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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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인의왕도론
2.1. 순자와 왕도론
3.1. 순자 성악론의 도전
3.2. 정치철학적 해석
4. 법선왕론
4.1. 순자의 법후왕론과의 비교
5. 역성혁명[1]
5.1. 혁명론 도출 배경에 관한 의문들
5.2. 맹자의 혁명론은 조선 건국(정도전의 혁명)을 정당화하는가?


1. 개요[편집]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계가 양주(楊朱)[2]

묵적(墨翟)[3]의 사상에 경도되어 유학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판단한 맹자는 유학의 수호자를 자임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는 한편, 다른 학파의 사상적 도전에 맞서 유학 사상의 이론화 작업을 전개하였다. 그는 공자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비해 사회 혼란[4]이 가중되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사회 안정을 위해 특히 '의(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맹자가 강조한 '의'는 공자가 제시한 '의'에 대한 견해를 강화한 것이었다. 공자는 사회 혼란을 치유하는 방법을 '인(仁)'의 실천에서 찾고, 인의 실현에 필요한 규범으로서의 '의'를 제시하였다.[5]

공자가 '인'을 강조한 이유는 자연스러운 도덕 감정인 '인'을 사회 전체로 확산했을 때 비로소 사회가 안정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때 공자는 '의'를 '인'의 실천에 필요한 합리적 기준으로서 '정당함'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혈연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도덕 감정인 '인'의 확산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도, '의'의 의미를 확장하여 '의'를 '인'과 대등한 지위로 격상하였다. 그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인'이고, 형을 공경하는 것은 '의'라고 하여 '의'를 가족 구성원간에도 지켜야 할 규범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나의 형을 공경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남의 어른을 공경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유비적 확장을 통해 '의'를 사회 일반의 행위 규범으로 정립하였다. 나아가 그는 '의'를 개인의 완성 및 개인과 사회의 조화를 위해 필수적인 규범으로 설정하였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개인은 '의'를 실천하여 사회 질서 수립과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맹자는 '의'가 이익[6]

의 추구와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사적인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이익의 추구는 개인적으로는 '의'의 실천을 가로막고, 사회적으로는 혼란을 야기한다고 보았다. 특히 작은 이익이건 천하의 큰 이익이건 '의'에 앞서 이익을 내세우면 천하에는[7] 필연적으로 상하 질서의 문란이 초래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회 안정을 위해 사적인 욕망과 결부된 이익 추구는 '의'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맹자는 '의'의 실현을 위해 인간에게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근거와 능력이 있음을 밝히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덕 행위를 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선천적으로 내면에 갖춰져 있다는 일종의 도덕 내재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은 자기의 행동이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이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을 본래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마음이 의롭지 못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동기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모든 인간의 마음에 갖춰져 있다고 하여 '의'를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 역량이 내재화되어 있음을 제시하였다.

맹자는 '의'의 실천을 위한 근거와 능력이 인간에게 갖추어져 있음을 제시한 바탕 위에서, 이 도덕적 마음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본래 갖추고 있는 선한 마음의 확충과 더불어 욕망의 절제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특히 생활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일에서도 '의'를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그는 목숨과 '의'를 함께 얻을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라고 주장하여 '의'를 목숨을 버리더라도 실천해야 할 가치로 부각하였다.

ㅡ 2014년 9월 대수능 모의고사 비문학 지문 (17번 ~ 21번)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독자적으로 연구하면서, 양주묵적을 까고, 전국시대의 패도적 부국강병을 반대하고, 도덕적으로 정치하면 오히려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는 왕도정치를 말하였다.

공자의 인(仁) 사상을 본격적으로 현실 정치에 적용하고자 했던 맹자는 자신을 초청한 제후들에게 '인(仁)한 정치를 할 것[8]'을 역설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맹자는 본래 인(仁)의 크기를 헤아리는 척도의 덕목, 즉 부수적인 덕목의 위치에 있던 의(義)의 지위를 격상하고 인(仁)과 병칭하여 인의(仁義)라 명명하였다. 이 연유는 자사(子思)[9]가 남긴 《중용(中庸)》을 참고하여 이해할 수 있다.

중용》에서 공자가 이르기를; "인(仁)은 인(人)이요, 의(義)는 의(宜)이다[10]"하였는데, 이때 인(仁)을 풀이한 인(人)은 '사람다움'을, 의(義)를 풀이한 의(宜)는 '마땅함'을 뜻한다. 맹자는 여기서 '사람다움[仁]'은 물론이요, 더불어 '마땅함[義]'에도 주목하였다. 곧 공자의 인(仁) 사상에 강력한 '당위 개념'을 첨가하여 유가(儒家) 정치학의 논리를 견고하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번엔 '당위의 당위성'을 설명해 줄 '성선설(性善說)'이 도출되게 된다. 그 자세한 바는 하위 항목에서 후술.

사마천의 《사기》 맹순열전에 따르면 맹자는 자사 계열에서 배웠다고 하지만, 맹자 본인은 그냥 사숙(私淑, 사적으로 혼자 배웠다)했다고 한다. 참고로 지금 우리가 쓰는 사숙이라는 말 자체가 맹자에서 유래된 말이다. 또한 공자는 방대한 제자들을 길러놓았고, 이들이 대륙 각국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맹자만 특별히 공자의 학통을 계승한 건 아니다. 오히려 맹자는 공자의 학통에서 보면 극단적인 지류에 가깝다.

사마천은 맹자의 주장이 당대 군주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렸을 거라는 평을 내리고 있다. 맹자는 당대 강국이었던 위(양)나라[11]와 제나라 등에 초청되어 차례대로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국시대에 그의 주장은 법가와 군현제의 확산에 눌러 기를 펴지 못했다. 맹자라는 책은 사실상 맹자의 실패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맹자의 사상이 마이너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맹자는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았던 동시에 자부심도 강한 인물이었다. 생존시의 명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공자보다도 더 높았던 것이 맹자였다. 때문에 왕들은 앞다투어 맹자를 초빙하였고 높은 관직과 많은 녹봉을 주었다. 단적으로 맹자는 제나라에서 경-대부-사라는 춘추시대의 3단계 직급 중에서도 최상위인 경의 직책에 있었고, 위나라에서 경의 직책에 있었다. 약소국 노나라의 대사구라는 대부 직책에 있었던 공자와 초강대국 제나라의 경의 직책에 있었던 맹자의 녹봉은 그 격이 달랐다. 단적으로 당시 화폐처럼 쓰인 곡식 를 기준으로 삼으면, 공자의 연봉은 조 90톤이 한계였지만 맹자의 연봉은 1만 5천 톤에 이르렀다. 너무 많아서 과장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지경이다. 이게 아니라도 맹자가 한번 지나갔다고 하면 주변 군주들이 노자돈을 주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맹자가 제나라를 떠나서 추나라로 돌아갈 때, 지나가는 길에 있던 송나라와 설나라의 군주들은 맹자에게 황금 36 kg[12]을 노자의 명목으로 주었다. 왕들이 아니라도, 임나라 왕의 동생 계임은 맹자가 군주들에게 명성을 얻기 전부터 후원을 하였고, 제나라의 고위관직에 있던 저자 역시 맹자에게 자금을 주었다. 이것은 맹자의 명성이 드높았으며, 동시에 평가도 높았다는 방증이다. 맹자의 인치는 인기가 없었지만, 묵가도가처럼 무정부주의 성향을 보이지 않는 것은 왕들이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맹자의 명성과 학교를 곁에 두고 싶어하였다. 그리고 작은 나라의 군주들은 맹자를 통해서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을 보장받고 싶어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맹자는 이런 것에 휘둘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맹자는 고자편에서, '예를 다해주고 말도 들어주면 관직에 나가지만, 예는 다하지만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관직에 물러나는 것'을 임관의 첫 번째 기준으로 꼽았다. 하지만 실리적이었던 맹자는 2번째와 3번째에서는 기준을 낮춘다. 두 번째는 '말을 들어주지는 않지만 예를 갖춰주면 관직에 나가고, 예도 갖춰주지 않으면 물러나는 것'이고, 마지막은 '굶어 죽게 되었는데 왕이 이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구제하여 준다면 나가는데, 굶어죽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맹자의 기준은 당연히 첫 번째에 있었다. 제나라 왕이 자기 말을 안 들어준다 싶으니 바로 사직계를 내놨다. 제나라왕은 맹자의 명성을 바란 것이었기 때문에 학교건물까지 세워두고 경 관직에서 1/10 정도의 녹봉으로 국학을 맡아줄 것을 대신 청했다. 이것도 국학기준으로는 상당히 파격적 대우이지만 맹자는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떠나는 맹자에게 제나라 왕은 송별금조로 '순도 높은 금 100'을 보냈다. 도량형이 적혀있지 않지만, 이것을 같은 단락에서 언급된 것으로 보면 '일'이라는 단위가 되는데 이 기준에서 본다면 황금 30kg 정도에 해당한다. 맹자는 이것을 받지 않고 떠났다. 맹자 공손추 하편에서는 이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유를 설명[13]하고 있는데, 아무리봐도 제나라 왕과 틀어져서 화가 나서 그냥 안 받았다 쪽이 가장 합당한 해석으로 보인다. 맹자는 그만큼 자신의 위치와 역량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었고, 그런 맹자를 써먹으려 했던 이들과 서로 투닥투닥하면서 평생을 보냈다.

맹자가 말싸움의 달인이었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맹자의 내용을 보면 말싸움이 아니라 그냥 자기들 주장만 늘어놓고 있어서 누가 논파되었는지 나타나지 않는다. 맹자의 무수한 아가리파이트 승리기록인즉 그것이 맹자가 남긴 기록이기에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이 있으나, 원문을 읽어보면 승리했다라는 식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그냥 그 사람은 이렇게 주장했고, 맹자는 이렇게 주장했다는 구조. 소크라테스처럼 직접 맞장 떠서 논파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사실 소크라테스도 말싸움으로 상대를 이겼다기 보다는 상대의 원한만 사는 경우가 많았고, 댓글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이 그의 죽음으로 연결되었다.

단지 맹자가 말하는 스타일이 매우 독하기는 했다. 또한 맹자의 말이 남고, 다른 사람들의 말은 사장되었기 때문에 맹자가 결과적으로는 이긴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양식적으로도 맹자가 다른 사람의 말에 반박하고는 한 단락이 끝나는 구조라서 맹자의 주장에 무게가 실리는 편집방식이다. 맹자의 말에 대한 반론이 있었어도 맹자가 가만있었을 리 없었겠지. 이런 편집방법은 중국 고전의 여러 사상책에서 찾아볼 수 있고, 현대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두 사람이 만나 토론을 나누고 그 결과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책을 저술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싣기 때문이다.비단 맹자뿐 아니라 위키에서도 수없이 많고, 또 끝없이 변화한다.

의외의 면모로, 맹자는 군사활동도 한 적이 있다. 제나라에 머물던 시절 이웃 연나라에서 다름 아닌 자지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 연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제나라 왕에게 알리고 연나라에 쳐들어가 복속시키도록 했다.


2. 인의왕도론[편집]


맹자께서 양(梁) 땅의 혜왕(惠王)을 만나 보시니, 왕이 말하였다.

"노선생께서 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으시고 찾아와 주셨으니, 또한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해 주심이 있겠지요?"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꼭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하시면, 대부(大夫)는 말하기를; "어찌하면 내 가문을 이롭게 할까" 할 것이고, 사(士)와 서민들은 말하기를; "어찌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 할 것이니, 이같이 위아래가 서로 다투어 이를 도모한다면, 나라는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만 수레의 나라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천 수레의 가문에서 나올 것이고, 천 수레의 나라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백 수레의 가문에서 나올 것인데, 이미 만 중 천을 차지하고, 천 중 백을 차지했다면, 그 소유한 바는 많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허나, 진실로 의를 뒤로하고 이(利)를 앞세운다면, 이처럼 빼앗지 않고서는 질릴 줄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허나, 이제껏 인인(仁人)으로서 그 어버이를 저버린 예는 없었으며, 이제껏 의인(義人)으로서 그 군주를 뒷전으로 여긴 예는 없었습니다.

왕께서는 또한 인과 의를 말씀하시면 될 뿐입니다. 어찌하여 꼭 이를 말씀하십니까?"

《맹자》〈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상(上)〉, 1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데 유감이 없는 사회를 구현함이 왕도(王道)의 첫 걸음입니다.

5무(畝)[14]

의 택지 주변을 둘러 뽕나무를 심게 한다면, 쉰 넘은 이들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닭, 새끼 돼지, 개, 큰 돼지[15] 등의 가축을 기르는 데 그 번식기를 놓치게 하지 않는다면, 일흔 넘은 이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100무의 전답을 나누어 주고 그 농번기를 놓치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 식구 딸린 가정에 굶주림이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상서(庠序)[16]의 교육을 엄숙히 하여 효제(孝悌)의 의(義)를 강명한다면, 머리 희끗한 이들이 짐을 이고서 길거리를 다니는 일이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일흔 넘은 이들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뭇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 그러한 사회를 구현하고서도 (王) 되지 못한 자는 이제껏 있어 본 적이 없습니다.

개, 돼지가 사람 먹을 것을 먹어도 단속할 줄을 모르고, 길바닥에 굶어죽은 송장이 있어도 베풀 줄을 모르며, 사람이 죽으면 곧 말하기를 "내가 그리한 것이 아니다. 시세(時歲)가 그리한 것이다." 하면, 이는 사람을 찔러 죽여 놓고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한 것이 아니다. 무기가 그리한 것이다." 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왕께서 시세를 탓하지 않으신다면 이리로 온 천하의 민(民)이 의탁해 올 것입니다."

《맹자》〈양혜왕장구 상〉, 3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밝은 군주는 민(民)의 생계를 마련함에 반드시 부모를 우러러 섬기기에 족하도록, 굽어보아 처자를 먹여 살리기에 족하도록, 풍년에는 배 터져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흉년에는 죽어 스러짐을 면하도록 합니다. 연후에야 선(善)으로 다독여 가는데, 그래야지 민이 따르기가 쉽습니다.

지금이야, 민의 생계를 마련했다고 한들, 우러러보아 부모를 섬기기에 부족하고, 굽어보아 처자를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며, 풍년에는 고생하다 죽을 지경에 이르고, 흉년에는 죽어 스러짐을 면치 못합니다. 이래서야 죽음을 피하기도 여의치 않을까 두려울진대, 어떻게 예의를 닦을 겨를이 있겠습니까?

왕께서 왕도를 행하려 하신다면, 어째 그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5무의 택지 주변을 둘러 뽕나무를 심게 한다면, 쉰 넘은 이들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닭, 새끼 돼지, 개, 큰 돼지 등의 가축을 기르는 데 그 번식기를 놓치게 하지 않는다면, 일흔 넘은 이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100무의 전답을 나누어 주고 그 농번기를 놓치게 하지 않는다면, 여덟 식구 딸린 가정에 굶주림이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상서의 교육을 엄숙히 하여 효제의 의를 강명한다면, 머리 희끗한 이들이 짐을 이고서 길거리를 다니는 일이 없게 될 수 있습니다.

노인들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뭇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 그러한 사회를 구현하고서도 왕 되지 못한 자는 이제껏 있어 본 적이 없습니다."

《맹자》〈양혜왕장구 상〉, 7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17]


"군주의 푸줏간에는 살찐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는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들의 낯에는 굶주린 기색이 있고, 들판에는 굶어 죽은 이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으니, 이는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한 것입니다.

짐승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조차 사람들은 혐오하는데, 백성의 어버이 된 자로 정치를 행함에 있어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함을 면치 못한다면, 어찌 백성의 어버이라 이름될 수 있겠습니까?

중니(仲尼)[18]

가 말하기를; "용(俑)[19]을 처음으로 만든 자는 그 자손이 없으리라!" 하였으니, 이는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다가 부장품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어찌 이 백성들을 굶어 죽게 만들 수가 있습니까?"

《맹자》〈양혜왕장구 상〉, 4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힘으로써 인(仁)의 이름을 빌리는 자를 (覇)라 이르니, 패는 강대한 나라를 필요로 한다. 덕으로써 인의 본질을 행하는 자를 (王)이라 이르니, 은 강대함에 기대지 않는다. (湯)은 사방 70리의 땅에서 일어났고, 무왕(武王)은 사방 100리의 땅에서 일어났다.

힘으로써 사람의 복종을 얻었다면 이는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을 얻음에 따른 것이 아니고, 다만 굴복자의 힘이 넉넉치 못했음에 따른 것이다. 덕으로써 사람의 복종을 얻었다면 이는 마음 한가운데로부터 솟구친 기쁨에 근거한 참된 복종을 얻은 것이니, 일흔 명의 제자가 공자께 복종한 것이 바로 이와 같다.

(詩)에 이르기를; "서쪽에서 동쪽에서, 남녘에서 북녘에서, 감복해 오지 않는 이 없네" 한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맹자》〈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 상〉, 3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등(滕)나라의 문공(文公)이) 필전(畢戰)[20]

을 시켜 정지(井地)(정전제(井田制))를 물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선생의 군주께서 장차 인정(仁政)을 행하려 하시므로 가려 뽑으시어 선생을 보내셨으니, 선생께서는 반드시 힘써 주셔야 할 것입니다.

