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라이벌

덤프버전 :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



1. 개요
2.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일본
2.1. 영원한 전통적인 숙명의 라이벌
2.2. 일본프로축구 출범(1993년) 이전
2.3. 일본프로축구 출범(1993년) 이후
2.4. 일본의 추격: 2000년대(2000~2009년)
2.5. 대등한 라이벌: 2010년대(2010~2019년)
2.6. 2020년대 현재
2.7. 한·일 팬들의 관점
2.8. 해외의 시각
2.9. 역대 한·일 전적
3. [[이란|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틀:국기|
]][[틀:국기|
]]
이란
3.1. 지긋지긋한 악연
3.2. 침대 축구
3.3. 역대 한·이 전적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라이벌 들을 정리한 문서.


2.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일본[편집]




2.1. 영원한 전통적인 숙명의 라이벌[편집]


대부분의 한국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일본과의 라이벌 의식이 매우 강하다.[1] 특히 축구는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도 내셔널리즘이 강하게 작용하기에 한일전의 열기가 더욱 뜨겁다.

자세한 내용은 한일전, 한일전/축구, 도쿄 대첩 항목 참조


2.2. 일본프로축구 출범(1993년) 이전[편집]


건국 초기부터 역사적인 이유 및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해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과 라이벌 의식이 매우 강했다.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최종예선에서 양국은 맞붙었으며 당시 전쟁이 끝난지 1년밖에 안 지난 시점에서 한국은 일본 원정에서 1승 1무를 거두어 일본을 제압하고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였다. 특히 해방된지 고작 9년밖에 안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민간의 반일 정서가 매우 강했으며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대표팀의 방한을 거부하고 일본 원정을 떠나는 한국 대표팀에 승리를 독촉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다만 20세기까지만 해도 축구에서 일본은 한국 국가대표팀의 적수가 아니었다. 한국은 1954년 스위스 대회 출전 경험과 1986년 이래 꾸준히 월드컵에 나선 경험이 있던 반면 일본은 1998년 이전까지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아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지금은 일본에 완전히 역전당한 아시안컵 커리어 역시 본래 격차가 엄청났는데 한국은 아시안컵 초대, 2대 대회 우승팀이었고 이후에도 우승만 못했을 뿐 꾸준히 토너먼트에서 활약한 우승후보였던 반면 일본은 1988년 이전까지는 아시안컵 본선조차 진출하지 못한 약팀이었다. 또한 현재의 압도적인 한일전 전적이 증명하듯 20세기 내내 한일전은 한국의 일방적인 경기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이유로 해방 이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동안 일본 축구는 몇 수 아래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한일관계의 특수성으로 인해 한일전은 실력을 차치하고 1950년대부터 강렬한 라이벌리로 간주되었으며 어쩌다 한일전에서 패하는 경우 축구팬들을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이 분노했다.[2] 다만 일본 내에서는 반한 정서가 상대적으로 옅었으며,[3] 일본인들 역시 축구보다 야구, 스모 등 기타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 당시까지만 해도 한일전은 한국인들의 관심 수준이 훨씬 더 높았다.


2.3. 일본프로축구 출범(1993년) 이후[편집]


일본은 1992년 아시안컵[4]에서 우승한 뒤 1993년에 J리그를 창설하면서 야심차게 장기적인 계획을 세운다. 일본 축구 시장과 실력이 차츰 향상되기 시작한 이후로 1994년에는 아깝게 94 월드컵 24강 본선행이 좌절되었으나, 1998년에는 98 월드컵 32강 본선에 진출하는 등 본격적으로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1990년대에는 홍명보가 국가대표 경기에서 "이제부터 일본에게 패배하면 나는 축구선수에서 은퇴한다." 같은 충격발언을 하는 등 비장한 각오로 일본을 상대하곤 했지만 이제는 과거보다 전력의 격차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 확정과 1998년 월드컵 진출로 월드컵 2연속 진출이 확정된 일본은 이 시점부터 점점 라이벌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여태껏 쌓아놓은 자산으로 아시안컵, 월드컵, 상대전적 등에서 충분히 압살하고 있던 상황이며 이때까지도 한일전에서 한국이 우세하는 경기가 많았기 때문에 여전히 일본을 도전자로 여기던 시기였다.


