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클/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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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반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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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1집

Fine Killing Liberty : BLUE RAIN
(1998.05.20)

정규 2집

White
(1999.05.12)

라이브 앨범

1999 Fin.K.L First Live Concert
(1999.10.01)

비정규 2.5집

S.P.E.C.I.A.L
(1999.11.24)

파일:finkl_album_3.jpg


파일:Fin.K.L 3.5.jpg


파일:finkl_album_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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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3집

Now
(2000.10.06)

리메이크 3.5집

Memories & Melodies
(2001.04.13)

정규 4집

call me in your heart ...can be my soul show you love again
(2002.03.08)

디지털 싱글

Forever Fin.K.L
(2005.10.26)

파일:finkl_best_album.jpg


파일:finkl_single_like_a_son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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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K.L Best Album
(201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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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싱글
남아있는 노래처럼
(2019.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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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뷔 전 - 결성 과정
2. 데뷔 이후
2.1. 1998년 정규 1집
2.3. 2000년 정규 3집
2.5. 2002년 정규 4집과 개인활동 그리고 해체
2.6. 2003년~ 개인 활동의 시작, 2006년~2018년: 그룹 활동 중단
2.6.1. 해체 논란
2.7. 2019년 캠핑클럽과 완전체 활동
3. 데뷔일 논란


1. 데뷔 전 - 결성 과정[편집]


대성기획젝스키스가 성공하면서 야심차게 다음 그룹으로 걸그룹을 기획하게 되는데, 사실 본래 회사의 계획은 같은 회사 출신의 중고신인 김준희를 기반으로 그녀가 리더를 맡아 한국판 TLC를 결성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에 맞춰 훗날 '타샤니'로 데뷔하게 되는 '애니'[1] 등 힙합 삘이 제대로 나는 연습생들을 연습시키고 있었다.

허나 사장이었던 이호연라이벌 SM의 S.E.S.에 자극받아서인지 그룹 컨셉을 힙합에서 귀여운 댄스 그룹으로 가기를 원해서 멤버들이 재구성 되었다고 한다.[2] 그래서 김준희, 애니, 옥주현 3인 걸그룹 체제에서 '김준희'가 빠지고, 이진성유리가 합류하여 음반 녹음까지 하였으나, 이호연 사장이 보기에 당시 S.E.S.의 위상을 따라가기는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는지 최종적으로 '애니'를 빼고 다른 멤버를 추가하기로 결정하고[3], 무려 데뷔 한달을 앞두고 마지막 멤버로 다른 기획사에서 데뷔를 준비하던 이효리가 극적인 합류를 하게 되었다.

각 멤버들이 회사에 들어온 계기를 소개하자면, 우선 1997년 하반기쯤 가장 먼저 합류한 옥주현은 이미 이문세별이 빛나는 밤에 별밤뽐내기 연장원 출신이었다.[4] 그리고 이미 이런 프로들에서 자신의 걸그룹으로 데뷔시킬 재목을 찾고 있던 이호연은 라디오에서 옥주현이 부른 머라이어 캐리의 'Hero'를 듣고[5] 자신에게 연락한 지인을 통해 옥주현과 컨택해서 핑클 첫 멤버로 합류시켰다. 옥주현은 성악을 전공할 생각이어서 대중가수에는 별 생각이 없었으나[6] 이호연 사장의 설득을 통해 연예계에 발을 딛게 된다. 옥주현이 2011년 힐링캠프에서 사장님 성대모사를 섞어가며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이호연은 뚱뚱한 옥주현을 처음 보고 "너 살 많이 빼야겠구나?"라고 특유의 직설 돌직구를 던졌으나, 옥주현은 나는 성악 할 사람이니 뚱뚱해도 상관없다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그러자 이호연은 나 아님 누가 너 걸그룹 시켜주겠냐며 진지하게 가수 할 생각 없냐고 하자, 옥주현도 자기 외모가 걸려 내가 어떻게 걸그룹을 하냐고 반문하니 여자는 살 빼고 쌍꺼풀 수술하면 확 바뀐다고 설득했다고 한다.[7] 또 옥주현이 이호연 사장 부고 후 고인을 기리며 쓴 에 따르면, 이 에피소드 외에도 젝스키스 콘서트를 공짜로 보여주고 도 사주고 아직 승낙도 안했는데 주변 관계자에게 자기가 키우는 걸그룹 메인보컬 시킬 애라고 무대뽀 뻥카를 치는 등 하여튼 옥주현 영입하려고 되게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렇게 합류했다보니 이후 옥주현핑클 결성의 많은 부분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데, 이진 역시 옥주현이 캐스팅해 온 멤버였다. 이진은 은광여자고등학교 2학년 재학 시절 강남 일대에서 나름 유명한 얼짱이었는데, 옥주현의 친구가 이진과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옥주현은 직접 은광여고로 찾아가서 단역 연기자 출신인 이진에게 오디션을 볼 것을 요청했고 에코의 '행복한 나를'을 부른 이진은 핑클의 두 번째 멤버가 되었다.

성유리는 2009년 무릎팍도사에서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고1이던 1997년 (아마도 5월) 당시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사생대회에 갔다가[8] 캐스팅디렉터의 눈에 띄여[9] 젝스키스가 있는 회사라고 명함을 주며 영입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허나 성유리는 그 당시 의사인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가수가 될 생각은 딱히 없었는데, 그래도 젝키 있는 회사니 젝키 보러 가자던 친구들의 꼬드김에 (아마도 9월) 부모님 몰래 대성기획에 오디션을 보러 간다. 그리고 여기서 사장이 어떤 여자들 앞에서 노래를 시켰는데 첨엔 보컬 선생님인 줄 알고 노래를 했으나 알고 보니 그게 1살 언니 옥주현이었고[10], 이호연이 옥주현에게 어떻냐고 물으니 연습시키면 될 것 같다고 해[11] 핑클 멤버로 합류시켰다.[12]

남은 한 자리엔 '애니'부터 시작해서 영턱스클럽의 멤버 전현정과 후에 클레오로 데뷔하는 멤버 채은정[13] 많은 가수 연습생들이 거쳐갔지만 모두 핑클과는 인연이 되지 못했으며, 옥주현, 이진, 성유리 3명은 확실하게 모였지만 소속사 사장의 고집으로 꼭 4인조[14]로 데뷔해야 했고 세 명이 캐스팅 된 이후 긴 시간 동안 네 번째 멤버를 발탁하기 위해서 공을 들였다.

그러다 데뷔 1달을 앞두고 모 기획사에서 힙합그룹[15]을 준비하던 이효리가 마지막으로 대성기획으로 넘어오면서 그룹의 최종 멤버로 확정되었다. 압구정동 레스토랑에서 알바하던 중 캐스팅 디렉터에 의해 발굴되었다고 한다. 힐링캠프에서 이효리가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날 대뜸 '나 이호연이요'라고 전화가 와서 사장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얼굴만 보고 바로 뽑혔다고 한다.[16] 사족으로, 이효리는 과거 H.O.T. 토니 안 팬이어서 H.O.T. 팬클럽에서도 이쁜 팬으로 나름 유명했는데[17], SM 회사 앞에서 토니안을 기다리다가 SM에 캐스팅되어 잠깐 연습생을 했던 적도 있었다. 즉, S.E.S. 멤버가 될뻔도 했던 셈. 될놈될 그러나 이효리는 SM에 잠깐 있다 나왔고, 이후 월드뮤직이란 기획사에서 데뷔를 준비하던 중 대성기획에 캐스팅되었는데, 이때 이효리를 상대로 부적절한 계약을 하고 있던 점을 파악한 대성기획 측이 이효리의 가능성을 높게 판단하여, 쿨하게 위약금을 던져주고 이효리를 데려오면서 핑클의 마지막 멤버가 되었다.

이후 PC통신에서 그룹명 공모를 받아 팀명은 "핑클"로 정해졌으나, 원래 원년 후보멤버였던 김준희의 팬들이 지정해줬던 '핀클'로 확정을 지었다가 발음이 좋지 않다고 판단 핑클로 변경을 하고, 이걸로는 부족했던지 상단과 같은 짬뽕 단어의 약자(Fin.K.L)를 핑클로 부르자고 했다.

그렇게 이 4명의 소녀는 핑클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18]

2. 데뷔 이후[편집]






2.1. 1998년 정규 1집[편집]


1998년 4월 이효리의 합류 이후 급하게 자켓 재촬영과 음반 리디렉팅을 거쳐, R&B 발라드곡 Blue Rain으로 데뷔했다.



핑클의 시작을 알린 1집 앨범 타이틀곡 Blue Rain 뮤직비디오

유튜브 핑클 공식 라이브 데뷔무대 링크

1998년 5월 17일 SBS 인기가요에서 첫 공식 음악 방송 데뷔를 치렀으며 R&B 발라드곡 Blue Rain의 라이브 무대로 데뷔했다. 차별성을 위해 R&B 그룹을 표방하고 청순한 미모와 뮤직비디오가 인기를 얻으면서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최고 순위는 SBS 인기가요에서 2위(1위 후보), MBC 음악캠프에서 2위. 29만장의 음반판매량을 기록하며 신인이 이 정도면 차세대 대세가수로 충분히 주목할 만한 성적이었다.



핑클 인기의 서막을 연 내 남자친구에게 뮤직비디오
하지만 이쁘장한 외모에 다분한 끼를 가지고도 얌전하게 발라드만 부르는 것으로는 2% 부족했다. 옥주현이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Blue Rain의 저조한 반응을 보고 이호연 사장이 방향성을 확 바꿔 빛의 속도로 일을 진행했다고 한다.[19] 본래에는 은지원이 코러스와 랩핑에 참여한 힙합계 댄스곡 'Shadow'로 후속곡을 내정하고 있었으나 이호연의 촉으로 그룹 방향을 선회, 멤버들은 녹음해놓은지도 잊고 있던 귀여운 댄스곡으로 후속곡을 급하게 바꾸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내 남자친구에게'. 멤버들은 이 노래가 후속곡으로 정해지면서 나온 격렬한 귀여운 컨셉에 모두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이내 타이틀곡보다 나은 반응이 뒤따르기 시작한다. 깜찍하고 발랄한 느낌의 곡이다. 쿵짝쿵짝 거리는 느낌이 다소 뽕삘이 나기도 한다

핑클은 말괄량이같고 친근한 옆집 누나 느끼으로 접근했다. 가사의 주제부터 평소에 친하게 알고 지내던 친구가 갑자기 상대방에게 잘 보이려고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고, 입술을 보며 망설이지 말라는 등 조금은 도발적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당시 시대 상황을 감안했을 때) 적극적으로 고백하는 가사이다. 장난도 잘 치고 잘 웃던 옆집 소녀가 갑자기 고백해달라며 애교를 부리는 상큼발랄한 느낌은 이진, 성유리의 '난 니꺼야'로 극적인 포인트마저 잡아내며 기존 큐티이미지를 이어갔다.

