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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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라틴어: Marcus Valerius Laevinus

생몰년도
미상 ~ 기원전 200년
출생지
이탈리아 로마
사망지
이탈리아 로마
지위
파트리키
국가
로마 공화정
가족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포티투스(조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아버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아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아들)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아들)
참전
제2차 포에니 전쟁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210년
전임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동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후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귀족이자 장군. 마케도니아 왕국필리포스 5세한니발 바르카와 협력하여 로마를 공격하는 걸 저지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고대 로마 최고의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발레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조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포티투스는 기원전 331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는 기원전 280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는 기원전 227년 샤르데냐 섬의 초대 총독이자 법무관으로 발탁되었다. 일부 기록에는 그가 기원전 220년 퀸투스 무키우스 스케볼라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고 기술되었지만, 다른 자료에는 그 해의 집정관은 가이우스 루타키우스 카툴루스와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가 이 해 집정관을 역임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될 무렵,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의 미망인과 결혼함으로써, 영향력 있는 평민 귀족 집안인 풀비우스 집안과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215년 두번째로 법무관이 되어 루카니아와 아풀리아에 주둔한 2개 군단, 타렌툼의 1개 군단, 25척의 함대 지휘권을 맡았다. 그러던 중 한니발 바르카가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원로원은 그에게 이탈리아 남부 해안을 마케도니아로부터 지키라고 명령했다.

기원전 214년, 필리포스는 일리리아에 쳐들어가서 아폴로니아를 포위했다. 하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자 오리쿰을 공략했다. 이곳 주민들은 브룬디시움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그는 다음날 발칸 반도로 건너가 오리쿰을 탈환했다. 이후 아폴로니아가 또다시 마케도니아군에게 포위당하자, 그는 구원 사절을 받아들여 동맹군 사령관 퀸투스 나이비우스 크리스타가 이끄는 2,000명의 병력을 그곳으로 파견했다. 필리포스는 로마군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퇴로조차 미처 확보하지 못했다. 그는 아폴로니아에서 배를 타고 도망치려 했지만, 적이 강 어귀에서 길을 막자 배를 불태우고 육로를 통해 마케도니아로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라이비누스는 일리리아에서 겨울을 보낸 뒤, 3년간 발칸 반도에 남아 아이톨리아 동맹, 페르가몬 왕국, 스파르타, 엘리스, 메시네를 포함한 강력한 반 마케도니아 연합을 결성하였다. 이들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은 육상에서 마케도니아군과 맞섰고, 라이비누스는 바다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기원전 212년 자칸토스 섬을 점령하고, 뒤이어 아카르나니아의 도시 에니아데스와 나소스를 점령했다. 필리포스는 이들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군사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이탈리아 상륙을 더 이상 고려하지 못했다.

그는 이러한 성과를 거둔 것을 인정받아 기원전 210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고,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에게 발칸 반도에서의 지휘권을 넘겨준 뒤 로마로 돌아갔다. 동료 지휘관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였다. 두 집정관은 8년 전 전리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지금까지 은거 중이던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가 로마로 돌아오도록 주선했다. 한편, 마르켈루스는 시칠리아 방면을 담당하였고, 라이비누스는 이탈리아에서 한니발과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시칠리아 주민들이 사절을 보내 마르켈루스가 자신들을 다스리지 않게 해달라고 호소했고, 결국 원로원은 담당지를 바꾸기로 했다. 기원전 210년 말 시칠리아에 도착한 그는 아직도 카르타고를 따르던 아그리젠툼을 기습 점령하고 모든 주민을 노예로 삼았다. 이에 시칠리아 섬 전체가 로마의 권위를 인정했고, 그는 시칠리아를 이탈리아의 빵 공급원으로 만들기 위해 메시나와 파노르무스, 릴리바움을 연결하는 발레리아 도로를 건설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이후 다음해 집정관 선거를 주최하기 위해 로마에 방문한 그는 사촌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메살라가 아프리카 해안을 성공적으로 공격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원로원 의원들에게 메살라를 시칠리아 방어를 위한 독재관으로 임명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회는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를 시칠리아 독재관으로 선출했고, 그는 이를 인정하기 싫었기에 비밀리에 로마를 떠났다. 결국 선거는 무효 처리되었고, 그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시칠리아에서의 지휘를 기원전 206년까지 수행할 수 있었다. 기원전 208년과 207년에 아프리카를 두차례 성공적으로 공격하였고, 한 번은 카르타고 함대를 격파해 18척의 배를 나포하기도 했다.

기원전 206년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이듬해 마고 바르카가 제노바에 상륙하자 2개 군단을 이끌고 그를 견제하였다. 또한 키벨레의 성석을 프리기아에서 수도로 운반했으며, 기원전 203년 원로원이 카르타고의 평화안을 논의할 때 전쟁의 지속을 촉구해 관철하였다. 기원전 201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아엘리우스 파이투스는 그를 그리스로 파견하여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계속 침략하는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하게 하였다. 그는 그 임무를 완수하였고, 기원전 200년 로마로 귀환한 뒤 그해 말에 사망했다.

그에게는 세 아들 마르쿠스, 푸블리우스, 가이우스가 있었다. 마르쿠스는 기원전 182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가이우스는 기원전 176년 집정관을 역임헀다. 푸블리우스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을 볼 때 일찍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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