무릇 인정은 반드시 전답의 경계를 긋는 데서 첫걸음을 떼는 법입니다. 경계가 바르지 못하면, 정지(井地)가 균등하지 못하고, 곡록(穀祿)[21]

이 공평하지 못하리니, 바로 이런 까닭으로 폭군과 탐관오리는 반드시 경계를 긋는 데에 태만한 것입니다. 경계가 바르면, 전답의 분배 대책과 녹봉 제도를 정하는 일은 앉은 자리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등나라의 강토가 협소하다고는 하나, 군자(君子)[22]

가 될 사람이 다 있고, 야인(野人)[23]이 될 사람이 다 있을 것입니다. 군자가 없다면 야인을 다스릴 수 없고, 야인이 없다면 군자를 육성할 수 없습니다.

청(請)하건대, 야(野)에서는 9분의 1의 세법(稅法)인 조법(助法)[24]

을 시행하고, 국중(國中)[25]에서는 10분의 1의 세법으로 스스로 내게 하십시오. 경(卿)[26] 이하로 반드시 규전(圭田)[27]이 있게 하되, 규전의 크기는 50무로 하십시오. 여부(餘夫)[28]에게는 25무를 주십시오.

허면 죽거나 이사를 가더라도, 자기 향촌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니, 향촌 전답의 한 정(井)에 속하는 이들이 일 나가고 집 돌아오는 가운데 서로 우애롭고, 향촌을 수비하고 경비하는 데 서로 도우며, 질병이 돌면 서로 보살피리니, 곧 백성이 친목할 것입니다.

사방 1리(里)를 1정(井)으로 삼으면, 1정은 900무가 되는데, 그 가운데의 100무는 공전(公田)이 됩니다. 여덟 가구가 각각 사전(私田)으로 100무를 경작하고, 공동으로 공전을 경작합니다. 먼저 공전의 일을 끝마친 연후에 감히 사전의 일을 돌봅니다. 이것이 야인의 분별이 됩니다.

이상은 대략(大略)에 불과하니, 이것을 윤색하기는 곧 군주와 선생께 달렸습니다."

《맹자》〈등문공장구(滕文公章句) 상〉, 3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仁義王道論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맹자는 당대 제후들의 부국강병 정책을 '패도(覇道)'로 규정지었고, 옛날의 성왕(聖王)들이 행하였던 존덕애민(尊德愛民) 정책, 즉 '왕도(王道)'로의 회귀를 주장하였으며, 그 왕도의 실천 덕목으로서의 '인(仁)'과 '의(義)'를 제시하였다.

왕도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왕도는 단순히 도덕에 목숨 거는 정치 형태가 아니다. 반드시 백성들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 주어야 하며, 그것이 오히려 왕도의 첫걸음이라고 위 인용문에도 명시되어 있다.


2.1. 순자와 왕도론[편집]


보통 인의론, 왕도론 하면 '맹자의 고유한 사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뭇사람들이 맹자의 대척점에 서있다 생각하고 있는 순자(荀子) 또한 '인의', '왕도' 등의 용어를 자기 학설을 펼치는 데에 요체로 삼았다.[29]

순자의 비판 대상은 비단 맹자뿐만이 아니라 공자를 제외한 제자백가 전원이었다. 순자는 '백가百家의 집대성자', '동양의 아리스토텔레스'로 불릴 만큼 비판철학적으로 대성(大成)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단순히 공자의 사상만을 수용, 계승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사상을 중체(中體)로 하되 온고지신(溫故知新)할 수 있는 것이라면 여타 학파의 이론 또한 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예를 들어, 그의 수양론은 도가와 밀접하고, 그의 정체론(政體論)은 법가와 밀접하다.

따라서 순자는 맹자의 사상 또한 일부 수용하였다. 아니, 수용한 수준을 넘어서 정밀화시키고, 발전시켰다. 전문이 매우 기므로, 이에 대해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왕도

국가를 예의로써 선도함. 하나의 불의를 행하여 하나의 무죄한 이를 죽이면 천하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리 하지 않음. [30]

이상을 견지함. 정치 성원은 모두 도의적인 인사. 형법 또한 모두 도의적. 군주는 기민하게 뭇 신하를 부리되 이 또한 도의적인 마음으로써 함. 옛날의 왕자들은 이같이 하였으므로 작은 데에서 시작하여 큰 데에 이르렀고, 천하에 그 밝음이 감추어지지 않아 후세까지 이름이 전해짐. 이른바 '의(義)가 우뚝 서면 왕자가 됨'은 이를 가리킴.


패도

덕이 온전치 못하고 의가 완전치 못하나 대체로 천하의 도리가 모여있음.

형벌과 포상이 매우 분명하여 천하와 뭇 신하들의 신임을 삼. 한번 선포한 정령을 바꾸지 않으니 백성을 속이는 일이 없음.

한번 협약을 맺는다면 동맹국을 속임이 없음. 옛날의 패자들은 이같이 하였으므로 변방의 나라이면서도 천하를 호령했고, 강대하여 중원을 위태로이 하였음. 이른바 '신(信)이 우뚝 서면 패자가 됨'은 이를 가리킴.


망도(亡道)

공리를 일으키는 의와 신에 힘쓰지 않고 오직 사익을 추구함.

작은 이익을 취하는 데 백성을 속이기를 꺼리지 않음. 큰 이익을 취하는 데 동맹국을 속이기를 꺼리지 않음.

본래의 소유를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의 소유를 항상 탐냄. 이같이 하므로 그 신하와 백성 또한 그 군주를 속일 마음을 가지니, 때문에 위, 아래가 분열됨. 자연 적국도 그를 경시하고, 동맹국도 그를 의심하므로, 권모술수만 난무하여 마침내 군주 본인은 죽고, 나라는 망하게 되니, 이로써 천하의 큰 치욕거리가 되어 차후 악례(惡例)를 들 때 반드시 꼽히게 됨.


흥미로운 점은 '패도'의 위상을 중간 수준으로 높이고, 본래 패도의 위상에는 새로이 '망도'[31]를 두었다는 것. 종래의 맹자식 왕패론(王覇論)을 참고하여 '온고지신'한 것이라 볼 수 있다.《순자》에는 아예 별도의 편목으로 〈왕패(王覇)(왕도와 패도)〉 편이 있다.[32] 위키러들의 일독을 권한다.


3. 성선론[편집]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에 대하여 참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 있다. 선왕(先王)들께 사람에 대하여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이로써 사람에 대하여 참지 못하는 정치[不忍人之政]가 있었다. 사람에 대하여 참지 못하는 마음으로 사람에 대하여 참지 못하는 정치를 행하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 위에서 굴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에 대하여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하는 까닭은 이렇다. 지금 사람이 문득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본다면, 누구든지 섬뜩하고 조마조마하고 아리고 애끓는 마음[怵惕惻隱之心]이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귈 심산 때문이 아니요, 동네[鄕黨] 사람들이나 벗[朋友]들에게 명예로운 평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요, 나쁜 평판을 듣기가 싫어서도 아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아리고 애끓는 마음[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마다하고 물러나는 마음[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아리고 애끓는 마음은 인(仁)의 단(端)이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단이요, 마다하고 물러나는 마음은 예(禮)의 단이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단이다.

사람이 사단(四端)을 가진 것은 사체(四體)[33]

를 가진 것과 같다. 이 사단을 가지고서도 자기는 할 수 없다 하는 자, 그자는 자기를 그르치는 자요, 자기 군주는 할 수 없다 하는 자, 그자는 자기 군주를 그르치는 자이다.

무릇 사단을 갖추고 있는 자가 그것을 넓히고 또 가득히 할 줄 안다면, 불이 탁 타오르는 것과 같고, 샘물이 탁 퍼져 나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것을 가득히 할 수 있다면, 사해(四海)를 보전하기에 족할 것이다. 그것을 가득히 하지 못한다면, 부모를 섬기기에도 부족할 것이다."

《맹자》〈공손추장구 상〉, 6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고자(告子)가 말했다.

"성(性)은 고리버들과 같고, 의(義)는 광주리[34]

와 같습니다. 인성(人性)으로써 인의(仁義)를 행함은 고리버들로써 광주리를 만듦과 같습니다."

맹자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고리버들의 성을 따라 광주리를 만든다 여기십니까? 장차 고리버들을 해친 뒤에야 광주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장차 고리버들을 해치고서야 광주리를 만들 수 있다 한다면, 선생의 말씀은 곧 장차 사람을 해치고서야 인의(仁義)를 행할 수 있다는 말씀이 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천하 사람들을 선동하여 인의에 화(禍)를 입히는 것은 필시 선생의 이 말씀일 테지요!"

《맹자》〈고자장구 상〉, 1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입이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눈이 아름다운 빛깔을 좋아하고, 귀가 흥겨운 소리를 좋아하고, 코가 향긋한 내음을 좋아하고, 사지가 편안함을 좋아함은 성(性)이지만, 이는 명(命)에 달려 있으므로 군자(君子)는 그것을 성이라 부르지 않는다. 부자 간에 인(仁)이 있고, 군신 간에 의(義)가 있고, 주객 간에 예(禮)가 있고, 현자에게 지(智)가 있고, 천도(天道)에 성인(聖人)이 있음은 명이지만, 이는 성에 달려 있으므로 군자는 그것을 명이라 부르지 않는다."

《맹자》〈진심장구(盡心章句) 하(下)〉, 24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우산(牛山)은 본래 나무가 무성하여 아름다웠다. 허나 산이 큰 도읍의 교외에 있어 사람들이 날마다 도끼를 들고와 벌목해댔으니 어찌 그 아름다움이 보존될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밤낮으로 회복, 생장하고, 비와 이슬이 적셔주었으므로 그루터기에서 다시금 새싹이 움트지 아니한 바 없으나 소와 양들이 몰려와 그것마저 뜯어먹었으니 비로소 이처럼 민둥산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민둥산 된 모습을 보고서 '저 산에는 일찍이 재목이 없었다' 여기지만 그것이 어찌 산의 성(性)이겠는가?

사람에게 있는 것 중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겠는가? 그 양심을 팽개쳐 두는 것은 나무에 도끼질을 하는 것과 같다. 날마다 베어대니 어찌 그 아름다움이 보존될 수 있겠는가? 그래도 밤낮으로 회복, 생장하므로 새벽녘 즈음 기(氣)의 호오(好惡)는 남들과 가까움이 근소하지 않게 된다. 허나 대낮에 세속에서 행하는 바는 그것을 다시 옥죄어 망실되게 한다.[* 어느 날, 그날따라 어찌된 일인지 새벽 일찍 일어났던 경험이 있는 위키러들이라면 이 대목의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안개 같은 푸른빛이 방 안을 물들이고, 창 밖으로는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며, 그 와중에 가끔 아침새가 짹짹대는, 고요한 생기로 넘치는 그 평화로운 시간대에 일어났을 때의 기분은 어떠했는가? 그 시간대는 대낮의 공동체 활동으로 인한 외물(外物) 접촉이 일어나지 않는 시간대이다. 공동체가 잠에 든 그 시간대는, 하늘이 만물을 냈을 때의 그 본연, 자연의 상태와 유사한 상태의 시간대이다. 맹자는 이러한 시간대에는 필연적으로 인간 본연의 기운(기氣)이 흥기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그 누구에게서나 다 흥기하는 기운으로, 곧 '선을 좋아하고 그것을 도모하고자 하는 경향성'이다. 외물과의 접촉이 끊긴 그 시간대는 인간 본연의 유순함이 드러나는 시간대라는 것이다. 이렇게 써 놓으니 뭔가 신비주의적이거나 해서 와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정말 아주 간단히 말하면, 그냥 '새벽 감성'이 도덕적으로 터진다는 얘기다(...).] 이 옥죄임이 반복된다면 밤에 일어났던 기는 존속될 수 없게 된다. 밤에 일어났던 기가 존속될 수 없다면 곧 그 어그러짐은 금수(禽獸)와 멀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금수 된 모습을 보고서 '저 사람에게는 일찍이 재질이 없었다' 여기지만 그것이 어찌 사람의 정(情)[35]

이겠는가?

그러므로 합당한 길러짐을 받고서도 장성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합당한 길러짐을 받지 못하고서도 소멸하지 않는 것은 없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가꾸면 존속되고, 버리면 망실된다. 그 출입에 정해진 때가 없고, 그 향하는 곳은 알지 못하겠다"하셨으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겠는가!"

《맹자》〈고자장구 상〉, 8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그 정(情)[36]

을 따져 본다면, 곧 선(善)을 행하기에 가하니, 때문에 이른바 성선(性善)이라 하였다. 불선(不善)을 행한다면 그것은 재질의 죄는 아니다. 사람이라면 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고, 사람이라면 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있고, 사람이라면 다 공경지심(恭敬之心)[37]이 있고, 사람이라면 다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있다. 측은지심은 인(仁), 수오지심은 의(義), 공경지심은 예(禮), 시비지심은 지(智)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밖에서 욱여넣어지는 것[38]이 아니라 내 고유의 것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단지 사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구하면 얻게 되고, 버리면 잃게 된다' 하였다. 혹여 서로의 차이가 두 배, 다섯 배에 이르고 심지어는 헤아릴 수도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면, 그 재질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詩)에 이르기를; "하늘이 뭇사람을 낳으니, 물(物)이 있어 칙(則) 또한 있도다. 뭇사람이 상도(常道)를 지니니,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노라!" 하였으며,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이 시를 지은 사람은 도를 아는구나!" 하셨으니, 해서 물이 있으면 반드시 칙 또한 있으며, 뭇사람이 상도를 지니니, 해서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것이다."

《맹자》〈고자장구 상〉, 6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보통, 교과서에서는 "맹자가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그보다 한 세대 아래의 순자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였는데, 전자의 근거는 동정심 등이고, 후자의 근거는 이기심 등이다" 하고 바로 인의예지, 왕도정치, 역성혁명, 예치주의, 화성기위, 고자의 성무선악설 등을 조금 블라블라하고는 얼렁뚱당 다음 철학자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저런 별로 엄밀하지 못한 소개에 기초[39]하여 "맹자는 인간을 가리켜 덮어놓고 선하다 했고, 순자는 인간을 가리켜 덮어놓고 악하다 했구나!"라고 이해한다면 전형적인 오독이다.

일단, 맹자라는 책을 읽어 봐도 맹자는 인간이 나쁜 짓을 하는 현실에 대해 개탄하고 있다. 전국시대의 카오스 상황 속에서 살았던 인간이 덮어놓고 인간은 선하다고 주장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것.

(仁)은 사람의 마음이요, (義)는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내버려 두고서 따르지 않고, 그 마음을 놓치고서[40]

찾을 줄 모르니, 슬프구나!

사람들은 닭이나 개를 놓치고서는 이를 찾을 줄 알지만, 마음을 놓치고서는 이를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없다. 놓쳐버린 그 마음을 찾는 것일 따름이다.

《맹자》〈고자장구 상〉, 11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맹자의 주장은 몇몇 사람의 오해와는 달리, 본질적으로 선하니까 어찌 됐든 인간은 선하게 행동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은 '선'이라 할 수 있는 '재질'을 가지고 태어났으되, 이것을 놓칠 수 있으니, 제발 꽉 붙잡아서 선하게 살려는 노력을 하라는 뜻이다. 특이하게도, 맹자의 학론에서의 성(性)ㅡ 곧 '타고난 마음'ㅡ은 놓쳐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이때 놓친다는 표현은 선성(善性)이 탈모빔 맞은 것마냥 툭툭 빠져나가 고대로 끝장난다는 뜻은 아니고(...), 개개인이 선성을 지니고 있더라도 비참한 현실에 너무 치이거나, 쾌락에 탐닉하거나, 사상이 뒤틀리거나, 그냥 지 배때지가 불러 눈에 뵈는 게 없어서 별 생각이 없거나, 받은 교육이 개차반이었다거나 하는 등 여러 장애 요소에 선성이 압도되어 발현이 제대로 안 되고 나가리화(...)한다는 뜻이다. 상단의 여러 인용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맹자가 성을 마음[心], 의지[志], 기운[氣]과 자주 결부해 운운하는 게 바로 이 때문.

유명한 "항산(恒産, 안정적 생계)이 없음에도 항심(恒心, 안정적 도덕성)이 있기는 사(士)만이 가능한 것이다. 민(民)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항산이 없으면 이로써 항심도 없다."는 말도 사람에게 선성(善性)이 있을지라도 사(士)처럼 평소부터 선성에 포커스 맞추고 각잡고 도덕적 단련을 거친 게 아니면 당장 입에 풀칠도 어려운 카오스 상황에 처한 민(民)들이야 당연히 도덕 그딴 거 나가리 뒷전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41]

하여튼 다음 인용문에서 맹자의 사상 면면을 더 엿볼 수 있다.

孟子曰: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 所不慮而知者, 其良知也。
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양능(良能)'이고, 사려하지 않고도 아는 것, 그것이 '양지(良知)'이다.
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者;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也。
포대기에 싸여 마냥 웃는 어린아이라도 그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지 않고, 장성하여서는 그 형을 존경할 줄 모르지 않는다.
親親, 仁也; 敬長, 義也。
친족을 친애함은 인(仁)이요, 연장자를 공경함은 의(義)이다.
無他, 達之天下也。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없다. (이를 확충하여) 천하를 휘덮도록 하는 것이다.
ㅡ《맹자》〈진심장구 상〉, 15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曰: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이) 말했다:
不爲者與不能者之形, 何以異?
아니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모양새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曰: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挾泰山以超北海’, 語人曰, ‘我不能!’
'태산(泰山)[42]을 옆구리에 끼고서 북해(北海)[43]를 뛰어넘는 일'을 두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못 한다!'라 합니다.
是誠不能也。
이는 실로 못 하는 것입니다.
‘爲長者折之', 語人曰, ‘我不能!’
'어른을 위해 꺾는 일[44][45]을 두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못 한다!'라 합니다.
是不爲也, 非不能也。
이는 아니하는 것이지, 못 하는 것이 아닙니다.
ㅡ《맹자》〈양혜왕장구 상〉, 7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맹자에 따르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면서부터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고, 자라서는 형을 존경할 줄 안다. 그의 관점에서 이는 곧 자연적 필연이다.[46]

'어버이를 사랑함'은 '친족을 친애함'에 연결되므로 '인(仁)'의 덕목에 속하고, '형을 존경함'은 '연장자를 공경함'에 연결되므로 '의(義)'의 덕목에 속한다. 그렇다면 군자도, 선비도 아닌, 삶에 찌든 한낱 소시민에 불과한 우리이지만서도 저 고매한 인의(仁義)와의 거리는 생각 이상으로 아주 가깝다 할 수 있다. '어버이를 사랑함', '형을 존경함' 등의 기초적인 가족 윤리를 확충해 나간다면 곧 사회 윤리인 인의로 귀결될 것이므로.

