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보 도시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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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1·3·5대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 Ōkubo Toshimichi


파일:Toshimichi_Okubo_4.jpg

출생
1830년 9월 26일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고라이초
(現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고라이초)
사망
1878년 5월 14일 (향년 47세)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기오이자카초
(現 도쿄도 치요다구 기오이자카초)
재임기간
제3대 대장경
1871년 6월 27일 ~ 1873년 10월 12일
초대 내무경
1873년 11월 29일 ~ 1874년 2월 4일
제3대 내무경
1874년 4월 27일 ~ 1874년 8월 2일
제5대 내무경
1874년 11월 28일 ~ 1878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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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도시나리(利済) → 도시미치(利通)[1]
아명
쇼케사(正袈裟)
통칭
쇼스케(正助) → 이치조(一蔵)[2]
아호
고도(甲東)
부모
부 오쿠보 도시요
모 후쿠
배우자
마스코
자녀
장남 오쿠보 도시카즈
차남 마키노 노부아키
삼남 오쿠보 도시타케
사남 오쿠보 도시오
오남 이시하라 오구마
육남 오쿠보 하야구마
칠남 오쿠보 나나구마
장녀 요시코
팔남 오쿠보 도시가타
친인척
조부 오쿠보 도시타카
백부 오쿠보 도시타츠
사위 이주인 히코키치
손자 오쿠보 도시아키
손자 오쿠보 도시하루
손서 요시다 시게루
증손 오쿠보 도시테루
증손 요시다 켄이치
현손 아소 다로
현손 노부코 비
학력
조시칸(造士館)[3]
신장
178cm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가계도
5. 대중매체
5.1. 바람의 검심
5.2. 라스트 사무라이
5.5. 기타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사쓰마 번 하급 무사 출신. 기도 다카요시·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메이지 유신을 이끈 중심 인물로 이들을 묶어 '유신삼걸(維新三傑)'로 부른다.

에도 막부 말기와 일본 제국 초기의 정치인. 초대 내무경(内務卿)이기도 하다. 내무경이 나중에 내무대신으로 개칭되고[1], 내무성총무성의 전신[2]이 되었기 때문에 현 총무대신을 후신으로 볼 수 있지만, '내무경'이라는 명칭을 쓸 때에는 오늘날 일본 총리로서의 기능도 맡고 있었다. 사실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총리에 취임하기 전날까지 산조 사네토미가 마지막 태정대신을 맡고 있다가 태정대신 폐지와 동시에 내각총리대신이 신설되었기 때문에 내각총리대신의 직접적인 전신은 태정대신이지만, 당시 태정대신은 실권이 적고 명예직에 불과했던 반면 실질적인 권력은 내무경이 가지고 있었기에 사실상 근대 일본 최초의 총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2. 생애[편집]


1830년 9월 26일 사쓰마 번사무라이인 오쿠보 주에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쿠보의 집안은 그리 높은 무사 계급은 아니었지만, 후지와라 가문의 후손으로 자부심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3살 위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동문수학하였고, 17세부터 사쓰마 번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섬기기 시작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오쿠보 도시미치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중용하였다.

오쿠보는 본래 사쓰마 번주를 보좌하여 '쇠약해져 가는 에도 막부 정권이 유력 들이 중앙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양보하고, 대신에 번들은 막부의 통치에 협조하자'는 공무합체(公武合体) 운동에 매진하였으나, 이후 생각을 바꾸어 막부를 쓰러뜨리자는 토막파에 참여하였다. 1866년에는 사카모토 료마의 주선을 통해 죽마고우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조슈 번기도 다카요시와 비밀리에 만나서 삿초 동맹을 성립시켰다. 이렇게 극적으로 에도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연맹한 사쓰마-조슈 연합군은 정치판에서 큰 영향력이 있던 이와쿠라 도모미와도 제휴하고 수도 교토로 진군, 1868년 1월 천황의 신병과 황궁을 확보하였다. 뒤 이은 보신 전쟁(무진 전쟁)으로 친막부파를 무력으로 정벌하면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근대 중앙집권 정부를 구성한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켰다.

