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문제점 및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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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문서 ]


1. 개요
2. 비판
2.1. 패널들의 태도 문제
3. 논란 목록
4. 1~3화 설민석 강의 편
5. 4화 페스트
6. 5화 진주만 공습과 핵폭탄
7. 6화 진시황제
8. 13화 네로 황제
9. 19화 냉전
10. 33회 초한지(항우와 유방)
11. 44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1.1. 쿠치마 정권 문제를 친서방 vs 친러 갈등으로 강의한 왜곡
11.2. 유셴코 vs 야누코비치를 친서방 vs 친러로 강의한 왜곡
11.3. 경제적 이유로 인한 친러 야누코비치의 EU 서명 보류에 친서방 국민들에 의해 유로마이단의 과격시위가 발생했다는 왜곡
11.4. 무장 시위대의 키이우 의회를 점거에 의해 친러 대통령이 물러났다는 왜곡
11.5. 결과
13. 56화 기축통화 달러
15. 78화 이란 역사 편
16. 106화 영락제자금성
17. 108화 합스부르크가의 비극
18. 109화 화산폭발과 백두산
19. 116화 오펜하이머
20. 123화 교황의 탐욕


1. 개요[편집]


tvN 역사 예능 벌거벗은 세계사의 나오는 문제점과 비판을 정리한 문서

2. 비판[편집]


  • 시청률에서 보다시피 화제성도 크나 성공적인 시청률과 다르게 첫회 분부터 지적이 나오며 비판 여론이 치솟았다. 전반적으로 자극적일 뿐만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틀린 내용이 많았다. 게다가 2화의 경우 이집트 자문을 맡은 전문가가 프로그램이 자문 내용을 하나도 반영하지 않음은 물론 수준미달의 사실확인임을 지적하고, 자문 과정에서 제작진이 보여준 각종 추태[1]까지 폭로하면서 제작진이 사과했다.(#)[2] 이후 프로그램명에 이름까지 들어간 진행자 설민석의 논문 표절 보도와 함께 그의 하차로까지 이어졌다.

  • 설민석의 하차 이후 그에게 가려져 있던 제작진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6시간 장시간 녹화에 1시간 반 편집본이 방영이 되다 보니 시대 배경 설명도 빈약하게 편집했다는 점이다.[3] 또한 중간에 뜬끔없는 미리보기나 생각보다 많은 퀴즈 등 흐름이 끊기는 편집으로 인해 오히려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만들었다.

  • 주제 설정도 자극적인 주제들로만 구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4화 페스트, 7화 로마 건축사를 제외하고 모든 회차 전쟁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였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좋기는 하지만 1, 3화 같은 경우에는 강의 내용이 아이들에게 보여주기에는 굉장히 잔인하고 자극적인 내용이 굉장히 많았다는 점[4]이다. 설민석 하차 이후 스페셜 강사로 진행되면서 잔인한 부분은 최대한 줄어들기는 했으나 주제는 여전히 전쟁 중심으로 갔었다. 이는 시즌 2가 되면서 사건이 아닌 인물 중심으로 가는 것으로 전향하며 다소 해결됐다. 다만 위인이나 역사의 유명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서술하다보니 필연적으로 주제에 전쟁이나 자극적인 소재가 들어가긴 한다[5]지만 인물이 핵심인지라 전쟁 자체에 포커스를 두기보단 '이 인물이 이러한 사건을 일으켰다' 정도로 짚고 넘어가는 수준으로 크게 순화되긴 했다. 심지어 시즌 2 최초의 '사건 중심 편'인 '냉전 편'에서도 전쟁과 관련된 내용은 어느 정도 축소했다. 전쟁처럼 사건 자체를 포커스에 뒀던 시즌 1과 비교하면 상당히 할애량이 줄어든게 눈에 보일 정도.

  • 그리고 역사에 대한 정보가 적거나 전혀 관계가 없는 주제로 진행하는 부분에서 비판이 나오고 있다.[6] 대표적으로 90화의 '바다 오염'과 97화의 '진화론의 돌연변이, 우생학', 107화 '인공지능의 역습' 편 등 일부 에피소드에서 혹평이 나오고 있다. 그나마 97화 에피소드는 다른 에피소드들과 달리 우생학의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았지만, 과학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설명을 하다보니 아쉬움이 많다는 의견이 있다.


2.1. 패널들의 태도 문제[편집]


일부 에피소드에서 현 패널들이 문제가 되는 태도를 보여 비판이 나오고 있다. 세계사를 강의하는 교수가 문제를 말할 때 역사와 전혀 관계가 없는 정답을 말하거나 강의가 진행하는 도중에 쓸데없는 농담을 말하면서 시청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7]


3. 논란 목록[편집]



4. 1~3화 설민석 강의 편[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설민석/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4화 페스트[편집]


4편에도 많은 오류가 있었다. 자문에 참여한 박흥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카파 공성전에 관한 자료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뢰할 수 없으며, 흑사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르네상스라는 희망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후 흑사병이 발생한 사실을 지적하고, 그밖에 강의 전반에 깃든 중세에 대한 편견을 비판했다.

중세는 신본주의이고, 르네상스는 인본주의라는 단순한 도식으로는 당대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으며[8] 인민 주권, 권위의 상승이론과 같이 근대의 특징이라고 여기는 것들의 상당수가 이미 중세 시대부터 오랫동안 준비되고 형성된 것들이었다.[9] 설령 흑사병이 그러한 개념의 발전을 촉진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흑사병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이 전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아래의 박흥식 교수의 논문에도 언급되는 것처럼 자선이 보편적 인 의무로 간주되었던 이전과 달리 흑사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빈민층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강화되었다.

중세인들이 신앙에만 의존하며 흑사병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거나, 근대 초기에 로마 교황의 권위는 몰라도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등의 설명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 관계가 틀린 것이다. 일례로 '밀라노'처럼 재빠른 격리조치 등을 실행하여 큰 피해 없이 넘긴 케이스도 엄연히 존재한다.[10] 또한 이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명확한 반박 사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1347년 10월 초 제노바의 갤리선이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흑사병을 퍼뜨린 이래로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유럽 대부분의 지역은 치명적인 전염병의 굴레에 빠져들었으며,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입었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각 공동체들도 점차 적응력을 갖게 되었다. 도시들이 초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것은 이 전염병이 전방위적으로 미칠 파괴력을 미리 가늠할 수 없었으며, 공동체의 지도층 가운데 다수가 희생을 당하여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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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중북부 도시들 가운데 흑사병에 대한 도시의 대응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피스토이아이다. 이 도시는 인근 도시들이 흑사병으로 피해를 입자 그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보건위생규정>(Ordinamenta sanitatis)이라 이름붙인 법령을 제정하여 대응했다. 1348년 5월 2일 제정된 이래 6월 중 순까지 무려 세 차례나 개정된 이 법령은 당시 도시의 구체적인 대응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총 23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법령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조치는 피사나 루카와 같이 이미 전염병 발생이 확인된 지역을 방문하거나 그곳으로부터 도시로 진입하는 행위를 금지한 것이다. 문지기들은 어느 누구도 비밀리에 잠입하지 못 하도록 철저히 경계를 서야만 했으며, 불법적으로 들어온 자는 발각되면 500 데나리우스라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 시민들이 불가피하게 감염지역을 여행해야 할 경우에는 시참사회의 특별 허가가 필요 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품도 통제했으며, 특히 직물의 반입을 경계했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보고했듯이 직물을 통해 오염된 독기가 전염병을 옮길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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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흑사병 시기 도시정부가 시행하였던 여러 조치들은 사실상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 일부 중북부 이탈리아의 도시에서는 그 이전에도 전염병이 발생하면 거리 청소, 비위생적 요소 제거, 위험인물 추방, 종교적인 속죄행진 등으로 질병에 대처했다 . 예컨대 피렌체의 1325년 <도시법>은 도시 내에서 동물의 가죽과 같이 악취를 풍기는 상품의 교역을 금지시켰고, 공적인 장소에서 도축도 금지시켰다. 정기적으로 시장과 도시 전역에 걸쳐 청소 작업도 행하여졌고, 분뇨 구덩이는 밤에만 비우도록 했다. 이와 같은 조치들은 독기가 공기를 오염시키고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는 오랜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1348년 3월 피렌체에 흑사병이 발병했을 때도 앞선 시기의 환경개선조치들을 재차 실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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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물이나 쓰레기를 치워 도시의 위생상태를 전반적으로 개선하고, 육류 및 생선의 찌꺼기 처리과정을 비롯하여 식료품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며, 흑사병 환자들을 수용할 특별병원을 한적한 지역에 건설하여 환자들을 효율적으로 격리시키고 치료하려 노력했던 점 등은 이 시기에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었던 보편적인 조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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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중세 말기에도 외부인들에게 배타적인 공간이었지만, 근대 초기까지 이어진 만성적인 흑사병으로 인해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정부 당국은 전염의 위험성이 큰 빈민들을 도심의 공공장소와 중심가로부터 격리시킬 기회를 얻었다. 흑사병 환자들의 이동을 제한하거나 금지시키던 조치들로 인해 빈민들과 하층계급은 도시 내에서 뿐만 아니라, 타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시 당국의 각종 통제조치들, 즉 출입금지와 위험한 인물에 대한 보고 의무, 빈민들과 떠돌이들에 대한 추방 등은 점차 강화되는 추세를 띠었다. 흑사병은 근대 초 부랑자 및 빈민들에 대한 도시의 편견과 억압에 빌미를 제공했으며, 그 결과 유랑민들의 삶은 더욱 위험한 상황에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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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 <흑사병에 대한 도시들의 대응>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져 널리 퍼진 신화, 즉 '과학자'와 '종교주의자' 사이의 장대한 논쟁을 묵인한다. 유감스럽게도 양 진영의 일부 구성원들이 오늘날까지 이런 신화를 지속시키는 활동을 하고 있지만, 어떠한 과학사가도 이러한 '갈등' 모형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 상황을 올바르게 반영하지 못한다. 16세기와 17세기, 그리고 중세 시대에는 '종교주의자'의 박해에서 벗어나려고 고군분투하는 '과학자' 진영이 존재하지 않았다. 박해와 갈등이라는 대중적인 이야기들은 기껏해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거나 아니면 과장한 것이며, 최악의 경우 민간에서 지어낸 이야기다(갈릴레이에 관한 3장의 언급을 참고하라).

