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메이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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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121대 천황
고메이 덴노
孝明天皇


파일:고메이 천황.jpg

출생
1831년 7월 22일
야마시로국 교토 교토 어소
(現 교토부 교토시)
사망
1867년 1월 30일 (향년 35세)
야마시로국 교토 교토 어소 상어전
(現 교토부 교토시)
능묘
노치노츠키노와동산릉(後月輪東山陵(후월륜동산릉)[1]
재위기간
일본 황태자
1840년 4월 16일 ~ 1846년 3월 10일
제121대 천황
1846년 3월 10일 ~ 1867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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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노미야(熙宮(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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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메이 덴노(孝明天皇(효명천황)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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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고카(弘化(홍화, 1846년 ~ 1848년)[1]
가에이(嘉永(가영, 1848년 ~ 1855년)
안세이(安政(안정, 1855년 ~ 1860년)
만엔(万延(만연, 1860년 ~ 1861년)
분큐(文久(문구, 1861년 ~ 1864년)
겐지(元治(원치, 1864년 ~ 1865년)
게이오(慶應(경응, 1865년 ~ 1867년)}}} ||}}}}}}}}} ||

1. 개요
2. 생애
2.1. 즉위
2.2. 쿠로후네 사건과 천황의 정치 개입
2.3. 에도 막부의 독단적인 결정
2.4. 말년
3. 사후
4. 평가
5. 외모
6. 가족관계
7. 독살설?



1. 개요[편집]


일본의 제121대 천황.
메이지 덴노의 친아버지로, 일본 황실과 현대에 살아있는 구황족이 고메이 덴노를 통해 핏줄이 이어진다. 이름은 오사히토(統仁)였고, 칭호는 히로노미야(煕宮)였다.

2. 생애[편집]



2.1. 즉위[편집]


1846년 천황에 즉위했으며, 당시 천황은 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항 이전의 기록은 많지 않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황족과 귀족이 다니는 학교가쿠슈인을 창설했다. 여기까지라면 에도 막부 시대의 여느 천황들처럼 그저 존재감 없는 일본의 얼굴마담 정도에 불과했다.
일본 메이지 시대에서 패전 뒤까지 활약했던 수필가 사토 고세키(佐藤垢石)가 쓴 '도미 감시(にらみ鯛)'라는 글에 보면, 만엔 원년 무렵 한여름이라 왕궁에 어선(御膳) 즉 수라상에 올라가는 생선들이 모조리 썩어서 악취가 나고 먹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고, 고메이 천황이 연회를 열었을 때 왕궁 안에는 언제나 술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술에다 물을 타서 마셨고 결국 몇 잔을 마셔도 취할 수가 없었다거나, 연회에 연어 한 조각이 남은 것을 보고 "버리지 말고 챙겨 두어라. 짐이 두었다 저녁 반주에 먹겠다(これを棄ててはならぬ。朕は晩酌の佳肴とするつもりである)"고 하는, 이게 진짜 한 나라의 국왕이 맞긴 한가 싶은 심히 안습한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 이는 에도 시대 천황가가 처해 있던, 윗사람이라는 대접만 받았지 실상은 빈껍데기만도 못한 처지였던 현실을 보여준다.

2.2. 쿠로후네 사건과 천황의 정치 개입[편집]


