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크 하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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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제11·13대 총리
셰이크 하시나 와제드
শেখ হাসিনা ওয়াজেদ | Sheikh Hasina Wazed


파일:Sheikh Hasina  1.jpg

출생
1947년 9월 28일 (76세)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자치령 동벵골 다카 주 고팔간지 (현 퉁기파라)
국적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
display: none; display: 방글라데시"
행정구
]]

학력
아짐푸르 여자고등학교[1] (졸업) (-1965년)
다카 대학교 (B.A) (-1973년)
가족
父: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2]
母: 셰이크 파질라투네사 무집
배우자: M A 와제드 미아 (1968년 결혼)
슬하: 1남 1녀
약력
아와미 연맹 지도자 (1981년 – )
방글라데시 제11·13대 총리
정당

[[아와미 연맹|
아와미 연맹
]]
(1980년-)
지역구
고팔간지 3구[3]
의원 선수
8
재임기간
1996년 6월 23일2001년 7월 15일
2009년 1월 6일현재
직업
정치인
종교
이슬람교
서명
파일:셰이크 하시나 서명.svg
SNS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4]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5]

1. 개요
2. 생애
3. 정치 활동
4. 총리 재임
4.1. 1기 (1996년 ~ 2001년)
4.2. 2~3기 (2009년 ~ 현재)
5. 평가
5.1. 긍정적 평가
5.1.1. 긍정적 평가/어록
5.2. 부정적 평가
6. 가족 관계
7. 여담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방글라데시정치인. 8선 의회 의원이며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이후 2009년 이래 다시 총리로 집권하고 있다. 2020년대 기준 가장 최장수하고 있는 여성 정부 수반이기도 하다.

শেখ(Sheikh)는 아랍어 "شيخ"에서 유래한 어휘로서 아랍어로는 방언에 따라 '시흐' , '셰흐', '셰이흐', '샤이흐' 등으로 발음되지만 벵골어발음은 '셰크'이다. 하지만 '셰이크'라는 발음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문서의 제목도 '셰이크 하시나'가 되었다.


2. 생애[편집]


1947년 9월 28일 수도 다카 인근의 툰기파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대 및 4대 대통령이자 2대 총리였던 방글라데시의 국부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고, 어머니는 영부인인 셰이크 파질라툰네사 무집이었다.

출생 당시 방글라데시는 동파키스탄이라고 하여 파키스탄의 일부였으나, 언어, 민족, 문화 등에서 오늘날의 파키스탄에 해당하는 서파키스탄과 차이가 커서 심하게 대립했다. 서파키스탄에 있던 중앙정부는 동파키스탄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탄압했는데, 아버지 무지부르는 이러한 서파키스탄 정권의 탄압에 분노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하시나의 젊은 시절은 고통 그 자체였다. 애초에 파키스탄 자체가 예전부터 상황이 막장이었고 그러한 파키스탄의 일부였던 방글라데시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서파키스탄에게는 인구가 너무나 많았던 동파키스탄이 상당한 골치거리였는데, 1970년 총선에서 인구가 많아 유리했던 동파키스탄의 아와미 연맹이 승리했다. 그러자 중앙정부는 즉각 선거 무효와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독립을 위한 긴 운동이 시작된다. 하시나는 이 때 할머니댁으로 보내졌고 학교를 다닐 수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다카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학생운동에 동참했다.

1971년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이룩하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버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대통령에 취임하였지만 반대파들과 반정부세력들의 내란 및 난동이 끝이 없었고, 이에 무지부르는 대통령중심제와 민주집중제에 근거하여 헌법을 개정했다. 하지만 당시 페이비언 협회의 영향을 받은 연성사회주의자로 평가받던 무지부르의 헌법개정은 정적들에게는 마치 공산주의처럼 보일 수 있는 사회주의 체제의 급진적 도입으로 받아들여졌고, 이슬람극단주의 세력과 군부 중심의 친 파키스탄 세력의 반발을 사 이들이 주도한 폭동이 계속되었으며 1975년 8월 15일에는 기어이 쿠데타가 일어나서 결국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아내인 파질라툰네사와 아들들과 함께 집안에서 살해되었다. 딸인 하시나와 여동생은 당시 서독(후에는 인도)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그녀는 28세에 가족 대부분을 정치 테러로 잃는 비극을 겪었고 이후의 인생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3. 정치 활동[편집]


하시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이어 정치를 하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1981년 방글라데시로 귀국하였다. 귀국하자마자 아와미 연맹의 총재로 선출되었으며 반정부 투쟁을 기획하였다.