근대 초기의 자연철학을 이해하려면 오늘날의 여러 가지 상식적인 가정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첫째, 거의 모든 유럽인, 특히 이 책에서 거론된 모든 과학사상가는 기독교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현대적이든 아니든 간에 과학 연구에는 무신론-에둘러 표현하자면 '회의론'-이 필요하다는 개념은, 과학 자체를 종교로 삼기를 바라는 (대체로 자신들을 그러한 종교적 위계질서에 포함시키는) 이들이 제안한 20세기의 신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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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런스 M. 프린시프, 《과학혁명》


애시당초 저 시대에는 병원균의 존재를 몰랐다.[11] 당시 주류 견해는 '모든 질병과 해충, 해수 등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였으며, 신앙에 의지하거나 교리에 의지하는 것 역시 저렇게 '인간을 잔혹하게 죽이는 질병이 자연적으로 발생했다 = 우리의 타락으로 신이 심판을 내리는 것이다'라는 인과관계를 유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당시 인류가 질병에 무지했던건 맞지만 이걸 무조건 신앙의 탓으로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12]

그리고 교황의 권위가 줄어든 이유는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더불어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간의 알력다툼에서의 교황의 열세가 큰 작용을 했으며, 결정타로 아비뇽 유수에 의해 세속 군주(프랑스 왕)가 교황보다 더 강한 힘을 보인 것을 증명하여 교황의 권위가 크게 추락했다. 이 과정에서 흑사병의 도움이 아예 없었다는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흑사병이 100% 원인이 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가톨릭의 영향력이 줄어든 이유는 가톨릭 자체의 부정부패와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이용한 《성경》 인쇄로 책의 가격이 줄어들어 이전보다 사람들이 더 쉽게 《성경》을 접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면죄부 판매라는 부정부패의 끝판왕 덕분에 결정타를 먹은 것이다. 이 면죄부와 더불어 가톨릭의 부정부패가 만연하자 결국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프로테스탄트가 득세하게 되는 등의 일련의 변화를 거치며 가톨릭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을 뿐이다. 즉, 어느쪽이건 흑사병 하나로 퉁칠 수 없는 '시대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에 가깝다.


6. 5화 진주만 공습과 핵폭탄[편집]


  • 5회차는 1~4화와 다르게 해당 회차를 감수했던 전공자와 함께 녹화해서인지 큰 오류는 없었다. 굳이 자잘한 오류를 손꼽자면 리틀 보이 투하를 설명할 때 진주만 공습 당시를 설명할 때 잘만 사용한 육군항공대란 단어 대신 아직 창설되지 않은 공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이 있다.[13]

  • 최태성 강사가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을 국방부 장관으로 소개하였는데, 실제로 당시 미국은 전쟁부(육군부)와 해군부로 이원화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 미국에서 국방부는 2차 대전 이후 설립됐으며, 때문에 초대 국방부장관도 1947년 현 미국 국방부의 전신인 '미합중국 국가군사기구' 소속 장관으로 '제임스 포레스탈'이란 인물이 최초로 지내게 되며, 이후 1949년에 국방부로 개정되며 현재에 이른다. 실제로 미국은 현대에도 국방부 산하에 육군부/해군부/공군부로 부서가 나뉘며, 각 부서의 장관이 따로 배정된다.

  • 한반도 분단에 대한 설명 도중에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오류를 범했다. 단, 현재까지 남아있는 분단국가 중 내부의 문제 없이 오로지 외세에 의해 갈라진 국가를 의미하는 설명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게 좀 더 쉽게 다가오기도 하고. 현재 한국 외의 분단국가로는 대만과 중국, 북키프로스와 남키프로스가 있다.[14] 하지만 중국과 대만은 국공내전의 결과 국민당군이 패퇴하여 타이완으로 도망치고,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집어삼키며 분열된 내전에 의한 분단이며, 북키프로스와 남키프로스 역시 터키계의 북키프로스와 그리스계의 남키프로스가 서로 내전에 준하는 대립을 일으켜 터키와 그리스, 영국의 개입이 있었다지만 엄연히 내분으로 갈라진 케이스이다. 하지만 한국은 외세가 분열시키기 이전까진 서로 어떠한 군사적 대립도 없었으며, 오롯이 외세의 간섭에 의해서만 분열된 유일한 분단국이라고 볼 수도 있다.[15]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분단국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카미카제(가미카제)를 보여주는 자료영상에 슈투카의 풍압식 사이렌(제리코의 나팔)의 소리를 사용했다. 사실 제리코의 나팔이 강렬한 인상을 남겨 전세계적으로 비행기가 급강하하면 풍압식 사이렌 소리가 난다고 믿어서 비행기가 급강하하거나 추락하는 장면이 들어간 2차 세계대전 기록영화 또는 영상 매체에서 제리코의 나팔 소리를 첨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 카이로 회담 부분에서 장제스의 국기가 대만국기가 아닌 중국국기로 표시되었다. 그나마 잠깐 지나가는 장면이라 다행이었지만 굉장히 위험한 부분이었다. 우리나라로 대입하면 이승만 대통령 사진 밑에 국기를 인공기로 붙인 것과 같기 때문. 장제스는 오히려 중국 공산당을 일본보다 더 큰 위협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반공정신이 투철했던 사람이었다.


7. 6화 진시황제[편집]


  • 진나라가 서쪽에 위치해 실크로드 무역을 운운했는데, 중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해봤다면 실크로드가 실제로 개척되고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전한의 무제가 장건을 파견한 이후라는 점은 누구나 알 것이다.
    • 실크로드는 세 가지 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오아시스로를 말하는 것이고, 원래 있었던 초원길은 이미 기원전 8~9세기부터 만들어져 무역길로 통용되어 왔다. 오아시스로가 따로 만들어진 이유는 흉노가 초원길을 막는 바람에 전한에서는 그 위험을 줄이고자 돌아가는 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 당시에는 유목민들이 사용하던 초원길이 있었지만 이 길을 진나라가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실제로 초원길은 고비사막 위(현재 러시아 영토)로 한참 돌아가는 길로 진나라 영토와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방송에서는 실크로드를 통해 일찍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인 진나라를 언급했는데 당시 어떤 서역 문물을 받아들였기에 강해졌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진나라는 서역의 문물이 아닌 유목민족의 기마전술을 받아들여 강한 병력을 갖춘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물론 유목민의 기마술도 서역의 문물이라고 주장하면 할 말이 없다.

  • 만리장성을 설명하며 현재 남아있는 석조로 지어진 만리장성 사진을 이용했는데 이는 엄연히 현대에 다시 쌓았거나 명나라 시기에 석조로 개축하여 보이는 모습이다. 실제로 진나라 시대에 쌓은 만리장성은 토성이었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측도 아닌 정설로 취급하고 있다. 다만 사진자료 이외의 오류는 딱히 없는데, 실제로 만리장성은 본래 있던 장성들을 하나로 이으며 다듬은 과정인데다가, 진~한대의 만리장성은 명나라~현대 중국으로 오면서 중국이 대대적으로 보수했기 때문에 고대 시기의 만리장성은 남은 것이 거의 없고, 사람들의 머릿속 만리장성은 명~현대 시기의 것이므로 구분하기 쉽게 일부러 현대의 것을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다.

  • 서복의 얘기를 하며 한반도를 거쳐갔다는 얘기를 했는데 방송에서도 얘기했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문제는 방송 중에 남해 곳곳에도 '서복과차'라는 명문이 남아있는 각석들이 발견된다며 자료사진을 띄웠는데 이는 도망가는 사람이 자기 흔적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닐 리가 없으니 서복이 남긴 것이 아닌 후대에 한반도인들이 전설을 떠올리며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는 가르치던 강사가 아닌 게스트가 말한 것이므로 강사의 오류는 딱히 없다.


8. 13화 네로 황제[편집]


  • 네로의 성장 과정에서 모후인 소 아그리피나칼리굴라 시대때 레피두스, 율리아 리빌라 등과 공모한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 암살 미수 사건으로 기소되어, 명확한 증거로 유죄 판결을 받고 유배된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에 의해 누명을 쓰고 처형된 네로의 고모인 도미티아 레피다가 유배 중인 소 아그리피나 대신 네로를 키워줬음에도 불구하고, 소 아그리피나가 그녀를 죽인 사실이나, 네로가 친고모가 무죄임에도 뻔뻔하게 재판에서 불리한 증언을 했다는 것도 나오지 않는다.