이것은 곧 우리에게 선을 능히 행할 수 있는 재질이 태어나면서부터 구현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의 재질이 있으면서도 '나는 성인(聖人)도 아니요, 군자(君子)도 아닌데, 어찌 능히 선을 행할 수 있으리오?' 하며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타고난 것을 자기기만으로 찍어 눌러서 아니하는 것이지,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맹자는, '선'이라는 것은 결코 공허한 담론이 아니며, '어린아이나 평범한 사내, 아녀자에서부터 공자와 같은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상 생활에서 쉬이 행할 수 있는 것'임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성리학에서 이르는 태극(太極)이니 이(理)니 기(氣)니 하는 거창한 우주론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서 맹자는 한 발 더 나아가 선의 실천이 '의무'임을 설파하고 있다.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성(性)을 알 수 있다.

그 성을 알게 되면 곧 하늘을 알 수 있다.

그 마음을 보존하고, 그 성을 기르는 것, 이것이 하늘을 섬기는 방법이다.

요절(夭折)과 장수(長壽)를 둘로 여기지 않고, 다만 수신(修身)하여 기다리는 것, 이것이 하늘의 명(命)[* 이는 숙명(Fate)과는 다르다. 맹자는 "명 아닌 것이 없다."라 하였으나 또한 "순응하여 그 바름을 지키라. 명을 아는 자는 돌담 아래에 서지 않는다. 그 도에 진력하다 죽음은 바른 명이요, 족쇄와 수갑으로 죽음은 바른 명이 아니다." 하였다. 이는 개인의 행동 여하에 따라 명이 바뀜을 강조하는 것으로, 오히려 반숙명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47]

을 세우는 방법이다.

《맹자》〈진심장구 상〉, 1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맹자는 성(性)에 대한 당대의 보편적인 관념, 즉 '하늘이 내린 본바탕'이라는 관념을 활용하여 자신의 학론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동시에 의무론적 윤리학의 성격을 부여했다.

당대 중국의 상식으로 보자면, 하늘은 만물의 절대자임과 동시에 만물 운동의 근본 원리이다. 즉 모든 것의 주인이자 모든 것의 이치가 되는 존재이므로 섬기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였다. 맹자는 이에 주목하여 '하늘이 내린 본바탕이 담긴 그릇[心]을 보존하고, 하늘이 내린 본바탕[性]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하늘을 섬기는 방법이다' 선언한 것이다.

이로써 사사로이 이익을 추구하는 모든 활동을 '성(性)의 선단(善端(선의 단초))을 보존하고 기르는 일' 앞에서 그 순위를 격하시키는 작업의 단초는 일단 마련된다.

사회 일반의 몇몇 피상적인 이해와는 달리 맹자는 성에 '욕망을 추구하는 마음' 이 내재함을 시인한 바 있다(그것은 상단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맹자에 따르면 그것에서 중체(中體), 내지는 대체(大體)가 되는 마음은 역시 '선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는 마음' 인데, 이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구분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은 근소한데, 보통 사람은 이를 버리고, 군자는 이를 보존한다.

순(舜)[48]

께서는 뭇 사물에 밝으시어, 인륜을 살피시고, 인의에 말미암아서 행동하셨으니, 인의를 천착하여 행동하신 것은 아니었다.

《맹자》〈이루장구(離婁章句) 하〉, 19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맹자에 시선에서 식욕, 색욕 등의 성은 아무런 색깔이 없는, 짐승과 같은[49]이며, 논적인 고자의 입장과 이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사단(四端(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 양지(良知)/양능(良能) 등으로 표출되는 인간의 도덕적 생태를 고찰해 봤을 때, 그 근원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뿌리박혀 있는 것[50]으로 여겨지므로, 역시 사람의 성은 「선하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흰색 종이에 붉은 점 몇 개가 찍혀 있는 것을 보고 "붉다!" 할 수 있는 것과도 같다[51]. 맹자식으로 본다면, 「흰색 종이」는 「동물군 공통의 성」, 「붉은 점 몇 개」는 「인간군 고유의 성」. 하여 사람의 성은 그 구성이 보통 짐승들의 성을 기본 바탕으로 깔고 「선」이 덤으로(...) 얹혀진 형태라는 것. 좀 더 확실히 하자면, 맹자는 동물군 전체를 통괄하는 보편적 성이 있고, 그중에서도 「개의 성」, 「소의 성」, 「목도리도마뱀의 성」 등이라 따로 이름할 수 있는, 다른 종과는 차별적인 해당 종만의 특질적인 성이 있다고 본 것(뭐 당연한 말이다만)인데, 이 중에서도 「사람의 성」의 경우 그 특질이 바로 「선」이라는 것.

이제 생각해 보자! 개가 뼈다귀에 관심을 보이고, 소가 되새김질을 하고, 목도리도마뱀이 목주름을 팔락팔락대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녀석들의 생물적 특질이며 현실이다. 만약 지금 어떤 개에게 뼈다귀를 던져 줬는데 녀석이 뼈다귀를 노려 보며 으르렁대고, 소가 여물에다 까스활명수를 들어부어서 말아다가 원샷으로 때려 먹고, 목도리도마뱀이 웬 빨간 목도리를 목에다 둘둘 감고서는 명동 거리를 직립보행으로 활보하며 "메리 크리스마스~★"하고 인사를 건넨다면 이것은 말 그대로 자연스럽지가 못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늘이 구상한 종의 역할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경우는 어떠한가?

개가 살아가는 방법은 뼈다귀에 붙은 살점을 뜯는 것이고, 소가 살아가는 방법은 되새김질하여 먹은 여물을 쉬이 소화시키는 것이며, 목도리도마뱀이 살아가는 방법은 목주름을 펼쳐 적을 쫓아내거나 이성을 유혹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문명, 즉 구성원끼리 근력과 지혜를 교환하고 집대성하고 진보케 하며, 그 구성원 중 뛰어난 자는 높여 대사(大事)를 맡기고, 결손 있는 자에게는 도움을 주는, 상생의 공동체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인가? 즉 인(仁)으로 대표되는 선(善)이다.[52][53]

실로 그렇다면 '보편성'과 '특수성'의 구분은 명확해진다. 우리 「동물군」은 모두 '움직여[動]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이것이 뭇 동물의 「삶」ㅡ'보편'이며, 먹고, 마시고, 성교하고 하는 등등의 기본적인 욕망 추구가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움직여 살아갈' 것인가? 개들은 개들답게 뼈다귀를 찾고, 소들은 소들답게 되새김질을 하고, 목도리도마뱀들은 목도리도마뱀들답게 목주름을 팔락댄다. 이것이 개별 동물종의 「삶의 방식」ㅡ'특수'이다. 이처럼 개가 개다움으로 살아가고, 소가 소다움으로 살아가고, 목도리도마뱀이 목도리도마뱀다움으로 살아간다면, 사람 또한 사람다움[仁]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맹자가 본 천명(天命)이었다. 맹자는 남달리 유독 '타자의 마음'에 민감한 동물[54]인 인간, 그 특수종의 특수한 삶의 방식을 「선」으로 단정하고, 확신하였다. 하늘이 「인간군(人間群)」에게 할당한 「성」에는 「선」이라는 특수한 「기능」이자 「의무」, 「삶의 방식」이 있다고 천명(闡明)한 것이다.

헌데, 지금, 사람이 되어 사람임을 자각하고 사람으로 살고자 하면서도, 사람의 방식인 선을 "행하지 않겠다!" 한다면?

그렇다면 인간종으로서의 직무 유기가 아니겠는가!

바로 이같은 논리로 맹자는 인도(人道)를 천도(天道)에 결부시켜 '당위의 당위성'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공자의 '인(仁)'에다 '천명(天命)으로서의 의(義)'라는 날개를 달았던 것이다.


3.1. 순자 성악론의 도전[편집]


무릇 사람이 선善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그 성(性)이 악(惡)하기 때문이다.

대저 천박하면 중후하기를 원하고, 추하면 아름답기를 원하며, 협소하면 광대하기를 원하고, 가난하면 부유하기를 원하며, 미천하면 고귀하기를 원하니, 진실로 그 안에 없는 것은 반드시 밖에서 구하려 들기 마련이다.

순자

그리고, 이에 대해 순자는 비판을 가하며 인간의 성(性)이 추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말하고, 성으로부터의 선이 아닌, 후천적인 교육과 학문으로부터의 선이 유학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55][56]

물론 그렇다고 맹자가 인위적 노력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다. 맹자가 학문과 교육을 강조한 측면은 《맹자》라는 서물 전체에서 폭넓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순자에 비해 맹자의 학문, 교육 중시 경향이 부각되지 못한 이유는 〈권학(勸學)〉, 〈예론(禮論)〉 등의 별도의 편을 만들어 요즈음의 대학 논문 형식으로, 즉 세밀한 논증과 냉철한 문체로 학문과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한 순자와는 달리 맹자는 이를 위한 별도의 편을 두지 않고 다만 《맹자》 여기저기에서 거의 기습적으로, 주로 감성적으로 꽂히는 일갈, 비유 등을 활용한 격언 형식으로써 명쾌히, 하지만 지나가듯이 학문과 교육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상은 애초에 《맹자》는 어록집의 성격, 《순자》는 논문집의 성격이라는 차이에서 기인하지만, 두 유자(儒者)의 성향 차이에서 빚어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맹자는 성(性)을 선(善)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학문이나 교육을 성(性)의 연장태로 보았다.[57] 맹자가 보는 인간은 그 기본적 성격이 '매일매일 선의지가 샘솟는, 대인(大人)의 자질이 충만한 무한의 가능태'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성(性)을 보존하고 나아가 확충한다면야 구태여 학문의 중요성을 멱살 잡고 찐득하게 설명해 줄 필요는 없다. 선한 사람은 더 나은 선을 향해 매일매일 스스로 도약할 것이기 때문에.

반면, 순자는 성(性)을 악/오(惡)로 규정했기 때문에 선(善)을 작(作)하는 위(僞)[58]의 기능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위(僞)는 성(性)과는 엄격히 분(分)되어야 하며, 성(性)보다 그 가치가 격상되고 나아가 신성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순자는 위(僞)의 간판급 작용인 '학문', '교육'[59] 등을 자기 학설의 모토로 설정하고 이의 실용성, 필요성을 치밀하게 논증하고자 한 것이다.[60]

순자의 성론이 맹자의 성론을 저격하는 포인트는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 부분이라기 보다는 그 저면에 깔린 "양지, 양능"이다. 순자가 볼 때 '젖먹이 아이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다만 동물적 가족애일 뿐 인(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며, '장성하여 형을 존경하는 것'은 분명 의(義)이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순종성의 발로가 아니라, 장성하는 과정 중에 이미 가정교육을 거쳤으므로 도출된 인위의 결과이다.[61] 즉, 순자가 극력 부정하는 것은 '성(性)의 건설적 측면'이라기 보다는 '성(性)의 건설적 측면에 대한 도덕적 해석'이며, '성(性)과 위(僞)의 혼동'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맹자는 "선(善)의 자질"을 "선(善)"으로 보았고, 순자는 그냥 "자질"로 본 것이다. 순자가 인정하는 선(善), 덕(德)의 성립 요건은 맹자보다 훨씬 까탈스러운 (...) 수준이라는 것.

좌우지간, 이같은 순자의 시선은 대단히 현실주의적이며, 현대적이다. 우리도 익히 알고 있듯이, 아기가 어버이를 사랑하는 이유는 자신이 울면 당장에 어버이가 달려와 토닥여 주고, 안아 주고, 젖 먹여 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요, 또한 그것이 실제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먼저 어버이가 아기를 만족시킴으로써 유대감이 촉발, 발달되고, 이것이 가족애로 이름되는 것이니, 결국 부모-자식의 "신성한 관계"도 실질적으로는 "이익"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순자는 말했다: "이익을 좋아하고, 무언가 얻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의 정情이요, 성性이다."


3.2. 정치철학적 해석[편집]


허나, 후대의 유학자 대부분은 이같이 현실적인 성론을 제시한 순자를 버리고, 비록 개개인 간 해석의 차이를 보이긴 했으나, 다분히 이상적인 성론을 제시한 맹자를 아성(亞聖)으로까지 추앙하며 그 설(說)을 끝끝내 고집하였는데, 이는 순자의 성론이 당위 논증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순자의 출현으로 인해, 자사와 맹자가 애써 천명(天命)과 짝지어 놓은 도(道), 선(善)은 의무로서의 성격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이다.

순자가 성선론을 해체함으로써, 맹자가 양혜왕(梁惠王) 앞에서 부르짖은 "왕께서는 어찌하여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로지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따위의 변설은 있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이제 선善은 양심적 정언명령(定言命令)의 요청물이 아니라, 옛날 옛적 성왕(聖王)의 유별난 기호(嗜好)로 밝혀져 버린 것이다![62]

때문에 순자는 선배 유학자들이 즐겨 써먹었던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라는 인륜적 당위성의 논증을 통한 유세를 하지 않는다. 대신 순자가 택한 것이 "편의성" 논증이었다.[63] 편의에는 "대편(大便)"과 "불편(不便)"이 있는데, 유학자들이 좇는 인의의 법도는 큰 편의, 대편을 낳게 되고, 소인들이 좇는 눈 앞의 이익은 종국에는 편의 아닌 편의, 불편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64] 이러한 태도를 보인 순자의 학문은 후대 유학자들이 보기에 유학의 본령을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었다.

철학 항목에서 보이듯이, 동아시아의 철학은 서양철학과는 다르게 세상에 대한 "왜?"라는 질문이 아닌, "어떻게 해야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근간을 두고 있다. 그런데 순자의 학문은 이 사람의 심성에 대한 "왜?"라는 질문에는 매우 짧고 직관적으로 답을 할 수 있는 반면, "우리는 왜 선하게 살아야 하나요?"라는 질문에는 답하는게 어렵고 많은 추가적 논의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맹자의 경우는 "도덕"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설명했고, 또한 하늘(天)과 연결시켜 일종의 종교적 당위성을 제공했다. 그렇기에 맹자의 사상에서 도덕은, 냉철한 이성의 작용이 아니며, "지키면 좋은 것"도 아니다. 지켜야만 하는 것이며,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옳음"은 복잡하고 냉철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옳으니까" 지켜야 하는 것이 된다.

이제 순자의 사상을 보자. 순자는 "편의성"을 논증하는 방법으로 도덕을 설명하려 하였지만, 이렇게 될 경우 도덕은 "인간의 냉철한 이성의 결과"로 추락한다. 그리고 공리주의 항목에서 보듯 순자와 비슷한 발상은, 맞냐 틀리냐와는 별개로 인간의 직관과 괴리된 도덕적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맹자와 후대 유학자들의 관점에서 순자를 평가하면, "천하를 도탄에 빠트릴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 되는 것이다. 유학자들이 유학을 파는 것은, 어디까지나 천하를 도탄으로 부터 건져내기 위함인데, 여기에서 위험성을 내포한 순자의 사상은 그 자체로 학문의 존재의의를 상실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유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순자의 사상은 재미있는 지적 유희는 될 수 있어도, 천하를 구원할, "도덕주의적으로 실용적인" 사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65][66]

유학자들의 1차 목표는,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세상에 사랑정의평화를 구현하는 것이지, 지적 호기심의 만족은 어디까지나 2차적 목표였다. 물론 순자의 사상은 지적 유희 따위에 경도된 것도 아니고[67], 세상을 도탄에 빠트릴 위험성이 다분한가라는 물음에는 현대까지 연구자 개개인마다 견해가 천차만별이나, 적어도 후대 유학자들이 보기에는 잡스럽고[68] 위험한 사상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참으로 순진하고, 다른 방면으로는 너무나 현실주의적인 것이다.[69] [70]
[71] [72]

때문에 맹자는 이상주의적이고 순자는 현실주의적이었기에, 각각 누군 성선설 같은 순진한 소리나 하고, 누군 성악설 같은 냉철 이성적 현대적 판단을 했다는, 오늘날 민간 일반의 도식적 해석은 역시 피상적이며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성론에서의 논리적인 면에서 맹자가 순자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간단히 맹자를 치워버릴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맹자는 '철학자(혹은 논리학자)'로서는 순자에게 밀릴지 모르나, '정치철학자(혹은 도덕철학자)'로서는 그다지 간단하게 밀리지 않는데, 이는 정치철학에서 그 '학문적 논리성' 못지 않게, 어쩌면 더욱 주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그 '학문적 논리의 기능성'이기 때문이다. 당장 맹자의 논리가 순자에 비해 초라하게 보일지언정, 그 논리 이전에 계산된 논리(즉 전면에 내세울 논리의 기능성을 고려한 토대로서의, 제한적 규준으로서의 논리적 계산)가 있다고 가정할 때, 그것은 아무래도 순자의 그것과 간단히 우열을 잴 수 없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맹자는 왕도론의 시작인 양혜왕상 1장부터, 성선론의 시작인 고자상 1장부터 논리 자체보다는 논리의 정치적 사회적 기능성을 화두로 삼고 있다. "양혜왕, 왕인 당신이 이러이러하게 말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 꼴이 어찌 되겠는가?" "고자, 선생이라는 당신이 이러이러하게 말해버리면 장차 사람들 꼴이 어찌 되겠는가?" 맹자는 명백히 논리 자체가 아닌 어떤 논리의 정치적 사회적 기능, 결과를 우선시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자기 나름대로 분석, 예측하고 우려하고 있다. 왕이 인의를 말하지 않고 대놓고 이익이나 떠벌리고 있으면 밑엣놈들이 무얼 보고 배우겠나? 선생이 성무선악설 같은 거나 말하고 있으면 무조건적 천명적 의무적이지 못하게 되는 도덕이 어떻게 효력을 발휘하겠나?

