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랑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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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전통 그리스식 팔랑크스
2.1.1. 페르시아 전쟁기의 전성기
2.1.2. 전술적인 사용례와 약점
2.2.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
2.3. 레기오와 팔랑크스
2.4. 팔랑크스의 멸망
3. 비슷한 사례
3.1. 동양


1. 개요[편집]


φάλαγξ(Phalanx)

고대 그리스보병 방진. 영어로는 페일랭크스 정도로 읽는다.

고대 그리스의 주력 병력인 중무장한 호플리테스로 구성되었던 전술로서, 이후로도 영미권에서 보병 방진의 대명사로 꼽히고 있다. 방패을 든 다수의 병사를 고슴도치처럼 밀집대형으로 배치하여 근접전을 벌이며 적을 압박하는 전술이다.

영어발음인 팔랑스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팔랑크스를 구성하는 각 병사들을 팔랑기테스(Phalangites), 복수형은 팔랑기타이(Phalangitai)라고 한다. 영어식으로 Phalangist, Phalangists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팔랑가이트라고도 하는 듯.

2. 상세[편집]



2.1. 전통 그리스식 팔랑크스[편집]



그리스 호플리타이(όπλίται)의 팔랑크스

기본적인 전투방식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큰 원형 방패를 일렬로 포개어 적들의 무기가 파고들 수 없을 정도로 두텁고 넓은 방패벽을 만들고, 도리(δόρυ)라 불리는 창을 역수로 쥐고 방패벽 너머로 적병들에게 내리꽂는 것. 무술단체에서 여러 번 재현해본 결과, 방패를 들고 대열을 이루다보니 밑으로 쥐는 것보다 이편이 이동하거나 휘두를 때에 아군들에게 걸리적거리지 않고 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방패가 가려주지 못하는 다리, 즉 정강이 쪽은 각반 혹은 정강이 보호대가 보호해주고, 방패 너머도 갑옷과 투구가 보호해주기 때문에 웬만해선 공략법이 없는 단단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기본적으로 대열을 유지하면서 방패로 자신과 옆 병사를 동시에 방어하는 것이 포인트. 중장보병 전투에서는 전통적으로 우익의 팔랑크스에 정예병을 배치하는 게 관례였다. 여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중장보병은 왼손에 방패를 들고 그것으로 자기 몸의 왼쪽 반신만을 가렸다. 우측면은 우측 병사의 방패에 맡겨야 했다. 두 사람이 한 개의 우산을 나눠 쓰듯이 방패를 공유하게 되는데, 맨 우측의 병사는 자신의 우측을 가려줄 방패가 없었다. 이 병사가 방패를 자신의 우측면으로 좀 더 당기면 연쇄반응을 일으켜 모든 방패가 우측으로 쏠리게 된다. 굳이 이런 경우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방패가 우측으로 쏠리는 현상을 완전히 방지하기는 힘들었다.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므로 방패의 엄호면이 공정하게 가운데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병사의 몸도 방패를 따라 우측으로 가게 된다. 결국 팔랑크스는 똑바로 가지 못하고 우측으로 비스듬히 진격하게 된다.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뒷 대열에서 잽싸게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 그래서 한 분대는 가로열이 아닌 세로열로 섰다. 교전이 맨 앞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뒷열의 병사도 적 진형을 무너뜨리고 아군을 전진시키기 위해 앞 사람을 민다. 따라서 같은 팔랑크스끼리 정면 대결을 한다면 종심이 깊은 쪽이 더 강력하다. 대열에 구멍이 날 경우 자신뿐만 아니라 하나의 팔랑크스 전체가 위험에 빠지기 때문에 이런 진형으로 전투를 치르려면 높은 규율이 필요했고, 따라서 그리스군의 훈련은 진형 유지에 집중되었다.

다른 폴리스들은 자기 생업에 종사하는 시민병으로서 1년에 십수일에서 30일 정도의 훈련을 받았을 뿐이지만, 스파르타는 시민보다 전사로서의 삶이 우선이었다. 다른 폴리스 시민들이 진형 유지 훈련하는데 훈련일정을 다 보내는 반면에, 스파르타인들은 평생에 걸쳐서 단련하는 전사들이었기에 진형 유지는 처음 몇 년 만에 다 떼고 개인 무술이며 기동훈련이며 제식이며 심지어 임무형 지휘체계까지 훈련했다. 진형이 깨지면 그대로 패주하는 다른 그리스 병사들과 달리 이들은 일부러 진형을 해체하고 흩어졌다가 적이 추격하느라 길게 늘어지면 순식간에 재집결하는 기동전술도 펼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스파르타의 팔랑크스도 딱히 무적은 아니었으며, 군사기술의 발전으로 다른 폴리스의 간단한 꼼수에 격파되기도 했다.[1]

창을 들고 있는 오른쪽의 경우 방어를 전적으로 옆 병사의 방패에 의존해야 했기에 병사 간 신뢰도도 상당해야 했다. 하지만 역시 타인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지라 병사들은 오른쪽 병사의 방패로 몸을 자꾸 붙이려는 경향이 있었다. 거기에 접전이 붙으면 방패로 보호받는 오른쪽 병사는 전진하고, 왼쪽 병사는 물러서는 경향이 있어 전투가 오래 지속되면 각 전열의 오른쪽이 좀 돌출되고 왼쪽은 좀 물러서 있는다.


2.1.1. 페르시아 전쟁기의 전성기[편집]


고대 그리스 시절의 근접 전투력은 최강으로, 거대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팔랑크스를 이루는 호플리테스는 전신을 방어구로 보호했는데, 현실적으로는 청동으로 된 흉갑들이 너무 무겁고 비싸서 비효율적인지라 소수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따라서 몸통에는 두꺼운 린넨 천으로 된 흉갑을 주로 입었는데, 어차피 방패의 지름이 1미터에 이르고 겉부분을 청동으로 보강했기 때문에 몸의 대부분을 가릴 수 있었다. 거기에 투구나 다리 보호대도 청동으로 만들었으므로 사실상 정면은 빈틈이 거의 없었다.