2.4. 일본의 추격: 2000년대(2000~2009년)[편집]


2000년대부터 일본이 한국을 추월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오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한국의 위상 및 커리어에 일본이 거세게 추격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부터 진정한 라이벌 구도가 성립되었다.

아득히 벌어진 상대전적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이 시기부터 상대전적은 대등하게 가져가기 시작했고 2000년, 2004년 우승으로 총 3회를 만들며 아시안컵 우승 횟수 역전이 이루어지며 아시안컵 커리어에서는 일본의 우세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월드컵에서도 일본의 추격은 이어졌다.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로 월드컵 2회 연속 및 최초 16강을 달성한 일본은 2006년 독일 월드컵 및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 내리 진출하고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16강에 진출하는 등 아시아 내 확고한 강호로 자리매김했다. 다만 2002년에는 한국이 월드컵 4위라는 불멸의 기록을 달성해 일본의 16강 진출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2006년 월드컵에서도 같은 조별예선 탈락이었지만 한국이 판정승하는 등 월드컵 성과에서는 여전히 한국의 압도적 우세가 지속되었다.


2.5. 대등한 라이벌: 2010년대(2010~2019년)[편집]


2010년에 접어들어 이미 한국이 자랑하던 월드컵 커리어마저 어느정도 역전한 부분도 생겨났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은 일본의 절대적인 상위호환으로만 보기 어려워졌다. 일본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6강 9위, 2018년 러시아 월드컵 16강 15위를 통해 2라운드 진출 횟수를 앞질렀고 2011년 아시안컵을 우승하며 우승 횟수를 또 한차례 앞서나갔다. 많은 커리어에서 따라잡거나 이미 추월한 상황이다.

다만 여전히 월드컵 최고성적(4위) 및 최다 진출기록 보유, 상대전적은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닌지라 한국의 압도적인 우위가 유지되고 있기에 양국의 평가가 대등해진 정도이지 일본의 우세로 굳어지진 않았다.


2.6. 2020년대 현재[편집]


2020년대 현재 일본은 한국에 뒤쳐졌던 커리어를 어느 정도 많이 따라잡았다. 대표적인 성과로는 월드컵 2라운드 16강 진출 4회vs3회,[5] 아시안컵 우승 4회vs2회[6] 등이 있다. 그 외 국가 클럽 대항전인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 성적도 대한민국 12회 vs 일본 8회로 격차를 꽤나 좁힌 상황이다.

다만 상대전적은 이미 너무 벌어진지라 현실적으로 뒤집기는 커녕 격차를 좁히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월드컵 성적 역시 단순 2라운드 진출 1회 차이로 일본의 우위를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 한국 측에는 4강 경력, 월드컵 통산 순위 및 역대 월드컵 본선 진출 횟수 우위 등 여전히 내세울 무기가 많다. 아시안컵의 경우 우승횟수는 일본이 한국의 2배이며 훨씬 최근의 우승인지라 한국 축구팬들도 일본의 아시안컵 우위를 인정하는 편이나 여전히 아시안컵 서열 순위(한국이 2위, 일본이 3위) 등 한국에 유리한 지표가 조금은 남아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서로간의 대결에서도 2000년대 이후에는 그 전과 같은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축구 내적인 면에선 완벽히 동등한, 관점에 따라 우열이 갈리는 라이벌에 걸맞는 관계가 되었다.