1853년, 일본의 역사를 바꿀 쿠로후네 사건(흑선사건)이 터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개항하면서 고메이 덴노는 정치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1857년 에도 막부의 로주[1]들은 개항 여부를 놓고 주요 다이묘(영주)들의 의견을 수합한 결과, '개항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편전쟁에서의 청나라의 참패는 물론, 네덜란드로부터 입수한 세계 정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고려한 결과였다. 이에 1857년 말에 <미일수호통상조약> 시안을 작성하고, 1858년 초 막부의 로주 홋타 마사요시가 조정으로부터 형식적인 승인을 받기 위해 교토로 상경했다.
조정의 최고 관직인 '칸파쿠'(관백, 殿下)와 그 다음인 좌•우•내대신 자리는 최고위 귀족인 고셋케(오섭가)와 그 다음 서열인 세이가케(청화가)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도쿠가와 쇼군가나 시마즈씨 등 유력 다이묘 가문과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막부와 유력 다이묘들이 개항에 찬성했기 때문에 교토 조정의 주요 대신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로주 홋타 마사요시에게 설득되었다.
하지만 고메이 덴노는 홋타와 칸파쿠 이하 대신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칙허를 불허했으며, 섭가(셋케)에 눌려 있었던 귀족 가문들인 '평공가'들이 덴노에게 동조했다.
안세이(安政) 5년(1858년) 7월 27일에는 40년 동안 교토 조정을 주도하고 있었던 타이코우(太閤, 태합) 다카쓰카사 마사미치(鷹司政通)의 나이란(內覽)[2] 직권을 정지시키고, 출가할 것을 종용하는가 하면, 2개월 뒤인 9월 4일에는 칸파쿠(関白, 관백) 구조 히사타다(九条尚忠)[3]의 나이란 직권까지 정지시켰다.
막부 실권자들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할 정도면, 고메이 덴노가 평소부터 황실의 권력 회복에 관심을 두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여지껏 천황들이 이루고 싶어도 막부의 구조에 가로막혀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숙원을 시대가 가능하게 해 준 것이었다.

2.3. 에도 막부의 독단적인 결정[편집]


이이 나오스케가 천황의 윤허를 얻지 않고 서양과의 조약을 일방적으로 맺은 것에 화가 난[4] 고메이 덴노는, 1858년<무오밀지>(戊午の密勅)라고 불리는 양이(攘夷) 칙명을 내렸다. 이 칙명이 일본에 큰 반향을 일으켜 일본내 공사관에 있는 외국인들을 습격하거나 살해하는 사건[5]이 빈발해 결국 이는 사쓰에이 전쟁이나 시모노세키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에도 막부 타도를 위한 것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고메이 덴노는 존황 의식에 따라 막부의 쇄국 유지를 통한 현재 체제의 안정을 꾀한 것이었다. 본인은 황실[6]과 도쿠가와 쇼군가의 결혼도 주선했으나 그를 따르는 존왕양이파는 오히려 막부 타도 쪽으로 노선을 잡기 시작했다.
구미 열강도 일본을 자기 뜻대로 주무르려면 이 작자가 상당히 방해가 된다는 것을 감안해, 1865년 자국의 함대가 오사카 만까지 들어오게 하는 천황의 칙허를 요구했다. 사실상 "우리의 말을 안 들으면 대포 세례다!!" 라는 협박이라 천황도 허가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고메이 덴노 본인은 철저한 양이파라 이해에는 궁중에 칩거하며, 서양 의학을 금지하는 등 보수적인 자세는 무너뜨리지 않았다.[7][8]

2.4. 말년[편집]


고메이 덴노의 노력으로 1860년대 후반에 들어 천황의 발언권은 굉장히 높아져 있었다. 하지만 양이파(攘夷派)들은 시간이 갈수록 천황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각자의 이상이나 밥그릇같은 권력 쟁탈전에 집중하여, 천황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려 하지 않았다. 호가호위하는 자들이 많아져 천황이 한탄하는 대목도 있다.
결국 제2차 조슈 정벌을 명하는 칙명을 내렸으나 오쿠보 도시미치가 "의롭지 못한 칙명"이라고 반발하는가 하면, 이와쿠라 토모미도 "결국 이렇게 분열을 야기한 것도 다 천황 때문이 아닌가?" 라고 말하는 등, 지지를 잃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럴 만도 한 것이, 두 사람은 모두 후에 삿초 동맹으로 칙명에 뒤통수를 칠 사쓰마 측 인물이었다. 그러니깐 진정으로 존왕의 뜻이 있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과 이상 실현을 위해 일단은 없어져야 할 에도 막부에 대항하기 위해 교토 조정의 위세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세력이었던 것이다.
결국 비교적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가 1867년, 천연두로 인해 35세의 이른 나이로 붕어했다.

