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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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제조 방식
3. 역사
3.1. 고대부터 중세까지: 신의 피
3.2. 식민지 시대 이후: 국민주
3.3. 맥주의 침략: 식어버린 인기
3.4. 현대: 재부흥
4. 관련 신화
5. 여담


1. 개요[편집]


Pulque

멕시코의 전통주. 용설란의 수액을 채취해 발효시킨 양조주이다. 우유처럼 탁한 하얀색에 거품이 살짝 일고, 약간 끈적한 식감에 신 효모 맛이 나나, 효모 대신 자이모모나스 모빌리스라는 특수한 박테리아로 발효시킨 것이다. 이 풀케를 밑술로 삼아 메스칼(Mezcal)이나 데킬라를 만들기도 한다.[1]

2. 제조 방식[편집]


다 자란 용설란에게서 하루에 두번, 총 5~6리터의 수액을 쇠주걱[2]으로 채취한 후 통에 담아 티나칼(Tinacal)이라는 이름의 전용 양조장으로 옮긴다.[3] 티나칼 안에 있는 발효용 통[4]에 수액을 붓고, 씨간장처럼 대대로 내려져오는 씨-풀케(semilla 혹은 xanaxtli)를 넣고 7일에서 14일의 발효기간을 거쳐 만든다. 이 과정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즉 집안 남자들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나 온도, 습도, 수액의 품질 등 여러 요인에 따라 영향을 쉽게 받으며 그만큼 상하거나 시어지는 것도 쉽다.[5]

완전히 발효되기 전 풀케는 통에 담겨 판매된다. 발효가 계속 이어지는 바람에 술이 완성되어도 상하기 쉬우며, 빠른 시간 내로 소비하거나 증류주의 밑술로 만들어야 한다.

3. 역사[편집]



3.1. 고대부터 중세까지: 신의 피[편집]


석재 조각 유물에 의하면 서기 200년 이전의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양조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기원은 자연적으로 발효된 용설란의 수액에 꼬인 주머니쥐 등의 설치류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마시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풀케를 제조할 수 있을만큼 용설란이 성숙하는데는 자그마치 12년이 걸리고, 수액의 중독성도 매우 강한데다 상술했듯 제조 및 발효과정도 매우 복잡하고 섬세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나 특수한 상황 하에서만 마실 수 있는 술이 되었다.[6] 아즈텍 제국 시절에는 음료 자체가 신성시되었으며 마야우엘, 사냥의 신 믹스코아틀 신을 섬기는 축제에서 의식용 음료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특히 사제들을 고양시키고 인신공양에 쓰일 제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귀족과 사제, 전사들이 마시기도 했다. 평민이 풀케를 마실 때도 있긴 했으나, 노인이나 환자, 임산부에게만 허락되었다.[7] 전 계층을 통틀어 풀케를 비롯한 주류의 과음은 허락되지 않았고, 더 나아가 술주정을 부리는 것은 전재산 몰수 및 추방(초범), 심지어는 사형(재범)까지 당할 수 있는 중범죄로 여겨졌다.

3.2. 식민지 시대 이후: 국민주[편집]


16세기 초중반 콩키스타도르의 침략 이후 풀케는 고위층이나 종교인의 전유물에서 대다수의 평민들과 스페인인 등의 외지인들도 쉽게 맛볼 수 있게 변해 신성을 잃은 일개 술로 전락하여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과음금지 등 기존의 풍습도 사라져 가톨릭식 축제에 사용되기도 하며 풀케의 제조와 소비는 점점 늘어만 갔고, 서민들이 길거리 노점이나 카트에서 흔히들 파는 술로 변했다.

특히 멕시코 시티에서의 풀케 소비가 급증했는데, 주세까지 걷는데도 워낙 인기가 좋아 17세기 후반까지 무면허 포함(...) 100곳 이상의 풀케 전문 선술집풀케리아(Pulqueria)가 생겨났다.[8] 비단 현지인 뿐만 아니라 스페인 출신 하층민, 크리올, 흑인 등등 다양한 계층과 출신의 사람들이 풀케리아에 마음껏 드나들었다. 단순히 전통주를 파는 술집에서 그치지 않고 음식[9]을 내오거나 여성 종업원을 고용하고 소규모의 라이브 공연까지 행하는 등 세속화는 극에 달했고, 이를 탐탁치 않게 본 상류층들은 온갖 규제[10]를 걸어댔지만 그럼에도 풀케와 풀케리아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19세기, 현대 멕시코의 역사로 접어들면서 시골에 산재해 있던 풀케리아는 도시화와 부족한 규제로 인해 점차 도심에도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천 곳이 넘게 들어선 풀케리아는 개성을 발휘해 과달루페의 성모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가게 내부를 화려하게 꾸몄고, 멋지게 지은 가게 이름은 중요한 정체성이자 현대 멕시코의 대중 문화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11] 고급화도 진행되어 하층민, 서민들의 술집에서 부자도 오가는 주점이 된 건 덤. 폭발적으로 증가한 생산과 소비는 300곳이 넘는 거대 용설란 농장과 풀케 귀족(Pulque Aristocracy)이라 불리는 신흥 부자 세력을 낳았고, 철도가 깔린 후 수도로 풀케를 공급하고 유통하던 노선의 기차는 풀케 열차(Pulque Train)라는 별명으로 따로 불리기도 했다.