축구 외적인 면에선 한일관계가 점차 개선되면서 온건한 라이벌 관계가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과거에 비해서 무거운 분위기가 아닐 뿐, 지금도 최대의 라이벌 더비 매치이기 때문에 여전히 다른 국가들과의 경기와는 부담감과 마음가짐이 다르다. 오히려 한국의 국제적인 위상이 많이 올라가면서 일본의 입장에서 한국이 정치, 경제적으로 껄끄러운 상대가 되어버리고 일본인들에게도 한국은 가장 큰 라이벌이 되면서 일본에서도 한국전에 대한 경쟁의식과 투지가 많이 올라왔다.

과거[7]와는 달리 A급 대표팀 경기는 양측 모두가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서로가 꺼린다. 한국 입장에서 고사하는 비중이 더 높지만, 일본에서도 점점 한국전 패배가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있다. 양국 모두 상대에 패하는 순간 엄청난 비난이 따라오고 만약 월드컵과 같은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한일전을 했다가 지면 선수단의 분위기가 위축될 수도 있다. 그 결과 2011년~2021년 10년 동안 1군 대표팀 경기가 단 두 번 밖에 없었다. 국내파로만 무장하여 친선전보다 못한 동아시안컵(한국 2승 1무 1패)이나 연령별 대표팀 경기만 치러졌다.

친선전을 빼면 만날 수 있는 게 월드컵 예선이나 아시안컵인데, 월드컵 지역 예선은 2018년은 둘 다 2시드여서 못 만났고 2014, 2022 두 번 모두 만날 확률 50%를 피했다. 아시안컵에서는 2015 아시안컵 16강 조별리그에서 만날 확률 25%였으나 피해갔고 결승에서 만나는 대진이었으나 일본 8강 5등 탈락, 한국 준우승으로 못 만났다. 2019년 조별리그[8]에서는 둘 다 1시드여서 못 만났고 결승에서 만나는 대진이었으나 한국 8강 5위 탈락, 일본 준우승으로 못 만났다.[9] 무엇보다 아시안컵이나 월드컵 예선이나 한국은 이란, 우즈벡 등과 일본은 사우디, 호주 등과 지속적으로 엮이면서 서로간의 조우가 더욱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 한일전이 몇차례 없었다는 사실에 아쉬워하는 축구팬들도 많다.

21세기[10] 한일전 전적은 2022년 기준으로 5승 6무 6패로 호각세이다. 일부에서는 지난 2, 30년 간 급성장한 일본 축구에 추월당했다는 평가와 최근 한일전 연이은 대패로 한국은 이미 일본에 밀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의 최근의 성과 위주로 일본이 우위라는 관점으로 봐도 아직까지는 그렇게까지 차이가 많이 나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한국은 아직까지는 항상 유력한 아시안컵 우승후보였고, 일본의 월드컵 성적은 최고가 월드컵 9위(16강)이며,[11] 아직까지 4강 준결승은 커녕 8강 준준결승에도 진출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12]

그리고, 2020년대 들어서 일본이 5대 리그, 특히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이 많아지고[13]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벨기에 같은 중소리그에도 많이 진출하면서 유럽파가 증가했다. 따라서 월드컵 최종예선과 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나오는 일본 1군 명단을 보면 5대리그나 유럽파 선수들로 명단을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은 2020년대 들어 대한민국팀이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일본팀을 여러차례 승리[14]하였고, 공격진은 유럽파가 많으나 미드필더와 수비수들은 K리거와 아시아 리그 선수들이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K리그가 아시아권에서는 좋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결국 축구의 중심지는 유럽이기 때문에 K리거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물론, 한국은 축구선수들이 병역의무를 반드시 수행하는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일본 선수들보다 해외 리그 진출에 불리하다.[15]

한국에서는 그동안 박지성, 손흥민과 같이 세계무대에서 통하는 스타플레이어들의 존재로 인해 이러한 스타플레이어가 많지 않은 일본을 얕잡아보는 경우가 많았으나 일본이 지속적으로 유럽파를 늘려온 결실을 맺고 있기 때문에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16] 물론 한국 선수들도 지속적으로 유럽 진출에 나서고 있어서 앞으로의 한일전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17][18]


