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가와 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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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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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홋카이도 11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4대
나카가와 쇼이치


제45대
이시카와 도모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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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10대 재무대신
일본국 제27·40대 농림수산대신
일본국 제37-44대 중의원 의원
나카가와 쇼이치
中川昭一 | Nakagawa Shōichi

파일:나카가와 쇼이치.jpg
출생
1953년 7월 19일
도쿄도 시부야구
사망
2009년 10월 3일 (향년 56세)
국적
[[일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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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신주쿠 구립 오치아이 제일 소학교 (졸업)
아자부 중학교 (수료)
아자부 고등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 / 중퇴)
도쿄대학 (정치학 / 학사)
직업
정치인
가족
아버지 나카가와 이치로, 어머니 나카가와 사다코[1]
남동생
아내 나카가와 유코[2], 장녀 나카가와 마리코[3] 장남 [4]
혈액형
A형
소속 정당


의원 선수
8 (중)
지역구
홋카이도 11구
약력
일본흥업은행 근무
농림수산대신 역임
중의원
경제산업대신 역임
자유민주당 홍보본부장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재무대신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기타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홋카이도 제11구 중의원이었으며, 재무대신, 농림수산부 대신 등을 역임했다. 아버지 나카가와 이치로는 농림대신, 초대 농림수산대신, 과학기술청 장관을 지냈으며, 북해의 큰곰 (北海のヒグマ)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등, 강경파 의원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아베 신조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와 절친했다.[5]

그 영향으로 아소 다로, 아베 신조와 함께 ANA 라는 콤비를 이루었고 아마리 아키라,스가 요시히데까지 포함해서 NASA라고 불린다.

홋카이도 5구,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 도입 후에는 홋카이도 제11구에서 선출되어 2009년에 낙선할 때까지 연속 8기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농림수산대신, 경제산업대신, 재무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금융담당)을 역임했으며 당 3역에서는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을 지냈다. 또 초당적 납북 일본인을 조기에 구출하기 위해 행동하는 의원연맹 회장, 일본회의 상담역을 맡았다.


2. 생애[편집]


1953년 7월 19일, 도쿄도 시부야구에서 홋카이도 개발청에 근무하고 있던 나카가와 이치로와 그의 아내 사다코의 장남으로서 태어났다. 본적지는 홋카이도 히로오초. 아버지는 결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쿄로 부임해 근무하고 있었다.

신주쿠 구립 오치아이 제일 소학교에서 아자부 중학교·고등학교에 진학했고.중학교 수험시, 어머니는 쇼이치를 학원이나 가정 교사에게 의지하게 하지 않고, 참고서를 통해 공부시켜 합격시켰다고 한다. 아자부 시절에는 즐겨 하던 축구를 대학입시 때문에 그만뒀다가 심장 비대를 앓게 됐었으며 집에서는 호헌파의 학자 미야자와 도시요시의 이야기를 하던 중 아버지 이치로에게 혼난적 있었다고 한다.

현역생 시절에 합격한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 경제학과에 입학하면서 게이오의 분위기 자체는 마음에 들었지만, 아자부 출신들의 대부분은 도쿄대학에 합격해, 자신만 떨어진 것은 속상하다고 느껴 재수를 하면서 1974년, 도쿄 대학 문부 과학 일류에 재입학했다.전문과정에서는 이 대학 법대 정치학과에서 정치학을 배웠으며 재학 중에 한 번만 사법시험을 치렀다.

도쿄대학 법학부 졸업 후 1978년 4월, 일본 흥업은행에 취직했으며 나카가와는 「관료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지금 와서는, 실물 경제라는 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관리가 열심히 해도, 혹은 정치가가 열심히 해도 국민 개개인의 모랄이라고 할까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국가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흥업은행에 들어간 것은 은행원이 되려고 생각했다기보다, 일본 경제 전체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식이 강했다」라고 말을 했으며 흥업은행에서는 예금부와 외환부에서 근무하고 예금부 시절에는 기업의 자금 조달이나 상사 상대로 수출, 수입의 결제를 하는 역할을 했다. [6]

그러나 1983년 아버지가 급사함에 따라 일본 흥업은행에서 퇴직하고 같은 해 12월에 치러진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의 공천을 받고 홋카이도 5구에서 입후보했다.조문선거가 된 이 선거에는 아버지의 측근으로 비서를 맡고 있던 스즈키 무네오도 입후보했으며 두 사람의 후계 다툼은 언론으로부터 '골육 싸움'이라고도 불렸고 이 선거에서 나카가와는 당선되었다.