  •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가 소 아그리피나와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네로를 망친 이야기나 세네카가 벌인 악행이 전혀 설명되지 않고 있다.

  • 네로의 본명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이며, 입양 후 즉위 전 이름은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이다. 그런데 가계 설명과 입양 과정에서 부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실제 악행은 빠져 있고, 그가 방계 황족이라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네로의 양자 입적 후 이름이 잘못 고증된 영화 자료를 그대로 옮겨 소개하고 있다.

네로가 입양된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로 율리우스 씨족과 하나의 가문이 되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로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따라서 네로의 입양 전 사용한 개인 이름(프라이노멘)인 '루키우스'를 철저히 금지해 사용하지 않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에서 루키우스와 클라우디우스가 같이 사용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는 클리엔텔라 관계로 클라우디우스 가문에게 성씨를 하사받은 이들의 후손들도 마찬가지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맏사위였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루키우스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클라우디우스를 아예 빼고 이름을 지어줬다.


9. 19화 냉전[편집]


  • 냉전의 3번 문항인 '대리전쟁'에서 한국전쟁을 '최초의 대리전'이라고 소개했으나 이후 대리전의 예시에서 국공내전이 언급됐다. 하지만 국공내전은 냉전대립보다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어오던 전쟁이었다. 중간에 일본군의 대대적 침공에 의한 중일전쟁 발발로 공산당과 국민당이 일시적으로 연합해 일본군에 대항했을 뿐 본질적으로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둘은 앙숙이었고, 일본이 패퇴하자마자 다시 2차 국공내전을 치른게 우연히 냉전과 시기가 겹쳐있었을 뿐이다. 2차 국공내전마저도 1949년에 국민당이 국부천대를 단행하며 사실상의 종전을 맺은, 1950년에 시작된 한국전쟁보다도 먼저 끝난 전쟁이다.

물론 국공내전의 결과가 냉전에 끼친 영향은 컸지만[16], 대체로 냉전의 최초 대리전으로 평가하는 전쟁은 6.25 전쟁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공내전 자체는 냉전과는 무관한 중국 군벌의 세력싸움의 연장선이었을 뿐이었다.[17] 실제 강의자는 한국전쟁을 최초의 대리전이라 칭했으니, 제작진이 '공산권과 비공산권이 싸워 공산권이 승리한 전쟁'이라는 결과만 가지고 무리하게 예시로 넣어 발생한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10. 33회 초한지(항우와 유방)[편집]


후술할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전체적으로 가공의 소설인 《초한지》를 중심으로 해석한 결과로 빚어진 문제가 많다. 특히 강의 내용을 보면 거진 고우영 화백의 《초한지》를 보고 강의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해당 작품에서 설명하는 인물상과 거의 일치하는 방향으로 인물들을 설명하고 있다.[18]

  • 《초한지》는 분량상 최소 2부작으로 해야했으나 1부작으로 빠르게 하려다보니 전후 사정을 전부 스킵하고 진행되어 문제가 많은 편이다. 초 의제가 항우에게는 그의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니 송의를 상장으로 삼고 항우를 차장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하고 관중으로 진격하는 루트를 명령하고, 유방은 포용성이 있고 관중을 지배하기 좋은 인재이니 일방적으로 유방을 관중왕으로 밀어줬다는 듯이 이야기했는데 이는 전후 사정이 완전히 생략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송의를 그 자리에 임명한 것은 애시당초 항씨 집안에 의해 왕위에 오른 초 의제가 항량이 함양을 치러 가던 도중 사망하자 항우를 견제하기 위해 송의를 항우 위에 둔 것이지만 유방을 다른 루트의 사령관으로 삼은 것이 꼭 항우를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보기는 어렵다.[19][20]

  • 항우가 함양 입성 이후 단행한 행위 중 진시황릉을 파헤치고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를 진시황릉 병마용 일부가 불탄 사진을 보여주며 정설처럼 이야기했는데 이는 아직 학계에서도 설왕설래가 많은 부분이며, 진시황릉을 전부 발굴해야만 밝혀지는 부분이다. <한고제 본기>(漢高帝本紀)에서 항우의 죄목을 나열하여 명분 얻기로 쓰였으나 정작 진나라 멸망까지 적은 <진시황 본기>에서도 일언반구가 없으며 사마천의 《사기》 <항우 본기>에도 이러한 내용은 적혀져 있지 않다. 진나라는 진시황릉을 만든 뒤 이에 연관된 인부와 관계자를 전부 죽여 무덤의 위치를 숨겼는데 초한쟁패기를 각색한 소설에서는 항우의 장수였던 경포가 진시황릉 건설에 복역한 죄수 출신이라는 성분을 넣어 도굴을 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 설명에서 전체적으로 유방에 대한 평가에 구멍이 많다. 특히 유방의 장기인 용병술전략적인 대담성은 죄다 언급하지 않거나 줄여서 말하고, 참패는 크게 부풀렸다. 가령 유방의 가장 큰 공적인 한신의 등용 역시 일면식도 없던 한신을 대뜸 대원수로 기용했던 용인술은 싹 지운 덕분에 한신은 배수진을 언급할 때 쯤에야 겨우 언급되며, 팽성 전투에서 한군의 패배의 원인[21]은 전혀 설명하지 않고, 항우가 30,000명의 정병을 이끌고 560,000명을 깨부쉈다는 결과만 말했다.

결과적으로 공신 처형 역시 처형당한 공신들의 과오는 덮고, 이성왕이었단 이유로 처형했다는 듯이 말하여 패널들에게 한고제 유방이 무능한 폭군으로 낙인찍히게 만들었다. 문제는 당시 한나라가 이제 막 패권을 쥔 신생 국가였고, 당시 중국 땅은 통일보다 분할된 시절이 더 길었기 때문에 한나라는 좋든 싫든 통치 기반의 확립을 위해서라도 이성왕들을 견제해야하는 입장이었으며, 오히려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공신 9족 멸살' 등을 생각하면 유방은 되려 매우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고 봐도 무방하다.[22] 또한, 이성왕 출신들은 유방의 수하로 있었던 시절부터 반기의 조짐을 보이거나 대가가 없으면 쌩까거나 밍기적대는 태도를 자주 보였던 만큼 어찌보면 이성왕들의 숙청은 그들의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 있지만[23][24], 이러한 요소를 하나도 말해주지 않아 패널들이 제대로 혼동을 일으켰다.

  • 한신의 북방정벌에서 배수진을 훌륭히 선보인 정형 전투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배수진을 본 조나라 왕이 비웃는 발언을 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데 애초에 어느 문헌에도 이런 발언은 없으며 진여가 한신을 깔봤다는 내용은 여러 문헌에 있다. 이는 당시 조나라 왕 조헐진여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 겉으로 보이는 관계만 군신관계일 뿐 조나라는 진여가 다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후에도 유방이 한신을 위험분자로 보게 되는 제나라 정벌과 그로 인한 참모 역이기의 죽음 및 제나라 왕으로 봉해달라는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고 진행했다.

  • 가장 큰 문제로, 한신의 실책을 전부 덮거나 언급하지 않았다. 그 고우영 화백조차도 최소한 한신의 행적을 언급은 해줌으로써 독자들에게 한신과 유방 중 누가 더 잘잘못이 있는지 따질 기회라도 줬는데, 이쪽은 아예 한신의 실책을 모조리 덮은 결과, 최종적으로 한신이 무고하게 처형당한 충신으로 미화되어 버렸다. 《초한지》를 조금이라도 읽으면 알겠지만, 유방이 처형시킨 공신들은 대체로 그만한 야욕을 드러내어 견제당한 인물들이었다.[25]

당사자인 한신만 해도 자신의 야욕에 눈이 멀어 괴철의 말을 믿고, 기껏 역이기가 포섭했던 제나라를 공격해 초한쟁패기를 1~2년 더 늦춤은 물론 공신이던 역이기조차 사망하게 만들었고[26], 이후로도 왕위 등을 요구하며 한시가 급한 유방에게 반항하며 밍기적대고, 초왕 시절에는 항우의 측근인 종리말을 거두어 보호하는 등 유방에게 제대로 미운털이 박힌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유방은 그를 회음'후'로 강등시키는 선에서 그쳤으며, 실제 처형은 유방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여태후가 손을 써 처형당한 것이다. 즉, 한신의 처형은 어디까지나 그의 오만함이 원인이었던 것인데, 이를 말하지 않고 넘긴 결과, 패널들조차 혼동할 정도의 큰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실제로 한신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평가받는 초대형 공신이었던 소하는 후대인 혜제때까지 천수를 누리고 갔고, 마찬가지로 핵심 공신이었던 장량 역시 야사와 달리 끝까지 유방의 책사로써 곁을 지켰었다. 소하, 장량, 번쾌는 유방의 대표적인 3대 공신들이며, 특히 소하는 아예 논공행상에서 1등으로 앉은 인물일 정도였다. 즉, 진짜 공신 견제가 목표였다면 이 셋부터 죽여야 마땅했음에도 이들은 관직을 받고 천수를 누렸으며, 유일하게 번쾌가 사형당할 뻔 했으나, 이것도 공신 견제가 아니라 여후를 위시한 여씨 일가 견제가 더 주된 목적이었다. 야사나 소설에서는 이성왕 견제로 가닥을 잡아놓은 반향인지 소하는 권좌의 욕심이 없음을 내비쳐 목숨을 얻었고, 장량은 아예 신선으로 귀화하겠다고 말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나오는데, 이를 다르게 해석하자면 숙청당한 이성왕들은 권좌를 노리는 행동을 보여서 처형당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토사구팽이란 단어 자체가 한신의 개소리나 다름없는 셈이다. 즉, 한고제 유방의 숙청은 대체로 이성왕 견제와 더불어,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인물들을 심판한 것에 가까웠는데, 이성왕 견제쪽만 크게 부각되어 전해진것이 그대로 강의로 전달된 셈이다.


