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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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군사평의회 의장 →
1. 1924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2. 대통령직 부활
3.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직 폐지 및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
4. 대통령직 부활
5. 1973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6. 1980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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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ardo Nicanor Frei Montalva
(1911년 1월 16일~1982년 1월 22일)


1. 개요
2. 생애
2.1. 정치 경력
3. 행정
4. 아옌데에 대한 쿠데타 지원
5. 죽음





1. 개요[편집]


에두아르도 니카노르 프레이 몬탈바는 칠레의 정치인이다.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칠레의 제27대 대통령, 기민당 대통령, 상원 의장을 지냈다. 그의 장남인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칠레의 대통령이 되었다.

1973년 8월 22일 하원이 아옌데를 헌법 위반으로 고발하자, 프레이의 기민당은 그의 후임자인 살바도르 아옌데를 해임하기 위한 군사 개입을 지지했다. 그는 후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의 반대론자였다. 1982년 1월 22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사망하였다. 암살은 일부 사람들에 의해 의심되었지만 증명된 적은 없다.


2. 생애[편집]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는 1911년 1월 16일 산티아고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스위스계 독일인 에두아르트 프레이 슐린츠와 빅토리아 몬탈바 마르티네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 그의 가족은 아버지가 양조장의 회계사로 고용되었던 론투에로 이사했다. 게다가 그의 다른 두 형제 아르투로와 아이린도 태어났다. 그는 퐁튀에 공립학교에 다녔다. 산페드로 와이너리는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200km 떨어진 론투에와 몰리나에서 잘 알려져 있으며 1865년 보니파시오와 호세 그레고리오 코레아 알바노 형제가 설립했다.

1919년, 가족은 산티아고로 돌아왔고, 에두아르도(Eduardo)는 젊은 시절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1922년까지 머물렀다. 1923년 루이스 캄피노 인스티튜트에 입학하여 1928년 17세의 나이로 졸업하였다.

18세 때인 1929년 카톨리카 대학교 법학대학원에 입학했다. 2년 동안 그는 친구 알프레도 루이즈-타글레의 누이인 마리아를 방문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다녔고, 1933년에 변호사로서 졸업하였다. 그는 마리아 루이즈 타글레과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장남인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는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칠레의 대통령을 지냈다.



2.1. 정치 경력[편집]


그는 보수당에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지만, 1938년 자신의 정당인 팔랑헤 나시오날(Falange Nacional)[1]을 창당한 젊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45년 공공사업부 장관을 지냈고, 1949년 아타카마와 코킴보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그는 알베르트 에드워즈 비베스와 공동으로 《칠레 정당의 역사》를 출판했다. 1950년, 그는 유엔 대표로서 뉴욕으로 여행을 갔다. 1952년, 41세의 나이로 프레이 몬탈바는 대통령 선거에 첫 출마를 선언하였다.

1952년 선거에서는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가 승리했다. 이후 이바녜스 대통령은 프레이에게 집행위원회를 구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1954년 유엔은 그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총리 회의의 보고서를 정교하게 설명하는 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했다. 콜롬비아의 전 대통령 카를로스 레라스 레스트레포와 ECLAC의 라울 프레비슈 국장이 있다. 이 보고서는 경제 발전과 라틴 아메리카의 통합에 대한 후속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1956년 산티아고에서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7년 7월 27일 팔랑헤 나시오날은 칠레 기독교민주당이 되었고, 그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지도자가 되었다. 1958년 대통령 선거에서 프라이 몬탈바는 다시 한번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것을 제안받았다. 호르헤 알레산드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가 3위에 그쳤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정치의 의미와 형태"와 "진실은 때가 있다" 그리고 "생각과 행동"이라는 세 권의 책을 더 출판했다. 1960년에 그는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중남미 대학의 미션"에서 강의했다. 1961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제1차 세계기독교민주당대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회의에는 중남미, 유럽, 북미, 아프리카 각국에서 온 대표단이 참석했다. 그 해에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열린 개발 도상국의 문제에 대한 세미나에 특별 손님으로 초대되었다. 그 세미나에는 전 세계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1960년부터 1962년까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에 대해 강의했다. 1962년, 그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발전과 통합에 관한 회의를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열었다. 그는 1964년에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1962년부터 1964년까지 CIA는 총 260만 달러를 대통령 선거 자금으로 지출했고, "아옌데의 FRAP 연합으로부터 유권자들을 겁주기 위해" 반아옌데 선전비로 300만 달러를 지출했다. CIA는 프레이의 승리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큰 성공으로 여겼다.