그러나 바로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군부 세력의 탄압으로 사실상 가택 연금 되었다. 더욱이 당시는 폭압적인 군사정권 시절이라 독재정권은 무지부르의 세력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했기 때문에, 무지부르의 딸인 하시나 또한 탄압의 대상이었다. 아와미 연맹은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군부 투쟁에 나섰으며 군부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암살당하고 권력에서 밀린 구 군부 세력의 국민당도 동참하였다.

1986년 대통령 후사인 모하마드 에르샤드는 일부 야당에 대한 해금령을 내리고 아와미 연맹은 곧바로 동년의 총선에 참가한다. 당시 총선은 말이 많았는데, 애초부터 계엄령 하에 치러진 총선이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은 뻔할 뻔자이고, 구 군부 세력의 국민당은 이러한 총선에 아예 보이콧을 선언함으로서 매우 불안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선전하기는 했으나, 에르샤드 정권의 지속적인 탄압과 견제를 못 이기고 이 따위 국회의원 안 해!라며, 1년 만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한다. 의회는 곧바로 해산되었다. 그 후 1991년 제대로 된 총선이 치러지기 전까지는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에르샤드 정권을 향한 민심이 폭발하여, 1990년부터 전국적으로 에르샤드를 축출하기 위한 시위가 벌어졌다.[6] 결국 에르샤드는 연말에 사임하였고 이듬해 총선은 성공적으로 치러져서, 칼레다 지아가 이끄는 국민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아와미 연맹은 제1야당이 된다. 그러나 칼레다 지아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쿠데타 세력에 대한 면죄부 등으로 둘은 서로를 더욱 강경하게 적대하기에 이르렀고, 1994년 마구라 선거구 의원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보궐선거에 도전해 보지만 부정으로 인해 국민당 후보에게 패했다.

하지만 국민당 정권은 기대가 높아진 민심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이에 아와미 연맹은 칼레다 지아 총리의 사퇴와 임시정부 구성을 요구했으나, 정부는 이를 쿨하게 씹었다. 그러자 아와미 연맹은 사상 유례 없는 대투쟁을 벌였고, 결국 칼레다 지아는 무하마드 하비부르 라흐만을 필두로 한 임시정부를 구성한 후 사임한다.[7] 그리고 1996년 2월 15일 치러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은 압승했으며, 이로서 하시나는 총리로 오르게 된다.


4. 총리 재임[편집]



4.1. 1기 (1996년 ~ 2001년)[편집]


총리에 오른 하시나는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고자,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신의 아버지를 사형시킨 범죄자들을 보호하는 일명 '보상법'을 곧바로 폐지한다. 인도갠지스 강 물을 30년 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협약에도 서명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으며, 관영 중심의 텔레콤 사업을 민영으로 전환하는 등 개혁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외국계 회사들이 100% 자회사를 운영하는 것 또한 허락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적극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은 하락하였고, 결국 2001년 총선에서 국민당에게 정권을 내주고 만다. 칼레다 지아가 여전히 국민당 총재였기에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4.2. 2~3기 (2009년 ~ 현재)[편집]


하시나의 아와미 연맹에게서 정권을 탈취했지만 칼레다 지아의 2기 또한 실책으로 가득했으며, 2004년에는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인 테러 사건[8]이 발생하는 등 치안이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이 때를 노린 아와미 연맹은 2005년 다카 시장 선거에서 승리하며 다시금 지지를 얻기 시작했고, 칼레다 지아는 2006년 말 사임한다. 이후 국민당은 총리를 선출하지 못한 채 권한대행들만 선출하는 등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고, 시위는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이 와중에 40명이 사망하면서 국민당 정권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커진다.

2007년 셰이크 하시나는 국민당 정권의 탄압으로 강요죄 등의 누명을 씌워 구속되었으나, 국민의 반발이 극심하여 국민당 정권은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한 상황까지 이어진다. 2008년 국민당은 건강 악화 등을 이유로 셰이크 하시나를 석방했으나 이미 민심은 국민당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2008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이 재집권에 성공한다.

