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정치/수카르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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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정치사
2.1. 자유민주주의 시기
2.2. 교도민주주의 시기
3. 의원내각 목록
4. 정당 이념 지형
5. 공산주의자 대학살과 정파들




1. 개요[편집]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 해체 이후, 수카르노 시대(1950년 8월 17일~1966년 3월 11일) 인도네시아의 정치사와 정치 환경을 서술하는 문서.


2. 정치사[편집]



2.1. 자유민주주의 시기[편집]


수카르노 집권기 전반은 자유민주주의(Demokrasi Liberal, Liberal Democracy) 시기로, 신생 인도네시아에서 다당제 의회민주주의가 꽃을 피웠던 1950년 8월 17일부터 1959년 7월 5일[A]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기에는 총선을 통해 다양한 정당이 의회에 참여하였고, 처음에는 대통령 수카르노도 이와 같은 의회 정치에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정당 간 논의가 길어지며 결론 없는 교착 상태에 빠지거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가지 않는 경우를 반복적으로 마주하며 수카르노는 완전히 자유로운 서유럽식 의회 정치가 신생 인도네시아 국가에 이상적인 모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의회의 논의에서 합의가 도출되지 않고, 의견 충돌로 인한 잦은 사임과 내각 불신임으로 내각의 지속 기간이 길지 못해 정부는 계속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에 수카르노는 자신이 조정 권한을 갖고 전체적인 정책 방향을 제안하는, '교도'민주주의라는 체제를 구상하게 된다.
  • 임시국회 구성(1950년 8월 17일): 단일 국가가 된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독립전쟁기의 KNIP와 합중공화국 의회를 인적으로 계승하여 의원 236명의 새로운 단원제 임시국회(Dewan Perwakilan Rakyat Sementara)를 출범시켰다. 이는 총선으로 새 국회가 선출되어 구성되기 전까지 임시로 입법 기능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임시국회는 1956년 3월 26일 총선에 의해 선출된 국회로 대체되기까지 약 5년 7개월 동안 기능하였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때 임시국회에 기반한 의원내각제가 운영되었다. 대통령 수카르노는 임시국회의 의원내각이 성립되면 권한을 위임하였다.
    • 임시국회는 어느 정도 검증된 인물들로 구성되었고, 대통령도, 정당들도 자기 정파 인원을 마음대로 추가하지 못하도록 인사권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그러나 결국 임시국회는 선거 없이 구성되어 정당성이 약했고(그 이전 마지막 총선에 해당하는 폴크스라트 선거는 1939년이었다), 명망가들의 다당제 집단지도체제처럼 구성되어 국정 추진력이 강하지 못했다. 그래도 임시국회 내에서 민주적 의사결정과 국정 운영에 대한 합의는 존재했다.
    • 대통령은 합중공화국 대통령 수카르노가 별다른 이의 없이 유임되었다. 부통령으로는 1950년 10월 14일 임시국회 내 부통령 선거에서 76.87%을 득표한 모하맛 하타가 당선되었다. 정·부통령은 "법률에 의해" 선출될 것이 1950년 잠정 기본법에 규정되어 있었는데, 이후 어떤 식으로 이들을 선출해야 할지(국민 직선이 좋을지, 의회 내 간선이 좋을지, 아니면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이 좋을지) 명확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실질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의원내각제였으니 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결국 이 정·부통령 선거에서의 '국회 내 간선'은 1950년 이래의 관행이 되어 1999년까지 이어진다.
  • 남말루쿠 공화국 반란(1950년 4월~1963년 12월): 말루쿠 지역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의 통합을 반대하는 세력이 일으킨 반란. 남말루쿠 제2대 대통령 크리스티안 소우모킬(Christiaan Soumokil, 1905~1966) 등이 주도하였다. 1950년 9~11월의 작전 결과 인도네시아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말루쿠 핵심 지역 암본 등을 점령하여 반란을 거의 진압하였다. 이후 남말루쿠 공화국은 스람 섬에서만 활동하다 1963년 12월 사실상 소멸하였고, 그 이후 네덜란드망명 정부를 세워 명맥만 이어 가고 있다.
