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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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양녕대군의 부인
수성부부인 | 隨城府夫人


파일:양녕대군묘.jpg

양녕대군묘[1] 전경
출생
1410년
사망
1456년 2월 28일 (향년 46세)
능묘
양녕대군묘(讓寧大君墓)[2]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407년 ~ 1418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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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광산 김씨
부모
부친 광산군 김한로
(光山君 金漢老, 1358 ~ ?)
모친 선경택주 정선 전씨
(善慶宅主 旌善 全氏, ? ~ 1411)
배우자
양녕대군
자녀
슬하 3남 5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순성군(順成君, 1414 ~ 1462)
차남 - 함양군(咸陽君)
3남 - 서산군(瑞山君, 1420 ~ ?)
장녀 - 전의현주(全義縣主, 1409 ~ ?)
차녀 - 현주(縣主)[1]
3녀 - 영평현주(永平縣主)
4녀 - 현주(縣主)[2]

봉작
숙빈(淑嬪)
→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수성부부인(隨城府夫人)

1. 개요
2. 생애
2.1. 세자빈 시절
2.2. 폐세자빈이 된 이후
2.3.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광산 김씨(光山 金氏) 김한로(金漢老)와 부인 정선 전씨의 딸이며 양녕대군의 아내로 조선의 제4대 왕 세종과 효령대군에게는 형수이다.

왕세자 이제와 혼인하면서 숙빈에 책봉되기도 했지만, 남편이 폐세자되자 그녀도 폐빈되어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다. 세종 14년에 국대부인이 부부인으로 개칭되면서 수성부부인(隨城府夫人)이 되었다.


2. 생애[편집]



2.1. 세자빈 시절[편집]


남편이 공부를 안 하고 사냥을 하고 술을 마시거나 여자, 그것도 기생들을 후궁으로 들이는데, 전 중추부사 곽선의 첩, 어리를 납치해 궐로 데려오는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부왕과 갈등을 일으켰다.

태종이 양녕대군이 저지른 사고를 마무리 짓고자 그와 어울리던 패거리를 벌주고, 그 중 몇명은 파직시키자, 아버지의 이러한 조치에 대한 항의로 양녕이 곡기를 끊은 적이 있었다. 이를 보다못한 어머니 원경왕후도 양녕대군에게 "너는 어리지도 않은데 지금 어째서 부왕(父王)께 이와 같이 노여움을 끼치느냐? 이제부터는 조심하여 효도를 드리고 또 밥을 들도록 하라"[3]며 잔소리를 했다. 심지어는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이 지신사(知申事) 조말생을 은밀히 불러 "세자가 공부를 않고 놀기만 좋아하고, 황음(荒淫)[4]하는 것이 심하니 어쩌면 좋으냐"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한탄을 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이다.[5]기사

그럼에도 양녕대군은 어리라는 여인과 나누던 밀회[6]가 발각되어 태종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게된다. 그걸로도 모자라 김씨의 친정아버지이자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가 태종으로부터 문책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를 김한로 본인의 집에 숨겨두고[7] 그녀가 양녕대군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까지 드러나 태종은 더욱 대노하였다. 이에 태종이 질책하자 양녕대군은 "아바마마도 첩이 많으면서, 왜 내가 축첩하는 건 안 되는 것입니까?"라며 반박하는 내용의 수서(手書)를 올려 태종을 당황케 한 일도 있다

그렇게 양녕대군은 사사건건 자기 아버지에게 계속 대들고 반항했다. 당시 세자빈이었던 김씨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기록된 것이 없지만, 아마도 시부모님에게 고개도 못 들 정도로 죄송하고 민망했을 것이다.

게다가 남편이나 한두명도 아닌 첩실들이나 꼴도 보기 싫었을 테지만, 남편을 말리지 못한 대가로 김씨는 폐세자빈이 되고 아버지 김한로는 양녕대군의 장인이란 이유로 유배를 가게된다.


2.2. 폐세자빈이 된 이후[편집]


이후 시동생아랫동서가 세자ㆍ세자빈이 되는데, 외척을 알레르기만큼이나 싫어하던 태종은 심온을 고문하다가 처형하고 소헌왕후의 어머니와 자매들은 노비가 된다.

어떻게 보면 김씨를 포함한 아버지 김한로의 입장에서는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어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양녕대군은 죽을 때까지 비행을 저질렀으며, 태종과 원경왕후의 승하와 세종의 즉위 후부터는 그 강도가 더 심해졌다. 안 그래도 양녕대군은 과거 왕세자였고 현 국왕의 친형이라는 이유로 지속적인 관찰과 감시의 대상이 되었는데도, 자신의 아들의 첩[8]까지 범하는 인간 이하의 행위까지 저질렀고, 이에 충격받은 아들이 목을 매 자결할 정도로 계속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참고로 양녕대군은 세자 시절에 큰아버지의 첩[9]을 범한 적도 있으니 이 정도면 호색한의 수준을 넘어선 패륜의 극치였다.


2.3. 대중매체[편집]


용의 눈물에서는 안연홍이 배역을 맡았다. 작중 엄청난 대인배로 나오는데, 바람 잘날 없는 왕실의 온갖 사건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10], 양녕대군은 날이 갈수록 비행을 저지르는데 이를 말리지도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묵묵히 참아낸다. 심지어 양녕대군이 바깥에서 봉지련이라는 기생과 혼례식까지 올리고 궁궐 안으로 불러들이기까지 하는데, 전혀 투기하지 않고 오히려 봉지련을 직접 맞아들이는 모습을 보면 정말 보살이 따로 없다. 그래도 결국 사람인지라 비슷한 처지인 시어머니 원경왕후와 신세 한탄을 자주 하며, 함께 굿까지 벌이며 위안을 삼기도 한다. 나중에 폐세자가 되면서 또 다른 첩실로 집안에 들어온 어리도 예우를 갖춰 잘 대해주는등 그야말로 생불 그 자체.

대왕 세종에서는 유서진이 연기했다.

태종 이방원에서는 이송이가 연기했다. 31화에서 양녕의 퇴장과 함께 첫 등장해서 등장 자체는 상당히 늦은 편. 슬하엔 1남 1녀를 두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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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과 합장됨.[2]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산65-42[3] 현대식: 네가 어린애도 아니고 왜 자꾸 아버지 화나게 해? 나잇값 좀 하고 가서 이나 먹어![4]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5] 태종실록 35권, 18년(1418 무술/ 영락 16년) 3월 6일 병진.[6] 원래 다른 사람이었던 것을 양녕이 빼앗았다.[7] 그러니까 양녕대군이 자기 내연녀를 본처의 친정에다 숨겨놨다는 얘기다. 축첩이 당연시되던 당시 기준으로도, 이는 도를 넘은 경악스러운 행동이었다.[8] 양녕대군의 적3남 서산군 이혜의 첩.[9] 기생 출신의 초궁장[10] 세자빈으로 간택되자마자 갑자기 명나라 황실과의 국혼 파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곧바로 폐세자빈이 될 위기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