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우즈베키스탄 관계

덤프버전 :






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2.2. 고대 말
2.3. 중세
2.4. 근세
2.5. 19세기
2.6. 20세기
2.7. 21세기
3. 교통 교류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이란우즈베키스탄의 관계. 양국은 오래전부터 관계가 깊었고 언어, 문화, 종교에서 여러 교류가 많았고 중세에는 둘다 똑같은 국가에 속하던 경우가 있었다.(칼리프 왕조,셀주크 제국, 티무르 제국 등등)


2. 역사적 관계[편집]



2.1. 고대[편집]


고고학적, 인류학적 연구 결과 고대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란에 해당하는 지역과 중앙아시아에 해당하는 지역 사이에는 인적, 물적 자원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바가 확인되었다. 이란어군에 해당하는 민족들은 캅카스와 이란, 중앙아시아 각지에 널리 퍼져 거주하였으며, 조로아스터교 관련 유적이 중앙아시아 각지에서도 발굴되는 것이 그 증거이다.

고대 당시 최대 판도를 자랑했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마사게타이족을 지배하는 등 중앙아시아의 방대한 영토를 두고 있었다. 마케도니아 제국알렉산드로스 3세이 페르시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각지가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정복 이후 점령지 각지에 그리스인들이 주둔한 것을 계기로 이란 고원과 중앙아시아 모두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2.2. 고대 말[편집]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동부와 남부, 타지키스탄 일대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소그드인들은 돌궐 제국사산조 페르시아 사이의 중계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2.3. 중세[편집]


중세 초 아라비아 반도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으나 이슬람교의 발흥과 함께 분열되어 있던 아랍인들이 통일되면서 페르시아를 정복했다. 아랍인의 정복하에서 페르시아는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우마이야 칼리프조의 확장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지역도 아랍 무슬림들에게 정복되어 이슬람화되었고, 이후 문화적으로는 순니 이슬람-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압바스 칼리프조 시대가 되면 호라즘어, 소그드어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의 다양한 방언들이 점차 힘을 잃고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중세 페르시아어가 공용어로 활발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이란 문화를 전파하던 사만 왕조와 카라한 왕조를 계기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튀르크계 민족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하고 페르시아계 민족들과 튀르크계 민족들은 서로 통혼이 많이 이뤄지게 되었다.

서로 깊숙히 연계되어 있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과 이란 고원과의 관계를 1차적으로 단절시킨 대상은 바로 몽골 제국이었다. 몽골 제국은 중앙아시아 지역과 페르시아를 정복하는데 이 과정에서 농경지가 크게 파괴되었다. 이란 고원의 농경지 중 1/4 가량이 몽골 제국의 침략 이후 이란어군 농민들이 거주하던 지역에서 튀르크계 유목민족들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전환되었다. 몽골 제국의 5칸국 중 차가타이 칸국은 우즈베키스탄 일대 그리고 일 칸국은 이란 고원과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2.4. 근세[편집]


한 때 티무르가 건설한 티무르 제국이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이란 등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세우는가 싶더니 몇 세대 가지 않아 무너지고 이란에는 시아파 근본주의 성향의 사파비야 교단에 의해 사파비 제국이 들어섰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일대에는 무함마드 샤이바니가 중심이 된 우즈베크 칸국이 들어서는데 순니파 하나피파에 속했던 우즈베크 칸국은 호라산 일대의 패권을 두고 사파비 제국과 영토 분쟁을 벌였다. 사파비 제국은 건국 초반에는 우즈베크 칸국을 대상으로 전쟁에서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순니파 주민들이 반발하면서 호라산 지방을 완전히 장악하는데는 실패한다. 호라산 서부에는 우즈베크인들과 투르크멘인들이 히바 칸국을 건국하고, 사파비 제국 서부의 오스만 제국에게 신종하고 양쪽에서 사파비 제국을 견제하면서 사파비 제국의 확장에도 제동이 걸렸다.