  • 10월 17일 사건(1952년 10월 17일): 정부에 대한 군부의 중대 공격 사건. 당시 인도네시아군은 구 네덜란드령 동인도군 파벌과 구 일본군(향토방위의용군) 파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자가 후자보다 훈련도가 높고 비교적 정예였다. 1952년 중순 윌로포 내각은 구 일본군 출신 위주로 군 감축을 추진했는데, 구 일본군 파벌 수프노(Supeno) 대령이 군축을 지지하고 관련 실무를 맡은 구 동인도군 파벌의 지도자인 나수티온(Abdul Haris Nasution) 장군과 시마투팡(Tahi Bonar Simatupang) 장군을 공격하며 그들의 해임을 촉구하는 서한을 정부로 보냈다. 수프노는 7월 17일 해직되었지만, 수프노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기존 군축 정책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나수티온과 시마투팡은 이를 민간의 군에 대한 과도한 개입으로 보고, 대책 논의 후 10월 17일 행동에 나섰다. 군용 트럭을 탄 5,000명 규모의 대규모 시위대가 국회의사당을 점거했고, 대통령궁으로 행진했으며 시위대를 따라 도착한 군 병력은 대통령궁 방향으로 전차와 대포를 배치했다. 시위대는 계속 규모가 커져 대통령궁 앞에는 최종적으로 30,000명 규모의 인파가 운집했다. 이때 대통령 수카르노가 대통령궁에서 나와 군중 앞에서 연설하여 호응을 얻은 후, 군 지도부와 비공개 회담을 가졌고, 시위대와 군은 해산했다. 이때 군은 국회 해산 등을 요구했지만, 수카르노는 정치력을 발휘해 군을 달래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군은 수카르노를 강요해 요구를 관철시키는 데 실패했고, 주모자 나수티온을 포함해 군 고위층 다수는 직후 해임되었다.[1]
  • 반둥 회의(1955년 4월 18일~24일): 정식 명칭은 아시아-아프리카 회의.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인도네시아, 인도, 버마, 실론, 파키스탄 5개국이 주도하여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의 회의.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 및 외무장관 루슬란 압둘가니(Ruslan Abdulgani)가 회의 진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주로 비동맹 노선을 취하는 29개국 대표가 참석하였고, 정치적으로 회의를 주도한 것은 수카르노, 자와할랄 네루(인도), 저우언라이(중국), 가말 압델 나세르(이집트)였다.[2] 반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 비동맹주의를 천명하고, 세계 평화와 협력에 관한 '반둥 10원칙'을 발표하였다. 현대 세계에서 최초로 열린 비서구 국가들의 대륙 간 국제회의이며, 비동맹운동의 가시적인 첫 성과이기도 하다.
  • 제1차 인도네시아 총선(1955년 9월 29일): 상위 득표 4당 인도네시아 국민당(57석), 마슈미(57석), 나들라툴울라마(45석), 인도네시아 공산당(39석)이 전체 의석 257석 가운데 77%를 획득했지만, 의석을 1석이라도 배출한 정당은 28개에 달하였다. 이후 수카르노는 의회 정치의 혼란에 염증을 느끼고 점차 독재적 행보를 보이며 교도민주주의로 나아간다.
  •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합 탈퇴(1956년): 네덜란드령 뉴기니를 둘러싼 네덜란드와의 관계 악화의 결과.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간 정치적 연합 관계는 완전히 청산되었다.
  • 다룰 이슬람 반란(1949년~1962년): 자바 서부, 아체, 남술라웨시, 남칼리만탄 등지에서 세속주의 성향의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몰아내고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반란. 정부는 1956년부터 을 동원한 진압에 들어갔고, 1959년까지 대부분 반란 지역에 대한 안정화에 성공했다. 반란 주동자는 1962년 6월 체포되었고, 반란은 1962년 말까지 거의 정리되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이슬람 국가를 수립하려는 극단주의 파벌은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하였다. 특히 다룰 이슬람 반란에 참가했던 하산 디 티로(Hasan di Tiro)는 1970년대부터 아체 분리주의 내란을 이끌었다.
