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조 사네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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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
三条実美[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62px-Sanetomi_Sanjo_formal.jpg

출생
1837년 3월 14일[2]
야마시로국 교토 (現 교토부 교토시)
사망
1891년 2월 18일 (향년 53세)
도쿄부 도쿄시 아자부구
(現 도쿄도 미나토구)
재임기간
태정대신[3]
1871년 9월 13일 ~ 1885년 12월 22일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4]
1889년 10월 25일 ~ 1889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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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명
요시마로(福麿)
아호
리도(梨堂)
가명
나시키 세이사이(梨木誠斉)
부모
부 산조 사네쓰무
모 산조 미스
아내
산조 하루코
작위
공작
정당

약력
우대신
제102대 태정대신
초대 내대신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
귀족원 의원
산조 가문 제31대 당주


1. 개요
2. 출생 및 성장
4. 메이지 유신 이후
5. 일화
6. 참고문헌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이와쿠라 도모미와 함께 메이지 유신기를 대표하는 공가 출신 정치인이다. 당시 유력 정치인들 중 가장 높은 가문 출신으로 메이지 초기 정부의 최고위직인 태정대신을 역임하였고, 이 때 이와쿠라가 2인자의 자리인 우대신에 있어서, 둘을 합쳐 조암양공(条巌両公)라고도 불렸다. 이름 때문에 사네토미는 주로 높임말로서 조공(条公), 이와쿠라는 암공(岩公, 巌公)라고 불렸던 것에서 유래. 훗날 내대신으로서 1889년 10월 25일~1889년 12월 24일에 일본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을 지냈다. 이를 '산조 잠정 내각'이라고 부른다. 구로다 기요타카 총리가 사표를 내자 메이지 덴노는 구로다 총리의 사표만 수리하고 나머지 각료들은 대부분 유임시키면서 산조에게 임시로 내각을 맡겼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1891년 55세로 사망하는 당일(사망 전), 정1위에 임명된다. 생전에 정1위로 임명된 일본 역사상 7번째이자 마지막 인물.

생가인 산조 가 저택은 구게마치에 있었으며, 이는 현재 교토교엔 부지 안, 교토 선동어소와 교토 영빈관의 사이에 있었다. 산조 가 저택 자리의 동쪽에 해당하는 곳에는 현재 사네쓰무와 사네토미를 제신으로 하는 나시노키 신사가 서 있다.

무덤은 도쿄 고코쿠지역 바로 앞의 고코쿠지(護国寺). 오쿠마 시게노부, 야마가타 아리토모, 도이하라 겐지, 하토야마 구니오 등도 같은 절에 묻혔다.


2. 출생 및 성장[편집]


산조 사네토미는 덴포(天保) 8년(1837) 2월 8일[5], 청화가[6] 산조 가에서 태어난다. 아명은 요시마로(福麿)[7]. 아버지는 사네쓰무(実万, 1802~1859), 어머니는 10대 도사 번주 야마우치 도요카즈(山内豊策, 1773~1825)의 딸 미스(眉寿, 이후 紀子. 1803~1872). 사네쓰무의 4남으로 구게마치에 있던 산조 가 저택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사네쓰무의 자식(=사네토미의 형제)으로는 만 1세를 넘기자마자 일찍 죽은 아들(公凞, 1825~1826), 긴무쓰(公睦, 1828~1854. 후술), 사네토미, 사네후미(実文, 1845~1910)[8]과 딸로 명가(名家)[9] 가라스마루 미쓰마사(烏丸光政, 1812~1863)의 장녀 마사(正, 1833~1868)[10], 섭관가 이치조 다다카(一条忠香, 1812~1863)[11]의 양녀로 가는 미네(峯, 1837~1895)가 있다. 마사는 야마우치 요도(山内容堂, 1827~1872)[12]에게, 미네는 구마모토 번 11대 번주 호소카와 요시쿠니(細川韶邦, 1835~1876)에게 시집간다. 가족관계를 서술하는 김에 미리 언급해 두자면, 사실상의 장남 긴무쓰[13]의 부인 히사(恆, ?~1913)는 도요카즈의 아들인 도요아키라(豊著, 1802~1859)의 친딸[14]이며 이후에 도요아키라의 큰형[15]의 양자인 12대 번주 도요스케(豊資, 1794~1872)[16]의 양자로 들어간다. 엄청나게 복잡하지만, 관계로만 따지면(도요오키를 도요오키의 아들로 쳤을 때) 긴무쓰에게 히사는 종질(촌수로는 5촌인 조카)에 해당한다.