반면 페르시아군은 귀족 기병이나 이모탈 같은 정예병들도 몸통 갑옷만 입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근접전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머리 대부분을 가리는 그리스식 투구와 달리 당시 페르시아의 원뿔형 투구는 머리 윗부분만 가렸다. 페르시아 기병들이 마갑이나 전신 갑옷을 써서 호플리타이보다 더 중무장하여 카타프락토이가 만들어진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특히 페르시아 군대의 장비에는 다리 보호대가 없고, 방패는 화살 막이용이었는지라 페르시아 병사들이 아무리 용맹해도[2] 근접전에서는 장비의 차이를 극복할 수가 없었다. 이는 당시 오리엔트를 석권했던 페르시아군의 전술이 다수의 경보병과 투사 무기를 동원하고 이를 기동성이 뛰어난 다수의 기병이 보조하는, 넓은 제국을 다스리기 위한 기동력 위주의 군대였기 때문이다.

팔랑크스는 부유한 그리스 시민들이 결투에서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 황당할 정도로 중무장을 했던 호플리테스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투방식이었다. 반면에, 페르시아 제국은 넓은 제국을 다스려야 하므로 기동성과 정보전달 능력을 중시한 군대였기에 이러한 상성차이가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페르시아군에 대한 그리스의 팔랑크스의 우세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 때에도 재확인된다.

영화 300의 무대였던 테르모필라이에서 압도적인 규모의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버틸 수 있던 이유는 이러한 무장의 차이, 그리고 그 무장의 차이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형 때문이었다. 페르시아군은 이란 고원+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시리아+이집트를 쓸어버린 강군들이지만, 운이 나쁘게도 테르모필라이에서 팔랑크스와 상성 관계가 발생하여 수많은 부대가 거의 녹아버리다시피 했다.

고대 전쟁에서 대부분의 전사자들은 전투 중이 아니라, 대열이 무너지는 순간과 승패가 갈린 후 패주하는 병사들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따라서, 전면의 방어력이 매우 높은 팔랑크스는 대열이 깨지지 않는다면 이기건 지건 피해가 극히 적었다. 비슷한 밀집방진인 로마의 레기오 역시 마찬가지로, 인정사정없이 밀렸다던 전투에서도 사상자가 수백명 뿐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팔랑크스는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적을 추격, 섬멸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양측에서 사상자가 적게 발생하게 되어,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시민병들이 계속 살아남아서 도시들의 생산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전통적인 팔랑크스 전술은 이겨도, 져도 큰 손해가 발생하지 않고 시민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그리스 전쟁의 '정석'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페르시아인들은 "쟤네 뭔 바보짓하냐?" 라고 생각했다고.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팔랑크스가 강력한 진형임은 맞았지만, 거대한 제국의 입장에서는 무식하고 비싼데다 상대편이 먼저 달려들기 전에는 구경만 해야하는 느려터진 병종이었다. 하지만 그 페르시아도 호플리타이에게 패배한 후에는 전투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강력한 경제력으로 그리스 호플리타이를 용병으로 고용했다. 나중 가면 아예 호플리타이를 얼마나 많이 보유하는지가 어떤 샤트라프가 더 센지의 척도가 되고, 샤트라프에 고용된 호플리타이가 샤한샤가 고용한 호플리타이와 싸우는 괴상한 일도 벌어진다.


2.1.2. 전술적인 사용례와 약점[편집]


팔랑크스는 근본적으로 매우 수세적인 대형이며, 팔랑크스 하나만 믿는다면 적을 막아낼 수는 있을지언정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어려웠다.[3] 따라서 팔랑크스로 적을 격멸하려면 적이 반드시 뚫고자 하는 길목에서 버티거나[4] 망치와 모루 전술 등등등을 적절히 사용하여 어떻게든 팔랑크스 정면을 적에게 붙여야 했다. 팔랑크스는 분명 가공할 정면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적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만전의 태세를 갖춘 팔랑크스에 (자신들도 같은 팔랑크스가 아닌 이상) 정면으로 달려들지는 않았으며, 무지성 순수 팔랑크스만 고집할 경우 당장 병거 부대가 팔랑크스 주변을 돌기만 해도 인간과녁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5]

알렉산드로스 3세가 명장인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페르시아 정복은 '우월한' 헬라스군이 '저열한' 근동 군대보다 강해서 성공한 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가 팔랑크스와 기병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불세출의 명장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팔랑크스가 근동 군대를 다 때려잡는 무적의 군대라면,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오니아의 헬라스인들이 근동을 정복했을 것이다. 레기오와의 비교에서 보듯, 팔랑크스는 이상적인 조건에서는 매우 강하지만, 그 이상적인 조건을 뽑아내기 위한 지휘관의 세심한 컨트롤이 비교적 많이 요구되는 군대였다.

전통 팔랑크스의 공격법은 방패 뒤에서 창을 짧게잡고 찍는 원시적인 수준이었지만, 전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파괴력을 가졌다. 반대로 기동성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정교한 전술을 발휘할 여지가 적었으며, 심지어는 장군들도 대열에 끼어서 그냥 묵묵히 전진만 했다고 한다. 팔랑크스에선 대대나 연대는 존재하지 않고 병사나 장교 할 것 없이 모두 한덩어리로 직사각형의 대열을 이루는 것이었다. 물론 편제가 존재하기는 했다. 명목상으로만. 20세기 중반까지 소대 단위 전술은 쓰일 여지가 거의 없었음에도 소대 편성이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단, 스파르타는 예외로 종합각개 훈련까지 했다. 물론, 그 그리스 최고라는 스파르타 귀족 팔랑크스조차 아테네의 펠타스트 등에게 측면을 찔려서 격파당하고 한동안 육상전을 회피한 것을 보면, 스파르타식의 장점은 펠레폰네소스 전쟁기에는 이미 무적이 아니게 된다.[6] 이는 애초에 팔랑크스라는 것이 개개인의 힘이 아닌, 전쟁을 잘 배우지 못한 그리스 시민들의 단결력과 질량을 이용하는 전법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서로를 지지해주는 진형이 주력이었던 덕분에 그리스는 민주정이 발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아테네에 비교해서도 악독할 정도의 이웃도시들을 노예로 삼는 노예제도와 귀족제를 병행한 스파르타에서도 시민의 대표들의 지위가 왕에 준할 정도로 높았다. 그리스에서 동성애가 장려된 것도 이런 땀내나는 진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7]