그 해 그는 자유 혁명의 슬로건(56%)으로 사회당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3. 행정[편집]


프레이의 행정부는 칠레 사회에서 많은 개혁을 시작했다. "Promoción Popular" (사회 홍보), "Reforma Agraria" (농업 개혁), "Reforma Educacional" (교육 개혁), "Juntas de Vecinos" (근린 협회) 등이 그의 주요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그는 또한 약물 공급을 합리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1964년 9월 4일, 칠레 역사상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프레이 몬탈바가 칠레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두 달 후인 11월 4일에 취임했다.

프레이 대통령은 GNP의 비율로서 임금의 비율이 증가하는 것이 특징인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프레이 대통령직이 끝날 무렵, 임금과 봉급 부문은 거의 GNP의 51%를 받았다. 이러한 부의 긍정적인 재분배는 정부 정책, 특히 실질 임금이 40% 증가한 농촌 부문에서 장려되었다. 1964년에서 1970년 사이, 교육 총 등록률은 46% 증가했고,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약 25만 채의 집이 지어졌다.

프레이의 행정부는 또한 세제를 더 진보적으로 만들기 위해 부유세를 도입하고 재산세 재평가를 실시했다. 국민총소득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1964년 12.8%에서 1970년 21.2%로 증가했다. 프레이 정부가 도입한 사회 개혁은 공공 지출의 엄청난 증가로 이어졌고, 이는 GNP의 비율로 1965년 35.7%에서 1970년 46.9%로 증가했다. 교육, 농업, 주택에 대한 지출은 1965년에만 주택에 대한 지출이 70% 증가하는 등 상당히 증가했다.

프레이가 재임한 6년 동안 매년 평균 4만 채의 주택이 건설되었고, 총 10만 채의 부지가 배정되었다. 1차 진료 클리닉과 병원에 대한 투자도 진행되었으며, 1965년에서 1969년 사이에 20개의 클리닉과 16개의 병원이 지어졌다.

1965년, 그는 프랑스, 영국, 서독, 이탈리아, 바티칸을 순회하는 대통령 순방을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또한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콜롬비아, 페루, 에콰도르, 베네수엘라와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을 방문했다.

그가 돌아온 후, 그는 주택, 교육, 산림 재건, 토지 개혁, 건강, 그리고 구리의 국유화를 포함한 중요한 계획을 시작했다. 또한 코미시온 국립 문화 위원회, 콘세리아 국립 데 라 프로모시온 대중 위원회, 융타스 데 베치노스가 설립되었다.

프레이 행정부에 의해 높은 우선순위로 주어진 개혁의 한 영역은 (특히 판자촌의 "조직되지 않은" 주민들 사이에서) 지역 자조 단체들의 네트워크를 육성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국가 감독 위원회 아래에 놓였다. 정부의 조치의 결과로, 어머니 센터, 체육 협회, 청소년 클럽, 주민 위원회, 그리고 부모 단체들이 확산되었고, 1970년까지 약 20,000대가 존재했다고 정부 수치에 따르면 말했다. 이 새로운 유닛의 절반은 어머니 센터였으며, 약 45,000명의 여성 회원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정부는 이 센터에 7만 개의 재봉틀을 배포했다고 한다. 프레이에 따르면, 이러한 조치들은 수십만 명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삶과 희망"을 주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수용된 사유지들은 향유지가 되었다. 이것은 국가가 신용, 토지, 기술 지원을 제공하고, 농민들이 그들의 노동력을 지원하면서, 그 농장과 옛 라티푼디아(광범위한 농경지)에 살았던 농민들 사이의 공동기업으로 운영되는 법적 형태였다. 불확실한 기간이 지난 후, 농민들이 원한다면, 그 토지는 소규모 개인 부지로 분할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빈곤선 이하에 사는 인구의 비율은 1965년 39%에서 1970년 17%로 꾸준히 감소했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 엘살바도르 광산에서 8명의 노동자와 푸에르토 몬트 대학살에서 11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의 내무부 장관 에드문도 페레스 주조비치는 정치적 비난을 받았다. 1969년 10월 21일, 타크나초 반란이 일어났다.

1966년, 안데스 그룹은 공식적으로 선언을 통해 1965년 1월에 서명했다. 그러나 보고타주 볼리바르 광장에서 프레이 몬탈바가 한 유명한 연설로 그룹은 절정에 달했다. 같은 해에 칠레 구리에 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1967년 1월 국민회의는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여행하는 그의 헌법적 허가를 거부했다. 1967년 4월, 그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미국 대통령 회의에 참석했다.

1970년 칠레 폰티피아 대학교로부터 호노리스 카우사 박사 칭호를 받았다. 11월 4일, 그는 대통령직을 살바도르 아옌데에게 넘겨주고 퇴임했다.


4. 아옌데에 대한 쿠데타 지원[편집]


1970년 아옌데의 승리 이후, 프레이는 공산주의의 폭정을 강요하기 위해 그가 "전체주의 프로젝트"라고 부르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1971년 데이턴, 오하이오, 보스턴, 뉴욕 미주 평의회에서 컨퍼런스를 열고 아옌데 정부의 행동을 규탄했다.