  • 하타의 부통령 사임(1956년 12월 1일): 독립전쟁기부터 수카르노와 함께한 공화국 부통령 모하맛 하타자바인이 아닌 수평적인 문화가 몸에 밴 미낭카바우계였고, 서구식 의회민주주의를 굳건히 신뢰하고 독재 정치를 반대했다. 하타는 점차 수카르노가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권위주의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았고, 그에게 환멸을 느꼈다. 하타는 1955년 선출된 제헌평의회가 구성된 후부터 부통령직에서 사임할 뜻을 내비쳤고, 결국 1956년 말 공식 사임했다. 중앙 정계에서 비자바계를 대표하던 거물 하타의 사임은 비자바계에게는 특히 엄청난 충격이었는데, PRRI와 Permesta가 반란을 일으키고 나서 하타의 복귀를 정부와의 협상 조건으로 내걸었을 정도였다.
    • 하타는 사임 후 야인으로서 저술과 정치 평론 활동을 하며 수카르노 정부와 교도민주주의 시기 수카르노의 독재를 비판했다. 1960년 하타는 저서 《우리의 민주주의》(Demokrasi Kita)를 발표하며 교도민주주의를 독재의 다른 이름이라고 신랄하게 공격했는데, 수카르노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수카르노가 자신을 비판하던 사회당의 수탄 샤리르를 체포했을 때도 하타는 수카르노에게 체포가 "비합리적"이고 "식민지적 발상"이라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보냈지만, 수카르노는 무시했다.
  • 인도네시아 공화국 혁명정부(PRRI), 보편투쟁헌장(Permesta) 반란(1957년~1961년): 서수마트라 파당 등을 중심으로 하는 PRRI, 북술라웨시 마나도 등을 중심으로 하는 Permesta의 반란. 두 세력은 1958년 2월 17일부터 연대하였으므로 보통 묶어서 PRRI/Permesta 반란으로 칭한다. 근본적으로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치자바 중심주의에 반발한 지방군 장교정치인의 반란으로, 수카르노 시대의 반란 중 다룰 이슬람 반란과 함께 가장 지속적이고 위협적이었다. 반란에 참여하거나 동조한 인물 중 독립전쟁기부터 공화국과 함께한 중량급 인사들도 많았다. 반란은 나수티온(Nasution) 장군 등이 펼친 작전으로 결국 진압되었지만, 인도네시아가 진압 과정에서 소련의 군사 원조에 의존하게 되어[4] 이후 인도네시아가 상대적 친소 노선으로 기울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PRRI의 중심 인물로는 샵루딘 프라위라느가라(Sjafruddin Prawiranegara, 전 공화국 임시정부[3] 수반, 전 공화국 재무장관), 부르하누딘 하라합(Burhanuddin Harahap, 전 공화국 총리), 말루딘 심볼론(Maludin Simbolon, 공화국군 대령), 수미트로 조요하디쿠수모(Sumitro Djojohadikusumo, 전 공화국 재무장관, 프라보워 수비안토의 아버지), 모하맛 낫시르(Mohammad Natsir, 전 공화국 총리) 등이 있었고, Permesta의 중심 인물로는 앞서 마카사르 반란을 진압했던 알렉스 카윌라랑 등이 있었다.
  • 수카르노의 거국중립내각 제안(1957년 3월~4월): 제2차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 내각 말기까지 수카르노는 아직 실권을 행사하지 않고 의회에 정책을 제안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PRRI 반란이 터지며 수카르노는 심각한 국가 위기 상황에서 1957년 3월 14일 계엄령을 선포했고, 이어 의원내각제 체제의 불안정성을 지적하며 국민당, 공산당, 나들라툴울라마, 마슈미 4대 정당이 모두 국익을 위해 협력하는 거국중립내각, 즉 '상호부조(고통로용) 내각'의 구성을 제안했다. 이는 내각에 공산당을 참여시키는 것을 거부한 다른 정당들과 군대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수카르노는 국민당 위주로 재차 내각 구성을 시도했지만, 마슈미는 수카르노와 강경한 대립각을 세우며 참여를 거부했다. 결국 논쟁 끝에 자유민주주의 시대의 마지막 내각은 기술관료 주안다 카르타위자야(Djuanda Kartawidjaja, 국민당)가 총리로 이끄는 실무 위주 내각이 되었다.(국민당을 주축으로 NU, 마슈미, 이슬람연합당, 기독당, 무르바당, IPKI가 참여함) 수카르노가 의원내각제를 깨고 통치력을 행사하여 일부 관철된 것으로, 이는 교도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초기의 사건이었다.