이 곡은 화제가 되었고, 남자팬들을 순식간에 쓸어모았다. 노래방에서도 인기를 끌어 여성들에게는 부담스럽지 않게끔 고백할 수 있는, 남성들에게는 심쿵할 애교로 받아들이기 충분할 정도의 고백송으로도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사실 지금 와서 봐도 가사가 고백송으로 괜찮은 곡이다.

또한, 이 곡으로 지상파 음악차트 첫 1위에 올랐다.



루비 뮤직비디오
대략 9월 중순까지 내 남자친구에게로 활동하였다. 어차피 두 달 동안 활동하면서 인기도 많이 누렸겠다, 활동을 접냐 또다른 후속곡을 내놓냐 갈림길에 놓인 시점에서 핑클은 데뷔곡으로의 회귀를 선언한다. 루비라는 발라드로 삼속곡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하모니카 사운드로 시작하는 애절한 느낌의 발라드로 핑클은 또 한 번의 도약을 맞았다. 데뷔곡도 발라드였지만 느낌이 상당히 달랐는데,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청순한 이미지를 매칭하며 또다른 변신을 주었다.

이 변신은 결과는 좋았다고 평가받는다. 핑클이 단순히 옆집 누나같은 친근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곱디 고운 느낌까지 있는 아이돌이라는 것을 어필했기 때문이다. 청순한 느낌의 무던한 발라드로 청순함을 좋아하는 남자팬들을 끌어모으며 팬층을 더욱 넓혔고, 세 번째 활동곡임에도 방송사 1위를 또다시 차지하였다. 이 노래로 9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약 두 달 반 동안 길게 활동하면서 성공적으로 데뷔앨범 활동을 마무리했다. 걸그룹 최초로 8개월 활동을 펼치며 음반 판매량 29만 장, 삼양라면 CF 개런티 8천의 기록을 세웠다.

1집 활동 당시 멤버들간의 불화가 있었는데[20], 이효리와 이진 사건의 경우 머리 끄댕이 잡고 싸워서 맘이 상한 이효리가 스케줄을 펑크낼 정도였다. 사실 핑클 멤버들은 옥주현, 이진, 성유리가 1998년 1월에 모여 음반 녹음과 자켓 촬영을 급하게 끝내고, 이효리는 불과 데뷔 한 달 전에 급하게 투입된, 당시로서는 객원 멤버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이효리가 맏언니로 리더가 되고[21] 이진, 성유리보단 노래 실력도 나았기에 파트 분배에서도 좀 더 혜택을 받았는데, 그런 리더 이효리는 당시에도 왈가닥 기질이 있어 데뷔 후에도 사적인 대학교 이성친구들과도 거리낌없이 교류하고, 수시로 을 마시는 등 당시 미성년자 멤버들이 보기엔 '노는 언니'에 가까웠다.[22] 반면 옥주현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 둘은 당시만 해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에 세상 물정도 어두운 순진한 소녀에 가까웠다.[23] 그래서 지방 공연을 가면 이효리와 옥주현은 관광지에 놀러가거나 술집에 가서 을 마시고, 성유리와 이진은 지역 교회에 가서 기도를 했다고 한다.[24] 사이가 나쁜건 아니었지만 성향이 워낙 반대였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

그러다 어느 날 또 이효리가 아침부터 술 마시고 들어와 멤버들과 지방 공연을 가는 도중이었는데, 차 뒤편에서 이진과 성유리가 둘이 속닥속닥 얘기를 하는게 뭔가 거슬리던 이효리가 애들이 내 욕하나 싶어 '니들 혹시 내 얘기하니?'라고 물었는데 '아니다'라고 했으면 그냥 넘어갔을 문제를[25], 이때 뭔가 쌓인게 있었는지 갑자기 이진이 급발진해서 '그래 언니 얘기 중이었다'라고 해 이효리도 하극상에 욱해서 머리 끄댕이를 잡고 차 안에서 싸우고 멤버와 매니저는 말리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후 맘이 상한 이효리는 가식적으로 방송하긴 싫어 그 날 밤 라디오 스케줄을 펑크냈고, 소속사에선 몸이 아파 이효리가 병원에 갔다고 했으나 실제 이효리는 길거리에서 팩소주를 뜯어마시다(...) 갈 곳도 없어 새벽에 집으로 돌아갔는데 거기서 기다리던 매니저한테 의외로 혼 대신 다독임을 받아 엉엉 울고 담날 이진도 '언니한테 대들어 미안하다. 언니 행동이 이해 안갈때도 있어 힘들었다.' 등 장문의 사과 편지를 눈물과 함께 이효리한테 건네 서로 화해했다고 한다. 농반진반 이효리도 이후론 술을 좀 자제했다고. 몰래 마셨다고 한다.

그래도 당시부터 서로 쿨한게 있어서, 신인임에도(!) 모 인터뷰를 통해 불화를 인정하고 화해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는데, 아마 자료가 남지 않은 사소한 마찰들은 더욱 많았을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서로에 대해 잘 모르던 시기라 멤버 간 다툼이 어느 정도 있었던 시기였다는 점. 그러나 오히려 멤버들의 이런 솔직하고 바로바로 부딪혀서 푸는 성격 탓에 앙금이 남지는 않았으며,[26] 이후 여러 사건사고를 겪으면서 친자매처럼 똘똘 뭉치게 된다.

데뷔곡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두 후속곡으로 큰 인기를 얻은 1집 앨범은 291,925장이 팔려나가며 그 해 KMTV 가요대전과 골든디스크에서 신인상을 수상하였다.[27] 가요계 시장에 개그테이너 걸그룹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2.2. 1999년 정규 2집, 비정규 2.5집[편집]




핑클 2집 앨범 타이틀곡 영원한 사랑 뮤직비디오
1999년 4월, 데뷔 1년여 만에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공식팬클럽 창단식을 가진 뒤, 5월 2집 <White>를 발표한다. 그리고 타이틀곡 '영원한 사랑'이 좋은 반응을 얻으며 인지도 있는 여성그룹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특히 영원한 사랑은 새끼손가락을 피고 '약속해줘'라고 말하는 포즈, 양팔을 빙글빙글 돌리는 안무 등이 따라하기 쉬웠으며, 남성 아이돌그룹 극성팬이던 일부 여성들에게는 질투를 받았지만[28] 정작 욕하던 이들도 교실에서, 축제 장기자랑에서, 수학여행 가면서[29] 영원한 사랑은 으레 한 번씩은 따라할 정도로 질투와 인기를 한 몸에 얻었다.

타이틀곡 '영원한 사랑'이 메가히트를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거론될 수 있다. 우선 귀여운 컨셉으로 가질 수 있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어우러지게 함으로서 요정 컨셉의 절정을 이룬[30] 곡이란 점도 있겠고, 전작인 '내 남자친구에게'에서 보여준 사랑스러운 옆집 소녀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는 노래지만, 또 일견 유치해보이는 점도 있는 내 남자친구에게보단 멜로디 구성이 좀 더 성숙해지고 발라드 느낌이 있으면서도[31] 템포가 꽤 빨라져 댄스곡으로도 큰 손색이 없는 곡이 되었다. 여기에 청순함을 극대화시키는 흰색 드레스와 살랑거리는 안무, 항상 나의 곁에 있어달라 약속해줘라는 고백 가사까지 1집 삼속곡 루비에서 얻은 청순한 이미지를 매치시키고, 을 연상하게 하는 뮤직비디오 배경에 성유리가 쓰던 월계관으로 곡의 이미지에 맞는 포인트 매칭까지 당시 10대~20대 초 걸그룹이 낼 수 있는 청순, 순수, 귀여움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4분짜리 한 곡에 다 때려넣었다. 그리고 이 풋풋한 느낌을 핑클 멤버들도 매우 잘 살려주었다.



영원한 사랑 무대 영상
2집은 컴백 당시 다이어트로 1집 대비 환골탈태한 옥주현의 미모가 큰 화제를 모았고, 1집에 이어 청순한 모습의 이효리와 여전한 덕후몰이상 이진, 그리고 귀여움과 더불어 약간의 백치미도 느껴지던 요정 미모로 레전드를 찍었던 핑클의 마스코트 성유리까지 4명 모두의 매력이 잘 발휘됐었다.



자존심 뮤직비디오
귀여운 컨셉으로 인기 굳히기에 들어가며 후속곡으로도 1위를 차지했다. 뮤직비디오에 물 오른 비주얼로 남성팬들이 크게 열광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댄스곡으로 DDR, 펌프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오락실에 가면 매우 자주 들릴 정도로 DDR 열풍에 한 축을 이루었다.

2집으로 네 달간의 활동을 마무리하고 걸그룹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총 7,000여 명의 팬들이 참여하여 성황리에 끝났다고 전해지며, 이 콘서트 영상을 짜깁기해서 발라드곡 'Waiting For You'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원래 이 곡이 정식 삼속곡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너무나 바쁜 스케줄에 2.5집 앨범 준비까지 겹쳐 공식적인 활동은 하지 못했고 2주간 음악방송에서 2집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oh! boy', 'Waiting for you'로 잠깐 무대를 가지고 활동을 곧바로 마무리했다.

이 시기에 대만 제작사를 통해서 대만에 앨범을 발표했고 한국 가수들 공연에 참가하여 공연을 가진 적이 있다.

