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1988)/선수 경력/두산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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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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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15

파일:2008 베이징 올림픽 로고.svg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종목
금메달
2008

파일:WBSC 프리미어 12 엠블럼.svg
2015 WBSC 프리미어 12
우승반지
2015

파일: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10

파일:2014 인천 아시안게임 로고.svg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14

파일: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18 자카르타 • 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18





파일:일구상 로고.jpg 2008 일구상 최고 타자상

성구회
회원번호
기록
가입년도
비고
18
2,000안타[진행중]
2021년
현역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8, 2018 KBO 리그 타격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8, 2009 KBO 리그 최다 안타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8 KBO 리그 출루율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10, 2014 KBO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자

파일: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구 로고.png2008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선정 올해의 선수



보유 기록
14개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최다 홈런[1]


김현수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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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 등번호 89번
이선덕
(1984~1988)

김현수
(2006)


윤현민
(2006~2008)
두산 베어스 등번호 50번
박정배
(2005)

김현수
(2007~2015)


이영하
(2017~)
볼티모어 오리올스 등번호 25번
버드 노리스
(2013~2015)

김현수
(2016~2017)


앤서니 산탄데르
(2017~)
필라델피아 필리스 등번호 31번
마이클 매리엇
(2016)

김현수
(2017)


마크 라이터 주니어
(2018)
LG 트윈스 등번호 22번
김광삼
(2010~2016)

김현수
(2018~)


현역

1. 개요
2.1. 2008년 이전
2.2. 2008 시즌
2.3. 2009 시즌
2.4. 2010 시즌
2.5. 2011 시즌
2.6. 2012 시즌
2.10. 두산에서의 기록


1. 개요[편집]



두산 베어스 No.50
김현수
金賢洙 / Hyun-Soo Kim


''내년, 그리고 저 은퇴할 때 까지 두산에서 같이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2015 시즌, 메이저리그 진출 얘기가 나오고 있을 때, 시상식에서 팬들에게


''10년이면, 두산에서 잡아준다면 두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15 시즌 허슬플레이 시상식에서 10년 후에 김현수 선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라는 장내 아나운서의 질문에.

[허슬플레이 시상식] 은퇴할 때까지 두산 베어스와 함께! 3할본능 김현수!


그가 두산을 떠나기 전까지 두산 하면 김현수가 떠오를 정도로, 그야말로 두산을 대표하던 두산 베어스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영구결번 0순위 후보였다.

2006년 어느 팀에게도 지명을 받지 못하여 결국 두산에 신고선수로 입단했으나, 이내 타격 잠재력을 뽐내며 단숨에 리그 수위타자로 발돋움 하며 신고선수 신화를 썼다. 꾸준한 성적으로 두산 타선을 책임졌고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팀의 대표 선수가 되었다. 2008~2010 3년 연속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다.

2015 시즌에는 마침내 꿈의 한국시리즈 우승 또한 달성하였으며, 이후 FA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였고, 한국 복귀 당시 LG 트윈스로 이적하게 되면서 두산에서의 선수생활은 사실상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2. 두산 베어스 시절[편집]



2.1. 2008년 이전[편집]


신고선수로 입단한 만큼 절치부심하며 훈련했다. 김광림 타격코치의 지도 아래 매일 하루 1000번의 스윙을 했다고 한다. 입단 첫해 훈련 중 외야 수비를 하다 펜스에 제대로 부딪쳤는데 툭툭 털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김경문 감독의 눈에 들었다.

2006년 시즌 후 교육리그에서부터 잠재력을 인정받고 2007 시즌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되며 1군 무대에 첫 등장하였다. 시즌 초반 극심한 부진으로 팬들로부터 김경문 감독의 양아들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점점 리그에 적응해가기 시작했다. 이후 주로 2번타자로 출전해 99경기, 타율 0.273을 기록했다. 규정타석은 채우지 못했지만 팀 내 타율 4위, OPS 6위, wOBA, WAR 5위를 기록하며 팀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2.2. 2008 시즌[편집]