팔랑크스 대열은 빨리 움직이면 개인의 차이에 따라서 진열이 무너지므로 천천히 전진해야 했다. 그래도 빨리 걷는 속도 정도는 낼 수 있었지만 어쨌거나 팔랑크스의 기동성이 매우 떨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었고, 이것은 이 전술의 최대 약점이었다. 이 때문에 팔랑크스는 측면과 후방에 대한 공격, 특히 무기를 들되, 방패를 들지 않은 오른쪽에서 기병이나 경보병이 투사무기를 이용해 공격해오면 상당히 취약했다. 기원전 391년에 벌어진 레카이움 전투(Battle of Lechaeum)에서는 아테네군 경보병대가 스파르타군 왼편에 매복해있다가, 스파르타군 중보병대가 보급품을 호송하고 방향을 바꿔 돌아올 때 오른쪽이 노출되자 투사 공격만으로 집요하게 공격하여 600명 중에 250명을 사살해내기도 했다. 측면의 약점만 잘 찌를 수 있다면, 그리스 최강이라는 스파르타 완전시민 최정예 팔랑크스도 얄짤없이 평민들의 투사무기와 경보병한테 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비어있는 오른쪽을 옆 병사의 방패가 보호하고 있어도, 본능적으로 오른쪽을 보호하기 위해 옆 병사의 방패쪽에 자신의 몸을 더욱 밀착시키다보니, 그 결과 직선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전진하는 모양새를 띠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팔랑크스에서는 '오른쪽으로 도망치는' 현상 때문에 부대의 최우익에는 최정예 병사를 배치했다. 슬금슬금 도망치다 무너지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군 우익이 상대하는 적 좌익은 점차로 '도망가고 있는' 적이므로 적 좌익을 먼저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테베의 명장 에파미논다스는 팔랑크스의 약체 병사들이 모인 좌익을 역으로 비정상적으로 강화해 적 우익(최정예)을 격파하는 사선대형을 만들었다. 이 사선대열은 오히려 적의 정예부대가 있는 쪽에 대규모의 질량을 집중시켜서 정예부대를 먼저 짓밟는 전략이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 최강이었던 스파르타의 완전시민 팔랑크스는 사선대열을 통한 대규모의 질량 집중 때문에, 싸움 실력을 떠나서 아주 일방적인 질량 차이로 최정예 완전시민들이 짓밟혀서 무너졌다. 이로써, 팔랑크스는 개개인의 싸움실력보다는 대규모 질량의 활용법이 중요한 전술이라는 것이 입증되고, 전통적인 최강의 팔랑크스였다는 스파르타의 전설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팔랑크스는 산악지형이 많은 그리스에서는 측면이 약하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유용했다. 산악지형은 길목이 좁으므로 팔랑크스와 같은 정면대열을 피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팔랑크스를 이루는 병사들은 평시에는 경제를 담당하는 시민병이라는 특성 때문에, 공격자든 패배자든 너무나 튼튼한 방어력 덕분에 사상자가 많이 나오지 않는 팔랑크스 전술은 고대 그리스의 경제 상황에서도 가장 유용했다.

다만 기동성의 약점은 선명한지라, 기병이나 경보병 등이 달라붙으면 녹여버릴 수 있는게 팔랑크스의 장점이라면, 기병-경보병이 싸워주지 않고 그냥 우회해서 가버리면 멀뚱멀뚱 보고만 있어야한다는 전략적 약점을 가진 것이 팔랑크스였다. 도시나 마을 등을 지키라고 있는게 군대인데, 그 도시와 마을을 털어버린 다음 가버리면 중보병들은 뒤뚱거리며 뒷북을 치던가, 아니면 대형 해제하고 달려오다가 죽던가...


전술적으로도 군사전략이 발달하고 경보병과 기병들이 발달하자, 팔랑크스는 점점 약점을 노출했다. 수백년 후의 로마 레기오와의 대결에서 노출한 약점이 대표적이지만, 심지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그리스 인들의 내전에서도 이미 약점이 보였다. 전쟁에선 스파르타가 이겼지만, 스파르타가 자랑했던 팔랑크스는 아테네의 경보병과 테베의 사선대열이라는 새로운 전술 앞에선 오히려 대패를 연거푸 겪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 역시도, 육상전을 배제하고 페르시아의 도움&해양전에서 승리했던 것 뿐으로, 전통적인 팔랑크스의 강함과는 거리가 있는 전쟁이었다.[8]

여담으로, 사선대형을 만들어낸 테베에는 신전에 죽을 때까지 복무하기로 맹세해 신성부대라고 불리는 정예 보병대가 있었는데, 150쌍의 동성커플 3백 명으로 편성했다고 한다. 굳이 동성커플을 쓴 이유는 애인과 함께 전장에 나오면 자신의 애인을 지키기 위해 더 잘 싸울 것이다고 생각했기 때문.[9] 이 부대는 마케도니아와 맞붙은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괴멸되었으며 전사 254명 부상 46명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도 언급되었다.[10]

위의 테베는 사선대형은 전통적인 최정예 스파르타 팔랑크스의 완전시민부대를 완전히 짓밟아버리게 되는데, 이는 팔랑크스라는 것 자체가 개개인의 전사로서의 능력보다는 큰 규모의 질량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협동심, 대규모 질량의 분배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전투이기도 했다. 그리고, 더 큰 싸움에서의 정면에 대한 질량과 저지력 만을 위해서 발달한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가 탄생하게 된다.


