다[편집]


제갈각은 이궁지쟁 와중 상당히 조용히 보내며 사실상 손화의 몰락을 관망한 편이지만 손화의 비 장비(張妃)의 외삼촌으로써 근본적으로 손화파였다. 손화파였던 제갈각이 실세로 군림하자 장비는 황문 진천을 보내서 건업으로 갈 수 있도록 상소를 보내고 제갈각에게 안부를 묻도록 했다. 제갈각은 진천에게 말했다.

"나를 위해 비에게 전하시오. 때가 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뛰어넘게 해줄 것이라고 하시오."


이 말이 누설되었고, 제갈각이 천도를 위해서 무창의 궁을 수리하자 민간에서는 제갈각이 손화를 다시 황제로 삼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후 제갈각이 손준에게 주살당한 뒤 손준이 이 말을 트집잡아서 손화를 죽이게 되었으니, 결국 손화의 죽음을 초래한 셈이 되었다.

참고로 장비는 손화의 죽음을 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은 일이든 흉한 일이든 간에 저는 당신을 따라야만 합니다. 끝까지 혼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장비 또한 손화를 따라서 자살했다고 한다.

3.2. 사마사와의 대결[편집]


251년, 고평릉 사변으로 위나라를 휘어잡은 승상 사마의의 죽음으로 장남 사마사는 대장군으로 승진하여 대권을 승계했다. 공교롭게도 위나라의 2세대 사마씨인 사마사가 권력을 물려받은 시점에 오나라의 2세대 제갈씨인 제갈각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격이었다.

두 권신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았다. 둘 다 황제 다음 가는 높은 직위에 오른 건 물론 사마의제갈근이라는 각국의 거물을 아버지로 두고 있으며, 동생으로 각각 사마소, 제갈융이 있었다. 하지만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권력을 물려받은 셈인 사마사와는 달리, 제갈각은 6년 연상이긴 해도 스스로 여러 공적을 세워 그 자리에 올랐다. 『진서』 「경제기」와 『오서』 「제갈각전」을 비교해봐도 제갈각은 대권에 오르기 전부터 신동 일화 외에도 여러 군사적 / 정치적 활약을 기록한 반면 사마사의 첫번째 활약이자 유일한 군공은 쿠데타인 고평릉 사변이었다.

어디까지나 탁고 대신으로 어린 손량을 보좌했고 손준 등 견제세력도 있었던 제갈각과는 달리 사마사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기에 훨씬 권세가 강했지만, 사실 완벽한 건 아니어서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한 조방이 그래도 하후현 등과 쿠데타를 획책하는 등 이래저래 불안정하긴 했다. 사마사 사후이긴 해도 지방 사령관 문흠, 관구검, 제갈탄 등이 연달아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권력의 취약함 덕분에 두 2세대 권신들은 결국 권위를 굳건히 세워줄 뛰어난 업적을 세우는데 여념없게 되었다.

제갈각의 숙부 제갈량사마사의 아버지 사마의에게 4차 북벌과 5차 북벌을 지휘해서 도전했듯이 오의 제갈각과 위의 사마사가 맞붙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였다. 실제로 위오는 1년도 안돼서 두 차례의 대규모 혈전을 벌인만큼 손량 즉위에 이어서 칭한 연호 건흥[38]을 이런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제갈각은 건흥 원년(252년) 10월, 동흥에 사람들을 모아 다시 큰 제방을 만들어 왼쪽과 오른쪽은 산으로 이어지고, 그 제방을 낀 형태로 두 성을 쌓았다.

-『오서』 「제갈각전」

첫번째 도발은 제갈각의 몫이었다. 제갈각은 동흥제의 재축조를 명했다.

3.2.1. 252년: 동흥에서의 대격돌[편집]



3.2.1.1. 왜 동흥제의 재축조를 명한 것일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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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흥제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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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군의 지도
230년, 일찍히 손권은 동흥에 제방을 쌓아서 소호의 물을 막게했다. 그러나 오나라군이 회남 지역에 쳐들어가자 오히려 소호에 있던 위나라의 배 때문에 패배를 겪자 손권은 제방을 철폐하고 다시는 수리하지 못하도록 명했다.

동흥제는 근본적으로 물이 풍부한 양주 지역의 수로를 활용하기 위해 지은 제방이다. 일찍히 위나라의 등애는 대운하를 개발해서 합비 측면의 농업을 늘리는 동시에 국경의 장강허창의 회수가 연결된 덕분에 공세와 방어 모두 용이해졌다. 『자치통감』에 주석을 달았던 호삼성의 경우에도 양주의 수로를 활용하기 위해 동흥제를 건설하려 했다고 해석했다. 즉, 이 동흥제의 건축 목적을 '수군 운용에 이익을 얻기 위해'로 파악하고 있다. 물론 소호가 유수를 통해 흘러나가는 것을 막는다면 호수는 불어날테고, 수군의 활동범위도 더 넓어지게 되는게 맞기는 하다.

그러나 동흥제 건설은 양날의 칼이었다. 소호의 물이 느는 것은 확실히 수군의 활동 범위를 넓힐 수 있으나 230년의 사례처럼 위나라에서도 역이용할 수 있고 더욱 중요한 부분은 합비를 통한 주요 통로인 유수의 물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즉, 유수오와 소호의 수군이 쉽사리 퇴각하거나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수로가 완전히 막힌다고 볼 수 있다.

한 해석에 의하면 손권이 동흥에 제방을 건설하려 했던 이유는 228년에 석정 전투에서 오나라가 대승을 거둬서 양주 방면에서 오나라가 일시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229년에 건업으로 천도를 명했음으로 양주 방면의 공세를 다채롭게 변화하기 위해 내세운 강수라는 점이다. 실제로 이때부터 오나라는 합비에만 주야장천 때리기보다는 여러 방면에서 공세를 시도했고 제갈각 또한 참여한 241년의 작피 전투에서는 한참 후방인 작피와 형주의 양양과 번성을 동시에 포위하는 등 상당히 이색적인 공세 전략을 추구했다.[39] 그러나 작피 전투에서 전종이 왕릉에게 패배하는 등[40] 악재와 앞서 언급한 등애의 대운하 덕분에 양주 방면에서 위나라가 오히려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고 동흥제는 오히려 위나라의 칼로 오나라의 공세 전략을 제한하는 악재로 변모했다고 볼 수 있다. 손권이 동흥제를 방치한 이유는 단순히 패전뿐만이 아니라 이런 대국적인 문제가 일조했다는게 이 해석의 결론이다.

파일:BwLh8H0.jpg
현대의 소호(巢湖)
이런 의미에서 제갈각의 동흥제 재건은 제갈각의 오랜 정치적 / 군사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 혜안을 유감없이 보여준 정책이었다. 권위 강화를 위해 위나라와의 전쟁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던 제갈각에게는 동흥제 재건은 상당한 패나 마찬가지였다. 동흥에 제방을 제건함으로 한때 손권이 그랬듯이 양주에서의 우위를 다시 점하리라 내적으로도 알리는 신호였으며 외적으로도 실패의 위험없이 위나라에게 대놓고 도발할 수 있는 묘수였다.

252년 10월, 제갈각은 양쪽의 산을 기둥으로 삼아서 각각 성을 쌓고 그 가운데에 제방을 건설해서 소호의 물이 가득차도록 명령했다. 각각 성에 겨우 1천명의 병력을 놔둬서 서쪽의 성은 전단에게 맡기고 동쪽의 성은 도위 유략에게 맡기고 퇴각했다. 뜬금없이 침공당한 위나라에서는 이를 치욕스럽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제갈각의 강력한 도발은 명백히 성공한 셈이다. 이제 사마사의 반응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3.2.1.2. 사마사 측의 전략[편집]

동흥제 재건설로 인해 위의 사마사측에서도 전략회의가 시작되었다. 아직 제대로된 전공이 없는 상태에 막 사마의에게 물려받아 권위가 약했을 무렵이니 사마사 입장도 오나라와의 전쟁 소식에 오히려 쾌재를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진서』 「경제기」에서는 동흥제 전투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고 고평릉 사변에 대한 기록 이후에 거의 바로 합비신성 전투로 돌입하는데 사마사 입장에서는 워낙 치욕스러운 기록이라서 아예 빼버린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정황상 제갈량의 승리가 분명한 노성 전투마저 사마의의 승리로 돌변시킨 『진서』의 신뢰도를 고려하면 근거는 없지만 전혀 불가능한 가정이 아니다.

진동 장군 제갈탄이 사마사에게 말했다.

"지금 오가 우리 나라 국경 안으로 침입해온 것을 이용하여 문서[41]

에게 강릉 지역을 압박하게 하고, 중공[42]에게 무창을 향하게 하여서 오의 상류에서 재갈을 물려두십시오. 그런 다음 정병을 골라서 그들의 두 성을 공격하게 하면 그들의 구원병이 이를 때쯤에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43]

제갈탄 외에도 정남 장군 왕창, 정동 장군 호준, 진남 장군 관구검 등 양주 방면의 주요 사령관들 모두 각기 오나라를 정벌할 전략을 세웠다. 이 세명의 전략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조정에서는 상서 부하에게 어느 전략이 옳을지 문의했다. 부하가 말했다.

“옛날 부차(夫差)는 제(齊)나라를 누르고 진(晉)나라를 이겨서 위세를 중원에 떨쳤지만 고소대(姑蘇臺)에서 최후를 만났고, 제(齊)의 민왕(閔王)은 영토를 병합하고 변방을 개척하여 국토가 천 리나 확대되었지만 몸은 국가의 전복을 밟았습니다. 시작이 좋다고 끝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고대에 증명되었습니다.

손권(孫權)은 친히 관우(關羽)를 격파하고 형주(荊州)를 병합한 후에 야심에 차고 욕망이 가득해져 흉악함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선문후(宣文侯)는 원대한 계책을 제시했습니다. 현재 손권은 죽었고, 어린 아들은 제갈각(諸葛恪)에게 의탁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손권의 가혹함을 바로잡고 잔혹한 정치를 없애서, 백성들은 혹독한 학대를 받지 않고 은혜로 막 안정되며, 조정의 안과 밖에서 함께 국사를 걱정하며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비록 끝까지 안정을 지킬 수는 없을지라도 손권은 장강(長江) 밖(형주)에서 멸망의 시기를 연장하여 생명을 길게 할 수 있었겠지요.

의론하는 사람들은 간혹 배를 띄워 장강을 건너 형주를 소탕하려고 하고, 간혹 사방의 길로부터 동시에 진격하여 그 성이나 보루를 공격하기를 원하며, 간혹 변방지역에서 대규모의 둔전을 행하여 기회를 타서 행동을 일으키기를 원합니다. 이런 것들은 확실히 모두 적을 공격하여 취하는 일상적인 계책입니다. 정병이 출발하였을 때부터 물러날 때까지는 3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적을 침략한 지 60년이 되었지만, 군주와 신하를 거짓으로 칭하고, 길흉은 함께 재난을 맞이하며, 또 그 총대장(손권)을 잃어서 상하가 국가의 위기를 근심하고 있습니다. 설령 중요한 나루터에서 배를 나란히 하고 성을 공고히 하고 험한 곳을 점거할지라도, 장강을 가로지르는 계책은 아마 승리를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단지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커다란 밭을 만들도록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병사들이 백성들을 향해 나와서 침입하여 약탈하지 않는다면, 앉아서 쌓아놓은 곡물을 먹고 운송하는 병사를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되며, 적군을 습격하여 원정하는 노고와 비용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군대에서 당면한 급한 일입니다.

옛날 번쾌(樊噲)는 10만 병사로 흉노(匈奴) 땅에서 돌아다니기를 원했는데, 계포(季布)에게 당면하여 그러한 단점을 지적당했습니다. 지금 장강을 넘어 적의 영토를 밟으려는 책략 또한 번쾌와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법령을 밝히고 병사를 훈련시키고 완전한 승리를 얻을 것 같은 상황 하에서 계책을 펴고 뛰어난 계책을 펼쳐서 적의 패잔병을 제어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은 승리를 얻는 필연적인 방법입니다.”[44]


"의논한 것을 보면, 어떤 사람은 배를 띄워서 지름길로 건너는데, 장강밖으로 가로질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네 길로 나란히 진격하여 그들의 성루를 공격하자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변경에 둔전을 확대하고 있다가 틈을 봐서 움직이자고 하였는데, 진실로 모두 적을 잡을 수 있는 정상적인 계책입니다.[45]

그러나 전투를 시작한 이래로 들락날락 하기를 3년 동안이나 하였지만, 몰래 습격하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적들이 노략질한 지는 거의 60년[46]

동안에 군신들이 서로 보위하며 길흉을 함께 걱정하였고, 또한 그들의 원수를 상실하여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이 걱정하고 위태롭게 생각하고 있으니, 설령 나루의 요새에 배를 늘어놓거나, 성을 굳게 하면서 험한 곳을 점거한다면 가로질러 건넌다는 계획은 승리를 거두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변경을 지키는 군사는 적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적들이 연락망을 늘어놓고 특히 비밀을 중하게 여기고 있어서 간첩 행위를 시행할 수 없으니 우리의 귀와 눈에는 보고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무릇 군대에 이목이 없고 살펴보는 것이 자세하지 않으면서 많은 무리를 들어 큰 위험이 있는 곳으로 다가고자 한 것인데, 이것은 요행히 공로를 세우자는 것이고, 먼저 싸워보고 나서 나중에 승리해보자는 것이니 모든 군대가 취할 훌륭한 계책은 아닙니다. 오직 군사를 앞으로 내보내어 둔전을 확대하는 것이 비교적 완전한 계책입니다. 왕충과 호준 등에게 조서를 내리시어 지역을 선택하여 험준한 곳을 점거하고 살펴가며 조치를 취하여 두는데, 세 방향에서 일시에 진전하여 지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비옥한 땅을 빼앗아서 척박한 땅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것이고, 병사들이 나아가서 백성들의 밖에 있게 되면 적군들이 범접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이며,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품으면 항복하여 귀부하는 사람이 매일 이를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입니다. 멀리 초소를 벌려놓으면 간첩들이 오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이고, 적들이 그 지키는 초소로 물러나면 벌려놓은 것은 반드시 얕아질 것이고, 둔전의 농사 짓는 일이 쉬워질 것이니[47]

이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앉아서 쌓아놓은 곡식을 먹으면서 사병들은 곡식을 운수하지 아니할 것이니 이것이 여섯 번째이고, 틈이 생기는 곳을 때때로 소식을 들으면 쳐서 습격하는 것을 신속히 결정할 것이니 일곱 번째입니다. 무릇 이 일곱 가지는 군사에 있어서 급히 해야 할 일입니다.