만 20세에 리그를 폭격하다

2008년에는 타격포텐이 완전히 터져 타율왕과 최다안타를 달성하며 리그 최고의 중장거리 타자로 등극했다. 전 경기에 출장해 타율 0.357 (리그 1위), 안타 168 (리그 1위), 출루율 0.454 (리그 1위), 장타율 0.509 (리그 4위), 홈런 9, 타점 89 (리그 5위), OPS 0.963 (리그 2위), wRC+ 176.5 (리그 2위), WAR 7.14(리그 1위)라는 매우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으며, 이게 고작 입단 3년차 신인의 기록이다. [1] 엄청난 것은 타격왕을 먹었는데도 출루율이 타율과 1할이나 차이가 난다는 점으로, 볼넷을 80개나 얻어내는 동안 삼진은 고작 40개를 당하며 'BB/K가 2를 찍었다. 정규시즌의 좋은 활약으로 여름에 열린 2008 베이징 올림픽에도 출전했으며, 같은 막내 김광현과 함께 맹활약하며 금메달을 받아 병역특례까지 따냈다. 특히 일본과의 예선전에서 9회 대타로 나와 좌투수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중전 안타를 때려내[2] 역전 결승타점을 만드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국대 김현수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정규리그와 올림픽,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보여준 한결같았던 타격기계의 모습은 한국시리즈에서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가을맹구의 시작 삼성과의 플레이오프까지만 해도 24타수 8안타 1홈런 5타점 4볼넷으로 맹활약하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며, 작년의 충격적인 한국시리즈 역전패를 설욕하고 팀에게 우승컵을 선물할 것이라는 팬들의 기대가 대단히 높았다. 한국시리즈 3차전에는 팀이 3대2로 지고 있는 9회말 1사 만루에서 병살타를 쳐서 그대로 패배했으며, 베이징 올림픽 결승전 마지막 타자였던 쿠바율리에스키 구리엘이 친 병살이랑 똑같다고[3] 하여 김쿠바, 김구리엘이란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하필이면 상대도...[4] 그리고 시리즈 스코어 1대3으로 팀이 벼랑끝에 몰린 5차전, 2대0으로 지고 있는 9회에 1사 만루찬스가 다시한번 찾아왔으나, 채병용을 상대로 다시 1-2-3 병살을 치며 그대로 눈앞에서 SK에게 우승을 헌납해버렸고, 두산의 2년 연속 준우승에 큰 공(?)을 세웠다. 당시 병살타를 치고 1루에서 펑펑 울던 어린 김현수의 모습은 모든 야구팬들에게 안쓰럽게 다가가기 충분했다. 결국 한국시리즈 최종 성적은 21타수 1안타 그리고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 최형우가 21타수 2안타를... 2018년 한국시리즈에서 박건우가 24타수1안타를 기록했다. 결국 정규시즌에 맹활약을 했음에도 시즌 MVP 마저 우승팀 SK의 에이스 김광현에게 빼앗기며, 2008년의 마무리는 새드 앤딩으로 끝나고야 말았다.

여담으로 이 시절 김현수를 똑딱이 시절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홈런 수가 적었다 뿐이지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장타율 5할[5]에 OPS 9할을 기록한걸 보면 똑딱이가 아니며, 엄연한 중장거리 타자였다. 애초에 장타율 5할에 리그 4위를 달성한 성적을 단순히 홈런 개수가 적었다고 똑딱이라 하는거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무엇보다 이 시즌의 wRC+가 거의 176인데 단순 똑딱이는 이정도 생산성이 절대 안나온다. 2008년의 리그 OPS는 0.721로, 상당한 투고타저 시즌이라 9홈런이 적어보이는 것일 뿐. 김현수 다음 타석의 타자가 장타자 이미지가 강한 김동주였던 점과, 같은 해 각성해 홈런 31개에 무려 장타율 0.622를 기록한 김태균이 있었다는 점[6] 때문에 상대적으로 똑딱이처럼 보였을 뿐이다. 당장 이 해 2루타 1위부터가 김현수(34개)였다.

2.3. 2009 시즌[편집]



2009년에는 소포모어 징크스[7]는 개나 주라는 듯, 2008년의 놀라운 안타 생산능력에다가 부족했던 홈런까지 갖춘 전천후 선수가 되었다. 특히 6월 초반까지 4할대 타율을 유지하는 괴물같은 스탯을 찍어주었다.

2009 KBO 드림팀을 뽑는 투표에서 7개 구단 감독 만장일치로 3번타자로 낙찰되기도 하였다. 한참 선배인 홍성흔이 김현수를 가리켜 "타격의 신"이라고 하거나, 이승엽도 베이징 올림픽 때 김현수에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 치냐"라고 묻기까지 할 정도로 타격 능력에 있어서는 자타공인 천재.