  • 제1차 인도네시아 지선(1957년 하반기): 인도네시아 공산당자바 섬에서 모든 정당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2.2. 교도민주주의 시기[편집]


집권 후기에 수카르노는 자신의 교도민주주의(Demokrasi Terpimpin, Guided Democracy) 구상을 실현시켰는데, '나사콤'(NASAKOM), 즉 민족주의(NASionalisme), 종교(Agama), 공산주의(KOMunisme)를 세 축으로 하여 대통령인 자신을 그 중심에 위치시킨 사실상의 독재 체제를 구축한 것이었다. 이 체제에서 대통령은 합의를 달성하기 위해 정책을 지도(교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교도민주주의 시기는 1959년 7월 5일[A]부터 1966년 3월 11일까지 지속되었다. 교도민주주의 시기 후반, 수카르노는 점점 공산당과 가까워졌으며, 1962년에는 공산당 서기장 등 공산당계 인사 2인을 입각시켰다.
  • 제헌평의회 해산(1959년 7월 5일): 인도네시아/정치 문서 관련 절 참조. 국회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후 인도네시아 국회는 점점 수카르노의 거수기처럼 변해 갔다.
  • 마슈미 불법화(1960년 9월): 수카르노는 1960년 9월 4대 정당 중 하나로 유력했던 중도우파 이슬람(이슬람 모더니즘 계열) 정당 마슈미의 핵심 인물 샵루딘 프라위라느가라, 부르하누딘 하라합, 모하맛 낫시르 등이 PRRI 반란에 참여했고 마슈미 당원 중 반란 참여자 및 지지자가 많은 것을 이유로 마슈미를 해산하고 불법화하였다. 직전인 1960년 8월, 마찬가지로 PRRI 반란 참여 및 지지를 이유로 보다 작은 원내 8당 인도네시아 사회당도 해산당했다.
  • 유엔 총회 연설(1960년 9월 30일): 유엔 총회에서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판차실라가 근본적으로 미국 독립선언서공산당 선언을 함께 승화시킨 결과물이라 주장하며, 인도네시아가 자본주의자유주의공산주의 모두와 구별되는 독자 정치경제 노선(마르하엔주의)을 따름을 천명했다. 이는 제3세계의 지도국 중 하나로서 인도네시아가 확고히 자리매김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 트리코라 작전(1961년 12월 19일~1962년 8월 15일): 네덜란드와의 영유권 분쟁으로 네덜란드령 뉴기니인도네시아군침공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무승부였으며, 뉴욕 협정에 의해 서뉴기니유엔이 잠시 관리했다 인도네시아가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서뉴기니에서는 인도네시아로의 통합에 반대하는 독립 투쟁이 전개되었다.
  • 수카르노가 종신 대통령이 됨(1963년): 인도네시아 국회는 1963년 수카르노에게 종신 대통령 지위를 부여했다. 이는 수카르노 독재 권력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대치(1963년 1월 20일~1966년 8월 11일): 말레이시아의 성립을 둘러싸고 보르네오 북부에서 인도네시아가 말레이시아 지역의 공산 게릴라를 도와 말레이시아령에 군을 침투시켜 벌인 국지전. 수카르노는 말레이시아를 영국괴뢰국으로 보고 인정하지 않았다. 선전포고는 없었으며, 한때 말레이 반도로까지 분쟁이 확대되기도 했지만 친서방 노선의 수하르토가 집권함에 따라 대치는 종결되었다.
  • 9월 30일 운동(1965년 10월 1일): 수카르노 정부에 대한 좌익장교들의 실패한 쿠데타. 원인과 전개 등 세부에 대해서는 우파좌파 간 설이 대립하고 있다.
  • 인도네시아 공산주의자 대학살(1965년~1966년): 좌익 장교들의 쿠데타 실패 후 수하르토와 군의 우익 세력이 주도한 대대적인 공산주의자, 좌파, 화교 학살. 수백만 당원을 자랑하던 세계적 규모의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소멸하였다. 사망자의 규모는 최소 50만에서 100만 이상을 헤아린다.