오쿠보는 메이지 신정부에서 대장경을 맡아 토지세 개편, 도쿄 전도, 폐번치현 등 주요 개혁을 이끌었으며 1871년부터 18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미와 유럽의 선진국들을 견학하기도 하였다. 오쿠보는 견학을 통해 서방 국가의 앞선 국력을 절감한 뒤, 일본의 구시대적 적폐를 청산하고 서방의 제도와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한편 메이지 유신의 동지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족#일본의 지배 계급 계급이 중심이 되어 개혁을 이끌고자 하였는데, 이에 반해 오쿠보는 서양의 강대국들을 본받아 사족의 특권을 대폭 축소하고 폐지하고자 하였다. 또한 메이지 6년(1873년),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을 찬성하는 입장이었던 사이고에 대해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며 반대하여 대립하였고, 결국 정쟁에서 패한 사이고와 정한파들이 낙향하였다(메이지 6년의 정변이었다).

사이고가 낙향한 뒤 오쿠보는 내무성의 초대 내무경이 되어 '오쿠보 정권'이라 불린 메이지 정부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내무경은 모든 지방 관료를 임명할 수 있는 자리였을 뿐만 아니라, 경찰력을 손에 쥐었으며, 일본 각지의 근대화 계획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쿠보는 젊은 인재 위주로 메이지 정부의 관료를 충당하였는데, 특히 자신의 주변 지인이나 서양에 견문을 다녀온 적이 있는 인물들로 주요 관직을 채워넣었다.

한편 유신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중앙 정치에서 소외된 사족들이 불만이 고조되어 1874년 2월 사가의 난 등의 사족 반란이 줄을 이었다. 1874년 오쿠보는 정한파 무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정한파들이 원하던 타이완 침략을 결정하였으나,[3]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말라리아로 인한 561명의 병력 손실만 본채 청나라로부터 약간의 배상금을 받는데 그쳤다. 이 때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가 정한론 때와 같은 이유로 대만 출병을 반대하며 오쿠보와 대립하다가 사임하였다.

이후 오쿠보는 정권의 안정을 위해 기도 다카요시의 복귀를 추진하여 1875년 2월 오사카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오사카 회의에 오쿠보, 기도,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참여하였는데, 오쿠보가 기도와 이타가키가 원하던 의회 설립과 점진적 입헌정치에 대해 합의하면서 기도와 이타가키가 정부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의회 정치로의 급진적 전환을 원하던 이타가키와 여전히 사쓰마와 조슈가 정권을 장악하기를 원하던 오쿠보+기도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고, 때 마침 발생한 운요호 사건의 처리를 두고 기도와 이타가키의 의견 대립이 절정에 달해 이타가키가 다시 사임하였다. 이후 지병이 악화된 기도 역시 정치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게 되면서 오쿠보가 다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876년 오쿠보는 근대화를 완성하기 위해 폐도령을 내리고 재정 적자를 이유로 에도 막부 시절부터 사족에게 지급해오던 녹봉을 폐지(질록처분)하여 사족들의 불만을 크게 산다. 특히 1877년에 사쓰마에서 오랜 친우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구심점으로 하는 대규모 사족 반란(세이난 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겨우 진압하였으며, 결국 사이고는 할복자살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반정부적인 자유민권운동과 언론을 탄압하는 동시에 농민 봉기[4]도 무력으로 제압하면서 원망을 샀다.

결국 세이난 전쟁을 진압하고 1년도 지나지 않은 1878년 5월 14일, 도쿄의 아카사카 이궁에서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기오이자카에서 자신의 마차를 몰던 마부와 함께 카가 번사(이시카와 현) 출신의 사족 시마다 이치로 일당에게 암살당했다.[5][6]이른바 기오이자카의 변(紀尾井坂の変). 암살자들은 자수한 후 모두 사형당했다.

