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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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라틴어: Marcus Livius Salinator

생몰년도
기원전 254년 ~ 미상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미상
지위
노빌레스
가족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조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아버지)
칼라비아(아내)
가이우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아들)
마르쿠스 리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양자)
참전
제2차 포에니 전쟁
직업
로마 공화국 집정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219년
전임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동기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후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207년
전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동기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후임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평민 귀족이자 장군.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함께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승리했다.

2. 생애[편집]


평민 귀족 집안인 리비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조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기원전 282년 법무관을 맡았으나, 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는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했다. 그는 기원전 254년경에 태어나 타란토 출신의 그리스인 노예에게 교육받았다. 이 노에는 나중에 그를 잘 키운 공을 인정받아 해방되었고, 리비우스 안드로니코스라는 이름을 수여받았다. 그는 기원전 240년경 카푸아 귀족 파쿠비우스 칼라비우스의 딸 칼라비아와 결혼했고, 이들의 후원 덕분에 주요 공직을 역임할 수 있었다.

기원전 219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로마의 영토를 약탈한 마케도니아 왕국과의 동맹에 의지하여 로마의 영토를 약탈한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와 싸우기 위해 일리리아로 출진했다. 두 집정관은 디말라 요새를 포위 공격하여 공략한 뒤, 일리리아 해안가의 다른 도시들을 항복시켰다. 이후 데메트리오스를 파로스에서 바깥으로 유인해 회전에서 물리쳐, 그가 필리포스 5세에게 도망치게 하였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로마군은 일리리아 전역을 정복한 뒤 로마로 귀환했고 개선식을 거행했다. 폴리비오스는 이에 대해 아이밀리우스 혼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명한 사람들에 대하여'라는 책을 지은 익명의 저자는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역시 이 전쟁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218년 집정관 임기가 끝난 뒤, 파울루스와 리비우스는 전리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이들의 범죄를 직접 고발하였고, 재판에 여러 증거를 제출했다. 파울루스는 무죄 판결을 간신히 받아냈지만, 그는 유죄를 선고받고 벌금을 납부한 뒤 정계를 강제 은퇴해야 했다. 이 일로 그와 네로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렇지만 기원전 218년 카르타고로 전쟁을 선포하러 간 사절단의 일원으로 들어갔으며, 이후 이베리아로 가서 지역 부족들과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사군툼을 구원하지 않은 로마를 불신한 그들로부터 외면받았다.

이후 8년간 어떠한 공직도 맡지 않고 조용히 지내던 중, 기원전 210년 집정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가 리비우스의 로마 귀환을 주장했다. 그 덕분에 귀환하고 원로원에 출석하기는 했지만, 장인이 카푸아를 한니발에 바친 일 때문에 여전히 의심받았다. 기원전 208년 타렌툼을 잃은 혐의로 고발된 친척 마르쿠스 리비우스 마카투스를 변호해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하스드루발 바르카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상대로 바이쿨라 전투에서 참패한 뒤, 이참에 아예 형 한니발과 합류하기로 마음먹고 3만 명의 병력을 수습한 뒤 이탈리아로 출진했다. 그는 진군 도중에 갈리아 부족민들을 용병으로 추가 고용하면서 총 5만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었다. 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원로원과 민회는 이를 막기 위한 집정관 선거에 착수했다.

하지만 당시엔 집정관을 맡을 인물이 마땅치 않았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베리아에서 전후수습을 해야 했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고령의 나이인데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더이상 군대를 이끌기 어려웠으며,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등은 전사했다. 일단 네로는 무난하게 기원전 207년 집정관에 선출되었지만, 두번째 집정관으로 삼을 인물이 정해지지 않았다.

이에 원로원은 전리품을 횡령한 혐의로 정계에서 강제 은퇴당한 뒤 오랫동안 잊혀졌던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에게 집정관에 출마할 것을 권고했고, 그는 이에 따라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두 사람은 원수지간이었고 서로에 대한 증오를 숨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원로원이 서로 힘을 합쳐 적에 대항하여 행동할 것을 촉구하자, 개인적인 감정을 접어두고 일단 협력하기로 맹세했다. 그리하여 어렵게 정해진 집정관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임무를 배정받았다. 네로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을 저지하는 역할을 맡았고, 리비우스는 하스드루발을 막기로 했다.