11. 44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편집]


레오니트 쿠치마 대통령은 동남부지역을 기반으로 당선된 친러시아 성향의 대통령이었거든요. 쿠치마 대통령의 재선이 성공한 이후에 2000년에 들어서는 러시아에서는 푸틴 대통령의 첫 등장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강한 러시아를 건설하겠다는 푸틴의 목표에 우크라이나의 쿠치마 대통령도 러시아에 손을 잡으면서 두 사람이 밀접한 관계를 이루어나갑니다. 푸틴의 집권이 시작되면서 마침 우크라이나 안에서도 친서방 세력과 친러시아 세력이 맞부딪히면서 끊임없는 갈등의 장이 시작됐어요.

그 가운데 대통령 선거출마를 위한 두 명의 대통령 선거 후보가 등장을 하는데 바로 친서방 성향의 후보 유셴코와 친러시아 성향의 후보 야누코비치였습니다. 결국 친서방 세력인 유셴코가 당선이 됐죠.

친서방 세력이었던 유셴코는 당선 이후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그 다음에 유럽연합 가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우크라이나의 정치가 급격하게 친서방 경향으로 기우니깐 대대적인 경제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어요. 바로 가스관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러시아는 지난날 소련에 속했던 나라에 한해서는 상대적으로 싼 값에 가스를 공급하면서 안정적인 가스관 사용을 지속하고 있었는데 우크라이나가 친서방성향으로 기울어지니깐 러시아가 가스공급을 중단해버린거예요. 결국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져서 가스공급이 다시 이루어지긴 했지만 이렇게해서 결국 이 싸움의 승자는 러시아였습니다. 물론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있었지만 러시아의 경제압박에 우크라이나의 경제가 휘청이기 시작하면서 다음 대선에 승자는 친러시아 세력인 야누코비치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면 친서방 세력은 많이 약해졌나요?)

약해질 거라 생각은 했는데 친서방 세력이 결정적으로 어떤 사건을 맞이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주류로 떠오르게 됩니다. 2013년에 EU 가입을 연기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거예요. 야누코비치가 밝힌 이유로는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EU에게서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그 받는 조건으로 강력한 구조조정 그래서 우크라이나의 경제대책에 제동을 거는 대신에 러시아에서는 150억달러를 조건없이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통 크게 하죠. 우크라이나의 이익에 따라서 야누코비치는 EU 가입을 포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유럽연합 가입을 기대했던 이 우크라이나의 국민들과 그동안 움츠러들었던 친서방 성향의 국민들이 이 일로 대규모 시위를 하게 된 거예요. 이게 바로 '유로마이단'이라는 사건이죠.

# 9:50-13:37

# 19:42-23:30

벌거벗은 세계사 44회


무장 시위대가 키이우하고 그 의회를 점거하면서 야누코비치 퇴진을 외쳤죠. 결국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 14:28-14:40

# 24:22-23:34

벌거벗은 세계사 44회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 중 최악의 역사왜곡을 보여준 에피소드로 우크라이나에서 존재했던 다양한 갈등을 일방적으로 친서방, 친유럽연합 vs 친러로 왜곡하는 강의로 구성되었다.


11.1. 쿠치마 정권 문제를 친서방 vs 친러 갈등으로 강의한 왜곡[편집]


쿠치마가 논란이 된 이유는 곤가제 기자를 목을 잘라 죽인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었으나 이걸 친서방vs친러로 왜곡한다.

2006년 가을 집권 세력의 비리를 파헤치던 곤가제 기자가 실종된 후 목이 잘린 시체로 발견된 사건으로, 후에 쿠치마 대통령 비서실장 멜니첸코가 유출한 녹음테이프에는 쿠치마로 추정되는 인물이 곤가제를 처리할 것을 지시하는 음성이 나와 서방에서 큰 파장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쿠치마는 미국의 지지를 잃고 급격히 러시아로 기울었다.

허승철. (2021). 러시아의 근외정책과 정치 지도자 선택 :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비교 연구.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72, 331

쿠치마가 논란이 된 이유는 곤가제 기자를 목을 잘라 죽인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었으나 이걸 친서방vs친러로 왜곡한다.

이게 야누코비치를 대선후보로 내세우는 데까지 영향을 주었다.

2004년 2선 제한에 걸린 쿠치마는 3선 개헌과 내각제로의 개헌 등 집권 연장을 꿈꿨으나 5% 정도에 머물던 지지율로 인해 집권 연장을 포기하고, 대신 후계자 물색에 나섰다. 이때 후계자 물망에 오른 친러-중도 정치인은 세르히 티힙코(Serhii Tihipko)와 빅토르 야누코비치(Victor Yanukovich)였다. 티힙코가 중도에 가까운 정치인이었다면, 야누코비치는 친러 성향이 강한 동부 지역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친러 정치인이었다, 국립은행장과 경제장관을 지낸 경제 전문가인 세르히 티힙코는 야당 대표주자인 빅토르 유셴코와 비슷한 경력을 소유하고 대중적 인기도 높은 경쟁력 있는 후보였다. 그러나 집권 2기 동안 동부 지역 올리가르히에 의존하며 국정을 이끌어 온 쿠치마는 결국 동부 지역 클랜(clan)이 지지하는 후보인 야누코비치 도네츠크 주지사를 후계자로 정하고, 2002년 11월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 동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중적 지지가 별로 없고, 중앙 무대 정치 경험도 없는 야누코비치를 후계자로 정한 것은 쿠치마 후계 구도의 패착으로, 결과적으로 2년 뒤 대통령 선거에서 오렌지 혁명이 일어나고 정권을 친서방 노선을 내세우는 소위 “오렌지 혁명 세력”에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허승철 2021, 331-332


D’Anieri는 “야누코비치가 쿠치마와 지역당의 횃불을 들도록 결정한 것은 ‘중대한 실수’였다. 야누코비치는 범죄 전과가 있었고 카리스마도 없었으며, 돈바스 지역 외에서는 인기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결선 투표가 부정선거였다는 것이 드러난 후 실시된 재선거에서 그는 44퍼센트를 득표했다. 이것은 좀 더 경쟁력이 있는 제도권 후보(establishment candidate)가 나섰다면 충분한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라고 지적

허승철 2021, 332



11.2. 유셴코 vs 야누코비치를 친서방 vs 친러로 강의한 왜곡[편집]


이 부분은 곤가제 살인사건을 강의내용에서 제외한 것만큼이나 심각하다. 이 때 유셴코 독극물 사건과 부정투표 사건이 벌어져서 유명한 '오렌지 혁명'이 발생한다.

대통령 선거를 반년도 채 남기지 않은 2004년 여름 야누코비치의 지지율은 15-20퍼센트에 머문 반면, 유셴코의 지지율은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쿠치마 진영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후보를 교체하는 것을 고려하는 대신에 좀 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였다. 9월 5일 정보부장 일행과 저녁식사를 한 유셴코 후보는 독극물에 중독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나 목숨을 구했다.

허승철 2021, 332

야누코비치 지지율이 낮아서 유셴코 독극물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걸 빼버렸다. 그리고 독극물 암살 시도 및 부정선거로 오렌지 혁명이 발생한다.

선거와 집계 조작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 투표자들은 투표가 끝난 저녁 8시부터 시내 중심부로 모여 부정 선거 항의 집회를 시작하여 소위 “오렌지 혁명”이 촉발되었다. 이후 부정 선거 항의 시위 인파가 급격히 늘어나 최대 50만 명까지 마이단 광장과 흐레샤치크 거리를 메웠다. 후에 밝혀진 바로는 중앙선관위 건물 옆에 있는 조랴나라는 극장에 선거조작팀이 본부를 차리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선거결과 집계를 컴퓨터로 조작해서 약 280만 표를 야누코비치에게 몰아주어 선거 결과를 뒤집었다.

허승철 2021 332

독극물 사건, 부정선거, 오렌지혁명 전부 중요한 사건인데 강의내용에서 전부 제외하고 친서방 vs 친러 구도에 입각하여 강의를 진행했다. 차라리 내부에서 보혁갈등과 우크라이나 정부 내부의 고질적인 문제를 집어줬어야 했다.


11.3. 경제적 이유로 인한 친러 야누코비치의 EU 서명 보류에 친서방 국민들에 의해 유로마이단의 과격시위가 발생했다는 왜곡[편집]


야누코비치가 어떤 정치인인지 알면 나올 수 없는 왜곡. 위의 오렌지 혁명 이후 쿠치마와 야누코비치 진영이 졸속으로 통과시킨 게 대통령 권한 축소와 내각제 도입이다.