순니파 이슬람 종주국을 자처하는 오스만 제국이 서쪽에서,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 신종하는 히바 칸국이 동쪽에서 사파비 제국을 포위하는 형세가 되자, 사파비 제국은 서쪽 국경에서 봉기를 일으킨 야지디교 신도들 등 쿠르드인 포로들을 붙잡아서 동쪽 국경지대로 강제이주시켰다. 원래 이란과 튀르키예, 시리아와 이라크 사이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쿠르드족들이 이란 동북부에도 일부 거주하게 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상술한 것처럼 근세 이란에 들어선 사파비 제국 시아파 12이맘파 근본주의 노선을 택하고 이란 내 순니파 주민 상당수를 시아파로 개종시키면서, 우즈벡 칸국들과 문화 교류가 상당부분 단절되었다. 오늘날 이란에 해당하는 지역의 주민 상당수가 시아파로 개종한 것을 기점으로 양 지역간의 교류가 감소하였다. 우즈벡 칸국은 이후 페르시아 지역보다는 무굴 제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한 편 사파비 제국에서는 아바스 1세 치세 들어서 자국 내 상공업 및 국제무역 관련하여 아르메니아인들을 중용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 유대인들의 생계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침식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몽골 제국의 침략[1]티무르 제국의 확장 전후하여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트란스옥시아나의 유대인 공동체는 부하라 칸국 시절 유대인들이 다시 이주해오면서 재차 부흥을 맞이하였다.

2.5. 19세기[편집]


19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이 캅카스 동부로 팽창하여 이란의 카자르 왕조로부터 조지아, 아르메니아를 해방시키고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였다. 이후 19세기 중엽 러시아 제국이 중앙아시아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우즈베크 칸국에서 갈라져나온 여러 칸국들은(투르크메니스탄 일대의 히바 칸국 타지키스탄 일대의 코칸드 칸국 등등)은 러시아 제국에게 병합되었고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란 카자르 왕조의 경우 명목상 독립을 유지할 수는 있었고 러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2.6. 20세기[편집]


1917년에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몰락하고 소련이 출범했다. 소련 치하에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자치 공화국이 들어섰으며 1930년대 전후로 문맹 퇴치 운동이 벌어졌다. 이 외에도 소련 스탈린 정권 시절에는 농촌 지역의 물라(이슬람 율법학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벌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차도르, 파란자 같은 복식들이 우즈베키스탄 일대에서 완전히 근절되기 이른다.

반면 이란의 경우 카자르 왕조가 무너지고 팔라비 왕조가 들어서는 과정에서도 농촌 지역의 물라들이 세력을 건제하게 유지하였고, 카자르 왕조의 샤리아 폐지 및 서구법 도입 개혁 그리고 팔레비 정권의 농촌 문맹 퇴치 및 여성 인권 개선 운동 그리고 이슬람 사원 소유의 토지를 농민에게 재분배하는 문제에 계속하여 저항하였다. 결국 이란에서는 성직자 세력과 도시 대학생 세력이 연합하여 이란 혁명을 일으켜 팔라비 왕조를 붕괴시켰다.

냉전당시에 소련에 속했던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서로 영토가 인접한 것도 아니고 자체적인 외교권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교류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다만 소련 측에서는 이슬람권 국가에 외교 홍보 목적에서 부하라[2]에 어용 이슬람 신학교를 유지하였고 부하라의 소비에트 마드라사와 이란 측에서 제한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91년에 소련이 해체되면서 우즈베키스탄은 독립하고 이란과 공식 수교했다.

2.7. 21세기[편집]


이란과 우즈베키스탄은 역사적으로 관계가 깊은 편이라서 언어, 문화 면에서 공통 분모가 적지 않은 편이다. 이란어는 인도유럽어족 이란어군이고 우즈베크어는 튀르크어족 차가타이어파에 속하지만 어휘 면에서 우즈베크어가 이란어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이 수니파가 주류일 뿐더러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받으면서 세속 국가가 된 반면, 이란은 시아파가 주류일 뿐더러 70년대말에 이란 혁명으로 이슬람 공화정이 되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질감도 큰 편이다.

양국은 이슬람 협력기구, 상하이 협력기구의 정회원국이다.


3. 교통 교류[편집]


두 나라들을 잇는 항공 노선들이 존재한다.


4.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3 09:32:11에 나무위키 이란-우즈베키스탄 관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중앙아시아 유대인들은 주로 사마르칸드발흐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밀집 거주하고 있었는데,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가장 심각한 인명피해를 입었던 곳들이 바로 이런 대도시 도회지였다.[2] 순니파 기준 가장 권위있는 하디스 모음집을 편찬한 무함마드 부하리의 고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