점거하지 않는다면 적들이 멋대로 자원으로 삼을 것이고, 이것을 점거하여 처리한다면[48]

이익은 나라로 돌아올 것이니, 살피지 않으면 안됩니다. 무릇 주둔하고 있는 보루가 서로 압박하게 된다면 형세는 이미 엇갈리고, 지혜와 용기 있는 사람을 벌려놓을 수 있으니, 재주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쓸 수 있게 될 것이고, 이를 계책으로 하면 득실의 계산을 알게 되며, 이것을 비교하면 남는 것과 부족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오랑캐의 허실이 장차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무릇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하면 하는 일은 번거롭고 힘은 다 쏟게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을 대적한다면 부렴이 무거워지고 재물이 궤핍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적이 편안하면 거들을 수고롭게 할 수 있어야 하고, 배부르다면 그들을 배고프게 할 수 있어야 한다.'[49]

고 하였는데,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50]


상당히 길지만 요약하자면
1. 제갈각의 도발은 결국 손권을 잃은 불안함을 타파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다.
2. 이에 침공으로 대응하지 말고 대규모 둔전으로 전략을 수정해서 장기전을 노려야 한다.
3. 결국 장기적으로 손해보는 쪽은 먼저 도발하고 국력이 더욱 약한 오나라이다.
4. 장기적으로 틈이 생기는 순간 바로 공격해서 쳐부숴야 한다.
즉, 부하의 전략은 지휘관들이 내놓은 동흥제 공략법을 아득히 뛰어넘은 제갈각의 총체적 전략에 대한 파훼법이라 볼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원수를 상실하여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이 걱정하고 위태롭게 생각하고 있으니"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부하는 제갈각의 동흥제 축조가 내부 결속을 위해서라는 점을 느슨하게나마 꿰뚫어보고 있었다.

234년의 제갈량의 5차 북벌의 일환으로 벌어진 촉군의 오장원 점거도 결국 제갈각과 동일한 전략적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먼저 적을 도발하고 더 유리한 지형에서 버텨서 선제 공격의 폭탄을 떠넘긴다. 제갈량은 둔전을 벌이며 장기간 오장원에서 버티고 농서의 여러 거점을 찔러보며 위의 내부 불만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조예사마의의 인내심에 도전했는데 반대로 오보다 훨씬 더 큰 전력[51]을 보유한 위나라가 둔전을 하면서 진득히 장기전에 임한다면 제갈각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도발이라는 이점이 오히려 목앞에 칼로 돌변해서 제갈각은 내부 불만을 떨치기 위해라도 대군을 앞에 두고 선제 공격을 지시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전쟁을 회피했더라면 오나라 내부의 제갈각의 권위가 폭락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러나 사마사는 부하의 훌륭한 전략을 채택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이유로 추측되는데 불안한 기반을 굳건히 하기 위한 가시적인 군사적 업적이 어찌보면 탁고 대신이라는 확실한 입지에 이전의 전공이 존재하는 제갈각보다 불완전한 권력을 승계받은 사마사가 더 필요한 입장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제갈각이 대놓고 도발한 것도 아마 이러한 정치적 이유로 사마사가 "감히" 장기전으로 떨쳐내지 못했으리라는 예측이 동반했을 가능성이 높다.

252년 11월, 사마사는 왕창, 관구검, 호준, 제갈탄에게 세 길로 나누어 동흥을 공격하도록 명했다.

사마사가 반타의 반자의로 제갈각의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3.2.1.3. 제갈각의 성공, 대승을 거두다.[편집]

파일:WwUEBS8.jpg
위군의 삼로침공.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왕창, 관구검, 제갈탄 · 호준 순서다.
252년 12월, 왕창은 남군을 공격하고, 관구검을 무창을 향했으며 호준과 제갈탄은 대군 7만을 이끌고 동흥을 공격했다. 호준과 제갈탄은 여러 부대에게 부교를 만들어 건너게하고 제방 위에 진을 치고 병사를 나누어 전단과 유략이 각각 천명씩 수비하는 성을 함락시키려 했으나 지형이 험준하고 성이 높아서 실패했다.

12월 19일, 제갈각은 4만의 대군을 거늘고 밤낮을 강행하며 구원에 동흥을 구원했다.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적들은 태부(太傅=제갈각)께서 오신다가 것을 들으면, 해안으로 올라가 반드시 달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정봉 혼자만이 반론을 제기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적들은 저들의 경내를 뒤흔들어 허도와 낙양의 병사를 다하여 크게 일으켜 왔으니, 반드시 세워 논 계획이 있을 것인데, 어찌 헛되이 돌아가겠습니까? 적들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믿지 마시고 저를 믿으시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제갈각은 본인이 도착하기 앞서서 정봉, 여거, 유찬, 당자를 선봉부대로 삼아서 산의 서쪽을 올라서 유략과 전단을 구원하게 했다. 정봉이 제장들에게 말했다.

"이제 여러 부대의 행군 속도가 더딘데 만약에 적들이 편리한 지대를 점거하게 되면 싸우기가 어려우니 내가 청컨데 그곳으로 빨리 가시오"

이에 제장들은 정봉을 위해 길을 열어놓고 아랫길로 내려갔다. 정봉은 3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지름길로 나아갔다. 북풍이 불어오니 정봉은 돛을 달고 2일만에 동관에 도달하고 서당[52]을 점거했다. 12월의 추운 날씨에 호준은 병사들의 몸을 덥힐 생각이었는지 술을 놓고 연회를 열었다.

적의 선봉이 적은 것을 파악한 정봉은 부하들에게 말했다.

"후작에 책봉되는 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병사들은 갑옷을 벗고 모극을 버리되 투구만 쓰고 큰칼과 방패만 무장한 채로 맨몸에 둑을 기어올라갔다. 취한 위군은 이 광경에 크게 웃을 뿐 경계태세를 취하지 않았다.

유찬과 정봉 등의 병사들은 둑에 올라가서 북을 울리며 함성을 지르며 이리저리 베어버리니 위의 주둔지를 크게 깨뜨리고 여거의 지원군도 뒤를 이어서 도착했다. 위의 군사들은 놀라서 도망쳤는데, 서로 다투면서 부교를 먼저 타려고 했다. 결국 부교가 파괴되었고 어떤 이들은 스스로 물안에 빠졌고, 위군의 병사들은 서로서로를 밟았다. 「주이전」에 의하면 주이는 소호에서 수군을 이끌고 부교를 공격해 파괴하는데 일조했다고 한다.

혼란속에 한종환가 등 여러 위의 장수들이 죽고 도합해서 죽은 위군은 총 수만 명이었다.

왕창관구검은 동쪽방면의 군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주둔지에 불을 사르고 모조리 다 도망쳤다.

제갈각은 일찍히 오나라를 배반한 한종의 머리를 보내서 대제(손권)묘당에 아뢰었다고 한다.

수레와 가마, 소와 말, 노새와 당나귀를 각각 수천씩 노획했고, 물자와 병기가 산처럼 쌓였다. 제갈각은 부대를 정돈하여 오군은 귀환했다. 큰 승리를 거둔 제갈각은 양도후로 봉해지고, 형주와 양주목을 겸양했으며, 독중외제군사로 삼아서 안팎의 여러 가지 군사적인 일을 감독하게 되었다. 더불어 금 1백 근, 말 2백 필, 비단과 베 각각 1만 필씩을 하사받았다.

3.2.1.4. 제갈량의 북벌 이상의 피해를 입혔지만...[편집]

제갈각의 절묘한 도발은 그야말로 완벽한 성공을 거뒀다.

위나라 입장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대패로 위군에게 수만의 피해를 입히는 성과는 제갈량의 북벌에서조차 달성하지 못한 업적이었다. 제갈각 이후로부터 위군에게 비슷한 규모의 피해를 입힌 인물은 강유가 거의 유일하다. 그러나 강유조차도 공세의 입장에서, 그것도 지휘하에 있는 전군을 쏟아부은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비해 제갈각은 방어전에 본인이 지휘하는 주력조차 도착하지 않은 시점에서 오직 선봉만으로 이룬 업적으로 강유의 도서 전투에 비해 훨씬 적은 피해와 물자를 요했을 것이다.[53] 제갈각은 전략 구상, 수립 그리고 실행 면에서 결점이 없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동흥제 전투까지의 활약상만 놓고본다면 제갈각은 오나라 2세대는 물론 삼국의 2세대 인물 중 가장 뛰어난 영걸 중 한 명으로 과감하게 평할 수 있다. 이로부터 몇년 전에 있었던 촉한의 흥세 전투도 위가 관중이 텅텅 비었다고 표현할 정도의 대패를 입은 전투지만 이는 왕평, 유민조상, 하후현의 대군을 지연시키고 그 사이에 비의의 중앙군이 후방에 들이닥쳐 위의 대군을 몰살한 것으로, 성격 자체가 촉한의 여러 거물들이 유기적으로 합작한 전투라 혼자서 전략 수립 및 실행까지 완전하게 해낸 제갈각의 동흥제 전투와 단순 비교할 순 없다. 물론 동흥제 전투의 실행 측면에서 선봉으로 나선 정봉과 퇴로를 끊은 주이 등의 활약을 고려했을 때 제갈각의 원맨쇼라고 보기에는 좀 무리이긴 하나, 원래부터 공세를 목적으로 쳐들어온 적에 대처한 왕평, 비의, 강유와 비교했을 때 제갈각은 고안한 기발한 도발로 수세를 취해야 할 적을 공세로 몰아넣어 적을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들이고 정봉, 주이 등을 선봉으로 보내는 결정마저도 제갈각의 결제에 따라서 이뤄진 것이기에 업적에 대한 지분 자체는 제갈각이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아직 여러 불안 요소가 있었던 제갈각의 입지는 완전히 다져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마사에 비해 훨씬 더 안정적인 탁고 대신 입지 + 위대한 군공 + 원수 한종의 죽음 + 성공적인 내치로 인한 백성들 사이에서의 인기의 결합은 권위의 절정이었으며 양주 / 형주 자사에 독중외제군사 책봉까지해서 후일 내부의 반대에 불구하고 20만[54]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엄청난 지지도와 동흥제 전투에 등에 업은 강력한 권위 덕분이었다.

위의 대장군 사마사는 대실패에도 불구하고 제갈탄의 말을 듣지 않은 본인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했다. 다만 묘한게 아무리 봐도 제갈각의 전략에 대한 맞불로는 부하의 둔전이 가장 좋은 파훼법이다. 결국 제갈탄의 말을 들었어야 한다고 언급하는 것을 봐선 사마사가 전략적으로 공세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감군으로 총괄하던 동생 사마소와 자신 외에는 작위를 깎지 않은 덕분에 부하들의 신뢰도를 얻는 등 급한 불은 껐다.[55] 하지만 결국 사마사의 권위를 강화해줄 군공없이 황제 위에 군림한다는 문제 때문에 근본적으로 모순되어 있는 내부 입지가 약해지는 것은 시간 문제나 마찬가지였다.

상식적으로 볼 때 최대한 위와의 전투를 회피하고 내치에 힘쓰면서 촉한의 재상 비의와 함께 위에서의 상황을 주시하는 게 합당하다. 내부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군공에 궁핍해진 것은 사마사이고, 칼을 쥔 것은 각각 내부 지지도가 높았던 촉오의 재상들이었다. 사마사는 군공을 세우기 위해 위험한 모험을 취할 가능성이 높으니 아예 먹이를 주지 않거나 아니면 다시 안전한 요충지에서 도발을 취해 계속해서 위군이 꼴아박도록 강요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었을 것이다. 부하의 전략에 임하려 해도 내부 지지도가 안 따라주니 수년간의 장기전은 커녕 내부 불만을 억누르지 못해 도발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고, 사마의를 있는 힘껏 서포트 해준 조예와 달리 황제 조방사마사의 영향력을 떨쳐내려고 안간힘이었다. 결국 내부 권위를 위해 군사 모험을 멈출 수 없는 악순환에 갇힌 사마사 정권은 언젠가 붕괴할지도 모르는 처지였으며 일이 비교적 잘 풀렸음에도 관구검, 문흠, 제갈탄 등의 봉기를 맞서야했던 사마사사마소 형제의 미래를 고려하면 이 상태에서 사마사는 더 이른 시점에 훨씬 더 심각한 정변을 맞서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제갈각이 동흥제에서 대승을 거둔 이유가 사마사 및 조위의 정황을 잘 파악하고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갈각 역시 이러한 점을 간파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결과적으로 위에 언급된 대로 조위의 정황을 좀 더 지켜 본 다음에 행동을 취했어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조위의 정황이 혼란하다면 이를 무너지는 걸 지켜보는 한편 국력을 키워 상대를 하면 되는 것이고, 안정을 찾을 기미가 보이면 그 때 행동으로 옮겨도 늦지 않다는 소리.

그러나 단양 평정과 이궁지쟁에 이은 동흥제 전투의 성공으로 여태까지 성공만 맛본 제갈각은 교만해질대로 교만해진 상태여서 이러한 합리적인 생각을 할 인물이 더 이상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동흥제 전투는 제갈각의 전성기를 열고 동시에 그의 몰락의 단초를 심은 승리였다.

동흥에서 대승을 거둔 제갈각은 다시 위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노렸다.

3.2.2. 253년: 합비신성에서 몰락하다[편집]



3.2.2.1. 합비 공략의 명분과 이유를 설명한 제갈각[편집]

동흥제에서 돌아온 제갈각은 즉시 재출병 의사를 밝혔다. 물론 오나라 내부에 멍청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자주 출병하면 군이 피로하다는 이유로 여러 대신들이 제갈각에게 한 목소리로 반대했지만 제갈각은 이를 듣지 않았다. 중산대부 장연이 고집을 꺾지 않고 끝까지 제갈각에게 반대하자 제갈각은 그를 부축시켜 밖으로 끌어보내고 '논하는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유시했다.