쿠치마 정권과 야누코비치 진영에서는 재선거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내각제 성격이 크게 가미된 졸속 헌법개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두 가지 결정은 이후 유센코 정권의 국정 수행을 방해하고, 우크라이나의 정치발전을 막는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허승철 2021 333

(이 헌법개정안은 졸속이라 문제가 있었는데 개정 당사자인 야누코비치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엔 개정안의 절차에 문제가 있다며 대통령 권한으로 폐지한다. 아래 설명 참고)
유셴코는 대통령 당선되자마자 쿠치마와 야누코비치를 '용서'해버리는 실책을 범한다.

2005년 초 대통령직에 오른 유셴코는 친서방 외교정책과 개혁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으나, 자신의 암살 시도와 부정 선거를 주도한 정치인들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 실책을 범했고,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했어야 함에도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은 채 국정을 이끌고 나가 야누코비치에게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말았다.

허승철 2021 333

그리고 친서방진영은 분열해서 표와 지역구가 분열된다. 그래서 야누코비치가 내각제 성격이 강화된 체제에서 사회당, 공산당과 연정수립 성공해서 총리로 취임하고 내각을 장악한다.

2006년 3월 23일 실시된 총선에서 야누코비치의 지역당은 전체 450석 중 186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고, 티모셴코가 이끄는 정당이 2위, 유셴코의 집권당은 3위에 머물면서 정치 위기가 심화되었다. 소위 오렌지 혁명 세력 간의 내분으로 사회당이 이탈하면서 야누코비치는 지역당, 사회당, 공산당의 연정 수립을 성공시켜 총리로 취임하고 내각을 장악하게 되었다. 1년 전 대선에서 맞붙은 두 후보가 각각 대통령과 총리를 맡는 2중 권력(dual power)이 형성되어 국정은 거의 마비상태에 빠졌다.

허승철 2021 333

이 때 티모셴코는 내각을 장악한 친러 성향의 총리인 야누코비치와 협력한다.

대선에서 유센코와 손을 잡았던 티모셴코는 차기 친서방 진영 대통령 후보를 노리고, 유센코의 정책을 견제하고 야누코비치와 협력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허승철 2021 333

나중에 야누코비치가 이걸로 심각한 통수를 친다.

그리고 다음 대선에선 야누코비치가 대선 2차 투표에서 당선됐으나 역대 최악의 지지율을 획득한다.

역대 대통령 당선자 결선 투표 득표율

크라프축 61.6%

쿠치마 52.2%

쿠치마 56.3%

유센코 52.0%

야누코비치 48.9%

허승철. (2014). 우크라이나 야누코비치 정권 붕괴의 국내 정치ㆍ경제 요인 분석.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46, 160

포로셴코는 1차에서 54%라는 역대급 득표율 얻어서 2차 결선제 투표 없이 즉시 당선된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5/26/2014052602609.html

젤렌스키는 2차에서 73%라는 역대급 득표율을 얻었다.
https://www.yna.co.kr/view/MYH20190501003800038

현재까지 2차까지 갔는데 야누코비치처럼 득표율이 적은 대통령은 없다. 당선 후 지지율이 취약했던 야누코비치는 본인들이 쿠치마 말기에 개정했던 개정안을 본인들이 무력화시킨다.

야누코비치는 먼저 헌법재판소를 자신에게 충성하는 재판관들로 채우고 2004년의 헌법개정안을 무력화시켰다. 2010년 9월 헌법재판소는 오렌지 혁명의 결과 채택된 2004년의 헌법개정안을 무효로 선언하고, 1996년의 헌법을 복원시켰다.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를 절충한 2004년의 헌법개정안에서는 총리는 의회의 다수당이나 연정세력이 선출하고, 외무장관과 국방장관, 국가안보회의장을 제외한 각료도 총리의 제청에 의해 의회에서 인준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대통령은 의회의 동의 없이 내각을 해산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2004년의 헌법개정조항을 무효화함에 따라 대통령은 총리 후보를 직접 지명하여 의회 인준 없이 임명하고, 모든 각료에 대한 임명권도 행사하며, 의회 동의 없이 내각을 해산할 수 있고, 내각의 의결사항도 일방적으로 취소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허승철 2014 163


그리고 정적에 대한 정치적 탄압까지 하는데 친러 성향으로 당선됐으면서 경쟁자인 티모셴코가 (친러 총리였던 본인에게 협력하던 시절에) 친러행적 한 것 때문에 탄압한다. 이것때문에 서방과 러시아(푸틴)가 야누코비치의 정치적 탄압을 규탄한다.

이 판결에 대해서는 정치적 보복이라는 비판이 국내외 에서 거세게 일었다. 2009년 대선 주자였던 티모셴코가 러시아의 환심을 사기 위해 러시아가 제시한 조건을 크게 거부하지 않고 가스가격 협상을 맺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사법적 심판의 대상으로 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일었다. 7년형의 실형을 선고하고, 피선거권을 7년 박탈한 것은 티모셴코가 2015년 대선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이 판결 결과에 대해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러시아 등의 국가와 유럽 연합, 나토 등의 국제기구, 국제투명성 위원회, 국제사면기구, 프리덤하우스, 국제인권 감시기구(Human Rights Watch) 등이 ‘차별적 사법 정의(selective justice)’와 ‘정치적 탄압(political persecution)’이라고 비난했다.

허승철 2014 162

친러 대통령이 정적을 (본인의 총리권력이 강했을 때) 친러라면서 탄압한 사건이라 러시아(푸틴)가 서방과 같이 '정치적 탄압'이라고 규탄했는데, 이걸 친서방 vs 친러라 요약한 것이다. 친러 야누코비치는 티모셴코를 친러적 행보로 탄압했으나 오히려 본인은 서방 상대로 연속으로 약속을 어겨서 서방 지원이 끊킨다. 그래서 오히려 본인이 러시아에 의존하게 되다가 러시아에 대한 연체금 페널티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난다.

2010년 8월 우크라이나는 IMF와 151억불의 구제 금융을 제공받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IMF가 제시한 이행 조건을 매번 어기면서 두 번에 걸쳐 20억불을 지급 받은 후, 2011년 초부터는 더 이상 재정 지원을 받지 못 했다. 러시아와는 2010년 4월의 ‘하르키프 협정’을 통해 흑해함대 기지 사용 권한을 2042년까지 25년 연장해 주는 조건으로 가스수입가를 30% 삭감 받기로 하였으나, 가스수입가가 국제 유가에 연동하여 결정되게 합의를 하였기 때문에, 2011년부터는 천입방미터 당 가스수입가가 410불을 넘어섰다. IMF의 재정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매달 7-8억불에 달하는 가스수입대금을 갚지 못하게 되자, 연체금에 대한 페날티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유권자들은 러시아로부터의 경제적 혜택을 기대하며 친러정권을 출발시켰지만, 우크라이나 통과 가스관의 지배 지분 확보를 노리고 있었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경제를 회생시키기보다는 가스 대금 누적을 유도하여 가스관 확보를 노리는 정책을 썼다. 결국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부터 큰 경제적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티모셴코 투옥 등의 강압 정책으로 서방으로부터 의 재정 지원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허승철 2014 165-166

티모셴코를 '친러'라면서 정치적 탄압하다가 러시아에게도 비난받고, 본인은 서구와 약속을 어겨서 러시아에만 의존하다 연체금이 페널티가 늘어난다.

그리고 야누코비치 정부의 부패는 역대 최악이었다.

2012년 국제투명성위원회는 우크라이나의 투명성을 176개국 중 144위로 발표했다. 2007년 179개국 중 118위에 비해 투명성 순위가 크게 떨어진 것은 부패가 빠르게 확산된 것을 보여준다. 2012년 국제투자자문회사 어니스트 앤 영(Ernest & Young)은 우크라이나를 콜럼비아, 브라질과 함께 세계 3대 부패국으로 꼽기도 하였다.

허승철 2014 166


위에 인용된 건 국가청렴도이다.
2012년 야누코비치 정부 우크라이나는 점수 26점, 순위 144
2018년 포로셴코 정부 우크라이나는 점수 32점 순위 120
https://www.transparency.org/en/cpi/2018

포로셴코가 야누코비치 이후 역대급 부패했던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와 전쟁하는 와중에 그나마 회복시킨 것이다.

포로셴코는 저것조차 푸틴과 러시아의 침공도중, 그것도 전쟁수행의 일종으로 부패공작을 수행하는 와중에 방어한 것이다.

지난 5월, 미국 국무장관 블링켄은 우크라이나를 방문해서 뿌리 깊게 구조화 되어 있는 부패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부패문제는 내부적으로 개혁과 부패청산에 반대하는 과두 정치세력과 이를 활용하여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침식하는 도구로 삼는 러시아의 작전이 엉켜 있다고 분석했다. 2017년 국제투명성기구(TI)의 보고서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부패를 활용하고 무기화하는 방식을 설명한 바 있다. 젤렌스키 정부에서도 부패는 지속되고 있다는 다양한 보도와 보고서들이 제출되고 있다. 현재 젤렌스키의 개혁과 반부패 노력은 타당하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법제도적 성과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준모. (2021). 코로나19 시대 글로벌 격변과 우크라이나의 반부패 노력 및 개혁과제. 동유럽발칸연구, 45(4), 104

다음은 국제투명성기구(TI, Transparency International)의 국가청렴도(CPI, Corruption Perceptions Index, CPI)이다.