  • 수카르노 실각(1966년~1967년): 학살 초기에 수카르노는 공산당을 변호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친공 입장을 취했던 수카르노는 수하르토가 주도한 공산주의자 학살과 수하르토의 권력 장악을 지켜봐야 했다. 당면한 경제난과 정국 혼란의 책임이 근본적으로 수카르노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수카르노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는 1966년 1~2월에도 이어졌다. 수카르노는 1966년 초까지도 정치적 실권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1966년 3월 11일 당면한 혼란을 통제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권한을 수하르토에게 위임하는 문서(Supersemar)에 서명함으로써 실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수카르노가 이 문서에 강제로 서명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이후 수카르노는 1년 정도 명목상의 대통령직에 있었고, 1966년 6월과 1967년 1월 두 차례 연설을 통해 권한을 회복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1967년 3월 12일 국회는 수카르노를 대통령직에서 공식 해임했다.

3. 의원내각 목록[편집]


자유민주주의 시기와 교도민주주의 시기를 가르는 주된 체제상의 차이는, 전자 시기에는 1950년 잠정 기본법에 따라 총리 휘하 의원내각이 행정부를 구성하고 의회에 책임을 지는 의원내각제가 시행된 반면[5], 후자 시기에는 수카르노가 총리직을 겸임하여 대통령 내각이 구성되는 대통령제, 그것도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신대통령제가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시기 의원내각은 잦은 사퇴와 불신임으로 평균 지속 기간이 짧았다. 이하는 이 시기 대통령 수카르노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실질적으로 통치한 의원내각의 목록이다.
  • 낫시르 내각(1950년 9월 7일~1951년 4월 27일, 총리 모하맛 낫시르[Mohammad Natsir, 마슈미])
  • 수키만 내각(1951년 4월 27일~1952년 4월 3일, 총리 수키만 위료산조요[Soekiman Wirjosandjojo, 마슈미])
  • 윌로포 내각(1952년 4월 3일~1953년 7월 30일, 총리 윌로포[Wilopo, 인도네시아 국민당])
  • 제1차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 내각(1953년 7월 30일~1955년 8월 1일, 총리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Ali Sastroamidjojo, 인도네시아 국민당])
  • 부르하누딘 하라합 내각(1955년 8월 1일~1956년 3월 24일, 총리 부르하누딘 하라합[Burhanuddin Harahap, 마슈미])
  • 제2차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 내각(1956년 3월 26일~1957년 4월 9일, 총리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인도네시아 국민당])
  • 주안다 내각(1957년 4월 10일~1959년 7월 10일, 총리 주안다 카르타위자야[Djuanda Kartawidjaja, 인도네시아 국민당])

4. 정당 이념 지형[편집]


수카르노 시대 주요 정당들의 이념 지형을 정리하면 이하와 같다. 의석 기준 4대 거대 정당은 볼드체하였는데, 이들이 교도민주주의 시대 '나사콤'(민족주의: 국민당, 종교: 나들라툴울라마, 공산주의: 공산당)을 직접적으로 대표한다.

4대 정당 중 PRRI 반란에 엮인 마슈미는 1960년 해산당했다. 마슈미의 해산 이후, 국회에서 이슬람 정당의 세는 눈에 띄게 줄었고, 상대적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반사 이익을 얻게 되었다.
  • 아코마당(Partai Acoma, 1952~1965): 극좌, 마르크스주의, 트로츠키주의
  • 인도네시아 공산당: 극좌, 마르크스-레닌주의, 중소결렬 이후 친중
  • 무르바당(Partai Murba, 1948~1977): 좌익, 사회주의, 민족 공산주의, 중소결렬 이후 친소
  • 인도네시아 노동당(Partai Buruh Indonesia, 1차 1945~1948, 2차 1949~1956): 좌익, 좌익 대중주의, 노동자 권익 옹호
  • 인도네시아 사회당: 좌익~중도좌파, 민주사회주의, 독재 반대(반권위주의)
  • 인도네시아 국민당(PNI, 1923~1973): 좌익~중도, 마르하엔주의,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좌익 민족주의)
    • 판차실라 수호자 운동(Gerakan Pembela Panca Sila): 1955년 총선을 앞두고 잠시 결성된 PNI의 위성정당.
