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피누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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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小) 피핀 (Pepin the Younger), 단신왕[1] 피핀 (Pepin the Short)
생몰년도
714년 ~ 768년 1월 28일
재위기간
751년 11월[2] ~ 768년 9월 24일
출생지
불명
사망지
프랑크 왕국 생 드니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라틴어
Pippinus III (피피누스 3세)
독일어
Pippin der Jüngere (단신왕 피핀)
프랑스어
Pépin le Bref (단신왕 페팽)
네덜란드어
Pepijn de Korte (단신왕 프페인)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개창자이다. 피핀 3세 이전에도 카롤루스 가문의 킬데베르 3세[3]가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바 있으나 실데베르 3세는 폐위된 후 메로빙거 가문이 다시 왕위에 복귀하여 왕위가 이어지지 않았고 피핀 3세가 즉위한 이후에야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가 왕위를 세습하여 왕조가 이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카롤루스 왕조의 실제 창시자는 피핀 3세라고 인정된다. 그 유명한 카롤루스 대제의 아버지이며, 프랑크 왕국을 이슬람으로부터 지켜냈던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의 둘째 아들이다.


2. 생애[편집]


프랑크 왕국궁재로서 왕국의 실권자였던 아버지 카롤루스 마르텔이 741년 숨을 거두자 형인 카를로만과 함께 궁재직을 나눠받았다. 그래서 카를로만과 함께 프랑크 왕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들을 진압하다가 747년 카를로만이 아들 드로고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수도원으로 은퇴해버리자 곧바로 조카인 드로고를 수도원으로 유폐시키고 모든 전권을 장악했다.

이후 왕위를 노렸는데 여기에 교황을 회유해서 끌여들였다. 당시 교황 자카리아에게

"실력은 있는데 왕이 되지 못한 자가 왕이 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왕이면서도 실력이 없는 자가 통치를 해야 합니까?"

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고[4] 교황 자카리아가 그를 왕으로 인정하면서[5] 메로베우스 왕조킬데리크 3세폐위시키고 751년 11월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피핀은 롬바르드 왕국의 위협을 받는 교황을 도와 '로마인의 수호자'(patricius Romanorum)라는 칭호를 받았고, 756년 교황에게 자기가 점령한 옛 라벤나 총독부 지역을 기증하게 된다. 이게 유명한 <피핀의 기증>이며 이는 곧 교황령의 기원이 되었다.

작센 원정을 준비 중이던 768년, 생드니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세상을 떴다. 유해는 생 드니 대성당에 안치됐다.

여러모로 《삼국지조비와 비슷한 점이 있다. 마르텔의 궁재직을 이어받은 것은 조조가 조비에게 위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받아 위나라를 열었듯이 피핀도 결국 메로베우스 왕조로부터 선양을 받아 카롤루스 왕조를 개창한 점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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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구왕(短軀王)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2] 즉위 장소는 수아송.[3] 피핀의 6촌 종조부로 피핀 3세의 조부 피핀 2세의 외숙부인 그리모알드 1세의 아들이 실데베르 3세였다.[4] 사실 이 서신이 답정너식인게 가톨릭이 국교인 프랑크 왕국에서 교황에게 이런 내용의 서신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반역을 하겠다고 통보하는 것이다. 즉 피핀은 교황에게 승인을 받고 쿠데타를 일으킨게 아니라, 이미 쿠데타 준비를 다 완료한 상태에서 교황에게 통보를 한 것이다. 즉 서신의 속뜻은 "이 서신을 보낸시점에서 쿠데타 준비가 다 되었으니 답은 정해져 있고 교황 성하께서는 승인만 해주시면 됩니다."[5] 언급했듯이 이미 피핀은 쿠데타 계획을 전부 마친 상태였기에 자카리아는 굳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피핀이 언젠가 왕위를 차지할 작정임을 눈치챘고, 괜히 척 져서 적이 되는 것보다 그를 왕으로 인정해주고 거기서 나오는 이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서로에게 이득이 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