산조 가의 가록은 469여 석[17]. 산조 가는 후지와라 북가 간인류(閑院流)의 가문으로, 사이온지 긴모치로 유명한 사이온지 가, 도쿠다이지(徳大寺) 가[18]와 같은 간인류다. 분가/지류로서는 대신가인 오오기마치 산조(正親町三条) 가[19], 산조니시(三条西) 가, 우림가인 아네가코지(姉小路) 가[20], 시게노이(滋野井) 가 등이 있다. 오오기마치 산조 가나 산조니시 가와 구별하기 위해 사네토미의 산조 가를 덴포린(転法輪) 산조 가라고도 한다. 아버지 사네쓰무(1802~1859) 역시 당시의 조정이나 정계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다.

태어나자마자 교토 근교(洛北新田村)의 농민 구스노키 로쿠자에몬(楠六左衛門)의 집에 맡겨지나[21] 덴포 12년, 5살이 되자 원래의 산조 가 저택으로 돌아온다.

사네토미는 원래 사네쓰무의 4남[22]으로, 산조 가 서류(庶流)인 하나조노(花薗, 우림가) 가의 대를 이을 양자로 갈 예정이어서[23] 원래대로라면 집을 물려받기는 커녕, 청화가에서 우림가로 격이 한참 떨어질 뻔 했다. 그러나 사네토미의 형들인 사네쓰무의 장남과 3남이 일찍 죽고, 그나마 오래 살았던 차남 긴무쓰(公陸)도 병약했다. 긴무쓰가 죽기 두어 달 전에 긴무쓰의 아들 기미아야(公恭)[24]가 태어나지만, 산조 가의 가신이었던 국학자 도미타 오리베(富田織部)가 사네쓰무에게 기미아야는 적자가 아니라 긴무쓰의 첩이 낳은 아이라는 이유로 '쓸 수 없는 분(不用之御方)'이라며, 사네토미를 긴무쓰의 정실에게 양자로 넣어서 대를 잇게 해야 한다고 진언하곤 했다. 결국 긴무쓰는 1854년 2월에 병사하고 사네토미는 1854년 4월에 산조 가의 당주가 된다.[25]

위의 에피소드들에서 보듯, 부친 사네쓰무는 몇몇 학자를 가신으로 거느릴 만큼 수많은 학자들과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고, 그 자신도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이는 산조 가의 가직 중 하나가 유직고실(有職故実 : 고래의 의식, 복장, 관직, 풍속, 제도 등을 고증하는 것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직고실은 단순히 제도나 의례 등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 담겨있는 의미나 그 변천의 역사까지 다 알아야 했기에, 유교 경전들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에 정통해서 헤이안 시대부터 내려오는 옛 공가들의 일기들까지도 자세히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이 유직고실을 가직으로 하는 공가 가문은 산조 가 외에도 많지만, 사네쓰무는 단순히 가직이기 때문에 잘 아는 것을 넘어 본인 자체의 학식이 이미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26]