그의 장례식은 일본 최초의 국장으로 치러진 후 도쿄 아오야마레이엔(青山霊園)에 안장됐다.[7] 오쿠보가 암살된 이유는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기 전 대접받던 사족 계급들 중 몇몇 사람이, 메이지 정부가 되면서 시대가 변하자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를 오쿠보 탓으로 돌리며 분노성 범행을 시도한 결과라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3. 기타[편집]


  • 위엄을 갖추기 위해 기른 자신의 수염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사진을 보더라도 수염을 매우 풍성하게 기른 후에 그것을 서양식으로 가꾸려 한 흔적이 보인다.

  • 윗 사진하고는 다르게 실제 사진은 이런 모습이었다.amazon

  • 매우 근엄한 사람이어서 주변인이 함부로 말도 못 붙였고, 복도를 지나가기만 해도 주변을 긴장케 만드는 존재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가정에서는 상당히 다정한 성격이었던 모양. 오쿠보가 오랜만에 집에 오는 날에는 딸 요시코(吉子) 등 아이들이 서로 오쿠보의 신발을 벗겨주려고 다투다 뒤로 벌렁 넘어진 적도 있고, 매주 금요일 밤마다 친척들을 불러 만찬을 가졌는데 오쿠보는 이 만찬을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로 즐겼다고 한다.

  • 무대뽀스런 면은 있었어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인텔리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서양문물에 밝고 지성적이며 냉정하게 판단하는, 무사보다는 현대인에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고. 또한 언변에 능해 신분에 관계 없이 사람을 잘 끌어모았다고 한다.

  • 부심이 강한 인물이었는지 지나치게 무게를 잡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유신 운동에 매진하기 이전 사쓰마 번저에서 근무할 때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우월감이 강해서[8] 신분이 낮은 무사는 거의 사람 취급을 안 했다고 한다. 퇴근할 때 숙직무사가 인사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그가 이끈 메이지 정부는 신분제 철폐에 앞장섰지만 정작 본인은 신분의식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 이후 유신에 가담하면서 동료를 끌어들일 때는 신분을 가리지 않았지만, 막상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하급 무가 출신은 가차 없이 내버리거나 심지어 막부 측에 희생양으로 넘겨 버리기도 했다. 나중에 신 정부 내각을 결성할 때도 차별의식은 여전해서, 더 이상 눈치 살필 필요가 없어지자 본색을 드러냈는지 유신 지사 중 상인 출신이나 하급 무가 출신은 내각에서 배제하려고 노력했다.[9] 유신군 측에 자금을 지원한 미쓰비시(三菱)나 미쓰이(三井)에서 심어놓은 인사들도 이 배제대상에 포함되어서, 유신운동 때보다 많은 불만과 원한을 샀다. 나중에 어이없이 암살당하게 된 계기도, 이 당시 배제된 자들이 획책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 세간에 흔히 알려진, 교활한 술책으로 선배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정계에서 쫓아내고 세이난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는 다를 가능성이 높다. 사이고와의 분열은 이타가키 다이스케나 에토 신페이 같은 히젠, 토사 번 출신들이 오쿠보와 이와쿠라 도모미가 해외로 순방을 떠나기 전에 맺은 12개소의 약정을 무시하고 관제개혁이나 징병령, 조선사절 파견 문제와 같은 중요 사항을 멋대로 처리해버렸으며, 참의의 숫자를 각 번에서 1명씩 뽑아놓은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토사 번, 히젠 번 출신을 늘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이고는 이 와중에 조선 사절로 자신이 가고자 했으며, 이 주장에 대해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메이지 6년의 정변을 일으켜 정한론 반대 의사로 조선사절 파견문제를 엎어버렸다. 이때 문제가 생긴다. 처음 사이고의 뜻에 따라 조선사절파견문제가 통과되자 이에 항의하여 오쿠보 도시미치, 오키 다카토, 오쿠마 시게노부가 사표를 제출했고, 이와쿠라가 조선사절파견을 뒤엎자 이에 항의하여 사이고가 사표를 먼저 제출하고 가고시마로 귀향, 사이고 정한파의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고토 쇼지로, 소에지마 다네오미 일행이 사표를 제출해 버렸다. 한 번에 7명의 참의가 동시에 사표를 제출하는 초유의 사태가 생긴 것이다. 이에 메이지 덴노는 오쿠보 등의 사표는 반려했으나, 사이고 등의 사표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수 차례의 사족 반란이 터진 이후 결과적으로 사이고와의 대립은 세이난 전쟁으로 이어져 사이고가 죽는 원인이 되었고, 고향인 사쓰마 일대에서는 아직도 역사적 아이돌이나 다름 없을 만큼 사랑받는 사이고를 죽게 만든 자로 받아들여져 극도로 증오를 받은 탓에 그 시신도 가고시마에 가져와 묻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미국 남부에서 컨트리 음악공화당, 기독교를 욕하지 못하는 것처럼 "가고시마에서는 가고시마 특산물인 돼지와 사이고를 절대 욕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오쿠보는 지방에서 그 사이고를 죽게 만든 천하의 간신으로 취급당하였다. 물론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서 고향인 가고시마에서도 당대의 걸물로 재평가되고 있고 세이난 전쟁 역시 개화의 혼란중에 일어난 어쩔수 없는 비극 정도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지역의 슈퍼스타인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밀린 콩라인. 이렇게 동상도 있다.