맹자와 순자(혹은 고자 / 묵자)의 도덕철학(정치철학)적 대립은 비록 그닥 명료하진 않을지언정 훗날 서양 근대의 의무론과 공리주의의 대립의 예고판이었으며, 도덕철학에서의 맹자적 입장(즉 도덕의 무조건성, 절대성을 비논리적 어거지로라도 보호하는 입장: ex. 의무. 천명. 완전태. 상식. 아름다움)은 플라톤(소크라테스)과 크세노폰 이래 로크, 흄, 칸트까지 무수한 철학자들을 괴롭히고 후대의 '멍청하다'라거나 '거짓말쟁이다'라거나 '씹선비 같다'라는 둥의 조롱까지 감수하게까지 하면서, 그들이 끝끝내 놓을 수 없도록 했던 입장이었던 것 같다.

플라톤(소크라테스)이 <<국가>>에서 도덕의 정당화라는 목적의식에 침참하면서 그토록 싫어하던 궤변까지 일삼고 결국 주입식 거짓신화까지 운운하게 되는 이유, 절대선의 이데아계로 침참한 이유, 크세노폰이 <<키루스의 교육>>에서 아동교육과 청년교육의 도덕교육방법의 간극에서 갈등한 이유, 로크와 흄이 이성과 도덕을 의심하다가도 판단을 중지하고 '상식'으로 돌아간 이유, 그들 경험론의 사조를 이어받은 칸트가 비판철학을 일으키고 3비판서를 출판하면서도 오히려 '선험(초월)'의 '성역'을 남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그들 모두 도덕이라는 것이 사실 허상이고 토대가 없다는 내적 결론을 내렸으면서도, 사회일반 만천하에 그것을 공개하면 어떤 붕괴적 사태가 일어날지 상상하고 우려하였기에 그리 하였던 것이 아닐까?

사실, 따지고 보면 순자도 이런 견지에서 결국은 논증 외적 영역의 방법을 택했다. 바로 종교와 기밀을 이용한 방법이었는데, 멍청한 백성들(순자도 기본적으로는 애민주의자였기에 딱히 이 말에 악의는 없어 보인다)은 어차피 알 필요 없고 알아 듣지도 못하므로 걔들은 종교의식으로 위장계도하고 엘리트층만 도덕적 정치적 진리를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맹자적 입장에서 봐줄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마키아벨리나 한비자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결국은 의론의 봇물이 개미 항문 만큼이라도 터진 이상 세간에 퍼지게 되는 걸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결국 루소 이래로 아예 다 민간에 알려져 버렸고, <<한비자>>는 한왕이 아니라 진시황의 손에 들어가 이용당했다. 당장 오늘날 우리 사정은 더해서 이 두 책을 동네서점에서 가볍게 구매하여 비관적이고 음습한 인간관을 습득함과 동시에 서로를 어떻게 등쳐 먹을까를 너도 나도 궁리할 수 있지 않은가(...) 둘 다 우리 군주님만 몰래 사용하세요 간사한 인간 본성과 음험한 술책을 잘 파악하고 이용하세요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됩니다 하는 내용으로 수두룩 빽빽한 주제에 말이다(...).

하여튼 결론을 내린다면, 순자는 맹자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현실주의적으로 그를 극복하고 유학의 새로운 활로를 제시했지만 맹자와 같은 웅혼한 윤리형이상학적 체계를 세울 수는 없었다. 그의 해체적이고 냉철한 사유는 바로 그렇기에 후대 유학자들이 수용하기에는 오히려 두려운 것, 혹은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ㅡ'하늘[73]'을 제거한 유학은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이제 오로지 개개인의 기호에 기대야만 하는 유학은 학문으로서의 절대성과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가?[74]

그렇게 맹자가 살아남았고, 맹자의 사상은 주자 이후 800년 동안 유학, 나아가 동아시아 윤리학의 정통으로 군림하였다.[75]


4. 법선왕론[편집]


(인용문 추가 바람)

법선왕론(法先王論)[76]은 성선론과 더불어, 왕도론(+혁명론)을 정당화하는 주요한 축이다. 성선론이 인간 개개인의 자연적 도덕성을 주장해 인의와 왕도를 정당화하려 한다면, 법선왕론은 역사적인 영웅적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위한 결과의 긍정성을 주장해 인의와 왕도를 정당화하려 한다.

법선왕론의 골자는, 옛날에 위대한 왕자들이 도덕적으로 정치하여 천하가 다스려졌으니, 오늘날 우리도 그들처럼 도덕적으로 정치하면 오늘날 천하 역시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맹자는 법선왕을 말하기 위해 먼저, 당대에 나돌고 있던 순, 우, 탕, 무왕(+a) 등의 비도덕성을 담은 여러 설화를 부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새롭게 순, 우, 탕, 무왕(+a)의 도덕적 미담을 제시한다. 오늘날까지 회자되곤 하는 순, 우, 탕, 무왕 등의 미담이란 것들은 대개 맹자가 제시한 바로 이 미담들이다.

맹자의 이러한 시도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이 <<국가>> 등에서 시도하는 '신화적 장치 설정'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도덕 자체만을 말해서는 사람들이 영 도덕을 잘 안 지킬 것 같을 때, 고대 사상가들은 이런 수법을 많이 써먹었다.

맹자의 7편 중 <만장> 편에서 주로 논해진다. 편명의 만장은 사람 이름으로, 맹자의 제자이다. 이 사람은 편 초장부터 맹자에게 성왕 설화에 관한 날카로운 비판적 질문, 즉 '성왕들의 기존 설화 중 이러이러한 게 있는데, 이건 성왕의 비도덕적 일면을 보여주는 거 아니냐?' 하는 질문을 던지며 등장하고, 맹자는 거기에 방어적 대답을 내놓는다. 그런 식의 대화가 죽 계속된다.(ex.만장 왈 "순 임금은 동생한테 제후 자리 하나 줬는데, 순 임금의 동생은 망나니로 유명한 놈 아닙니까? 순 임금 동생 부임한 땅의 백성들은 뭔 죄입니까?" 맹자 왈 "아, 동생한테 한 자리 줘야지 그래도. 그리고 사실 순이 실권은 다 자기 심복들한테 주고 동생을 보좌하게 했어. 동생한테는 말 그대로 명예만 준 거야. 문제 없지?") 여러 성왕들 중에서도 특히 순 임금에 대한 썰이 주로 다뤄지는데, 이 순 임금이 선양의 전통의 시발점에 있는 인물이므로 이 사람의 도덕성부터 잘 정당화되어야 법선왕론을 내세우기가 순탄하기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이런 일련의 질문들에의 맹자의 대답은 어떨 땐 절묘하고, 또 어떨 땐 궁색하고, 또 어떤 대답은 누가 봐도 맹자의 뇌피셜(...)이고, 또 어떤 대답은 출처 있는 대답이다.

때로는 심지어 만장이 맹자보다 더 맹자답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일도 벌어진다(ex. 만장 왈 "웬 강도 놈이 남한테 뺏은 물건을 가져와다가 예의 바르게 선물하면, 고놈 참 예의 바르다 하며 받을 수 있습니까?" 맹자 왈 "그딴 놈은 죽이기나 죽여야지 받긴 뭘 받어" 만장 왈 "그럼 웬 제후 놈이 백성한테서 수탈한 물건을 가져와다가 예의 바르게 선물하면, 고놈 참 예의 바르다 하며 받는 건 대관절 뭔 도리입니까?" 맹자 왈 "아 그거랑 이거랑 같냐? (횡설수설)" ). 이처럼 만장 편에는 맹자가 만장한테 은근히 쩔쩔 매는 모습이 많이 보이고, 맹자 비판자들한테 곧잘 지적되곤 하는 맹자의 속물적인 듯한 모습도 드러난다. 그래서 만장 편은 맹자 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편이고, 예로부터, 이런 비범한 모습을 보여주는 만장을 성선론에 대해 자주 질문한 공손추와 함께 맹자의 수제자로 보는 시각이 많다.

아마 '법선왕론'이라는 것의 존재 자체에 대해 생소한 사람들이 많을 텐데, 당연한 일이다. 보통 흔히 접할 수 있는 고교 윤리와 사상 과정이나 대학 학부 수준의 철학 교과 과정에서 이게 다뤄지는 일은 잘 없고 따라서 성선론 왕도론 혁명론 등에 비해 인지도도 낮다. 왜 잘 안 다뤄지느냐면, 이건 논증 구조를 갖춘 철학이라기보단 밑도 끝도 없는 썰에 가깝기 때문이다(...). 굳이 철학적으로 다룬다면 정치철학 과정에서 다룰 만한데, 거기서조차 서구적 내용에 치중한 학문 풍조상 차라리 플라톤의 신화 썰이 다루어지지 맹자가 언급될 일은 없다(...).


4.1. 순자의 법후왕론과의 비교[편집]


뭐든지 맹자를 걸고 넘어지고 보는 순자는 법선왕론 역시 걸고 넘어져 법후왕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 골자는, 유치하게시리 정반대로 걸, 주 같은 거나 본받자는 것이나, 미래의 왕을 기다리자는 것이 아니다.

순자의 법후왕론은, 옛날 옛적의 성왕들의 행적이라고 남아있는 기록이 얼마 되지도 않고, 있어도 얘기가 두루뭉실하기 짝이 없으므로, 실제적으로 본받을 건덕지가 별로 없다는 지적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이 비교적 선명해 본받을 건덕지를 잘 남긴 지도자들을 주로 본받아야 하는데, 그런 지도자는 대략 주나라 때부터 나타났다. 때문에 순자는 '왕자들 중에서도 비교적 후대의 왕자들, 문왕, 무왕(+ 주공) 등을 주로 본받자'고 하는 것이다. 즉 순자는 법선왕을 완전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왕 중에서도 공갈빵 말고 알짜만 골라 먹자고 말하는 것이다. 순자는 왕도론을 비판적 계승했듯이, 법선왕론도 자기 나름대로 비판적 계승했다 볼 수 있다. 법선왕-법후왕 명칭에 낚여서 둘이 아주 정반대 노선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

순자의 법후왕론은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순자 당대의 악성 유행이었던 '느그 조상님 뭐하시노' 배틀을 끊어버리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유가의 공자가 주공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제시한 이래, 묵자는 그 위의 우 임금을 내세우고, 맹자는 다시 요, 순으로 반격하고, 그러자 도가 계열에서는 다시 그 위의 황제헌원 등을 내세우고, 음양가는 태호복희를 꺼내들고... 순자 당대에 이르기까지 이런 식으로 제자백가가 서로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우리 할아버지가 짱 셈'이라는 유치뽕짝의 신화 배틀을 과열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놈이고 실증적 근거는 대지 않고.

이딴 천상의 뜬구름으로 치솟는 검증 불가 헛소리들에 치가 떨린 순자는, 담론 가능의 영역을, 문헌상 기록이 봐줄 만한 주나라 대로 도로 끌어내려 제한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공자적인 주례 존숭의 풍조를 회복하려는 노림수도 있었던 듯 싶다.

다만 <<순자>>를 읽어보면 순자 역시 지 내킬 때는 요, 순, 우 잘만 끌어다 쓴다(...). 사실 <<순자>>는 별로 일관성 있는 책이 아니다. 어디에서는 인격적 천을 부정하는가 싶더니, 딴 데 가면 '아아 착한 일을 많이 합시다. 하느님을 느그들을 잊지 않으실 거야' 하기도 하는 등(...) 이런 비일관성은 <<순자>>라는 책이 비교적 후대에 정돈이 된 영향이 크다고 여겨진다. 약간 탈선한 순자의 제자들이나, 더 후대의 순자 흉내내는 사람이나, 좀 다른 성향의 유가의 글이 섞였을 것이란 것. 아니면 그냥 내로남불이거나


5. 역성혁명[77][편집]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社稷)[78]

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다.

이 때문에 뭇 백성의 신임을 얻어야 천자(天子)가 되고, 천자의 신임을 얻어야 제후가 되며, 제후의 신임을 얻어야 대부(大夫)가 되는 것이다.

제후가 그 사직을 위태롭게 한다면, 곧 갈아치운다.

희생이 이미 이루어지고 기장과 피가 이미 정결하여 제사 의식이 때에 맞게 되었음에도 가뭄과 홍수가 일어난다면, 곧 사직을 갈아치운다."

《맹자》〈진심장구 하〉, 14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다.

"과인이 듣기로는, "(湯)은 (桀)을 몰아내고 천자(天子)가 되었고, 무왕(武王)은 (紂)를 쳐내고 천자가 되었다" 하던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맹자가 답했다.

"전해오는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신하 된 자로서 제 임금을 시해한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맹자가 말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79]

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80]이라 하며, 잔적지인(殘賊之人)을 단지 "그놈(一夫)!"이라고들 하니, "무왕께서 그 '주'라는 놈을 처형하셨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말은 들어 본 바 없습니다."

《맹자》〈양혜왕장구 하〉, 8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81]


맹자가 제나라의 선왕에게 말하기를 이같이 하였다.

"왕의 신하 가운데 그 처자식을 벗에게 맡기고 초(楚)나라로 유람을 간 자가 있었다 하지요. 그자가 돌아와 보니 처자식이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었다 한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절교해야겠지요."[82]

맹자가 말했다.

"사사(士師)[83]

가 사(士)[84]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파면을 시켜야겠지요."

맹자가 말했다.

"사방 국경의 안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왕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돌렸다.[85]

《맹자》〈양혜왕장구 하〉, 6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 유교적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들이다.

맹자는 왕 앞에서 대놓고 잘못된 왕은 갈아치워야 한다, 백성을 착취하는 왕과 관료들은 도둑놈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갈긴 인물이다. 여기에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신(神)은 갈아치워야 한다는 말도 한 인물. 모든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의 권위를 마냥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86] 맨 마지막 구절의 경우 번역을 달리해서 "저는 (걸왕과 주왕을 죽였다는 것에 대해) 일개 필부들을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왕을 시해했다고 들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은 단순히 이해득실을 따지는 공리주의가 아니라, 군주의 권위의 정당성이 어디까지나 백성에게 있다는 말이다 맹자가 굉장히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좋은 것을 독점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백성들과 함께 하라"는 것이다.

특히 (天)을 백성과 동일시하여 천명(天命)의 개념을 인문주의적으로 뿌리박았고, 이 천명이 바뀌는(革) 기준을 민심으로 규정하여서 민본(民本)의 개념을 정치의 축으로 세웠다. '명분에 집착하며 현실성이 없다'는 오늘날의 유교에 대한 뒤틀린 평가와는 달리, 맹자의 정책은 정전제로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민생을 구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지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애초에 맹자는 당대 패권자들에게 정책 파트너로서 초청을 받은 사람이다. 그냥 바른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사람이었고, 그를 초청한 군주들도 그 말을 실제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뜻이다. 백성과 함께하기 위한(여민동락) 군주의 도덕적 근본을 요구하는 것이다.

맹자의 민본주의가 민주주의로 연결되었다는 주장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87][88] 단지 민본적 사상이 민주주의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는 정도. 그나마도 민주주의에서 정치의 결과를 최종 판단하는 주체는 시민 개개인인 반면, 민본주의에서 "천명"을 판단하는 주체는 집권자 및 지배층에 한정된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그럼에도 맹자의 민본 사상이 중요한 것은, 민(民)과 천(天)을 동일시하면서 국가의 정통성에 있어서 "민심"을 중시하도록 만들어 놓은 데 있다.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권력자가 갈린다"는 주장은 민주주의가 대세가 되기 이전에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사상이다. 특히 법가의 등장 등으로 왕권의 강화와 일반 백성에 대한 철저한 통제를 지향하고 있던 기원전 4세기의 상황을 고려하면 맹자의 사상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 서민 사회의 형성과 사회적인 심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맹자의 시대에 그의 학설이 제도적으로 뿌리내리지는 못했고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맞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맹자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대의 한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시선으로 보더라도 전국시대는 까마득한 옛날이었고, 맹자의 주장을 당시의 조선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유학자들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자의 근본적인 메세지는 조선 시대에 유효하였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장이다.


