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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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쟁 경과
4. 주요 전투



1. 개요[편집]


기원전 214년부터 기원전 205년까지 한니발 바르카와 연합하여 로마 공화국을 일리리아에서 밀어내고, 발칸 반도를 제패하려는 마케도니아 왕국-아카이아 동맹 연합군과 이에 맞선 로마 공화국-일리리아 왕국-아이톨리아 동맹-페르가몬 왕국-스파르타-엘리스-메세니아 동맹군 간의 전쟁이었다. 기원전 205년 포이니케 평화협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되었다.


2. 배경[편집]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이었던 필리포스 5세는 기원전 221년 왕위에 오른 뒤 아카이아 동맹과 손을 잡고 아이톨리아 동맹, 스파르타, 엘리스를 상대로 아이톨리아 전쟁을 벌인 끝에 기원전 217년 이들을 굴복시키고, 그리스 전역에 대한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아이톨리아 전쟁을 치르던 중인 기원전 219년 로마군이 마케도니아와 인접한 일리리아 왕국을 복속시키자, 주변 국가들을 희생시켜가며 영토를 계속 확장하는 로마가 언젠가는 마케도니아까지 노릴 것이라 여기고 경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일리리아의 군주였다가 로마군에 축출된 뒤 마케도니아에 망명하여 필리포스 5세의 고문이 된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가 이렇게 부추겼다고 한다.

"헬라스는 이미 폐하에게 전적으로 순종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카이아인은 폐하께 진정한 애정을 표하고 있습니다. 아이톨리아인들은 전쟁에서 발생한 재난으로 인해 공포에 사로잡혀 감히 대적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이탈리아로 건너가셔야 합니다. 이것은 제국을 건설하는 첫 번째 단계이며, 폐하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로마인들이 페니키아인들에게 곤경을 겪고 있으니, 지금 행동해야 합니다."


필리포스 5세는 그 말에 혹해 로마군을 일리리아에서 축출한 뒤 이탈리아 반도로 진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기원전 217~216년 겨울에 100척의 전함을 건조하고 선원들을 훈련시켰다. 이때 건설된 배는 전사 50명을 태울 수 있고, 민첩하게 이동할 수 있는 일리리아산 소형 전선 렘보스(λέμβος)였다. 필리포스 5세는 해전 경험이 별로 없는 마케도니아군이 로마 해군을 정면 대결에서 무찌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고, 일리리아 해안을 장악한 뒤 군대를 이탈리아로 신속하게 수송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함대가 갖춰지자, 필리포스 5세는 일리리아 해안의 주요 요새인 아폴로니아를 기습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그리스 남단을 돌아 아드리아해를 따라 항해한 끝에 목표에서 14마일 떨어진 아올론 만에 도착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그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일리리아 국왕 스케르딜라이다스로부터 이 정보를 입수하고, 10척의 퀸퀘레메[1]를 아폴로니아로 파견했다. 로마의 5단 함선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필리포스 5세는 그들의 규모가 작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마케도니아 해역으로 철수했다.

기원전 216년 8월, 한니발 바르카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필리포스 5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로마의 패배가 기정 사실이라고 여겼고, 이 기회에 한니발과 손을 잡아 로마를 공략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기원전 215년 여름, 아테네 출신의 크세노파네스가 이끄는 필리포스 5세의 사절단이 한니발 진영에 도착했다. 한니발은 발칸 반도의 강대국 마케도니아를 동맹국으로 두는 것에 반색하며, 필리포스 5세가 자신을 위해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준다면 그가 일리리아를 완전히 차지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크세노파네스와 카르타고 대표단을 태운 배가 마케도니아로 돌아가던 중 칼라브리아 해안에서 로마 함대에 나포되면서, 로마 정부는 한니발과 필리포스 5세의 동맹이 맺어졌다는 것을 조기에 파악했다. 로마 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법무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에게 30척의 함대를 맡겨 아풀리아에 주둔한 25척의 함대와 연합해 아드리아해에 인접한 이탈리아 해안을 지키고, 필요한 경우 마케도니아로 건너가 필리포스 5세에 맞서라고 지시했다.