  • 사이고 다카모리를 따르는 그룹한테는 비정(非情), 잔인(殘忍)하다고 '忍人'이라고 불렸다. 사가의 난을 일으킨 에토 신페이를 '사라시구비'(효수형: 잘린 목을 길거리에 전시해서 사람들이 구경거리로 만드는 형벌)에 처한 것은, 근대 국가를 지향하는 메이지 정부의 전근대적 만행이었다.[10]

  • 취미는 바둑었다. 실력은 꽤 잘 두는 편이었기에, 바둑에서 지면 주변 사람들도 눈치챌 만큼 심기가 불편했다고 한다.

  • 지독한 골초였다는 증언이 있다. 담뱃대를 매일 부지런히 청소해야 할 만큼 담배를 많이 피웠다고 한다.

  • 키가 178cm로 당시 일본인치고는 상당한 장신이었다.[11]

  • 금전관리에 있어서는 충분히 권력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고도 남을 위치에 있었어도, 오히려 공무를 위해서는 빚을 얻어서라도 자신의 사재를 쏟아부었다. 그가 죽은 후에 밝혀진 재산은 막대한 빚만 있어서, 오쿠보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금 운동을 펼쳐 겨우 그 빚을 갚고 남은 가족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12]

  • 오쿠보의 차남 노부아키(伸顕)는 마키노(牧野) 가문으로 양자로 가서 '마키노 노부아키'가 되었는데,[13] 훗날 일본 총리가 된 요시다 시게루는 노부아키의 사위가 된다. 시게루의 딸, 그러니까 노부아키의 외손녀인 요시다 카즈코(吉田和子)는, 2.26 사건 당시 외할아버지 노부아키를 위험에서 구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2.26 사건 참조. 카즈코는 아소 다로 前 일본 총리와 아소 노부코를 낳았는데, 노부코는 토모히토 친왕과 결혼하여 아키코 공주요코 공주를 낳았다.

  • 내무경을 맡던 1877년에는 울릉도, 독도에 대한 지적 편입 문제를 두고 태정관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서신을 보냈고, 후대의 '독도 고유영토론'이 허구임을 알려주는 '태정관 지령'[14]을 전달받았다. 이후 시마네현에 울릉도와 독도 편입 중단 지시를 했다.


4. 가계도[편집]