2.7. 한·일 팬들의 관점[편집]


이런 상황이라 각 대표팀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국가대표 팬들은 자주 논의를 벌이곤 한다. 일본의 우위를 주장하는 팬들은 아시안컵 우승 4회,[19] 월드컵 2라운드 16강 진출 4회,[20] 근래 일본의 한일전 연승,[21] 일본 국대의 유럽파 스쿼드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반면 여전히 한국의 우위를 주장하는 팬들은 한일전 상대전적, 아챔 우승 12회 등 클럽 레벨에서의 비교 우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 11회,[22] 역대 월드컵 서열 우위,[23] 2002 월드컵 4위, 그리고 차범근/박지성/손흥민/김민재 최고 선수들의 기량 우위 등을 근거로 내세운다.

일각에서는 역사적 위상과 업적은 한국이, 현재 위상과 실력은 일본이 더 우세하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한일 양국 축구팬들이 그나마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점은 고점은 한국이 저점은 일본이 높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이 우세라 주장하는 쪽은 강한 스타 플레이어 주축으로 나오는 슈퍼플레이에 중점을 두고 일본의 우세를 주장하는 쪽은 일본 팀의 강한 결속력과 안정적인 팀플레이에 중점을 둔다.


2.8. 해외의 시각[편집]


한일관계의 라이벌은 세계의 축구팬들 사이에서도 유명하기 때문에 아시아 축구 최고의 라이벌전으로 한일전을 뽑는 팬들이 많다. 2014년에는 영국 가디언지가 선정한 "국가대표팀 더비 매치 TOP 10"에 한일전이 5위에 오르기도 했다.

다만 유럽 국가들처럼 서로 도발이나 디스가 오가거나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유럽에서 뛰는 한일 선수들은 서로 사이가 좋고 리스펙하는 경우가 많으며 한일 현지팬들의 경우에도 온라인상에서나 감정이 험악하지 오프라인상에서는 간혹 갈등이 터지지만 전반적으로는 꽤나 우호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2.9. 역대 한·일 전적[편집]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역대 전적은 2022년 7월 27일 A대표팀 기준 81전 42승 23무 16패[24]로, 한국 대표팀이 일방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다.

# 자세한 내용은 한일전/축구도쿄 대첩 문서 참고.


3. [[이란|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틀:국기|
]][[틀:국기|
]]
이란[편집]




3.1. 지긋지긋한 악연[편집]


전통의 아시아 축구 최강 5개국 중 한 국가로, 유독 국제무대에서 죽을 쑤지만[25] 아시아 내에서 가히 최강의 면모를 보여준다. 한국, 일본, 이란, 호주, 사우디 5개국 사이에는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란의 경우 한국에는 강하지만 일본에는 약하다. 한국과는 각종 국제대회 및 지역 예선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카타르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만났기에 한국이 월드컵에 무난하게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팀이었다.

특히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이 이끌던 시절에 한국은 이란을 상대로 승리는커녕 골 넣는 것도 힘겨워했다. 2011년 아시안컵 8강전 이후 11년 후인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이란을 이겨보지 못할 정도였다. 케이로스 감독이 떠난 후 그 위세가 많이 죽은 편이었지만 2020년 들어 이란의 유망주들의 포텐이 갑자기 폭발했다. 사르다르 아즈문러시아 프리미어 리그를 거쳐 분데스리가의 바이어 레버쿠젠으로 이적했고, 알리레자 자한바크슈에레디비시에서 득점왕을 해 가공할 만한 득점력을 보유하고 있어 한국에 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아시아 최고 라이벌 매치로는 한일전이 꼽히지만 1998년 이후 한국과 일본은 정작 월드컵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지 않았으며 아시안컵에서도 만나는 빈도가 상대적으로 적다.[26] 그래서인지 막상 라이벌 매치라도 경기 전에 긴장감이나 승부욕에 비해 경기 후에는 뒤끝이 개운한 편이다.