이후 2집 활동을 접은 지 두 달여 만인 1999년 11월, 겨울 느낌이 나는 스페셜 음반 2.5집을 발표했다. 나미의 곡을 리메이크한 '인디안 인형처럼'만 빼고는 모두 신곡이었고 곡도 13곡이나 들어가 있었다. 활동곡은 총 세 곡으로 11월에 하나, 12월에 하나, 1월에 하나씩 한 곡으로 한 달씩, 지금으로 치면 싱글과 비슷한 활동이었다.

첫 번째로 내놓은 타이틀곡은 '나의 왕자님께'라는 발라드로 전작 2집에서 발라드로 활동하려다 계획이 취소된 것을 의식한 기획이었다. 역시 청순 컨셉 걸그룹답게 고백하는 내용의 발라드 형식으로 sbs 1위를 거머쥐었다.



White 무대 영상
거기에 더해 White가 불과 한 달밖에 활동하지 않았고 뮤직비디오도 찍지 않을 만큼 소극적인 프로모션에도 지상파에서는 최고 4위까지 올랐다.[32][33]

2000년으로 넘어가면서 '가면의 시간'으로 세 번째 활동에 들어갔다. 다만 당시엔 기존 청순발랄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는 섹시 컨셉의 곡이어서, 일부 팬들이 왜 앨범의 좋은 곡들을 놔두고 이런 곡으로 활동하냐는 비난을 하기도 했다. 데뷔 시기나 멤버들 나이를 생각하면 시기상조로 보인 것도 사실이지만, 이후 3집 NOW로 섹시 이미지를 어필하기 전 일단 프로토 타입으로 시험해본 초석이 된 곡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가요 프로그램에서도 10위 권 안에 들면서 나름 좋은 반응을 얻었다. 2.5집은 45만 장을 판매하여 역대 핑클 앨범 중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으로 남았다.

2집 대박에다 2.5집 스페셜 활동까지 성공적으로 이어가면서, 1999년 연말엔 국내 걸그룹 역사상 최초로 가요대상을 두 번[34]이나 거머쥐었고 걸그룹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대형 콘서트를 개최했다. 대상 수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2집 앨범은 총 60만장에 가까운 판매량을 보여주면서, 1999년 음반판매량 연간 5위[35], 핑클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남았다.

단 이때 핑클의 대상 수상에 엄청난 논란이 있었던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우선 SBS 서울가요대상을 살펴보면 당시 진행자 유정현과 이승연이 분명 대상 수상자는 한 명이라고 못박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갑자기 대상 수상자가 두 명이라고 늘어난 것이다. 지금은 대상을 올해의 가수상, 올해의 노래상, 올해의 앨범상, 음원 부문, 음반 부문 등으로 세분화 하여 나눠서 주지만 당시에는 음반 시대였고 이처럼 세분화해서 주지는 않았다. 사실 핑클의 소속사인 DSP의 다른 소속가수 젝스키스도 전년 SBS 가 주관하는 서울가요대상에서 성적 차이가 심한데도 연간 1위 H.O.T.와 공동 수상을 하였던 곳이다. 99년에는 DSP 소속의 핑클의 이러한 수상이 일어난 것. 본상 수상자의 기준은 확실한 자료가 나오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방송 당시 밝힌 대상 수상자의 선정 기준은 오직 '심사위원의 현장 점수'로만 가려진다고 하였다. 이때 심사위원은 김광진 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 박경제 성형외과 원장, 신상호 한국음악저작권협회고문, 엄용섭 한국연에제작자협회장, 이기종 스포츠서울 부국장, 채림 탤런트이었으며, 이들의 현장 심사로만 대상 수상자가 결정된 것. 연예 관계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성형외과 원장과 탤런트가 무슨 자격으로 대상 수상자를 결정하는지는 미지수다. 당시 서가대는 '밀실 수상자 선정'으로 논란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SBS 가요대전의 경우는 SBS 인기가요 1년간 순위 50%, PC 통신 인터넷 투표결과 20%, 음반 판매량 10%[36], 방송 기여도 20% 기준으로 본상 수상자 10팀을 선정하고, 그 중 최고 점수 획득자를 대상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단 이 지표에서 핑클의 수상이 논란이 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각 지표에서 핑클이 최고 점수를 점할 수 있는 지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SBS 자사 음악프로그램 순위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점수를 산출했는지 밝히지 않았기에 알 수는 없지만, 1위 횟수에서 핑클 5회를 기록하여 6회를 기록한 젝스키스 유승준보다 낮으며, 99년 한 해 인기가요 50위에 들어간 횟수도 다른 가수들에 비해 낮다.[37] PC 통신 인터넷 투표도 1위를 기록한 적이 없고[38] 음반 판매에서는 190만장의 조성모 80만 장의 유승준보다 한참 낮은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 방송기여도가 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팬들은 말하지만 핑클이 99년 한 해에 SBS에 프로에 출연해서 결정적인 시청률 상승 기록은 커녕 어떤 예능에 나왔는지 목록을 팬들조차 모르는 실정이며 어떻게 방송기여도 점수가 큰 역할을 했다고 확신하는지 알 수 없는 부분이다.[39] 결국 기준은 들러리에 불과할 뿐, 기획사와 방송사 간의 이해관계로 일어난 수상이었다.[40] 사실 성적대로 하자면 99년 대상이나 2001년 최고인기상은 핑클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상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SBS에서만 일어나는지 이 모든 게 우연이라면 필연적인 운명일 듯.

참고로 댓글 등을 보면 2집 판매량이 100만장을 넘겼다는 기사가 당시에 나왔음에도, 세금 탈루를 위해 대성기획이 연말 신고를 누락해 실제 판매치보다 낮게 신고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소속사가 제출하는 한국음반산업협회 기준으로 약 59만장이 팔려나갔는데, 당시 음협 외에도 최대 음반 유통사인 악명높은 신나라 레코드가 발표하는 연말 결산 판매량을 보면 해당 기관에서도 핑클의 2집 판매량은 약 60만장이었다. 즉, 음협의 기록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신나라 레코드는 소속사의 자료를 받아서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판매량을 집계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설득력을 얻지 못 한다는 것.

다른 결정적인 증언도 있는데, 바로 당시 핑클의 매니저를 맡았던 길종화의 인터뷰 영상이다. 당시 MBC 뉴스데스크에서 실제 판매된 판매량보다 부풀려 홍보하는 가수들의 사례를 고발하는 뉴스를 전했는데 여기에 길종화가 인터뷰를 했다. 길종화의 말에 의하면 6월 이전에 100만장이 돌파하지 않겠냐라는 인터뷰를 했는데 신문에서는 눈에 확 들어오게 마치 100만장이 팔려나간 것처럼 과대광고가 됐다는 것이다. 당시 영상. 즉, 관계자라는 사람도 정확하지 않은 자신만의 추측으로 이야기를 했고 그걸 그대로 받아써서 눈에 확 들어오게 기사를 낸 스포츠지가 함께 빚어낸 촌극이라는 것.

그래도 단일 음반은 아니지만 1999년 한 해 동안 3장의 총 합 음반 판매량이 무려 110만 509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큰 수확을 거두긴 했다. (2집 판매량: 593,816장 / 콘서트 라이브 음반 판매량: 57,275장 / 2.5집 판매량: 449,418장) 단 이 수치는 99년 한 해에만 팔린양이 아니다. 2.5집의 총 판매량이 2000년 초까지 팔린 양이기 때문.

이때가 (이후 예능으로 좀 더 인지도를 높이며 활약하긴 하지만) 핑클 인기의 전성기라고 평가받는다고 한다. CF도 전보다 더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예능 활동도 활발하게 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전설의 핑클빵이 나온 것도 이때였다. 핑클빵이 H.O.T.에게 훨씬 높은 개런티로 제안이 갔다가 콘티가 구리다고 까여서 핑클에게 최종 1억으로 가게되니 비화가 있다.

2.3. 2000년 정규 3집[편집]


데뷔 이후 별다른 공백기 없이 2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렸던 핑클의 대외활동은 2000년에도 이어졌다. 2집이 잘됐고 CF, 방송활동이 늘어나자 2.5집 활동까지 접은 이후에도 CF를 찍었으며, 각종 행사에 1순위로 불려가는 등 인기를 이어가기 위한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2000년 5월, 소속사 선배가수 젝스키스가 갑작스런 해체를 맞으며 핑클은 명실상부 대성기획의 기둥이자 1순위 밥줄이 되었다. 그래서 이때를 기점으로 핑클을 대하는 소속사의 대우가 많이 달라졌다고 하며, 이전부터 핑클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젝스키스 팬들에겐 완전히 공공의 적이 되며 여기저기서 테러의 대상이 되는 등, 높아진 인기만큼 시기와 질투의 상징이 되며 베이비복스, 보아와 함께 10대 여자들에게 압도적으로 미움을 받는 아이돌이 되어 여러가지 피해를 입었지만[41],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베이비복스, 보아와는 다르게 핑클 멤버들은 이들에게 나름대로 복수를 하는 활약상도 보였다.[42]



핑클 3집 앨범 타이틀곡 Now 뮤직비디오
2000년은 그야말로 가요계 별들의 전쟁이었던 시기로 일명 Big3라 불렸던 H.O.T.서태지, 조성모가 컴백해 모두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god의 거짓말, 박지윤의 성인식, 이정현의 와, 너가 신드롬급 인기를 얻었다. 이 상황에서 앞서 2집으로 사랑을 받았던 핑클은 부담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스케줄이 워낙에 많아 쉼없이 달리고 있는데 이렇게 경쟁가수가 연달아 컴백하는 상황, 그리고 대중의 노출도가 절정에 이르며 핑클 멤버들의 비글미가 노출되고, 2년이 넘는 청순발랄 이미지의 소모로 피로감까지 쌓인 상황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3집의 컴백은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발매 시기는 2000년 10월로서, 2.5집 활동 종료 후 7개월만에 발매되었다. 타이틀곡은 'Now'로서, 상당히 강도가 센 안무와 리듬감, 청순함 대신 성숙함과 섹시함으로 무장하여 기존의 이미지를 뒤엎었다.