그의 집안의 영향력은, 근대를 넘어 현대 일본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 친조부 : 오쿠보 도시타카 (? ~ 1801)
    • 백부 : 오쿠보 도시타츠 (? ~ 1821)
    • 친부 : 오쿠보 도시요 (1794 ~ 1863)
  • 외조부 : 미나요시 호토쿠 (? ~ 1838)
    • 친모 : 미나요시 후쿠
      • 오쿠보 도시미치(1830 ~ 1878) / 처 : 오쿠보 마스코 (1840 ~ 1878)[15] / 첩 : 스기우라 유우[16]
        • 장남 : 오쿠보 도시나카 (1859 ~ 1945)
        • 차남 : 마키노 노부아키 (1861 ~ 1949) 마키노 가에 양자로 보냄.
          • 친손녀 요시다 유키코 (? ~ 1941) / 손녀사위 : 요시다 시게루 (1878 ~ 1967) 일본 총리
            • 외증손자 : 요시다 겐이치 (1912 ~ 1977) 영문학자
            • 외증손녀 : 아소 카즈코 (1915 ~ 1996) / 외증손녀사위 : 아소 타카키치 (1911 ~ 1980)
        • 3남 : 오쿠보 도시타케 (1865 ~ 1943)
        • 4남 : 오쿠보 도시오 (1867 ~ 1894)
        • 5남 : 이시하라 유우쿠마 (1869 ~ 1943) 이시하라 가에 양자로 보냄.
        • 6남 : 오쿠보 슌쿠마 (1870 ~ 1912)
        • 7남 : 오쿠보 시치쿠마 (1871 ~ 1943)
        • 8남 : 오쿠보 (1878 ~ 1956) 유복자


5. 대중매체[편집]



5.1. 바람의 검심[편집]




생년월일
1830년 9월 26일
신장
178cm
체중
65kg
혈액형
O형
별자리
천칭자리
출신지
가고시마 현
특기
정략
취미
바둑
자랑거리
수염

무(전투력)
지(지식,지혜)
심(정신력)
덕(카리스마)
오리지널항목(캐릭터 특성)
2
5
5
4
신분 5

만화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에서는 막부 말 이후 첫 재회로 사생결단을 내고 있던 히무라 켄신사이토 하지메의 싸움 중 등장. 현실의 오쿠보하고는 달리 엄청나게 미화[17]되었다.

위에서 언급된 것과 달리, 신분이 낮은 히무라 켄신이나 사이토 하지메를 차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18][19] 켄신이 "예전보다 많이 수척해졌다"고 말을 건네는 것을 보아[20] 비록 사츠마 쪽 유신지사였지만 죠슈 번 유신지사로 활약한 켄신과도 안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교토편 직전 마차를 타고 가다가 세타 소지로에게 암살당하고, 역사상에서의 진범인 시마다 이치로 일파는 자신들이 했다고 우기기 위해 시체를 난도질한 것으로 나온다. 등장이 많진 않았어도 위에서 언급된 실제 역사상에서의 어두운 행적들과는 달리 작중에서는 국민이 스스로 자신들의 길을 선택하는 국가를 건설하려는 이상을 가진 정치가로 묘사되었다. 죽기 직전에 후쿠시마 현령과 나눈 대화에서 그의 이상이 나온다.

"국가의 기초를 다지려면 30년이 필요해. 이제까지 바친 10년은 제1기 '창업'의 시기였던 거야. 앞으로 10년은 '발전'의 시기. 내정을 정비하고, 국내의 내실을 다지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시기일세. 미력하나마 난 그 제2기 10년을, 온갖 역경을 헤쳐서 이루고 싶네. 마지막 제3기, '수성'의 시기는 후발 현자에게 맡기고, 동시에 의회를 열어 정치를 민정으로 이행. 그렇게 일본은 '국민국가'로 거듭나 유신은 그 진정한 완성을 보게 될 걸세."


이를 현령에게 들은 사이토 하지메는 "종래의 에도나 메이지처럼 쇼군이나 천황이 모든 걸 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자신들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국가라고? 너무 장대한 이상이로군"이라고 짤막하게 코멘트하기도 했다.[22] 성우는 사카구치 요시사다/온영삼(애니메이션), 오오츠카 아키오 (PS유신격투편), 마츠야마 타카시(2023). 작가인 와츠키 노부히로는 오쿠보 도시미치를 대단히 높이 평가했는지 그의 말에 의하면, 바람의 검심에서의 생김새는 링컨을 참고하기도 했다고. 그래서인지 일본의 에이브러햄 링컨에 비유하며 칭찬하기도 했다.