"무릇 하늘에는 두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마리의 용이 없다. 왕 된자가 천하를 겸병하는 일에 힘쓰지 않고 그자리만을 후세에게 남기려 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없었다. 옛날 전국시대의 각 제후들은 스스로 강력한 병사와 광범위한 영토에 의지하여 서로 구원하였는데, 이와 같은 정권은 충분히 대대로 전할수 있고 사람들이 위태롭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방종되게 하고 노고를 꺼려 진나라로 하여금 점점 강대하게 하면 결국에는 그들을 병탄시키는데, 이것은 과거의 사실이다. 근래에는 유경승[56]

이 형주에서 병사 1만명을 가지고 있고 재물과 식량은 산만큼 있지만, 조조는 아직 미미하여 그와 힘을 다투지 않고 그의 세력이 강대해져 여러 원씨를 병탄하여 멸망시키는 것을 좌시하고 있다. 북방이 전부 평정된후 조조는 30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형주를 향해 왔다. 그 당시는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었지만 또 계획을 만들어 낼수 없었다. 그래서 유경승의 아들이 어깨를 교차시켜 투항을 요청해 결국 포로가 되었다. 적대 국가가 서로 병탄하려고 하는 것은 원수가 서로 제거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원수가 있다고 하여 힘을 축적한다면 화는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에게 있게 되니 멀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옛날 오자서가 말하기를 "월나라가 10년간 백성들을 양육해서 모으고 10년간 훈련시키면 20년후에는 오나라가 전쟁에서 패하여 소택지가 될것이다." 라고 하였다. 부차는 오나라의 강대함에 의지하고 있으면서 이 말을 들었는데 이 때문에 오자서를 주살시키고 월나라에 대비하는 마음이 없었다 싸움에 패하여 후회함에 이르러서는 어찌 미치는 것이 있었겠는가? 월나라는 오나라에 비해 작았지만 여전히 오나라의 화근이 되었으니 하물며 월나라 보다 강대한 나라는 어떻겠는가? 옛날 진나라는 단지 관서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오히려 육국을 병탄하였으며 현재 적들이 모두 진, 조, 한, 위, 연, 제 등 아홉주의 땅을 얻었다.

이 땅은 모두 전쟁용 말이 생산되는 곳이며 유능한 인재를 배출시킨 땅이다. 지금 위나라를 옛날 진나라에 비교하면, 토지의 수는 배나 되고 오와 촉을 고대의 육국과 비교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위나라를 대적할수 있는 까닭은 단지 조조시대의 병사들은 오늘 마침 힘을 다했고 이후에 출생한 자는 아직 성장하지 않아 바로 적군이 쇠약해지고 수가 적으며 아직 왕성해지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마의는 이전에 왕릉을 주살했고 이어서 그 자신도 죽었고 그의 아들은 어리고 약한데 독자적으로 대임을 맡고 있으므로 비록 지혜와 계책이 있는 선비가 있을지라도 임용할수 없을것이다. 응당 오늘 정벌해야 하며, 바로 그들이 액운을 만날때이다. 성인은 시기를 긴급히 붙잡는데 진실로 오늘을 말한것이다. 만일 사람들의 감정에 순응하여 편안함을 훔치려는 계획을 품고 있으면서 장강은 험난하여 대대로 전할수 있다고 주장하고 위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논의하지 않고 오늘의 상황으로써 그 이후의 변화를 경시한다면 이것이 내가 길게 탄식하는 까닭일것이다. 고대 이래로 위정자들은 사람을 낳아 기르는 일에 힘썼는데 현재 적의 백성은 해마다 달마다 증가하고 있으나 나이가 작아 아직 사용할 수 없을 뿐이다. 만일 또 10년이 지나면, 위나라 백성들은 틀림없이 현재의 배가 될것이고 우리 나라의 강인한 병사가 주둔해 있는 곳은 모두 공허하게 되어 오직 이런 사람들이 대사를 정함을 볼수 있을뿐이다. 만일 그들을 일찍 사용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늙게 하여 또 10년이 지나면 절반으로 감소할 것이며 이들 자제의 수가 부족함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적의 인구가 배로 증가하고 우리 병사가 절반으로 손실된다면 비록 또 이윤이나 관중이 계획할지라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오늘 멀리 생각하는데 이르지 못하는 자는 틀림없이 나의 이런말을 실지와 거리가 멀어 어두운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우환이 이르지 않았는데 미리 걱정하는것 이것이 진실로 사람들이 어둡다고 보는것이다. 어려움이 이르게 된 연후에 머리를 땅에 닿도록 굽혀 절하는 것은 비록 지혜가 있는 자일지라도 또한 방법을 도모할 수 없다. 이것은 고금의 병폐이지 오직 한 시대의 상황만은 아니다. 과거 오나라는 처음에 오자서의 견해를 어두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이르자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경승은 10년 뒤의 일을 생각할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을 남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 나 제갈각은 신하의 재능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위대한 오에서 소하와 곽광의 임무를 받았으며 지혜는 일반 사람들과 같고 생각하는 것은 먼 곳 까지 가지 못하지만 만일 오늘 국가를 위해 변방 지역을 개척하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나이를 먹을 것이고 그대 원수와 적은 더욱 강대해져 목을 잘라 잘못을 사죄하려고 해도 어찌 소용이 있겠는가? 오늘 사람들은 간혹 백성들이 여전히 빈곤하므로 휴식에 힘쓰도록 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크나큰 위험을 걱정할줄 모르고 작은 은혜를 베풀기 좋아하는것이다. 과거 한고조는 다행히도 삼진의 땅을 자신것으로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함곡관을 페쇄시키고 요충지를 지키며 직접 오락을 즐기지 않고 오히려 근거지를 나와 초나라를 공격하려다가 몸에 상처를 입고 갑옷에는 이가 생겼으며 장수와 병사들은 어려움과 고통을 견뎠겠는가? 어찌 예리한 칼날이 부딪히는 것을 좋아하고 안녕을 잊었겠는가? 이것은 적과 우리가 끝까지 오랫동안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한 것일 뿐이다. 나는 언제나 형한이 공손술에게 출병하여 천하를 취하는 계책을 설명한 것을 보고 있으며 근래에는 집안의 숙부가 표를 올려 적과 천하를 다투는 계책에 관해 진술한것을 보았는데 일찍이 탄식하지 않았을 때가 없었다. 나는 밤이 되면 몸을 뒤척이며 이런것을 생각한다. 그래서 잠시 어리석은 생각을 적어 여러 군자들 곁으로 보낸다. 만일 하루 아침에 내가 죽는다면 지향하고 계획한 것은 실현될 수 없을 것이므로 후대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걱정한 일을 알게 되어 훗일을 생각할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57]


"무릇 적대국을 서로 삼켜버리려고 하는 것은 바로 원수들이 서로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이오. 원수가 있는데 그것이 자라나게 놓아둔다면, 화가 자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후세 사람들에게도 있게 되는 것이니 불가불 멀리까지 생각해야 할 것이오.

옛날 진나라는 단지 관서 지역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도 오히려 여섯 나라를 병탄하였소. 지금 위나라를 옛 진나라에 비교해본다면 땅은 몇 배나 되고, 오와 촉한을 가지고는 옛날 6국의 반도 될 수 없소. 그러나 이제 그들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조조 당시의 병사가 많았지만 오늘에는 다 없어지고, 그 후에 난 사람들은 아직 다 자라지를 아니하였으니 바로 적들은 쇠약하고 젊어서 아직은 왕성하지 못한 시기요. 더욱이 사마의가 왕릉을 먼저 주살하였고,[58]

뒤이어 자기 스스로도 죽었는데, 그의 아들은 어리고 약하지만 오직 저 사람이 담당하던 큰 임무를 맡았으니, 비록 지모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이를 시행하여 쓰지는 아니하였소.

오늘날을 맞아 가들을 정벌하는데, 이는 그들의 액운이며, 성인께서 시기를 따르는 것을 급히 하라고 하였는데, 정말로 오늘을 말하는 것이오. 만약 많은 사람들의 정리를 좇아 구차하게 편안히 지내려는 계책을 품고서 장강의 험한 것을 후세에 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논하지 아니하고서 오늘날의 현상을 가지고 드디어 후에 일어날 일을 가볍게 생각한 것이니 이는 내가 길게 탄식하는 까닭이오.[59]

오늘날 듣건대 많은 사람들은 백성이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한가하게 쉬게 하는데 힘쓰자고 하지만 이는 그것이 크게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고 조금 부지런히 할 것을 아끼는 것이오.

옛날 한나라의 고조는 다행스럽게 이미 스스로 삼진의 땅을 갖고 있었는데, 어찌 관문을 걸어 잠그고 험한 지역을 지키면서 스스로 즐기지 아니하였고, 공연히 나아가서 초를 공격하여 몸에 상처를 입고, 갑옷 속에 이가 가득 생기게 하며, 장사들이 곤고한 것을 싫어하는데, 어찌 칼날을 즐기며 안녕을 잊었다는 말이오? 장구한 세월에서는 둘이 함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오.

매번 형함이 공손술에게 나아가서 빼앗을 계책을 가지고 유세한 것을 볼 때마다, 최근에 우리 집안의 숙부께서 표문을 올려서 적과 더불어 경쟁하려는 계책을 진술한 것을 보니,[60]

일찍히 탄식하지 아니할 수 없었소. 밤새도록 몸을 뒤척이며 생각하였던 것이 이와 같으니 그러므로 즐겨 어리석은 말을 적어서 한두 명의 군자들에게 보내는 것이오. 만약에 어느 날 아침에 죽어서 뜻과 계획을 세우지 못하게 된다면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내가 염려하는 바를 알게 하는 것이니, 뒤에 가서 생각할 뿐이오."[61]


이 두 문장은 사람들의 반대에 충분한 명분을 쌓기 위해 작성한 제갈각의 논의로 흔히 뻘짓으로 이해되는 합비 공략을 왜 추구하게 되었는지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자료다. 제갈각의 주장 중 중요한 포인트를 몇개 간추리자면
1.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 두마리의 용이 없듯이 오나라는 결국 천하통일을 이뤄야 한다. 최종목표가 천하통일이었는지 현상유지였는지 갑론을박이 자주 벌어지는 손권과 달리 제갈각은 이 문장으로 오나라와 본인의 목표는 천하통일이라는 점을 명백히 밝혔다. 즉, 제갈각은 위나라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이전 시대 전략가인 주유와 노숙처럼 제갈각도 나름대로의 대전략을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62]
더군다나 오나라 자체가 호족연합체일뿐 천하통일의 대의명분이 부족했으며 호족연합이라 타 국가에 비해 체계적으로도 떨어졌다. 그나마 이 당시 동맹인 촉한은 내부적으로 체제가 튼실하기라도 했지 오는 황제는 어렸고 불과 얼마전까지 내부적인 홍역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 제갈각은 이런 논지를 통해 이제 막 새로 어린 황제가 즉위한 오나라라는 국가의 존속과 나아갈 방향성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63]
2. 힘을 축적하는 것은 오히려 적의 회복을 초래할 수 있다. 제갈각은 이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위나라의 국력과 촉오의 국력을 비교하는데 위는 전국시대진나라에 비해 "땅은 몇배나 되고" 촉한과 오는 "옛날 6국의 반"조차 못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현재 위나라를 적대할 수 있는 것은 조조가 죽고 세대교체가 원만히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64]이라 한다. 그런고로 이런 상태에서 10년이 지나면 위의 인구는 배가 되고 오의 군사는 반으로 줄어들지도 모르는데 기회를 노려야한다고 서술한다.[65] 제갈각은 아예 장강 방어선을 언급해서 험한 지형에 의존해 수세에 일관하자는 주장을 질타하기까지 한다.[66]
3. 결국 기회는 지금 뿐이다. 결국 2번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으로 동흥제에서의 대승이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공세를 취해야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지에는 딱히 다른 논리를 수반하지 않는다. 다만 위를 다시 치는 행위를 "그들의 액운"이라 직접 말하는 점이나 성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즉시 일를 치뤄야한다고 서술하는 것을 이 부분은 논리보다는 감성에 주력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4. 사마사는 나약할 뿐이다. 거의 대놓고 언급하는 부분으로[67] 나름대로 사마사의 약점을 정곡으로 찌르는 부분이다. 큰 업무를 담당하던 아버지 사마의가 막 죽어서 이를 승계한 아들내미에게 버거울테니 지혜로운 선비가 있더라도 쓰지 못할 것이라는 점인데 사마사 본인은 오히려 단호하고 유능한 편이지만 사마의를 곧 계승한 입장인데다가 본인의 경험과 공로가 적은 편이어서 선택지가 적다는 점은 나름대로 제갈각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분석이다.
5. 내가 나이먹기 전에 일을 치뤄야할 것 아니야! 농담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제갈각이 직접 언급하는 부분이다.[68] 나름대로 겸손하게 말한답시고 "신하의 재능을 갖추고 있지 않"고 "지혜는 일반 사람들과 같"다고 말하지만 근본적으로 소하와 곽광의 임무를 받은 본인이 나이를 먹기 전에 대업을 이뤄야한다고 언급하는 것은 오만하기 짝이 없다.
다만 이 부분은 제갈각의 가족력이 수반했을 가능성이 높긴하다. 아버지 제갈근은 67세에 사망함으로 오나라의 요절징크스를 고려하면 상당히 장수한 편이지만 숙부 제갈량은 54세에 사망했고 동생 제갈교는 불과 25세에 사망했다. 당시 제갈각은 무려 50세로 사마사에 비해 6년이나 연상이었는데 나이를 염려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를 나름대로 설득한답시고 쓴 문장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오만하다고 밖에 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제갈각의 '논하는 글'을 설펴보면 제갈각이 그냥 소위 "꼴려서" 합비 공략을 노린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전략적인 목표와 염려가 있었기에 그랬다는 것은 살필 수 있다. 나이먹기 전에 이뤄야한다는 등의 망발을 차치하고 여기서 눈여겨봐야하는 부분은 제갈각의 천하통일 지향성, 미래의 위촉오 간의 국력차에 대한 염려, 사마사의 약점에 대한 희망, 그리고 동흥에서의 승리를 등에 업어 공격하는 것은 위오간의 파워 밸런스를 뒤엎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관점이다.