반면 이란과는 여러 대회에서 지긋지긋한 악연을 쌓고 있는데 아시안컵에서는 1996년 대회부터 2011년 대회까지 5번 연속으로 8강에서만 맞대결을 펼쳤고, 1996년에는 이란 쇼크를 당하기도 했다. 월드컵 예선에서도 마찬가지인데 2010 월드컵 최종예선부터 2022 월드컵 최종예선까지 4번 연속으로 같은 조에 속하는 악연이 계속 되고 있고, 2014 브라질 월드컵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그 유명한 케이로스 감독의 주먹감자 논란이 터지기도 했다.

아무튼 아시아 축구계의 숨겨진 빅매치라 부를 수 있는 라이벌 관계다. 식스투 참사2011 아시안컵 이란전, 그리고 역대 한국-이란전 중 최고 명승부라는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동메달 결정전 등, 한국과 이란이 둘다 딱히 재미있는 축구를 하는 팀들이 아님에도 이상하게 이 둘이 맞붙는 경기마다 역대급 명승부가 나오는 경우가 흔했고, 한일전에 가려져서 그렇지 AFC 내에서 가장 흥미로운 더비매치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세계 무대에서는 아시아 톱 레벨의 성적을 거두는 한국이지만 아시아 내에서는 유독 자주 만나는 이란에게 자꾸 덜미를 잡히며 고전하고 있다. 이란은 원래 일본과 달리 국가적으로 별 관계가 없지만 축구로 자꾸 만나면서 악연이 생긴 쪽이다. 앞서 언급됐듯이 케이로스 부임 후부터 쌓여온 악연으로 감정적 어그로 문제가 있다. 또한 이란 측도, 이런저런 인터뷰를 통해 엿보면 역시 지긋지긋하게 만나고 있고 같이 아시아 탑에서 경쟁하는 한국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재미있게도 한국의 주유니폼은 붉은색, 보조유니폼이 흰색[27]이지만 이란은 주유니폼이 흰색이고 보조유니폼이 붉은색으로 정반대이며[28], 대표팀의 별명(이자 상징동물) 또한 한국이 호랑이[29], 이란이 사자[30]인 점 등 여러 면에서 대조된다.


3.2. 침대 축구[편집]


2002년 한일 월드컵 준결승 이후 한국 대표팀은 유럽 축구나 세계 무대 같은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한국이 처해 있는 현실은 아시아이고 세계 무대에서는 도전자지만 아시아 무대에서는 역으로 한 수 아래 상대들을 요리해야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약팀인 아시아 상대들은 한국을 상대로 밀집 수비나 침대 축구를 하는 비중이 높다.

이란은 자신들이 불리하다 싶을 때는 침대 축구를 취하고, 대등하다 싶을 때는 대등한 경기를 하고, 유리하다 싶을 때는 압도하는 축구를 통해서 한국을 잘 상대한다. 서아시아권에서 침대 축구에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한국과 2000년대 이후 너무 자주 만나며 실속을 잘 챙겨갔다. 축구에 관심이 있지 않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란이 아시아에서 강팀인지도, 한국과의 역대전적이 백중세인 것도 잘 몰랐지만 중요한 경기에서 자주 매칭됐고, 특히 상징적으로 케이로스와 최강희 간의 주먹감자 신경전까지 터지면서 제대로 된 감정적 어그로가 끌리기 시작했다.

이란과의 대결은 이란이 한국이 강할 때는 숙이고 약할 때는 난타하는 철저하게 실리적인 경기 운영으로 인해 한국이 극도로 농락당하면서 화를 내는 팬들이 많다.