    • 인도네시아당(Partindo, 1차 1931~1936, 2차 1958~1966[6]): 수카르노 시대 인도네시아당은 국민당과 마찬가지로 마르하엔주의, 좌익 민족주의를 지지해 국민당과 이념적 차이는 크지 않았다. 사실상 국민당 2중대였지만, 지도부가 국민당보다 약간 더 좌익 성향이 선명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대학살 이후 친공 입장 때문에 공산당과 함께 불법화되었다.
  • 인도네시아 이슬람연합당(Partai Syarikat Islam Indonesia, 1923~1973): 중도좌파~중도, 이슬람 사회주의, 이슬람 모더니즘
  • 인도네시아 시민권 협의체(Baperki, 1954~1965): 좌익~우익(이념빅 텐트), 중국계 권익 옹호
  • 나들라툴울라마(NU, 1926[7]~현재): 중도~중도우파,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토착 이슬람(특히 자바) 전통 존중, 이슬람 민주주의
  • 인도네시아 기독당(Parkindo, 1945~1973): 중도우파, 기독교 민주주의
  • 마슈미(Masyumi, 1945~1960): 중도우파, 이슬람 모더니즘, 이슬람 민주주의, 범이슬람주의
  • 가톨릭당(Partai Katolik, 1923~1973): 중도우파~우익, 기독교 민주주의, 정치적 가톨릭
  • 인도네시아 독립지지자연맹당(IPKI, 1954~1973): 중도~우익, 판차실라 강조. 나수티온 등 군부 명망가가 주축이었으며 골카르와 가까웠음

5. 공산주의자 대학살과 정파들[편집]


1965~1966년, 좌익 쿠데타가 실패하고 곧이어 정계 내부에서 수하르토우익권력을 장악하고 수카르노 충성파가 숙청되었으며[8], 이어서 주로 1965년 10월부터 1966년 3월까지 군 우익과 이들이 지원하는 자경단, 반공 청년단 등이 주도한 공산주의자 학살이 벌어졌다.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학살이 발생한 곳은 자바 중부와 동부, 자카르타, 발리, 그리고 수마트라아체였다. 그러나 자바, 수마트라, 소순다 열도의 다른 지역이나 칼리만탄에서도 극단적인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폭력학살은 단순히 "공산주의자"를 향한 것뿐만 아니라, 지역에 원래 존재하던 사회적 갈등이 폭발한 양상을 띠기도 했다. 람풍 등 수마트라 지역, 서칼리만탄과 남칼리만탄 등지에서는 자바인, 화교 이민자들에 대한 선주민들의 증오가 이들을 공격하는 직접적 동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몇 년 전 PRRI, 다룰 이슬람 반란을 겪은 수마트라 지역에서 선주 민족들은 자바인들을 정치적, 경제적 점령자로 인식했고, 이들에 대한 적대감의 골이 깊었다.

대학살 시기, 대략적으로 정파나 집단에 따라 구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피해자: 직접적인 학살의 표적이 된 경우.
    • 인도네시아 공산당: 학살의 주요 표적으로, 수백만 당원 규모로 세계에서 손꼽는 거대 공산당이었던 당이 소멸했다. 공산당 서기장 아이딧은 붙잡혀 총살당했고, 공산당 전국 및 지역 간부 조직은 체포, 살해 등으로 와해되었다. 대체로 극단적인 학살1966년 3월까지 잦아들었지만, 학살이 특히 심각했던 자바나 발리 일부 지역에서는 학살에서 살아남은 공산당원들이 무장하고 우익 세력에 산발적으로 반격하기도 했다. 동부자바 블리타르(Blitar)에서는 공산당 잔당의 자생적 게릴라전이 1968년 소탕될 때까지 벌어졌다.
    • 아코마당: 이념적으로 매우 선명한 공산주의를 표방하여 공산당과 함께 학살의 표적이 되었다. 공산당과 함께 당이 소멸했다.
    • 인도네시아 시민권 협의체: 구성원들의 이념은 좌익에서 우익까지 다양했지만, 중국계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학살 표적이 되었다. 공산당과 함께 당이 소멸했다.