우크라이나

야누코비치

(유로마이단 발생 전)2012년

Score

26

Rank

144


우크라이나

포로셴코

2018

Score

32

Rank

120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2021

Score

32

Rank

122


러시아

푸틴

2012

2018

2021

Score

28

28

29

Rank

133

138

136

https://www.transparency.org/en/cpi/2018

포로셴코는 야누코비치에 의해 부패한 우크라이나의 국가청렴도를 어느정도 회복한데 비해 푸틴의 러시아는 오히려 청렴도가 우크라이나에게 역전됐다.

야누코비치 부패는 상상을 초월한다.

2014년 4월 30일 우크라이나 대검찰청이 밝힌 야누코비치의 국고 횡령액은 320억 달러에 이른다. 대검찰청은 야누코비치가 이 액수의 상당 부분을 현금으로 반출하여 동부 지역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하는 데 쓰고 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정부 1년 예산이 310억 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큰 금액을 야누코비치가 국고에서 빼돌렸는지 알 수 있다.

우크라이나 경제에 정통한 학자인 오슬룬트는 야누코비치가 국고에 직간 접으로 손을 대는 방법으로 매년 80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를 빼돌렸다고 추정했다.그에 의하면 세수에 직접 손을 대거나, 세무 당국에 들어온 뇌물을 상납 받는 방식과 부가가치세 환급액을 횡령하는 수법으로 매년 30억 달러에서 50억 달러를 축적했고, 2010년 유로컵을 비롯한 각종 정부발주 공사를 수의계약하면서 특혜를 준 기업으로부터 수익금의 절반을 걷어들이는 수법으로 매년 최소한 20억불을 벌어들였다. 또한 우크라이나 국내에서 생산되는 180억 입방 미터의 천연가스를 천입방 미터 당 53달러의 싼 값에 구매하여 이를 러시아에서 수입되는 가스 가격인 410 달러에 판매함으로써 매년 최소 30억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허승철 2014 167-168

러시아와 전쟁하며 러시아에 의해 부패공작을 당한 2018년 포로셴코 정부와 2012년 야누코비치 정부 시기 를 비교해도 야누코비치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부패 문제를 생략한다.

그리고 야누코비치가 유럽연합과의 서명 직전에 그만둔 게 친서방 국민 자극해서 유로마이단 발생했다는 부분 이게 정말 왜곡의 절정이다.

먼저 야누코비치가 EU 협력체제의 서명을 마지막 순간에 포기한 것은 나름대로 고심한 정책적 결정으로 보이지만, 우크라이나의 국내 정치 상황을 주의 깊게 관찰한 사람이라면 2013년 말 야누코비치 정123권이 EU 협력체제에 서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여러 근거가 있었다. 물론 러시아가 가스공급가를 30% 할123인해 주고, 150억불의 신용 공여를 약속한 소위 ‘당근’ 정책으로 야누코비치 정123권의 EU 접근 정책을 U-turn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야누코비치는 EU 협력협정 서명의 발목을 잡은 결정적 문제는 티모센코의 석방 또는 신병치료를 목적으로 한 독일 이송이다. 유럽 지도자들은 EU 협력협정 서명의 전제조건으 로 티모센코 문제 해결을 야누코비치에게 여러 번 요구한 바 있다.

허승철 2014 172

EU 서명 조건인 티모셴코 석방을 생략한다. 야누코비치가 티모셴코를 '친러'했다는 이유로 정치적 탄압했다가 서방과 러시아 양쪽에게 규탄받고 EU가 서명의 전제 조건을 내 건건데 강사가 본인 강의에 완전 상반되는 사실 숨기려고 제외시켰다. 방송의 왜곡이 도를 넘었다.


11.4. 무장 시위대의 키이우 의회를 점거에 의해 친러 대통령이 물러났다는 왜곡[편집]


야누코비치는 도망간 것이고 그 원인은 배후를 알 수 없는(야누코비치나 야누코비치 정부가 배후인지 여부가 밝혀지지 않음) 저격병이 등장해서 시위대를 대량으로 저격학살한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교섭을 하는 동안 마이단 광장 근처에 숨어 있는 저격수들이 총을 쏴서 100여 명을 살해했다. 대부분이 시위대였고 우크라이나 경찰도 몇 명 사망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일부분이라도 이 총격에 관여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했다.

대량 학살이 벌어진 뒤 야누코비치를 지지하던 의원단과 그를 보호해 주던 경찰이 등을 돌렸다. 야누코비치는 각종 자료를 팽개친 채 화려한 관저를 빠져 나와 도망쳤다. 자료 가운데는 고문인 폴 매너포트에게 거액의 현금을 지불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매너포트는 2년 뒤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대책 본부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티머시 스나이더,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유강은 옮김), 서울 : 부키, 2019


키예프와 드니프로에서 시위는 대체로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유대인 집단의 지지를 받았다. 마이단 광장에서 자위 대대를 조직한 사람들 가운데는 이스라엘군의 재향군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키예프에서 자기 밑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형제"라고 불렀다고 기억한다. 1월 마이단에서 처음 발생한 사망자 두 명은 아르메니아계인 세르게이 니호얀과 벨라루스 국적인 미하일 지즈넵스키였다. 2월에 벌어진 저격병 학살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자체와 시위의 다양성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희생자 가운데는 우크라이나 동북단에 자리한 하르키우 출신으로 러시아어를 쓰는 환경 운동가 예브헨 코틀례프도 있었다. 이 학살에서 무장하지 않은 우크라이나 유대인 세 명이 살해됐는데, 그중 한 명은 붉은 군대 재향 군인이었다. 무슬림 난민 가정 출신으로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젊은이가 유럽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혁명에서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아르메이나, 폴란드, 유대 문화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대통령 권한 대행과 임시 정부 성원들은 우 파 민족주의자는커녕 대개 우크라이나 동부 출신의 러시아어 사용자였다.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뽑힌 국회의장은 우크라이나 동남부 출신의 침례교 목사였다. 이행기 동안 국방부, 내무부, 국가보안부 등이 러시아어 사용자들 손에 넘어갔다. 국방장관 직무 대행은 집시계였다. 내무장관은 아르메이아인과 러시아인의 피가 반반 섞인 사람이었다. 부총리 두 명 중 한 명은 유대인이었다. 러시아의 침공 위협을 받은 동남부주인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의 주지사 역시 유대인이었다. 러시아의 침공 위협을 받은 동남부주인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의 주지사 역시 유대인이었다. 2014년 봄 임시 정부 각료 열여덟 명 가운데 세 명이 민족주의 정당인 자유당 소속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더라도 이 정부는 우파 정부가 아니었다.

쿠데타를 실행하는 사람들은 행정부의 권한 축소를 요구하지 않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졌다. 쿠데타를 벌이는 이들은 권력을 양도하기 위해 선거를 요구하는 법이 없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 2014년 5월 25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우크라이나 남부 출신의 중도파 러시아어 사용자인 페트로 포로셴코가 승리했다. 초콜릿 사업가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당시 쿠데타 시도 같은 게 있었다면, 그것은 우크라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해킹해서 극 우 파 정치인이 승리했다고 선언하려 한 러시아의 시도와 그 선언을 그대로 내보낸 러시아 방송의 발표였다.

2014년 5월, 극 우 파 정치인 두 명이 우크라이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는데, 각각 전체 투표의 1퍼센트도 얻지 못했다. 둘 다 유대교 정강을 내건 유대인 후보보다 더 적은 표를 얻었다. 승자인 포로셴코는 계속해서 총선을 요구했고, 9월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쿠데타에서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사태 진행과 정반대였고, 또한 우크라이나에서 극 우 파의 인기는 매우 제한적이었다.우크라이나의 우 파 정당, 즉 자유당과 준군사 집단 라이트섹터를 바탕으로 생겨난 신생 정당 어느 쪽도 의회에 진출하는 데 필요한 기준선인 5퍼센트를 넘지 못했다.