2.2.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편집]



파일:attachment/Phalanx.jpg

마케도니아 페제타이로이(Pezhetairoi)의 팔랑크스[11]

전통 그리스식의 팔랑크스는 한 손에 큰 방패, 다른 손에 2.5m가량의 창을 들고 있었지만, 전통적인 그리스 팔랑크스는 경제활동을 해야하는 중산층 이상의 중무장 시민병들의 생명을 어떻게든 보호하면서 전력으로 써먹기 위한 기초적인 전술에 가까웠다. 하지만, 필리포스 2세가 개량한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는 철저한 직업 군인들을 중심으로, 철저히 군대적인 질량과 저지력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집단으로서의 활용성을 더욱 극대화 하여 탄생했다.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는 방패를 가죽끈으로 팔뚝에 묶고,[12] 사리사라고 하는 두 손으로 찌르는 자그마치 6.5m가량의 미친듯이 긴 창을 썼다. 1~5열의 병사들은 전방의 적을 향해 직접 창을 겨누고 그 뒤의 병사들은 허공으로 높게 치켜든 상태로 대기한다. 따라서 1열의 창들을 비집고 들어왔다해도 2열, 3열의 창들도 줄줄이 가로막고 있기에 훈련이 잘된 팔랑크스를 정면돌파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고 만약 들어왔다고 치더라도 보조무장인 검으로 상대할 수 있었다. 이 고슴도치처럼 솟아오른 창의 무리는 의외로(?) 투사무기에 대해서도 굉장한 방어력을 가졌다고 한다. 날아오는 발사체가 빽빽한 창의 숲에 걸려 운동에너지를 잃었다고 한다. 심지어 사과를 던져서 그 사과가 땅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모이는 것을 이상적인 밀집대형이라 칭한 자도 있었을 만큼 정말 빽빽하게 모여있다 보니 저럴 수도 있었던 모양. 이처럼 강력한 모습과 더불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활약 및 헬레니즘 국가 전역에 이 형태의 팔랑크스가 도입된 덕분에 오늘날 팔랑크스하면 원조 그리스식을 제치고 마케도니아식의 인지도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 팔랑크스를 기병대 및 경보병과 면밀히 연계해서 사용하여 적의 주력을 팔랑크스로 받아내면서 경보병으로 팔랑크스의 측면을 방어함과 동시에 적의 측면, 후방을 기병으로 공격하는 통칭 망치와 모루 전술로 많은 승리를 거둔 바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에도 주력 전술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잦은 전쟁으로 기병전력이 급감하고 팔랑크스의 주적이 다른 팔랑크스가 되자 공격력, 방어력 향상에 치중하여 대형화되고 무게가 증가된 창과 방패로 무장하여 기동성이 거북이보다 못한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것은 마케도니아 전쟁 당시에 로마군이 그리스군에게 과도한 기동을 강요한 후 그로 인해 생기는 빈틈을 파고들어 돌파하는 전술을 사용하자 로마군에게 대패하는 원인이 된다.


파일:Macedonia_Phalanx3.png

에페이로스의 페제타이로이

팔랑크스의 중장화는 팔랑크스끼리 힘싸움이 벌어지면 기동성보다는 "버티는"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에 발생했으며, 상비군인 페제타이로이나 정예부대인 아르기라스피데스(은방패 부대)등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보다 훨씬 중무장했음에도 여전히 상당한 기동성과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측면 부대는 원래보다 짧은 창으로 무장한 보병이나 지금의 터키 앙카라 지방에 정착한 켈트족인 갈라티아인, 혹은 기병을 통해 엄호했는데, 후대로 갈수록 헬레니즘 3국이 막장루트를 타면서 측면 부대가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또한 로마에게 패배한 이후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 수차례의 팔랑크스 개량 시도를 했는데 본래 발을 내미는 쪽인 왼쪽에 정강이 받이를 했지만 사라지고 청동방패 대신 목재 합성방패를 쓰는 등 여러 가지 개량을 했다고 한다. 이게 상당한 성과를 냈지만, 로마군의 물량 앞에는 쩔쩔맬 수밖에 없었던 슬픈 사연도 있다.

결국 팔랑크스의 막장화는 중무장화도 중무장화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끼리 박터지게 치고 박다가 자기네들끼리 정예병을 말아먹고 국력을 소모한 것, 소수의 그리스인이 다수의 오리엔트인을 지배해야 하는 헬레니즘 왕국 체계의 모순, 그리고 그리스인의 인구가 적어졌다는 거시적인 측면이 더욱 큰 이유이다. 사실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팔랑크스의 모루로서의 가치는 이때도 충분했다. 다만 측면 엄호부대의 부재와 기병 전력의 약화, 병력 자체의 질 하락 혹은 삽질이 겹쳐지면서 팔랑크스가 군단병에게 약점을 노출한 것.

어쨌든 피드나 전투를 계기로 그리스계 세력들이 몰락함과 동시에 고대 지중해 지역의 최강 부대는 그리스의 호플리테스에서 로마의 레기오로 바뀌게 된다.[13]


2.3. 레기오와 팔랑크스[편집]


파일:battle of Cynoscephalae.jpg

팔랑크스를 상대하는 로마군

팔랑크스는 제한된 경우에는 강했지만 그 이외의 경우에는 다재다능하고 유연한 레기오에게 졌다.

팔랑크스와 레기오가 처음 맞붙은 것은 피로스 전쟁 시기의 헤라클레아 전투로, 에페이로스의 팔랑크스 군단과 로마 군단이 맞붙은 것이었다. 여기서 양 군단은 7번이나 겨루었으나 서로 우열을 가리지 못했고, 결국 피로스의 전투 코끼리에 의해 로마군 기병대가 패주하자 로마군 역시 패배하였으나 보병 군단의 전투력만큼은 레기오가 팔랑크스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피드나 전투에서는 로마군은 2개 군단 포함 29,000명에 보조병 포함하면 3~4만 명, 마케도니아군은 45,000명 가량되었는데도 사상자수 100:25000이라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보통 이 수치는 로마군의 사망자가 지나치게 적게 기록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적어도 전술이 완벽하게 먹혀들기 전까지는 로마군의 피해도 상당했다는 점을 감안해 위키백과에서는 로마군의 전사자를 최소 1,000명 이상으로 추산한다. 마케도니아왕 페르세우스는 팔랑크스들을 데리고 무모하게 구릉지대로 추격하거나 왕이 화살 맞고서 기병 데리고 튀거나, 2,000명의 헤타이로이를 데리고 전장에서 튀어버리는 막장 지휘로 로마의 승리를 돕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군단병이 지중해의 승자가 된 이유는 팔랑크스가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은 상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팔랑크스는 제대로 포진한다면 정면에서 뚫을 가능성이 거의 없으나 이러한 상황은 다음과 조건에서만 가능했다.

