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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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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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에 세 형제가 내조하여 각각 받은 칭호. 시기 불명. 고려사상 확인됨.
** 백제 문주왕에게 담왕이 받은 칭호로 족보상 기록됨, 후대 도동음률(명칭에 이설 있음)은 삼국사기상 좌평으로 확인됨.





왕호
탐라국왕(眈羅國王)
탐라국주(耽羅國主) 좌평(佐平)
성씨
유리(儒李)

도라(都羅) / 도동음률(徒冬音律)?
출생
미상
사망
7세기경[1]
자녀
아들 고여, 아파기 등
1. 개요
2. 이름
3. 행적




1. 개요[편집]


삼국통일전쟁 시기 탐라국의 군주.


2. 이름[편집]


1년이 못 되는 시간차를 두고 탐라국의 지배자를 중국 사서[2]에서는 유리도라(661년), 한국 사서[3]에서는 도동음률(662년)이라는 이름으로 칭한다. 661년과 662년 사이에 왕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워낙 짧은 간격이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더 높고 실제 연구도 동일인물로 간주하고 두 이름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것이 많다.

이름을 분석해보면, 『당회요』는 '유리도라'에서 유리가 성이고, 도라가 이름이라고 확인해준다. 한편 도동음률은 성과 이름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노태돈 교수가 『삼국통일전쟁사』에서 徒를 제외하고 '동음률'을 인명으로 해석했는데, 그 외에는 대체로 도동음률 네 자를 인명으로 이해했다. 서로 다른 두 인명에 대해, 성씨인 유리에 '음률'이, 이름인 도라에 '도동'이 상응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4]

이두문에서는 徒를 '내', 冬音을 '드름/두름'[5]이라고 읽는다. 이를 참고해서 언어학 유튜버 향문천은 개인 블로그를 통해 도동음률을 유리도라와 동일인물로 보고, 원음을 *naytolom 혹은 *nalitolom으로 추정하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동음률'이 인명(고유명사)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 근거는 『삼국사기』에 주석으로 도동음률을 "一作津."이라고 했으니, 률()을 진()이라고도 한다는 것에서 착안한다. 2018년 게재된 「신라와 탐라의 관계기사 재검토」에서는 이 주석에 주목해 도동음률을 인명이 아니라 "佐平徒ˇ冬音津 來降", 즉 " 탐라국주(=좌평)의 무리가 동음진(冬音津, 강진)[6]에 와서 항복했다."라는 문장으로 해석했다. 이는 고후 삼형제가 신라에 입조할 때 탐진(강진)을 통했다는 『탐라지』, 『고려사』기록과도 통한다.[7]

이 시기는 족보상으로는 34대 처량왕(處良王) (658~683) 시기로 기록되어있다.

3. 행적[편집]


660년 7월, 의자왕이 항복하고 탐라국의 종주국이었던 백제가 멸망했다. 이듬해 661년 5월 유리도라는 왕자 아파기를 일본에 보냈다. 같은 해 8월에는 본인이 직접 당나라에 가 조공했고, 또 그 다음해인 662년 2월에는 탐라국주 본인이 신라에 항복해 속국이 됐다. 유리도라가 나당연합군 앞에 항복의 제스처를 취한 것으로 보이며, 신라에서는 그 다음달인 3월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백제를 평정한 일을 기려 대포(大酺)를 벌였다.

한편 당나라 기록을 참조하면 백제부흥운동에 탐라 사람들이 가담한 흔적이 드러난다. 663년 주류성이 함락되자 왜국 사신과 함께 탐라 사신들이 포로로 잡혔다. 『신당서』 유인궤전에 따르면 665년 당 고종이 한반도 국가의 추장들을 불러모아 회맹을 맺고 봉선의식을 벌일 때 담라의 추장 역시 유인궤를 따라 당나라에 갔다.[8]

일본서기』에 따르면 꾸준히 일본에도 조공하거나 방물을 바쳤다. 봉선의식이 있던 665년에 조공했고, 이듬해 666년에는 왕자 고여(姑如)를 보내 방물을 바쳤으며, 그 다음해 667년에는 좌평 연마(椽磨)가 방물을 바치고 비단 등을 받았다. 조금 뒤인 676년 기록에는 왕자였던 고여가 탐라 군주로 언급된다. 그 사이에 나타나는 왕자 구마기(久麻伎)·구마예(久麻藝), 도라(都羅), 우마(宇麻) 등이 새 군주 고여의 왕자들이라면 660년대 후반에서 670년대 초반 사이에 왕위가 교체됐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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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아들인 고여가 675년 탐라국왕의 신분으로 일본에 방문한 점을 볼 때, 675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2] 당회요, 책부원구[3] 삼국사기[4] 박남수, 「탐라국의 동아시아 교섭과 신라」, 『탐라문화』 58권,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2018, 39쪽.[5] 본래 뜻은 물고기를 20마리씩 한 묶음으로 세는 단위를 일컫지만, 調(토리, 트름)을 훈독할 때도 사용되었다.[6] 강진군은 삼국시대에 동음현(冬音縣)으로 불렸다.[7] 김희만, 「신라와 탐라의 관계기사 재검토 - 문무왕 2년 조와 유인궤전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탐구』 28,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8, 289~291쪽.[8] 『삼국사기』에는 국사(國使)가 갔다고 하며, 『구당서』에서 탐라는 언급조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