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데리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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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트라시아의 왕
프랑크인의 왕

Childeric II | 킬데리크 2세
파일:킬데리크 2세.jpg
제호
한국어
킬데리크 2세
프랑스어
Childeric II
생몰 년도
653년 ~ 675년
재위 기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663년 ~ 673년
프랑크인의 왕
673년 ~ 675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의 왕이었다가 프랑크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왕.


2. 행적[편집]


653년 클로비스 2세와 바틸다 왕비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으로 클로타르 3세가 있었다. 662년, 네우스트리아 왕국의 권신인 에브로인 궁재는 6년 전에 시게베르 3세가 사망한 뒤 그의 양자이자 자신의 아들 킬데베르 3세를 왕위에 올린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궁재 그리모알드를 처단하기로 했다. 그는 그리모알드와 킬데베르 3세를 네우스트리아로 유인해 처형했다. 이후 수 개월간 차기 아우스트라시아 왕이 될 적임자를 물색한 끝에 시게베르 3세의 조카인 킬데리크 2세를 662년 10월 18일과 12월 9일 사이에 시게베르 3세의 딸 빌리킬다와 결혼시키고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에 오르게 했다.

673년 형이자 네우스트리아의 왕 클로타르 3세가 죽었다. 에브로인은 귀족들과 논의하지 않고 클로비스 2세의 셋째 아들 테우데리크 3세를 새 군주로 내세웠다. 부르군트의 레오데가리우스 주교와 형제인 파리 백작 바렌 등 주교들은 에브로인의 독단적인 처사에 반감을 품고 킬데리크 2세와 궁재 울포알드에게 에브로인을 몰아내준다면 프랑크 전체의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킬데리크 2세는 파리로 진군해 귀족들의 호응을 얻었고, 테우데리크 3세와 에브로인은 삭발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생드니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에브로인은 부르군트의 룩셀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레오데가리우스 등 귀족들은 킬데리크 2세에게 프랑크 전체의 왕으로 옹립하는 대가로 3가지 법령에 서명하도록 했다. 첫째 법령는 각 지역마다 고유한 법과 관습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법령은 고위 관리인 공작과 백작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세 번째 법령은 궁재 직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3가지 법령 모두 받아들였다. 다만 아우스트라시아 궁재는 직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674년 성년이 된 그는 나라를 스스로 통치하려 했다. 레오데가리우스가 이를 막으려 들자 주교 직을 박탈하고 룩셀 수도원에 수감했다. 또한 지금까지 아우수트라시아 왕국만 관장하던 울포알드가 왕국 전체를 관장하게 했다

한편, 툴루즈 공작 루푸스 공작은 673년에서 676년 사이에 프랑크 왕국이 권력 분쟁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로데즈와 알비를 점령했으며, 전통적으로 네우스트리아 왕국의 소유지인 리모주를 점령했다. 그리하여 루푸스는 비엔 강에서 가론 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아키텐 공국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킬데리크 2세는 툴루즈 공작의 영역 확장에 신경쓰지 않고 귀족들을 숙청했다. <프랑크 왕국 역사집>에 따르면, 그는 보딜로를 잡아다가 막대로 채찍질 했다고 한다.

675년, 보딜로와 친구 아말베르트, 잉고베르트는 리브리(오늘날 로그네스) 숲에서 사냥하던 왕을 암살하기로 했다. 왕은 숲에서 사냥하던 중 아내 빌리칠트, 다섯살 된 장남 다고베르와 함께 살해되었다. 사후 네우스트리아 왕위에는 지난날 폐위되었던 테우데리크 3세가 복위했고, 아우스트라시아에서는 에브로인이 클로타르 3세의 아들로 위장한 클로비스 3세가 왕위에 올랐다가 폐위된 후 시게베르 3세의 아들 다고베르 2세가 왕위에 올랐다. 킬데리크 2세의 유해는 파리 근교 생제르맹-데프레에 안장되었다. 당시 3살이었던 킬데리크 2세의 차남 킬페리크 2세는 수도원에 보내져 수도자 다니엘로서 활동하다가 715년 다고베르 3세가 사망한 뒤 43세의 나이로 네우스트리아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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