5.2. 라스트 사무라이[편집]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삼은 인물인 오무라가 등장하며, 독특한 수염은 그대로지만 간신배 타입의 뚱뚱보[23] 로 나온다. 게다가 오쿠보를 모델로한 오무라는 사리사욕을 위해서 일본의 옛 전통을 팔아치우려는 개화파의 우두머리로, 사이고를 모델로 한 카츠모토가 존왕양이파 사무라이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묘사해 실제 역사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1876년 시점에는 오쿠보는 내무성의 내무경으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정권의 최고 위치에 있었다. 일개 미군 대위 출신의 교관을 직접 만나서 스카웃하는 위치가 아니었다.

5.3. NHK 대하드라마[편집]


NHK 대하드라마나는 듯이》(주연)와 《신센구미!》에서도 등장. 사이고와 함께 사쓰마 번의 대표로 나오는데, 실제 모습을 반영하듯 상당히 깐깐하고 불친절한 인상이다. 문제는 사실상 사이고의 쩌리 역할이라는 것. 삿초 동맹이 성사될 때는 사이고만 나오는 데다 후에 등장할 때도 회담이나 정국 등을 주도하는 건 죄다 사이고의 몫이다. 더군다나 오쿠보가 불친절하긴 하지만 평범한 인상인데 반면, 사이고는 후덕하면서도 뇌리에 보다 쉽게 각인되는 외모인데다 사이고가 능수능란한 언변을 자랑하는 능구렁이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존재감을 더욱 어필한다. 때문에 오쿠보는 마치 사이고의 부하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마저 나타날 정도.

야에의 벚꽃에서도 등장. 우리에게는 용과 같이 시리즈도지마 다이고 성우로 유명한 토쿠시게 사토시가 맡았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다룬 2018년 드라마 세고돈에서도 주역으로 등장했다. 배역은 에이타가 맡았다. 종전처럼 깐깐하고 권위적인 캐릭터이지만, 절친 다카모리에게만은 누구보다 든든한 맹우로 그려지고 있다.


5.4. 고종, 군밤의 왕[편집]


보신 전쟁이 무승부로 끝이 나 신정부가 일본 전역을 장악하지는 못해 개혁의 속도가 느려졌지만, 서남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암살당하는 일 없이 20년 이상 장기집권 했다. 그런데 자기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도쿠가와 요시노부라서 씁쓸해한다.


5.5. 기타[편집]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저 위의 사진을 참고했는지 저 사진처럼 독특한 수염을 달고 나온다. 워낙 독특한 스타일이다 보니 먼나라 이웃나라뿐만 아니라 바람의 검심부터 해서 유신 이후의 오쿠보가 등장하는 매체에서는 다 저 카이저 수염으로 묘사되는 편.


6. 둘러보기[편집]


스즈키·아소·오쿠보·요시다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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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고조부
외고조부
미시마 미치츠네
오쿠보 도시미치
2대
증조부
아소 다키치
3대

