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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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湖
1536년(중종 31) ~ 1597년(선조 30) 8월 27일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수부(秀夫).
임진왜란 때 활약하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시호는 충원(忠元).
1536년(중종 31) 전라도 임피현 서삼면 발산리(현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서 최치원의 15대손인 최한정(崔漢禎)의 네 아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한정은 무인으로 1552년(명종 7) 무과에 급제한 후 북방을 지키는 중요 요직을 두루 거친 유명한 노장군이었다.
현신교위(顯信校尉:종5품 무관의 품계)로서 정로위(定虜衛)에 복무하다가, 39세 되던 1574년(선조 7) 별시 무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하면서 수의부위(修義副尉:종8품 무관의 품계) 및 권지(權知)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종8품)를 제수받아 근무했다. 2년 후인 1576년(선조 9)에는 중시(重試) 무과에 갑과 1위로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성부에서 의주까지 2개월 동안 선조 일행의 파천 길을 뒤에서 지켰고 3개월 간 의주를 지켰다. 이후 9월 22일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받아 가토 기요마사를 상대로 의주를 수호하는 등 활약한다. 이윽고 선조 26년 4월 18일 1년 만에 서울이 탈환되고 10월 18개월 만에 선조는 서울로 환도하였다. 최호는 함경도와 두만강 일대의 야인들의 약탈 침범 속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치안 유지와 민생고 해결에 3년간 애썼다.
화의의 진행에 따라 싸움이 소강 상태일 때 최호는 휴직을 청원한다. 이미 전란 중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지만 전란 중 병마절도사의 직을 떠나지 못하고 비로소 선조의 윤허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10개월 전 기복 출사, 즉 상복기를 마치기도 전에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명받았다.
이후 충청 수사 부임 3개월에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년) 2월 26일 이순신이 파직된 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그의 휘하에서 종군하다 정유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도주하는 원균을 뒤로 하고 끝까지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했다.
임란이 끝난 6년 후 1604년(선조 37년) 공신 책록에서 이몽학의 난 평정의 공신으로 청난 공신 이등 공신으로 책록되었고, 정2품의 자헌대부에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로 추증 되었으며, 계성군으로 봉군 되면서 충원공(忠元公)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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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湖
1536년(중종 31) ~ 1597년(선조 30) 8월 27일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수부(秀夫).
임진왜란 때 활약하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시호는 충원(忠元).
2. 생애[편집]
1536년(중종 31) 전라도 임피현 서삼면 발산리(현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서 최치원의 15대손인 최한정(崔漢禎)의 네 아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한정은 무인으로 1552년(명종 7) 무과에 급제한 후 북방을 지키는 중요 요직을 두루 거친 유명한 노장군이었다.
현신교위(顯信校尉:종5품 무관의 품계)로서 정로위(定虜衛)에 복무하다가, 39세 되던 1574년(선조 7) 별시 무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하면서 수의부위(修義副尉:종8품 무관의 품계) 및 권지(權知)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종8품)를 제수받아 근무했다. 2년 후인 1576년(선조 9)에는 중시(重試) 무과에 갑과 1위로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성부에서 의주까지 2개월 동안 선조 일행의 파천 길을 뒤에서 지켰고 3개월 간 의주를 지켰다. 이후 9월 22일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받아 가토 기요마사를 상대로 의주를 수호하는 등 활약한다. 이윽고 선조 26년 4월 18일 1년 만에 서울이 탈환되고 10월 18개월 만에 선조는 서울로 환도하였다. 최호는 함경도와 두만강 일대의 야인들의 약탈 침범 속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치안 유지와 민생고 해결에 3년간 애썼다.
화의의 진행에 따라 싸움이 소강 상태일 때 최호는 휴직을 청원한다. 이미 전란 중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지만 전란 중 병마절도사의 직을 떠나지 못하고 비로소 선조의 윤허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10개월 전 기복 출사, 즉 상복기를 마치기도 전에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명받았다.
이후 충청 수사 부임 3개월에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년) 2월 26일 이순신이 파직된 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그의 휘하에서 종군하다 정유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도주하는 원균을 뒤로 하고 끝까지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했다.
임란이 끝난 6년 후 1604년(선조 37년) 공신 책록에서 이몽학의 난 평정의 공신으로 청난 공신 이등 공신으로 책록되었고, 정2품의 자헌대부에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로 추증 되었으며, 계성군으로 봉군 되면서 충원공(忠元公)의 시호를 받았다.
3. 대중매체[편집]
-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등장한다 배역은 석정만.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할때 부터 회의 장면에서 간간히 보이긴 하지만 붉은 철릭을 입은 다른 장수들과 달리 대사는 한마디도 없고 비중은 공기수준이다. 그래도 충청수사라고 칠천량 해전이 있기전 출정식에서도 이순신이 입었던 갑옷과 동일한 붉은 두석린갑을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사는 없다.
- 2014년 개봉한 영화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부하들의 원혼을 보는 장면에서 이순신이 "이 수사......최 수사......"라며 울며 말하던 '이 수사'와 '최 수사'는 각각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를 가리킨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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