첫째, 나무 투성이가 없는 매끈한 평야지대여야 할 것. 피드나 전투 또는 술라가 미트리다테스와 싸운 전투들을 보면 팔랑크스들이 군단병의 정면공격을 받아 격퇴당했다. 이는 팔랑크스들이 돌투성이 험지에 포진하여 창의 빽빽한 고슴도치 형태가 일그러졌고 이 틈새로 군단병이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창이 지나치게 긴 팔랑크스는 접근전이 매우 취약했으므로 군단병이 파고드는 데 성공하면 맞서기 위해 창을 버려야 하는데 이것 자체가 쉽지 않을 뿐더러 팔랑크스는 그 특성상 근접전에 약했다. 돌투성이 험지에서는 이러한 약점이 그대로 노출되었으므로 팔랑크스는 반드시 매끈한 평야지대에서 전열을 갖춰야 했다. 산악지형이나 숲 같은 곳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어떻게든 맞설 수는 있고 군단병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겠지만 상대방은 한 3천 죽는데 이쪽은 2만 죽으면 누가 패한 것인지는 답이 나오는 문제다.

둘째, 측면과 후방이 완벽히 보호되어야 할 것. 팔랑크스는 매우 긴 창으로 병사들이 균형을 맞추어놓았기 때문에 측면과 후방으로 방향 전환이 매우 힘들었다. 따라서 이들은 측면, 후방 공격에 매우 취약했으며 따라서 이쪽을 완전히 보호받아야 했다. 군단병의 경우 백인대가 각각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고, 이들이 천명 모여 대대(cohort)를 이루었으며 백인대 자체도 별도의 소대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측면, 후방의 공격을 받았을 때 즉시 몇 개의 소대가 따로 방향을 바꿔 맞설 수 있었다. 갈리아 전쟁을 보면 실제로 전투가 무르익었을 때 적이 갑작스럽게 측면, 후방을 치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이 보이는데 로마군은 즉시 후방의 전열이 분리되어 이들에게 응전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통해 상당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전체를 보호하여 최악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팔랑크스로는 이러한 세심한 움직임이 불가능했다.

셋째, 느린 스피드가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할 것. 팔랑크스는 촘촘하게 창으로 대열을 유지한 상황이므로 빠른 움직임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팔랑크스로 기습을 하거나 기습을 받거나 또는 빠르게 적의 배후로 우회하여 협공하거나 하는 종류의 움직임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팔랑크스는 기동력과 신속함이 승부를 결정짓는 상황에서는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또한 이들을 이런 용도로 쓴다면 긴 창을 휴대하기 위해 다른 보조 장비들의 질이 뒤떨어지는 팔랑크스 병사들의 약점이 나타나게 된다. 군단병은 팔랑크스와 달리 매우 빠른 기동력을 가졌고 기습, 기습에 대한 대응, 그리고 신속하게 후방과 측면 등으로 이동하여 적의 약점을 칠 수 있었다.

넷째. 가장 큰 문제점은 훈련도가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는 절대적인 방어력을 자랑했지만 그 대신 구성원의 대부분은 후일 로마 군단병처럼 고참 지원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고강도 훈련을 통해서만 대열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인데 이런 정예병력이 그리스 자체의 약화와 함께 크게 줄어들게 된다. 사실 팔랑크스가 측면 공격에 약하다는 건 그리스인들도 알고 있어서 근접전 혹은 대열 중간 중간의 공백에 대한 유연한 전술 구사 능력이 요구됐는데 이건 결국 유능한 중견 지휘관과 숙련된 병사들의 존재가 필수이다. 반면 피드나 전투 당시 팔랑크스 구성원 대부분은 오합지졸의 징집병들이었다. 만일 이 전투에 투입된 마케도니아군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 그를 따른 고참 정예병들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에 거론한 팔랑크스의 약점에 대해 그리스인 역사가 폴리비오스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전장에서는 모든 전투의 시간, 장소, 상황이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이 모든 중요한 조건 하나하나에 따라 전투의 결과가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팔랑크스는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 특정한 상황에서만 무적이다. 팔랑크스에 유리한 시간, 장소, 상황에서 이에 대적하는 한 이 가공할 대형을 무너뜨릴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팔랑크스가 불리한 시간, 장소, 상황이라면 그 전망이 매우 불투명하다. 팔랑크스를 유리하게 만드는 조건이 쉽게 사라지는 경우는 있어도, 팔랑크스를 불리하게 만드는 조건이 사라지는 법은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스인들의 이 유명한 전투대형이 로마인들이 대항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보다 왜 열등한지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러한 팔랑크스의 약점들을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최소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팔랑크스 자체도 어느 정도 유기적인 기동이 가능할 만큼 고참병 위주의 정예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점점 전술이 발달하고 망치와 모루의 개념이 장군들에게 상식처럼 되자 기병과 같은 보조병만으로는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가 어려워지게 된다. 로마 장군들의 승전사례를 보면 강력한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보병의 유기적인 움직임이 없었다면 패배할 뻔한 상황이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자마 전투의 경우 로마군은 1500명, 누미디아군 포함해서 전부 5천명이라는 적잖은 손실을 입었다. [14][15] 또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투를 보면 그가 치른 많은 전투가 평야에서 벌이는 회전은 얼마되지 않고 적의 야습에 대한 방어, 포위전, 시가전 등등 다양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군이 계속 승리를 거머쥔 것은 위기 상황에 끊임없이 유기적으로 기동하면서 대응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조병의 보조를 받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보병대 자체에 유기적인 움직임이 필요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또한 로마군은 보조병을 군단병에 맞먹는 수로 편성하여 유기적인 군단병뿐 아니라 방어에 적합한 팔랑크스, 투창기병, 돌격기병, 크레타 궁병, 발레리아스 투석병, 코끼리병 등 온갖 보조병을 동원하였다. 로마 장군들은 실전 경험이 매우 풍부했으며 이러한 병력을 적재적소에 쓰는 방법을 알았고 또 로마가 지배하는 지역이 다양했으므로 그만큼 각지에서 보조병을 징발할 수 있었다. 이는 다양한 보조병의 조달이 제한적이고, 이런 병력을 실전에 쓰는 데 익숙하지 않은 그리스의 장군들과는 대조적이라 볼 수 있다. 그리스 장군들은 보조병의 활용에 익숙치 않았는데, 가령 팔랑크스의 측면을 지켜줄 수 있는 투레오포로이, 토라키타이 같은 병과들이 탄생했음에도 헬레니즘 지휘관들은 이를 제한적인 용도로만 사용했다. 게다가 당대 헬레니즘 국가들의 군사력을 담당하는 인적 자원은 긴 전쟁을 거치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크게 하락한 상황이었고 셀레우코스를 제외하고는 망치 역할을 할 기병 전력은 더욱 손실이 컸다. 마케도니아는 심각한 인구유출에 시달렸으며 셀레우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도 오랜 기간에 거친 시리아 전쟁, 동방 원정, 내부 반란 때문에 군사력으로 동원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크게 고갈되어 있었다. 피드나 전투가 벌어진 BC 160년대에 마케도니아의 상비군 팔랑크스는 그 수가 확연히 줄어들고, 이제 소수화된 아게마와 대다수의 징집 팔랑크스가 이를 대체할 정도로 인적 자원이 고갈되었다. 반면 로마군은 로마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피로스조차 "이놈들 히드라 아니냐. 머리 하나를 자르면 그만큼 또 나온다."고 할 정도로 막강한 물량을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미 초창기 고대 그리스식 팔랑크스를 운용해본 로마는 전열도 없이 빠르게 이동하는 켈트족과 삼니움족과의 싸움을 통해 팔랑크스가 가진 한계가 노출되는데 켈트족은 전열대형이라 해도 상당히 띄엄띄엄 있거나 아예 진열을 구성하지 않았기에 훨씬 유동성이 좋아 팔랑크스의 측후면을 노리기 쉬웠고[16] 삼니움족은 뛰어난 게릴라전술로 절대 팔랑크스가 유리한 상황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결국 유연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적극적으로 상대의 무기와 전술을 받아들였지만, 팔랑크스의 강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헬레니즘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로마의 장수들은 결코 팔랑크스가 우세한 전장에서 싸워주질 않았다. 로마가 지중해의 패자로 등극한 것은 군단병의 우수성과 다양한 병과들의 유기적인 운용, 상대의 강점을 살릴 수 없는 전장에서 전투에 임하는 우수한 전술의 결과였다.