박지성이 대표팀에서 뛰고 있었던 시절에는 한국이 이란보다 강했고,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도 홈, 원정에서 모두 1:1 무승부를 거두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면서 웃게 됐고, 이란은 탈락하면서 절망했다. 하지만 2011년 박지성의 은퇴 이후에는 7경기에서 3무 4패로 단 한 차례도 이기지 못하면서 10여 년간 철저하게 농락당하다가 2022년에 12년 만에 2-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부터 시작하는 이란은 선수들의 자부심과 애국심이 강하고, 신태용 감독이 말한 것처럼 서양인 체형[31]이라 한국보다 다리길이, 어깨너비, 근력 등 많은 부분에서 신체적 장점이 있어서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한국이 아시아권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는 애국심으로 인한 정신력, 아시아에서는 뛰어난 편인 신체능력 이 두 가지에서 한국과 대등 혹은 그 이상으로 상대할 수 있는 팀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난적이다. 이들이 웅크리고 있을 때 한국보다 축구에서 체형이 유리하기 때문에 쉽게 열어젖힐 수 없고, 웅크리고 있다가도 상당한 순간가속력과 몸빵으로 치고 나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란은 2018 러시아 월드컵 예선에서는 슈틸리케 체제에서 크게 부진하던 한국에 침대축구를 하지 않고 상대했으며, 한국은 유효슈팅도 하나 없이 처참한 경기력으로 이란에 0:1로 패배했다.


3.3. 역대 한·이 전적[편집]


이란 대표팀과의 역대 전적은 2022년 3월 24일 기준 33전 10승 10무 13패로, 한국 대표팀이 열세이다. 전적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 지리적 인접성 및 과거사로 인한 양국 간 라이벌리 때문에 한일전에 관심이 압도적으로 쏠려서 그렇지, 아시아 축구사에서 일본 못지않은 한국의 라이벌이 이란이다.

비교적 근래에 아시아 톱 레벨에 진입한 일본과 달리 이란은 일찌감치 아시아 축구의 강자였으며 아시안컵 최다 승점을 보유한 무시 못할 강팀이다. 한국보다 국제무대 성적이 낮지만[32] 2000년대 중반까지도 상대전적으로 열세였던 만큼 최근에만 이란에 약한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밀렸던 상대전적을 대등하게 맞춰갔지만 2010년대 넘어와서 다시 벌어졌다. 한국 입장에서 이란은 언제나 까다로웠고 또 중요한 길목에서 자주 만나는 골치아픈 상대이다.

이란 원정을 가서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한국인들이 이란을 난적으로 생각하는 주요 원인이다. 이란은 우리나라 홈에 원정을 와서 3번의 승리를 거뒀던 적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이란 원정에서 2004년에 U23 대표팀이 이천수의 결승골로 승리를 제외하고, 단 1경기도 이긴 적이 없다. 이란의 홈구장인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8전 3무 5패이고, 득실차도 4득점 11실점으로 열세이다.


4. 관련 문서[편집]