이런 핑클의 180도 이미지 변신은 처음에는 여러 사람들의 우려를 샀다. 핑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요정, 귀여움, 친근함인데 이와는 정반대에 있는 섹시한 이미지로 돌아섰으니, 핑클과 어울릴까 하는 고민이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세간의 우려와는 다르게 3집도 대박 좋은 인기를 얻었다. 세련된 노래에 비록 섹시 컨셉이었지만 커리어 우먼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성숙하고 정갈한 의상이 대비가 되어 기존 핑클에게 없었던 아우라를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비슷한 시기에 컴백한 H.O.T.와 god 같은 쟁쟁한 가수들 속에서도 연달아 1위를 차지하며 SBS 인기가요에서 왕중왕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린다.

또한 이때부터 남성팬들 뿐만 아니라 여성팬들에게도 어필하며 핑클에게도 많은 여덕들이 생기게 된다. 특히 이효리가 크게 주목을 받으며 성유리를 이은 핑클의 새로운 마스코트로 떠올랐다. 이효리는 이전에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핑클의 이미지는 마스코트격이던 성유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다 3집 'Now'와 후속곡 'Feel Your Love'부터 이효리에게 초점이 맞춰 컨셉이 잡혔다. 귀여운 컨셉을 할 때도 이효리는 제법 잘 소화를 했지만, 그룹 컨셉 때문에 성숙함과 섹시함은 어느정도 가려져 있었는데 이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시기부터였다.

Now로 2집 못지않게 큰 인기를 누린 다음 연말부터 후속곡 'Feel Your Love' 활동으로 접어든다. 도도하고 섹시한 느낌이 묻어나는 곡이었으며, '교복컨셉', '힙합컨셉', '작업복컨셉' 등 무대마다 각양각색으로 변신하는 의상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메인인 '스쿨룩'이 화제를 모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한 교복 소녀의 얼굴로 도발적이고 섹시한 노래를 부르며 유혹하니 색다른 매력을 준 것. 또 이효리가 랩을 시도해 '랩퍼횰'이라는 별명이 생긴다. 후속곡 선정은 말이 많았는데, 컴백 때 이미 불러버린 곡이 후속곡으로 낙점되었다. 당시 공식홈페이지 투표에서는 'My Love'란 곡이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었다. 하지만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상파에서 3위를 차지하였다.[43] 앨범 판매량은 44만 장으로, 2.5집과 비슷한 판매량을 보였다.

허나 3집 활동은 공식적인 막방도 하지 못하고 갑작스레 흐지부지 끝났는데, 옥주현이 KBS 스탠바이큐 예능 촬영 중 다리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제작진들이 무리시킨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자 옥주현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고 말하며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옥주현은 한동안 제대로 걷지 못했고, 이 때문에 1000일 파티 당시 휠체어에 앉아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

2.4. 2001년 비정규 3.5집[편집]




핑클 리메이크 앨범 타이틀곡 당신은 모르실거야 뮤직비디오
2001년 4월 리메이크 앨범인 3.5집으로 컴백, '당신은 모르실거야'를 부르며 활동을 이어 나갔다. 2001년 핑클은 핑클팬덤 역사상 많은 팬들을 끌어모았고, 르네상스 시기에 접어든다. 이들은 '당신은 모르실거야'로 방송 3사에서 2주 동안 전부 1위를 수상했다. 곡의 인기로는 '영원한 사랑'과 'Now'가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았지만, 팬덤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가 이 때인데, 당시 아이돌 그룹 팬덤 대결의 장이었던 드림콘서트에서 많은 팬들이 모여 일당백 응원을 시전하였다.

이미연 리메이크 열풍이 분 적이 있었는데, 핑클은 이 열풍에 자연스럽게 편승하여 리메이크 앨범을 발표한다. 여성 선배 가수들의 여러 곡들을 리메이크하였으며 히트곡 위주의 선곡과 눈부신 보컬 능력을 보여준 옥주현 파트에서는 대체로 호평을 받았고, 대체로 잔잔한 노래들에 이효리의 부드러운 음색이 어우러져 보컬 능력에서도 대체로 좋은 점수를 받았다.

핑클이라는 그룹의 활동이 3년이 넘어가면서, 이전보다는 더 성숙하면서 청초한 이미지를 선보였다. 대체로 1집 루비와 비슷한 느낌의 분위기로 활동했는데, 무대 경험이 많이 쌓여서인지 뮤직비디오나 무대 등에서 확실히 노련미와 성숙함이 돋보이는 활동이었다.

2000년 10월 3집 Now로 컴백한 이후 공백기에도 KBS 스탠바이큐 고정 예능에 쭉 출연하며 3.5집 활동이 끝날 때까지 거의 1년을 티비에 주야장천 나오며 얼굴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이렇듯 대중 노출 효과에도 불구하고 음반 판매량은 252,127장을 기록했는데, 스페셜 앨범임을 감안해도 다소 아쉬운 성적을 기록하였다.

'당신은 모르실거야'는 웨딩드레스 컨셉이었는데, 뮤직비디오에서 이효리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에서 헬멧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뮤비가 방송금지 된 적이 있다.

몇 달간의 공백기를 거친 뒤에 그해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골든디스크 시상식을 제외한 연말 가요 시상식에 대부분 참석하였는데 2001년 <SBS 가요대전>에서 강타와 함께 대상 후보격인 '최고 인기상'을 수상했다. 대상은 god. 상반기에 스페셜 앨범으로 길지 않게 활동한 것 치곤 이례적인 수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안티들은 이 수상에 대해서도 공정성 논란을 제기한다. 상세 점수가 SBS 인기가요 점수, 음반 판매량 점수, 방송 기여도 점수, 인터넷 투표 점수였다. 핑클은 SBS 인기가요 점수로 보자면 1위 횟수도 두 번밖에 되지 않아 본상 15팀 중 하위권이었으며, 음반 판매량은 25만장으로 하위권이었으며, 방송 기여도 점수는 공개되지 않았고 핑클이 고정 예능을 한 건 KBS지 SBS가 아니었다. 인터넷 투표 점수도 상위 10위권 가수들 중 하위권이었다. 이렇게 어느 지표를 봐도 핑클이 대상 후보에 들 성적이 안 되는데 대상 후보에 올랐다는 주장.

2.5. 2002년 정규 4집과 개인활동 그리고 해체[편집]




핑클 4집 앨범 타이틀곡 영원 뮤직비디오
2002년 3월 8일 4집 앨범을 발표했다. 타이틀곡은 '영원'이었다. 4집은 1집부터 3.5집까지 멤버들이 사실상 공백기가 거의 없었을 정도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낸 속에서 나온 앨범들과 달리, 사실상 처음으로 맞은 제법 긴 공백기 동안 핑클이라는 그룹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맞이한 후 내놓은 앨범이었다. 그래서 긴 공백기 속에 비교적 여유롭게 앨범을 준비할 수 있었는데, 이 덕분에 핑클 4집은 역대 핑클 앨범 중 최상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앨범으로 남았다. 성숙한 느낌을 강조한 4집은 여러 장르의 음악을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발전된 믹싱을 보여주었음은 물론, 멤버들의 가창력도 이전보다 더 좋아지며 가수로서의 핑클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4집 앨범은 대중들에게 성숙한 핑클, 가수로서 한 단계 성장한 핑클을 보여주었다.

성유리의 생일 3월 3일 첫방을 시작으로, 타이틀곡 '영원'과 후속곡 'Don't Go Away'로 활동하였다. '영원'은 SBS에서 왕중왕 타이틀을 다시 한번 안겨 주었다. 1집 앨범처럼 발라드곡이 타이틀이 된 두번째 정규앨범으로[44] 당시 유행하던 미디어 템포 발라드풍 노래였다. 전체적으로 성숙해졌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뮤직비디오 역시 4명의 멤버가 각각 스토리를 가진 형식을 취했는데, 멤버 이진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과(3분26초) 후반부 자살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공식적인 4집 활동 첫방송이었던 2002년 3월 3일, SBS 인기가요 발산동 공개홀에는 많은 팬들이 운집하였는데 방송이 끝나고 공개홀 근처 공원으로 이동하여 팬미팅을 진행했다. 그리고 2002년 3월 30일엔 희대의 라이벌 걸그룹이었던 S.E.S.와 함께 MBC 음악캠프 1위 후보에 올랐지만 결국 S.E.S.가 1위를 차지한다. 다만 다음날 SBS 인기가요에선 핑클이 1위를 차지하나, 이는 S.E.S.와 맞대결이 아니었다.

영원 다음 후속곡은 팬들이 투표하는 형태로 선정한다고 발표했는데, 당시 팬들은 컴백 때 무대를 가졌던 'Never'와 지금도 핑클의 숨은 명곡으로 손꼽히는 ‘Fortune’[45] 등 의견이 많이 갈렸었지만 결국 2002년 월드컵 분위기를 고려해 소속사가 'Don't Go Away'로 후속곡을 결정하면서 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국 활동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만 흐르다 월드컵 시즌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앨범 활동을 접게 된다.

한편, 4집 활동 중간에 희대의 괴작(...)으로 평가받는 영화 긴급조치 19호에 출연했으며[46], SBS에서 <핑클과 가자가자> 라는 단독 예능을 런칭하기도 했다. 8월에는 마티즈 2의 모델로 발탁되었는데, 핑클의 마지막 상업광고 출연이 되었다. 2002년 11월 24일, 핑클은 마티즈 2 출판을 기념한 서울모터쇼에서 축하 공연 겸 4집 마지막 무대를 가지게 된다. 이 날 주말을 맞아 모터쇼를 보러온 관객들과 핑클의 4집 마지막 무대를 보기 위해 몰린 팬들로 인파가 넘쳐 모터쇼 현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급기야 핑클이 관객들의 안전을 당부하는 멘트를 직접 하기도 했다.

