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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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군사평의회 의장 →
1. 1924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2. 대통령직 부활
3.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직 폐지 및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
4. 대통령직 부활
5. 1973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6. 1980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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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공화국 제23대·29대 대통령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Carlos Ibáñez del Campo


출생
1877년 11월 3일
칠레 리나레스
사망
1960년 4월 28일 (향년 82세)
칠레 산티아고 지방 산티아고
직업
군인, 정치인
재임기간
제23대 대통령
1927년 7월 21일 ~ 1931년 7월 26일
제29대 대통령
1952년 11월 3일 ~ 1958년 11월 3일
내무부 장관
1927년 2월 9일 ~ 1927년 4월 7일
전쟁·해군부 장관
1925년 1월 25일 ~ 1925년 2월 25일
서명
파일:Firma_Carlos_Ibañez_del_Campo.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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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로사 퀴로스 데 아빌라
그라시엘라 레텔리에르 벨라스코
국적

정당

약력
내무부 장관
전쟁·해군부 장관
칠레 제23·29대 대통령

1. 개요
2. 1924년과 1925년의 쿠데타
3. 전쟁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시절
4. 첫 대통령직 시절
5. 대통령직 사이
6. 대통령직에 돌아오다
7. 은퇴와 유산



1. 개요[편집]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장군은 칠레 육군 장교이자 정치인이었다. 1927년부터 1931년까지 두 차례 대통령을 지냈으며, 1952년부터 1958년까지 10년간 재임했다.


2. 1924년과 1925년의 쿠데타[편집]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의 대통령직은 비효율적인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증가했다. 1924년 루이스 알타미라노 장군이 이끄는 칠레군은 군인들이 의회 바닥에 칼을 쾅쾅 치는 시위인 '루이도 데블'을 시작했다. 군대의 위협 속에서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는 더 이상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비록 이 사임은 의회에서 승인되지 않았지만,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는 나라를 떠났고 알타미라노는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마르마두케 그로브 대령과 이바녜스 중령이 이끄는 또 다른 파벌은 정부의 비효율성을 끝내는 데 군정의 개혁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또 다른 쿠데타를 주도하여 알타미라노를 폐위시키고 에밀리오 벨로 코데시도(Emilio Bello Codesido)를 수장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다. 배후 세력인 이바녜스와 그로브는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에게 복귀하여 임기를 마치라고 요청하였다.


3. 전쟁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시절[편집]


1925년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가 돌아와 입법부의 권한을 감소시켜 정부를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바녜스는 전쟁부 장관, 후에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는 이바녜스가 너무 야심이 강하다고 판단했고, 많은 이들이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를 이바녜스의 졸개라고 조롱했다. 이에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는 다시 한번 사임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이바녜스는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출마를 선언했지만, 보수당, 자유당, 칠레 급진당 등 3개의 주요 칠레 정당들은 그를 그만두도록 압력을 가했다. 세 정당은 불안정한 정치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 유세를 피하기 위해 에밀리아노 피게로아를 유일한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바녜스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인 좌파 호세 산토스 살라스는 후에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이바녜스의 지지와 함께였다고 의심했다.

에밀리아노 피게로아는 투표의 71%와 함께 승리하였으나 내무부 장관으로서 이바녜스를 유지하였다. 이바녜스는 이바녜스의 꼭두각시보다는 1927년 사임하기로 결정한 약한 에밀리아노 피게로아를 통제할 수 있었다. 칠레 헌법상 내무부 장관이었기 때문에 이바녜스는 부통령이 되었고, 그해 5월 22일 선거를 공고하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전통적인 정당들은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바녜스의 유일한 상대는 공산주의자인 엘리아스 라페르테였고, 그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후안 페르난데스 군도로 망명했다. 이바녜스는 98%의 투표와 함께 선거에서 승리했다.


4. 첫 대통령직 시절[편집]


이바녜스는 독재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법령에 의한 통치(decretos confuerza deley), 의회 선거를 중지하고 대신 정치인들을 상원과 하원에 임명했다. 그의 이전 동맹인 마르마두케 그로브를 포함한 정적들이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기는 미국의 높은 성장률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준 미국 은행들의 막대한 대출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그는 거대한 공공 사업을 건설했고, 공공 지출을 늘렸다. 그는 또한 이전에 무질서했던 경찰력을 통합함으로써 카라비네로스 데 칠레를 만들었다. 이바녜스의 첫 행정부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1929년 칠레가 태평양 전쟁 동안 점령되었던 타크나 주를 페루에 반환하는 데 동의한 리마 조약의 서명이었다.