아버지인 사네쓰무가 우선 이러한 사람이었기에, 사네쓰무는 당시 일류 학자들을 초빙하여 사네토미의 교육에 힘을 쏟는다. 한학을 뒤에서 언급할 이케다 다이가쿠(池田大学)나 앞서 언급한 도미타 오리베 등에게, 국학을 다니모리 다네마쓰(谷森種松) 등에게, 와카를 아스카이 마사노리(飛鳥井雅典, 우림가 공가) 등에게, 심지어는 서도나 아악, 회화에 궁마(弓馬)까지 배우게 했다고 한다. 특히 사네토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도미타 오리베이다. 미국과의 통상조약이 진행되는 와중, 막부를 비판하고 '황국'을 바로 세우는 대변혁이 필요하다는 사상을 사네토미는 사네쓰무와 도미타에게 흡수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사네쓰무는 공가 집단 안에서도 크게 신임받는 실력자였다. 막부와 조정 사이의 의사소통을 담당하는 직역이자 공가의 극히 일부만 참가하는 조정 회의(朝議)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무가전주(武家伝奏)의 직책을 담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막부와의 연관성도 컸다. 이러한 정치적 입지는 그의 능력과 인맥, 그리고 학식과 사상에 의한 것이었다. 고카쿠 천황(재위 1780~1817)이나 닌코 천황(재위 1817~1846)은 그 자신이 조정 부흥 및 막부에 대한 대결 의식과 강한 정치 의식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조정 내부에서 공가들을 모아 유직고실, 유학 경전, 역사(주로 중국사나 일본사. 때로는 정관정요같은 책을 읽기도)에 관한 회독(會讀)[27]을 하기도 했고, 사네쓰무는 그 회독의 중요 멤버 중 하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사네쓰무는 조정 내의 인맥을 쌓고 신임을 얻으며, 동시에 다같이 학문을 배우면서 조정 부흥, 막부 비판적인 사상을 쌓아 나갔다. 막부에 대해서 대놓고 비판하지는 않으면서, 동시에 조정을 위한 발언을 막부에 전달하고 그 과정을 절충할 수 있는 사네쓰무라는 존재는 조정에 있어서도 막부에 있어서도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28]. 사네쓰무의 사상은 주로 (천황에 대한) '충효', 조정의 부흥, 그리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 있었다[29]. 이러한 사네쓰무의 정치적 자산은 인맥이든 사상이든 평가든 성격이든, 상당수가 사네토미에게 계승되게 된다.

이윽고 안세이 대옥으로 사네쓰무는 실각하게 된다. 도미타 오리베 등 산조 가의 가신들도 검거되고 사네쓰무는 교토를 떠나 자신의 영지가 있는 곳에 칩거, 낙식(落飾)[30] 근신하게 된다. 사네쓰무가 칩거하는 기간 중에도, 사네쓰무와 성향도 비슷하고 많은 학문과 인맥을 물려받았으며 그러한 학문으로 인한 깊은 효심, 그리고 막부에 대한 분노로, 사네토미는 자주 사네쓰무를 만나러 가서 자신의 명의로 사네쓰무의 건의서를 대신 써서 제출한다거나, 공부한 내용에 대해서 보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세이 대옥 발발의 이듬해, 복권되지 못한 채로 사네쓰무는 병사하게 된다. 사네쓰무는 병사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네쓰무가 퇴조한 이후 사네토미는 본격적으로 정치적으로 활약할 기회를 얻어 중앙정계에서 부상하게 된다.

3. 막말의 활동(안세이 대옥~왕정복고)[편집]


존황양이파의 중심적 인물이였으나, 당시 고메이 천황을 진무천황릉으로 행행시켜 정권을 탈취하려는 국학자 및 존황양이파 공가들의 시도가 실패, 역풍을 맞아 계획 가담자였던 산조를 비롯한 7명의 공가가 교토를 떠나 조슈로 탈출하게 된다. 이를 분큐 3년 8월 18일의 정변, 그리고 7명의 공가가 피신하게 되는 사건을 '7경 낙향'(七卿落ち)라고 한다.[31]

이후 그들을 숨겨주던 조슈 번도 8월 18일의 정변으로 불리해진 교토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려 일으킨 이듬해의 금문의 변으로 실각, 역적(朝敵)으로 규정되어 사네토미 이하 7경은 다시금 후쿠오카다자이후텐만구로 피신하게 된다.

하지만 1867년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복고가 실현되자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4. 메이지 유신 이후[편집]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신정부 절반 이상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던(이 상태를 메이지 유수(留守) 정부라고 한다) 1873년에 조선과의 외교적 마찰이 일어나자[32] 당시 내각 회의에서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주도로 조선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사이고 본인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개항 협상을 진행하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것을 명분으로 조선을 정벌하자는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던 대부분의 인사들이 사절단에 합류하여 일본을 떠나있는 상태에서 유수 정부 내에 사이고와 비등하거나 이를 넘어설 입지를 가진 인물은 없었고, 결국 유수 정부에서는 각의를 통해 이를 승인한다.