4집의 최종 판매량은 261,518장으로, 2002년 전체음반 판매량 19위를 기록했다. 활동 기간이 짧았고 또한 월드컵이 겹치면서 전체적으로 가요계의 불황이 심했는데 핑클도 이를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룹 활동과 함께 병행한 개인 활동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면서, 활동 마지막 해였던 2002년을 어느 정도 유종의 미를 거두며 끝내게 되었다. 이를 입증하듯 2002년 리스피아르의 여론조사에서의 핑클은 여자 가수 선호도 조사 1위를 기록하게 된다.

결국 2002년을 끝으로 핑클의 완전체 활동은 사실상 끝을 맺었으며, 2003년부터는 이효리옥주현의 솔로 앨범 발매 등을 시작으로 이진성유리도 연기자 생활을 본격 시작하는 등 개인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47]


파일:finkl.jpg

다. 이효리제니퍼 로페즈의 의상과 머리, 성유리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링귀걸이, 이진모닝구 무스메요시자와 히토미가 먼저 한 털모자와 비슷한 분위기의 상의 코디, 옥주현머라이어 캐리의 고양이 동반 화보 등이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나 비슷한 구석들이 많았다.

2.6. 2003년~ 개인 활동의 시작, 2006년~2018년: 그룹 활동 중단[편집]


4집 활동 중이었던 2002년 4월부터, 핑클은 그룹을 해체하지 않고 따로 또 같이라는 개인활동을 선언했다. 당시에는 생소한 개념이라 해체냐 아니냐를 놓고 팬들과 언론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으나 소속사에서는 해체가 아니라고 못박았다.[48] 따라서 2002년에는 그룹 활동과 개인 활동을 병행하였으나[49] 옥주현이효리의 솔로 가수 활동이 본격화된 2003년부터는 조금씩 이러한 경향이 뜸해졌고, 이진성유리도 연기자로 전향하고, 이효리가 솔로 가수로 대박이 터진 2003년 말부터는 사실상 따로 활동하게 된다.[50]



핑클 디지털 싱글 타이틀곡 FINKL 뮤직비디오
그러다 2005년 예능 야심만만에 오래간만에 그룹 완전체로 모두 출연했고, 10월 디지털 싱글인 'FINKL'을 내면서 완전 해체가 아니라는 것은 보여줬다.[51] 다만 FINKL은 방송활동도 거의 없어서 이때 싱글을 낸 줄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도 'FINKL'로 당시 음원사이트 점유율 3위이던 도시락[52] 주간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다만 이건 당시 도시락 사이트에서 디지털 싱글의 대대적인 프로모션(이벤트 팝업창이나 메인 배너 노출, 음원 추천 마크, 도시락 자체 CD제작 후 지급)을 진행해 얻은 결과기도 해서, 다른 곳에선 프로모션을 진행하지 못한 점 등 명성에 비해 결과가 조금 아쉽긴 했다. 참고로 핑클은 성유리 증언에 의하면 계약서가 없는 무계약 팀이었는데[53], 고로 dsp에 있는 동안은 핑클 활동 중 개인 활동이라고 보는것이 맞다고 할 수 있는 경우이다.

디지털 싱글을 발표한 지 몇 달 후, SBS 인기가요 무대 영상과 자켓 사진집 등을 포함한 형태로 한정판 DVD를 발매하였다. 이후 그룹 활동은 2019년 이전까지 중단되었고 완전한 개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효리가 솔로로 성공하고 잘나가는 동안 동생들에게 무심했다고 나중에 사과한걸 보면 다른 멤버들은 팀 활동에 미련이 있었던듯도 해보인다.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이때까지도 방송 활동을 활발하게 함과 동시에 개인 활동을 시작해, 핑클이 '해체'라는 개념 없이 자연스럽게 '각자의 길'을 선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핑클은 그룹 활동 시절 찍은 많은 CF와 예능몰이로 대중 노출츨 최우선 무기로 삼았고, 이때 다진 방송 활동으로 방송감도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솔로로도 한명씩 자신의 자리를 잡아가면서 '해체'라는 표현과 활동의 끊김없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길을 찾아 나름대로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중에 '털털함'이라는 이미지에 더해 '섹시함'까지 더해지며 제대로 포텐을 터뜨린 이효리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 탑 뮤지컬배우로 성장한 옥주현과 연기자로 자리를 잡은 성유리, 이진까지 남녀 1세대 아이돌을 통틀어 지금까지 가장 멤버 전부가 개인 활동을 잘 해나가는 그룹으로 위상을 굳힌 것은 이때의 자연스런 흩어짐이 역할을 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팀원간 사이도 나쁜게 아닌데 굳이 해체라는 단어를 쓸 필요없이 핑클 팬들을 굳건히 결집시킨 상황에서 그 인기를 자연스레 개인의 인기로도 끌고 올 수 있었다는 것.[54] 현재 2세대 이후 아이돌의 개인 활동에 보이그룹 신화와 더불어 여러모로 큰 영향을 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55]

이후 멤버들은..

리더인 이효리는 2000년대 가요계의 독보적인 아이콘이 되어 각종 가요대상을 휩쓸고, 이효리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다. 90년대, 00년대, 10년대, 20년대 모두 1위를 기록한 유일한 가수.[56] 또 각종 예능 프로그램(<해피투게더>, <패밀리가 떴다>, <효리네 민박>, <놀면 뭐하니?> 등)에서 활약하며 연예대상까지 받아 걸그룹을 넘어 솔로 연예인 역사에서도 먼치킨급 커리어를 작성한다.

성유리도 연기 활동 초반, <나쁜 여자들>, <막상막하>, <천년지애>에서 연기력 논란으로 욕을 제법 먹었지만[57], <천년지애>는 최고 시청률 29.7%를 찍을만큼 큰 인기를 얻은 드라마였고[58], 이후로도 <황태자의 첫사랑>, <눈의 여왕>, <쾌도 홍길동>, <태양을 삼켜라>, <로맨스 타운>, <신들의 만찬>, <출생의 비밀>, <몬스터> 등 웬만한 탤런트보다 좋은 필모그래피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연기력도 많이 늘어 콤플렉스를 극복해갔다. 이후 2010년대 들어선 2011년 발라드 솔로곡 한 사람을 내놓기도 했으며, <힐링캠프>를 통해 MC로도 활약했다.

옥주현은 의외로 솔로 가수 활동에서는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으나, 별밤 라디오 DJ로 높은 청취율을 기록하며 장수했다. 또 뮤지컬 배우로 전향하며 여기서 대성한다. 2005년 뮤지컬 <아이다>를 시작으로 <시카고>, <캣츠>, <브로드웨이 42번가>, <엘리자벳>, <레베카>, <위키드>, <마리 앙투아네트>, <마타 하리>, <스위니 토드> 등의 여주인공을 연달아 차지하며 양대 뮤지컬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휩쓸어 그야말로 최고의 뮤지컬 배우로 활약하고 있다.

이진은 원래 꿈이었던 연기자로 변신, <논스톱3>, <왕과 나>, <대풍수>, <출생의 비밀> 등 각종 드라마에서 주조연으로 활약했고[59] 예능에도 꽤 꾸준히 출연해 SBS <X맨을 찾아라(당연하지)>, <영웅호걸> 등에 출연했다. MBC 일일드라마 <빛나는 로맨스>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후 이진의 활동에 대해서는 이진/핑클 활동 중단 이후 참고.

이 효과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걸그룹의 레전드로 자주 손꼽히는 그룹이다. 2015년 1월 힐링캠프에선 MC인 성유리의 게스트로 옥주현이 초대되고 이효리랑 전화 통화 연결만 하였는데도 시청률이 7.4%로 전주 대비 2.4% 상승해서 그해 최고 시청률을 올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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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멤버들은 개인 활동 이후에도 여전히 친하게 잘 지냈으며 서로 축하할 만한 일이 있을 때에도 모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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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2014년 무한도전 토토가에서 이효리가 밝힌 바에 따르면 2008년 이효리 콘서트 이후로는 다 같이 모인 적이 한동안 없었다고 한다. 확실히 이땐 멤버들끼리도 큰 불화가 있다기보단 서로 각자 생활이 바빠서 소원하게 지내는 편이었던걸로 보이는데[60], 2013년 9월 이효리 결혼식 때도 멤버들이 단 한명도 참석하지 않아 불화설이 돌기도 했으나 지금 와서 보면 쓸데없는 해프닝이었다. 당시 결혼식은 제주도에서 가족과 몇몇 지인들끼리 나름 조촐하게 열렸는데, 멤버들은 모두 스케줄이 있었고 거리가 거리인지라 옥주현축가로 루비를 직접 불러 유튜브에 업로드하기도 했다.# 노래 마치고 나서 하... 가버렷!이 압권. 그리고 2015년 4월 26일, 불화설을 모두 종식이라도 하듯 오손도손 다정하게 모인 사진이 공개되어 팬들을 기쁘게 했다

2018년에 데뷔 20주년을 맞아 이진, 성유리, 옥주현이 이효리가 있는 제주도여행을 갔다. # 그리고 3년 만에 단체 사진영상을 올렸다.

2.6.1. 해체 논란[편집]


정규 4집과 마티즈 2 광고모델 계약 종료 이후 활동도 중단하고 핑클이 지금까지 음반활동이 없어서 해체한 그룹이라고 얘기를 많이 하는데 앞에서 언급했지만 핑클은 공식적으로 아직 해체 안 한 사실상 한국 최장수 아이돌 걸그룹이며 또한 멤버 전원이 핑클은 아직 해체 안 했다면서 단호하게 못박고 있다.[61] 하지만 각자 소속사도 달라졌고 서로의 활동 범위가 판이해졌기 때문에 2005년 디지털 싱글 'FIN K.L' 이후 후속 앨범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해서 사실상 해체 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2007년 이효리 생일파티와 2008년 성유리 생일파티 때 네 명이 함께 출연하거나 이효리 첫 번째 단독 콘서트 때 이진, 성유리, 옥주현이 깜짝 출연해 넷이 이벤트 무대를 벌인 적은 있다. 성유리는 핑클 얘기가 나오면 되도록 언급을 피했으나[62], 2008년까지 여전히 핑클 멤버임을 수차례 못박아왔고, 2013년 DSP festival에선 영상으로 "앞으로도 계속 저희 핑클도 많은 관심 부탁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진은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2009년 이진이 핑클 결합을 원치 않는다는 오보가 난 후 오보라는 사실을 피력하기 위해 팬사이트에 글을 쓴 적도 있다. 특히 이효리, 옥주현의 경우엔 매년 꾸준히 "핑클은 해체하지 않았다"고 말을 해왔다.

