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증왕/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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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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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냉수리 신라비 · 포항 중성리 신라비



1. 개요
2. 순장 폐지(502년)
3. 우경법 실시(502년)
4. '왕' 칭호를 사용(503년)
5. '신라' 국호 확정(503년)
6. 상복법 제정(504년)
7. 12성을 쌓다(504년)
8. 지방 조직인 군현제 정비(505년)
9. 얼음을 저장하고 선박 이용의 제도를 정비(505년)
10. 동시전 설치(509년)
11. 이사부우산국 정복(512년)



1. 개요[편집]


지증왕의 업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고구려의 소수림왕처럼 전쟁은 멈추고 내정 개혁에 집중한 것이다. 한반도 동남쪽에 있어 대륙의 문물을 접하기 힘들던 신라는 삼국 중 고구려백제가 이미 율령제에 기반한 체계적인 통치를 하던 것에 비해 뒤쳐져 있었다. 그러나 지증왕과 법흥왕 때 엄청난 속도의 개혁으로 두 나라의 통치 구조를 따라잡은 것이다.

그렇기에 중ㆍ고등학교 한국사 시험에 꼭 나오는 왕이다. 사실 지증왕 전까지 신라는 전성기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방어하느라 매년 전쟁이 일어났고 내정을 개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지증왕 재위기에는 갑자기 전쟁 기록이 끊긴다. 왜 그런지 《삼국사기》에 추가적인 기록이 없어 명확히는 알 수 없다.

대체 왜 고구려의 신라 공격이 계속되다가 지증왕 즉위 시점부터 갑자기 끊겼는지 추측하자면 고구려 장수왕문자명왕이 5세기까지는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공격해보다가 나제동맹우주방어에 계속 막히니까 이래서는 아무도 못 잡겠다 생각하고 서기 500년쯤부터는 백제 공격에만 집중하고 신라와는 일종의 휴전을 맺었다던가 할 수도 있다. 마침 백제도 개로왕이 죽은 뒤 계속되던 혼란을 무령왕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해 안정시키고 문자명왕의 고구려와 1:1로도 싸울 수 있는 국력에 다다른다. 신라 역시 소지 마립간 때까지는 고구려가 백제에 쳐들어가면 백제에 지원군을 파견하고는 했는데 지증왕 때부터는 40여 년간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다. 물론 그 외에도 실제로는 고구려가 계속 쳐들어왔는데 기록이 누락됐다거나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어쨌든 지증왕과 차기 법흥왕은 큰 전쟁이 거의 없었던 6세기 초반의 40여 년간을 신라의 강도높은 내정 개혁, 국력 증대, 왕권 강화, 주변 소국 흡수에 집중해 많은 업적을 쌓아 6세기 중후반 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명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두 왕이 내실을 다져두지 않았다면 다음 진흥왕 때 폭발적인 신라의 영토 확장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증왕은 즉위 당시에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지증왕 대의 해당 업적들 상당수가 지증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법흥왕이 태자 신분으로 일종의 대리청정을 하면서 국정을 주도하며 미리 손을 써 놓은 것이 아니냐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실제로 법흥왕 역시 즉위하자마자 엄청난 업적들을 순식간에 처리해버린다.


2. 순장 폐지(502년)[편집]


노동력 확보를 위해, 지증왕 대까지 삼한 땅에 내려오던 인신공양순장과 같은 악습을 전면 금지시켰다. 그 전까지 신라는 왕이 죽으면 남녀 5명씩 같이 묻었다고 한다. 사실 이 시대에 신라만 순장을 하던 것은 아니고 왕릉에 수십명씩 같이 묻은 옆동네 대가야중국의 후덜덜한 규모의 순장에 비하면 소박하긴 하지만 엄연히 이것도 악습이었던지라... 그리고 순장금지령은 지방 세력에게 이를 어길 경우 제재가 들어갈 수 있다고 통보한 것과도 다름없으므로 순장금지령도 지방 통제와 제민지배 강화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이후 순장을 금지한 신라가 영토를 넓혀 가야, 한강 유역 등을 정복하면서 삼한 세계 전체에 이런 생각이 퍼져나가게 되었고, 인명 존중 사상이 상대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로도 작용하였다.[1]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후 1,000년 가까이 지난 명나라 때까지도 순장을 이어 왔다. 선례를 남기는 게 이토록 중요한 것. 기원전인 춘추전국시대에 공자가 순장은커녕 순장 대신 가짜로 묻는 '용'조차도 반인륜적이라고 혐오를 표출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병기나 토우 등을 묻는 방법으로 대체하기도 했지만 순장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유목민족의 유입에 따라 또 다시 보편화되기도 했었고, 이 때문에 명나라도 전대 원나라가 몽골의 풍습에 따라 순장을 했었던 것의 유습이 잠시 내려왔었다가, 영종 정통제가 궁궐 인력의 감소를 우려하여 순장을 금지한다. 이후 청나라가 개국하면서 잠시 부활하지만 완전히 중원을 장악한 제3대 황제인 세조 순치제가 다시 금지시킨다. 이처럼 중국의 순장은 북방민족의 영향으로 인해 유지되었다가 폐지되었다가를 반복했다. 고대부터 일관적으로 수천 년간 시행됐던 것은 아니다.