5.1. 혁명론 도출 배경에 관한 의문들[편집]


그런데, 일부 학자들 중에서는 "맹자는 전형적인 귀족주의자로, 그의 혁명론도 사실은 민의(民意)에의 존중보다는 귀족 지배층의 편의[89]를 고려한 과정에서 도출된 것이다."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즉 사(士), 대부(大夫) 계층의 이익을 염두에 둔, 군권(君權) 견제를 위한 변설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

그러니까 걸, 주 같은 폭군의 자리에 맹자가 섬기는 군주가 대입되고, 탕, 무왕 같은 덕을 갖춘 혁명자의 자리에는 맹자 본인으로 대표되는 사, 대부 귀족 계층이 대입될 수 있으니, 맹자는 결국 자기가 섬기는 군주한테 '우리들 귀족한테 나중에 걸, 주 꼴 당하기 싫으면 우리한테 눈치껏 권력 내놓고 군주 너는 알아서 짜져라'라고 압박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 일부 학자들의 의견은 핀트부터가 좀 어긋난 것이다. 맹자가 토착 귀족이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제나라 선왕에게 혁명론을 설파한 당시, 그는 외부에서 초청받아 자리잡은 객경(客卿)의 신분, 그나마도 실권은 없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자길 후원해 주는 군주를 견제하고 남의 나라 벼슬아치들 입김을 강화시켜 봤자 손해 보는 건 자신이었다.[90] 애초에 맹자 자신부터가 철밥통 벼슬아치들 입김 때문에 일 말아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뭐하러 그러겠는가.[91] 즉 맹자와 다른 사, 대부 계층이 담합할 만할 상황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맹자가 다른 사, 대부 계층 이익을 옹호할 이유도 없었다.'일부 학자'들이 맹자와 여타 사, 대부 계층을 이익공동체로 본다면 오류를 범한 것이다.

또, 일부 학자들이 놓치는 정말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맹자는 국군(國君) 한 사람만 갈군 것이 아니라, 떡밥만 생기면 공직자란 공직자는 죄다 갈구고 다녔다는 사실이다.

맹자가 평륙(平陸)[92]

에 가 그 대부(大夫)에게 말했다.

"당신의 지극지사(持戟之士)[93]

가 하루에 세 번 대오를 이탈했다면, 그를 처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대부가) 말했다.

"세 번을 기다릴 것도 없지요."

"그러시다면야, 당신께서 대오를 이탈한 일 역시 많습니다. 흉년기세에 당신의 백성들 중 늙고 야윈 이들은 시신이 되어 구렁텅이에서 나뒹굴었고, 장성한 이로서 사방으로 흩어진 이들은 머릿수가 수천이었습니다."

(대부가) 말했다.

"그것은 저 거심(距心)[94]

이 어찌 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맹자가) 말했다.

"지금 다른 사람의 소와 양을 받아 기르는 일을 부탁받은 이가 있다고 하십시다. 그렇다면 필히 목장과 목초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목장과 목초를 구하려 했으나 얻지 못했다면, 이제 녀석들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할까요? 아니면 우두커니 서서 그것들이 죽는 꼴을 보아야 할까요?"

(대부가) 말했다.

"이는 곧 저 거심의 죄입니다."

다른 날, (맹자가) 왕[95]

을 만나 보고 말했다.

"왕의 고을[96]

을 맡고 있는 이를 신(臣)[97]이 다섯 명 알고 있습니다만, 스스로의 죄를 안 이는 공거심이 유일했습니다.[98]"

(맹자가) 왕을 위해 (공거심과의 문답을) 이야기했다.

왕이 말했다.

"이는 곧 과인의 죄입니다."

《맹자》〈공손추장구 하〉, 4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여기선 아예 면전에다 대고 "너 일 제대로 못하는데 뱃지 빼야 되는 거 아니니?"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이번엔 "그러면 맹자 개인의 입지만 상승시켜서 개인적 이득을 좀 챙겨 보려고 했던 건 아니냐"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언어도단이다. "실권 없는 객경"이라는 것은 마냥 싱거운 직종처럼 보이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경(卿)의 신분이기 때문에 봉급을 주긴 줘야 한다. 즉 일을 안 해도 연봉이 쭉쭉 나오는 자리다.[99] 근데 맹자는 왜 괜히 평생 왕들, 다른 사, 대부들이랑 수시로 투닥거리고 갈라서고, 특히 제나라를 떠날 때는 회유책으로 제시된 개인 학당 + 곡식 1만 가마의 연봉을 굳이 마다하고 가 버렸단 말인가. 게다가 맹자는 제나라를 떠나기 이전부터 왕이 자기 말을 안 들으니까[100] 항의의 표시로 봉록 받기를 거부하여 누적량 10만 가마 가량의 봉록을 안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또 해석을 달리하여 "사실 실질적 이익에 대한 계산은 없었고, 그냥 권력욕을 주체 못한 게 아니냐"라고 해 보면 어떨까?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맹자의 인의론, 왕도론, 성선론, 역성혁명론, 대장부론, 민귀군경론(民貴君輕論), 존현론(尊賢論) 등 모든 논설이 사실은 왕을 세 치 혀로 홀려서 자신의 허수아비로 만들고, 왕 머리 위에 앉은 실세로 군림하며 지존의 쾌락을 느끼고자 했던, 큰 그림의 포석이었다는 소리. 이쯤 되면 아주 대놓고 음모론이다. 사실이고 아니고를 판단할 객관적 근거는 어느쪽에도 없으니 판단은 각자 취향껏 알아서.[101]

일부 학자를 중심으로 이런 논의가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사적으로 봤을 때 조선 왕조의 유교 학풍이 맹자를 상당히 중시했고, 적어도 대중적으로는 조선이 심각한 군약신강의 나라였으며 더불어 이런 군약신강 때문에 붕당, 세도정치 등이 일어나 나라를 그르쳤다는 인식이 짙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흔히 생각되는 것과 달리 조선은 군약신강 체제의 국가가 아니었다는 걸 알아둘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내내 왕이 정책을 추진하려는 과정에서 재상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시골 선비까지 키배를 걸어왔다는 기록들이 있다보니 이런 인식이 생긴 듯 한데, 오히려 조선이 진짜로 왕권이 형편없는 국가였다면 유림에서 왕에게 키배를 걸어올 이유가 없다. 오스만 제국예니체리들의 예시를 보면 알 수 있듯 정말로 군약신강이 심한 국가라면 그냥 왕의 존재를 개무시하면 그만이다. 반면 조선 왕조 내내 왕을 이론적으로 반박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은 오히려 왕의 실질적 권한이 강했기 때문이다. [10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이유는 맹자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맹자는 당대의 사회 구조나 지배계층을 직접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고, 위의 인용문에서 나오는 것처럼 종종 정면으로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맹자의 사상은 순자처럼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윤리체계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 윤리체계를 구성했다. 따라서 맹자가 주장하는 사회의 모습이나 사회 문제의 해결방안은 당대의 현실에 맞게 변형된 것이 아닌, 윤리체계 자체에 바탕을 둔 불변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맹자 본인은 어느정도 당대의 현실을 직시했을지 몰라도 그의 윤리체계가 그런 태도를 뒷받침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맹자가 당대의 기득권층을 비판했다고 해서 사회 구조에 대해 진보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맹자가 애민정신을 내세운 것은 왕과 권력자들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데서 그쳤으며, 백성들의 저항[103]을 언급했다고는 하지만 그로부터 사회 구조의 변화나 인사 제도의 변경과 같은 견해를 도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다. 즉 지배계층 내부에서 도덕성이 있는 사람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의미일 뿐, 계층에 바탕을 둔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선비들이 왕과 지배층을 비난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진보적인 사회관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즉 맹자 본인은 지배층을 비판하는 입장이었지만, 맹자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지배층의 편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용하기에 적합하며, 실제로 그 이후의 역사에서도 맹자 및 후계자들의 사상은 바로 그런 역할을 했다. 맹자의 사상에 대한 논란은 바로 이 불일치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5.2. 맹자의 혁명론은 조선 건국(정도전의 혁명)을 정당화하는가?[편집]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맹자의 주요 사상 항목을 정독한 사람은 대충 눈치챘겠지만, 다른 모든 사상이나 종교적 가르침도 후대에 오면 다 그렇게 되듯이, 본원 유교적, 맹자적 사상이나 가르침도 조선에서 100% 이해되거나 실현되지 못했기에(그것이 시대적, 현실적 제약으로 나름 용납해 줄 만한 이유에서였든,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였든 간에) 본원 유교, 맹자와 조선 유학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게 되었다.[105] 사실 조선 건국 초장부터 그 대표적 사례가 발생했는데, 조선 건국 자체가 맹자 혁명론의 괴상한 적용이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을 '유교 국가'로 내세워 맹자 사상에 확산에 기여한 정도전만 하더라도, 개인 행실을 따진다면 물론 과전법 시행 등에 기여하여 민생에 있어 맹자의 義를 실현한 일면도 있으되, 정치적으로는 맹자의 義를 변질적으로 이용한 일면도 있는 인물로, 예컨대 군신유"의"의 차원에서 본다면, 그는 누대의 찬탈자들이 그리 했듯이 맹자의 혁명론을 과대해석하여 악용했다고까지도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소위 변질된 유교적 전통에 정도전이 깊이 결부돼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하는 문화적 폐습이라기 보다는 사상적 오용 혹은 이용을 다룬다.)

맹자는 걸, 주와 같은 극악무도한 폭군의 처단을 용인했지, 말 좀 안 듣는 왕(예컨대 공양왕)이라고 냉큼 다 모가지 치라고는 안 했다. 맹자의 사상에서 혁명론의 파격성이 크기에, 맹자의 말 중 혁명론만 강조되고 이게 왕이 삐끗하면 냉큼 확 그냥 때려 부셔도 된다는 식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맹자는 "이윤[106]의 뜻이 없이 이윤의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찬탈이다", " '우리 임금은 능히 해낼 수 없는 인물이다' 여김을 '賊[107]'이라 한다." 등 과격한 혁명을 경계하는 말도 한 인물이다. 이로써 볼 때 정도전의 행실은 맹자의 의에 부합하지 않고 변질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너무 과격하며, 오히려 정몽주의 행실이 보다 맹자의 의에 맞는다.

사실 그 누구보다 맹자를 열성 탐독한 정도전이 이 점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역시 누대의 좀 짱구 굴릴 줄 아는 찬탈자들이 그리 했듯이, 처음에는 선양의 형식을 취하는 걸로 가닥을 잡고 찬탈적 혁명 과정을 포장하려 했다. 맹자는 요-순-우의 선양 승계를 긍정적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양왕-이성계의 선양 승계가 이룩되면 맹자의 義와 합치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었다.[108]

그렇지만 이 역시 잘 뜯어 보면 맹자의 뜻에 별로 합치되지 못한다. 맹자는 선양이라고 다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맹자 생전에 선양이 막돼먹게 일어나자 맹자가 이를 극력 부정한 일이 있었다. 전국시대 연나라의 자쾌-자지 선양 사건이 그것이다. 연나라의 권신 자지가 계략을 꾸며, 자기 수하를 시켜서 연왕 자쾌를 이런 식으로 구슬린다: '자지는 충신이니까, 임금님이 자지에게 선양한다 하면 자지는 사양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임금님은 왕위는 그대로 지키면서도 요, 순처럼 선양을 하고자 한 덕 있는 군주로 소문이 날 테니, 만천하에 우리 임금님 가오가 살겠죠?'

여기에 멍청한 자쾌는 홀딱 넘어가서 '자지한테 선양한다' 했는데, 자지 이 놈이 냉큼 받고 입을 싹 닦는다. 그래서 연나라는 자쾌파 대 자지파로 분열돼 내전에 휩싸인다. 이때 마침 옆나라 제나라에는 요순의 선양을 찬양한 맹자가 제나라 선왕을 가르치며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이거이거 연나라 쳐들어가도 되는 부분임?'하고 자문하자, 맹자가 이런 식으로 답을 준다: 'ㅇㅇ 준 놈이나 받은 놈이나 정신머리 없는 놈들이지. 자쾌 놈은 멋대로 주면 안 됐고 자지 놈은 멋대로 받으면 안 됐음. 연나라로 쳐들어가서 다 본때를 보여주고 연나라 사람들 의향에 맞춰서 새 군주를 세워줘야 함.' [109]

사실 맹자가 선양이든 무력적 혁명이든 아니면 그냥 자손계승이든 왕위 계승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한결같다. 1) 하늘이 그 왕위 계승자를 받아들여야 하며, 2) 백성이 그 왕위 계승자를 받아들여야 한다.[110]1은 하늘에 제사지낼 때 별 일 없으면 그냥 통과고(...)[111], 2는 백성들이 제 입으로 호응하면 통과이다. 맹자에 의하면, 요가 죽자 백성들이 요의 아들이 아니라 오랫동안 능력과 덕을 내보인 요의 재상 순에게 몰려갔고, 순이 죽자 순의 아들이 아니고 역시 오랫동안 능력과 덕을 내보인 순의 재상인 우에게 몰려갔다. 그런데 우가 죽자 당시 우의 재상은 경력이 짧았던지라 민심이 그에게 돌아가지 않고 우의 아들에게 돌아갔으며, 이때부터 왕위의 자손계승이 일반적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든 아니든 맹자의 입장은 명확하게 보여준다. 왕위 계승의 조건? 그것은 '민심' 두 글자에 달린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 공양왕-이성계의 선양(도 뭣도 아닌 그 무엇)이 정말 "민심"을 반영했을까? 민심이 공양왕을 내치고 이성계가 새 왕조를 건설해야 한다고 명령한 일이 있었는가? 그러고 보면 요즘 각 정당에서 자기 당론을 얘기할 때 아무튼 저마다 즈그 당론이 "민심"이다 외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가지고 잘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정통 따지기 좋아하는 조선 유학자들이 정도전이 아닌 정몽주를 숭앙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정도전이 아닌 정몽주가 조선왕조 내내 숭앙된 것은, 물론 익히 알려진 대로 조선 건국 이후부터는 정치적으로 내세워야 할 가치가 역전된 때문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정말 원론적으로 정도전의 행실이 별로 유교적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비단 맹자의 군신유의 기준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정도전은 주자(朱子)도 자기 선배 탄핵했다는 명분을 들이대며 동문과 스승을 참살하자고 부르짖고 사법살인을 자행하며 그 와중에 법에도 없는 간계를 일삼는 등[112] 기본적인 仁에 반하는 것으로 해석될 행실을 보이기도 했고, 실제로 정도전 사후 정도전의 명예가 박탈될 때 바로 이런 점이 지적당했다. 한 마디로 정도전은 여러 모로 나가도 너무 나갔다는 것이다.

물론 또 정몽주의 행실 겉만 봐서 너무 반혁명적, 보수적으로 쏠려버리면 이번엔 맹자의 의를 기준으로 볼 때 함량미달이 되고 역시 맹자 사상의 변질이 된다. 조선유학의 흐름이 갈수록 이렇게 쏠려서 폐단을 가져왔기에 오늘날 와서는 또 정도전식의 시원하게 다 때려 부시는 과격 노선이 재조명을 받고 고평가, 심지어는 맹자 사상의 적통을 이은 것으로 평가 받곤 하는데, 이런 평가는 맹자의 원론이 아니라 오늘날의 시대의식에 비추어 끌어낸 평가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상은 특히 군신유의에서의 의를 위주로 따져본 것이며, 정도전으로 인해 <<맹자>>가 보급되고 이로써 맹자의 의의 일반적 가치가 조선 건국 이래 우리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은 인정될 만하다. 다만 무슨 성부-성자처럼 맹자-정도전/맹자 사상-조선유학이 일치하는 게 아님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6. 대장부[편집]


경춘(景春)[113]

이 말했다.

"공손연(公孫衍)[114]

장의(張儀)[115]는 진정한 대장부(大丈夫)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한 번 노하면 제후가 두려움에 떨고, 편안히 거처한다면 천하가 잠잠해집니다."

맹자가 말했다.

"그따위로 어찌 대장부의 이름에 미치겠소이까? 그대는 여지껏 (禮)를 배우지 못했소?

장부(丈夫)는 관례(冠禮)[116]

를 치를 적에 그 아버지로부터 진중한 가르침을 받고, 여자는 시집갈 적에 그 어머니로부터 진중한 가르침을 받는데, 어머니는 딸이 친정 문을 나설 적에 타이르기를 "가는 곳이 여자의 집이 되는 것이니, 너는 마음으로 공경하고, 마음으로 경계하여, 남편에 대해 어김이 없어야 한다." 하오.

이처럼, 순종을 정칙(正則)으로 삼는 것은 첩부(妾婦)[117]

의 도리올시다.[118]

천하의 넓은 집[119]

에 거처하고, 천하의 바른 자리[120]에 서며, 천하의 큰 길[121]을 거닐어, 뜻을 얻는다면 만백성과 더불어 이를 좇고, 뜻을 얻지 못한다면 홀로 그 길을 거니므로, 부귀도 그를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도 그를 흔들지 못하며, 위세나 무력도 그를 굽히지 못하나니, 이와 같아야지 가리켜 이르기를 '대장부'라 하는 것이외다!"

《맹자》〈등문공장구 하〉, 2장(주자집주 기준, 번역은 별개.)


민본주의적 역성혁명을 주장한 대목과 더불어 《맹자》에서 가장 인용 빈도가 높은 대목이다.

맹자는 본시 용기나 배포, 위세, 무력 등이 대단한 남성을 이르는 칭호로 쓰였던 '대장부(大丈夫)'[122]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여, 지극히 올곧고 굳센 도덕적 기개를 지닌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하였다. 이는 대인(大人)과도 뜻이 통한다.