과거 소속사인 DSP조차 "현재 소속사가 다를 지라도 굳이 핑클이란 이름으로 넷이 활동하는 것에 대해 제재하지 않겠다"고 했다. 게다가 2004년 3월 DSP 사장 이호연이 특허법인을 통해 핑클 상표를 등록하기 위해 서류를 제출하였으나 2005년 6월 거절당한 기록이 남아있다. 즉, 핑클이라는 이름의 상표권은 DSP에게 없을뿐더러,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므로 굳이 앨범이 나오지 않더라도 이런 산발적인 이벤트는 일어날 수 있다.[63]

사실 핑클의 진정한 위력은 각자의 길을 떠난 후에 더 증명된 측면도 있다. 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그룹 해체 후 솔로로 전향할 때 큰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이들 모두 자신의 새로운 자리를 확고히 잡았고, 연예계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계속 다져나갔다.

2.7. 2019년 캠핑클럽과 완전체 활동[편집]


2019년 7월, JTBC 캠핑클럽을 통해 14년 만에 완전체로 예능 활동을 했다. 참고로 단체 예능은 2005년 1월 10일, 17일 출연한 야심만만 이후 최초다.


핑클 디지털 싱글 남아있는 노래처럼 뮤직비디오

2019년 9월 22일에 14년만의 신곡인 '남아있는 노래처럼'이 디지털 싱글로 발표되었다. # 음원은 멜론 실시간 차트에 78위로 진입[64]한 후 99위에 머무르고 있다가 캠핑클럽 방영 직후 85계단이나 올라 차트 14위를 차지하였고#, 지니 6위, 엠넷 5위[65], 벅스, 네이버뮤직, 소리바다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90년대 치트키 아이돌들 중 아무런 사건사고(?) 없는 거의 유일한 그룹이기에 다시 뭉친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화제였다. 특히 다른 가수들과 다르게 굉장히 솔직한 모습들로 90년대부터 예능감을 뽐냈던 핑클이기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이효리의 '배란일 드립'과 이진의 '구마의식' 등 예능감도 여전했다. 한편으로는, 갱년기 멤버들의 진솔한 대화와 눈물이 많은 프로기도 했다.

추가적으로, 엄밀히 말해서 캠핑클럽 출연은 핑클이 해체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결합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오히려 공백기를 끝내고 활동을 재개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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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데뷔일 논란[편집]


핑클의 경우 정확한 데뷔 방송이 기록되지 않고 있다.[66] 그래서 데뷔한지 한참 지난 오늘날까지도 팬덤끼리도 의견이 분분해 누가 맞니로 싸우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일단 1차적으론 핑클이 공식 데뷔 전부터 비공식 스케줄 및 행사, 비방 무대를 많이 해서 특별히 데뷔 방송 무대를 정해놓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고[67], 후술되어있듯 각 방송사간 데뷔 날짜 차이에 따른 설왕설래도 있지만 한편으론 음방이 아닌 예능이나 잡지 출연 등에 먼저 나간 것을 공식 데뷔일로 삼는 경우도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단 다수의 팬덤 측에서 인정하고 멤버들도 기념하는 데뷔일은 1998년 5월 12일이다.[68] 다만 정작 이 날이 무슨 방송이었는지는 전설 속에 묻혀있다.(...) 애초에 1998년 5월 12일인 화요일엔 음악방송이 없었다.[69] 그래서 5월 12일 데뷔일 설은 당시 케이블 KMTV의 쇼! 뮤직탱크가 화요일녹화하고 토요일방송을 했기 때문에 데뷔일이 해당 날짜로 정해진 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다만 이것도 가설일 뿐이며, 너무 오래 전 일이고 KMTV 또한 폐국된 지 오래 되어 정확한 정보를 찾을 수가 없다.

멤버들은 방송에서 데뷔 무대를 라이브로 진행했다가 완전히 망치는 바람에 악몽으로 남아있다고 '야간개장' 등 방송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이런 이유로 해당 날짜로 추측되는 1998년 5월 23일 MBC 생방송 음악캠프에서의 무대가 진짜 데뷔 날짜라고 추측했던 이들도 있었다.[70] 이게 맞다면 인터넷 기사 포함 과거 많은 언론들이 1998년 5월 12일 MBC 음악캠프로 핑클이 데뷔하였다고 보도한 것은 오보였던 셈이다. 한 팬에 따르면, 5월 12일에 잡지 촬영으로 먼저 데뷔하였다고 한다.#

한편, SBS에서 2019년 9월 업로드한 핑클 컴백 무대 모음 영상의 설명란을 보면, 핑클이 SBS 인기가요에 데뷔한 무대의 날짜는 1998년 5월 17일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영상 자료에 따르면 핑클의 첫 공식 지상파 데뷔 날짜는 SBS 인기가요에서의 5월 17일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도 정확한 게 아니다 보니....

다만, 1998년 5월 12일 데뷔설은 이미 상징적인 날이 되어버렸기에 이제 와서 데뷔일자를 바꾸는 것도 별 의미가 없긴 하다. 그리고 90년대만 해도 가수들이 음반을 내면 홍보를 목적으로 음악 방송보다 예능 프로그램부터 출연하는 경우가 꽤 잦았기 때문에 5월 12일에 출연한 방송이 음악 방송이 아닌 예능 프로그램일 가능성도 있다. 핑클 또한 오랜 팬들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1집 발표 후 음악 방송 출연 전에 지상파 퀴즈 프로그램부터 출연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5월 12일이 음악방송이 없는 화요일이었던 것을 보면 이 날은 예능에 출연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애초에 한 팬이 이효리의 예능 방송 출연 목록을 작성하다 알게 된 사실을 보면, 1998년 5월 9일에 '기쁜 우리 토요일'에 출연한 자료가 있다. 즉, 데뷔보다 빠른 예능 출연일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kmtv에서는 이미 2차례 4월 데뷔 그룹으로 소개된 적도 있었다.

핑클은 예능돌의 시조답게 활동기간 정말 많은 예능방송과 야외 행사를 뛰어다녔지만, 당시에는 vod 서비스 관리도 없었고, 유튜브도 없던 시기라 제대로 남겨진 기록이 드물기에 더 아리송한 부분이 있다.[71] 시간나면 모여서 족보 정리 한번 할 필요는 있어보인다.