그 이후 아버지가 속한 자유혁신동우회(구 청람회)에 속하다가 자유혁신동우회가 세이와 정책연구회에 흡수되면서 그에 속하다가 가메이 그룹을 거쳐서 지수회에 입회하였다.

1989년 농림수산 정무차관에 취임을 했으며 1998년 오부치 내각이 발족하자 나카가와는 농림수산대신으로 입각했고 이후 오부치 제1차 개조내각까지 같은 직을 맡았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 이치로가 초대 농림수산대신이었고 농림수산성의 명판도 아버지의 휘호에 따른 것이었지만 장관 취임 후 그 명판을 향해 일례하며 "정신차리라고 아버지가 말하는 것 같다"는 소감을 밝혔다.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시절인 2003년 9월에 개조된 고이즈미 개조내각에서 경제산업대신에 취임했으며 중국에 의한 동중국해 가스전 문제에 대응했다. 제국 석유에 시굴권을 부여하는 등 중국에는 강한 자세로 협상을 벌이고 있었고 2005년 10월까지 재임했다.그후 나카가와는 다시 농림수산성 대신을 지냈다. 내각은 일련의 고이즈미 개혁에 기여하고 장관으로는 멕시코 필리핀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의 성과를 거두었고 대한민국을 '백색국가'로 인정했다. [7]

그것을 바탕으로 나카가와 쇼이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부터의 신뢰가 두터워 그에게 퍼스트 네임인 '쇼이치'으로 불리는 몇 안 되는 국회의원 중 한 명이 되었다. 동지인 아소가 昭ちゃん(쇼쨩)이라고 불렀다면 아베는 昭一さん(쇼이치 상)이라 불렸다는 뜻이다.

한편, 고이즈미가 진행한 우정 민영화에는 찬성하면서도, 히라누마 다케오를 리더로 하는 우정 민영화 법안에의 조반조에 대해서도 반 동정적이었고 나카가와와 히라누마는 은행원 시절부터의 형제와 같은 사이로 처음 선거에 입후보했을 때에는 응원을 하러 달려갔던 인연이 있다. 또 나카가와는 2003년, 그때까지 자신이 맡고 있던 북한에 의한 일본인납치의련 회장직에 후임으로 취임하도록 아베 신조와 함께 히라누마에 삼고초려의 표시로 타진한 바 있었던 인연이다.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퇴임이후 자민당 총재선거에서는 당시 내각관방장관이었던 아베를 지지했고, 아베 총재 탄생 후에는 같은 당 정조회장에 취임했다.

이듬해인 2007년에는 정부 세제조사회장인 혼마 마사아키의 애인 문제에 즈음해서는, 「도덕의 문제」라고 단정해 혼마의 사임으로의 흐름을 만들었고 또한 같은해에 예산안의 중의원 표결에서 민주당은 해임결의안을 다발하여 항전, 많은 자민당 의원들이 이를 '대의 없는 저항'이라고 비판한 반면, 나카가와 측은 '민주당은 정말 표결을 저지하려면 더 철저하게 저항했어야 한다'는 취지의 강연을 했다.

같은 해 8월의 제1차 아베 개조 내각 인사 내지 자민당 임원 인사에서는 중요 포스트로의 기용이 확실시되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입각이나 당 중요 임원에의 취임은 없었다.

같은해 2007년 아베가 건강상 문제로 사임하면서 2007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는 즉시 아소 다로 "수상"만들기를 위한 활동을 개시했고 직후에 아소와 회담하여 지지를 전하면서 총재 선거 입후보를 위한 추천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선거전에서는 아소와 동행하여 다른 응원 의원들과 함께 도쿄 신주쿠 역 앞에서의 거리 연설 등에도 참가하였지만 결과는 후쿠다 야스오가 승리하여 같은 달 후쿠다 야스오 내각이 발족하였으며 그가 소속된 지수회의 회장이었던 이부키 분메이가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하자 나카가와는 지수회 회장 대행을 맡게 되었으며 같은해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등을 강사로서 초빙한 정책 스터디 그룹을 개최한 것 외, 동년 11월에는 보수파의 의원으로 참·보수 정책 연구회(창생 일본)를 설립하는데 있어서의 정리하는 역을 맡았다. 이 모임 참가자의 대부분은 직전 총재선거에서 아소의 지지자였으며, 이듬해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아소가 선출되는 원동력의 하나가 되었다.

