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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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진행
3. 여파
4. 진짜는 지금부터 - 정미사화(양재동 벽서 사건)
5. 이후


1. 개요[편집]


을사사화()는 명종 즉위년(1545)에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1]이 충돌한 끝에 소윤이 승리하여 대윤 일파가 모조리 숙청된 사화(士禍)를 말한다. 을사사화 자체는 대윤, 소윤 대신들 내부의 대결이며 그와 동시에 파평 윤씨 내부의 대결이었지만, 특히 을사사화 이후로 벌어진 사건들에서 대윤에 협력했던 사림이 피해를 입어 사화라고 불린다.

'훈구파가 사림파를 핍박했다'라는 단순한 구도로 이해하기엔 을사사화는 그 구도에서 많이 벗어나는 편이다. 옥사를 주도한 정순붕은 원래 기묘사화를 당한 조광조 일파의 선비였고, 남곤, 심정, 김안로가 그랬듯이 대다수 권신은 사림 출신이 많았다.[2]

대윤의 핵심인 윤임과 소윤의 핵심인 윤원형/문정왕후는 9촌 지간으로, 윤원형의 아버지인 윤지임이 윤임의 8촌 종형이다.

2. 진행[편집]


1544년 11월에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윤임을 비롯한 대윤파가 득세하였다. 소윤은 윤원형의 밑에 모여서 윤임 일파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드디어 1545년 7월,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수렴청정하게 되니 전세는 역전되었다.

윤임 일파는 이들의 대두를 막으려고 윤원로를 귀양보냈으나 이는 되려 투지만 살려준 꼴이 되었다. 윤원로가 당시만 해도 목소리도 제일 크고 과격파였기에 표면적으로 소윤의 대장 노릇을 톡톡히 했었다. 반대로 동생 윤원형은 교양이나 예의와는 거리가 먼 형과 달리 과거합격자 출신에 당시만 해도 사람이 학문을 좋아하고 점잖다는 평이 있었다. 그래서 윤임을 비롯한 대윤 세력은 윤원로만 처치하면 그 나머지는 어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일을 벌였으나 진짜 흑막은 따로 있었고 역공을 맞고 만다.

당시 조정은 대윤과 소윤이 비교적 균등하게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조참의 윤원형을 위시로 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3], 병조판서 이기[4], 공조판서 허자(許磁)[5]가 상소를 올렸고 예조판서 윤개는 지나친 숙청에 반대했지만 결국 윤원형과 소윤에 협조했으며 문정왕후가 직접 나서 형조판서 윤임 및 그 일파인 이조판서 류인숙(柳仁淑), 좌의정 류관(柳灌) 등을 내쫓았는데 류관은 판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가 유배를 가게 되었고 우의정 성세창(成世昌)은 좌의정으로 승차했으나 대윤을 신구하다가 역시 내쫓겼다. 즉, 호조, 예조, 병조, 공조의 소윤이 이조와 형조의 대윤을 몰아낸 셈. 당시 유인숙은 찬성도 겸하고 있었다. 판서 vs 판서[6] 여담으로 예조판서는 윤원형이 사화 직후 즉시 먹었다.

영의정 윤인경과 영중추부사 홍언필은 대윤과 소윤 간의 갈등을 조정해 보려 했고, 사람들이 많이 죽는 걸 막아보려 했지만 결국 소윤에 협조하게 된다.


3. 여파[편집]


승자가 된 소윤에게 성렬대비의 보답은 확실했다. 병조판서 이기는 사화가 시작된 뒤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사화 이전에는 좌의정 유관, 우의정 성세창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대윤의 우세였지만 명종 즉위 이후 좌의정 성세창, 우의정 이기로 정승이 바뀌면서 소윤의 우세가 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좌의정에 이기가, 우의정에 정순붕이 제수되면서 사실상 소윤 정권이 들어섰다.

중종 시기만 해도 양쪽을 모두 비판하던 정순붕이 소윤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정순붕은 관직 초기만해도 조광조의 일파를 자처하며 급진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기묘사화로 관직운이 꼬이고 20년 가까이 야인생활을 했다. 야인생활은 그를 변하게 하여 선배 사림 김안로처럼 권력을 탐하게 되었고, 윤원형에 빌붙는 건 물론 아들까지 동원해 반대파 윤임 공박에 앞장섰다.