결론은 정확한 데뷔일은 팬 한 명도 모른다는 것이며, 상징처럼 되어버린 5월 12일을 데뷔일로 보는 것이 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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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니는 핑클에 합류했고 1집 녹음도 다 했었다. 은지원이 핑클 전 멤버로 애니를 계속 꼽는 이유가 그때 은지원이 핑클의 1집 수록곡 shadow를 함께 녹음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당시 멤버들의 상징색은 애니(블랙), 옥주현(레드), 이진(블루), 성유리(화이트).[2] 재미있는건 S.E.S도 처음 컨셉은 힙합 걸그룹이었다 유진이 캐스팅되면서 그녀의 외모에 걸맞는 청순 걸그룹으로 컨셉이 바뀌었다.[3] 사실 후술되어있듯 애니 외에도 마지막 1자리를 놓고 여러 명이 교체되었다고 한다.[4] 당시 별이 빛나는 밤에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었고, 이 프로그램의 꼭지 코너였던 별밤뽐내기는 요즘으로 치자면 프로듀스 시리즈 비슷한 스타 등용문 같은 코너였다. 다만 옥주현은 이때 가수를 진지하게 하려고 여기 지원한건 아니고, 그냥 고딩 친구들과 같이 방송국이랑 연예인 구경이라도 좀 할까 싶어 지원한게 컸다고 한다. 참고로 옥주현은 이후 별밤 DJ도 지낸다.[5] S.E.S.의 메인보컬 바다도 학교 무대에서 Hero를 부르고 SM에 캐스팅되었던걸 보면 당시 노래 좀 하는 학생들에겐 애창곡이었던 모양.[6] 당시 옥주현은 성악하려고 이탈리아로 유학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옥주현 어머니가 유학 가기 전에 을 봤는데 무당이 "이번 해에 바다를 넘어가면 얘는 죽는다, 1년만 기다리면 귀인을 만나니 기다리라"고 해서 유학도 못가고(옥주현은 첨엔 황당해서 무당이 뭔데 자기 인생에 간섭하냐고 따지러 갔는데 오히려 자기도 그 아우라에 제압당해 돌아왔다고 한다(...)) 학교 1년만 꿇은 상태였다. 훗날 옥주현은 그 귀인이 바로 이호연 사장이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7] 그런데 정작 합류한 이후엔 데뷔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쌍꺼풀 수술을 안 시켜주다 뒤늦게 시켜줘서, 데뷔하고 한동안은 쌍꺼풀이 부은 채로 활동했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8] 옥주현은 성유리가 놀이공원에서 픽업되었다고 했는데 이게 올림픽공원으로 보인다.[9] 김동완, 유진, 이효리, 김상혁 등을 캐스팅한 바 있는 그 분야에선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한다.[10] 나머지 한명은 이진이었는데, 성유리 왈 '진이 언니는 멤버라고 생각했지만 주현 언니는 진짜 선생님인줄 알았어요.ㅎㅎ'[11] 옥주현이 방송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처음 오디션땐 성유리가 노래도 그닥이고 스타일도 약간 노는 애 스타일로 와서 뽑을까 말까 망설이다 그래도 음색이 좋으니 다음날 화장하지 말고 츄리닝만 입고 내츄럴하게 와보라고 했는데, 다음날 그렇게 수수하게 차려 입고 온 성유리가 너무 예뻐서 뽑았다고 한다.[12] 그런데 이때 예능 드립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디션곡으로 1997년 11월 데뷔한 S.E.S. 노래를 부른 것 같다고 회상하는거 보면, 오디션을 본게 11월 이후로 추정될 여지도 있다.[13] 이 2명 외에도 옥주현이 2007년 상상플러스에 출연해 밝힌 바에 따르면 티티마의 최유진, 탤런트 임유진 등 여러 명이 네 번째 멤버의 자리를 거쳐갔다고 한다. 특히 이날 방송에서 유명 걸그룹 메인보컬이 핑클 데뷔곡 녹음 중 욕설을 하다 짤렸다고 밝혀 방송 후 옥주현이 경솔했다며 네티즌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다만 그땐 누구였는지 딱히 밝혀지진 않았는데, 방송 10년 후인 2017년에 클레오채은정이 그 멤버가 결국 자신이었음을 모 잡지 인터뷰를 통해 실토했다. 실제로 채은정은 핑클 데뷔 한달 전에 하차해 사실상 이효리가 합류하기 전 마지막 데뷔조 멤버였다.[14] 당시 DSP의 전략으로 유명한 SM+1 시스템이었다. 당시 H.O.T, S.E.S 등 SM 측 주요 아티스트들 보다 한 명을 더 뽑아 데뷔시키던 전략. 원래는 '애니'를 포함해 데뷔한다고 이미 광고를 했던 상황에서 4번째 멤버가 계속 바뀌어 데뷔가 미뤄지고 있었다. 그래서 옥주현, 이진, 성유리는 지쳤던 상황이었다.[15] 이 그룹이 타샤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며, 원래 이효리는 월드뮤직에서 윤미래와 99년 데뷔하게 되는 탤런트 임유진과 함께 3인조 힙합 그룹 업타운 걸스를 준비하다가 이 팀이 어른의 사정으로 무산되고 같은 회사의 연습생 신분이던 샵의 이지혜, MC몽, 신화의 김동완과 함께 10대 댄스 그룹을 준비하던 차에 DSP에 캐스팅 되었다. (다른 방송에서 탁재훈이나 이지혜, 룰라의 이상민이 같은 소속사(당시 월드뮤직)에 있던 연습생 이효리를 기억하기도 했다.) 타샤니는 한참 후에 윤미래와 본래 핑클 데뷔조였던 애니가 함께 모여 만든 듀오 그룹이며, 타샤니는 원래 윤미래의 솔로 데뷔 프로젝트였지만 앨범 발매 1달전에 듀오 체제로 바뀐 그룹이다. 즉, 타샤니와는 상관없다.[16] 성유리 역시 무릎팍도사에서 우스갯소리로, 캐스팅 된 이효리를 처음 봤을 때 힙합 차림에 청순한 얼굴을 보고서 "됐다!"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 3명만 있을땐 좀 불안했거든요. 물론 이효리 왈 이후 한 프로듀서 앞에서 노래 오디션을 봤는데, 사장이 바로 OK했다는 말에 프로듀서가 옥주현 이상으로 노래 잘하는 애가 들어온건가 싶어 기대하고 봤다 실망했다는 드립을 치기도 했다.[17] 친구가 H.O.T. 숙소 근처에 살아 이효리도 본 적이 있던 옥주현이 우연찮게 얻은 이효리 사진을 학생 시절 워너비처럼 들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이효리가 기획사에 왔을땐 그때 그 언니가 나랑 같은 팀이 된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18] 특이한건 성유리 증언에 따르면 이 당시 계약서가 없었다고 한다. 즉, 사장이 알아서 돈을 준 셈. 어찌보면 주먹구구식인 이 당시 DSP의 경영을 보여주는 한 단초이기도 하지만, 대우 잘해줬다는 가수들 증언을 보면 착취를 한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젝키랑 핑클이 떠난 이후부턴 DSP도 시대적 흐름에 맞춰 계약서를 쓰게 된다.[19] 2015년 핑클 회동 당시 옥주현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 보따릴 펼쳤더니 재미난 일들이 많긴 하다. 넷은 여러모로 세고 특이했다. 이상하리만큼 운이 좋았다, 우린. 가수가 되고 싶단 큰 꿈도 없이 캐스팅된 아이들. 노래 안 되고 춤도 안 되는데 '연습생 시절'이란 것도 없이 그 상태로 데뷔를 시켜서 망할 거라고 확신하며 아무 기대도 겁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예상대로 데뷔곡 '블루레인'은 큰 집중을 받지 못했지만 좌절하지도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우리 사장님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곡으로 방향을 바꿔 빛의 속도로 일을 진행했다. 뮤직비디오를 찍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유치한 가사를 립싱크하라니. 이걸로 앞으로 방송도 해야 하냐고. -이것봐 나를 한번 쳐다봐. 나 지금 예쁘다고 말해봐-콜미 콜미 콜콜 기 붜 코올 -난 니 거야- 우린 모두 하기 싫은 티를 뚝뚝 묻혀가며 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터질 줄이야…! 그 이후 고공행진. 노래 춤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예능의 절대 강자로 시청률을 제압하던 핑클은 잠자는 시간, 가요 프로그램 출연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예능촬영에 몰두. 노래 연습은 안녕… 춤은 모두가 따라 출 수 있는 걸로. 오늘 밥 먹으면서 저 위의 내용으로 웃음꽃이 활짝 폈다. 신기하지 않냐며, 잠깐 꿈을 꾸고 깨어난 것 같다며. 갖춰진 것도 없이 운이 억수로 좋았던 건 말이 안 되는 걸 되게끔 옆에서 애써준 사람들의 공이 크다고…FBI에서 훈련 받는 것보다 우리 넷을 케어하는 게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__^) 매니저 오빠들. 불도저 이호연 사장님. 오늘 귀 좀 간지러우시겠다. 핑클을 에워싼 숲이 되어준 그대들에게 고맙고 보고 싶고 미안하고 넷이서 이야기 나누며 많이 그리워했어요. 오겡키데스카.[20] 2013년 라디오스타에선 이효리가 착각했는지 2집인 '영원한 사랑' 얘기를 했는데, 2012년 힐링캠프에서 밝힌 바나 아래의 핑클 화해 언급 영상을 봐도 1집 '내 남자친구에게' 활동 당시로 보인다.[21] 사실 당시만 해도 핑클의 실질적인 리더는 이효리도 인정했듯 옥주현이었다.[22] 이효리는 이미 대학 1학년의 프리한 생활을 하다가 규제가 있는 팀 생활을 하는 입장이었고, 당시 핑클은 S.E.S.처럼 합숙 생활도 하지 않고 집에서 매니저가 차로 각 멤버들을 태워서 가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멤버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만한 시기나 동갑친구도 없던 이효리 입장에선,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 입장에 일 펑크만 안내면 되지 이게 팀의 이미지에 폐가 갈 수 있는 행동이라는 생각을 이땐 크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원래 하려던 힙합 걸그룹이었으면 큰 문제까진 안됐을지도 모를 행동도, 핑클이란 아이돌 걸그룹 팀에는 지장이 됐던 것.[23] 옥주현은 후에 개종하지만 당시엔 불교 신자였고, 성유리는 아버지가 목사였다. 이진은 아버지가 군인이였다.[24] 이건 1998년 이후다. 1998년에 이효리 제외 세 사람은 다 미성년자였다. 그래서 이효리는 애들이 술 악마에 들린 자기를 위해 기도한다는 드립을 치기도 했다.[25] 실제 이효리 얘기하던게 아니었다고 한다.[26] 이는 신화와도 비슷하다. 신화는 대기실에서 주먹이 오갈 정도로 심하게 다투었지만, 오히려 멤버 탈퇴 없이 어느 그룹보다도 돈독하게 오랜기간 유지되고 있다.[27] 여담으로 골든디스크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신인상을 두 그룹이 공동수상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당시 S.E.S.가 1집으로 60만장, 2집으로 30만장 넘게 팔은 상황에서 공동수상을 받게 돼서 공정성 논란이 생기기도 했다.[28] 심지어 2020년대까지 안티 기질을 못 버리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극소수 있어보인다.(...)[29] 단, <영원한 사랑>이 발표된 1999년엔 6월 30일 발생한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의 여파로 이후 각급 학교의 수학여행은 축소되는 분위기였다.