그런데 이와쿠라 도모미 사절단 일행이 일본으로 돌아와 그것을 반대하여(조선을 치기 이전에 먼저 국내의 안정과 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논리) 정한론(征韓論) 논쟁이 벌어졌다. 이를 중재하는 과정에서 신경을 너무 많이 쓴 나머지 쓰러져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가 권한대행을 하였다. 이른바 정한론 정변, 메이지 6년의 정변이라고 하는 사건이다. 결과 이와쿠라 및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권을 잡고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정한론파가 실각, 정부를 떠나게 된다. 이때 정부를 떠나 사쓰마로 돌아간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후 정권과의 알력으로 인해 일으킨 것이 바로 세이난 전쟁이다.

이후 근대 내각제가 출범하자 내대신이 되었다. 내대신을 맡고 있던 중 구로다 기요타카 내각이 내각총사퇴를 결의하고 메이지 덴노에게 사표를 제출했으나 덴노는 구로다 총리의 사표만 수리하고 나머지 각료들은 사표를 반려하고 유임시킨 채 산조에게 총리 권한대행을 맡겼다. 오늘날 같으면 내대신이 아니라 각료(국무대신)[33]들 중에서 뽑았을 일이지만 내각제의 틀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초기라 가능했던 것이다. 산조 잠정 내각은 구로다 내각의 연장선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에 산조도 정식 총리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수상관저 홈페이지에서도 공식적인 제3대 총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로 설명하고 있다.

1891년 2월 18일 향년 55세로 사망하였다.

5. 일화[편집]


  • 사네토미가 14~15세즈음에, 전쟁놀이가 유행했다고 한다. 한 쪽이 깃발에 유명한 대장의 문양을 단 반면, 사네토미는 일장기 모양(흰 바탕에 빨간 원)을 달았다고 한다. 어떤 아이가 "햇님이 싸움을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 문양은 안 된다"라고 하자, 사네토미가 "이것은 나라의 표식이다. 나라와 나라가 싸울 때는 이 표식을 달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받아쳤다고 한다.

  • 다 같이 그림을 그리며 놀 때, 다들 후지산이나 학, 거북이 등을 그리는 데 비해 사네토미는 천황의 어소(고쇼=궁궐)을, 그것도 실제와는 달리 훨씬 크게 그리자 "어소는 작잖아, 그런 큰 어소가 어디 있냐"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사네토미는 이에 대해 "지금은 어소가 작지만, 내가 크면 어소를 이렇게 크게 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한다.

  • 사네토미의 이름을 지을 때(원복=성인식을 할 때, 아명을 버리고 본명을 지을 때인 듯), 사네쓰무는 実美라는 한자는 결정지어 놓고 이를 '사네요시'라고 할지 '사네하루'라고 할지 고민하던 찰나, 한학자인 이케다 다이가쿠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그것이 썩 좋지 않아서 원래 독음과는 상관없이 '사네토미'로 읽어야 한다는 조언을 받아 정했다고 한다.

6. 참고문헌[편집]


안타깝게도 국내에 한국어로 소개된 사네쓰무/사네토미 연구는 사실상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〇사료
『三条実美公年譜』

〇서적
오사카베 요시노리(刑部芳則)『三条実美ー孤独の宰相とその一族』(吉川弘文館、2016)
저자에 따르면 패전 후 처음으로 나온 사네토미에 관한 전기. 저자는 소장파 학자로서 막부 말기~메이지 초기 공가/화족/복식 연구의 1인자. 『公家たちの幕末維新』(中公新書、2018)과 같은 공가의 입장에서 본 막말~메이지 초 개설서도 냈다. 전공이 전공이니만큼 2018년 NHK 대하드라마 세고동 후반부의 복식 고증을 담당하기도 했다.