이후 국민당은 제1야당 자리도 로샨 에르샤드자티야 당에 뺏기게 된다. 자티야당은 원래 분열된 군부 출신 대통령으로 지아우르 라흐만을 죽이고 신군부격으로 80년대 권좌에 오른 후세인 무하마드 에르샤드가 이끌던 당이었지만, 에르샤드가 실각하고 체포당하는 등[9] 고생하면서 명맥만 유지하다가 아와미 연맹이 주도하는 대연정에 참여하여 셰이크 하시나에 협력하게 된다.


5. 평가[편집]



5.1. 긍정적 평가[편집]


셰이크 하시나 총리는 군부 독재자에게 아버지가 살해당한 인물로 단순히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많은 고초를 겪으며 민주화 운동을 한 민주투사 출신으로 방글라데시 국내에서는 인기가 상당하다.

아와미 연맹 자체가 세속주의를 표방하다보니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이 있는 구 군부 세력의 테러와 IS의 준동을 척결하는데도 앞장서고 있다. 학교에서도 세속주의식 교육을 학생들에게 진행시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의 불만을 산다고 한다.

경제도 2010년대 기준 연 6~8% 고성장 중이며, 덕분에 방글라데시는 2016년 파키스탄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아졌다. 심지어 2019년엔 인도조차 제쳤다. 참고로 그녀가 재집권한 2009년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 인도 모두에 1인당 GDP가 뒤지는 나라였다. 하시나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사회적 경제모델을 따르고, 이슬람권에서도 가장 높은 여성의 경제참여율을 이끌며 봉제[10], 선박 해체[11] 등 실업률에 도움이 되는 노동집약적 산업을 발전시켰다. 또 외교적으로도 최대한 주변국들과 잘 지내는 노선을 펼쳐 친서방, 친인도, 친중 등을 통해 주변 환경 문제를 최대한 낮춰 수출에 집중하는 등 경제적 실익을 얻고 있고, 이를 통해 느리지만 착실히 제조업 비율을 늘려 제법 안정적인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환경 보호 정책에도 앞장서 하시나 총리는 세계 최초로 약 3억 달러의 자체 기후 변화 신탁 기금을 설립했으며 연간 예산의 6~7%를 기후변화 적응에 배정하고 있다. 참고로 방글라데시는 기후변화에 가장 취약한 나라 중 하나다. 이런 환경 정책은 다른 정치 지도자들에게 모범을 보였다고 평가받는다.#

2017년, 거의 백만명의 로힝야 난민들이 미얀마 군부의 학살 사태를 피해 방글라데시에 입국하자, 하시나는 그들에게 피난처와 지원을 제공해 글로벌 호응을 받았다.


5.1.1. 긍정적 평가/어록[편집]


'방글라데시는 봉고본두의 비전과 셰이크 하시나 총리의 강력한 지도 하에 성장하고 있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봉고본두는 방글라데시를 건국했고 그의 딸 셰이크 하시나는 방글라데시를 구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셰이크 하시나의 강력한 리더십은 방글라데시를 진보와 번영의 길로 이끌었다.'

프라나브 무케르지, 인도 대통령


'사회경제적 발전과 동시에 여성에게 더 많은 기회와 보호를 보장하는 셰이크 하시나의 리더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전 세계가 따라야 할 가장 좋은 예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셰이크 하시나는 본국에서 새천년개발목표(MDG)를 모범적으로 달성하고 전 세계가 따라야 할 가장 훌륭한 리더십과 비전을 보여주었다.'

짐 볼저 경, 뉴질랜드 총리 겸 특사


'셰이크 하시나는 여성의 인권 강화, 군사독재에 대한 투쟁과 테러 근절, 민주적 제도 강화를 위한 모범적인 헌신을 보여주었다.'

앤 공주


'셰이크 하시나는 진보적 글로벌 리더십의 상징이며 아동권리, 특히 여자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그녀의 정부의 조치는 칭찬할 만 하다.'