2009시즌은 2년 연속으로 전 경기에 출장해 타율 0.357 이 기계는 신규패치가 없네 (리그 3위), 출루율 0.448(리그 3위) ,장타율 0.589(리그 3위), 안타 172(리그 1위), 홈런 23(리그 11위), 타점 104(리그 2위), OPS 1.037(리그 3위) ,WAR 6.88(리그 1위)등 단지 타격왕만 놓쳤을 뿐 월등히 좋아진 장타력으로 2008시즌보다도 더 좋은 괴물같은 스탯을 찍었다. 다만 겉보기인 클래식과 다르게 타격 WAR수치나 wRC+ 수치는 2008년이 더 우위인데, 이는 2009년이 엄청난 타고투저였기 때문이다. 리그 평균 OPS수치가 2008년 0.721이었던 반면, 2009년에는 무려 0.787로 6푼넘게 상승했다. 이 때문에 홈런과 타점이 훨씬 더 많아졌어도 다른 타자들도 같이 타격성적이 잘 나왔기 때문에 투고타저속에서도 괴물같은 스탯을 찍어낸 2008년의 세이버 스탯이 더 높게 나온 것. 그럼에도 2009년에 기록한 wRC+가 169.5로 거의 리그 MVP급 성적을 찍어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승 프리미엄 + 홈런, 타점 1위인 김상현이 MVP를 가져가면서[8] 2년 연속 리그 최고 수준의 활약을 하고도 2년 연속 2위에 만족해야 했다.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김거김을 만들어내는 등 펄펄 날았지만 SK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부진하였다. 그러다 10월 13일 플레이오프 5차전 SK와 경기에서 2회 선제 솔로홈런을 쳤는데, 직후 경기가 우천으로 중단되었다가 결국 취소되면서 그 홈런은 아예 무효 처리되었다. 홈런을 치고 포효하며 기뻐하다가 비가 많이 내릴수록 점점 근심에 싸이는 모습을 보며 두산 팬들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홈런을 치는데 왜 경기를 못하니... 다음날 또 홈런을 치면 된다고 인터뷰했지만, 14일 리셋하고 다시 시작한 5차전에서는 두산이 참패하였다. 5차전에서 크게 지고 있던 상황 중 정말로 홈런을 치고 베이스 도는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가 '나는 오늘 세상에서 가장 슬픈 홈런을 보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4. 2010 시즌[편집]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2010)
파일:현수10.jpg
부진에 빠져있던 플레이오프 4차전 7회말 2사 만루에서 손시헌의 대타로 나와 2타점 적시타를 때려낸 후
시즌 KIA와의 개막전 2연전에서 도합 8타수 7안타를 치면서 역시 김기계라는 평을 들었으나 최훈 카툰 이후 극도의 부진(?)고장에 빠지면서 김기계답지 못하게 타율이 2할대까지 떨어졌었다.

이러한 부진(…)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했다. 4번 타자에 배치된 게 심적으로 부담이 됐다거나, 베이징 올림픽과 WBC 이후 유명해지면서 펄모씨과 얽히면서 멘탈이 망가진 것 아니냐는 카더라도 있었다. 김경문 감독은 이러한 김현수의 부진에 대해 "야구하면서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부진이다. 계속 잘하기만 하면 얼마나 야구가 쉬워 보이겠는가." 라며 현재의 부진이 더 발전하기 위한 성장통 정도로 생각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3할 20홈런에 90타점 가까이 기록해놓고 부진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쩌면 김현수 개인에게는 불행한 일일지도 몰랐다.[9]

식빵을 자주 입으로 굽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야갤에서 신나게 까였고, 또한 발전도 없는 새끼가 겉멋만 들었다며 까였다. 그러다보니 기레기라는 별명이 생겼다.

2010 올스타전 홈런더비에서 10개의 홈런을 기록, 역대 최고 기록으로 우승했다. 그런데 이 기록은 2012년 김태균이 14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깨졌다. 그러나 2014년, 다시 김현수가 14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보란 듯이 타이기록을 기록했다.