나이토 가즈나리(内藤一成)『三条実美ー維新政権の「有徳の為政者」』(中公新書、2019)
궁내청 서릉부(書陵部)[34] 소속의 저자가 10여 년에 걸쳐 써 낸 산조 사네토미의 개설서. 오사카베의 연구서는 주로 메이지 유신 이후의 사네토미에 집중하고 동시에 사네토미의 친척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면, 나이토의 연구서는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사네토미 자체에만 집중하여 균형 잡힌 서술을 하고 있다.

〇논문
笹部昌利「幕末期公家の政治意識形成とその転回:三条実美を素材に」(『仏教大学総合研究所紀要』8、2001)
佐竹朋子「三条実万の思想形成について」(『京都女子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紀要 史学編』4、2005)
佐竹朋子「幕末公家社会における三条実万の役割」(『新しい歴史学のために』2006年度3、2007)
佐藤雄介「近世中後期の武家伝奏の活動と幕府役人観」(日本史史料研究会監修・神田裕理編『伝奏と呼ばれた人々:公家交渉人の七百年史』ミネルヴァ書房、2017)
吉田昌彦「和親条約締結前後の三条実萬」(明治維新史学会編『明治維新の人物と思想』吉川弘文館、1996)

〇기타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上・下(1996): 구 화족 가문들의 가계도 집성. 각 구 화족 가문에 연락을 넣어 내용 감수를 받은 가계도를 모아 출판한 자료다. 연락이 안 되는 경우도 있기에 가문마다 다르지만, 대체로는 기본적으로 19세기에서 쇼와 중후기까지의 계보는 거의 실려있는 편이다. 가문에 따라서는 헤이세이 6년(1994)에 태어난 자손이 기록된 경우도 있다. 공가나 다이묘는 대부분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이 되었기에 관련 내용을 참조할 필요가 있을 때 유용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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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자체: 三條實美[2] 음력 2월 8일 [3] 내각 제도가 들어서기 전 태정관 제도의 수장. 산조를 끝으로 태정대신 직책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태정대신 폐지와 동시에 신설된 직책이 지금의 내각총리대신이기때문에상명목상으로는 태정대신이 총리대신의 전신이다.[4] 이 기간의 임시 내각을 '산조 잠정 내각'이라고 한다. 권한대행 당시의 직함은 '내대신'으로, 내무대신과는 관련없는 직함이다.[5] 본 문서에서는 메이지 6년의 양력 실시 이전까지는 모두 연호와 함께 음력 날짜로 표기한다. 단, 지나가는 인물들의 생몰년은 괄호 속에 연호로 표시하지 않고 해당 연호와 겹치는 서력 연도로 표시한다. 날짜에 따라서는 양력과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여담으로, 같은 해 같은 달의 19일에는 오사카에서 그 유명한 오시오 헤이하치로(大塩平八郎)의 난이 일어난다.[6] 공가 가문은 극관(極官 : 승진 가능한 최고 관직)에 따라 그 서열이 나뉜다. 가장 높은 가문이 섭관가(摂関家)고, 그 다음이 청화가(清華家, 세이가케)다. 공가 항목 참조[7] 편의상 본 문서에서는 계속 성인식(元服) 이후의 이름인 사네토미로 표기한다.[8] 공가 가와바타 긴아키라(河鰭公述)의 양자로 가서 가와바타 가의 당주가 된다. 이후 원로원 의관 및 귀족원 의원 등을 역임. 사네후미의 뒤는 긴아키라의 차남 긴아쓰(公篤, 1857~1922)가 있지만, 그 뒤는 다시 사네토미의 4남 사네히데(実英, 1891~1983)가 양자로 들어가 가문을 잇는다. 사네히데는 유명한 유직고실(후술) 연구자로서, 쇼와여자대학장 등을 역임한다.[9] 여기서 '명가'는 일반명사로서의 명문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에도시대 공가 계급으로서의 명가를 말한다.[10] 양녀. 후술할 미네와 마찬가지로 시집과 격을 맞추기 위해 임시로 양녀로 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흔한 일로, 비슷한 케이스로 아츠히메가 있다.[11] 그의 다른 친딸이 나중에 메이지 천황과 혼인하게 되는 쇼켄 황후이다.