무모한 철부지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위의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위의 상황과 삼국간의 관계에 대한 제갈각의 분석은 상당히 정확하고 문제를 제대로 짚은 편이었다. 그나마 균형을 이루고 있는 현재의 위촉오 간의 국력차가 수 십 년 뒤에도 똑같이 유지되는 것은 오촉의 약한 국력으로 보나 위나라의 막대한 인구와 인재로 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위나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이점은 물량과 시간이었고 이를 파악한 제갈각의 분석은 그런 물량과 시간을 극대화해서 장기 둔전을 통해 동흥제 재축조를 분쇄하고자한 부하의 간언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므로 위가 세대교체가 막 이뤄져서 지휘관들이 아직 미숙하고[69] 사마사가 아직 사마의의 대업에 버거워하며 동흥제 전투로 큰 피해를 입은 호기를 노려서 공격하고자 한 제갈각의 전략 자체는 아주 틀렸다고 말하기 뭐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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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화가 예슝(葉雄)이 묘사한 제갈각
그러나 제갈각의 거시적인 관점과 달리 세병제둔전제로 대표되는 동오의 군사체제는 곧바로 제갈각의 즉각적인 군사작전을 수용할만큼 유연하지 못했다. 오나라에서는 사병을 인정해서 병력을 자손에게 세습하는게 가능했고 둔전이란 형태로 영지를 줘서 병력을 유지하도록 지원했다. 덕분에 오나라는 이권이 달린 수성전에는 거의 무적의 모습을 보인 반면 공격전에는 비교적 열의가 없는 모습이 보였고 사병이 동시에 둔전민이었다는 사실은 전쟁이 자주 벌어진다면 영지의 노동력 또한 줄어둘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열의를 더해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오나라는 군주와 세습군단을 이끄는 반독립적인 장군들간의 주종관계가 군주 한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는데 1대 황제인 손권 사후 각지의 토착호족들과 장군들은 어린 손량을 위시한 중앙정부의 명령을 따를지에 대한 문제가 불거짐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탁고대신인 제갈각이 한 차례 동흥제에서 대승을 거둠으로 일시적으로 중앙정부의 위상이 높아지는 최상의 결과를 낳았지만 반대로 군사적으로 대패를 겪는다면 위상을 그대로 말아먹는 희대의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각 병사가 장군들의 재산인 오나라에서는 패배에 대해서 촉위에 비해 훨씬 더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갈각이 손량을 어떻게 보좌하느냐에 따라서 불안정한 오나라의 미래가 좌지우지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제갈각의 전략적 분석은 틀린 말이라 할 수 없었고 오히려 이전시대 전략가들의 대전략을 계승하고 손씨 왕조의 기틀을 다지겠다고 천명한다는 의미에선 제갈각의 넓은 시야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갈각은 여러가지 이유로 조급증에 걸려 지나치게 서둘렀으며 이로 인해 당시 불안정한 오나라의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패한다면 어떤 후폭풍이 들이닥칠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로 동흥제 전투의 승리를 반복할 생각밖에 없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오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대전략을 위해서라도 제갈각은 훨씬 더 신중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지만 자제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동흥에서의 승리에 취해 분별력이 떨어진 채로 권위는 높아서 제지할 대신조차 한 명 없었다.

사실상 대승 하나가 사람을 버린 것이다.

3.2.2.2. 여전한 내부반대[편집]

제갈각과 잘 지내던 단양태수 섭우는 제갈각에게 편지를 보내서 합비 공략에 대해 충고했다.

"대행황제[70]

께서 본래 동관을 막을 계책을 갖고 계셨고, 계책을 아직 시행하지도 않았는데, 구적들이 멀리서 스스로 보내와서 장사들은 위엄 있는 덕에 의거하여 몸을 내어 목숨을 걸고 싸워서 하루아침에 대단한 공로를 세웠으니, 어찌 종묘의 신령과 사직의 복이 아니었겠습니까?

마땅히 또 병사를 누르고 정예부대를 기르다가 틈을 보아서 움직여야할 것입니다. 지금은 이러한 형세를 타고서 다시 크게 출동하려고 한다면 하늘의 때로 보아서 가능하지 않고, 만약에 왕성한 의지에 맡긴다고 하여도 나의 사사로운 마음으로는 불안하다고 생각됩니다."

제갈각은 '논하는 글'을 작성한 뒤 섭우에게 서신을 보냈다.

"족하께서 비록 자연스러운 이치를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직 큰 운수는 못 본 것 같으니, 이 논하는 글을 익히 살펴보시면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오."

제갈각은 거의 대놓고 "제 글이나 보세요."라고 섭우에게 답한 것이다.

제갈각과 사돈관계이자 같은 탁고대신인 태상 등윤이 제갈각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윤이나 곽광과 같은 부탁을 받으셔서 들어가서는 본 왕조를 편안하게 하시고, 나가서는 강적을 꺾으시어 명성이 해내에 떨쳤으니, 천하에 진동하지 않는 것이 없고 만백성의 마음은 그대의 은전을 입어서 휴식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노역[71]

을 치른 다음에 군사를 일으켜서 출정하면 백성들이 피곤하여 힘이 모자라게 되며, 멀리 있는 나라의 주군은 대비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성을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고, 들에서 노략질하여도 먹을 것을 얻지 못하면 이는 앞에서 수고하였던 것을 잃을 것이며, 뒤에 올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갑병들을 어루만지고 군사들을 휴식하게 하다가 틈을 보아 움직이는 것만 못합니다. 또한 군사적인 일은 큰일이고 일이란 여러 사람이 해결해나가는 것이니 여러 사람이 진실로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대 홀로 이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이에 제갈각은 답했다.

"여러 사람들이 안 된다고 말했는데, 모두 계산한 것을 보지 못하고 구차스럽게 편안하게 있고자 하는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오. 그대도 다시 그러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내가 무엇을 바라겠소."

무릇 조방은 아둔하고 못났으며 정치는 개인의 수중에 들어가 있어서 저들의 신하와 백성들은 진실로 마음이 서로 떨어져 있소. 지금 내가 국가가 가지고 있는 자본을 이용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위엄에 의지한다면 어디들 간들 이기지 못하겠소?" 합비. 합비잖아

등윤의 상식적이고 정론적인 반박을 이따위반대하는 니들은 그냥 놀고싶을 뿐이잖아!로 반박하는 것을 보면 제갈각이 어지간히 오만에 빠진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지금 읽어도 얼척없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등윤을 비롯한 당대 오의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제갈각은 반대하는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합비 공략을 결정했다.

반대의견은 오나라 뿐만이 아니라 동맹인 촉한에서도 있었다. 촉한의 시중이자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이 제갈각의 사촌동생이었는데 장억은 황급히 제갈첨에게 서신 두 개를 보냈다.

"동쪽 오나라의 군주는 방금 붕어하였고, 황제는 사실 유약합니다. 태부 제갈각은 어린 군주의 위탁의 중책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또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황족으로써 빼어난 재능을 갖고 있던 주공(周公)에게는 오히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전파한 유언이 있었고,[72]

곽광(霍光)이 임무를 받았을 때에는[73] 또 연왕 단(燕王 旦)과 악읍개주, 상관걸 등의 음모와 반란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성왕 소제의 명철함에 의지하여 이 재난을 면했습니다. 옛날부터 동쪽의 군주는 살생과 상벌의 권한을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항상 들었습니다."


"옛날부터 동쪽의 군주는 (손권은) 살생(殺生)과 상벌(賞罰)의 권한을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항상 들었습니다. 지금 또 생명이 위급할 때 갑자기 태부를 불러 훗일을 위탁하려고 하니, 진실로 걱정할 만합니다. 게다가 오와 초의 사람들은 사납고 급하다고 과거의 책에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태부는 어린 군주를 떠나 적지로 들어가니, 아마 훌륭한 계획과 뛰어난 계산에 기초한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비록 동쪽 나라는 기강이 엄숙하고 위와 아래가 화목할지라도 백 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실패가 있다면, 총명한 사람의 사려는 아니겠지요? 과거의 것에 따라 현재를 판단하면 현재는 과거와 똑같이 될 것입니다. 그대가 태부에게 나아가 중언하는 것을 제외하고, 누가 또 말을 다할 자가 있겠습니까! 군사를 돌려 농업을 발전시키고, 은덕을 베푸는 일에 힘쓰고, 수년 이내에 동쪽 오와 서쪽 촉이 함께 병사를 일으켜도 확실히 늦지 않을 것입니다. 깊이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내용을 보면 제갈첨에게 제갈각의 북벌을 말려야한다고 역설하는게 확연하다. 장억의 편지 중 말미구절의 "수년 이내에 동쪽 오와 서쪽 촉이 함께 병사를 일으켜도 확실히 늦지 않을 것입니다"를 참고하면 제갈각의 북벌 자체를 뜬금없어서 반대하기 보다는 현재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반대한다는 느낌을 팍팍 내는데 당시 대장군 비의가 한수에서 곽순에게 암살당한터라 촉한은 이전같은 대규모 병력운용으로 제갈각을 지원하기 어려워서 말리려한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있다.

제갈첨이 제갈각에게 서신을 보냈으리라 예상되지만 그 서신 전문은 커녕 보낸 여부 자체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한진춘추』에서는 제갈각이 비의의 뒤를 이은 강유에게 유세하면서 보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옛 사람이 말하길, 성인도 때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으나, 때가 이르면 또한 놓치지 않는다고 하였소. 지금 적의 정치가 일개 집안(私門=사마씨집안)으로 넘어가, 안팎이 (서로) 의심하고 있으며, 병사는 밖에서 꺾이고 백성은 안에서 원망하여, 조조 이래로 그 망하는 형세가 지금같은 적이 없었소. 만약 크게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벌하여, 오(吳)로 하여금 그 동쪽을 공격하게 하고, 한(漢=蜀)으로 하여금 그 서쪽을 공격하게 하면, 그들이 서쪽을 구원하면 동쪽이 빌 것이고, 동쪽을 중히 여기면 서쪽이 가벼워질 것이니, 단련된 군대로 적의 허하고 가벼운 틈을 탄다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소"

강유는 이를 따라서 같이 북벌에 나섰다.

3.2.2.3. 합비신성을 포위하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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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비신성의 위치.
253년 3월, 제갈각은 20만의 대군을 발동해서 위에 다시 쳐들어갔다. 등윤을 도하독으로 삼아서 유수의 업무를 장악하고 통솔하게 했다. 도하독이 건업에서 군사 업무를 장관하게 하는 직책임을 고려하면 후방을 사실상 등윤에게 맡긴 것이다. 촉한의 강유 또한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석영을 나와서 적도를 포위했다.

「제갈각전」에 의하면 20만이나 징발했기에 백성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고 제갈각은 인심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군사적 위업과 선치로 쌓은 인기가 전초부터 뒤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출병해서는 본래의 계획마저 어그러뜨리고 만다.

애초에 제갈각은 회수 강역의 백성들을 몰아내기 위해 회남 깊숙이 진공했으나, 제장 중 한 명이 제갈각에게 간언했다.

"지금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로 깊이 들어왔으므로 이 강역에 있는 백성들은 반드시 서로서로 이끌면서 멀리 도망하였을 것이니, 군사들은 수고롭게 되고 공로는 적어질까 걱정입니다. 신성을 포위하는데 그치는 것만 못하니, 신성이 곤란하게 되면 구원병이 반드시 도착할 것이고, 도착하여 이를 도모한다면 이에 크게 승리할 것입니다.[74]

즉, 괜히 깊이 들어가 군사력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물량의 우세를 살려 가까운 합비신성을 집중 포위하면서 이를 구원하러 온 위군을 격파하자는, 최대한 안정적인 공략법을 피력한 것. 적이 신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20만의 대군에게 먼저 선공격을 하는게 필수인만큼 합비신성을 때맞춰 함락시켜서 반격을 펼친다면 확실히 좋은 전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이 전략은 두고두고 오군의 발목을 잡는다. 제갈각은 이 의견을 취해 회남으로 들어갔던 군대를 물려 신성을 포위했다(「제갈각전」).

전번에 제갈각의 자그마한 도발로 시작되었던 동흥제 전투와 대국 위나라조차도 20만을 동원하는 제갈각의 북벌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강유가 수만을 거느리고 적도를 포위하고 있었으며 20만의 대군은 위나라에서도 쉽게 동원하기 어려운 숫자였다. 『진서』 「경제기」에서는 이 혼란을 생생하게 기록했는데 위의 조정에서는 회수와 사수를 도강해 서주에 진입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강구마다 병력을 배치하자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그러나 대장군 사마사는 반대하고 다른 의견을 냈다.

“제갈각은 오나라에서 새로 정권을 얻었으니, 한 때의 이익을 구하고자 하여 합비(合肥)에 병사를 아울러서(모아서) 요행[萬一]을 바랄 것인데, 어느 겨를에 청주(青州)와 서주(徐州)의 근심이 되겠소. 또한 수구(水口)는 많으니[非一], 많은 곳을 지키면 군사를 많이 써야 하고, 적은 곳을 지키면 도적[寇-제갈각의 군사를 말함]을 제압하기에 부족하오.”

사마사는 제갈각이 곧장 강북을 침공하기보다는 합비를 먼저 공략하려 들 것이라 예견한 것이다. 그리고 사마사의 예견대로 제갈각의 대군은 합비신성을 포위했다. 인근 병력으로는 제갈각의 대군을 막아낼 수 없는만큼 사마사는 곧장 태위 사마부에게 20만의 대군을 맡겨서 합비로 향하게 했다.

사마사는 우송에게 물었다.

지금 동쪽서쪽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고 이 두 곳이 다급하게 되었는데, 제장들의 의지가 저하되어 있으니[75]

이를 어떻게 해야 하오?"

우송이 말했다.

"옛날에 주아부가 창읍의 성벽을 굳게 지키자, 오나라와 초나라는 스스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일에는 약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것이 있으니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제갈각은 그들의 정예부대를 모두 모아서 왔으므로 흉포하다 할 것인데, 가만히 앉아 신성을 지키면서 우리 군사를 끌어내어 한 번 전투를 하려고 할 뿐입니다. 만약에 성을 공격하여도 함락되지 아니하고, 전투하기를 청하여도 할 수 없게 되면 많은 군사들은 오래 있게 되어 피로해져서 형세로 보아 장차 스스로 달아나게 될 것이고, 제장들이 지름길로 가지 않는 것이 공에게 유리할 것입니다.