티머시 스나이더,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11.5. 결과[편집]


이러한 대규모 왜곡 덕분에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모순이 지나치게 드러나게 됐다. 쿠치마의 실각과 야누코비치의 대두에 어떠한 연관성도 없어져버렸고, 유로마이단의 원인은 야누코비치는 멀쩡한 선택을 했는데(...) 국민들이 단지 러시아가 싫어서 혁명이 발생했다는듯이 왜곡된 셈이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정작 우크라이나 내부의 반러기조가 팽배해지는데 러시아가 원인을 제공한 사건은 딱히 없었다(...).[27] 러시아는 어디까지나 자국의 패권을 위해 앞마당이자 수도에서 가까운 외국인 우크라이나를 어떻게든 자국의 패권 아래로 넣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우크라이나 내부 친러정권의 상상을 초월할 부정부패와 권위주의적 정치의 영향으로 친러세력 자체가 국민의 지지를 잃고 몰락한 것이다.[28] 만약 야누코비치가 조금이라도 정치능력이 뛰어났고, 친서방 인사들에게 적당히 당근을 먹였다면 유로마이단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설령 유로마이단으로 인해 실각되어도 우크라이나 내부의 친러세력 규합을 위해 재파견되어 우크라이나 내부 친러세력 우세지역들에서 쿠데타를 종용해 해당 지역들을 뚝 떼어내 독립시키는 지도자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실상은 야누코비치가 워낙 못해서(...) 그는 퇴임 이후 러시아에서 숨죽이고 사는 형국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자신이 밀어주던 세력이 국민의 지지를 잃고 몰락해버린 마당에, 새로 정권을 잡은 친서방계 인사들은 탈러시아화를 위해 이런저런 정책들을 고속으로 통과시켰고, 그 결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대화로 구슬리는게 불가능하단걸 체감하여 무력을 통한 강압적인 병합으로 노선을 변경하였고, 그 여파가 바로 크림반도 합병을 시작으로 한 돈바스 전쟁과 이번에 벌어진 우크라이나 침공전이 된 셈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러시아에게 좀 더 원인이 있는건 맞지만, 적어도 일방적인 친러 vs 친서방 구도와는 달리 매우 복합적인 요소가 섞여있는 셈이며, 상술한 이야기는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를 모두 빼버리고 마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과도하게 자극하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방식으로 교육이 되어버리는 결과가 초래되었고,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전을 개전한 주된 이유로 말한 사항이다.

때문에 우크라이나 지지 세력이 많은 군사 갤러리 등지에서는 해당 프로그램을 보지 않겠다는 유저들이 많아졌다.


12. 51화 그리스 vs 페르시아[편집]


  • 설명 중 잘못한 남성 혹은 소년들을 여성들 앞에 세워 놀림감으로 삼게 했다는 설명이 있는데, 예시로 든 삽화가 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운동하는 스파르타 젊은이들>(Young Spartans Exercising)이라는 근대 화가인 에드가 드가가 그린 그림이다.
  • 오류라기보단 다소 아쉬운 설명으로, 최후에 남은 군대의 숫자를 줄여서 말했다. 실제 강의 중에는 스파르타인 300명만 남은 듯이 말했으나, 실제론 700명의 테스피아인과 400명의 테베인도 같이 남아, 실질적인 숫자는 약 1,500명이 남았다.[29]
  • 또한, 스파르타군이 남은 이유를 현실적인 면과 더불어 '스파르타 정신'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대를 이을 자녀가 있는 군인'이라면 왕을 포함해 300명이 전부 지휘관급 인사들일텐데, 항복한 완전 시민 200명을 지키기 위해 해군도 포기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스파르타를 생각하면 왕과 지휘관급 근위대 300명을 고작 정신 하나로 꼬라박한다는건 말이 안된다.[30] 현재 학자들이 저 1,500명이 결사대로 남은 이유를 추정하길, 레오니다스가 보고를 받았을땐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페르시아군이 육박한 상황이라 그리스군이 후퇴하는 동안 전방에서 페르시아 본대를 막아 시간을 벌기 위해서로 추측하고 있다. 즉, 후자보단 전자의 이유가 더 강한 셈인데, 편집상의 실수인지 후자의 이유가 더 부각되는 듯한 편집이 되었다.


13. 56화 기축통화 달러[편집]


  • 금 1 온스를 설명하면서 1 온스가 28.35g이라고 표시했다. 그러나, 이는 상용 온스(avoirdupois ounce)와 트로이 온스(troy ounce)를 구별하지 못한 오류이다. 일반적인 물체의 무게를 재는 단위로는 '상용 온스'(OZ)가 사용되지만, 황금을 비롯한 귀금속의 무게에는 '트로이 온스'(OZ.T)가 사용된다. 흔히 금 1 온스라고 말하더라도 이는 금 1 트로이 온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1 상용 온스는 약 28.35g[31]이고, 1 트로이 온스는 약 31.1g[32]이다.


14. 72화 엘리자베스 2세[편집]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가계도에서 오류가 있었는데, 셋째이자, 차남 앤드루 왕자의 전 배우자인 사라 퍼거슨의 출생연도가 1959년이 아닌 1969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15. 78화 이란 역사 편[편집]


팔레비 왕조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 원인이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주의자들과 1970년대에 밝혀진 팔레비 왕가의 부정부패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1953년에 이란 민족주의자였던 모하메드 모사데크CIA가 몰아낸 것이었다. 게다가 팔레비 왕조의 백색혁명이라는 것도 도시의 상•중산층에 한정되어 있었고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류층은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설명은 신우파들이 "이란인들이 미개한 신념에 빠져 팔레비 왕가의 은혜를 모르고 루홀라 호메이니라는 독재자를 선택했다."라는 인종주의적 수사를 정당화하는데 악용되고 있다.[33]

게다가 모하메드 모사데크를 몰아낸 CIA가 1979년에 반서방을 내세우는 루홀라 호메이니에게는 그러지 않았는지에 대해 의혹이 나돌고 있는데 이에 로버트 드레이퍼스는 영국과 미국 정부가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앙아시아에서 반공주의를 확산시키는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그랬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을 정도이다.


16. 106화 영락제자금성[편집]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만들어낸 음식이 취두부라고 언급됐는데, 주원장이 전파했다고 전해지는 음식은 호피모두부로 취두부와는 다른 모두부다. 자세한 것은 홍무제 항목 참조.

연왕 주체가 미친 척한 것을 누군가가 건문제에게 고변하는 화면을 표출했는데 이때 폐하가 아닌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전하'는 황제가 아니라 제후 왕에게만 사용하는 호칭이다.

방효유 10족 멸족설을 이야기했는데, 사실 딱 한 명만은 죽음을 면했다. 영락제의 아들인 인종 홍희제가 방효유의 사촌동생이었던 방효복을 사면한 것. 방효복은 임오순난 당시 남쪽의 변방인 경원위(慶遠衛, 現 광시성 허츠시 이저우구)에서 군역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구성상으로 보면 대체로 홍무제든 영락제든 정화의 대원정 정도만 빼면 업적[34]은 축소하거나 거의 다루지 않고 일방적으로 폭정만 부각시켰다. 물론 명나라와 자금성의 역사 전반을 다루다 보니 분량상 생략한 게 크겠지만, 그래도 영국 해군의 아버지로서의 업적을 어느 정도 인정했던 헨리 8세 편이나 무주의 치를 대대적으로 묘사한 측천무후 편에 비하면 아쉬운 부분.

17. 108화 합스부르크가의 비극[편집]


호엔슈타우펜 왕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프리드리히 2세에 관련된 그림이 화면에 나와야 되는데 호엔촐레른 왕조 프로이센 왕국의 초대 왕 프리드리히 1세와 대왕 프리드리히 2세의 초상화가 화면에 나오는 실수를 저질렀다. 중세의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근세의 호엔촐레른 왕조는 연대 차이가 무려 600년에 이른다는 점에서 제작진의 서양사에 대한 무지함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한국으로 치면 통일신라시대를 설명하면서 조선시대 그림을 쓰는 격이다. 아마 구글링 후 검토도 없이 사진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제2대 왕 펠리페 2세의 네 번째 왕비였던 오스트리아의 안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었던 막시밀리안 2세[35]와 그의 황후인 스페인의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첫째였다. 어머니 마리아는 펠리페 2세의 여동생이었고,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는 펠리페 2세와 사촌지간이었다.

게다가 펠리페 4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의 자녀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틀린 내용이 있었다.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는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인데다가 막내동생 카를로스 2세를 제외한 남동생 2명과 여동생 1명이 먼저 요절했다. 또한 마르가리타 테레사레오폴트 1세의 결혼식을 설명할 때 레오폴트 1세가 44세로 표시되어 있어서 오류가 있었는데, 실제로 레오폴트 1세와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11살 차이가 났다.

마지막으로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의 계비 마리아 아나가 오스트리아 귀족의 딸이라고 했는데 이는 틀리다. 마리아 아나의 아버지인 필리프 2세 빌헬름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경쟁했던 비텔스바흐 가문 노이부르크 분가의 첫 번째 팔츠 선제후로서 오스트리아 귀족이 아니었다. 팔츠는 독일 서부로써 오스트리아와 멀다.

18. 109화 화산폭발과 백두산[편집]


고대 로마 학자 소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를 잘 쓰지 않는 영거 플리니우스라고 번역했고, 영어 철자도 Pliny the Youger라고 잘못 썼다.


19. 116화 오펜하이머[편집]


고품질 우라늄 생산지인 요아힘스탈 광산이 독일이 합병한 오스트리아에 있다고 했으나 당시 체코슬로바키아[36]에 있었다. 또한 방송에서는 요아힘슈탈로 표기했으나 요아힘스탈(Joachimsthal)이 맞다. 영상에 나온 지도는 더욱 문제인데, 프랑스 영토에 독일이라고 표기했고, 뜬금없이 스위스에 요아힘스탈 광산이 위치한 것으로 표시했다. 현재의 체코 북서부에 표시해야 맞다.

1941년 12월 7일에 일어난 일본진주만 공습이 1942년 12월 7일에 일어났다고 잘못 말했으며, 자막도 그대로 답습했다. 이어지는 화면에서는 1941. 12. 07로 올바르게 표기했다.