앤서니 레이크, 유니세프 전무이사


'셰이크 하시나가 이끄는 방글라데시는 국제적 차원에서 기후변화와 재난위험 감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핵심 주체로 부상할 잠재력이 충분하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셰이크 하시나는 용기 있는 여성으로서 전 세계 여성의 권리를 위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녀의 리더십으로 방글라데시는 선진적 교육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


'셰이크 하시나는 남아시아 여성인권의 기념비적 존재다.'

마리-클로드 비보, 캐나다 국제개발부 장관


'방글라데시는 국부 봉고본두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꿈꿨던 '쇼나르 방글라(황금빛 벵갈)'를 충실히 건설하고 있다. 셰이크 하시나가 세계 평화와 안보에 기여한 점은 칭찬받을 만하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방글라데시는 평화 유지의 상징과도 같다.'

아눌 카레, 유엔 현장지원국 사무차장



5.2. 부정적 평가[편집]


파일:파일:방글라데시 시위 진압 만평.png
방글라데시 시위 진압 만평.

본인이 민주 운동가 출신으로 집권하였으나, 집권 이후 본인도 장기적으로 자리를 유지하며 권위주의적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일각에선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와 비견하기도 하는데, 1990년대에 1차 집권기를 가졌다가 실각 뒤 2차 집권기를 장기적으로 가져가며 흑화했다는 것이 오르반과 유사하다.[12]

다만 이에 대해선 반론도 있는게, 현재 방글라데시에서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 등의 야당이 완전히 초토화된 것도 아니고, 방글라데시의 2022년 민주주의 지수는 5.99점으로 결함있는 민주주의 바로 밑에 턱걸이된 '혼합된 체제' 최상위권인데 이는 5.42점으로 역시 '혼합된 체제' 평가를 받은 우크라이나 등보다 높은 점수이다. 즉, 민주주의 지표가 하락하는 경향은 있으나 절대치로 보면 아직은 권위주의 정부라고 재단하긴 이르다는 것. 실제로 셰이크 하시나와 오르반 빅토르 모두 독재자라고 여기는 의견도 있으나, 이들 모두 독재자라 부르기에는 상당히 온건하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셰이크 하시나가 자신의 가족을 죽인 구 군부 독재정권 및 친파키스탄 계열 세력에 매우 큰 반감을 가지고 있는건 맞아보이는데[13], 반정부 성향 시위를 무력 진압하고 이 내용을 SNS에 올렸다는 이유로 체포하여 강압조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야당 지도부들도 각종 형사사건에 휘말려 체포되는 경우가 잦아지다보니 현 정부가 사법적 수단을 활용해 정부를 비판하는 유력 야권 인사들의 세력화를 억누르려 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한다. 묘하게도 하시나의 가장 큰 정적이던 칼레다 지아 역시 2018년 횡령 혐의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14]

2018년에는 디지털보안법이란걸 만들었는데, 일단 공식적 목표는 인종차별, 종파주의, 극단론, 테러 선전, 소수 민족 증오, 음란물 등의 확산 방지이긴 하나, 현실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도 남용되어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실제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하는 2022년 방글라데시의 언론자유지수는 180개 국가 중 162위로 그래도 명색이 민주국가임을 내세우는 나라치곤 꽤나 심각한 수준이긴 하다.

2023년, UN 인권 최고대표 볼커 튀르크가 하시나 정부에게 디지털보안법 적용을 중단하고 법 조항을 포괄적으로 개혁할 것을 정부에 전달했다.# 이에 관해 아니술 후크 법무장관은 UN이 보낸 기술 의견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면서, 필요하다면 개정이 이뤄질 것이지만 디지털보안법이 필수적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후크 장관은 디지털보안법이 다소 오·남용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정부의 이미지를 더럽히기 위해 어린이에게 돈을 주고 인용문을 조작하는 사건 등에 대해서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뜻을 밝혔다.

확실히 방글라데시내 정치 갈등이 꽤나 심하긴 한 모양인데, TheTopTens에서 선정한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순위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담 후세인(9위)은 물론 이디 아민(8위), 김정일(7위), 폴 포트(5위), 마오쩌둥(4위), 이오시프 스탈린(3위) 같은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지게 되는 독재자들을 넘어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2위)까지 제치고 1위를 차지하는 굴욕까지 겪었다.(...)# 아마도 하시나 안티들이 뭔가 몰려서 나온 결과인듯 한데 아무리 그래도 하시나를 이들에 비하는건 그녀 입장에서는 억울할법하다.