강유는 많은 군사를 가지고 있으나 현군[76]

으로 제갈각에게 호응하여 우리의 보리를 빼앗아 먹으려는 것이지 깊은 뿌리를 가진 구적은 아닙니다. 또 우리가 동쪽에서 힘을 모으면 서쪽이 반드시 텅 빌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로써 지름길로 나아간 것입니다. 지금 만약에 관중에 있는 여러 군대에게 배나 빨리 그곳으로 가게 하면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는데로 나가게 되어 거의 달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송은 오와 촉한의 양면공세로 조정이 혼란스러움에도 놀라울만큼 냉철한 분석을 통해 이 둘의 전략을 꿰뚫어서 거의 완벽한 파훼법을 생각해냈다. 비의사후 거의 급조된 강유의 북벌은 병력만 많지 군량이 적어서 오래 싸우기 어렵고 단지 제갈각에 모든 전력이 대오전선에 집중되어 있는 순간 습격한 것이었다. 우송은 오의 제장이 제갈각에게 말한 간언을 거의 그대로 옲은 셈인데 최종목표가 신성합비가 아닌 위의 주력과의 한타싸움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단지 지연전을 벌여서 오의 대군이 스스로 무너지도록 냅둬야한다는 의견을 냈다.

사마사는 우송의 간언에 감탄했다.

"훌륭한 말씀이오."

비교적 덜 알려진 간언이지만 동흥제 전투에 대한 훌륭한 대처법을 제시한 부하 또한 제갈각의 서주침공이 불가능함을 상기하며 제갈각의 동향과 목표에 대해서 말했다.

“회수와 바다(淮海)는 적군이 쉽게 병사를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또 옛날 손권(孫權)은 병사를 파견하여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풍랑으로 침몰하여 익사하였고, 거의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제갈각이 어떻게 근본이 되는 힘까지 기울여 운명을 용솟음치는 바다에 맡기고 승리를 얻기를 구했겠습니까? 제갈각은 평소 북과 수군의 별 볼일 없는 작은 장수만을 보내 바다에서 역류하여 회수(淮)로 들어가게 하여 청주와 서주(青徐)에 대해 시위운동을 하게하고, 제갈각 자신은 병사들을 모아 회남으로 향했을 뿐입니다.”

우송의 조언대로 양주방면으로 곽회와 진태가 전력을 이끌고 강유를 대적하자 강유는 적도의 포위를 풀고 진태가 낙문에 도착하자 강유는 양식이 떨어져서 후퇴할 뿐이었다.

사마사는 관구검에게 칙령을 내려서 병력들에게 스스로 지키도록 명하고 합비신성은 오나라에게 맡겼다. 위와의 한타싸움을 노린 제갈각의 계획은 한껏 꼬이기 시작했다.

3.2.2.4.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20만의 대군[편집]

우송의 혜안은 뛰어났지만 합비신성 입장에선 매우 안좋은 점이 하나 있었으니, 저 말은 곧 지원군 없이 고작 3천의 병력으로 20만의 대군을 알아서 막아야 했다는 것이다. 당시 합비신성을 지키는 인물은 양주의 아문장 장특이었다.

그래도 합비신성이 천혜의 요새이긴 했는지, 장특은 저 병력으로도 어떻게든 오나라의 대군을 90여일간 막아냈다.[77] 하지만 당연히 그 3천의 병력조차 전사자가 절반이 넘고 병자와 부상자가 넘쳐났다. 게다가 제갈각이 토산을 쌓아서 성을 공격하자 장특은 더 이상 성을 보호할 수 없을 것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장특은 제갈각 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나는 다시 싸울 마음이 없다. 그러나 우리 위의 법에는 공격을 받아서 백일이 넘었는데도 구원병이 오지 않게 되었다면 비록 항복을 하여도 그 집안 사람들이 연좌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적의 공격을 받은 이래로 90여 일이 지났고, 이 성 안에는 본래 4천여 명이 있었는데, 전사자가 이미 반을 넘겼지만 성이 비록 함락된다고 하여도 오히려 이 반쯤 남은 사람들은 항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돌아가서 서로 상의하여 좋은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해서 내일 일찍 명단을 보내겠고, 또한 인수를 버리는 것으로 신표를 삼겠다."

즉 항복할테니까 하루만 시간을 달라는 것. 그리고 그 증거로 인수를 던져서 오나라군에게 넘겼다. 오나라군은 장특의 말을 믿어주기로 하고 그의 인수는 줍지 않았다. 혹은 돌려주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항복한다는 건 장특의 페이크였고, 실제로는 밤을 새가며 집에 쓰던 나무까지 뜯어내가며 뚫린 부분을 메우고 이중으로 목책을 쌓아 성을 보수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만 싸우다가 죽을 뿐이다."

빡친 오나라군은 진격해서 합비신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킬 수 없었다.

때마침 큰 더위가 찾아오는 바람에 오나라 병사들은 피로해지고, 물을 마시고 설사하며 종기가 번져서 병든 사람이 군사중 반이 넘었다. 이중 죽거나 다친 사람이 땅에 즐비했다. 여러 군영의 관리들이 병자들이 많다고 제갈각에게 아룄으나 제갈각은 이들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 후로는 감히 제갈각에게 병자들에 대해서 보고하지 않았다.

제갈각은 속으로 실책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성이 함락되지 않은 것을 두고 수치스럽게 생각해서 분한 마음이 얼굴이 드러났다. 주이가 군사문제로 제갈각의 기분을 거스르니 제갈각은 즉시 그의 군사를 빼앗고 건업으로 되돌려보냈다. 도위 채림은 군사계책을 제갈각에게 자주 설명했으나 제갈각은 이를 채용하지 않았다. 채림은 위나라로 도망쳤다.

보면 알겠지만 제갈각이 마냥 멍청해서 장특에게 속았다고 하긴 힘들다. 이미 전세는 자명해서, 누가봐도 설마 하룻밤 시간을 벌자고 저런 수를 쓰겠나 싶고 또 그렇다 해도 고작 하룻밤 가지고 뭘 하겠냐 싶었을 것이다. 그저 장특이 진짜로 하룻밤 새에 저런 짓을 한 게 대단한 것일 뿐...[78] 제갈각의 진짜 실수는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포기해야 할 때를 놓치고 만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제장들은 제갈각의 군대가 피로한 것을 보고 비로소 문흠관구검이 이끄는 구원병을 진격시켰다.

253년 7월, 제갈각은 그제서야 현실을 직시하고 군사를 이끌고 퇴각했는데, 이미 병들고 다쳐 스스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병사가 많았다. 결국 다른 병사가 옮기다가 뒤쳐지고 버려져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엄청난 피해에 죽은 사람, 산 사람 모두 애통하였고 어른, 어린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슬피 부르짖었다.

그러나 제갈각은 겉으로는 태연자약했다. 심지어 한 달간 장강에 있는 섬에서 머물다가 심양현에서 둔전을 일으킬 생각을 했다고 「제갈각전」은 전한다. 즉, 대패를 겪고도 여전히 물러나긴 커녕 계속해보려 한 것이다. 대체 어떤 맥락에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인지 열전의 한계상 알기 어려우나 하여튼 간에 제대로 된 전투조차 못해본 채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감조차 없던 것으로 추정된다. 덕분에 사람들은 실망뿐만이 아니라 아예 제갈각에 대한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몇개월 전의 인기가 무색하게된 격이었다.

20만의 병력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보니 퇴각하라는 조서는 많은 반면 이동할 수 있는 전력은 한정되어 있었다. 덕분에 후퇴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오서』에서는 기술하지 않으나 「경제기」에 의하면 문흠은 합유를 점령해서 오군의 퇴로를 끊고 관구검에게 오군의 후방을 공략하게 했다고 한다. 제갈각은 두려워하는 마음에 조급히 후퇴하니 문흠이 제갈각군을 대파해서 무려 만명의 수급을 벴다고 한다. 순수한 사망자가 만명이라는 뜻은 사상자와 포로 등의 피해가 최소한 수만은 된다는 의미이다. 『자치통감』에서는 「경제기」의 다른 내용[79]을 인용했지만 문흠의 공격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으며, 「관구검전」은 물론 문흠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배송지주 『위서』조차도 해당 전공을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완전한 날조는 아니더라도 심하게 과장되어 있다고 볼 여지는 있다. 하지만 설령 문흠의 추격이 없었다 한들, 이미 신성 포위 시점에서 20만의 대군영 중 과반은 병 들고 죽은 자는 땅에 즐비했던 이 전쟁에서 제갈각이 역대급의 대패를 당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제갈각은 분명히 동흥제의 승리를 기점으로 교만해져서 위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오군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각은 '논의하는 글'에서 위의 어려운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해서 기다리기보다 빠른 시일내에 침공하는 것만이 위를 심히 곤란하게 만들 것이라 예견해서 주위의 만류에 불구하고 침공을 강행했다. 제갈각의 예상대로 촉한과 오가 동시에 침공하자 위는 크게 당황했고 조정에서는 모든 강구에 병력을 두어야한다는 황당한 의견을 상당히 진지하게 제기했다. 그러나 제갈각에게는 불운하게도 우송부하가 제갈각이 위와의 한타싸움을 의도했음을 한눈에 꿰뚫어봤다. 제갈각은 사마사가 사마의의 나약한 아들이라 여겼지만 그가 우송의 간언에 따라서 제갈각 입장에서 최악의 전략을 제대로 택한 셈이었다. 거기다 하다못해 합비신성이라도 얻었으면 좋으련만 이마저도 장특의 필사적인 수비로 좌절되면서 아무런 성과없이 병력손실만 이루며, 결국 20만의 대군을 동원한 제갈각 희대의 도박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지략가로써의 제갈각은 당대 제일이었을지 몰라도 대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의 역할은 어울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합비신성 전투에서의 패배가 제갈각의 몰락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았다. 위의 사마사도 동흥의 패배에 불구하고 원만한 수습을 통해 합비신성의 승리를 거두지 않았던가? 그러나 성공가도의 인생을 살아오며 동흥제 전투로 교만해질대로 교만해진 제갈각은 이 패배를 곱게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 마디로, 대패보다는 대패 후에 보여준 리더로서의 책임감 부재야말로 그의 몰락의 기폭제였다.

3.2.3. 외전: "제갈각은 몰락할 것이다!"[편집]


당대에도 제갈각의 교만한 행보는 잘 알려졌던 모양인지, 제갈각의 몰락을 예견하는 일화들이 제법 된다. 장집의 경우에는 동흥제 전투를 기점으로 잡고 있고 아버지 제갈근은 아예 어린 시절'부터 집안을 망치리라 여겼다.

3.2.3.1. 장집의 예언[편집]

『위서』 「장기전」에 기재된 배송지주 『위략』에서 전해지는 일화다.

장집은 자주 위나라를 위해 촉오의 공격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어느 날 사마사와의 문답타임을 가졌는데, 제갈각이 동흥제 전투에서 이겼으나[80] 장집은 곧 살해될 것이라 예언했다. 사마사가 그 까닭을 묻자 장집이 말했다.

"위광은 그 군주를 떨치고, 공적은 한 나라를 덮고 있습니다. 죽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합비신성 전투에서 패하자 오나라에서 제갈각을 죽였다.

3.2.3.2. 등애의 예언[편집]

『위서』 「등애전」 본전에서 기록된 일화다.

제갈각이 합비신성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나라로 돌아갔다.

그러자 등애는 사마사에게 말했다.

"손권은 이미 죽었고, 대신들은 새로운 군왕에게 아직 의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나라의 명가와 호족은 모두 자기의 사병을 갖고 있으므로 병사의 세력에 의지하면 제위를 찬탈하기에 충분합니다.

제갈각은 방금 국정을 담당하였고, 내부에는 아직 걸주가 없습니다. 그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어루만져 근본을 공고하게 할 생각은 못하고 외부의 일로 바쁘며, 그 백성들을 잔혹하게 사용하고, 나라의 전 병력으로 위나라의 견고한 성을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여 죽은 사람이 만여 명이나 되고, 화를 싣고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제갈각이 죄를 받을 날인 것입니다. 옛날에 자서, 오기, 상앙, 악의 등은 모두 당시의 군주에게 임용되었지만, 군주가 죽자 실각했습니다. 더욱이 제갈각의 재능은 네 명의 현인에 미치지 못하고, 큰 재난에 대한 근심도 없으니, 그의 멸망은 기다릴 만합니다."

그리고 등애가 예견했듯이 제갈각은 곧 주살되었다.

3.2.3.3. 제갈근과 장승의 예견[편집]

『자치통감』 76권에서 서술되는 일화다.[81] 앞서 언급한 단양 평전 관련으로 「제갈각전」에 있는 평가와 다르다.

어려서부터 제갈각이 신동으로 이름을 떨친 덕분에 손권은 제갈각을 뛰어난 그릇이라 여겼다. 그러나 아버지 제갈근은 언제나 걱정하며 말했다.

"집안을 보존하지 못할 장본인이다."[82]

제갈근의 친구 분위장군 장승도 제갈각이 제갈씨 집안을 패망하리라 여겼다고 한다.[83]


3.2.3.4. 섭우의 예언[편집]

『오서』 「제갈각전」에서 전해지는 일화다.

합비신성 전투에서 패배한 제갈각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섭우는 제갈각이 곧 죽을 것을 알고 등윤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람이 세력이 강성할 때는 냇물과 산의 근본을 뽑을 수 있지만 하루 아침에 실패하여 곤경에 처했을 때는 사람들의 감정이 각양각색이 됩니다. 이런 일을 말하면 슬퍼 탄식하게 됩니다."

과연 제갈각은 섭우의 예언대로 손준에게 주살당했다.

3.3. 몰락을 재촉하다[편집]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인데, 합비신성 전투에서 패한 제갈각은 동흥제 전투에서 패한 사마사와 정반대의 조치를 취한다. 바로 패배의 원인을 본인이 아닌 남에게 전가하는 것이었다.

253년 8월, 제갈각군이 끝내 건업에 돌아왔다. 병사를 배열해서 관소로 돌아온 제갈각은 중서령 손묵을 불렀다. 제갈각은 사나운 목소리로 손묵을 질책했다.

"당신들은 어떻게 감히 망녕되게도 몇 차례나 조서를 작성했소?"

오군의 후퇴가 극악으로 느려진데 있어서 수많은 후퇴조서가 한꺼번에 도착해서 후퇴로가 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를 조율해야하는 임무는 총사령관인 제갈각에게 있는 바였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에도 결국 일이 꼬이니 손묵을 질책한 것이다. 손묵은 두려워하며 병을 핑계로 집으로 돌아갔다.