    • 정당 소속에 무관하게 공산주의자, 공산주의 동조자, 화교 등이 학살 대상이 되었다. 화교는 당시 학살을 수행한 자경단원들에게 팽배한 반화교 정서로 인해 피해자가 되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중국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 반화교 정서의 원인 중 하나였고, 당시 이에 관한 다양한 악질적 선전이 횡행하기도 했다.
    • 비교적 덜 주목받았지만, 보통 '아방안'(abangan)으로 칭하는 전통주의를 고수하는 자바 무슬림들도 자바 지역에서 학살 피해자가 된 경우가 많았다. 전통적으로 관습을 지키며 정통 이슬람을 따르지 않는(이는 사람마다 달랐고, 공격 목표가 된 아방안은 겉으로 티가 날 정도로 비정통적인 경우였다) 이들은 자바 중부와 동부에서 공산당 등 좌익 정당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기는 했지만, 화인들처럼 단순히 아방안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하기도 했다. 학살 이후, 일부 아방안들이 군부 정권의 강권으로 힌두교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 조력자: 군부 우익 세력, 지역의 반공 자경단과 함께 학살을 적극적으로 도운 경우.
    • 나들라툴울라마(NU): 현대 국민계몽당은 온건한 이미지가 있지만, 1965년 당시 나들라툴울라마는 교도민주주의 체제에서 수카르노를 지지해 왔으면서도 1963년 무렵부터 공산당과는 사이가 아주 나쁜 상태였다. 결국 NU는 적극적으로 공산주의자 색출과 제거를 위해 우익 군 세력, 반공 자경단과 협력했다. NU가 무하마디야에 비해 비교적 자바 전통에 호의적이기는 하지만, 학살당하는 아방안들을 감싸지는 않았다. 나중에 민주화 과정에서 대통령이 된 NU-국민계몽당 계열의 압두라만 와힛은 NU가 대학살에 연루된 일을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 무하마디야(Muhammadiyah): NU와 함께 오늘날까지 양대 이슬람 조직을 이루는 무하마디야 역시 공산주의자 학살에 협력했다. 이는 양대 조직의 역사에서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특히 무하마디야는 1965년 11월 공산당을 절멸시키는 것이 "지하드"라고 천명하였고, 신실한 무슬림 청년들에게 공산주의자 학살을 종교적 의무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 학살 관련 연구들의 통계를 보면, 자바에서 공산당이나 좌익 정당을 지지했던 지역과 이슬람 정당을 지지했던 지역 간에 학살 전후 인구 감소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난다. 이슬람 정당 지지 지역에서 학살을 실질적으로 도맡았던 지역 자경단의 활동이 거셌던 것이다.
    • 인도네시아 독립지지자연맹당(IPKI): 이 정당의 군부 출신 인물들은 좌익 쿠데타에서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고, 군 우익과 인적으로 겹친다. IPKI는 수하르토 집권 이후 수하르토와 골카르 세력에 공개적으로 친근감을 드러냈다.
    • 발리의 상층 계급: 발리는 힌두교도 다수 지역이었는데, 경제적, 정치적으로 주류인 상층 계급(주로 상위 카스트)은 주로 국민당을, 하층 계급(주로 하위 카스트)은 공산당이나 좌익 정당을 지지했다. 공산주의자 학살이 벌어지자 상층 계급, 특히 국민당을 지지하는 지주들과 공산당의 종교 경시를 아니꼬와하던 힌두 보수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 학살을 주도했다. 힌두교 승려 등 종교 지도자가 종교의 이름으로 공산당 분쇄를 촉구한 경우도 있었다. 발리는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 가운데 피해자의 비율이 특히 높았는데, 공산당 발리 지역당 서기장 등 20여 공산당 간부가 집단 살해 후 암매장당한 것을 포함해 당시 200만 발리 인구 중 5~10%인 10~20만 명이 학살당했다.[9]
  • 방관자: 학살 표적이 되지도,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도 않은 경우.
    • 인도네시아 국민당: 대통령 수카르노학살을 말리려고 노력했지만, 전체적으로 국민당은 갈팡질팡하며 일관된 입장을 내지 못했다. 상기한 발리나 자바 일부 지역에서는 당 전체의 입장과 별개로 국민당 당내 반공 청년들이 자경단을 이루어 학살을 주도하기도 했다. 반대로, 좌익 성향인 국민당 당내 좌파가 학살 피해자가 된 경우도 있었다.