10년간의 전쟁 동안 시민 수가 27만에서 13만 7천명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병력을 모집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징병 대상 나이를 낮추고 퇴역 장병을 불러들이고, 심지어 죄수를 동원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어떻게든 병력을 끌어모았다. 이후 갈리아 카살피나로 진군하여 메타우루스 강변에서 적과 대치했다. 이때 네로가 6천 명의 정예 보병과 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야밤에 그와 합세했다. 이후 군사회의에서, 몇몇 장교들은 군단병들이 며칠간 장기 행군을 하느라 지쳤으니 휴식을 취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네로는 한니발이 상황을 알아채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끝내야 한다며, 다음날 전투를 벌이자고 주장했고, 리비우스는 그의 의견을 따랐다.

하지만 하스드루발은 적이 전투 대형을 펼친 광경을 살펴보다가, 많은 군단병이 이전에는 없던 낡은 방패를 들고 있고, 일부 기병은 마치 긴 행군을 마친 것처럼 지쳐 있는 걸 보고 적군이 멀리서 합류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군대를 진영으로 돌려보낸 뒤 정찰병을 통해 추가 정보를 수집했다. 그 결과, 로마군 사이에서 전투 뿔피리의 신호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보내지는 걸 알아챘다. 이는 두 집정관이 한 진영에 있다는 걸 의미했다. 하스드루발은 일단 퇴각하기로 했지만, 로마군은 메타우루스 강을 따라 후퇴하는 적을 따라잡고 전투를 강요했다.

결국 하스드루발은 어쩔 수 없이 전투를 벌이기로 하고,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당시 로마군의 좌측에는 메타우루스 강이, 우측에는 험한 언덕이 위치했다. 리비우스는 좌측을 맡았고, 우측은 네로가 맡았다. 전투가 개시된 후, 네로는 높은 언덕을 잘 활용하여 갈리아 용병들을 막아냈다. 그러다가 아군 좌익과 중앙이 적의 강한 압박으로 고전하는 걸 발견하고, 여러 코호트를 이끌고 전장을 우회한 뒤, 적군의 측면과 후방을 습격했다. 이 절묘한 공격으로 승부는 결정되었다. 대다수 카르타고군은 섬멸되었고, 하스드루발도 죽었다. 당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갈리아인들이 도주하자, 부하들은 당장 기병대를 파견하여 몰살시키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절했다.

"저들이 돌아가서 우리의 용맹함과 참담한 패배에 대해 동료들에게 증언하도록 내버려둬라."


전투 직후, 네로는 휘하 장병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곧바로 돌아갔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불과 6일 만에 한니발과 대치 중인 아군과 합세했다고 한다. 이후 부하를 시켜 하스드루발의 잘린 머리를 카르타고 초소 앞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동생의 수급을 알아보고 "카르타고의 잔혹한 운명이여!"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 후 한니발은 루카니아로 돌아갔고, 그해 내내 숙영지에서 나오지 않았다.

한편, 로마 대중은 대승을 거둔 것에 몹시 기뻐했고, 원로원은 3일간의 감사 행사를 선포했다. 네로와 리비우스는 로마에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네로는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지대한 공을 세운 걸 인정받았고, 원로원은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 다만 리비우스가 배정한 전선에서 승리가 이뤄졌기 때문에, 리비우스는 개선식의 주인공이 된 반면에 네로는 혼자 말을 타고 들어갔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가 실제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걸 잘 알았기에 리비우스보다는 네로에게 찬사를 보냈다.

기원전 207년 고위 행정관 선거를 주관하는 독재관을 잠시 맡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기병장관에 선임되었다. 임무를 완수한 뒤 에트루리아와 움브리아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지지했던 자들을 색출하는 임무를 수행해 기원전 204년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205년 말 마고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이 리구리아에 상륙하자 법무관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와 함께 마고의 남하를 저지했다.

기원전 204년, 네로와 함께 감찰관을 맡았다. 두 사람은 계약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확립하고, 소금세를 도입했으며,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소금세로 인해 리비우스는 살리나토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두 감찰관 모두 공적인 비용으로 말을 샀기 때문에 각각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기원전 218년 전리품을 횡령한 혐의를 끄집어내어 리비우스에게 말을 팔라고 강요했고, 리비우스는 그 당시 클라우디우스가 재판에서 거짓 증언을 했으니 말을 팔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도덕적 문제로 더 높은 세금을 내야 하는 계층인 아에라리(aerarii) 계급으로 낮추려 했다. 호민관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는 감찰관들의 추잡한 행동을 기소하자고 제안했지만, 원로원은 일전에 큰 승리를 거둔 두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기원전 203년 카르타고 사절이 평화를 요청하기 위해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에 대해 처음으로 발언한 원로원 의원이었다. 기원전 191년 그의 유언에 따라 유벤투스 신전이 세워졌다고 하니, 그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 가이우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는 기원전 18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양자로 마르쿠스 리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를 들였는데, 아마도 첫 집정관 동료였으며 칸나이 전투 때 전사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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