전투에서 돌아온 제갈각은 오히려 선조[84]에서 상주하며 임명한 관원들을 일제히 파면시키고 다시 선발했다. 본인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 제갈각은 관원들을 자주 책망하고 죄를 주기 일쑤였다. 제갈각을 만나는 사람마다 놀라서 숨을 죽이지 않는 인물이 없었다. 또한 숙위를 바꿔서 본인과 친한 인물을 임용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제갈각은 병사들을 다시 무장시키고 청주와 서주를 다시 공격하려고 했다. 선치와 동흥에서의 승리로 절정에 이르던 제갈각의 인기는 곤두박질치고 백성은 물론 대신들마저 제갈각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이 일련의 행동은 앞서 말했듯이 사마사의 행동과 상반된다. 사마사는 최종적으로 패전의 책임이 본인에게 있음을 인정해서 형식적인 것이었을지언정 자신의 작위를 한직급 강등하고, 동생 사마소를 처벌하는 것 외에는 부하들에 대한 처벌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덕분에 사마사는 부하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패전에도 불구하고 권위가 심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 비해 제갈각은 반대로 패전의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며 오히려 적반하장의 태세로 위엄을 되찾기 위해 죄없는 사람을 꾸짖고 오히려 친한 사람을 마음대로 임용하는 등 부정부패를 행한데다가 한 술 더 떠서 다시 전쟁을 준비했다. 본인의 잘못을 시인해서 스스로 관직을 깎거나 권위를 포기하는 행동을 보여도 지지도 하락은 피할 수 없는 부분인데 거의 자폭을 목표로 둔 듯한 제갈각의 일련의 행동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흔히 추측하기로는 성공가도의 인생을 살아온 제갈각이 합비신성의 패배를 결코 인정할 수 없어서 거의 일련의 멘탈붕괴 때문에 폭주하기 시작했고, 다시 한 번 동흥에서처럼 승리를 쟁취해서 지지도를 올리려 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게 실로 제갈각의 계획이었다면 교만해질대로 교만해진 상태에서의 대패는 정치인이자 사령관이자 지략가인 제갈각을 완전히 망가뜨린 셈이었다. 이궁지쟁 당시 살아남아 베테랑 정치인으로의 기량을 증명하고 여러 번 날카로운 식견을 선보이며 동흥제 전투의 승리를 이끈 명신 제갈각은 이렇게 사라졌다. 끝에는 더 이상 처신이고 뭐고 할 생각없이 권위로 밀어붙이는 방법밖에 모르는 찌질이만이 남은 격이었다.

허나 대부분 호족들로 이루어진 오나라 조정은 외부인 제갈각의 폭주를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계속 밀어붙일 뿐인 제갈각의 폭주는 마치 꾹꾹 눌려진 스프링처럼 이제 반동을 맛봐야했다. 그 반동을 주도한 인물은 본인을 탁고대신으로 추천한 손준이었다.

3.4. 253년: 손준에 의한 주살[편집]


손준은 대부분 백성들이 원망하는데다가 많은 이들이 제갈각을 싫어하기 때문에 손량에게 제갈각이 변란을 일으키려한다고 고했다.

10월, 손준과 손량은 제갈각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했는데, 계책의 일환으로 연회를 베풀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갈각을 이 연회로 초청했다.

「제갈각전」에 의하면 제갈각도 낌새가 상당히 이상했던 모양이다. 손량과 만나기 전날밤, 제갈각은 정신이 어지러운 나머지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아침이 밝아서 제갈각은 세수하려 했으나 물에서 비린내가 난다는 소리를 들었다. 시종들에게서 받은 의복에서도 역한 냄새가 났다. 제갈각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물과 옷을 바꿨는데 역한 냄새는 여전했다고 한다.

제갈각은 단장을 마치고 걸어나오자 집안에서 기르는 개가 제갈각의 옷을 물고서 가는 것을 놓아주지 않았다. 제갈각은 이를 보고 말했다.

"개가 나를 가지 못하게 하는구나."

그러고선 다시 돌아와서 앉았다. 다시 일어나자 그 개는 다시 제갈각의 옷을 물었다. 제갈각은 시종에게 개를 쫓도록 명하고 마침내 수레에 탔다.

「제갈각전」에서는 과거의 요상한 사건들까지 수록하는데, 예전에 제갈각이 회남으로 출병할 당시[85]효자가 상복을 입고 제갈각의 안방에 들어와 있었다. 시종들이 제갈각에게 이 일을 고하자 제갈각은 효자를 밖으로 쫓아내라고 문책했다. 효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밖에 서있던 수비병들도 효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해서 이 일을 매우 요상하게 생각했다. 제갈각이 밖에 나간 후[86] 관청의 대들보의 중간이 부러졌다. 이 또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신성에서 출발해서 동흥에서 머물고 있는데 흰 무지개가 제갈각의 배에서 나타났으며 장릉[87]에서 제사지낼 때도 흰 무지개가 제갈각의 수레를 애워쌓았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이 일화들을 워낙 요상하게 여겼는지 『자치통감』에서는 단순히 "집안에서도 요괴한 일이 생겨서 제갈각은 의심을 품었다"고만 서술한다. 이게 야사집에 나온 일화도 아니고, 『정사 삼국지』같은 상당히 신뢰도 높은 역사서의 본전에서 나온 일화치곤 상당히 괴상한 편이다.

제갈각은 손량을 알현하기 위해서 수레를 궁궐 문앞에 멈췄다. 손준은 이미 휘장 내에 병사들을 매복시켜놨기 때문에 제갈각이 불시에 들어와 일이 탄로날까 두려워 직접 나서서 제갈각에게 말했다.

"사군께서 만일 귀한 몸이 불편하시다면, 이후에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주상께 상세히 보고하겠습니다."

손준은 제갈각에게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해서 그의 의중을 떠본 것이다. 그러나 제갈각은 답했다.

"당연히 저는 들어갈 것입니다."

산기상시 장약주은의 밀서가 제갈각에게 전해졌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오늘 평상시와 다르게 진술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의심스럽습니다."

제갈각은 그제서야 손준의 음모를 깨닫고 떠났다. 아직 궁궐을 벗어나기 전에 등윤을 만났다. 제갈각은 등윤에게 말했다.

"갑자기 복통이 있어서 조정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손준의 음모를 모르고 있던 등윤은 제갈각에게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당신은 행군에서 돌아와 아직 만나지 않았으니, 오늘 주상께서 주연을 베풀어 당신을 초청하였고 당신은 이미 문까지 이르렀으므로, 마땅히 힘을 다해서 가야합니다."

제갈각은 잠시 주저했으나 이내 궁궐에 다시 들어갔다. 제갈각은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로 손량에게 인사하고[88] 자리에 앉았다. 술상이 차려지자 제갈각은 의심을 풀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손준은 제갈각에게 말했다.

"사군의 질병이 아직 낫지 않았으니, 당연히 늘상 마시는 약주가 있을 것이니 직접 그것을 마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갈각은 안정하게 되었으며 이미 준비된 술을 마셨다.

「제갈각전」 본전을 읽어보면 위와 같이 등윤이 본의 아니게 제갈각을 연회로 끌고간 것처럼 서술되지만 배송지가 주석으로 첨부한 『오력』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묘사한다. 『오력』에 의하면 제갈각은 등윤에게 장약과 주은의 밀서를 보여주고 오히려 등윤이 제갈각에게 돌아가자고 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갈각은 반대하며 말했다.

"손준(孫峻)같은 어린 놈이 무엇을 할 수 있겠소! 다만 술과 음식을 통해서 사람을 해칠까가 두려울 뿐이오."[89]


"어린애 같은 녀석들이 무얼 어쩌겠는가? 바로 술이나 식사를 통하여 사람들을 중독시킬까만 걱정할 뿐이오."[90]

그러곤 약주를 가지고 들어갔다고 한다. 즉, 『오력』에 의하면 제갈각은 등윤의 제안까지 뿌리친 채로 본인의 명을 제촉한 셈이다. 이미 준비한 약주를 가졌다는 부분은 본전과도 내용[91]이 잘 맞물리는 편이고 제갈각의 안하무인 성격과 상식적으로 장약과 주은의 밀서를 받았음에도 등윤의 설득에 연회에 들어간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오력』의 내용을 신뢰하는 듯하다. 『자치통감』에서도 「제갈각전」 본전의 내용보다는 『오력』의 내용을 채택했다.

동진 시대 사람 손성은 『오력』의 내용을 옹호하며 무모한 제갈각의 행동에 대해 평했다.

제갈각은 등윤과 친해 정이 두텁고, 장약 등이 소를 올린 것은, 심상치 않은 큰 일이라, 정세상 응당 등윤에게 보여줘서, 함께 안위를 모의해야 했다. 그러나 제갈각의 천성이 강하고 사나우며, 게다가 손준을 본디 업신여겨, 스스로 믿지 않았기에 들어간 것인데, 어찌 등윤이 조금 권했다고 해서, 곧 이 때문에 화를 무릅썼겠는가? 본전보다 오력이 낫다.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이미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갔다. 손량이 마침내 물러나자 손준 또한 일어서서 측간에서 긴 옷을 벗고 짧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손준은 나오면서 제갈각을 꾸짖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렸는데 제갈각을 체포하라."

손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제갈각은 일어나서 칼을 뽑으려 했지만 손준의 칼이 교차해서 내려 제갈각을 여러차례 찔렀다. 제갈각을 호위하던 장약은 옆에서 손준을 찔렀는데, 손준의 왼쪽 손에 상처를 입히는데 성공했지만 손준은 장약을 내려쳐서 오른쪽 어깨를 잘랐다. 제갈각을 호위하던 병사들이 모두 달려나가 전당으로 올라오자 손준은 이들에게 말했다.

"체포하려던 사람은 제갈각이다. 지금 이미 죽었다."

병사들에게 칼을 다시 집어넣으라 명령한 손준은 주변을 치우고 다시 술을 마셨다. 제갈각의 시체는 풀자리로 싸매고 대나무를 허리에 묶어서 석자강의 공동묘지에 던졌다.

향년 51세. 제대로 권력을 잡은지 2년도 안돼서 맞이한 비참한 말로였다.

3.5. 사후[편집]


제갈각이 주살당했는데 그의 인척들을 건드리지 않을만큼 손준은 인망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제갈각의 차남 장수교위 제갈송과 삼남 보병교위 제갈건은 어머니를 수레에 태우고 도망쳤다. 손준은 기독 유승을 파견해서 백도까지 추격해서 제갈송을 죽였다. 제갈건은 위나라로 망명하려 했지만 수십 리를 도망간 이후에 추격병에게 체포되었다.[92] 제갈송의 경우에는 아버지 제갈각의 행동을 매우 걱정해서 여러차례 간언했지만 제갈각이 받아들이지 않았서 매우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

손준은 무난독 시관에게 명을 내려서 제갈각의 동생 공안독 제갈융을 체포하도록 명했다. 시관은 시적, 손일, 전희 등을 파견했다. 병사들이 이르었다는 소식을 듣자, 제갈융은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병사들이 성을 포위하자 제갈융은 약을 먹고 자살했다. 「강표전」에 의하면 제갈각의 주살에 앞서 공안에서 영험한 악어가 울음소리를 냈다고 한다. 당대 동요가 말하기를,

"흰 악어가 울고, 거북 등(背)은 평평하니, 남군의 성중은 오래 살 수 있지만, 지키다 죽으니 의를 저버리지 않지만 이룬 것이 없어라."

라 했다. 제갈각이 주살되자 제갈융은 금인장의 거북을 깎아서 복용하고 죽었다고 한다.

제갈융의 세 아들 모두 죽임당하고 제갈각의 외숙이자 도향후 장진, 주은 등의 삼족이 멸해졌다.

이로써 제갈각의 가문은 대가 끊겼다. 그러나 다행히도 제갈각의 동생 제갈교의 가족이 촉한에 남아있었기에 제갈각이 복권된 이후에 동오로 돌아와서 제갈근의 대를 이었다.

3.5.1. 외전: 제갈각의 시신을 수습하도록 요청하다[편집]


앞서 서술했듯이 제갈각의 시신은 제대로된 장례없이 석가장의 공동묘지에 버려졌다. 그러나 제갈각의 부하들이 모두 제갈각을 버린 것이 아니라서 장약주은만 해도 제갈각을 살리려 노력했다. 제갈각의 초라한 말로에 안타까움을 느낀 사람들도 많았던 모양이다.

임회 사람 장균은 제갈각이 황제의 명으로 주살당한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표문을 올려서 제갈각의 수신을 거두어 장사지내게 해달라고 빌었다.

"번개가 치고 우레 소리를 내는 것은 하루아침을 마칠 정도까지도 계속되지 못합니다. 큰 사람이 불고치고 지나가는 것이 하루 종일 계속되는 일도 아주 드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것을 뒤이어서 구름이 끼고 비가 와서 이것을 통하여 만물을 윤택하게 합니다.