그의 인기는 1929년 월스트리트의 붕괴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그 시점에서 모든 대출이 중단되고 요청되었다. 외화의 유입 없이, 칠레대공황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바녜스의 막대한 공공 지출은 상황을 완화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의 반대자들, 주로 추방당한 그로브와 알레산드리는 재기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1931년 7월 26일 이바녜스는 페드로 오파호 원로원 의장에게 자신의 집무실을 위임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내무장관 후안 에스테반 몬테로를 위해 사임했다.


5. 대통령직 사이[편집]


칠레는 1932년 아르투로 알레산드리가 재선될 때까지 정치적 안정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그의 경제 정책은 불황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1942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하였으나 후안 안토니오 리오스에게 패하였다.


6. 대통령직에 돌아오다[편집]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우파 농업노동당은 이바녜스를 대통령 후보로 선언했다. 이바녜스는 또한 좌파 인민사회당과 일부 페미니스트 정치 노조의 지지를 얻었으며, 페미니스트 마리아 데 라 크루즈는 그의 선거 관리인이었지만, 그녀는 장관직을 거부했다. 이바녜스는 자신의 "브룸"으로 정치적 부패와 나쁜 정부를 쓸어버리겠다고 약속했고 "희망의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전통적인 정당들을 비판했지만, 그의 제안은 모호했고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47%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1952년 볼리비아 국민혁명은 이바녜스의 추종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바녜스는 이를 칠레에서 민족 포퓰리즘의 모델로 삼았다.

그의 두 번째 임기는 아주 작은 성공이었다. 그 무렵 그는 이미 늙고 병들어 있었고, 그는 대부분 내각에 정부를 맡겼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의 주요 문제는 경제와 관련된 문제였다. 그는 당시 칠레에서 가장 시급한 경제 문제 중 하나였던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계획이 없었고, 그 결과 1954년 71%, 1955년 83%로 치솟았다. 클라인-삭스 임무에 도움을 받아 이바녜스는 자신이 대통령직을 떠날 때 33%로 줄이는 데 성공하였다. 그의 임기 동안 대중교통 비용은 50% 증가했고 경제 성장률은 2.5%로 떨어졌다.

정치적으로 훨씬 더 중도적인 이바녜스는 칠레 공산당을 금지한 민주주의 방어법을 폐지함으로써 많은 좌파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또한 그의 첫 대통령 임기보다 범죄에 대해 더 부드러운 접근법을 취했다. 예를 들어, 그는 푸푸나휴의 자칼에 대한 사형선고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일부 칠레인들은 이바녜스 독재 정권을 계속 지지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은퇴한 군 장교들이 이 이바녜스주의자, 새로운 독재 정권을 확정짓기 위해"Línea Recta"(수직 선)그룹을 만들어 냈다. 이바녜스 이 음모자들과 있지만, 궁극적으로 신뢰의 부족은 self-coup에 대해 계획 끝났다 만났다. 기자들이 이러한 음모자들과 이바녜스의 회의 구성된 스캔들은 이바녜스 정부를 뒤흔들다.


7. 은퇴와 유산[편집]


이바녜스의 후임 대통령은 숙적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의 아들인 호르헤 알레산드리가 뒤를 이었다. 그는 정치를 버리고 1960년 산티아고에서 사망했다. 이바녜스의 모호하고 흔들리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결과로, 그는 칠레 정치에 어떠한 지적 유산도 남기지 않았다. 칠레 정계에서 30년 이상 동안 그의 존재는 이 기간 동안 그는 종종 그를 지지하는 단체의 정치적 목표에 거의 동조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1920년대에 중앙 밸리 남쪽 지역의 신도시 개발과 남부 지역의 기존 기반 시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통해 가장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아이센델헤네랄카를로스이바녜스델캄포주는 아이센과 마가야네스의 고립된 지역을 칠레로 통합하려는 그의 시도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푼타아레나스에 있는 이바녜스 공항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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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