20. 123화 교황의 탐욕[편집]


테베레 강인데 지도의 자막은 '테레베 강'으로 표시되었다.

기독교의 확산을 보여주는 지도의 영역은 제정 시대의 로마 제국인데, 국호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오류가 있었다.

[1] 스텝롤에서 빼려고 했다거나, 자문료를 무리하게 깎으려고 한 것 등[2] 페스트 편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벌어졌으며 이번에는 스텝롤에 포함이 되었다.[3] 그리고 특히 1929년 대공황에 대한 설명도 빈약하고, 3편의 경우 산둥반도에 대한 일본의 점령도 그 때 당시에 조차지로 삼고 있었던 독일이 와서 점령하는 것처럼 오해 하게 편집하였다.[4] 방송 자체가 12세 등급이라는걸 감안해도 수위가 꽤 높다.[5] 네로 황제는 유명한 '로마 대화제'와 '그리스도 대학살' 등이 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은 애초에 일대기 자체가 전쟁 수준이고, 링컨은 '미국 남북전쟁',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과의 '칼레 해전' 등이 존재하고, 루이 14세도 일생에 전쟁을 했다.[6] 인물사나 과학 등.[7] 또한 71~72회에서 대타로 나왔던 이진호 역시 쓸데없는 농담을 하여 시청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8] 당장 중세 이미지의 대표격인 마녀사냥은 오히려 르네상스~근대 시대에 더 많이 이루어졌다.[9] 예를 들어 농노제 문서의 상단에 인용된, 중세 후기의 법률가 보마누아르의 신분제에 대한 설명을 보자. 그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신심이 깊은 기독교인이었고 귀족 출신의 고위 관료였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책에서 왕과 귀족들의 권력은 기본적으로 다수의 민중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임을 강조했으며, 이를 자신의 신앙이나 신분적인 특권과 모순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10] 당시 밀라노의 방식이 환자와 의심군을 완전히 가두고 굶겨죽이는 비인간적인 격리법이긴 했으나, 엄연히 현대에도 시행하는 '격리조치'의 원시적인 단계임을 고려하면 아예 의학적 지식이 0이 아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11]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데, 인류가 세균을 직접 관찰한건 17세기 경이지만, 병원균을 눈치챈건 1861년 파스퇴르의 실험으로 자연발생설이 원천적으로 부정당한 이후, 로베르트 코흐에 의해 1883년 비브리오균이 콜레라를 일으키는걸 밝혀내면서 본격적으로 병원균에 대한 인식이 밝혀졌다. 즉, 현대에서도 채 200년도 지나지 않은 셈이다.[12] 애당초 과학이 어느정도 발전한 20세기에도 방사능의 존재를 몰랐던 탓에 원폭 실험지에 방사복 보호의 없이 돌아다니거나, 방사능 원소를 이용한 원자력 발전소를 애들 장난감으로 판매하는 일도 있었다. 대표적인게 바로 다음화인 5화에서 나온 '트리니티 실험' 후 관계자들이 신발에 종이만 감고 폭심지를 돌아다니던 사진이다.[13] 다만 '육군항공대'라는 명칭 자체가 일반인에게 생소한 단어임을 고려하면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공군'이란 용어로 칭했을 가능성도 있다. 영문 명칭 자체도 육군항공대가 Army Air Force이고, 공군은 Air Force라서 별 차이가 없는 것도 있고.[14] 물론 단순히 한 민족이 분단된 사례는 정말 끝도 없다. 대체로 독립된 한쪽이 강대국에게 아예 집어삼켜진 케이스인 북아일랜드, 아일랜드나 내몽골, 몽골과 같은 사례나 서로 통일을 포기한 채 완전히 독립국을 유지하기로 합의한 네덜란드, 벨기에, 수단 등 이래저래 따지고보면 분단국은 생각보다 많지만, 서로가 통일을 원하며 각자 독립된 별개의 정부를 둔 한 민족끼리의 분단국은 사실상 저 3개국을 포함하면 극히 드물다.[15] 이 사례와 일치하는 대표적 사례들이 과거의 서독, 동독과 북베트남, 남베트남 정부 등이 있다. 예멘은 북예멘, 남예멘때는 이 사례가 맞지만, 최근 내전은 또 다른 사례라 섣불리 집어넣기엔 복잡한 케이스다.[16] 중국 공산당 정권의 승리로 아시아 일대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매우 커졌고, 6.25 전쟁의 발발 원인에도 지분이 있을 정도였다. 이 탓에 유럽전선에선 다소 신승한 자유주의 정권이 아시아권에선 사실상 패배 판정을 받고, 사회주의 정권이 태평양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해안 국가들을 포섭하는 단계에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17] 다만, 승리자측이 사회주의 정권 세력이라 결과적으로 냉전에서 사회주의쪽 세력에 힘이 크게 실렸을 뿐이다.[18] 오히려 고우영 화백은 대놓고 한 고제 유방을 찌질이 취급했고, 한신은 미화했으나, 역으로 한신이 저지른 과오도 모두 넣었기에 미화와 별개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한신의 잘못도 어느정도 존재하는걸 볼 수 있었으나, 이 강의에선 한신의 과오가 전혀 담겨있지 않다.[19] 물론 애시당초 군대를 둘로 나눈 것 자체가 항량과 항우를 견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데고 그게 전략전술에 어긋난 것은 아니므로 꼭 어느 한 쪽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또, 유방이 항량이나 항우와 척을 졌던 것도 아니다.[20] 관중왕 분봉 역시 어디까지나 양쪽을 경쟁시키기 위한 떡밥이지 어느 한 쪽을 편들기 위해서라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누가 봐도 당시 상황에서 관중왕에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항량이었다. 그리고 정작 항우는 유방을 촉 땅으로 쫒아낸 후 자신이 관중왕 자리에 앉을 수도 있었지만 고향에 돌아가겠다면서 돌아간 것을 보면 관중왕 자리에 그다지 흥미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다.[21] 56만이란 머릿수만 많지 전혀 통솔되지 않은 군벌들의 연합체라는 점이나, 승리에 도취해 방만해진 점 등.[22] 이성왕이 아니라 동성왕이라고 해도 중앙정부에서 제대로 견제하지 않으면 오초 7국의 난이나 서진의 팔왕의 난같은 꼬라지가 나게 된다.[23] 대표인 한신도 후술하겠지만 소하, 장량급 공신인 역이기를 죽게 만든 원흉인데다가 그렇게 유방의 공신마저 죽음에 이르게 한 후 얻은 제나라에서는 '왕으로 임명을 안해주면 안가겠다'고 밍기적대는 등, 제대로 눈 밖에 날 짓을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나라의 통일 이후에도 과거 유방의 숙적인 항우의 수하 종리말을 거두는 등 어그로를 있는대로 끌었음에도, 유방은 끝내 회음후 강등 이후로는 한신을 견제하지 않았으나, 여후가 손을 써 한신을 제거한 것이었다.[24] 그나마 가장 억울하다고 여겨지는 팽월도 여러 번 중앙에 바쳐야 할 공물을 쌩까는 등 중앙정부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적이 있었다.[25] 거의 유일한 예외가 번쾌로, 이쪽은 외척인 여씨가문 견졔를 위해 임의로 처형하려 했던 인물이었으나, 유방이 붕어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26] 참고로 역이기는 그 소하장량에 버금가는 초창기 개국공신급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는데, 유방이 관중으로 향할 때 남부 영토 대다수를 역이기 덕분에 넘을 수 있었다. 즉, 유방이 관중에 최초로 입성할 수 있게 큰 도움을 준 공신 중 한 명이었던 셈이다.[27] 물론 아예 없냐면 그건 아니다.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자국으로 회유하려 시도했던만큼, 우크라이나 내 반러세력이 경계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28] 당장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망명하자 러시아는 그를 헌신짝 취급했다(...). 만약 야누코비치가 진짜 능력이 뛰어났으나, 우크라이나 내부의 반러기조로 탄핵당한 것이라면 우크라 내부의 친러세력 규합을 위해 친러세력이 많았던 하르키우나 돈바스 지방 혹은 크림 반도에 그를 파견하여 내부에서 쿠데타를 종용하게 했을 가능성이 더 컸을 것이다.[29] 다만, 이는 조금 이해해야 할 것이 패널들이 하도 영화 300을 언급해댔기 때문에 강사 본인이 혼동이 왔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방송을 보면 강사는 꾸준히 영화와 현실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강의를 했다.[30] 실제 이 전투의 여파인지 스파르타는 테르모필레 이후 1년 가까이 제대로 군을 꾸리지 못하다가, 최후의 전투인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가서야 제대로 활약하게 된다.[31] 1 상용 온스(OZ)=28.349523125g[32] 1 트로이 온스(OZ.T)=31.1034768g[33] 에펨코리아대안우파 사이에서도 이러한 신우파 사관의 영향으로 팔레비 왕조가 상대적으로 나았다는 말들이 나돌고 있다.[34] 농업 생산량 증대, 중앙집권체제 강화, 성공적인 정복 활동 등. 둘 다 숙청은 잔인했어도 대체로 중국사에서 손에 꼽히는 명군으로 평가받는데 이쪽 비중은 이상할 정도로 없다.[35] 카를 5세의 동생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이었다. 즉 펠리페 2세의 사촌형제였다.[36] 현재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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