그리고 고전기 팔랑크스의 이피크라테스 개혁과 디아도코이 시절에 왜 팔랑기타이들이 창이 더 길어지고 중무장화가 진행되었는지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상대적으로 짧은 창을 들었던 고전기 팔랑크스든 디아도코이 왕조들의 팔랑크스든 창을 들고 측면을 노리는 기동을 요구하느니 차라리 창의 길이를 늘리고 떡장을 입혀서 정면 힘싸움에서 승리하는 쪽을 택했으며 심지어 유연한 기동이 가능했다고 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에도 측면 기동은 대부분 팔랑기타이들의 역할이 아니라 보조 보병들과 기병의 몫이었다. 즉 창 자체의 한계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폴리비오스는 군단병이 팔랑크스에 대해 우위를 지니게 된 이유를 한 가지 더 꼽고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전략적 기동성의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다. 앞서 제시 된 팔랑크스의 문제점 및 약점으로 인해 팔랑크스가 활약을 할 수 있는 지역, 지형 및 조건은 한정되어 있는 반면, 로마군의 보다 유영한 진형은 상대적으로 그러한 약점이 적었기 때문에 (로마군 특유의 준비성만 갖춰진다면) 해안이든, 숲이든, 구릉지든 어디서든 싸울 수 있었다는 것.

로마군이 그리스-헬레니즘계 폴리스 및 왕국들과 적대관계로 붙게 되는 것은 2차 포에니 전쟁이 후 세월이 흘러 3차 포에니 전쟁 즈음이 되는데, 이 무렵이면 1차 포에니 전쟁 때만 해도 이탈리아 반도 인근으로 국한 되어 있던 로마의 지배영역 및 영향권이 동서로 크게 확장이 된다. 서쪽으로 히스파니아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에게해를 넘기 시작하는 만큼 로마군은 신속한 행군을 통한 전략적 기동에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반면,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왕국들은 셀레우코스 왕조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각자 지배영역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장거리 원정을 경험한 적이 없으며, 시기적으로도 로마의 공세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자기 지배영역 내에서 방어전을 수행한 경우가 많았고, 애초에 고전시대로부터 내려온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들은 손바닥만 한 그리스 반도에 그나마도 대부분 산지로 뒤덮인 곳에서 좁은 통로로 이어진 평야지대의 병목을 틀어막고 싸우는 데 익숙해 있었다. 즉,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그리스계 군대는 좁은 범위에서 기동하며 싸웠고, 앞서 폴리비오스가 언급한 "팔랑크스가 유리한 고유의 조건들"에 알맞은 곳을 찾아 그 길목을 틀어막고 싸우는 경향이 컸다. 이에 대해 폴리비오스는, 팔랑크스가 아무리 무적이라고 해도 그 정해진 곳에서만 싸울 수 있는 반면, 로마군은 정 안 된다 싶으면 그냥 요리조리 잽싸게 우회해서 후방 죄다 털어먹고 본거지 죄다 함락시키고 외교전과 분열책동으로 아예 팔랑크스 군대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데 이걸 뭔 수로 이기냐면서 개탄을 한다.


2.4. 팔랑크스의 멸망[편집]


물론 디아도코이 이후의 팔랑크스가 훈련도가 떨어진건 사실이었다지만 그게 팔랑크스가 레기오에게 대패한 주요 원인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그 후계자들이 원정전쟁을 안한 것도 아니었고 꾸준한 훈련을 거친다면 전략기동도 할 수있었다.