맹자의 대장부론은 맹자가 그 특유의 왕패론(王覇論)을 전개하면서 '왕자(王者)'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왕자'의 론(論)이 최고 통치자로 명명됨의 필수 요건으로 도덕성을 요청한 것이라면. '대장부'의 론은 이른바 상남자로 명명됨의 필수 요건으로 도덕성을 요청한 것이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에 팽배했던 '힘이 센 놈이 위대한[大] 놈'이라는 인식을 변혁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맹자는 대장부론을 통해 종래의 힘 본위 대소귀천(大小貴賤) 인식을 덕(德) 본위 대소귀천 인식으로 변혁, 아니, 맹자 본인의 관점으로 본다면 복원함으로써, 난세의 주도권을 무력으로써 장악하고 있는 패(覇)와 여타 무뢰배들의 현실적 위상을 단호하게 격하하고, 그들에 대한 도덕적 지성인의 우월성을 확증, 확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맹자의 대장부론은 이러한 대담성과 호쾌성으로 인해 읽는 이들로 하여금 적지 않은 '인문정신적 쾌감'을 느끼게 하므로, 난세의 암울한 시대상으로 인해 의기(義氣)를 잃어버린 지식인층이 다시금 분발심을 얻게 되는 데에 주요한 계기로 작용하곤 하였다.

