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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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udan_Incident_of_1871_tombstone.jpg
당시 학살된 류큐인들의 시신이 묻힌 묘

모란사 사건
牡丹社事件

기간
1874년 5월
장소
청국령 대만, 낭교(瑯嶠) 목단향 석문
(現 대만 핑둥현 무단향)
원인
류큐인들을 학살한 대만 원주민에 대한 보복
교전 세력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대만 원주민
파일:일본 제국 해군기.svg 일본 제국 해군
해병대
파이완 부족
지휘관
파일:대만총독부 휘장.svg 사쿠마 사타마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사이고 주도
아루쿠(阿祿古)
병력
육군병원 3658명
하사관 781명 이상
군인 2643명
군속 172명
종복 62명
군함 승무원 734명
약 600명 추정
피해규모
전사 12명
병사 561명
최소 20명 이상 사망(지도자이자 족장 아루쿠와 그의 아들)
부상 50명 이상
결과
일본군 타격을 입고 퇴각했으나 일본의 승리, 지휘자 아루쿠 사망
영향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평가 및 영향
5. 여담



1. 개요[편집]


타이완 침략(臺灣侵略), 타이완 출병, 류큐 표류민 살해사건, 바야오만 사건, 모단사 사건, 미야코섬 도민 조난사건(宮古島島民遭難事件), 바야오만 류큐인 사건(八瑤灣琉球人事件), 류큐 표류민족 사건 등으로 불리우며 태풍으로 인해 대만에 표류된 류큐인들이 대만 원주민 부족 중 파이완 부족에게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당시 류큐를 노리고 있었던 일본 제국이 류큐인들의 복수를 하겠다는 명분으로 타이완 섬에 처들어와 원주민들과 교전을 벌여 이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2. 배경[편집]


당시 류큐인, 서양인 등의 여러 인종들이 타이완 섬에 표류되어 원주민들에 의해 학살당하는 건 일이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 일반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청나라가 규정에 따라 구출해 보호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사건이 뜻밖에 간접적으로 류큐 왕국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1871년 10월 18일, 류큐인들은 교역을 마치고 귀국 도중 태풍으로 인해 타이완 섬에 표류했고 69명 중 2명은 익사, 1명은 실종되어 살아남은 66명은 배가 파괴되어 당분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섬을 돌아다니다 두명의 한족을 만나 수화로 대화를 나눴다. 한족들은 서쪽으로 이동하는 '큰 귀 귀신'인 사나운 원주민들이 있으니 남쪽으로 가라는 조언을 하자 66명의 류큐인들은 그 두명의 한족과 합류해서 동굴에서 하룻밤을 보내려 했으나 동굴의 면적은 그리 크지 않았고 이내 한족과 류큐인의 다툼이 생겼다. 류큐인들은 이 두 사람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남쪽으로 가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고 서쪽으로 갔다.

그러다 12월쯤에 파이완 족과 만났고 수화와 중국어로 그들과 대화를 하여 파이완 족 마을에 가게되고 고구마, 토란죽, 쌀 등을 대접받아 잘 지냈으나 이튿날 총을 든 5~6명의 파이완 족이 사냥하려 갈테니 류큐인들에게 집에 머물고 나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류큐인들은 뭔가 안 좋은 불안감에 이곳을 떠나기로 결정했지만 파이완 족에 의해 저지되었다. 하지만 끝내 이들은 탈출한다.

류큐인들이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나자 파이완 족들은 이를 무례하게 여겼고 그들을 해적의 간첩이고 나중에 해적들을 끌고올 것이라고 오해하여 류큐인들을 추격해서 66명 중 54명을 붙잡아 처형하고 살아남은 12명은 대만에 정착해 살던 한족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이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후 일본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1872년 3월, 청나라에게 이 사건에 대해 항의했으나, 청나라는 대만 원주민들은 화외 종족[1]이라 청나라가 책임질 수 없다고 답변했다. 또한 일본 외교고문이던 미국인 르장드르가 대만 출병을 지지하는 의견을 피력하자, 이에 1874년 4월 일본은 참의 오쿠마 시게노부를 대만지사무국 장관으로, 또한 육군 중장 사이고 주도를 사령관으로 각각 임명하며 출병을 계획했다.


3. 전개[편집]


그러나 서양 외교관들의 우려와 기도 다카요시의 반대로 출병 중지가 결정되었으나, 출항을 앞두고 있던 사이고 주도의 독단으로 나가사키항을 출항하여 1874년(청 동치 13년, 일본 메이지 7년) 5월 6일, 대만 남부 헝춘반도에 병력 3,600명을 상륙시켰으며 5월 22일, 대만 서남부 사료항(社寮港)에 전군을 집결시킨 후 본격적인 진압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사건의 진앙지인 목단사(牡丹社) 등을 점령하고, 사건의 주모자인 파이완족 추장 아루쿠와 그의 아들을 사살하고, 인근 원주민 마을을 토벌하였다. 7월 1일 인근 원주민 부족들이 항복함으로써 전투는 끝났다.

대만은 당시 엄연히 청나라의 영토였으므로, 청군 수천명이 대만으로 파병되고, 일본과 청나라는 영국의 중재로 협상에 임하게 된다. 오쿠보 도시미치이홍장 간의 교섭 결과, 일본은 타이완 출병이 자국민 보호 조치였음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보상금을 받고 12월에 철수하게 된다.

4. 평가 및 영향[편집]




5. 여담[편집]


  • 이후 대만은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 제국에 귀속되었고, 1930년 대만 원주민과 일본군과의 또 하나의 싸움인 우서 사건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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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화 문화권 밖의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