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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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
Clovis II | 클로비스 2세
파일:클로비스 2세.jpg
제호
한국어
클로비스 2세
프랑스어
Clovis II
생몰 년도
633년 ~ 657년
재위 기간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
639년 ~ 657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의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 분국의 왕.


2. 행적[편집]


633년 다고베르 1세와 난틸다 왕비의 아들로 출생했다. 다고베르 1세는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그리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불러모은 후,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인들에게 클로비스 2세를 왕으로 받들고 아우스트라시아인들은 시게베르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639년 1월 19일 다고베르 1세가 생드니 수도원에서 병사한 뒤, 클로비스 2세의 어머니 난틸다 왕비는 다고베르가 축적한 국고의 3분의 1을 얻었고, 클로비스 2세도 3 분의 1을 받았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피핀 1세에 의해 메츠로 이송되어 시게베르 3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당시 6살이었던 클로비스 2세의 공식적인 섭정은 난틸다 왕비였지만, 실권은 에가 궁재에게 넘어갔다. 에가는 641년 사망할 때까지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다고베르 1세가 귀족들로부터 빼앗아간 재산을 원주인에게 돌려줘서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641년 에가가 사망한 후 새 궁재가 된 에르치노알트는 온순하고 친절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청렴했다고 한다. 그는 648년 색슨족 출신의 노예 바틸다를 사들인 뒤 클로비스 2세의 아내로 삼게 했다.

그러나 부르군트의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627년 바나차르 2세가 사망한 후 클로타르 2세가 왕실의 직할지로 삼은 이래, 부르군트에는 별다른 지도자가 세워지지 않았으며, 왕실의 통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결과, 부르군트 지역 귀족과 주교들은 프랑크 왕국의 의중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다고베르 1세가 생전에 바스크인을 물리치고 그들과 손잡았던 가스코뉴 귀족들을 통제하고자 세웠던 윌레바트 공작은 리옹과 발랑스 사이의 영역을 사유지로 삼고 권세를 누렸다. 난틸다 여왕은 642년 오를레앙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자시느이 조카 라그노베르트와 결혼한 플레차드를 부르군트의 궁재로 삼으려 했다. 플레차드는 부르군트 귀족들에게 그들의 재산과 명예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윌레바트는 이를 따르길 거부하고 프랑크 왕국에 적대적인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642년, 난틸다 여왕은 오를레앙 공의회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해 9월, 클로비스 2세는 에르치노알트와 플레차드와 함께 오툉으로 간 뒤 윌레바트에게 출두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윌레바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라고 확신하고 전 병력을 동원해 오툉으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투에서 수많은 프랑크인과 부르군트인이 전사했고, 윌레바트는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플레차드가 부르군트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샬롱에 도착한 직후 열병에 걸려 왈레바트가 사망한 지 11일만에 병사했다.

그 후 그는 전권을 궁재에게 떠맡기고 자신은 향락을 누렸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소유물을 조사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고 여자를 유혹하길 즐겼으며, 음식을 미친듯이 먹었고, 술을 퍼마셨다. 말년에는 정신 질환을 앓고 심한 경련에 시달렸다. 또한 이전까지는 모든 왕이 말을 타고 여행했지만, 그는 마차를 탔다고 한다. 657년 9월 11일에서 11월 16일 사이에 사망했으며, 사후 장남 클로타르 3세가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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