이렇듯 풀케는 전용 술집을 통해 멕시코 전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19세기 후반에는 빈부격차에 관계없이 온 계층의 멕시코인들에게 사랑받는 국민주가 되었다.

3.3. 맥주의 침략: 식어버린 인기[편집]


하지만 20세기, 유럽식 맥주가 도입되면서 풀케의 인기는 서서히 꺾이기 시작한다. 멕시코 혁명으로 인한 음주 반대 캠페인, 정확하게는 풀케 반대 캠페인이나 까다로운 제조 및 발효과정 탓에 해외로의 유통이 제한되어 내수용 주류로 그친 것이 그 원인이라는 설도 있지만 제일 큰 원인은 맥주 때문이다.

유럽 이민자 출신의 맥주 양조업자들은 멕시코에 뿌리내리기 위해 풀케를 깎아내리는 작업을 실시했는데, 대표적으로 든 게 바로 위생이었다. 맥주는 깔끔하고 현대적으로 제조되지만, 풀케는 동물이나 인간의 똥이 들어있는 인형을 집어넣어 발효시킨다는 소문을 퍼트린 것. 많은 풀케 양조업자들이 반발했지만,[12] 이 비방은 매우 큰 효과를 보여 많은 멕시코인들이 풀케를 멀리하고 맥주를 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풀케는 맥주에 밀려 국민주에서 빈곤한 사람들이나 시골에 사는 촌놈의 술로 격하되고 말았고, 소비는 줄어들어 많은 풀케리아와 풀케 양조장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 많던 용설란 밭에는 보리가 심어졌다.

3.4. 현대: 재부흥[편집]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들어 풀케는 복고풍 열풍으로 인해 다시금 재조명을 받는다. 멕시코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젊은이들과 풀케리아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노년층의 응원 덕에 숨통이 트인 것으로, 기존의 단점이었던 보관이나 배송에 관한 문제는 약간의 맛 변화를 감수하고 캔에 담아 판매하기 시작했다. 운동선수보디빌더들에게도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꽤 팔리게 되었다고.

4. 관련 신화[편집]


용설란의 중앙에 모인 수액은 여신 마야우엘의 피로 여겨졌다. 마야우엘은 수액을 채취하는 법을 알려준 신에 불과하고 풀케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준 자는 판테카틀(Pantecatl)이라는 인간 여성이라는 전승도 있다.

풀케와 관련된 신들, 그 중 술판을 벌이거나 술의 효능을 상징하는 신들은 대체로 토끼와 관련이 있었고, 이들이 속한 집단을 400마리의 토끼를 뜻하는 센촌 토토치틴이라 불렀다. 아즈텍 달력의 제례명을 따서 두 마리 토끼를 의미하는 오메토치틀리라 부르기도 했다. 이에 따라 풀케를 담은 술병은 토끼의 형태로 빚어졌다.

테스카틀리포카케찰코아틀이 죄를 범하도록 먹인 술이 바로 풀케인데, 이 때문에 케찰코아틀은 여동생(혹은 금욕적인 여사제) 케찰페틀라틀과 함께 종교의 의무를 저버리고 나태해졌다고 하며,[13] 술에서 깬 후 이를 부끄러워하다 분신자살을 해 재는 하늘로 승천하고 남겨진 심장을 샛별의 신 틀라우이즈칼판테쿠틀리로 만들었다고 한다. 스페인인에게 유리한 다른 전승에 의하면 케찰코아틀은 언젠가 복수하겠다며 바다로 추방당했고, 그 귀환과 복수의 때는 1519년이라고 전해진다. 마침 이 해는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 해안에 상륙하고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격한 때와 동일하다.

주머니쥐[14]가 손으로 용설란을 파헤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풀케를 마신 후 최초로 취한 자라는 명성을 얻었단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이로 인해 의 진로를 결정하던 주머니쥐가 꽐라만 되면 직선으로 흐르던 강들을 하나같이 구불구불하게 꼬아놨다나...