외조부
아소 다카키치
요시다 시게루
4대
장인
스즈키 젠코
5대
본인
처남
아소 다로
스즈키 슌이치
아소 치카코 (처)
6대
아들
아소 마사히로

※둘러보기 : 일본의 정치 가문
※ 가계도는 아소 다로 제92대 내각총리대신을 기준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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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85년 내각총리대신 직책이 신설될 때의 내무경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내무대신에 그대로 유임되었다.[2] GHQ 체제에서 내무성이 아예 폐지되었기 때문에 개명은 아니다.[3] 파병의 근거는 1871년 류큐의 어민 54명이 대만에 표류했다가 현지 주민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이때 류큐는 사쓰마 번의 속국이었지만 아직 일본의 완전한 영토로 편입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무엇보다 출병은 사건이 발생한지 몇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명분에 불과했다.[4] 지조 개정으로 인한 조세 부담 상승, 징병령 발효로 인한 병역 부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 상승이 겹쳐 유신 초반 농민들의 증오는 상상 이상이었다.[5] 마차 안에서 서류를 읽던 오쿠보는 시마다 일당에게 끌려나왔고, 오쿠보는 '무례한 놈'이라고 호통을 쳤지만 말 그대로 난자되어 살해당했다. 전신에 16개의 검상이 있었는데, 이 중 8개가 머리에 있었으며, 이때 시마다 일당이 얼마나 칼을 세게 휘둘렀는지, 오쿠보의 시신이 발견된 당시 칼날이 목을 뚫고 땅바닥까지 박혀 있었다고 한다.[6] 당시 대경시(경시총감)이던 사쓰마 출신 카와지 토시요시는 시마다 일당의 움직임을 미리 알아챘으나 카가번 출신 인사들이 뭘 할 수 있겠냐며 무시해 막지 못했다.[7] 당초에는 고향 사쓰마에 묻으려 했지만, 사쓰마 사람들이 오쿠보를 고향을 짓밟은 배신자로 여겨 거부했다.[8] 오쿠보 본인은 사쓰마 번주의 가신 출신.[9] 이런 그조차도 하급무사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를 중용했는데 이는 유신 초기 이토의 능력이 출중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10] 에토 신페이는 메이지 정부에서 참의, 사법경(법무부 장관직)을 맡았고, 자신이 관여한 메이지 정부 신법률에는 효수형 같은 전근대적인 악법을 폐지했다. 에토는 형법에도 없는 처벌을 당한 것이다. 더구나 사법 제도를 무시하고 항소도 못하게 한 암흑 재판이었다.[11] 다른 유신 3걸 중 하나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도 180cm의 거구였다.[12] 반대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경우 권력으로 횡령을 해먹는 데에 열성적이어서 당대에 말이 많았을 정도였다. 현재 가치로 100억 엔 이상 되는 국방비를 꿀꺽해서 상인에게 투자하라고 맡겼는데 돈을 다 날려먹어서 해당 상인이 사죄하며 자살하는 촌극이 벌어졌을 정도.[13] 정작 노부아키 본인은 양아버지가 일찍 죽으면서(7살에 보신전쟁에서 전사) 친아버지인 오쿠보와 계속 같이 살았고, 이와쿠라 사절단도 친아버지와 같이 동행했다.[14] 울릉도독도조선의 영토이며 일본과는 무관하다는 내용이다.[15] 아래 장남, 차남, 3남, 5남, 장녀만 낳았다. [16] 아래 4남, 6남, 7남, 8남의 생모. [17] 위 내용을 읽었으면 알겠지만 미화 정도가 아니라 걍 다른 사람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성격부터 사상까지 정반대다.[18] 사이토에게도 "자네가 신선조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여기서 두 사람이 죽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라며 부드럽게 말렸다.[19] 켄신이야 업적이 업적이니 백보 양보해서 개인적으로 인정했다고 할 수 있지만, 사이토는 아예 반대쪽인 막부쪽 사람이었다. 오쿠보가 이 정도로 허물없이 대하는게 오류다.[20] 이때 오쿠보의 대답이 "옛 시대를 부수는 것보다 새 시대를 세우는 것이 몇 배는 더 힘들더구먼."였다.[21] 오쿠보에 대한 립서비스가 과한 것이 이후 활약하는 정부 인사들을 보면 초기 유신지사들도 많았다. 이들은 성격이나 파벌 문제, 제국주의적 사상 등에 대해 비판이 나오지만, 엄연히 근대 일본의 건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을 세운 걸출한 인물들이다.[22] 오쿠보에게 재능을 인정받아서 출세했다는 카와지 토시요시 경시총감(역시 실존 인물이다. 실제로도 일본 최초 경시총감으로 일본 경찰의 아버지인 인물)은 낙담한 와중에도 "하지만 오쿠보 경만 건재했다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이상이었다"고 아쉬워했다. 사이토 하지메 역시 켄신과의 대화에서 "유신삼걸의 마지막 지도자를 잃었으니 이제 정계에는 역량 떨어지는 2, 3류 떨거지들 뿐이다. 앞으로 확실하게 '일본의 방황'이 시작될 거다"라고 말한다.[21][23] 하지만 사진을 봐도 뚱뚱한 편은 아니다. 도리어 키가 크고 깡마른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