[1] 예외는 양궁, 쇼트트랙, 바둑 정도로 이들은 일본의 실력이 떨어지고 중국이 잘 하는 편이라 최대 라이벌이 중국이며 반면 배구의 경우 한국의 실력이 떨어지므로 중일전이 더 주목받는다. 농구의 경우 본래 한중전이 라이벌이었으나 최근 일본이 무섭게 치고 올라왔기에 삼파전 양상에 가깝다.[2] 특히 단순히 반일 감정 뿐만이 아니라 상기했듯 객관적인 전력 또한 일본이 한국에 전혀 미치지 못했으므로 한일전 패배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현재 중국 축구에 패하면 한국 축구팬들이 충격을 받는 것과 유사하다.[3] 일본인들이 한국을 의식하기 시작한 시점은 1990년대~2000년대 즈음이며 반한 정서가 널리 퍼진 시점은 2010년대 즈음이다.[4] 8개국(8강) 본선 대회[5] 한국도 일본을 이기고 진출한 54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까지 합하면 16강 이상 진출 총 4회이나, 54 월드컵 당시는 1라운드 16강 조별리그였다. 한국 2라운드 16강 진출 2002 월드컵 4위, 2010 월드컵 15위, 2022 월드컵 16위 / 일본 2라운드 16강 진출 2002 월드컵 9위, 2010 월드컵 9위, 2018 월드컵 15위, 2022 월드컵 9위[6] 한국 2회. 일본 1992, 2000, 2004, 2011년[7] 과거에는 1년마다 하는 한일 정기전도 꽤 많이 했던 만큼 역사적으로 보면 두 나라의 축구는 교류가 많았다. 일본은 한국이 가장 많이 A매치에서 맞붙은 나라이기도 한데 한일 정기전 등으로 실력을 자주 겨루었다.[8] 24강 조별리그[9] 2010 월드컵 예선도 최종예선에서 만날 확률 50%였으나 비껴갔다. 2011년 아시안컵 16강 조별리그에서 만날 확률 25%였으나 피해갔고 1월 25일 준결승에서 만나 일본이 승부차기 승을 했다.[10] 21세기는 2001년부터 시작한다.[11] 2002년 9위(16강), 2010년 9위(16강), 2018년 15위(16강), 2022년 9위(16강)[12] 참고로 2022년 12월 피파랭킹은 일본 20위, 한국 25위로 맞대결 1번이면 순위가 뒤바뀔 수 있는 백중세이다. 반면 월드컵 통산 랭킹 또한 한국 26위, 일본 29위로 한국이 4회나 더 많이 출전했음에도 격차가 굉장히 좁다.[13] 22-23시즌 여름 기준 독일 1부에서 뛰고 있는 일본인 선수만 나열해보면 도안 리츠, 이타쿠라 코, 카마다 다이치, 하세베 마코토, 하라구치 겐키, 요시다 마야, 아사노 타쿠마, 엔도 와타루, 이토 히로키까지 총 9명이 뛰고 있다. 거기다 소속팀에서의 입지도 단순 벤치자원이 아니라 주전급으로 매우 좋은 편이다.[14] 그 중 2020년 울산이 우승하고, 2021년에 포항이 준우승까지 했다.[15] 올림픽 메달이든,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든 둘 중 하나는 무조건 따야 하는데, 애초에 국가대표에 뽑히는 것도 힘든데다가 나간다고 해도 이러한 성과를 보장받지 못한다.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단 한번 따봤을 뿐이고 훨씬 쉬운 U23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딴다는 보장이 없다. 실제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하고 2014년 우승하기까지 28년이 걸렸다. 게다가 이미 유럽에 진출한 선수들의 경우에는 팀에서 대표팀 차출을 거부하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손흥민의 경우에도 2012년 올림픽과 2014년 아시안게임 같이 병역특례를 받은 대회는 소속팀의 차출거부로 출전하지 못했고, 정작 2016년 올림픽에는 출전했지만 메달을 따지 못했다가 2018년 아시안게임에서 연장 혈투 끝에 금메달을 따서 병역특례를 받았다. 물론 운좋게 20대 초반에 병역특례를 받은 선수들은 본인의 실력만 된다면 해외에 진출하기 정말 쉬워진다.[16] 토미야스 타케히로아스날에서 수비수로서 자리를 잡았고, 2022-23 시즌 여름 이적시장에만 해도 모리타 히데마사가 포르투갈 강호 스포르팅 리스본으로 이적했다. 도안 리츠는 독일 프라이부르크로 이적했으며 쿠보 다케후사는 레알 소시에다드로 이적했다. 미나미노 타쿠미는 모나코로, 수비수 이타쿠라 코 역시 묀헨 글라드바흐로 이적했다. 이들은 유럽에서 수 년간 경험을 쌓고 자리잡아서 결국 리그 내에서 강팀으로 꼽히는 팀으로 이적에 성공했다.[17] 2020년대 국대 한일전 승리 중 2022년 9월 안양에서 열린 덴소컵 대학국대매치에서 한국이 일본에게 3:2로 승리하였으며전반전, 후반전, 연장전반,연장후반,##(그 해 2022년 8월에 대학국대매치에서 일본에게 0:5 참패와 연령별 연패를 설욕하였다.), 그리고 2023년 8월 17일 일본 쿠사나기 스타디움에 열린 U18매치 한일전 sbs컵에서 1:0으로 승리하여 최근 국대 참패들을 극복하고 있다.