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와카쓰키 내각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의 부상 악화로 1931년 4월 14일 하마구치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하마구치의 후임으로 입헌민정당 총재가 된 와카쓰키 레이지로 前 총리가 내각총리대신으로 다시 임명되어 설립된 내각이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각료회의를 열어 수습할려고 했지만, 이 시기 내각의 구조 상[1] 끝내 흐지부지되었다.
이후에도 아다치 겐조 내무대신의 제안으로 군부를 억제하기 위해 입헌정우회와 거국내각을 구성하고자 했으나, 각료의 대다수가 반대해 지지부진한 상태가 계속되면서 이에 반발한 아다치가 사직을 요구하면서 보이콧을 계속해 내각이 마비되어 통제력을 상실해, 결국 1931년 12월 13일 총사퇴했다.
2. 각료 목록[편집]
2.1. 국무대신[편집]
* 비고란에 쓰여진 것을 제외하고는 1931년 4월 14일 임명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2-10 19:36:02에 나무위키 제2차 와카쓰키 내각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대일본제국 헌법 당시 일본의 내각은 국무대신 한 사람만 사퇴해도 내각 전체를 해산해야 했기에 강경파 한명이 쿨하게 사퇴하면서 내각을 무력화시키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황고둔 사건 당시 다나카 기이치 총리는 초기에는 "관동군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가 단독으로 저지른 것"이라면서 히로히토 천황에게 처벌을 요청했으나 육군의 강력한 반발로 "묻어둘 수 밖에 없다."라고 말을 돌렸다. 히로히토 천황은 이에 역정을 냈고 "다나카를 더이상 보지 않겠다, 다나카는 아주 싫다." 는 발언까지 하자 결국 7월 2일, 사건이 터진지 한 달만에 다나카 내각은 총사퇴한다. 뒤이어 그의 후원으로 총리가 된 동창 야마나시 한조 조선 총독도 비리로 물러났다. 이렇게 내각이 단기간에 여러번 무너지자, 천황과 궁내대신들은 가급적 군과 내각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