1973년 3월 총선에서 산티아고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상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아옌데 반대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973년 7월 6일, 그는 실업가 협회(SOFOFA)의 전무이사를 만났다. 그들은 프레이에게 나라가 해체되고 있으며 긴급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칠레는 피비린내 나는 쿠바마르크스주의 독재체제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프레이는 "나 혼자, 의회나 민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답했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는 총으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의회에 가는 대신에, 우리는 연대로 가야 한다. "당신의 우려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바라건대 오늘 칠레군 총사령관들에게 분명하게 말하라고 충고한다."

1973년 9월 11일 쿠데타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옌데 대통령은 라 모네다에서 자살로 사망했다. 그의 기민당은 1973년 8월 22일 하원이 아옌데를 헌법 위반으로 고발하자 1973년 아옌데를 해임하는 데 군사 개입을 지지하였다.

1973년 11월, 프레이는 국제 기민당 총재 마리아노 루머에게 군사 개입을 지지하며 아옌데칠레공산주의 독재 정권을 강요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하는 것을 비난하는 역사적인 편지를 썼다.

1973년과 1977년 사이, 프레이 몬탈바는 다른 나라들로 초청되어 1976년 대서양 회의와 같은 회의에 참석했다. 1975년에 그는 그의 저서 엘만다토 데 라 역사 라스 엑시겐시아스 델 포르벤(El Mandato de la Historiay las Exigencias del Portven)을 출판했다. 옵시온 이 에스페란자 (Opción y Esperanza) 옵션과 희망("Option and Hope")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1977년과 1982년 사이에 그는 빌리 브란트가 이끄는 브란트 위원회에 참여하도록 초청받았다. 회원으로서 그는 독일, 스위스, 말리, 미국, 말레이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영국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브란트 위원회 대표로서 그는 IDB, OAS 및 ECLAC의 중요한 임원들과 협력했다.

1980년 그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린 라틴 아메리카의 전 민주당 대통령 회의에 참석했다. 1981년, 그는 카라카스에서 열린 "인류를 위한 대안: 라틴 아메리카 선교"에 대한 로마 클럽 국제 회의에 초청되었다. 그의 마지막 저서 엘 멘사제 휴머니스타("인본주의 메시지")가 출판되었다.

후에, 프레이는 피노체트의 군사 정부에 반대자가 되었다. 그는 1981년 피노체트의 대통령직 연장에 반대하여 이에 반대하는 집회를 이끌었다.


5. 죽음[편집]


1981년, 프레이는 불쾌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탈장으로 인한 만성적인 산 역류증을 앓고 있었다. 1982년 1월 22일 산티아고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죽음은 수술로 인한 패혈증 때문이었다. 그는 산티아고 수도원에 묻혔다.

이후 프레이가 군사정부의 정보기관인 DINA에 의해 생화학자인 에우제니오 베리오스가 만든 독소에 중독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벨기에 겐트대 연구진이 프레이의 몸에서 겨자 가스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전 전 대통령 가족이 소송을 제기했다.

프레이의 개인 주치의인 파트리시오 로하스(Patricio Rojas)는 그의 혐의를 부인했다. 엘 메르쿠리오의 칼럼니스트 에르모게네스 페레스 드 아르세는 벨기에의 보고서 존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대학의 통신 책임자인 톰 드 스메트가 대학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부인했다고 언급했다. FBI 실험실과 겐트 대학의 실험실로 보내진 조직 샘플은 독성 물질의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다. 칠레의 한 의사가 머스타드 가스가 분해된 결과일 수도 있지만 시체가 분해된 결과일 수도 있는 술폰 염의 잔류물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12월, 6명이 암살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알레한드로 마드리드 판사는 산티아고 산타 마리아 클리닉에 입원해 있는 동안 프레이에게 저용량 탈륨과 겨자 가스를 장기간 투여했으며, 이러한 독성 물질이 프레이의 면역 체계를 감소시키는 효과를 가져 수술에서 살아남기엔 너무 약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보고서는 쿠데타를 중재하고 CIA피노체트 정부와 강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에드워즈 가문이 소유한 신문인 엘 메르쿠리오와 라 세군다에 있는 외과 팀에 의해 널리 비판을 받았다. 항소법원은 마드리드 판사를 이 사건에서 정직시켰으며, 피고인들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재판은 마드리드 판사의 실격 시도에 실패한 후 2010년에 다시 열렸다.

2019년 1월 30일, 6명의 용의자들은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3년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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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 이름을 보면 유추 가능하듯 스페인식 팔랑헤주의에 영감을 받은 극우 정당이였으나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상대적으로 온건해져서 기독민주당에 흡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