3. 우경법 실시(502년)[편집]


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것. 우경법 실시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6세기가 될 때까지 신라 사람들이 농사짓는 데 소를 활용할 줄 몰랐었냐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 따라서 우경법이 시작됐다고 보기보다는 국가 차원에서 우경법 장려를 시작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즉 원래 우경이 존재했지만, 지방의 사정에 따라 암암리에 실행되었던 것을 국가에서 공인하여 전국적으로 시행했다는 의미이다.

우경 실시를 통해 신라의 왕권이 강화되고 지방 통제가 강화되었음을 방증한다는 견해가 있다. 사실 신라는 다른 국가에 비해 부체제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남아있고 토착 지배층의 영향력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우경이 도입되면 농경이 원활하게 가능한 지역과 산악지대로 이루어진 지역의 격차가 심해지기 때문에 지배층 내에서 불평등이 심화된다. 이것을 방지하고 지배층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신라는 국가 차원에서 도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증왕의 우경 실시는 지배층의 이런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졌음과 동시에 국가 차원의 지방 통제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나오는 업적이다.


4. '왕' 칭호를 사용(503년)[편집]


신라 고유의 군주의 칭호마립간의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신라의 마지막 군주이다. 지증왕 이후로는 중국처럼 왕호를 쓰게 된다.[2]

비공식적으로는 그 다음 군주인 법흥왕도 마립간의 칭호를 썼었지만[3] 정책을 바꿀 때 한동안은 예전 방식도 혼용하는 건 어디에나 있는 일이고 어쨌든 공식적 변경은 지증왕 때였다.

중국식인 (王) 칭호를 사용한 신라 최초의 군주이며, 시호를 한국사 최초로 받기도 했다.


5. '신라' 국호 확정(503년)[편집]


공식 국호를 '신라'로 확정했다. 이전에는 신라 국호의 한자 표기가 통일되지 않았던 상태로, 《삼국지》의 사로국(斯盧國), 포항 냉수리 신라비사라(斯羅), 그 외에 신로(新盧), 서나(徐那)·서야(徐耶), 서라(徐羅), 서벌(徐伐), 신라, 계림 등 여러가지 표기가 혼용됐다. 이것을 지증왕 때 공식 국호가 신라로 확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된다. 신라라는 국호 자체가 지증왕 때 처음 사용된 것은 아니며 이미 내물 마립간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다.[4] 그러나 신라는 사로, 신라, 계림, 사로 등의 국호가 혼용되고 있었고 주변국이나 중국에서는 기록상 사로라는 명칭을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을 지증왕 때 제도를 정비하면서 신라로 확정한 것이다.

지증왕은 신라라는 이름 의미를 뜻풀이했는데,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新者德業日 羅者網四方之義)

에서 앞뒤 두 글자를 취한 것으로 해석했다.


6. 상복법 제정(504년)[편집]


504년 음력 4월 장례식에 입는 옷 등 예식을 규정하는 상복법(喪服)을 제정한다. 장례는 가장 기초적인 문화고, 여기에 대해 국가가 주도적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국가의 지배력이 백성들의 가정 생활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강해졌음을 뜻한다.


7. 12성을 쌓다(504년)[편집]


음력 9월에 파리[5], 미실[6], 진덕, 골화 등 12성을 쌓는 등 고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8. 지방 조직인 군현제 정비(505년)[편집]


몸소 나라 안의 주•군•현 행정구역을 정비했다. 통일 전 신라의 수도, 지방 행정 조직은 6부 5주였는데, 지증왕 때 최초로 실직주(지금의 강원도 삼척시)를 설치하고, 이곳의 군주이사부를 파견했다. 어쩌면 북위양(육조)의 지방 제도를 벤치마칭했을 것이다.