하도 정순붕의 변절이 기가 찼는지 당대 야담에도 까는 내용밖에 없다. 그중 압권은 정적 류관의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류관의 여종 하나가 주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정순붕 베개 안에 역병 걸려 죽은 사람의 팔뚝을 구해 저주를 걸었다는 야담. 저주대로 정순붕을 골골 대다가 죽어버렸고 여종도 이 일이 들통나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맹꽁이 서당의 저자 윤승운이 그린 맹꽁이 인물 열전 2권에서도 소개 되었다.

정순붕은 조선시대 도가의 네임드 북창 정렴과 정작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정북창이 은둔생활을 택한 이유는 부친의 변절과 악행으로 인한 회의감, 죄책감이었다는 것이 중론. 심지어 순봉의 넷째 아들 정현은 노비로 변복하고 대윤 일파의 관료들을 미행하여 염탐했다. 이에 북창은 부친을 찾아와 울면서 이 일은 30년이 지나면 반드시 패하며 현이를 멀리해야 한다, 그애는 우리 집안을 망칠 놈이라고 간하지만 순봉은 들은척도 않고 현은 칼을 들고 형 북창을 죽이려 했다고 한다. 아무튼 정순붕이 추하게 얻은 관직과 작위는 선조 11년 때 삭탈된다. 이때가 북창이 부친에게 말한 30년 뒤였다.

그러나 허자의 경우는 양심이 있어서 선비들을 구제해주려고 했고 민제인의 동생 민제영을 당진현감으로 임명하는 데 동의했다가 관작이 삭탈되고 귀양을 떠난다.

이때 정계에 올라와 있던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이언적 계통의 사림파 또한 이에 휘말려 정계에서 쫓겨났다. 이언적은 사실 사화 자체는 피할 수 없다고 보고 류관과 류인숙을 살리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자신만 귀양갔다.

윤임의 일가는 당연히 숙청을 당했지만 자식 중 윤흥신은 나이가 어려서 살아 남았으며, 윤임이 복권된 이후 무신으로 관직 생활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전사했다. 또한 윤임의 아버지인 윤여필은 문정왕후가 "윤여필은 장경왕후의 부친이므로 특별히 방면한다'"라고 하여 석방되었다. 문정왕후의 입장에선 어느 정도의 자비를 베푼 셈이나, 대윤과 사림들의 입장에서도 과연 그랬을까.


4. 진짜는 지금부터 - 정미사화(양재동 벽서 사건)[편집]


4대 사화라고 하지만, 다른 사화들에 비해서는 을사사화의 규모는 매우 작다. 도리어 피바람은 명종 2년(1547) 1월 이임, 나식, 나숙 형제, 권벌 등 윤원로를 탄핵했던 사람들을 사사하거나 유배를 보내고 2월 이중열, 성자택, 김저 등이 윤임과 한패라는 이유로 처형되는 데서 시작했다. 같은해 9월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이홍윤 옥사 사건이 터졌는데, 그 유명한 충청도가 청홍도가 된 사유이다.

이홍윤 옥사는 죽은 사람만 30명이 넘었고 양재역 벽서 사건도 조정의 거물들이 대거 유배되는 등 규모 자체는 엄청났다. 이언적 계통도 을사사화 때는 사실 윤임을 몰아내는 데 울며 겨자먹기로 수행했다가 양재역 사건에서 삭직되었다. 그렇기에 을사사화 자체도 그 후 6년간 '소윤의 잔혹시대'를 상징하는 의미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사건의 여파가 매우 큰 데다, 이를 옥사로 연결할 때 윤원형 일파의 억지가 심하여서 벽서 자체가 조작 아니냐는 의심도 있다. 벽서를 썼다고 의심되는 자를 처벌하려 든 것도 아니고 '이전의 옥사 때 제대로 처벌이 되지 않아서 이런 여론이 나오는 것이니 이 참에 제대로 해야 한다'는 논리 아래 윤임의 잔여 세력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실록의 사관조차 처음 벽서를 발견하고 사건을 확대한 정언각 본인을 조작범으로 의심하기도 한다. 정언각은 이후의 옥사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악명을 쌓았는데, 어찌나 평가가 나빴는지 정언각이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사망할 당시 사람들은 그 말을 '의로운 말'이라고 칭찬했다고. 심지어는 '이 말은 옥사 때 죽은 임형수의 말이었기 때문에 주인의 복수를 한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7]

을사사화의 피해자 중에는 퇴계 이황 일가도 있었다. 이황의 형 이해는 윤임 일파로 몰려서 갑산으로 귀양을 가다가 병사했고, 이황도 홍문관 전한(典翰)에서 파직당했다가 곧 복직했으나 병을 핑계로 낙향하였다.