필리포스 5세는 한니발과 손잡은 뒤 아카이아 동맹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아카이아 동맹의 지도자 아라토스가 로마와의 전쟁에 함께 하길 꺼려서 그를 설득하는데 시간을 들여야 했다. 여기에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서쪽의 메세네에서 민중과 귀족 간의 갈등으로 인해 내전이 발발하자, 필리포스 5세는 이에 개입해 메세네 귀족 150명을 처형하여 내전을 수습해 준 뒤 그 대가로 이토메 요새를 제공받았다. 그러자 아라토스는 필리포스 5세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요충지인 아크로코린스를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토메까지 보유하는 것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힐난했고, 필리포스 5세는 어쩔 수 없이 이토메 요새를 포기해야 했다.


3. 전쟁 경과[편집]


기원전 214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시일을 지체한 필리포스 5세는 아폴로니아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120척의 렘보스로 구성된 마케도니아 함대는 아울론 만에 도착한 뒤 오리쿰 항구를 점령했다. 이후 육지에 상륙한 마케도니아군은 왕의 지휘하에 아폴로니아를 포위 공격했다. 오리쿰 주민들은 이탈리아 남단부의 항구 도시인 브룬디시움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마침 브룬디시움에 머물고 있었던 라이비누스는 이를 수락하고, 함대를 이끌며 발칸 반도로 항해해 오리쿰을 단숨에 탈환했다.

얼마 후, 라이비누스는 라틴 동맹군 사령관 퀸투스 나이비우스 크리스타에게 아폴로니아를 구원하는 임무를 맡겼다. 크리스타는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비밀리에 이동해 마케도니아 진영을 습격했다. 필리포스 5세는 로마군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퇴로조차 미처 확보하지 못했다. 그는 아폴로니아에서 배를 타고 도망치려 했지만, 로마군이 강 어귀에서 길을 막자 배를 불태우고 육로를 통해 마케도니아로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그후 라이비누스는 오리쿰 항구에 정박한 채 겨울을 보냈다.

필리포스 5세는 아폴로니아 공방전에서 패퇴한 뒤 자신에게 반기를 든 메세네를 진압하기 위해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에게 군대를 맡겨 파견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메세네 공방전을 치르던 중 전사했고, 마케도니아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메세네 주변의 영지를 황폐화시켰다. 이로 인해 그리스인들의 반 마케도니아 감정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필리포스 5세는 이대로 일리리아를 장악할 기회를 날릴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는 해로가 로마 해군에 의해 봉쇄된 이상 육로로 진격하기로 했다. 기원전 213년, 마케도니아군은 공세를 개시했다. 로마군이 굳건히 버틴 아폴로니아와 디라키움은 공략할 수 없었지만, 아틴타니아와 디말레 마을을 점령하고 일리리아의 다사레타스족, 파르티노스족, 아르디아이족을 복속시켰다.

필리포스 5세는 여세를 몰아 아폴로니아 및 로마와 동맹을 맺은 스케르딜라이다스의 영토 사이에 있는 리수스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아폴로니아 공방전때와는 달리 경계를 철저하게 해 로마군의 접근 여부를 감시했고, 대다수의 로마군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하느라 바빴기에 자신에게 맡겨진 육군이 별로 없었던 라이비누스는 리수스 요새에 구원군을 섣불리 보낼 수 없었다. 결국 리수스 요새는 수 개월 만에 함락되었고, 필리포스 5세는 마침내 일리리아 해안가에 거점을 마련했다.(리수스 전투)

필리포스 5세가 기어이 항구를 확보하자, 로마인들은 위협을 느꼈다. 당시 한니발이 1차 타렌툼 공방전에서 이탈리아 남부의 최대 항구 도시인 타렌툼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고, 시라쿠사 공방전 역시 카르타고 정부가 시라쿠사를 구원하기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했기에 승패를 알 수 없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카르타고 함대가 리수스로 가서 마케도니아군을 싣고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한다면, 필리포스 5세와 한니발이 조우하여 로마를 공동으로 상대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이에 라이비누스는 아이톨리아 동맹에 사절을 보내 필리포스 5세에 공동으로 대항하자고 제안했다. 기원전 217년 필리포스 5세에게 참패한 뒤 불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맺어야 했던 아이톨리아인들은 마케도니아 왕국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이 제안에 호의적이었다. 라이비누스는 기원전 212년 말 함대를 이끌고 아이톨리아를 방문한 뒤 동맹 의회에 출석해 동맹의 지도자들인 도리마코스, 스코파스와 협상했다. 이 자리에서 라이비누스는 로마가 카푸아 공방전에서 승리해 한니발을 궁지에 몰아가고 있다며, 마케도니아 왕국을 충분히 상대할 여력이 로마에게 있다고 장담했다.