9. 얼음을 저장하고 선박 이용의 제도를 정비(505년)[편집]


505년 11월 처음으로 담당 관청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했다. 또한 선박 이용의 제도를 정했는데 원래 신라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에 약했다. 앞서 유례 이사금 시대 기록을 보면 '신라는 주변국보다 수전에 약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증왕 시대에 바닷길 개척을 함으로써 이사부가 몇 년 후 수군을 이끌고 우산국을 정복한 것도 가능했고, 그 전 소지 마립간 시대까지 서라벌에 자주 쳐들어오던 왜군이 쳐들어오는 기록도 지증왕 시대부터 거의 사라진다. 적어도 동해안에 왜구가 상륙해서 수도 월성이 포위되는 상황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10. 동시전 설치(509년)[편집]


수도 동쪽에 상설 재래시장인 동시(東市)를 설치하고, 시장 감독 기구, 오늘날 공정거래위원회에 해당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지었다.[7]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지 마립간 때 수도에 시장을 처음으로 개설하였고, 지증왕 때 동시와 함께 동시전을 설치하였다. 동시의 설치가 추가 설치된 것인지, 확대 개편된 것인지, 복구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당시 신라에서 물자의 유통이 이전보다 활발하였음을 보여주고, 중앙은 이를 관리할 필요성을 느껴 동시전을 설치한 것 같다.

이는 소지 마립간 때부터 등장한 부체제의 한계와 중앙집권화가 지증왕 때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소지 마립간 때 설치된 우역과 시장은 지역에 따른 경제력 차이를 해결해줌과 동시에 중앙의 왕권이 부체제의 한계를 넘어서서 지방 통제를 강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지증왕 때 동시와 동시전의 설치는 우경과 함께 봐야하는데, 우경으로 인한 지역의 경제적 편차의 증가와 잉여 생산물의 유통은 당시 지방 지배층 간 경제적 갈등을 중앙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지방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조절할 수 있을만큼 왕권과 지방통제력이 강화되고 있음을 나타난다. 이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지증왕 때 처음으로 '왕' 칭호를 사용하고 국호를 '신라'로 비정한 점이다.


11. 이사부우산국 정복(512년)[편집]


실직주 이후 하슬라(지금의 강릉시)의 군주가 된 이사부에게 명해 수군을 이끌고 바다 건너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한 것도 지증왕 재위 시기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이사부 문서 참조.

그 외에 아시촌 소경(514년)을 설치해 지증왕 대의 업적을 마무리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업적들을 자랑하지만 금석문 기록에 따르면 지증왕 초기까지도 여전히 신라 왕실은 1개 부의 지배자 정도로 머물러 있었다고 나온다. 이런 것을 지증왕과 이후 법흥왕 2대에 대대적으로 나라를 고치면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1] 물론 프랑스 대혁명의 <인권 선언>과 동일선상으로 볼 수는 없다. 이 당시의 인명 존중은 본격적인 삼국 간 회전력 싸움이 슬슬 시작되던 시기에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을 순장으로 소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 활용하고 동시에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게 맞다.[2] 고구려와 백제는 "왕"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태왕, 어라하, 건길지 항목 참조.[3]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모즉지매금왕'(牟卽智 寐錦王)이란 이름이 등장하고, 이는 법흥왕으로 비정되는데, 매금은 마립간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지배자의 호칭이므로 이 때까지는 마립간과 왕이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4] 내물 마립간 때 중국 전진에 사신을 보낼 때 국호를 '신라'라고 했는데, 중국 사서에 사로가 아닌 신라로 기록된 첫 사례다.[5] 프랑스가 아니다. [6] 참고로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고, <선덕여왕(드라마)>으로 유명해진 미실과는 한자가 다르다. 《화랑세기》 미실은 美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 지명 미실은 彌實. 단 이 시절 신라는 사람 이름이나 지명에 쓰는 한자가 고정돼있지 않고 음이 같거나 비슷하면 혼용하기도 하는데, 필사본 《화랑세기》가 만약 박창화의 창작물이라면 신라인스러운 이름을 만들기 위해 박창화가 《삼국사기》의 이런 부분에서 참고해 따 온 이름일 수도 있다.[7] 소지 마립간이 최초로 시장을 열었다. 훗날 효소왕 때 서시, 남시도 만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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