[30] 다만 핑클은 전체 활동 기간을 통틀어서 보면 요정 컨셉 곡이 의외로 드문 팀이었다. 그만큼 컨셉 변화를 많이 가져간 팀이란 소리.[31] 실제 구글에 영원한 사랑 장르를 검색해보면 한국 댄스/일렉트로닉, 한국 발라드, K팝으로 나온다.[32] 1위에는 실패.[33] 영원한 사랑, Now와 더불어 지금까지도 후배 가수들이 종종 커버하는 곡으로, 이후 다비치, 오마이걸, 구구단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다.[34] SBS 주관 서울가요대상, SBS 가요대전.[35] 1위 조성모 180만 장, 2위 130만장 H.O.T.[36] 핑클 일부 팬들은 음반 판매량만 보는 것은 골든디스크 시상식이라며 부인하지만 음반 판매량 점수 10%도 확실히 들어갔다.[37] 핑클 팬들이 이제 와서 99년 SBS 인기가요 연간 1위라고 주장하는데 99년 연말 결산 자체를 하지 않았다. 명백한 날조.[38] 한 핑클 팬이 H.O.T.에 이어서 2위를 했다고 하지만9#, '그게 아직 자료가 있겠냐? 핑키들 가슴과 머릿속에간직돼있지..'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며 대답을 회피하였다. 그리고 애초에 H.O.T.는 소속사와 SBS 사이가 안좋아서 99년 가요대전에 불참하였다.[39] 99년에 SBS가 북한공연을 추진해서 핑클이 대표로 참석했지만 같은 DSP 소속의 젝스키스도 함께간 공연이었고 젝스키스도 10대 가수상 수상자로 선정됐기에 핑클만 독보적으로 점수를 받을 부분도 아니다.[40] 실제로 99년에 SM이 SBS와 싸워서 가수들이 시상식 불참을 선언하였으며, 핑클의 DSP는 SBS와 친하게 지내는 소속사였다.[41] 성유리가 2009년 무릎팍도사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대규모 합동 공연이 있으면 당시만 해도 압도적이었던 남자 그룹 팬들이 X자 표시를 하며 핑클 공연 관람 거부 제스처를 취해 벽 보고 노래하는 느낌이 든 적도 있었다고 하며, 어느 날 혼자 여자 화장실에 갈 일이 생겼는데 이를 노리고 들어온 안티 여고생들이 자신을 빙 둘러싸고 생전 첨 들어보는 온갖 욕짓거리를 다해서 멘붕이 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걸 보고 욱한 이진이 유리 괴롭히지 말라고 구해줬다는 설도 있는데 확실친 않다.) 그래서 성인이 된 지금도 여고생이 3명 이상 옆을 지나가면 식은땀이 흐른다트라우마를 고백하기도 했다.[42] 해피투게더에서 이진이 고백한 얘기에 의하면 안티팬들이 하도 괘씸했던 나머지 한 날은 안티 학생 한명을 잡아서 차에 데려온 후 반성문을 쓰게 시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진짜 걸그룹 중에선 탑급 팬덤층이 있던 핑클이니깐 그나마 이정도였고, 당시 팬덤 규모가 더 적고 섹시 컨셉으로 제대로 미운 털이 박혀있던 베이비복스에 대한 테러 행위는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하여튼 온라인에서 악플 다는 정도 수준의 지금과 달리 1세대(좀 더 길게 보면 1.5~2세대까지) 아이돌 팬덤 문화의 악성적 변질은 오프라인 테러로까지 이어지는 수준이었다. 이효리도 핑클 시절 차를 한대 사 몰고 나갔다 안티 팬들의 토마토 세례로 차가 엉망이 된 적이 있었는데, 이에 빡이 쳐 안티들에게 '차라리 욕을 하지 왜 토마토를 던지고 X랄이야'라고 소리를 지르자 안티들이 쫄아서 튄 적이 있었다고 한다.[43] 1위는 아쉽게 실패.[44] 정규앨범 외엔 2.5집의 '나의 왕자님께'도 있긴 하다.[45] 소속사 후배 카라의 곡 상당수(Rock U ~ 숙녀가 못 돼까지의 타이틀곡 전부)와 레인보우A, Mach를 만든 Sweetune의 초창기 곡이다.[46] 이호연 사장이 공동 기획자였다.[47] 라이벌이었던 S.E.S. 역시 2002년 연말 해체를 선언하며 두 그룹은 사실상 동시기에 함께 퇴장하게 되었다.[48] 이는 아예 2002년 12월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했던 S.E.S.와 달리 당시만 해도 애매한 개념이라 더욱 더 논쟁이 뜨거웠다. S.E.S.도 당시 이런 개념을 제대로 인지했다면 우리도 굳이 해체 안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을 정도. S.E.S.는 팀 활동을 계속 하고 싶었지만 소속사와 멤버 개개인간 계약이 자꾸 어긋나면서 이럴거면 솔로 활동에 집중하고 팀은 해체하는 쪽으로 가자고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49] 2002년 4월부터 옥주현은 별이 빛나는 밤에 DJ인 별밤지기로 들어가고, 이효리는 해피투게더, 타임머신 MC로 들어가는 등 개인활동을 늘려나간다.[50] 만약 이효리가 초대박이 아닌 적당한 선에서 성공한 결과를 냈다면 2004년에 핑클이 컴백했을 수도 있다. 당시는 S.E.S도 없었고 소몰이 열풍이 슬슬 시작될때라 걸그룹 시장 자체가 경쟁자가 없다시피해 핑클을 1강으로 봐도 무방했다.[51] 원래는 3~4월에 발매할 예정이었지만 당시 멤버들의 스케줄로 미루어졌다.[52] 지니뮤직의 전신이기도 하다.[53] 당시 DSP의 주먹구구식 경영 형태를 보여주는 한 단초지만, 그래도 과분한 대우를 받았다는거 보면 인간적 신뢰 관계로 간 사이라고 볼 수 있겠다.[54] 만약 핑클도 S.E.S와 같이 다른 소속사를 선택을 했다면 역시 논란이 있었을 테고 그 대상은 소속사를 이적한 이진, 성유리로 향했을 것이다. (성유리는 이후 소속사를 바꾼 것에 대해 '있을땐 그 소중함을 모르잖아요'라고 dsp가 크게 잘못한건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단지 가수 전문 기획사다보니 연기자 전문 기획사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들은 아예 솔로 가수는 할 생각도 없다고 못을 박듯(물론 가창력 측면에선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었지만, 팬들을 위해서라도 한번 정도는 시도해볼법도 했다. 이후 성유리가 솔로곡을 내놓긴 하는데 시기가 무려 2011년.) 배우 전문 소속사로 이적했다. 때문에 사실 핑클도 논란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체가 아닌 핑클 멤버라는 것을 꾸준히 강조했고, 당시엔 dsp와 핑클 멤버들이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 했는지 모를 팬들을 달래기 위한 말들로 어떻게 넘어갔다.[55] 핑클 이후로 '해체' 선언을 하지 않고 후일을 기약하는 대신 그룹 활동을 중단하는 후배 아이돌들이 많이 생겼다.[56] 가수로 최전성기는 90~00년대였고, 2010년대도 여전히 인기는 있었지만 가수 외 예능인+유기견 보호 등 다른 영역의 활동으로 더 주목받았다. 2020년대 1위도 예능 놀면뭐하니를 통한 싹쓰리, 환불원정대 활동을 통해서였다. 물론 이정도로 롱런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거지만.[57] 본인도 맘 고생을 꽤 해서, 2004년 드라마 황태자의 첫사랑이 끝난 후엔 연기자로 좌절감을 겪어 연예계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었다고 한다.[58] 사실 연기로는 '나는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다' 드립으로 안티들의 비꼼을 당하긴 했지만, 반대로 성유리 개인의 매력 측면에선 나름 괜찮게 통한 것도 있었다. 이후 예능에서 패러디되는걸 봐도 양날의 칼같은 캐릭이었다.[59] 단역 연기자 출신답게, 사극에서의 표정 연기나 발성도 꽤 괜찮은 수준이었다.[60] 2015년 1월 힐링캠프에서도 성유리가 김제동을 통해 이효리한테 전화해 폰 번호가 바뀌었다고 어떻게 번호도 안 가르쳐주고 폰을 바꿨냐고 하니 이효리가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하고, 통화 종료 후 성유리가 이렇게 한번 통화하면 간단한걸 왜 한동안 언니한테 연락 안했을까 하고 울기도 한걸 보면 사이가 나빴다기보단 한동안은 소원하게 지낸걸로 보인다. 사실 생각해보면 친척끼리도 그런 경우는 다반사인데 어찌보면 연예인이다보니 더 주목도가 있는 것.[61] 혹자는 1997년에 데뷔했던 베이비복스, 디바도 공식 해체는 아직 안했으니 이쪽이 원조라고 하지만, 아이돌 걸그룹 측면에선 핑클이 원조다. 디바는 애초에 아이돌보단 힙합 컨셉이 강한 그룹이었고(이런 식이면 1954년 데뷔한 은방울 자매도 아직 해체 안했다.(...)), 베이비복스는 1집이 망한 이후 아이돌 컨셉으로 바꾼게 S.E.S., 핑클이 대박난 이후 2집부터라 애매하다. 게다가 핑클과 가장 큰 차이점은 멤버 교체가 잦았다. 또 2020년대 기준으론 멤버 개개인의 연예 활동도 거의 없는 상태라(베복의 윤은혜 정도만 간간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애초에 윤은혜는 베복의 1기 멤버도 아니었고.) 사실 위상 면에서는 당시나 지금이나 핑클의 그것에 비하기엔 좀 부족하다.[62] 훗날 싸이더스와 개인 팬들, 그리고 여배우 이미지를 위해 피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를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은 하나라도 화제되는 재밋거리가 있으면 모든 연예인들이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는 게 트렌드다.[63] 2021년을 끝으로 JYP랑 재계약을 안했던 보이그룹 갓세븐은 상표권이 JYP한테 있지만 그룹을 유지한 상태에서 각자의 길로 가는걸로 정리했다.[64] 지니 29위, 벅스 18위, 엠넷 85위, 네이버뮤직 22위, 소리바다 10위로 진입.[65] 엠넷에서는 23일 오전 8시에 최고 순위 2위까지 차지했다.[66] 핑클을 제외한 90년대 팬덤이 어느 정도 있는 가수들은 다 자기 가수들의 데뷔일을 알고 있다.[67] 위키백과 문서에 따르면 1998년 4월에 비공식 무대를 가졌다고 한다. 심지어 지식백과 CD앨범 리뷰에 따르면, 1998년 3월잡지 '뮤직 웨이브' 신인 코너에 핑클이 첫 등장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진짜 신화보다 데뷔 선배였을수도 있다.[68] 이 설을 부정하는 팬들은 멤버들이 데뷔 날짜를 착각하는 것 아니냔 의견도 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난 2020년대면 몰라도 데뷔 이후 몇년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이때를 공식 데뷔일로 기념한 마당에 멤버나 당시 기획사나 주변인들이 설마 단체로 기억이 틀렸겠냐고 보는 의견이 다수다. 즉, 어떤 무대나 방송을 데뷔일로 정했냐 문제는 있을지 몰라도 해당 날짜 자체는 멤버들이 공식 인증한 데뷔 날짜라는 것. 물어보던지[69] 당시는 음악방송의 본좌급이던 가요톱10이 종영되고 3개월 남짓 지났을 때였고 뮤직뱅크가 첫방송되기 한 달 남짓 전이었다. 그래서 후술되어있듯 예능 방송 출연이나 잡지 촬영설도 나온 것.[70] MBC가 공식적으로 개설한 네이버TV의 타임머신TV 채널에서 2016년에 핑클의 데뷔 무대를 업로드했는데, 설명란을 보면 1998년 5월 23일 생방송 음악캠프 5회 방영분으로 설명하고 있다.[71] 그나마 유튜브에 검색되는 영상들만 정리해서 리더인 이효리의 방송 출연 목록에 작성해보았다. 몇몇 기록은 유튜브 링크도 있으니 궁금하시면 이효리 목록을 구경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