그러나 팔랑크스의 가장 큰 문제는 공격이든 방어든 직각으로밖에 못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레기오가 팔랑크스와 정면을 격돌하면 레기오가 진다. 레기오가 정확히 옆에서 치고 들어온다고 해도 훈련도가 높은 팔랑크스라면 측면 열만 공격방향을 바꿔서 대응할 수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스듬히 들어오는 공격은? 대처할 수없다. 수천 수백명으로 이루어진 직사각형들이 제각기 다른 각도로 방향전환을 하려다간 방진 대열이 파편화 되어서 틈이 엄청나게 생기며 장창 방진은 틈이 생기면 그대로 격파된다. 진형의 유연성과 융통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타원-장방형 방패와 숏소드로 무장하고 중대-대대 단위로 움직이는 레기오는 얼마든지 소부대 내지 대열 단위로 진형을 변형시킬 수있다. 가장 좋은 예가 상술된 2차 포에니 전쟁을 결말지은 자마 전투로서, 로마군 측은 전투 후반에 대열을 재정비하여 예비전력을 양측면에 비스듬하게 전개하여 학익진을 펼쳐 더 적은 병력으로 적군을 포위섬멸하면서 멋지게 승리할 수있었다. 이러한 레기오의 진형 유연성은 현대의 전투경찰순경의 시위진압전술에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으며, 이미 레기오의 전법이 확립된 그 시점에서는 팔랑크스는 진형도 제대로 못바꾸는 멍청이 병종이었던 것이다.


3. 비슷한 사례[편집]


팔랑크스 보병 자체가 강력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슴도치와 같이 단단하게 뭉쳐서 적과 충돌한다는 아이디어는 팔랑크스가 퇴장하고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유사한 전술이 등장할 정도로 근접전에서 매우 유용한 개념이다.

장창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동로마 제국 스쿠타티의 대열도 일종의 팔랑크스와 유사한 대열이다. 니케포루스 2세 포카스의 praecepta militaria나 Leo the deacon 등 10~11세기 서적에 따르면 스쿠타티도 4.3~4.7m에 달하는 긴 창으로 무장하는데, 고대 그리스마케도니아 왕국의 팔랑크스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이쪽은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방진이라, 장창 대열 사이에 궁병을 배치하는 식으로 오리지널과 비교해서 변형이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면에서는 동일.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사용한 쉴트론도 팔랑크스의 일종이며 15~16세기에 걸쳐 무적을 자랑했던 스위스 용병대의 미늘창, 파이크 대형도 팔랑크스가 발전한 형태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스위스 용병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독일인 용병 부대인 란츠크네히트나 150년간 무적으로 군림했던 스페인 테르시오를 비롯한 테르시오 대형도 기본적으로 팔랑크스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창이 길다고 해서 무조건 좋기만 한 것은 아닌데, 유럽 최강의 스위스 용병들이 사용한 장창의 길이가 그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은 란츠크네히트 부대가 사용한 장창보다는 더 짧았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부하들한테 전쟁에서 긴 창과 짧은 창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유리하냐고 묻자 모든 부하들이 짧은 창이 더 유리하다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 사실 창의 길이가 너무 길어지면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리기 때문에 막상 적을 창으로 찔렀을 때에 그 충격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 세대인 전열보병의 경우 무기는 머스킷총검으로 바뀌었고 팔랑크스 같은 방진의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된다. 물론 전열보병들도 방진을 짜긴 했지만 너무나도 얇았고[17] 애초에 사격을 위한 보병이라 방패가 없어 팔랑크스의 장점인 방어력은 전무했다. 총검돌격할 때도 뒷사람의 힘으로 미는 것보다는 그냥 찌르고 패고 쏘는 난투전이였기 때문에 팔랑크스와의 연관성은 없다. 대기병 방진이 방어력이 좋긴 했지만 이건 애초부터 전진만 바라보고 사는 팔랑크스와는 완전히 다른 전방위 사격 진형이라 전혀 상관이 없다.

3.1. 동양[편집]


동양에선 유럽처럼 장창방진을 대규모로 운용하진 않았지만, 엄연히 존재했다.

동예에서는 장창과 보전에 익숙하다는 기록이 존재하였으며[18], 7세기에는 북방의 기병들을 상대하거나 그들의 전법을 도입하면서 대기병 전술로써 장창밀집대형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당나라 군대가 돌궐을 토벌할 때 이정의 1만 명의 장창병 부대가 활약하기도 하였는데, 그에게 병법을 배운 소정방, 이세적 등도 이를 구사한 바가 있으며 신라에도 교리가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병법서에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전국시대때의 병법가 오기가 "보병은 밀집할수록 좋다"라고 한 것처럼 대기병이든, 보병 상대로든 밀집한 보병이 위력을 발휘한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불분명하지만 신라가 매소성에서 군 기병과 싸워 크게 이긴 매소성 전투에서도 장창 방진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본 전국시대 때도 이러한 장창 아시가루를 통한 방진은 널리 쓰였다.

동아시아에서 이러한 방진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지형과 주변 상황 때문으로 추측된다. 서양보다 중국쪽과 한반도는 비교적 평원보다 산지가 많고 좀더 북쪽으로 보면 지금의 몽골지역에서 만주까지는 기마민족이 득세했다. 동아시아에서 한중일간의 직접적인 전쟁보다 흉노, 돌궐 같은 기마족들과의 전투가 잦았다.

우선 바닥의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은 산지에서 이러한 장창 방진은 대열은 유지 하기 힘들다. 대열이 유지되는 평지에서는 기동성 차이 때문에 기병에게 포위되기 좋으며 화약이 중국에서 최초로 발명된 만큼 뭉쳐있으면 대포를 통한 화력집중으로 압살당할 것이다.