5. 이후[편집]


이후 선조가 즉위하면서 이준경의 주도로 양재역 벽서 사건과 이홍윤 옥사 등의 피해자들을 신원하였다. 당시 을사사화로 공신이 된 이들의 위훈을 삭제하는 것이 논쟁의 중심으로 떠올랐는데, 이준경은 이 일을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려 했다. 이준경은 위훈삭제의 역풍이라고 할 수 있는 기묘사화를 10대 후반에 직접 목격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스승이 바로 그 조광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이에게 면전에서 디스당하는 통에 논의가 경직되었고, 대간에서 7개월 동안 물고 늘어졌지만 결국 위훈삭제에 실패했다.

을사사화의 위훈삭제는 선조 11년(1578)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가 승하하기 직전에야 결론을 지었다. 인성왕후는 을사위훈 문제를 평생 마음의 부담으로 생각했다. 그나마 을사사화 당시 인성왕후 본인과 그녀의 친가는 문정왕후가 관용을 베풀어서 화를 피했지만, 을사사화 그 자체가 문제였다. 중종의 적자요 인종의 동생이라 당연히 정통 후계자일 수밖에 없는 명종을 즉위시킨 공이 있다고 하면, 누군가는 '정통 후계자' 명종의 즉위를 막았다는 소리이다. 임금의 사망 후에 후계가 불분명하면 후계자를 지명하는 것은 대비가 될 중전이므로 감히 거론할 수는 없어도, 원종공신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의 중전 인성왕후에게도 혐의점이 있다는 소리가 된다.

선조로서도 위훈삭제 문제는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문제였다. 이준경이 지적했듯이, 공신들의 위훈삭제는 자칫 또다른 피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아주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섣불리 이를 건드렸다간 최악의 경우에는 선왕 명종의 정통성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고, 이는 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한 선조 본인의 정통성과도 연결되었다.

인성왕후가 죽기 직전 선조가 위훈삭제가 어렵겠다고 선조가 아뢰자 "감히 쉽게 고치겠습니까, 감히 그럴 수 없지요."하고 부르짖었다. 이후 선조가 건물을 나가자마자 안에서 인성왕후의 통곡소리가 들려 선조가 자리에 주저앉아 "내가 녹이나 받아 먹으며 살았으면 편안히 한 세월 보냈을 텐데 어쩌다 왕이 되어 이렇게 난처한 상황을 면할 수가 없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인성왕후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자 선조가 급히 위훈삭제를 약속했고, 인성왕후는 그제야 편히 눈을 감았다.

선조대에는 이 시기 관직에서 물러났던 사림이 부활해서 척신 세력의 깔끔한 숙청을 주장하는 파벌과 척신 세력과 함께 살아남아 온건한 대응을 주장하는 파벌이 생겨났다. 이는 이조 전랑 문제를 계기로 생겨난 동인과 서인의 기초가 되었다.
[1] 실록에서는 대소윤의 존재를 일설 내지 낭설로 표현한다. 명종 즉위 후 문정왕후 역시 대윤과 소윤을 '설'로 표현한다. 다만 대윤과 소윤이 양재역 벽서 사건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만큼 공식 석상에서만 존재를 부정했을 뿐 대윤 소윤의 대결은 충분히 실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2] 훈구파는 세조 등극에 공헌한 계유정난(1453) 공신들과 그들의 파벌인 구공신파(정난공신파)를 시작으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신공신파,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정국공신파 등이 있다. 신공신파는 남이의 옥사에, 구공신파는 갑자사화에서 결단이 났으며 살아남은 훈구 일부가 정국공신이 되나 그나마도 수명이 다하거나 여러 옥사로 많이 없는 상황이었다.[3] 본래는 풍류를 즐기는 명망 높은 선비였으나 사랑하던 기생 옥매향을 윤임이 뺏어가자 복수를 위해 윤원형의 수족이 되었다고 한다.[4] 본래 인종 때 우의정에 올랐으나 대윤 세력의 탄핵으로 병조판서로 좌천되었다. 특히 좌의정 유관과 깊은 악연이 있었다.[5] 본래는 김안국의 문인으로 백인걸과도 친분이 깊었고 선비들과도 친분이 깊었지만 문정왕후와 소윤 쪽에 붙었다. 그러나 양심이 있어서 지나친 숙청을 반대하고 강경파와 대립하다가 결국 귀양을 떠난다.[6] 육조는 이호예병형공 순이니 굳이 따지면 좌의정과 이조를 낀 대윤이 더 끗발이 높긴 했다.[7] 이 사람의 차남 정신의 아들, 즉 손자가 바로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유명한 정문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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