[1] 易姓革命論은 사실 엄밀히 말해 그냥 혁명론(革命論)ㅡ천명(天命)의 변혁(變革)에 관한 논설(論說)ㅡ이다. 역성(易姓)ㅡ군가(君家)의 성(姓)을 갈아치움ㅡ따윈 아무래도 좋은 것이지만, "혁명"이 "역성"까지도 용인한다는 부분에서 시사점이 크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역성혁명론"이라 불린다.[2] 도가 계열의 사상가로, '정강이 털 한 올을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해도 그리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맹자는 이러한 '위아주의(爲我主義)'를 '무군(無君)의 도(道)(임금을 업신여김: 무정부주의)'로 평가했다.[3] 묵가의 창시자로, '근친원소(近親遠疎)의 차이를 두지 말고 만인을 평등히 애호할 것(겸애(兼愛))'을 주장했다. 맹자는 이러한 '겸애주의兼愛主義'를 '무부無父의 도(아버지를 업신여김: 가족 해체주의)'로 평가했다.[4] 춘추시대에 난립하던 제후국들이 크게 일곱 개로 정리되고 경제적으로도 일약 발전을 한 전국시대였지만 천자국인 주나라의 의미가 아예 없어진 시기이기도 하기에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질서를 이상적으로 본 유가 입장에선 춘추시대보다 심해졌다고 할 수 있다.[5] 의(義)는 본성에서 발현된 자연스러운 규범이나, 그 본성 규범이 사회적으로 정합하다고 보는 것이 맹자 특유의 이론이다.[6] 단순히 이익 전반을 모두 말한 것이 아니다. 맹자는 인의(仁義)로부터 파생된 이익(利)을 당연히 긍정했다. [7] 원문에는 「천하는」이라고 되어 있다. 문법적 실수로 간주하고 이같이 수정하였다.[8] 인정(仁政). 이 말은 《논어》 등 공자의 어록에서는 나오지 않고 《맹자》에서 처음 등장한다. 본격적인 유가(儒家) 정치론이 맹자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9] 공자의 손자.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증자(曾子)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 학통을 계승함으로써 유가 정신주의의 반석을 놓았다. 사상적으로 맹자와 접점이 많아, 자사와 맹자의 학문을 묶어 사맹학(思孟學)이라 일컫기도 한다. 저서로 《자사자(子思子)》 23권을 남겼다 하나, 일찍이 《중용(中庸)》 외에는 대부분 망실되었고, 일부가 최근 전국시대 고분묘 발굴 성과에 따라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10] 특정 글자를 동일한 발음의 다른 글자로써 풀이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대 중국인들의 시적이고 철학적인 글자 해석법으로, 중국 고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11] 위는 삼진에서 갈라져 나온 직후인 전국시대 초기에는 황하 중류 일대를 장악하여 잘 나가는 국가였다. 하지만 방연이 조나라를 치는 틈을 타 제나라의 손빈이 원군을 지휘해 위를 직접 공략한 후 마릉에서 위군을 격멸했고, 이후 진(秦)의 상앙이 황하 서쪽 영토를 탈취하는 바람에 많은 영도를 잃으며 국력이 급격히 쇠퇴한 끝에 수도를 안읍에서 대량(大梁)으로 옮기기에 이른다. 이후 위나라의 별칭이 수도를 따 양이라고도 불리게 되었기 때문에 맹자 첫 장에 등장하는 양 혜왕은 바로 위의 국왕이다.[12] 2015년 10월 기준 가치로 따져도 약 15억 원에 이른다.[13] 송나라는 노자하시지요라고 했고, 설나라는 호위병을 구하라고 돈을 줬는데 제나라는 그런 말이 없었으니, 이유 없이 준 돈은 매수하려고 준 돈이다라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송과 설 나라가 정말 저 이유 때문에 줬을 것이라고는 맹자도 믿지 않을 것이고, 제나라 왕도 저 금을 주면서 인사치레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며 송나라에서 받은 돈이 다 떨어져서 설나라에서도 받았다고 하기에는 송나라에서 준 황금 21kg이 너무 거금이란 점을 고려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감은 있다. 때문에 이 대목에서 진진의 질문은 자연스러운 반면에, 맹자의 답변은 영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14] 무(畝) 또는 묘(畝)는 고대 중국의 전토(田土)의 면적 단위이다. 주공(周公)이 처음으로 제정한 것으로서, 넓이는 길이가 19.496㎝인 주척(周尺) 8척이 만드는 정사각형 면적의 100배인 주척 6,400평방척이다 ㅡ 한국민족문화대백과.[15] 돈(豚)은 새끼 돼지이고, 체(彘)는 큰 돼지이다. 굳이 돼지만 구분해 놓은 이유는 새끼 돼지와 큰 돼지의 쓰일 데가 다르기 때문이다. 새끼 돼지는 특수한 제물용으로 쓰고, 1년 이상 키운 큰 돼지는 대개 식용으로 썼다. 성체, 미성체의 구분이 아니라 종의 구분이라는 설도 있다.[16] 주나라의 향교(鄕校)를 상(庠)이라 하였고, 은나라의 향교를 서(序)라 하였다. 전국시대에는 둘이 합쳐져 '향교'를 의미하는 보통명사화하였다.[17] 위 3장에서의 대화 상대는 양혜왕(梁惠王)이고, 이 7장에서의 대화 상대는 제선왕(齊宣王)이다. 맹자는 그들 모두에게 초지일관 왕도를 설파했으므로, 두 곳에서 글자 한두 개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똑같은 문장이 나타난다.[18] 공자의 자(字). 왕 앞에서 '선생(자子)' 운운하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으므로 자로써 언급한 것이다. 때문에 뒷말에서도 공자에 대한 공대(恭待)가 없도록 번역하였다.[19] 순장에 쓰이는 인형으로, 흙이나 나무로 만들었다.[20] 등나라 문공의 신하.[21] 곡식의 소출과 그에 기초한 녹봉의 배급.[22] '군자'는 본래 오늘날 말하는 '정치인', 혹은 '어엿한 사회인' 정도의 의미로 쓰이던 말인데, 공자 이래로 유교적 정치철학이 '정치인' 됨의 조건으로 '도덕적 지성인' 됨을 강조하면서 '정치인'은 곧 '도덕적 지성인'이라는 보편적 인식이 만들어졌고, 이 영향으로 세월이 흐르며 의미의 중점이 이동하여 '정치인이 되기에 적합한 도덕적 지성인'의 의미가 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본래적인 의미에 가깝게 쓰였다.[23] '군자'가 도성{國} 안에서 '지능(知能)으로 수고하는{勞心}' 자라면, '야인'은 도성 밖 들판{野}에서 '체능(體能)으로 수고하는{勞力}' 자이다.[24] 조(助)는 은(殷)나라 때부터의 세법인데, 사전(私田)을 가진 여덟 농가가 한 묶음이 되어 하나의 공전(公田)을 협력하여 가꾸고, 그 공전에서의 소출만을 나라에서 거두어 가는 세법이다.[25] 곧 성내(城內).[26] 오늘날의 총리급~장관급 관리.[27] 규전은 직역하면 '정결한 밭'이 되는데, 이는 이 밭이 '제사용 곡식'을 얻는 밭이기 때문에 그리 부른 것이다. 규전에는 세금이 붙지 않는다.[28] 정이천(程伊川)에 따르면, 나이 16세 이상으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내이며, 그가 장성하여 혼인하고 가정을 꾸리면 일부(一夫)로 인정하고 그때 100무의 전답을 준다. 이에 대해 주자(朱子)는 100무의 전답 외에 다시 남는 사내{餘夫}에게 토지를 주는 것이니 야인을 우대하는 정책이라고 하였다.[29] 사실 맹자와 가장 극명한 대척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는 학자는 한비자(韓非子)다.[30] 行一不義殺一無罪而得天下仁者不爲也: 하나의 불의를 행하여 하나의 무죄한 이를 죽이면 천하를 얻는다 하더라도 인자(仁者)는 그리 하지 않는다ㅡ이 대목은 맹자가 '성인聖人들이란 어떤 이들인가?'를 논할 때 했던 말인 「行一不義殺一不辜而得天下皆不爲也: 하나의 불의를 행하여 하나의 무고한 이를 죽이면 천하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 그리 하지 않는다」와 매우 유사하다. 순자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맹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31] 말 그대로 망하는 도(...). [32] 위 요약문도 왕패편을 참고하여 만든 것.[33] 사지(四肢). 팔다리.[34] 배권(杯圈). 배권은 '술잔' 혹은 '나무 식기'. 이 대목에서의 배권은 주로 '술잔'으로 해석되지만, 연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고리버들 목재가 어떻게 술잔 기능을 할 수 있는가에서부터 시작하여 무수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과연 고리버들로 술잔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면 이 배권은 나무 식기를 지칭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나무 식기인가? 혹 고대에는 이 단어에 또 다른 뜻이 있었는가? 하지만 그딴 건 이 담화의 요지와 별로 상관이 없으므로(...) 대강 번역하여 그저 '광주리'라고 명명해 두겠다.[35] 감정(感情)의 의미가 아니다. 실정(實情(=실태(實態), 실상(實相)))의 의미. 곧 재질과 통하며, '갖추어진 바탕의 참된 바'를 뜻하는 것. 혹은 '경향성/동향성'의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일본의 유학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齋)는 자신의 저서 《어맹자의(語孟字義)》에서 "정은 성의 욕구하는 바이니, 움직이는 것이 있다는 것으로써 말한 것이다. 때문에 성정(性情)으로 병칭한다. 〈악기(樂記)〉에서 이르기를 '물(物)에 감하여 움직이는 것이 성의 욕구이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 하였다. 성균관대학교 이기동 교수 저 《이또오진사이-일본 사상의 대변자》에 이 《어맹자의》의 번역이 실려 있으므로 자세한 바를 알고 싶은 위키러는 이를 참조하시길.[36] 위 인용문의 그것과 의미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양자 모두 재질(才)과 연관되어 언급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37] 일찍이 공손추장구 상 6장에서 제시된 '사양지심(辭讓之心)'에 해당하는 자리를 여기서는 '공경지심'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차지하고 있다. 이로써 맹자가 사덕(四德)을 반드시 일정한 도식에 가두려 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38] 삭(鑠)ㅡ원문의 이 글자를 따른다면 '녹아드는 것'이 직역이겠지만, 성균관대학교 신정근 교수의 번역을 빌렸다. 신 교수의 번역은 맹자가 '삭(鑠)'으로써 표현한 '외입되는 모양'을 '욱여넣다'라는 우리말로 묘사함으로써 '외입'의 비자연성, 강제성을 특히 부각하여 맹자의 뜻을 탁월하게 살려냈다.[39] 저런 소개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동양철학사에서 '인성론(심성론)'이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은 서양철학사에서의 '인식론(지식론)'에 비견할 수 있는데, 그 중요한 부분에 대한 설명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그렇다고 인식론을 교과서에서 제대로 다루냐 하면 그것도 절대 아니지만[40] 이 대목이 우리가 흔히 쓰는 그 '방심(放心)'이라는 단어의 출처이다.[41] 여기서도 오해가 발생할 수 있는데, 이건 나향욱 류의 개돼지 발언이 아니다. 바로 뒤에 맹자는 "진정 항심이 없어지면 방탕하고 편벽되고 사악하고 사치스러워져 못하는 짓이 없게 되는데, 이렇게 급기야 민(民)이 죄에 빠지게 된 그 다음에야 쫓아가서 형벌을 가한다면, 이건 그물을 쳐 놓고 민(民)을 포획하는 게 아닌가? 인자(仁者)가 어찌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민(民)을 그물질할 수가 있는가?" 하고서 오히려 민을 옹호하는데, 이렇게 해서 또 나오는 말이 바로 저 위에서 이미 인용된 왕도론이다.[42] 공자가 태어나고 자랐던, 그 옛날의 노(魯)나라 지방에 있는 산 이름. 중국 5대 명산의 하나로 동악(東岳)이라고도 불리운다. 공자는 태산을 좋아하여 자주 소풍놀이(...)를 했다. 《논어(論語)》에도 태산에 대한 언급이 몇 번 보인다. 하여튼 무지막지하게 큰 산.[43] 발해만의 발해(渤海)를 말한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남북국시대의 그 발해가 아니라 요동반도산동반도 사이의 바다. 랴오둥과 산둥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하여튼 꽤 큰 바다.[44] 후한대(後漢代)의 주석가 조기(趙岐)는, 이 문장은 '어른을 안마해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였다. '꺾는다'라고 함은 관절부를 아주 시원스레 주물러서 똑! 소리가 나는 현상을 비유한 말이라는 것. 맹자의 고향인 추(鄒)나라 및 그 근방의 관용 표현인 듯 싶다.[45] 주희는 같은 문장을 직역하여 '나뭇가지 등을 꺾는 것'으로 해석했다. 문맥상 아주 쉬운 일을 관용적으로 이른 것이라 판단한 모양인데, 아무래도 좀 뜬금없다 보니 현대에는 조기의 해석이 주류이긴 하다.[46] 그러나 위에서 눈치를 줬듯이 이러한 '필연'은 인간의 성(性)에 따라 그런 경향이 보편적으로 도출된다는 뜻이지, 그것이 앞길에 뭐가 있든 박치기하고 나가는 완전무결 금강불괴라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 인간은 하늘이 설계한 일종의 기계인데, 이 기계란 것이 설계상 어떤 원리로, 어떤 경향으로 작동하게 의도는 됐으나, 얼마든지 결함이 생길 수 있고 고장이 날 수 있다는 것이다.[47] 참고로 후한의 왕충(王充)은 그의 시시콜콜 미주알 고주알 따지는 비평서 <<논형(論衡)>>에서 맹자가 족쇄, 수갑을 운운한 대목을 두고 "아니 그러면 공자의 제자 자로나 은나라 주왕의 삼촌인 비간은 의롭게 행동하다 형벌을 받고 죽었는데 바르게 못 죽은 거네? 맹자의 말이 왜 이러냐!" 하면서 딴죽을 건 바 있다. 물론 이건 '족쇄'와 '수갑'이 '형벌'을 뜻하는 비유 표현임은 알아 들었으나 그 '형벌'이 앞서 언급된 '도에 진력함'과 대비되는 '도에 역행하다 응분의 죗값을 받음'을 뜻하는 또다른 비유임은 눈치 못 챈 왕충의 쉐도우 복싱일 뿐이다(...). 참고로 이건 <<논형(論衡)>>의 <자맹(刺孟 : 맹자를 찌른다(...))> 편에 있는데, 이것 말고도 맹자에 대한 왕충의 수많은 쉐도우 복싱을 볼 수 있다(...). 물론 개중에는 건전한 비판도 있는데 하도 왕충이 전방위로 질 떨어지는 쉐도우 복싱을 많이 해 놔서(맹자 외에도 공자, 한비자 등을 위시하여 전 학파에 대한 전방위적 비판을 했다) 읽다 보면 오히려 왕충의 비판 대상이 더 심정적으로 옹호가 되는 역효과가 발생한다(...)[48] 요(堯)의 뒤를 이은 전설상의 성왕(聖王). 요의 두 딸을 아내로 맞아 들인 뒤 자매덮ㅂ... 제위에 올라 정부 조직을 9개 부서로 세분화, 체계화하고, 전국을 12방의 구획으로 나누어 행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여러 법제를 정비하였다. 치수 사업을 성사시킨 우(禹)를 차기 대권 주자(...)로 양성하였고, 남방의 순수 중 사망하였다. 자신을 해치려까지 한 완악한 아버지를 쉰 넘도록 지극히 사모하여 끝내 그 마음을 돌리게 한 대효(大孝)의 고사로 유명하다.[49] 물론 어떤 큰 보편 범주(카테고리)상 같다는 것이지 완전 일치한다는 것은 아니다. 너나 나나 섭취 행위(혹은 음식 혹은 맛 혹은 포만감)와 교접 행위(혹은 번식 혹은 오르가즘 혹은 애정)를 추구한다는 것이지 인간이나 개나 다같이 개똥을 먹고 술을 먹고 개랑도 하고 사람이랑도 하고 그런다는 게 아니라는 것.[50] 맹자가 말한 이 '인의예지'가 말 그대로 완성형으로서의 '사덕'인지, 아니면 맹아(萌芽)형으로서의 '사단'인지는 고금의 주요한 논쟁거리. 전자가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자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정설로 여겨졌으나, 후대의 유자(儒者)들, 즉 이토 진사이, 정약용 등은 맹자가 후천적 노력을 강조한 부분, 예컨대 맹자 고자장구 상편 19장의 "오곡은 곡식 중에서 종자가 뛰어난 것들이지만, 만약 여물지 않는다면 비름이나 피보다도 못한 것이다. 하여 인仁 또한 그것이 여묾에 달려 있다."과 같은 부분에 주목하여 후자를 지지하였다. 오늘날 맹자를 존숭하는 학자들은 보통 후자를 지지하는 편인데, 예컨대 국립대만대학의 푸페이룽(傅佩榮, 1950년 ~) 교수는 후자를 강력히 지지하여 아예 '맹자의 성선설은 사실 선성(善性)을 주장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능히 가이위선(可以爲善)할 수 있다는 선언으로서의 향선설(向善說(사람의 성은 선을 좇는 경향이 있다는 설. 사실상 정약용의 성기호설(性嗜好說)과 통한다.))이다' 주장한다.[51] 기우(杞憂)겠지만, 이건 본 작성자가 편한 예시를 들기 위해 임의로 꾸며낸 문장이니 이를 《맹자》 원문에서 찾는 안습한 일은 하지 말 것![52] 아프리카 물소의 무리를 생각해 보자. 이들도 무리를 짓는다. 그러나 이들의 무리는 가장 약하거나 불행한 개체가 낙오되어 포식자에게 물어 뜯기는 동안 대개 집단 방관 내지는 집단 도주를 택한다. 이것이 이들 무리가 말 그대로 '무리'에 그치는 이유이며, '사회'로 이름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사람의 무리'인 '사회'는 백 번 양보할지라도 이와 똑같지는 않지 않은가. '선'이라는 삶의 방식을 '부여받은(진화학적 관점으로 이 「천명(天命)으로서의 선」을 부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맹의 '천(天)'은 의지적 존재인 동시에 이법적(理法的) 존재, 또한 자연 그 자체를 의미하는 존재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인간군은 고도로 발달된 공감 능력ㅡ인의로 연결되는, 측은의 마음과 수오의 마음을 지니고 있기에 능히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53] 이러한 논지는 흥미롭게도 훗날, 맹자를 가장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비판한 순자에 의해 가장 공고하게 정당화된다.[54] 동정심의 확장태인 '인(仁)', 도덕적 수치심과 도덕적 증오심의 확장태인 '의(義)'는 모두 '공감 능력'이라는 기반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55] 원래 동아시아에는 서양처럼 실체로서 악(Evil)이나 악마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惡)의 반대는 노자대학에 나오듯 미(美). 사실 善도 惡의 반대로 쓰이긴 했는데, 善은 착하다는 의미보다 좋다는 의미가 훨씬 강했다. 일단 다다익이란 말의 뉘앙스를 보자. 한자 (魔)라는 글자도 불교마라(mara, 악마)를 음역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낸 글자다.[56] 사실 '조악(粗惡)하다'의 뜻으로 해석하면 그만이므로, 성악설이라는 명칭이 자체부터 틀린 말은 아니다. 괜히 잘난 척 한다고 주변에 "이봐, 순자는 '성악'을 말하지 않았어. 그의 주장은 정확히는 '성오설'이라규!" 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학계에서 도올 외에는 그냥 다 성악이라 지칭하는 편이다. 그리고 도올도 선진(先秦) 문헌에 있는 '(惡)'자를 죄다 '오'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다만 '오'든, ''악'이든 선진 문헌의 '(惡)'자에 '(善)'과 이원적으로 대립하는 구도의 강력한 윤리형이상학성이 없는 건 맞다.[57] 《순자》를 보면 "맹자는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그 성(性)이 선(善)하기 때문이다' 했으나, 나는 '그렇지가 않다' 하겠다!"라는 문장이 나온다.[58] 인위(人爲). '거짓'의 의미가 아니다.[59] 옛날에는 사실상 가정교육이며 독학이며 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위대한 스승을 찾아 그를 모시고 가르침을 받는 것이 결국 '교육 받음'이며 '학문함'이었다. 여기서 이제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를 키운다!" 순자의 눈에는 이만큼 휘황찬란한 위(僞)의 작용은 없었을 것이다. 무려 제곱의 위(僞)![60] 순자가 보는 성(性)의 범주는 맹자와 달랐다. 맹자는 오늘날 관점으로 본다면 '습성', '품성'으로 분류될 만한 몇몇 특질 또한 '하늘의 의지로 그렇게 설계된 것'으로 간주하여 뭉뚱그려 성(性)으로 명명하였는데, 순자는 이에 반대하여 엄격한 구분을 요청하였다. 본연적인 성(性)은 본연적인 성이고, 인위(人爲)는 인위(人爲)인 것이다.[61] 인의왕도론(仁義王道論)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맹자는 의(義)를 인(仁)과 짝지어 그에 준하는 주덕(主德)으로 격상하고 줄기차게 인의(仁義)라 병칭하였는데, 사실 맹자만 특별히 그런 게 아니고 순자 또한 《순자》에서 이를 즐겨 사용했다. 그러나 순자의 인의(仁義)는 일체의 선험성이 없는, 사회적 차원에서 실현되는 위(僞)의 덕(德)이다.[62] 때문에 순자는 이 "성왕의 기호"를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순자와 그 제자들은 유학 분파 중에서도 경전 정리와 예악(禮樂) 사상 정립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분파였는데, 이 모두가 사람들의 기호, 즉 감정의 호오好惡 경향성을 옛날 성왕, 성현(聖賢)들의 그것과 합치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경전을 개중 몇몇의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시경(詩經)은 예로부터 전승된 300편의 노래, 특히 연가(戀歌)를 기록한 서적, (시경의 기록된 시들은 원래 시가 아니었다. 모두 옛날의 노래 가사였는데, 그 곡조를 기억하는 인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가사만 남아 시가 된 것이다.) 서경(書經)은 옛 성왕들의 준엄한 언행을 기록한 서적, 악기(樂記(예기(禮記)의 포함되어 전승됨))는 음악의 심오한 의미와 찬연한 기능을 설명한 서적이었으니 이 모두 사람들의 감정을 분발시키고 단련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악 사상은 성왕의 엄정한 예의, 절제된 음악이 조화되어 정치의 요체가 되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사람들의 감정을 교화하는 것이었다.[63] 이것은 묵가가 '의義는 이利이다.'는 명제로 제시한 바와 맥을 같이하는 공리주의적인 도덕 정당화 작업이며, 일찍이 맹자가 물리치려 했던 입장이다.[64] 순자의 대편불편론(大便不便論)은 그의 제자이자 훗날 통일 진(秦)의 승상인 이사(李斯)가 "진나라가 작금의 패업을 달성한 것은 인(仁)과 의(義) 때문이 아니라 유려한 편의주의 때문이 아닙니까, 스승님"라고 묻자 이를 제발 나대지 좀 말라면서 반박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인데, 당대 권력자들 또한 이사와 비슷한 논변으로 유학자들을 다그쳤으므로 순자는 이 '대편불편론'을 자연 줄기차게 써먹게 되었다. 하여튼 그 반박 내용의 말미를 인용하면: "... (湯)이 (桀)을 몰아낸 일은 명조(鳴條)의 들판으로 그를 쫓아낸 때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무왕(武王)이 주왕(紂王)를 쳐낸 일은 갑자일(甲子日) 새벽에 승기를 거둔 까닭에 있는 것이 아니네. 모두가 이전부터 힘써 갈고닦은 바에 기인한 것이니, 이를 일러 인의(仁義)의 병술이라 하는 것이야. 지금 자네는 근본에서 구하지 않고 말단이나 헤집고 있으니, 이야말로 세상이 혼란한 연유일세!"[65] 아이러니하게도, 전근대의 동아시아인들은 이런 방면에서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성을 중시했다. 물론 여기에는 성리학은 공허한 설정놀음 아니였냐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성리학에 반대하여 실사구시를 강조하는 실학이 나왔다는 점에서부터, 동아시아인들은 이미 극단적으로 현실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서양의 자연과학은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다.[66] 그러나 이러한 '실용성'은 현대에 일반적으로 말하는 실용성과는 전혀 다른 것임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현대에 철학의 실용성이라는 것은 실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지, 철학자가 도덕을 주장하는데 편리하다는 측면이 아니다. 물론 "도덕주의적인 실용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철학자가 도덕을 주장하기에 편리한 사상으로 도덕이 쉬이 정당화되고, 이 정당화된 도덕의 지배력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 치면 양자의 '실용성'은 특별히 구분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67] 오히려 순자는 지적 유희를 무척이나 경계하였다: "공손룡(公孫龍)의 견백설(堅白說), 혜시(惠施)의 동이설(同異說), 유후무후설(有厚無厚說) 따위의 연구도 하나의 연구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군자가 논변거리 삼지 않는 까닭은 그쳐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기이하고 고답적인 행동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군자가 행하지 않는 까닭은 그쳐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순자》〈수신(修身)〉)[68] 정자(程子(정명도(程明道)인지 정이천(程伊川)인지는 불명확. 추가 바람.))가 이르기를 "맹자 이래로 커다란 견식을 구한 사람은 당대(唐代)의 한유(韓愈) 외에 없었다" 하였는데, 이 한유는 "맹자는 순수하고도 순수한 사람이나, 순자와 양웅은 크게는 순수하되 작게는 하자가 있다" 하였다.[69] 이러한 순자관(荀子觀)은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의 마키아벨리관, 니체관과 유비될 수 있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적 정치론의 현실정치적 실효성, 니체의 진리론의 타당성을 인정하지만 그들의 가르침의 '순진함'은 현실세계에 거대한 파국을 가져왔다고 평한다. 