3. 사후[편집]


고메이 덴노의 사후 그의 아들 메이지 덴노가 14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이 시기에는 도쿠가와 막부의 위세가 매우 떨어져있었고 조슈 번, 사쓰마 번 중심의 도막파(倒幕派)들이 날로 강성해지고 있었다. 결국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그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대정봉환으로 권력을 덴노에게 반납했다.
그러나 형식상 권력이 덴노에게 돌아갔을 뿐 여전히 막부 측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도막파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막부군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고(무진전쟁), 이 전쟁에서 도막파가 승리함으로써 정국을 이들이 주도하게 된다. 중앙집권화와 근대화를 위시로 한 메이지 유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양이론>을 고수하여 막부와 대립한 고메이 덴노와는 다르게 메이지 덴노는 신정부에 그다지 대립하지 않아 이전처럼 정부와 조정이 대립하는 경우는 없었다.

4. 평가[편집]


일본 내에서는 공민왕, 이반 4세 등과 같은 나름 개혁적인 군주로 평가되지만, 실상을 보면 묘한 부분이 있다. 일단 죽음과 관련한 의혹이 계속 돌아다니는 데다가 어디까지나 본인은 굳건한 양이주의자로서 쇄국적인 입장을 취했다.
<미일수호통상조약> 조인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서양과의 전쟁까지도 각오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런 그의 현실 인식에 대해 막부의 로주 홋타 마사요시는
"조정이 제정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고 디스했고, 도사 번주 야마우치 도요시게[9]
"덴노의 주장은 서생과 같으며 무모하다."
고 비판하기도 했다.
조약 조인 및 개국 과정에서 의외로 현실적인 상황 판단을 보여준 막부와 달리, 고메이 덴노는 자신이 주장한 양이론의 근거로 황통의 영속과 <신국론>을 내세우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막부의 개혁파를 좌절시키고, 존왕양이 과격파가 힘을 얻도록 하여 막말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물론 아예 개혁을 하지 않으면 일본 자체가 멸망할 것이라는 점은 인지했는지, 고메이 덴노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자신의 개혁에 에도 막부 측의 불만이 세질 것을 우려해 이복 여동생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시집보내고, 개혁을 급진적이지 않고 비교적 온건적으로 실시하기를 원했다.
결국 그의 의도가 진짜 양이가 아닌 황권 강화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조차 달성되지 못해 메이지 신정부의 권력은 메이지 덴노가 아니라 유신 웅번 출신 하급 사무라이(대표적으로 조슈 번 출신 사무라이 등)들이 장악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개혁군주로 평가하기는 힘들다.

5. 외모[편집]


파일:Emperor_Komei_Portrait_by_Koyama_Shotaro_1902.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The_Emperor_Komei.jpg
아들 메이지 덴노와 많이 닮았으며, 아들과 비슷하게 초상화에 일종의 보정이 들어갔을 확률도 있지만 일단 특유의 인상과 주걱턱은 집안 유전을 보여준다. 실사진을 찍었다는 말도 있지만 확실하게 발견된 사진은 아직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항목 맨 위의 프로필은 명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이 문단의 1902년에 그려진 컬러초상화를 찍은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하나도 고메이 천황 삽화로 발행물에 실은 것으로 보인다.


6. 가족관계[편집]


닌코 덴노와 측실인 오기마치 나오코(正親町雅子)의 4남으로 태어났다. 이복여동생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에도 막부 제1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정실부인이 되었다.

  • 에이쇼 황후(英照皇后) - 고메이 덴노의 정실. 고셋케 중 하나인 구조 가문의 딸로, 이름은 아사코(夙子)였다. 두 딸 요리코(順子) 내친왕과 후키노미야(富貴宮) 내친왕을 낳았지만 모두 아기 때 죽었고, 이후 측실 소생인 사치노미야 무쓰히토 친왕을 양자로 맞이했다.


그 외에 두 측실에게서 아들 1명과 딸 2명을 더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었고, 자녀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사치노미야 무쓰히토 친왕이 황위를 계승했다.


7. 독살설?[편집]


당대 많은 정치 세력과 갈등을 빚었고 30대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천황인지라 독살설이 존재한다. 이런 유형의 인물에는 으레 따라붙는 역사적 가십거리의 하나지만 그 실체는 알 수 없다. 자세한 것은 메이지 덴노 대역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