6. 가족 관계[편집]


1968년 핵과학자인 M. A. 와제드 미아와 결혼하여 슬하 1남 1녀를 두고 있다. 와제드가 2009년 사망함으로서 하시나는 미망인이 되었다. 자식들은 미국캐나다에서 살고 있다. 이 외에도, 영국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인 튤립 시디크(Tulip Siddiq)를 조카로 두고 있다. 하시나 총리가 시디크 의원의 이모이다.

아버지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독립투사이자 방글라데시의 대통령이었지만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자택에서 살해당했으며 사후 2012년 권종에서 방글라데시 타카의 모든 권종의 모델이 되었다.


7. 여담[편집]


전 총리인 칼레다 지아와는 선대로부터 이어져오는 거의 원수지간으로 아치 에너미 관계 수준이다.# 90년대 이후 2020년대까지 방글라데시 정치는 이 두 여인이 싸우며 주도했는데[15], 그러다보니 오죽하면 이들이 집권시 서로 감옥 보낼 생각만 한다는 농반진반 소리까지 나올 정도.

2020년대 초 기준 정치 경력 전반에 걸쳐 총 19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2004년 수류탄 공격 당시엔 후유증이 생겨 지금도 청각 장애를 앓고 있는 모양. 그 와중에 다 살아남은 것도 기적적인 일이긴 하다.

2008년 방글라데시에 개교한 아시아여성대학에 후원도 하는 모양.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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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zimpur Girls High School.[2] 현행 방글라데시 타카 권종 전권의 모델이다.[3] 다카 주 고팔간지 구 위치.[4] 개인 계정[5] 방글라데시 총리 공식 계정[6] 재미있는건 에르샤드도 칼레다 지아의 남편인 라흐만을 살해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인물이라, 칼레다 지아 역시 에르샤드 정권에선 탄압을 받았고 덕분에 지아가 민주화 인사 비슷한 포지션까지 점하게 된다. 당연히 하시나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7] 이후에도 선거 치르기 전 임시정부 구성은 방글라데시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로, 서로 집권만 했다하면 여당이 부정선거하니어쩌니 음모론과 반발이 심해 서로를 믿질 못하다보니 그럼 정부는 중립적인 인사들에게 맡겨놓고 진짜 선거 제대로 치러보자는 목적도 있다. 이게 가능했던건 외국에서 그렇게 서로 부정선거 타령만 하고 싸우기만 할거면 해외 원조 중단한다고 일종의 협박과 회유도 했기 때문.[8] 2004년 8월 17일 오전 수도 다카를 비롯한 전국 456개 지역에서 동시에 폭탄이 터졌다.[9] 칼레다 지아 입장에선 에르샤드가 남편을 죽이고 자신을 핍박한 원수다.(...) 개판[10] 특히 여성들이 많이 진출한 분야로, 숙련도가 오르면서 생산성도 높아지고(실제 21세기 들어 방글라데시는 세계의 의류공장 소릴 듣기도 한다) 또 여성이 집안의 경제권을 가지니 여성 권리도 동시에 오르는 등 여러 부가적 효과도 있다고 한다.[11] 노후된 선박을 해체해야 되는데, 선박의 크기상 아직 자동화가 안되다보니 결국 많은 노동력이 달려들어야 된다.[12] 다만, 오르반 빅토르의 경우 본인이 적대하던 공산주의 세력의 향수를 이용하여 집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하시나는 구 군부 독재정권 세력을 강경하게 탄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오르반이 극우라면 하시나는 중도좌파 성향이다.[13] 기사에 따라선 단순한 정적 수준을 넘어 용서할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 하시나가 집권 이후 한 일 중 하나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체포하여 사형시킨 일이었다.#[14] 근데 하시나 역시 2000년대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 정권에 의해 구속된 적이 있었으니, 실체를 떠나 복수의 되물림 성격도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워보인다.[15] 이슬람 주류 사회에서 여성 정치가가 이렇게 활약하는 곳은 아직까진 방글라데시가 거의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