스트라우스에게 있어 마키아벨리와 같은 '현실주의자'는 '하수'이다. 스트라우스의 관점에서는, 플라톤 등의 고대 이상주의자들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주의자들이었다. 사려 깊은 현실주의자는 '밀교적 가르침'을 구사하여 후대의 또다른 사려 깊은 엘리트 사상가만이 알 수 있고, 동시에 마땅히 그러한 엘리트 사상가만이 알아야 하는 은밀한 지식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트라우스의 해석에 따르면, 플라톤은 <<국가-정체(Politeia)>>를 서술할 때 소크라테스가 그의 적수들을 차례차례 산파술로 박살내는 연출 형식을 취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부각시켰지만, 사실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여러 적수들의 사상을 소개하기 위한 장치였다.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편익"이라고 주장하다가 그 논증 과정의 허술함을 파고드는 소크라테스에게 최종적으로 관광당하고 퇴갤함으로써 소크라테스적 정의관의 타당성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 담론에서 소크라테스는 말빨 뿐인 궤변을 구사한 것이고, 진정 중요한 생각거리는 트라시마코스가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묘사한 트라시마코스는 주제적으로는 매우 중요하고 '진리적인' 관점을 제시하지만 그 논증은 빈약하고 허술하며, 그렇기에 소크라테스의 말빨에 휘둘리다 퇴갤한다. 때문에 사려 깊지 않은 독자는 오직 '승자' 소크라테스에게만 주목하고 그 이상론을 믿게 되지만, 사려 깊은 독자는 소크라테스의 껍질을 뚫고 플라톤의 의도를 간파하여 트라시마코스에 주목한다. 이런 식으로 덕의 본질, 종교의 본질, 법의 본질 등을 파악해 나가는 것이며, 니체가 말하듯 "진리는 없다는 것이 진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현실주의적이고 명민한 사상가는 오직 마음 속으로만 묵묵히 그리 생각하고 그 이후 소크라테스적 입장으로 회귀하여 "진리는 있다"라고, 전면에서 주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마키아벨리적-니체적 '솔직함'이 대중에 알려지고 보편화된다면 고대적인 덕 윤리의 사회, 중세적인 종교 윤리의 사회, 근현대적인 (민주적) 법 윤리의 사회는 모두 붕괴할 것이고, 이 삼자보다 명백히 야만적이며 혼란한 사회가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원시적 무규범 사회보다 더욱 야만적이고 혼란한, '문명적인 야만'의 사회가 되는 것이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그 실례로 제국주의(정확히는 "나쁜" 제국주의), 파시즘, 나치즘, 공산주의, 제노사이드, 군국주의, 세계대전의 시대인 20세기의 사회들을 꼽는다. 스트라우스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회들의 도래에는 마키아벨리, 니체와 같은 지나치게 솔직한 사상가들의 근원적 책임이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세상에 내던짐으로써 고대적인 덕 윤리의 사회와 중세적인 종교 윤리의 사회를 해체해 버렸고, 니체는 근대의 윤리담론을 폭발적으로 뒤집어 엎어 놓고는 그 혼란에 대한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70] 사실 스트라우스의 이러한 견해는, 1. 그 자체가 전혀 '밀교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모순적으로 보이며, 2. 결국에는 마키아벨리적 정치관의 인정이라는 점에서 음험하다. 그렇기에 그는 두 가지의 의미로 '마키아벨리를 비판한다고는 하지만 그 자신이 마키아벨리적'이라는 강력한 비판을 받곤 한다. 일단 1에 대해서만 조금 변호를 하자면 이렇다: 비록 모순적이다 할지라도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라던가, 논리를 불신하고 서책을 불신한다면서도 그러한 '논리'로써 '서책'을 쓴 '노자', '장자'의 경우, 그리고 이 문단의 뜨거운 감자인 '순자'의 경우도 보여주듯이(순자는 일찍이 종교의 허위성을 간파했지만 그 유용성 또한 간파했기에 레오 스트라우스와 비슷한 논지로 종교를 용인한 바 있다.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면 북 치는 의식으로 이를 물리치려 하고, 하늘이 가뭄을 내리면 기우제를 지내고 점을 친 후에 큰 일을 결정한다. 이로써 구하는 바를 얻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하다고 꾸미기{文} 위함이다. 군자는 이를 꾸밈{文}으로 여기고, 백성은 이를 신묘함{神}으로 여긴다."<<순자>><천론(天論)> 참조) 사상가가 자기 사상의 내용을 명확하게 전달하려면 결국 '첫 단추'로는 직접적인 말, 직접적인 글을 통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런 류의 비판은 각 사상가마다 어느 정도 예견한 바일 것이고, 감수한 바일 것이다. ㅡ하여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스트라우스의 모순이 아니라 그 모순으로 명확히 드러난 그의 '진리'이다.[71] 하여튼 동양에서는 주자 이후 사서삼경으로 보급된 《맹자》에서 "삶은 내가 바라는 바이고, 의(義) 또한 내가 바라는 바지만, 두 가지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리라" 선언한 맹자의 세뇌(...)를 받은 신유학자들은(어쩌면 맹자도 '스트라우스의 플라톤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맹자의 관심은 천하의 주의(主義) 변혁에 있었으므로. 양혜왕장구의 첫 장에서부터 보이는 위나라 혜왕과의 대담에서 '이익주의(利益主義)'가 아닌 '인의주의(仁義主義)'를 '말하라고' 하며 그러한 주청의 까닭으로 '왕의 노골적인 이익주의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될 경우 국가의 붕괴는 필연적이다'는 점, '인의주의자 가운데 가족과 국가를 방기한 예는 없다'는 점을 들어 진행한 '이익주의의 위험성 제시', '인의의 정치·사회적 유용성 제시', '이익주의를 '말함'에 대한 인의주의를 '말함'의 정치술적 우월성 제시' 작업, 마찬가지로 양혜왕장구에서 보이는 제나라 선왕과 소와 양의 일화에서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설파를 통한 '패권군주 교화' 작업, ' 만장장구에서 두드러지는 '전래설화의 주관적 정립을 통한 역사 도덕화' 작업 등은 이미 논해진 '성선설'과 더불어 '스트라우스적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성리학에 대한 신앙적인 고집에서 그랬든, 스트라우스 류의 통찰의 결과로 그랬든, 순자 사상의 완전한 수용은 극히 꺼렸다. 공자나 맹자나 주자를 온전히 수용한 사례는 수도 없이 보이지만(야마자키 안사이(山崎 闇齋) : 주자를 배워 잘못된다면 주자와 더불어 잘못되는 것인데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일례로, 실사구시, 경세치용의 유학자로 유명한 다산 정약용오규 소라이의 영향을 크게 받아ㅡ오규 소라이는 '정치의 발견자',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불리는, 맹자의 근본정신을 계승하고 그를 존숭했지만 세부이론적으로는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깠던(...) 근세 일본(에도 시대)의 현실주의적 유학자이다. 그는 순자도 많이 까긴 했지만(...) 맹학과 순학의 요지를 비판적 수용하고 종합하는 와중에서, 주자학이 곡해하고 도외시했던 순자 사상의 영향을 대차게 받았다.ㅡ순자의 이론을 대거 수용하는, 당대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맹자를 버리지는 못한 채 소위 '성기호설性嗜好說'을 주장했다. 뭐 사실 주자를 까도 사문난적 취급이었는데 맹자를 까면 어떤 참사가 일어났겠느냐마는...[72] 근데 실상을 따져 본다면, 까방권은 맹자보다 주자가 더 공고했다. 맙소사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주자를 존숭한 이유는 "주자께서 출현하신 이후 비로소 도학(道學)이 부활하고 완성되었다" 여겼기 때문인데, 이는 주자가 "맹자는 오직 성(性)을 논하고 기(氣)는 논하지 않았으므로 완전히 갖추어지지는 않았다. 성을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으면 이 성은 다 설명할 수 없고, 기를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성의 본령처를 꿰뚫어 볼 수 없다. 순자, 양자(揚子) 등이 성을 논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실은 기를 논한 것에 불과하다. 순자는 오직 불량한 사람의 성을 보고서 악이라 하였고, 양자는 반선반악의 사람을 보고서 선악이 혼재한다 하였다. 한자(韓子)는 천하의 많은 사람을 보았으므로 삼품설(三品說)ㅡ사람의 성(性)이 그 우수함과 용렬함을 기준으로 하여 크게 상, 중, 하의 세 가지 등급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설. 이는 공자의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는 바뀌지 않는다."는 언급에서 착안한 것이다.ㅡ을 주장하였다. 세 사람 중 한자의 설이 근사(近似)하다. 그는 인의예지를 성이라 하였고 희로애락을 정(情)이라 하였는데, 다만 그 논리의 이음새에 기(氣) 자(字)가 적다." 라는 실로 패기넘치는 논평으로 시작하여 성리학의 정수인 이기론(理氣論)을 확립하였기 때문이었다. 주자가 제시한 이기론에 근거하여 세계관을 구축하고 '이것이야말로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최종의 진리이다' 생각한 조선의 주류 성리학자들은 때문에 맹자의 말과 주자의 말이 상치되는 상황에 직면한다면 다만 이같이 생각할 뿐이었다: "주자님 말씀이 더 정확하겠지 뭐..." [73] 곧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의 관계성.[74] 흥미로운 점은, 가톨릭 역시도 심성론에 한정한다면 맹자와 비슷하게 설명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쪽의 경우도, 악의 문제와 같은 수많은 반론과 투쟁하여야 하였으나, 선을 악과 이원론적으로 이해하는 결론만큼은 절대로 내릴 수가 없었다. 그것이 전지전능하고 선한 유일신에 대한 신앙에 위배되는 까닭도 있었지만, 이원론적인 이해를 하게 될 경우 선과 악을 마치 경쟁하는 라이벌 관계처럼 이해할 여지가 있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선이 악보다 우월하고 따라야 할 가치인 이유를 설명해주세요"라는 물음에 답하기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맹자이든 가톨릭 교회이든간에, "옳음은 그것이 옳다는 이유 만으로 지켜야 한다"는 결론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가톨릭은 여기에 신학적인 여러 추가 설명이 붙고, 유학의 경우는 성리학적인 추가 설명이 붙을 수 있겠지만.[75] 순자 출현 이후의 유학, 특히 성리학의 역사는 "맹학(孟學)의 끊임없는 정당화"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순학(荀學)의 왜곡은 필연이었으며, 심지어 맹학의 왜곡 또한 필연이었다. 극도의 정신주의로 치달은 송명(宋明) 유학의 흐름은 현실에 부딪힌 유학의 한계를 애써 못 본 척하고, 어떻게든 그 옛날에 "있었다던" 대동세계(大同世界)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순진한 유학자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이었다 하겠다.[76] 여기서 法은 '본받다'라는 동사적 뜻이다(명사적으로 쓰이면 '본받을 것' 즉 '법'). 즉 '선대의 왕자들을 본받자'는 논설.[77] 易姓革命論은 사실 엄밀히 말해 그냥 혁명론(革命論)ㅡ천명(天命)의 변혁(變革)에 관한 논설(論說)ㅡ이다. 역성(易姓)ㅡ군가(君家)의 성(姓)을 갈아치움ㅡ따윈 아무래도 좋은 것이지만, "혁명"이 "역성"까지도 용인한다는 부분에서 시사점이 크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역성혁명론"이라 불린다.[78] 社ㅡ토지의 신, 稷ㅡ곡식의 신. 이들은 옛날 농본주의 국가에서 섬기던 주요한 신들이며, 예로부터 이들을 섬기기 위한 제단인 사직단(社稷壇)은 종묘(宗廟)와 함께 한 국가의 필수적 건축물로 여겨져 국가의 혼과 동일시 되었으며, 자연 그 관리 현황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점치는 척도가 되었다. 때문에 '사직', '종묘사직' 등의 말은 오늘날까지도 종종 국가 그 자체를 지칭하는 상징어로 쓰인다.[79] 도적 적, 역적 적, 사악할 적, 포학할 적, 학대할 적, 해칠 적, 죽일 적, 그르칠 적.[80] 잔혹할 잔, 흉악할 잔, 해칠 잔, 죽일 잔, 재앙 잔.[81]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 14회 말미에 주인공 정도전이 마음속으로 이 부분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82] 맹자가 이 장(章)에서 세 가지 질문을 통해 강조한 요지가 바로 '불치(不治)의 책임'임을 고려할 때, 이는 엇나간 해석이다. 맹자는 굳이 '왕의 신하 가운데' 라고 못을 박았다. 이는 질문 안의 주인공이 '치治를 업으로 삼는 공무원'임을 밝혀 둔 것이다. 첫번째 질문에서의 주인공은 '돼먹지 못한 친구한테 처자식을 맡기고(=실질적 방임) 초나라로 관광 떠난 공무원(왕의 신하)'이고, 두번째 질문에서의 주인공은 '부하를 다스리지 못하는 고위 공무원(사사士師)'이며, 세번째 질문에서의 주인공은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는 최고 공무원()'이다. 따라서 논리의 통일성을 고려한다면 이 대목에서 왕이 답한 말인 '棄之.' 는 '그 친구와 절교해야겠다'가 아니라 '그 못난 신하를 내치겠다' 내지는 '그 못난 신하를 멀리하겠다'로 해석함이 옳다.ㅡ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왕까지 올라가 적용되는 일종의 사회계약적 '위임성'과 위임의 '박탈 가능성'을 중점으로 생각한다면 그다지 논리의 통일성이 결여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83] 고대 중국에서 법령과 형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재판관(裁判官).[84] 이 경우에는 하위 사법관(司法官).[85] 맹자는 "왕을 잘라야겠지요."라는 대답을 왕에게 강요한 셈이다. 제선왕이 쫄아서 대답을 회피한 것(...).[86] 사실 제선왕 입장에서는 맹자의 혁명 이론은 불쾌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선왕이 속한 제나라의 전씨 왕조는 이미 여씨 왕조를 몰아내고 역성혁명을 벌인 '찬탈자'이기 때문이다. 제선왕 입장에서는 자신의 조상들이 벌인 찬탈을 긍정하는 이론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근데 이와는 별개로 나중에 맹자가 아예 직접적으로 "왕이 못나면 혈족의 경卿들이 갈아치울 수 있지요." 하자 제선왕은 얼굴이 씨벌개져서 씩씩댔다(...)고 한다. 과거의 혁명을 합리화하는 것은 자기 권력을 강화시켜주지만 그것을 현재에 적용하면 자기 권력을 붕괴시킬 수 있기 때문. 이런 것은 현재에도 볼 수 있다.[87]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 서구적 의미의 얼치기로 익힌 사람들이 민본과 민주를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88] 김대중대통령은 이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아시아도 민주주의를 실현시킬수 있다고 주장하였다.[89] 사실 "탕이 걸을 몰아내고 무왕이 주를 쳐낸 것"은 "지배계급"의 판단(즉 현재의 지존 지배자가 큰 도덕적 하자가 있다는, 중층 지배자의 판단)에 의한 축출이지, 백성이 주체가 되어 직접적 물리력을 행사하거나, 정식으로 탄핵을 소원하여 이루어진 축출은 아니다. 다만 그 판단함에 민심을 고려한 정황이 있는 것 뿐이다. 예로, 주 무왕의 혁명 과정은 아주 간략히 보면 이렇다: 맹자에 따르면, 은나라 주 임금의 폭정 때 백성들 사이에는 '이 해는 언제 꺼지려나? 내 차라리 너와 함께 죽고 말련다' 하는 노래가 유행했는데, 이것은 평소에 주 임금이 자기를 해(태양)에 비유했기 때문이었다. 주나라 무왕은 그것을 살폈다. 또 제후들의 회합을 주도해 주 임금을 칠 것에 호응하는 제후가 몇이나 되는가 살펴 그 수가 천하 제후의 3분의 2임을 확인했다. 그리하여 주나라 무왕은 그들의 뜻에 힘입어 은나라 주 임금을 쳤다.[90] 객경이 이런 상황에 처하는 사례는 오기, 상앙부터 이사에 이르기까지 차고 넘친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맹자는 심지어 '실권 없는 객경'이다. 오기 등은 거의 전권에 가까운 실권을 휘두르고도 후원해주는 왕이 죽자 끈 떨어지고 목숨까지 떨어졌음을 생각해 보자.[91] 예컨대 맹자가 노나라에 기용될 때 '맹자는 옛날에 죽은 아빠 장례보다 최근 죽은 엄마 장례를 더 성대하게 치렀으니 애비애미 서열도 모르는 놈입니다. 중임하지 마십쇼'라는 명분으로 탄핵하는 관리가 있었다. 맹자의 제자가 '아니 그럼 옛날보다 최근에 살림살이 더 나아졌으니 성대하게 치를 수도 있지 무슨 시답잖은 소릴 하나'하면서 맹자를 변호했지만, 이 명분으로 결국 맹자는 노나라에서 짤렸다. 이때 맹자의 반응은 대충 이렇다: '에휴 그딴 거로 짤릴 거면 원래 짤릴 팔자였나 보지...' (...)[92] 제나라의 한 지방이다. 노나라와의 접경지대로,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 윈치 현(汶上県) 어딘가이다. 산시 성(山西省)의 평륙과는 다르다.[93] 창병기의 하나인 극(戟)을 지닌 병사. 전국시대의 일반적인 보병이다.[94] 이 대부의 이름이 공거심(孔距心)이다.[95] 공거심이 제나라 평륙의 대부이므로 이 왕은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이다.[96] 도(都). 원칙적으로는 그 고을에 종묘와 신주가 있다면 도(都)라 하고, 그렇지 않다면 다만 읍(邑)이라 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이 둘은 통용되어 왔다.[97] 맹자의 경우 실권이 없었기는 해도 엄연히 경(卿)이었므로 신하를 자칭한 것이다.[98] 맹자가 공거심 뿐만 아니라 다른 대부들에게도 비슷한 맥락의 추궁을 하고 다녔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99] 물론 조문 사절로 보낸다거나 하는 별 정치력 없는 업무는 시킨다. 그렇지만 그것마저도, 본인 명색이 정사(正使)인데 실권은 옆에 있는 부사(副使)가 다 가져가고 그랬다..[100] 제나라가 연(燕)나라 공략을 성공할 당시, 맹자는 연나라 백성들을 해치지 말 것, 연나라의 종묘사직을 훼손하지 말 것, 연나라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새 군주를 세워 줄 것, 연나라를 식민지화 하지 말 것을 요청했는데, 제나라 선왕은 이 말을 들어 처먹지 아니하고서 연나라의 노약자를 해치고, 연나라의 기물을 때려 부수고, 연나라의 군주로 허수아비를 앉히려 중상모략을 일삼고, 연나라를 무리하게 식민지화 하려다 이 무슨 청개구리냐 주변국의 협공을 받고 거하게 일을 말아먹었다. 이 때문에 맹자와 선왕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사실 맹자는 애초부터 "연(燕)나라를 취하여 그 백성들이 도리어 기뻐한다면, 곧 취하십시오. ... 연나라를 취하여 그 백성들이 도리어 기뻐하지 않는다면, 곧 취하지 마십시오."라고 하기도 했다.[101] 다만 다분히 악의적인 해석을 순화시킨다면, 이 의견은 맹자를 개중에서는 나름 근사하게 분석한 것이다. 맹자는 "군주에게는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신하가 있어야 한다," "지위, 나이, 덕망이 세상에서 존귀한 것인데, 하나를 가졌다 해서 둘을 누를 수는 없다," "지식인은 군주를 의도적으로 가벼히 여기고 간언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세상에 왕이 나를 쓰지 않고서 어찌하겠는가?" 하며 이윤(伊尹)이나 주공(周公), 태공망(太公望)이 그러했듯, 영향력 있는 왕사(王師)의 대접을 받길 원했다.[102] 이는 중국과 비교하면서 생긴 오류인데 중국은 실질 권한이 강한 상태에서 아예 도전하기 힘든 시스템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도 명나라에서 완성하게 되며 명나라 실질적으로 봉건제인 원나라를 제외하고 송나라까지 조선과 비슷했다.[103] <<맹자>> <양혜왕 하> 12장을 보면 백성의 비협조를 옹호하는 구절이 있다.[104] 그런데 이 문서는 조선 이후의 변질을 논하는 경향이 강하고 조선 당대의 유학은 옹호하는 느낌이 있다. 본원 유교와 조선 당대의 유학의 간극을 파악하려면, 일단 선진시대 고전 및 선진시대 고전 연구서(고증이 잘 된)에서 말하는 본원 유교와 <<조선왕조실록>> 등에 드러난 조선 유학의 양상을 비교연구하고, 조선시대 당대의 소설이나 기타 민간 기록 등도 참고하며, 또 비단 사상/정치/역사 분야의 연구서 만이 아니라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등의 문화/경제적 측면에서 본 책도 폭넓게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105] 맹자가 조선에서 100% 이해되고 실현됐다면, 100%는 아니더라도 총론격 내용이라도 건전하게 간직됐다면 변질된 유교적 전통[104] 상당수가 없었을 것이며, 오늘날 맹자에 대한 맹목적 증오 어린 몇몇 인식 조류(ex. "유교탈레반 총대장 공자 다음 가는 No.2 씹선비 새끼")도 아마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106] 상나라 탕왕의 공신으로, 탕왕 사후 태자가 폭군의 기미를 보이자 그를 유폐하고 일정 기간 섭정을 하다가 태자가 반성하자 왕위를 돌려줬다는 전설적인 재상[107] 역적 적, 도적 적, 해칠 적, 잔인할 적... 맹자가 폭군 주를 형용한 말, ' 잔적한 그 놈'의 그 '적'이다![108] 물론 결과적으로 공양왕이 만만이는 아니었기에 선양도 아니요 아주 대놓고 찬탈도 아닌 '좀 모양 빠지는 그 무엇'의 형태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지만.[109] 제나라 선왕은 실제로 이렇게 진행하는 와중에 자기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최후에 맹자 말을 안 듣고 제나라 입맛에 맞는 허수아비를 연나라 군주로 세우려다가 주변국 협공 받고 일 말아먹는다. 그래서 맹자가 삐진다(...). 제선왕이 헛짓거리를 해서 일 말아먹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됐는데, 제선왕에게 연나라 쳐도 된다고 한 게 맹자이므로 괜히 맹자도 욕을 들어먹게 되었다. 이때 맹자가 한 말이 걸작인데 이런 식이다 : '아 내가 언제 콕 찝어서 선왕 저놈한테 쳐들어가라 했나? 난 쳐들어가라고만 했지 선왕 저놈한테 쳐들어가라곤 안 했는데? 나한테 '그럼 누가 쳐들어가면 되는 부분임?'하고 물었으면 '니 말고 덕 있는 놈이 쳐들어가야 한다'고 답했을걸?'(...) [110] 원칙적으로 현 군주의 자의적 지명권 따위는 없다. 맹자는 이런 말도 했다 : "... 하늘이 천하를 주고, 백성이 천하를 주므로, 천자가 감히 사사로히 천하를 줄 수 없다 하였다."[111] 게다가 혹시 별 일 있어도 '아따 오늘은 날이 아닌갑소'(...)하면서 슬쩍 넘어가고 다음날 다시 해서 별 일 없으면 그대로 통과(...)로 치는 것도 가능했다.[112] 이숭인은 곤장을 맞도록 했는데 일부러 엉덩이가 아닌 허리를 계속 쳐서 내상을 유도해서 죽였고, 이색은 섬에 유배 보내면서 바다에 이르면 바다에 처넣어 죽이자고 했다. 그나마 이색 건은 이성계가 거부해서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색의 아들 이종학은 결국 정도전에 의해 암살됐으며, 이성계도 왕씨들을 몰살하는 데는 찬동한 것으로 의심되기도 한다. 왕씨 몰살 문서 참고. 이 역시 맹자의 뜻에 반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맹자는 망한 왕조의 자손을 살려 작은 나라에라도 봉해주어 옛 성왕의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해주는 것을 미덕으로 보았다.[113] 종횡가(縱橫家)를 따르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수록된 《경자(景子)》 13편이 이 사람의 저서로 추정되고 있다.[114] 종횡가(縱橫家)로서, 합종책(合縱策)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축이었다. 뒤에 보이는 장의(張儀)의 적수로는 주로 소진(蘇秦)이 거론되지만, 현대의 사료 연구 성과에 따르면 소진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시기는 장의의 사후였다고 한다.[115] 종횡가(縱橫家)로서, 연횡책(連橫策)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축이었다.[116] 20세가 되어 갓을 매는 성인식.[117] 첩부를 첩실(妾室)로 해석할 수 있으나, 그냥 말 그대로 '첩과 부인의 도리'로 이해하는 게 좋다. 혹은, '첩'이란 말은 '부인'이 스스로를 낮추어 이르는 말로도 쓰임을 감안할 때, 이를 맹자가 의도적으로 인용했다 본다면, '아녀자'의 뜻으로 쓰인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118] 곧 맹자는, 저 공손연과 장의 등이 위세는 그럴듯해 보이나 실상은 전국시대 패자(覇者)들에게 아녀자마냥 아양을 떨고 비위를 맞춰서 연명하는 졸장부(拙丈夫)의 무리일 뿐인 것으로 단언한 것이다.[119] 인(仁)[120] 예(禮)[121] 의(義)[122] 大丈夫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흔히들 말하는 상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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