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아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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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초기
2.2. 전성기
2.3. 멸망



1. 개요[편집]


고대인들은 오늘날 그리스 코린트 만 연안의 남쪽 해안, 그러니까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서부를 아카이아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하고 이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기자 시키온의 아라토스의 제창 아래 10개 도시가 모여 아카이아 동맹을 구성했다.

사실, 편의상 "동맹"이라고 번역했는데, "동맹"이라기보다는 "연방"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이 개념은 미국보다는 좀 더 지방분권적인 스위스의 연방제와 더 가깝다고 보면 된다). 외교나 군사권, 세금 징수권은 동맹의 우두머리인 스트라테고스가 갖고 있었으며, 내정 부문에서 각 도시들은 완전한 자율권을 행사했다. 스트라테고스라 하더라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것은 아니었으며, 중대한 사안은 반드시 민회의 투표를 받아야 했다. 이들은 1년에 한 번씩 선출되는 스트라테고스를 우두머리로 하였으며, 연임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러나 동맹의 창시자인 시키온의 참주, 아라토스는 연임을 하지 않는 대신 격년제로 동맹의 스트라테고스가 되었다. 그 밑에는 데미우르고이라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공무원단 10명이 배치되었다.


2. 역사[편집]



2.1. 초기[편집]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하고, 이 지역에 눈독을 들인 것은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와 소아시아-시리아 제국을 지배하고 있던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였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마케도니아인들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카이아 동맹이 그런 생각을 가진 세력의 중심축에 있었다. 동맹은 BC 286년 발족한 이래로 계속해서 마케도니아인을 그리스인들의 세계에서 몰아내려고 시도했다. 때마침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의 왕위가 공석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시도는 그리 꿈으로만 여겨지지는 않았다.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의 치세에서 아카이아 동맹은 몇 차례 패배하긴 했지만 성공적으로 그리스의 독립을 찾을 수 있었고, 특히 마케도니아령이었던 코린트, 트로이젠, 에피다우로스의 획득은 무엇보다도 값진 성과였다. 거기다가 경쟁자였던 아이톨리아 동맹 역시 그들의 힘 앞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2.2. 전성기[편집]


BC 228년이 되면, 아카이아 동맹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마케도니아인을 거의 몰아낸 상태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시키온의 아라토스는 동맹의 창시자로서 아직까지 동맹 내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 왕인 클레오메네스 3세(BC 235~222)의 야망은 아카이아 동맹을 멸망의 위기에 빠뜨렸다. 클레오메네스 3세는 뛰어난 용병술로 BC 227년에 라도케이아에서, 이듬해엔 만티네이아에서 아카이아 동맹군을 완전히 분쇄시켜버렸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아라토스의 아카이아 동맹은 마케도니아 안티고노스 3세 도손(BC 227~221)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티고노스 3세는 바로 내려와 클레오메네스 3세와 일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그러나 BC 222년 셀라시아 전투에서 클레오메네스 3세는 대패했고, 결국 스파르타는 마케도니아령이 되었다. 클레오메네스 3세는 후원자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로 도망쳤으나 거기서 포로생활을 해야만 했다.
(클레오메네스 전쟁)

아카이아 동맹은 BC 198년 안티고노스 왕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로마와 동맹을 맺고 안티고노스 왕조에 대항했다.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가 패배하자 아카이아 동맹의 기세는 절정에 올랐다. 경쟁자이지만 아카이아 동맹과 함께 로마의 편에 섰던 아이톨리아 동맹의 체면은, 로마가 이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아카이아 동맹에게만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완전히 구겨졌다. 이로써 아카이아 동맹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완전히 제패한 것이었다.


2.3. 멸망[편집]


그러나 BC 192년에 새로 가입한 스파르타는 동맹 내에서 말썽을 일으켰고, 이후 아이톨리아 동맹과 아카이아 동맹 둘 중 어느 한 쪽도 상대방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이 당시 그리스의 내부 문제에 개입하려고 드는 로마의 진짜 의도에 대해 그리스인들은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카이아 동맹은 BC 168년, 로마의 동방 팽창에 대한 반감을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 숙적이었던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의 편을 들게 되었다.

아카이아 동맹과 마케도니아군의 선전 그리고 로도스 섬의 강력한 해상 지원으로 인해 페르세우스는 초기에 패배할 것이라는 당초 로마 원로원의 예상을 깨고 오랫동안 로마군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리리아인의 배신으로 페르세우스의 방어망은 무너졌으며, 결국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는 멸망했다.[1] 패전국이 된 아카이아 동맹은 이제 강대해진 로마의 보호국이 되었다. 그러나 로마에 대한 반감은 계속 높아만 갔으며 결국 BC 146년 동맹은 로마를 상대로 무모한 전쟁을 일으켰다. 반로마 항쟁은 로마의 승리로 간단히 끝났고, 로마는 본보기로 코린트를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반란에 잔혹하게 보복했다. 이로써 아카이아 동맹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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