아소 내각이 성립되자 재무대신과 금융 담당 장관에 취임을 하였다. 그러나(...) 2009년 2월 나카가와는 G7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참석차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했고 이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만취한 듯한 모습이 주목받았으며 .이 모습은 각 언론에서 크게 거론돼 맹비난을 당했다. 나카가와가 해명했지만 사흘 뒤 결국 장관직을 사퇴하게 되었고 후임은 요사노 가오루가 이어받았다.



이것으로 인해 결국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44회에서 붙었던 이시카와 도모히로에게 낙선하면서 그의 정치인생은 끝나게 되었으며 석패율비례대표에서도 역시 낙선했으며 결국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교체가 되었다.

낙선 후의 회견에서 나카가와는,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어졌지만, 여러분에게 보답을 하고 싶다.」라고 말했고 다음 달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향후 새롭게 결의를 가지고 나아갈 것입니다.발신해 가겠습니다.일본이 위험하기 때문이라고...」기록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허리통증과 감기, 그리고 불면증 때문에 수면제를 복용하는 상황이었다.

10월 4일 자택 2층 침실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됐으나 실제 사망 일시는 발견 전날인 10월 3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9월 27일 새로 발족한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의 각의에서 나카가와에 대한 정3위 및 욱일대수장의 추증을 결정했는데, 그 수여는 같은 해 10월 3일자로 결정되었었다..

영결식은 2009년 10월 8일·9일에 도쿄도 미나토구 모토아자부의 원아사부의 젠후쿠사에서 자민당과 나카가와 가문의 합동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정치동맹친구인 아베 신조,아소 다로,당시 총리인 하토야마 유키오,당시 자민당 총재인 다니가키 사다카즈,그가 속한 회장인 이부키 분메이가 참석했고 헌정기념관에서 추모집회가 있었으며 3000명이 출석하였고 그의 사후에는 46회 총선에서 부인인 나카가와 유코가 출마해서 당선된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홋카이도 5구


163,755 (25.18%)
당선 (1위)
초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8,149 (17.85%)
당선 (1위)
재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0,781 (16.27%)
당선 (1위)
3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0,832 (17.76%)
당선 (1위)
4선[8]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홋카이도 11구
97,428 (53.53%)
5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2,297 (57.74%)
6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2,210 (62.05%)
7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7,506 (51.62%)
8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9,818 (40.90%)
낙선 (2위)


4. 기타[편집]


  • 생전의 나카가와는 농정을 중심으로 우정제도, 방송전파정책, 재정정책, 문교정책, 북방문제, 북한문제 등 폭넓은 정책을 구사했으며 정책을 공유하는 친구인 아베 신조와 아소 다로의 AA는 나카가와를 더해 ANA라고도 일컬어졌으며 여기에 히라누마 다케오를 더해 HANA 또는 꽃모임이라고 불리지만 나카가와, 아소,아베외에 스가 요시히데, 아마리 아키라를 더해 NASA모임으로도 불렸다.

  • 술을 많이 즐겨했다. 정치권에서 중요한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술버릇을 주의받는 일이 늘었으며 종종 금주·단주를 선언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 때문에 2월 14일에 G7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참석차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한 후 만취 상태로 기자회견을 하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 우파 정치인이다. 매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했으며, 생전에 ‘다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에 가입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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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혼전 성 키노시타[2] 남편의 지역구를 이어받았으나 라이벌인 이시카와 도모히로의 아내인 이시카와 가오리에게 패하여 지금은 석패율비례대표의원이다.[3] 후지테레비에서 근무하고 있다.[4] 미쓰비시 상사에서 근무하고 있다.[5] 그러나 정치성향은 반대였는데 쇼이치의 부친인 나카가와 이치로는 이시하라 노부테루의 아버지인 이시하라 신타로와 함께 세이란카이(青嵐会)에 속한 극우파벌이었으며 하지만 아베 신타로는 후쿠다파였으나 장인인 기시 노부스케보단 아버지 아베 간의 영향을 받아 중도우파이다.[6] 친구인 아베 신조는 성적이 좋지않아 아버지 아베 신타로와 의견대립이 있었으며 그 이유는 도쿄대학에 가라는 말을 듣고 공부를 소홀히 했으며 결국 세이케이대학에 들어갔다.[7] 그 이후 그의 사후로 재집권한 아베 신조는 한국을 백색국가로 제외하는 아이러니한 성향이다.[8]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