[12] 사카모토 료마 등을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막부 말기 4현후의 한 명으로 유명한 15대 도사 번주. 본명은 도요시게(豊信).[13] 단, 사네쓰무가 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다.[14] 즉, 혈통적으로는 긴무쓰의 외사촌[15] 도요카즈의 적장자이자 도사 11대 번주 도요오키(豊興)[16] 도요카즈의 2남이자 도요오키의 동생, 즉 도요아키라의 작은 형[17] 그 대부분이 재정난에 허덕여 막부나 인척 다이묘(공가가 다이묘 가와 혼인 관계를 맺는 경우는 흔했다)로부터 항상 돈을 필사적으로 끌어오는 데에 여념이 없었던(심지어 이것은 천황가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가난한 공가치고는 청화가라는 신분만큼 상대적으로 가록이 높은 편이다. 섭관가는 약 1500~3000여석, 우림가 이하로 내려가면 평균 100석 내외는 물론이고, 극단적으로는 30석(!!!) 밖에 못 받는 가문도 있었다. 또 공가는 가신이나 하인을 고용하거나 이른바 품위유지비가 많이 들었기에 더더욱 적은 액수다. 우림가의 이와쿠라 도모미같은 경우는 공가의 집이 치외법권임을 이용해 도박장으로 빌려주고 자릿세를 받고는 했다는 일화가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 이와쿠라의 일화에 관해서는 오쿠보 도시아키(大久保利謙, 오쿠보 도시미치의 손자이자 매우 저명한 역사학자)가 쓴『岩倉具視』나 한국어로 번역된 책으로는 도널드 킨『메이지라는 시대』를 참고할 것. 이 에피소드는 2018년 NHK 대하드라마 <세고동>에도 반영이 되어 있다.[18] 도쿠다이지 사네쓰네(実則)는 이후 왕정복고에도 참여하는 도막파의 중요 공가 중 한 명이다.[19]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행동을 같이 하며 왕정복고에 크게 공헌한 인물 중 한 명인 오오기마치 산조 사네나루(実愛)를 배출한 가문. 여담이지만, 사네나루의 며느리는 메이지 천황의 외사촌이다. 사네나루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 사가(嵯峨)로 성을 바꾸고, 이 가문의 직계 당주가 낳은 딸 중의 하나가 바로 사가 히로. 사네나루의 손자, 사네토(実勝)의 딸이다. 사네나루의 증손녀인 셈. 또한 사가 가 계보에는 사네나루 이후에 양자 없이도 쭉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으로 보인다.[20] 아네가코지 긴사토(姉小路公知 : 이때까지는 '긴토모'라고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에서 '긴사토'라고 읽힘)는 극렬 존황양이파로 유명하여 1863년에 반대파에 의해 어소의 출입문 중 하나인 삭평문(朔平門) 밖에서 암살당한다. 이른바 삭평문 밖의 변.[21] 당시 대다수의 공가는 매우 가난하고, 자식을 튼튼하게 키우기 위해 어릴 때 농민의 집에 맡겨 키우게 하는 것은 일중의 관습이었다.[22] 계보『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에는 존재조차 나와있지 않지만, 나이토(참고문헌 문단 참조)에 의하면 3남도 일찍 죽었다고 한다. 오사카베 역시 4남으로 표현하고 있고, 후대에 편찬된『三条実美公年譜』에는 '사네쓰무의 4번째 자식이다(實萬ノ第四子ナリ)'라고 기록되어 있다.[23] 확실하게 대를 이을 적장자가 있을 때 차남 이하가 다른 집으로 양자로 가는 일은 흔했다.[24] 오사카베와 일본어판 위키피디아는 '긴아야', 나이토는 '기미아야'로 표기.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에서는 산조 가 항목에서 '기미아야', 히가시산조 가 항목에서는 '긴아야'로 표기(히가시산조 가에 관해서는 후술). 본 항목에서는 편의상 기미아야로 통일. 앞선 주에서 나온 아네가코지 긴사토의 예나, 사네쓰무의 부친인 기미오사 등, 당시 공가의 이름은 한자도 읽는 방법도 특이한 경우나 심지어는 읽는 법이 복수로 존재하는 경우도 있어 자료마다 읽는 방법이 다른 경우가 제법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당대 사료에서도 종종 읽는 방법을 틀리는 경우도 있다.[25] 여담으로, 이후 기미아야는 사네토미의 양자가 된다. 