이리하니 천지의 위엄이라도 늘 협진을 지나갈 수 없는 것이니, 제왕이 화를 내도 정리를 다 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은 미치고 어리석어서 기휘할 줄을 모르니 감히 파멸할 수도 있는 죄를 무릅쓰고 바람과 비와 같은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구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옛 태부 제갈각은 죄악을 많이 지어 스스로 이멸될 일을 자초하였고, 그의 아버지[93]

와 아들 세 사람의 목이 저자에 걸린지 여러 날 되었으며, 본 사람이 수만 명이고, 욕하는 소리는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나라의 큰 형벌로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장로와 아이들도 끝까지 다 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94]

사람의 정이란 많은 사물에 대하여 즐거움이 지극한데 이르면 애달파하는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갈각이 귀하고 왕성한 것을 보건대, 세상에서 그와 더불어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없어서 태보[95]

의 자리에 있으면서 몇 년의 세월을 지내왔으나 지금 주멸되고, 금수와 다를 바가 없게 되어 사람의 정리를 돌이켜보니, 아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미 죽은 사람은 흙과 마찬가지인데, 이를 뚫고 자르고 찌르는 것도 다시 덧붙일 것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스러운 조정에서는 건곤을 본받으셔서 노여워하는 것도 열흘을 넘기시지 마시고, 그의 향읍 사람들과 그의 옛 부하들에게 그의 시체를 수습하여 사오[96]

의 복장을 입히게 하시고, 세 치의 관[97]을 사용하도록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옛날에 항적이 빈장의 혜택을 받았고, 한신도 수렴의 은혜를 얻게 되었는데, 이것은 한고조가 신명 같은 명예를 드러낸 것입니다. 오직 폐하께서 삼황과 같은 어짊을 두텁게 내려주시고, 슬프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내려주셔서 나라의 은택이 죄를 짓고 죽은 해골에게까지 미치게 하시며, 다시금 그침 없는 은혜를 받아서 이 말이 먼 지역에까지 소문이 나게 하여 천하 사람들에게 권고하는 것이 어찌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난포는 명령을 위반하고 팽월에게 제시지냈는데, 신은 이것을 가만히 한스러워하면서 먼저 주상에게 청구하지를 아니하고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서 명예를 오로지 하였으니, 그가 주살되지 아니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실제 다행일 것입니다. 지금 신은 감히 어리석은 저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천자의 은혜가 내려지기를 삼가 엎드려 손으로 글을 써서 올립니다.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의견을 개진하여 보고드리오니 성스러운 밝으심으로 애달프게 살펴보아주시기를 빕니다."[98]


"신이 듣건데 우레가 울려도 온종일 지속되지 않으며 태풍이 불어도 종일 계속되는것은 드믈지만, 우레와 태풍을 이어 구름과 비가 있기 때문에 만물을 윤택하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와 같으면 천지의 위엄은 12일간 계속될수 없고 제왕의 노여움도 감정대로 처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신은 망녕되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꺼리는 것을 모르며 감히 집안과 자신을 파괴하고 멸망시킬 죄를 무릅쓰고 군왕의 비바람이 이르는 것과 같은 은택을 요청합니다. 엎드려 생각해보면, 태부 제갈각은 선친들이 남긴 훌륭한 공훈을 이었고 백부와 숙부들은 한왕조의 국운이 다하고 천하에 세 나라가 정립하여 나누어지자 세 방면에 의탁하여 모두 충성과 근면함을 이행했으며, 제왕의 사업을 융성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이어 받은 제갈각은 오나라에서 성장하고 오주의 교화에 훈도되어 영명하고 위대한 명성을 얻었으니, 오나라에 복무한 지 수십년이 되었지만 화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싹 튀우지 않았습니다. 선제께서는 이윤과 주공과 같은 중임을 그에게 주어 국가의 모든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제갈각의 평소 성격은 강직하고 괴팍하며, 교만하고 자부하며, 다른 사람을 능멸하여 국가 정권을 존경스럽게 지켜 국내를 안정되게 할수 없었고 공업을 세우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킨지 1년도 안되어 다시 출병하여 병사와 백성들을 헛되이 소모시키고 창고 속에 쌓아놓은 물자를 다 사용하여 텅 비게 하였습니다. 그는 독자적으로 정권을 잡아 관리들을 파면시키고 임용하는 일을 자기 생각대로 했으며, 형법에 의지해 백성들을 위협하였으므로 직위의 높고 낮음에 관련없이 말하지 못했습니다. 시중, 무위장군, 도향후 손준은 그와 함께 선제가 위탁한 조서를 받았는데 그의 간사하고 포악함이 나날이 더욱 심해짐을 보게 되자, 장차 천하를 뒤흔들어 놓고 사직을 기울여 위태롭게 하게 될 것을 걱정하였으며, 이 때문에 위세를 떨쳐 노여워하였으며 정성은 하늘을 관통하였습니다. 그는 신명보다 앞서 계획하고 지혜와 용맹은 형가나 섭정보다 백 배는 되어서 직접 날카로운 칼을 잡고 내전에서 제갈각의 목을 베어 버렸으니 공훈은 주허를 초과하고 동모를 넘었습니다. 나라의 큰 위해가 하루아침에 대대적으로 제거되었으며, 그의 머리를 말에 매달아 달리게 해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육군은 기뻐 뛰었고 일월은 광채를 더했으며 풍진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실제로 종묘의 신령이 하늘과 사람에게 나타난 징조인것입니다. 오늘 제갈각 부자 세명의 머리가 저자에 걸린지 며칠이나 되어 그것을 본자는 수만 명이나 되며 욕하는 소리는 바람을 만들었습니다. 국가의 큰 형벌에는 진동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늙은이든 어리이든 간에 모두 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만물을 관찰할 때 즐거움이 지극하면 슬픔이 생기게 되는데, 제갈각이 귀하고 흥성하여 세상에는 그와 견줄 만한 자가 없었으며 몸은 태보의 지위에 있으면서 여러 해를 지냈지만 오늘 주살되고 멸족되어 금수와 다름없이 되었습니다. 이런 정경을 보면 감정에 기복이 일어나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미 죽은 사람은 토양과 같은곳에 있어 파내어 찌르는 형벌을 다시 더할 수 없습니다. 성스런 조정에서는 천지를 본받아 노여움이 열흘을 넘지 않아 그의 고향에 있는 자나 과거의 부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병사들의 복장으로 거두어 염하도록 하고 3촌의 두께의 관으로 장례지내도록 원합니다. 옛날 항적은 예우받아 매장되는 은혜를 받았으며 한신은 거두어 염해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한고조는 신같이 밝은 명예를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오직 페하께서 삼황의 인덕을 발휘하여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드리워서 국가의 은택이 죄를 지은 시체 위에 더해져 또 다하지 않는 은혜를 받도록 하시고 이러한 은덕을 먼 곳까지 선양하여 천하 사람들을 징계하고 권면하시면 어찌 커다란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난포가 한고조의 명령을 어기고 팽월을 제사지냈을 때, 신은 마음속으로 한탄했었습니다. 이전에 주상에게 요청하는 일 없이 독단적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하였는데도 그가 주살되지 않은 것은 실로 요행일 뿐입니다. 지금 신은 감히 저의 어리석은 감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황상의 은혜를 나타내지 못하고 공손히 엎드려 글을 적어 생각한 것을 몽매하게 진술하였습니다. 성명한 주상께서 불쌍히 여겨 살펴보기를 희망합니다."[99]


이에 손량과 손준은 장균의 상소를 받아들여서 제갈각의 옛부하들이 제갈각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했다. 다행히도 석가장에서 제갈각의 시신을 찾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4. 손휴 시대 (258년~264년)[편집]



4.1. 258년: 복권되다[편집]


이러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제갈각이지만 다행히도 훗날 황제 손휴손침을 제거하면서 복권되었다.[100] 손휴는 제갈각, 등윤과 여거를 복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갈각(諸葛恪)·등윤(滕胤)·여거(呂據)는 죄가 없는데도 손준(峻)과 손침(綝) 형제에게 잔혹하게 살해되었으니 가슴이 아프다. 신속히 이들을 모두 이장시키고 각각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제갈각 등의 일에 연루되어 먼 곳으로 유배된 자들은 일체 불러 돌아오도록 하라."

그러나 『강표전』의 내용을 보면 손휴 또한 제갈각에 대해 껄끄럽게 생각했음이 확연하다.

제갈각이 복권된 이후, 조정의 신하들중에서 제갈각을 위해 공훈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야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박사 성충은 제갈각을 위해 비석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반대했다. 이에 손휴는 말했다.

“한여름에 군대를 출동시키고 병사들을 손상시켜 척촌(尺寸)의 공도 없으므로 그에게 재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린 군주를 보필하는 임무를 받고 어린아이의 손에 죽었으니 지혜롭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충의 의견이 옳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군사를 출동시켜서 사졸들을 다치게 하고도 한 치의 공로도 세우지 못하니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탁고의 책임을 받고도 무뢰배 녀석의 손에 죽었으니, 지혜가 있다고 할 수 없다."[101]