어차피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투의 종반부는 백병전이 장식했다. 이러한 진영전은 개활지에서 적을 말 그대로 갈아 버리는 기관총 등장 이후 사라졌으며[19] 이후 참호전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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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초반에는 스파르타 최정예 귀족 팔랑크스를 상대로 아테네의 평민 펠타스트들이 측면으로 맹공을 가하여 스파르타의 정예귀족들을 200명 넘게 사살하고 포로로 사로잡는 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 이는 팔랑크스 전법이 민첩한 기동전술에 취약하다는걸 로마 레기오의 출현보다 수백년 먼저 알려준 교훈이다. 하지만, 이후 아테네 쪽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오히려 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 쪽이 더 엄청난 국가적인 손실을 입었고, 팔랑크스의 약점은 그리 활용되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최정예 육군이 소멸할뻔한 스파르타도 육군의 싸움은 회피하고 해군을 육성하여 전쟁의 판도가 해양 쪽으로 넘어갔기 때문.[2]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가 남긴 문헌인 <역사>에 의하면 페르시아 병사들은 그리스 병사들의 창을 부러뜨리기 위해 맨손으로 달려들었다고 한다.[3] 팔랑크스의 정면이 아무리 가공할 전투력을 지녔다고 한들, 물러나는 적을 추격하여 격멸할 순 없었다.[4] 물론 이 경우에도, 적이 큰 희생을 감수하고 팔랑크스에 공세를 취해야 했다.[5] 방패로 버틸 수야 있지만, 적을 추격하기엔 너무나 느린 팔랑크스 특성상 병거 부대가 원하는 전장과 타이밍에서 싸우는 걸 강요당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팔랑크스가 불리하다.[6] 스파르타의 강함은 애초에 다른 도시국가들을 노예로 복속하기 위한 잔혹한 살인병기로서의 강함이었기에 산악 수비전이나 소수의 산병전투에선 꾸준히 강했지만, 팔랑크스는 특성상 대규모 전쟁이 되면 단순히 질량 싸움이 된다. 페르시아 전쟁 이전까진 의외로 대규모 전투가 없었기에 스파르타의 평판이 매우 높았지만, 이후로는 추락한다.[7] 물론 이는 성인-청소년 관계에 한정, 그나마도 싫어하는 그리스인들이 있었으며 성인간의 동성애는 법적 처벌 대상만 아니었지 엄청난 규탄을 받았다.[8] 심지어 이 전쟁 시기의 스파르타의 최고의 전쟁영웅으로 스파르타를 구원했다는 평가를 듣는 브라시다스는 전형적인 스파르타 방식의 용장이 아니라 외교 전략에 능숙한 지장, 덕장, 외교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이 전쟁초기에 이미 망조가 들뻔 했던 스파르타의 문제점을 해결한 구세주였다는 점에서, 팔랑크스와 스파르타의 마초적인 전설은 이 전쟁에서 이미 시대에 뒤처진 전술에 불과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9] 이는 의외로 효과적인 전술인데 단순 우정에 해당되는 전우애도 사기를 끌어올리는 수단이 될 수 있는데 사랑의 힘이라면 어떻겠는가? 거기다 단순 동성애 관계에만 유지한 게 아닌 스승-사제 관계도 있었고 이들의 생활비를 국비로 지원해 소속 병사들이 군사 훈련과 체력 훈련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하는 등 전투력 유지를 위한 다양한 수단을 활용했기에 신성부대는 단순한 동성애자 부대가 아닌 일종의 상비군이라 보는 것이 좋다.[10] 1890년에 있었던 발굴 조사에서 정말로 7열로 눕혀진 254명의 주검이 발견되어 신성부대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확실히 증명 되었다.[11] 그림에 묘사된 병사들은 가로 16줄 세로 16줄에 총 256명으로, 사리사 보병의 기본 부대 단위인 신타그마 하나가 전부 그려져 있다.[12] 방패를 보고 이것도 한손에 창, 한손에 방패를 들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 어떻게 그렇게 긴 창을 한손으로 들 수 있느냐는 질문도 나오곤 하는데, 당연하지만 한손으론 못든다.[13] 다른 그리스계 세력인 셀레우코스 왕조는 피드나 전투가 벌어지기 22년전에 이미 마그네시아에서 로마군에게 박살난 뒤였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는 로마와 직접적인 충돌은 거의 없었지만(나일강 전투, 악티움 해전 등 군사적 충돌이 있긴 했지만 전자는 이집트 내부 권력투쟁에 로마가 개입한것에 가깝고 후자는 로마 내전에서 이집트가 안토니우스를 편들고 싸운것이라 로마라는 국가 자체와 대립했다 볼 순 없다.) 국력면에서 로마보다 열세라는 걸 인정하고 사실상 속국 비스무리한 상태로 남았다. 대국이라 할 수 있는 디아도코이 계통들도 이러했으니 그보다 소국인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14] 카르타고군은 4만명 손실[15] 보병들은 카르타고측이 더 많았다. 스키피오는 전투 중에 로마 보병들을 넓게 펼치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숫적 우위를 앞세운 한니발군의 보병에게 포위당할 위험이 있었다. 기병이 결정타였다고는 하나 보병의 대형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면 로마 기병이 돌아오기 전에 포위섬멸당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기병이 더 많아서 이긴게 아니라 스키피오의 적절한 상황 판단으로 인한 보병의 유연한 대형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16] 기원전 279년 1월 브렌누스라는 족장이 이끄는 수천 명의 켈트족 전사들이 마케도니아를 침공하여 마케도니아 국왕인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누스(Ptolemy Ceraunus)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을 쳐부수고 케라우누스를 붙잡아 목을 잘라 죽여 버린 일이 있었다!장창방진은 결코 만능의 병과가 아니다., 켈트족이 마케도니아 왕을 죽였다[17] 사실 전열보병들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3열 횡대 정도로 전열을 형성했기 때문에 방진으로 보기도 힘들다. 횡대를 넓게 펼칠수록 더 위력적인 화망을 구성할 수 있었고 종심이 깊으면 그만큼 대포에 의한 희생자가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전열보병들의 방진이란 후술하는 것처럼 대기병용 진형이었다.[18]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동예에서는 3장짜리 긴 창을 여러 명이서 들었다고 하는데, 3장을 당시 단위로 측정하면 그 길이가 대략 6.9미터가 되어 마케도니아의 사리사보다 더 길다. 다만 이렇게 창이 길어지니 그 무게가 무거워서 혼자서는 도저히 못들고 여럿이서 들고 다녔던 것으로 추정된다.[19] 본격적으로 소총이 등장한 시점까지도 이러한 진영전은 어느정도 명맥이 남아 있었다. 총검총검술이 그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