후술할 8월 18일의 정변으로 사네토미가 산조 가 전체에서 의절당하고(삭탈관직을 당하고 이름조차 쓸 수 없는 처분을 받아 사실상 반란분자나 다름없기에 거의 반강제 내지는 관습적으로 전 가문에서 절연장이 제출된다) 기미아야가 일시적으로 산조 가의 당주가 된다. 사네토미가 사면되고 왕정복고 이후에 교토로 돌아와서는 다시 사네토미에게 가독이 돌아온다. 이후 사네토미는 기미아야에게 집안을 잇게 할 생각이었으나(사네토미의 적장자 기미요시(公美)는 히가시산조(東三条) 가를 만들어 분가한다), 기미아야의 행실 문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주변에서 권유를 받아도 단호히 몇 번이고 거부해오던 기미아야의 폐적(廃嫡)을 실행하고, 기미요시를 다시 산조 가로 불러들여서 가문을 잇게 한다. 히가시산조 가는 기미아야의 장남(사네토시実敏)이 잇게 된다. 따라서 기미요시와 아내, 차남은 히가시산조 성을 받아 히가시산조 가의 식객(厄介者, 현대 일본어에서는 '귀찮은 놈' 정도의 뜻이지만, 원래 공가 가문에서 가장 및 가문을 이을 적장자 이외의 아들 중 다른 집으로 양자를 가지 않거나 분가를 하지 않고 본가에 머물러있는 사람을 '피부양자'로서 가리키는 말)이 된다. 결국 나중에는 이 셋은 히가시산조 가로부터도 분리당해서 평민 신분이 된다. 그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지만 기미아야의 장례식에는 사람이 거의 오지 않았다는 말이 전한다.[26] 하루는 주에서 언급한 오오기마치 산조 사네나루가 유직고실에 관해서 물어볼 것이 있어 시게노이 가를 비롯해 여러 다른 공가를 방문하나,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지 못한다. 마지막에 사네쓰무라면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해 산조 가를 방문하여 대답을 듣고는 만족했다는 일화가 남아있을 정도이다. 또, 사네쓰무의 아버지, 즉 사네토미의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기미오사(公修)나 사네쓰무가 남긴 독서 노트나, 사네쓰무가 다른 공가 가문에 책을 빌려준 대출 장부, 사네쓰무가 젊을 적에 조정에 출석하여 천황 및 다른 공가들과 함께 스터디 그룹을 연 기록, 그때 읽었던 책들 등, 사네쓰무가 학문에 조예가 깊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은 많다.[27] 현대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스터디 그룹이나 연구회[28] 사네쓰무는 안세이 대옥을 단행한 것으로 유명한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의 히코네 번 이이 가와도 사촌지간이었다.[29] 가훈처럼 아들들에게 남기는 글에서도 유직고실이나 역사 등 학문을 열심히 닦을 것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30] 신분이 높은 사람이 머리를 깎고 출가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실상 조선의 귀양이나 다름없다.[31] 이때 사네토미는 27세였다. 쿠로후네 사건때 17세였음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한창 때 격동기를 정통으로 맞아 혈기 넘치는 시기에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할 수 있었던 세대라고 할 수 있다.[32]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강력하게 통상 거부 정책을 펼치던 시기다.[33] 이후의 총리 권한대행들은 추밀원 의장(구로다 기요타카, 사이온지 긴모치), 내무대신(와카쓰키 레이지로), 외무대신(우치다 고사이, 시데하라 기주로), 대장대신(다카하시 고레키요), 관방장관(이토 마사요시, 아오키 미키오)이 수행했다. 모두 국무대신들이다.[34] 황실 소유의 고문서나 유물 등을 관리하는 부서. 실제 일류 연구자들을 고용해서 운영하고 있으며, 일반인들의 자료 열람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서릉부에서 근무하다가 대학 교수로 옮기는 연구자들도 종종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