아이톨리아 동맹 의회는 논의 끝에 로마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협약을 맺었다. 로마가 단독으로 점령하거나, 아이톨리아인들과 협력하여 점령한 코르기라(현재의 코르푸) 남쪽의 모든 도시는 아이톨리아 동맹에게 넘어가며, 로마가 단독으로 점령해서 확보한 물자는 로마군이 소유하되 아이톨리아 동맹군이 도와줬다면 분배하기로 했다. 또한 로마는 25척의 퀸퀘레메를 제공하고, 아이톨리아인들은 대부분의 군인을 제공하기로 했다. 라이비누스는 여기에 더해 엘리스, 메세네, 스파르타, 페르가몬 왕국, 스케르딜라이다스 등에게 사절을 보내 반 마케도니아 연합에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기원전 212년 가을, 아이톨리아 동맹은 필리포스 5세가 마케도니아 북부를 침공한 다르다니아인들을 응징해 신티아를 공략하느라 바쁜 사이에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있었던 아카이아 동맹을 공격했다. 이에 아카이아인들은 전쟁에서 지면 모두 죽자고 맹세한 후, 여자와 아이들을 에페이로스의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결사적으로 항전했으며, 아이톨리아인들은 아카이아인들의 이같은 항전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필리포스 5세가 아카이아 동맹으로부터의 구원 요청을 받고 구원하러 달려오자 본토로 철수했다.

반면 로마인들은 더 성공적인 결과물을 얻어냈다. 라이비누스는 함대를 이끌고 아카이아 동맹에 소속된 오에니아데와 나수스를 공략했으며, 자칸투스 섬을 뒤이어 공격해 필리포스 5세가 세운 아크로폴리스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공략했다. 이 도시들은 사전 약속대로 아이톨리아 동맹의 소유가 되었다. 또한 라이비누스와 아이톨리아 동맹의 스트라테고스인 스코파스는 안티키라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 주민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고 도시는 아이톨리아인들에게 넘어갔다. 그후 라이비누스는 함대를 코르기라(코르푸) 섬으로 옮겨 겨울을 보냈다. 이 성공에 고무된 스파르타, 엘리스, 메세나는 로마와 동맹을 맺고 필리포스 5세에게 대항하기로 결의했다.

기원전 210년, 라이비누스는 집정관으로 선출된 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에게 지휘권을 넘긴 후 로마로 돌아갔다. 그런데 원로원은 라이비누스의 과장된 보고를 듣고, 발칸 반도의 상황이 마무리되었다고 오판하여, 갈바 막시무스에게 1개 군단의 지휘권만 맡긴채 나머지는 해산하도록 명령했다. 갈바는 이런 상황에서도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에게 해로 진군해, 필리포스 5세에게 포위된 에키누스를 구원하려고 했으나 격퇴되었고, 에키누스는 곧 항복했다.(에키누스 전투) 이후 아이기나를 공략하고 모든 주민을 노예로 팔려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아이톨리아 동맹에 넘겼으며, 페르가몬 왕국에게 아이기나를 넘기는 대가로 전쟁에 참여시켰다.

기원전 209년, 스파르타군과 아이톨리아 동맹군이 연합하여 아카이아 동맹을 공격했다. 갈바 역시 이를 지원하고자 라미아를 공격한 아이톨리아 동맹에 1,000명의 해병을 지원했다. 필리포스 5세는 이에 대응해 친히 라미아로 진격했고, 이어진 두 번의 전투에서 아이톨리아 동맹군에게 각각 1,000명의 사상자를 입히며 패퇴시켰다.(라미아 전투) 아이톨리아 동맹은 이 패배에 동요했고, 때마침 로도스 섬, 키오스 섬, 이집트, 아테네 사절단이 찾아와서 마케도니아와 아이톨리아 동맹 간의 화해를 주선하겠다고 제안하자 마케도니아와 30일 동안 휴전한 뒤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갈바가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1세와 함께 나우팍토스에 상륙하여 아이톨리아 동맹을 구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이톨리아 동맹 측은 돌연 오만하게 나오면서 필로스를 메세나에, 안티나니아를 로마에, 아르디아이를 스케르딜라이다스에게 넘겨야 한다고 요구했다. 필리포스 5세는 이에 분노해

"나는 진정으로 평화를 찾고자 여기 왔거늘 너희는 전쟁을 키울 구실만 찾고 있었구나!"