[18] 그리고 참고로 2020년대 한일전 승리 중 아챔에서는 대한민국 팀이 일본 팀을 여러차례 승리하였으며, 대표적으로 2021년 아챔 8강에서 한국의 포항 스틸러스가 일본의 나고야 그램퍼스3:0 승리, 2022년 8월 아챔 8강전 일본 사이타마에서 한국의 전북 현대 모터스가 일본의 비셀 고베를 3:1로 격파하였다. (아쉽게 준결승전에서 우라와에게 승부차기 끝에 아쉽게 졌다.)[19] 주로 서구권에서 ‘아시아 최강’을 놓고 일본을 지지하는 견해가 조금 더 많은 편인데 이에 대한 주요 근거가 일본의 아시안컵 지배력이다.[20] 2002 월드컵 9위(16강), 2010 월드컵 9위(16강), 2018 월드컵 15위(16강), 2022 월드컵 9위(16강). 한국도 일본을 이기고 진출한 54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까지 합하면 16강 이상 진출 총 4회이나, 54월드컵 당시는 1라운드 16강 조별리그였다.[21] 벤투호의 2021년 요코하마 열린 친선 한일전 0:3 패배와 2022 EAFF E-1 풋볼 챔피언십에서의 한일전 0:3 패배. 이 시기에는 연령대 대표팀 포함하면 5연속 0대3 패배를 했다.[22] 일본은 통산 7회 진출로 아시아 2위이지만 한국과 4회나 차이가 난다.[23] 한국 26위(승점 31점), 일본 29위(승점 27점)[24] 승부차기전까지 포함하면 43승 19패이다.[25] 일례로 이란은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경험이 전혀 없다. 다른 아시아 강팀들의 경우 한국은 4위 1회와 16강 2회, 일본은 16강 4회, 호주는 16강 2회, 북한은 8강 1회, 사우디아라비아는 16강 1회 진출 기록을 보유한다. 이란이 월드컵 최종예선에서는 압도적인 강자 중 하나로 군림하나 정작 월드컵 본선에서는 다른 아시아 팀들이 선전할 때 유독 힘을 못쓰는 경우가 많다.[26] 친선전, 동아시안컵 등의 맞대결에서 한쪽의 뚜렷한 우위라고 말하기는 무리가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청소년 대표팀 같은 경우는 역시 말하기 애매하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예선부터 2022 카타르 월드컵까지 한국은 이란, 일본은 AFC로 넘어온 호주와 계속 같은 조에 묶였다.[27]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검정 계열[28] 이 탓에 두 팀이 맞붙는 경기는 항상 양쪽 다 주유니폼만 착용한다.[29] 정확히는 '아시아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30] 정확히는 'Shiran e Iran(이란의 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린다.[31] 애초에 이란의 주류 민족인 페르시아인 부터 코카소이드이다. 또한 페르시아인 외에도 이란의 주요 민족 중 쿠르드족, 길라크족, 루르인 등도 코카소이드계이며, 튀르크계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이나 아르메니아인 등도 유전적으로는 혼혈 등을 통해 코카소이드나 다름 없다.[32] 이란의 국제대회 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다. 아시안컵에서도 최다 승점을 쌓아서 아시안컵 서열 1위를 기록(최다 우승국 일본은 서열 3위, 한국은 서열 2위다.)과 1978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예선에서 단 1자리에 들어가서 1978월드컵 본선 16개국 진출과 무려 월드컵 최종순위에서 헝가리와 멕시코를 제치고 이란은 1978월드컵 14위(1라운드 16강 조별리그)를 기록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참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5140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5;"
, 5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5140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5;"
, 5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1 05:42:34에 나무위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라이벌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