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밍고 산타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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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군사평의회 의장 →
1. 1924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2. 대통령직 부활
3.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직 폐지 및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
4. 대통령직 부활
5. 1973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6. 1980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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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omingo_Santa_María_1885.jpg
Domingo Santa María González
1825년 8월 4일 ~ 1889년 7월 18일

1. 개요
2. 생애
3. 정치 경력
4. 행정
5. 이후의 삶




1. 개요[편집]


도밍고 산타 마리아 곤살레스는 칠레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1881년부터 1886년까지 칠레의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2. 생애[편집]


산티아고에서 루이스 호세 산타 마리아 곤살레스와 아나 호세파 곤살레스 모란데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7년 칠레 대학교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곧이어 그는 법무부의 서기가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공식 시장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보수당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클럽인 소시에다드 델 오르덴의 간사가 되었다.


3. 정치 경력[편집]


23세의 나이에, 그는 콜차과의 인티난트가 되었다. 보수파에게 유리한 선거 조작에 대한 그의 적극적인 개입은 그를 야당의 주요 표적이 되게 했다. 2년 후, 그는 상관들로부터 사임 요청을 받았다. 그의 거절은 마누엘 몬트에 의해 그의 궁핍을 촉발시켰다. 그 시점에서 그는 마누엘 몬트의 반대에 가담했고 1851년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자유당에 입당했다. 1856년, "베르거 문제"로 인해 정부와 교회가 충돌하는 동안 그는 교회 반대파에 가담했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결국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다.

1858년, 그는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년 후, 1859년 혁명의 결과로 그는 유럽으로 추방되었다. 돌아온 후 그는 정치에 초연했다 그는 산티아고 항소법원의 변호사가 되었다. 친차 제도 전쟁 동안, 그는 아메리카니즘의 챔피언이 되었고 그의 기사들은 그를 공인으로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하원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하여 부의장이 되었다. 그는 또한 외교관이었고 상고법원 정회원과 국가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879년 3월 그는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곧이어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위치에서, 그는 전쟁의 방향을 거의 완전히 장악했고, 따라서 승리를 책임지는 주요 인물들 중 하나가 되었다.


4. 행정[편집]


산타 마리아 경력의 이 시점에서, 그는 핀토 대통령의 자연 상속인이 되었다. 비록 마누엘 바케다노 장군이 후보로 추천되었지만, 바케다노의 사임으로 산타 마리아가 최종 후보로 남게 되었다. 그는 1881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그는 태평양 전쟁을 끝까지 계속했다. 그의 대통령직 몇 달 전에 칠레리마를 점령했고 산타 마리아 행정부는 페루가 1883년 10월 29일 안콘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하여 전쟁을 종식시켰다. 산타 마리아는 또한 1884년에 볼리비아와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이는 1904년 이후의 평화 조약의 기초가 된다.

국내 전선에서 그의 주요 싸움은 칠레 가톨릭 교회의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는 시민 결혼법, 시민 등록법, 공공 공동묘지법을 의회에 강요했다. 그의 행동은 로마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시켰다. 그는 또한 아라우카니아 점령을 마무리 짓고 이 지역을 칠레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는 철도를 국가 소유로 중앙집권화하고, 산티아고콘셉시온 사이의 첫 번째 전화선을 개통했으며, 첫 번째 공공 전기 조명을 도입했다.

산타 마리아의 대통령직은 또한 증가하는 부정 선거와 정부 자유주의자들에게 유리한 개입으로 특징지어졌다. 1881년 의회 선거에서 보수당은 대의원 후보였던 카를로스 워커 마르티네스를 제외하고 참여를 거부했다. 정부는 워커의 당선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20,000명의 유권자가 있는 지역에서는 34,000명의 투표가 있었다. 야당은 몇 명의 반정부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를 선출하는 데 성공했다. 1885년, 선거전은 훨씬 더 폭력적이었고 보수주의자들은 사기에 반대하기로 결심했다. 정부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의 싸움은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정부 관리들에 의해 투표가 도용되었다는 수많은 보고가 있었다. 산타 마리아는 그가 사기에 가담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커녕 공개적으로 시인했다. "저는 권위주의자로 불렸습니다. 표를 가치 없는 사람들에게, 정당들의 비이성적인 열정에게, 그리고 심지어 일반 참정권을 가지고도, 나는 통치자에게 자살하는 것이며, 나는 속임수 앞에서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잘 볼 수 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잘 통치할 것을 강요할 것이고 미래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제시된 많은 자유주의 법을 지지할 것이다. 내 말을 잘 들어라: 미래의 민주주의"라고 그가 말한 적이 있다. 또 다른 경우엔 "나는 중재자로 불려왔다. 그렇습니다. 저는 노근위병 소속이고 만약 제가 개입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정부의 일에 협력하는 효과적이고 규율 있는 의회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경험이 있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나는 이론가들이 포르탈레스, 불네스, 몬트, 에라수리스가 한 일을 되돌리게 할 수 없다."


5. 이후의 삶[편집]


그는 자신의 제자이자 정치적 후계자인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의 당선을 보장했다. 그가 물러난 후, 그는 상원 의장으로서 그의 일을 계속했다. 1889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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