라고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이후 필리포스 5세는 나우팍토스에서 시콘으로 이동한 로마군을 기병으로 급습했고, 로마군은 서둘러 자기 배로 도망친 뒤 나우팍토스로 철수했다.

시콘 전투에서 로마군을 물리친 필리포스 5세는 아이톨리아 동맹의 본거지인 엘리스를, 아카이아 동맹의 스트라테고스인 키클리아데스와 함께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갈바는 키리네로 항해해 적이 엘리스를 포위하기 전에 4,000명의 군단병을 엘리스에 배치시켜 도시 수비를 강화할 수 있었다. 필리포스 5세는 기병대를 이끌고 군단병들을 향해 돌격했지만 도중에 낙마한 뒤 걸어가면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 끝에 로마군이 승기를 잡자 퇴각했다. 이후 군대를 수습해 피리쿠스 성채를 습격하여 점령한 뒤 4,000명의 포로와 20,000마리의 말 등 동물을 사로잡았다.(피리쿠스 전투) 그러나 다르다니아인들이 마케도니아를 또다시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어쩔 수 없이 필리포스 5세는 마케도니아로 귀환했다. 그후 이탈리아 반도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지휘관과 군대를 분산시키며, 여러 고지에 봉화를 설치해 적의 움직임을 자신에게 즉시 전달하도록 한 뒤 수비에 전념하면서 상황을 살폈다.

얼마 후, 반 마케도니아 연합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군은 한니발 바르카에 전력을 기울이느라 발칸 반도에 육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기에, 갈바는 오직 소규모 함대만 운용할 수 있었다. 육상에서는 아이톨리아 동맹과 스파르타 등이 공세를 주도했지만, 유일하게 마케도니아 편을 들고 있었던 아카이아 동맹을 제압하는 것조차 애를 먹고 있었다. 일리리아인들은 자국의 영토를 탈환하는데 관심이 있었지만 그 이상 공세를 펼칠 생각은 없었고, 페르가몬 왕국은 이웃 국가인 비티니아 왕국과 갈등을 벌이고 있어서 역시 그리스 방면에 전력을 기울이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공세를 시작한 갈바는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와 함께 60척의 연합 함대를 이끌고 아이기나 섬에서 렘노스 섬으로 항해했다. 아탈로스 1세는 페파레우스를 공격한 뒤, 갈바와 함께 니케아로 건너갔다. 이후 마케도니아 수비대가 점거하고 있었던 우라에오스를 공격하기 위해 에우보이아로 이동하여 우라에오스를 곧 공략했다. 갈바는 뒤이어 칼키스를 공략하려고 했지만 적의 방비가 생각보다 강하자 로크리스의 항구 도시인 키노스로 이동했다. 한편 아탈로스 1세는 로크리스 동부의 주요 도시인 오푸스를 점거한 뒤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며칠간 그곳에 머물렀다. 이때 봉화를 통해 적이 오푸스를 공격했다는 것을 조기에 파악한 필리포스 5세가 달려왔고, 약탈품을 수집하느라 사방에 흩어졌던 페르가몬군은 제대로 된 대항 한 번 못해보고 패주했다. 아탈로스 1세는 마케도니아군에게 사로잡힐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하고 바다로 탈출했다.(오푸스 전투)

이후 마케도니아 왕국과 동맹을 맺은 비티니아 왕국이 페르가몬 왕국을 공격하자, 아탈로스 1세는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중단하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갈바는 할 수 없이 아이기나로 철수했고, 로마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기원전 206년까지 그곳에 머물며 별다른 군사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페르가몬 왕국과 로마 모두 대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여유가 생기자, 필리포스 5세는 아이톨리아 동맹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트로늄과 케피소스 강 북쪽의 티트로니움 및 드리마이아를 공략했다. 이에 이집트, 로도스, 비잔티움, 키오스, 미틸레네, 아테네에서 파견된 사절들이 아이톨리아 동맹과 필리포스 5세가 화해하도록 중재하겠다고 나섰다. 기원전 207년 봄 엘라테이아에서 이들 사절단을 만난 필리포스 5세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아이톨리아 동맹은 전쟁을 꿋꿋이 이어나가기로 결의했다.