결국 성충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제갈각을 위한 비석이 세워지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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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갈자유지로'로 더 유명한데 驢는 '로'가 아닌 '려'로 읽는 게 맞다.[2] 한 20대로 추정된다.[3] 《三國志 卷64 吳書 諸葛恪傳》[4] '제갈자유지로'로 더 유명한데 驢는 '로'가 아닌 '려'로 읽는 게 맞다.[5] 그림 속의 한자는 '제갈각 득려', 즉 '제갈각이 당나귀를 얻다'이다.[6] 일전에 이 항목에서 기재된 파성넷본 번역은 "신의 부친은 일을 맡을 만한 자를 알지만 숙부는 모르기 때문에 뛰어난 것입니다."지만, "섬길 곳을 알지만"이 원뜻에 더욱 어울린다.[7] 손권의 술주정 중 하나인 술 권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다(...).[8] 옛날 조조가 쳐들어왔을 때 항복을 주장한 과거를 언급하며 비꼬는 말이다.[9] 『삼국지연의』를 번역한 『본삼국지』에서 발췌했다. 정사에서의 기록과 동일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번역이 더욱 매끄러움으로 항목에 기재한다.[10] 사실 오나라는 촉한에서 말을 수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나라의 말을 보관한다는 의미로 제갈각이 이렇게 말한 듯 하다.[11] 즉, 비의를 모욕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손권은 비의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었으므로 이 일화는 아마 비의와 손권과의 첫번째 만남이었을 때 벌어진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2] 비의 본인을 봉황에 비유하고 오나라 대신들은 당나귀에 비유해서 계속 먹기만하는 오나라 대신들을 조롱한 것이다. 아울러 손권은 먹는 것을 멈췄으니 당나귀가 아니라 기린에 비유되므로, 외교적으로 항의와 선 넘는 짓 사이에서 적절한 수준으로 대처한 것이다.[13] 輔吳. 장소가 보오장군의 위치에 있었음.[14] 무월은 "산월족을 불려들여 어루만지라는 의미다."[15] 병사들의 주둔지를 칭한다.[16] 당연한 얘기지만 한글 한정으로 동명이인이다. 대도독으로 유명한 주유의 이름은 瑜로 이 주유(周遺)와 다르다.[17] 제갈각 본인부터 갑병 4만을 얻을 수 있다는 포부를 외쳤는데 그중 일부분이라도 사병으로 거느리려 들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은 상상이다. 실제로도 그러한 바고.[18] 230년 제갈직과 위온이 이주와 단주 탐색에 실패하여 처형당했으나, 이 둘의 가문이 어찌되었는지는 기록에 없는 것으로 볼 때 멸문당한 것은 아닐 정황이 높다. 또한 단양 평정이 아무리 오래걸리더라도 241년에 제갈근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성패가 결론이 날 가능성이 훨씬 컸다. 단양 평정이 질질 끌리더라도 제갈각이 주장했던 3년 이내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손권이 못마땅해하거나, 손권은 이를 놔두더라도 제갈각이 가병을 거느리는 상황을 못마땅해 할 기성 호족 세력들의 견제로 인해) 손권이 이를 실패로 결정지으면 그만이었기 때문. 제갈근은 사망하는 해인 241년에도 번성 공략에 참여했을 정도면 234년 당시에는 정정했을 것이다. 즉, 단양 평정이 대실패로 끝나더라도 손권과 긴밀한 관계인 제갈근이 생존해있는 한 단양 평정의 성패만으로는 멸문을 언급할 정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제갈근은 최소 자신의 사후, 더 나아가서는 자신과 자신을 총애했던 손권의 사후 제갈각의 행보를 내다보고 예견을 했다는 가설이 성립하게 된다.[19] 만약에 제갈교가 제갈각의 최후를 예견했던 제갈근의 마지막 보험이었다 가정한다면 제갈근의 혜안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수준일 듯. 다만 제갈교가 제갈량의 양자가 된 시점은 234년의 단양평정보다 한참 전(제갈교의 생몰년은 204년 ~ 228년이며, 적자인 제갈첨의 출생년인 227년임을 감안하면 227년 이전으로 최소 7년 이상의 격차가 발생한다.)이라서 다소 무리가 있기는 하다.[20] 윗 내용에서 언급했듯이 손권과 제갈각간의 관계가 처음으로 삐걱거린 사례이며 사병을 얻어서 군벌화한 제갈각을 손권이 더 이상 편하게 보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21] 사실 정확히는 이궁지쟁 때 제갈각도 삐끗했다간 훅 갈 수 있었는데 처신을 잘해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이 더 타당하겠지만...[22] 위의 뜬금없는 육안 습격은 이런 기습중 하나로 보인다.[23] 「선제기」에서는 정확한 시점을 언급하지 않지만 「오주전」에서는 12월에 사마의가 서현에 당도했다고 서술하며 동일한 사건으로 보이므로 12월로 서술한다.[24] 누구를 칭하는 것인지 상당히 모호한 편이다. 경숙(敬叔)이란 이름이나 자를 가진 인물은 최소한 『정사 삼국지』에 등장하지 않는다. 위아설을 주창한 양자를 칭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그렇다면 양자를 칭할 것이지 양경숙이라고 언급하진 않았을 것이다. 전한시대 양웅도 후보긴하나 자가 자운이라 탈락. 바이두 백과에 의하면 동오의 관리라고 나온다.# [25] 다만 「화흠전」에서 아직 미번역된 배송지주 화교보서(華嶠譜叙)에서 경숙(敬叔)이 나오는데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26] 회계 사람으로, 오나라 황실 일족이 아니다.[27]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제갈각을 추천한 손준은 후일 제갈각을 직접 주살한다.[28] 「제갈각전」 본전에서는 간단하게 손권이 제갈각등에게 후사를 부탁했다고 서술하지만 배송지주로 달린 『오서』에서 더 자세한 정황이 기록되었다.[29] 계문자는 노나라의 대부인 계손행부며, 부자는 공자다. 여기서 언급하는 일화는 『논어』에 있다.[30] 전한의 여치가 아닌 여대를 칭한다.[31] 제갈각의 자.[32]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호삼성은 손준이 원래 제갈각을 추천한 인물이므로 원래 제갈각을 죽이고자하는 의도가 없었고, 제갈각이 마땅히 죽임당할 짓을 했기에 손준에게 죽었다고 해석했다.[33] 244년의 낙곡 전투의 일화를 언급한 것이다.[34] 권중달 교수의 주석에 의하면 장녕이 했다는 말은 『논어』에서 나오는 말이므로 정확히 공자의 말이고 장녕이 누군지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35] 문위는 비의의 자.[36] 사실 여대는 손패파의 일원이었던 인물인지라 제갈각 입장에서는 매우 고깝게 보였을 수도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손패파였던 자기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으니...[37] 손권은 교관이란 직책을 통해 관청의 문서를 조사해서 황제와 눈과 귀가 되도록 했는데 이를 시청이라 칭했다.[38] 이미 언급한 바지만 한창 제갈량이 북벌을 지휘했던 시점에 칭했던 촉한의 연호와 동일하다.[39] (정작 제일 중요한 제 5차 북벌에서는 합비에 꼴아박아 다들 속터지게 만들었지만.[40] 이전까지는 별 성과를 못내기는 했어도 큰 피해를 입은 적은 없었다.[41] 왕창의 자.[42] 관구검의 자.[43] 「조방전」에 배송지주로 인용된 『한진춘추』에 의하면 사마사가 이 간언을 택했다는데 같은 『한진춘추』의 다른 구절을 보면 오히려 사마사가 제갈탄의 간언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하들을 문책한 기록이 나온다. 이런 상충되는 부분이 같은 『한진춘추』내에서 있다는게 문제점인데 정황상 사마사는 제갈탄의 간언을 따랐으나 나중에 마음을 바꿨다고 보는게 맞는 듯하다. 『자치통감』의 경우에는 『한진춘추』로부터 인용된 제갈탄의 간언과 다른 기록에서 출제된 부하의 간언을 수록하고 사마사가 둘 다 따르지 않은 것으로 기록한다. 이 항목은 『자치통감』의 정리에 의거해서 작성한다.[44] 『위서』 「부하전」에서 발췌한 기록으로 아래에 『자치통감』에서 발췌한 사마표의 기록으로 추측되는 발언이 더욱 자세하지만 이 또한 번쾌에 대한 언급등이 내제되어 있음으로 같이 기재한다.[45] 즉, 왕창, 호준, 관구검의 전략을 부하가 모두 읊은 셈인데 누가 누구 것인지 구분하지 않았기에 헷갈린다. 삼국전투기의 경우에도 각 인물의 전략을 구분해서 그리지 않았다. 쉽게 말해, 알 수 없다.[46] 적벽대전으로부터 55년이었는데 아마 이를 언급한 것이다.[47] 여기서 칭하는 물러나는 것은 오군이고 둔전하는 군대는 위군이다.[48] 둔전할 영토를 점거하는 것을 뜻한다.[49]손자병법』에서 나온 말이다.[50] 『위서』 「부하전」에 배송지주로 수록되어 있는 사마표의 『전략』 에서 발취한 부하의 간언이지만 해당 부분이 아직 미번역이기에 대신해서 『자치통감』에 수록된 부하의 발언을 인용한다. 다만 원래 기록에 비해서 이래저래 편집된 부분이 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자면 본래 사마표의 기록에 수록되어 있는 번쾌이신의 일화가 없어졌다.[51] 후일 터지는 동흥제 전투만해도 제갈각이 고작 4만을 투입하는 상황에서 양주 방면에서만 7만을 출격했고 신성 합비 전투에서도 오나라가 20만의 대군을 출격하자 위도 20만을 양주 방면으로 보내고 동시 촉한까지 대처했다.[52] 동관의 부근에 위치한 지명[53] 허나 역으로 방어의 입장에 험한 지형을 낀데다가 함정으로 위군이 그대로 들어가서 퇴로를 끊는 것만으로도 수만의 피해를 초래한 동흥제 전투에 비하면 강유의 도서 전투는 난이도 면에서 넘사벽급의 어려움을 자랑했다. 피해와 요구된 물자 자체로만 비교하자면 동흥제 전투의 우위라 할 수 있지만 난이도라는 측면에서는 도서 전투가 넘사벽이라 봐도 무방하다.[54] 권중달 교수 역 자치통감 주석에 따르면 '대체로 이때에 오나라의 인구를 가지고 볼 때에 20만명이란 인구 10명 가운데 두 명을 군사로 징집한 셈이며 이것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인원이었다.'라고 했다.[55] 근데 「제갈탄전」에 의하면 제갈탄은 제갈각에게 패배했기에 진동 장군에서 진남 장군으로 전임되었다고 서술하고 임지 또한 관구검과 맞바꿨다고 한다. 소소한 처벌을 가하는 것이야 말이 되긴 하는데 웃긴 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한진춘추』내에서 제갈탄의 전략을 따랐는지에 대한 여부가 엇갈리는 상황에 사마사가 제갈탄의 간언을 따르지 않았다고 부하들을 문책했다는 점은 확실한데도 정작 올바른 계책을 냈다는 제갈탄을 처벌했다는 것은... 이래저래 정사 삼국지 최고 미스테리중 하나라 할 수 있다.[56] 경승은 유표의 자.[57] 『오서』 「제갈각전」에서 발췌한 발언으로 아래의 『자치통감』의 내용과 일맥상통해보이지만 더욱 길다.[58] 251년의 왕릉의 난을 언급한 것이다.[59] 호삼성은 이 구절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제갈각은 스스로 그 재주로는 충분히 위나라를 처리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적을 후순들에게 넘겨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을 숙부인 제갈량과 비교하여 어떠하다고 생각하였을까? 제갈량은 여러 번 군사를 내어 위나라를 공격하였지만 매번 한 주를 가지고는 적과 오래 지탱하기가 어렵다고 말하였으며, 끝내는 성공하지 못하고 뜻을 품고 죽었다. 제갈각은 제갈량과 같은 재주를 못가진 채 그 백성들을 가볍게 이용하려고 하였으니 오나라를 강하게 만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죽고, 그 집안도 멸망시키기 충분하였다.' 권중달 교수의 번역으로부터 발췌했다.[60] 제갈량의 『후출사표』를 인용한 것이다. 이 구절은 『후출사표』 위작설의 가장 강력한 증거중 하나다(...).[61] 『자치통감』에서 발췌한 제갈각의 문장으로 「제갈각전」의 내용과 전체적으로 유사하지만 더욱 간결하며 내용이 여러모로 편집된 느낌이 강하다. 객관성을 위해 둘 다 이 항목에 기재한다.[62] 주유는 실현 가능성은 둘째치고 군사적으로 서촉을 쳐서 천하를 이분하려고 애썼고, 노숙은 대놓고 "전하께서 천하를 얻으시고 천자의 신분으로 절 맞이하여 주신다면 그때 만족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제갈각의 입장은 오래전 이들 오나라의 수뇌부가 내세웠다가 손권 후반기에 애매해졌던 천하통일의 의지를 다시 천명한 것이다. 오히려 오나라가 그냥 걸어잠그고 수비만 하면 되고 천하통일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게 행동했다고 착각하는거야말로 게임을 통해 중국 삼국시대를 접한 현대인의 시선일 뿐, 정작 당사자들은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셈이다.[63] 할거해도 꽤 간다는 예로 동진을 예시로 드는데 그때 오래간거야 북쪽 국가들이 지들끼리도 싸우느라 정신없었거나 북쪽을 견제하느라 내부 역량이 없었기에 가능했던것이었다. 그런데도 비수대전처럼 멸망의 위기에 여러번 직면해야 했고 동진 역시 끊임없이 북벌로 이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이미 굳건한 하나의 왕조였던 위나라와는 상황이 여러모로 다르다. 그나마 가능했던게 본문에 제갈각이 언급한 조조 위공, 위왕 즉위 이후 위나라의 내란과 북방 이민족간의 연계인데 위가 무너지고 유비가 맹공세를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 오나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구도를 고착시켰으니... 실제로 이후 촉이나 오가 몇번의 대규모의 원정을 강행한 이유도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위나라와의 격차는 더더욱 커진다"라는 예측 때문이고 중원을 먹지 못하거나, 대등한 힘을 갖추지 못하면 이게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지형의 이점이야, 나중에 오는 지형의 이점이 없어서 망했겠는가.[64] "그러나 이제 그들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조조 당시의 병사가 많았지만 오늘에는 다 없어지고, 그 후에 난 사람들은 아직 다 자라지를 아니하였으니 바로 적들은 쇠약하고 젊어서 아직은 왕성하지 못한 시기요"[65] "만일 적의 인구가 배로 증가하고 우리 병사가 절반으로 손실된다면 비록 또 이윤이나 관중이 계획할지라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66] "만일 사람들의 감정에 순응하여 편안함을 훔치려는 계획을 품고 있으면서 장강은 험난하여 대대로 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위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논의하지 않고 오늘의 상황으로써 그 이후의 변화를 경시한다면 이것이 내가 길게 탄식하는 까닭일 것이다"[67] "그의 아들은 어리고 약한데 독자적으로 대임을 맡고 있으므로 비록 지혜와 계책이 있는 선비가 있을지라도 임용할수 없을것이다."/"그의 아들은 어리고 약하지만 오직 저 사람이 담당하던 큰 임무를 맡았으니, 비록 지모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이를 시행하여 쓰지는 아니하였소."[68] "오늘 나 제갈각은 신하의 재능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위대한 오에서 소하와 곽광의 임무를 받았으며 지혜는 일반 사람들과 같고 생각하는 것은 먼 곳 까지 가지 못하지만 만일 오늘 국가를 위해 변방 지역을 개척하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나이를 먹을 것이고 그대 원수와 적은 더욱 강대해져 목을 잘라 잘못을 사죄하려고 해도 어찌 소용이 있겠는가?"[69] 근래에 만총, 왕릉, 손례 등 대오전쟁에서 활약한 지휘관들이 모두 죽어서 호준, 제갈탄, 왕창 등이 새로 부임한 상황이었다.[70] 죽은 지 1년도 넘지 않는 황제를 칭한다. 손권을 언급한 것이다.[71] 동흥제 전투 뿐만이 아니라 손권의 능묘를 만드는 노역을 말한다.[72] 주무왕(周武王)이 죽고 주공 단(周公 旦)이 섭정이 되자, 무왕의 동생인 채숙은 형제들인 관숙, 곽숙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73] 한무제(漢武帝)는 병이 위독하자 곽광(霍光)을 불러 새 황제를 보필할 것을 당부했다. 이후 어린 소제(昭帝)가 즉위했는데 당시의 조정 대사는 곽광이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상관걸은 곽광이 모든 권력을 쥐어 자신이 허수아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황제의 형인 연왕(燕王) 유단과 모의해 곽광을 모반죄에 엮으려 했고, 실패하자 또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모두 소제의 통찰력으로 인해 구원받게 되었다.[74] 권중달 교수에 의하면 제갈탄이 사마사에게 했던 간언과 맥락상 동일하다고 한다.[75] 어찌보면 타이밍 자체는 제갈각이 매우 맞췄다고 볼만한 부분. 제갈각의 북벌 이후 오나라가 위에게 이런 위협으로 다가온 순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76] 적지에 깊숙히 침입해서 보급로가 위태로운 상태의 군사를 칭한다.[77] 조방전에선 5월 포위~7월 퇴각이나 손량전에서 3월 출정~4월 포위~8월 퇴각에 위략 장특전에서 90여일이라 기록하며 통감 역시 90여일로 보고 있다.[78] 전쟁에서 적을 속이는 기만전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어온 것이지만, 장특처럼 단 하룻밤의 시간을 벌자고 이런 짓을 하고 또 성공시킨 경우는 손에 꼽는다. 그것도 성을 보수한다는 건 거의 전병력을 투입해 체력을 소모시켰다는 것인데, 안 그래도 열악한 환경에서 이런 수를 썼으니 더더욱 대담한 판단이었다.[79] 사마사의 혜안, 사마부의 20만 대군 인솔, 우송의 간언 등.[80] 본문에서는 변방에서 승리했다고 서술하는데 이는 동흥제 전투로 추측된다. 그러나 합비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봐서는 합비신성 전투에서 이룬 제갈각의 소규모 승리를 칭하는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항목에서는 동흥제 전투가 맞다고 가정하고 서술한다.[81] 아마 『정사 삼국지』에 기재된 배송지주에서 발췌한 것이라 예상되지만 아직 미번역된 것으로 보인다.[82] 아버지인 제갈근은 아들과는 반대로 오만하지 않고 겸손한데다 인격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83] 참고로 이 기록 덕분에 초딩 제갈각을 발랐던 장승이 제갈근의 친구임을 알 수 있다.[84] 관원을 선발하는 부서.[85] 아마 합비신성 전투를 의미하는 듯하다.[86] 아마 출병했던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제갈각전」의 번역이 아직 직역투가 많다보니 확실하지가 않다.[87] 손권의 묘.[88] 칼차고 신발을 신은 채로 황제에게 인사할 수 있는 권한은 제갈각에게 내려진 특별한 영예로 당시 제갈각의 권위를 상징한다.[89] 파성넷역 「제갈각전」에서 발췌한 발언.[90] 『자치통감』에서 발췌한 발언. 둘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세세한 내용이나 의역이 다름으로 둘 다 기재한다.[91] 손준도 이미 준비된 약주를 언급하고 이를 내어서 제갈각의 의심을 푼다.[92] 말로가 서술되어 있진 않지만 참수당했을 것이다.[93] 제갈각의 아버지라면 제갈근을 칭하는 것일텐데 「제갈각전」은 물론 「제갈근전」에서조차 이미 죽은 제갈근이 부관참시당했다는 기록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부관참시는 보통 일이 아님으로 반드시 둘중 하나에 명시될텐데 기록이 전혀 없으니 매우 이상하다. 오역이거나 제갈각의 어머니를 오해한게 아닌가 싶다.[94] 이 부분만 봐도 제갈각이 얼마나 민심을 잃었는지 알 수 있다.[95] 재보(宰輔)를 뜻한데. 즉, 재상으로써 황제를 보좌하는 자리다.[96] 사오(士伍)는 대열 속의 병사를 칭한다. 진한시대에는 관작을 빼앗긴 사람을 사오라고 칭했다.[97] 당대에서 세 치의 관을 쓰면 매우 간단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인식했다.[98] 『자치통감』에서 기술된 장균의 표문으로 아래의 「제갈각전」에 기술된 표문과 여러 차이가 보인다.[99] 「제갈각전」에 기재되어 있는 장균의 표문으로 위의 『자치통감』의 기록과 번역과 쓰는 단어에서 여러 차이가 보인다.[100]삼국지연의』에서는 부하 장약을 시켜 손준이 이끌던 어림군 지휘권을 빼앗아 분노한 손준이 등윤과 모의하고 손량을 설득해 제거한 것으로 서술되었다. 정사에서 등윤은 제갈각과 친해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후에 손침에게 살해당했다. 술에 독이 들었을까 두려워 집에서 궁으로 술을 가져오게 했다는 서술은 정사와 연의 전부 같다.[101] 이 버전은 『자치통감』에서 서술된 발언으로 세세한 부분에서 위의 번역본과 차이가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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