역사 상의 인물라기보다 전설의 존재로 여겨지는 톨텍소치틀 왕비가 시집갈 때 용설란 수액을 혼수로 가져갔다고도 하며, 다른 이야기에서는 소치틀이 풀케를 발견한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5. 여담[편집]


원래 나와틀어로 불리던 이름은 옥틀리(octli)였는데,[15] 망한(...) 옥틀리를 의미하는 말인 옥틀리 폴리우키(octli poliuhqui) 중 폴리우키 부분을 술 이름으로 착각한 스페인인들에 의해 풀케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Fate/Grand Order에 등장하는 테스카틀리포카가 발렌타인 스토리에서 이 술을 언급한다. 정확하게는 마스터에게 핫초콜릿을 건네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거든 풀케로 한 잔 하자는 권유를 한 것. 원전의 전승을 생각해보면 어째 꿍꿍이가 있을 것 같지만(...) 다행히도 해당 게임에서는 보기보다 건전한 캐릭터성으로 출연하니 안심해도 될 듯 하다. 이 밖에도 2부 7장 후편에서 데이비트 젬 보이드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한 의식의 재료로 쓰이는 모습이 나왔다. 향이 강렬해서 난폭해진 공룡도 불러들인다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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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하게는 블루 아가베(혹은 데킬라 아가베)의 수액만으로 만들어진 풀케를 특정한 주에서만 증류해서 만들어진 술만을 데킬라라고 부를 수 있다. 메스칼은 블루 아가베 외의 용설란 수액으로 만들어진 풀케를 증류했거나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진 용설란 증류주들을 총칭해 부르는 것이다.[2] 스페인인이 오기 전에는 긴 을 빨대나 호스 삼아 수액을 채취했다. 참고용 이미지[3] 나무 지붕이 있는 돌 창고라 보면 된다. 벽의 윗부분은 공기 순환을 위해 열려있으며, 벽의 정면은 톨텍의 소치틀 왕비나 과달루페의 성모 등 다양한 모티브를 삼은 그림이나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4] 나무 틀 위에 소가죽을 늘어놓은 통의 형태를 하고 있다. 티나칼의 벽면에 달라붙도록 설치하는 편. 요즘은 플라스틱으로도 만든다고 한다.[5] 이래서 미신적인 요소가 강해졌으며, 노래와 기도 등 종교적인 행위를 하며 발효를 시키기도 하거니와 티나칼 안에 여자, 어린이, 외지인이 들어가는 걸 금지한다. 풀케의 맛이 나빠진다며 생선 통조림을 먹고 들어오는 것도 금지고, 운이 없어진다거나 재수가 없다며 모자를 쓰고 들어오는 것도 금지다. 그나마 모자 쓴 사람은 모자 안에 풀케를 채운 후 그걸 마시면 다시 운이 좋아진다는 미신이 붙어있다.[6] 현대화가 된 멕시코에서도 제조와 유통에 난항을 겪었던 만큼 아즈텍 제국 당시에도 양조가 꽤 어려워서 풀케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의례로 진화했을 정도였다. 아즈텍 시절의 양조업자들 또한 미신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었고, 발효 기간 동안에는 술을 상하게 만들 거라고 여겨진 성행위를 삼가 금욕적으로 풀케 생산에 임했다고 한다.[7] 지금 와서 보면 임산부에게 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기겠지만, 당시에는 풀케에 치유력이 있다고 믿었다.[8] 기존의 풀케를 팔던 노점에 벽과 천장을 더하다가 주점으로 발전한 것이다.[9] 엔칠라다, 케사디야, 타코, 소페스 등의 요리를 내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음식류는 주로 낮에 많이 팔았다고.[10] 개방된 지역에 위치해야 하고, 문을 달아놔선 안 되며 야간 영업은 금지되었다. 술만 팔고 그 외의 음식, 음악, 춤, 남녀 간의 결합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도 있었다. 이 규제를 받아들여 사회적으로 용인된 풀케리아는 대충 서른 곳 남짓 정도였다.[11] 라 트라비아타, 노르마 등 오페라에서 따온 이름이 있는가 하면 노틀담의 꼽추, 돈키호테 등 문학에서 따온 이름도 있었으며, 엄청 솔직한 이름으로는 Sal si Puedes가 있었다. 뜻은 나갈 수 있으면 나가보시던가(Get Out If You Can)(...)[12] 실제로는 드물게나마 그런 짓을 한 양조장도 있었을 거라고 한다. 무면허로 연 풀케리아 및 풀케 양조장의 수도 많았다는 걸 생각하면 위생관리가 철저하게 되지 않은 곳이 있었을지도.[13] 아예 근친상간이나 강간을 했다는 전승도 있다.[14] 나와틀어로는 틀라콰체(Tlacuache)로 불렸다.[15] 이스탁 옥틀리(iztac octli)라 불리는 경우도 있다. 이스탁은 나와틀어로 하얀색이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