    • 무르바당: 좌익 정당이었지만 무르바당은 공산당과 전통적으로 대립하는 입장이었으며, 특히 1965년 당시 무르바당 당내 우경화가 진행되면서 수카르노 정부와도 대립하고 있었다. 무르바당은 학살 과정에서 최대한 납작 엎드리며 풍파가 피해가기를 기다렸고, 수하르토 집권 이후에도 정당 통폐합 시점까지 살아남아 (상대적) 좌파 정당으로 활동했다.
    • 인도네시아 기독당, 가톨릭당: 기독당과 가톨릭당 역시 일관된 입장은 없었지만, 지역에 따라 학살에 협력하기도 했다. 특히 발리 지역의 학살은 군 우익과 발리 지역의 국민당, IPKI, NU, 기독당, 가톨릭당 지지자들이 모두 협력한 결과였다.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자 혐의를 산 사람이 군이나 자경단에게 기독당이나 가톨릭당 소속임을 밝힘으로써 학살 피해를 면한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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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4 20:56:47에 나무위키 인도네시아/정치/수카르노 시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A] A B 관점에 따라, 수카르노가 독재적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1957년 3~5월, 또는 교도민주주의를 이념적으로 공표한 1957년 8월 17일 독립기념일 연설을 교도민주주의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수카르노는 그 후 2년간 어느 정도 이전의 틀을 유지하며 독재로 나아갔다. 1959년 7월 5일은 1955년에 선출된 제헌평의회(국회와 별개로 신헌법 제정을 위해 선출된 의회로, 국회와 마찬가지로 다당제였음)를 수카르노가 해산하고 1945년 헌법을 재부과하는 대통령령을 내려 교도민주주의 체제가 공식적으로 완성된 시점이다.[1] 나수티온은 1955년 군으로 복귀했지만, 시마투팡은 1953년 해직된 후 명예직만을 전전하며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2] 참고로 한국은 참석하지 않았다. 일본은 대표단을 보내기는 했는데, 국가원수정부수반급이 참석하지 않고 장관급이 참가해 회의는 거의 참관하는 수준에 그쳤다. 회의 도중 따로 중일 회담이 이루어졌다는 의의는 있다.[3] 독립전쟁 말기 네덜란드 2차 공세로 욕야카르타가 점령당하고 수카르노 등이 체포당했을 때 성립한 임시정부.[4] 처음에는 미국으로 원조를 타진했으나 거절당했다.[5] 이것은 수탄 샤리르 내각, 아미르 샤리푸딘 내각, 모하맛 하타 내각이 구성되어 이원집정부제에 가까운 의원내각제로 운영되었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기 공화국 정부의 관행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했다. 참고로 가장 오래 지속된 자치국인 동인도네시아 자치국1947년부터 1950년까지 이와 비슷한 체제로 운영되었다.[6] 1차와 2차 모두 국민당에서 갈라져 나왔다. 2차는 1차의 이름만 계승했고 인적 계승 관계는 없다. 1차 인도네시아당은 원래 식민지 시대 국민당 온건파 사르토노의 정당이었다.[7] 원래 정당이 아니었고 이슬람 사회 단체였다. 오늘날 나들라툴울라마는 다시 사회 단체로 돌아왔으며, 이들의 입장을 사실상 대변하는 현대 정당으로 국민계몽당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나들라툴울라마 자체는 어떤 정치 조직과도 무관하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기는 하다. 독립 직후 정치적으로 마슈미와 함께 행동하던 때도 있었지만, 독자 정치세력화하여 총선에 참여하기로 하고 1952년 마슈미와 결별했다.[8] 1965년 당시 수카르노는 좌경화하며 친공산당으로 기울고 있었고, 이 때문에 우익 세력과 대립해 온 수카르노 충성파가 많았다. 수카르노의 좌경화 때문에 일부는 실패한 쿠데타를 수카르노의 친위 쿠데타로도 의심했지만, 이는 근거가 희박하다. 9월 30일 운동의 진상은 간단하지 않으며, 이에 관해 여러 설이 다양한 세부 사항을 놓고 대립하고 있다.[9] "발리는 제주의 아픔을 안다," 한겨레, 2013년 11월 11일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