기원전 207년, 스파르타 국왕 마차니다스가 이끄는 아이톨리아-스파르타 연합군은 아카이아 동맹의 영토로 침입했다. 이에 아카이아 동맹의 스트라테고스인 필로포이멘은 마케도니아 방식으로 육성된 아카이아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이에 맞섰다. 양군은 만티네아 평원에서 조우했다. 기록에 따르면, 스파르타-아이톨리아 연합군은 15,000명, 아카이아 동맹군은 15,000 ~ 20,000명이었다고 한다. 마차니다스는 좌익에 배치된 팔랑크스를 이끌고 아카이아군 우익을 공격하게 하면서, 우익 부대의 대열을 길게 늘려 아카이아군 좌익과 길이 같게 한 뒤 그들을 견제하게 했다. 또한 대열 앞에 투석기를 배치해 적 대열을 향해 돌덩이를 퍼붓게 했다.

연합군이 투석기로 아카이아군을 향해 퍼붓기 시작하자, 필로포이멘은 일리리아 용병들에게 투석기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아카이아군쪽에서 용병들이 달려들자, 마차니다스 역시 용병을 보내 그들을 막도록 했다. 이를 시작으로 양군 전체가 서로를 향해 진격하면서 전투가 본격적으로 발발했다. 초기에는 승패가 판가름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차니다스의 용병들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일리리아인들은 맹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패퇴했으며, 아카이아군의 좌익도 무너졌다. 이에 마차니다스는 기병대를 이끌고 도주하는 적을 몸소 추격했다.

마차니다스가 도주하는 아군을 쫓기 위해 전장을 이탈하는 것을 본 필로포이멘은 후퇴 명령을 내리는 대신 아카이아군 보병대에게 전진해 전장을 장악하라고 명령했고, 살아남은 일리리아인, 전사 및 용병들을 끌어모아서 팔랑크스 뒤에 자리를 잡아 마차니다스가 추격전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후 아카이아인들은 마차니다스의 이탈로 지휘 공백이 생긴 연합군의 통제되지 않은 공세를 그들 앞에 파여진 넓은 도랑을 적절히 활용해 격퇴한 뒤 도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연합군의 병사들을 모조리 살육했다. 마차니다스는 추격전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아군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본영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사전에 대기하고 있었던 일리리아인 및 전사들이 마차니다스를 알아본 후 공격했고, 마차니다스는 곧 피살되었다.[2] 이 만티네아 전투에서 최소 4,000명의 스파르타인 및 아이톨리아인이 전사했고, 더 많은 병사가 생포되었다. 여기에 본영에 남아있었던 모든 보급품과 수송 마차도 아카이아 동맹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반면 아카이아 동맹군의 손실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아카이아 동맹군은 필로포이멘의 지도하에 테게아를 공략하고, 라코니카를 침공하여 황폐화시켰다.

만티네아 전투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아이톨리아 동맹은 더이상 대마케도니아 전쟁을 이어가봐야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후, 로마의 동의없이 필리포스 5세와 평화협상을 벌였고, 기원전 206년 가을 필리포스 5세가 전쟁 중에 빼앗아간 영토가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국이 로마로부터 넘겨받은 영토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평화협약을 맺었다. 로마는 이에 반발해 기원전 206년 봄 일리리아 총독으로 선임된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에게 보병 10,000명과 기병 1,000명으로 구성된 병력을 맡겨 전쟁을 재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정도 병력으로는 필리포스 5세를 상대하기 어려웠고, 아이톨리아 동맹이 전쟁을 재개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결국 투디타누스는 필리포스 5세와 화해하기로 했고, 필리포스 5세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양국은 필리포스 5세가 전쟁 초기에 장악한 디말룸(Dimallum) 시와 파르티니(Parthini) 및 아틴타네스(Atintanes)족 중 디말룸과 파르티니를 되돌려주되 아틴타네스는 그대로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며, 필리포스 5세는 로마에 대한 어떠한 적대행위를 하지 않고 로마 역시 그러지 않겠다는 내용의 포이니케 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했다.

그러나 로마는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자신들을 공격하려 든 필리포스 5세를 용납할 수 없었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종결된 후인 기원전 200년부터 필리포스 5세의 침략에 시달리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돕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단행했다.


4. 주요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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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quinquereme: 5개의 노를 갖춘 갤리선[2]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필로포이멘이 몸소 창으로 마차니다스를 찔러 죽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