이 와중에 8월 5일 잠실 롯데와의 경기에서 사구를 맞자 성질을 내던 모습이 제대로 걸렸다. 네티즌들의 심한 비난에 직면해 있는 상태이다.#

후반부에 이르러 어느정도 기량을 되찾아 3할을 회복했으며 결국 20홈런 80타점도 무난하게 달성했다.

최종 성적은 132경기에 출장해 타율 겨우 0.317(리그 7위) 출루율 0.414(리그 5위)[10] 장타율 0.531(리그 6위) OPS 0.945(리그 3위) 88득점(리그 3위) 150안타(리그 3위)[11] 24홈런(리그 6위) 89타점(리그 6위) 78볼넷(리그 3위) WAR 5.24(리그 5위, 야수 3위). 2009년에 비해 성적이 크게 하락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호를 제외하면 리그 최고 타자 수준이었다. 이 해에도 단 1경기만 결장하며 많은 타석을 소화한 덕에 누적 종합 타격 스탯인 wRC는 홍성흔도 제치고 2위였다. 물론 1위가 압도적이어서 큰 의미는 없지만

시리즈 전적 1승 2패로 팀이 뒤지던 10월 3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0년 준플레이오프 4차전에서는 팀이 스코어 3:2로 앞선 9회초 무사 1, 2루에서 희생번트를 대야 했을 정도로 준플레이오프에서 극심한 타격 부진을 겪었다. 뒤에 나온 정수빈은 쓰리런... 뭔가 바뀐 듯한 기분
김현수는 이날 3타수 무안타를 기록했고, 팀은 9회초에만 8점을 뽑으며 스코어 11:4로 승리했다. 점수 못 뽑았으면 역전패당할 뻔...

김현수는 201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17타수 2안타 4볼넷 2득점, 타율 .118, 장타율 .176, 출루율 .286를 기록했고, 팀은 2연패 뒤 3연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에서도 부진해 선발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4차전 7회 대타로 나와 안지만의 높은 공을 때려 2타점 적시타를 만든 것 정도가 인상적인 활약. 김현수는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9타수 1안타 2볼넷 2타점 1득점, 타율&장타율 .111, 출루율 .273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김현수는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26타수 3안타 6볼넷 2타점 3득점, 타율 .115, 장타율 .154, 출루율 .281를 기록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며 대한민국의 우승에 기여하였다.


2.5. 2011 시즌[편집]



파일:올드현수.jpg

6월까지의 김현수는 한마디로 삼못쓰=삼할도 못치는 쓰레기로 요약 가능했다.

작년 6월에 비해 모든 스탯이 하락하였고 두산의 타선 침체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받았다. 타율이 3할이 안 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장타율로, 무려 1할 정도가 하락했다. 똑딱질도 안되고 2010시즌부터 선언해 왔던 거포 변신에도 완벽하게 실패한 모습이었다. 안타기계가 2땅 기계로 바꿔치기

2011시즌의 두산의 믿기지 않는 부진에 한몫을 했으며 , 2009시즌 올스타 투표에서 최다 득표를 차지한 적도 있는 그가 최형우, 박한이, 전준우에게 밀려서 올스타 출전도 불투명한 상태가 되면서 본인에게는 올해가 최악의 시즌이 되는 듯했다.

그리고 중심 타자였던 김현수까지 무너진 가운데, 김경문 감독은 사퇴를 선언하였다.

결국 감독 사퇴의 여파인지 다음 날인 6월 14일 경기에서 그간의 타격 부진을 만회하듯, 1회 말 이종욱오재원의 연속 출루로 무사 1, 3루인 상황에서 초구를 걷어 넘기는 홈런에 이은 연속 안타로 4타석 3타수 3안타 1홈런 1볼넷으로 경기 MVP 선정과 동시에 3할로 복귀하는 쾌거를 이뤘다. 프로 생활의 은인인 감독의 사퇴에 스스로도 죄책감을 느낀 듯 수훈선수 인터뷰 때 침울한 모습을 보였다.

8월 9일 SK 와이번스전에서 9회말 끝내기 안타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하필이면 심수창이 승리한 날이라서 완벽하게 묻혀버렸다. 두산팬들조차도 심수창 인터뷰를 보고 있다가 두산이 왜 이겼냐고 할 정도였다...

8월 23일까지 연일 맹타를 휘두르며, 어느새 타율도 10위권(.308로 9위)에, 타점 71점으로 5위, 4위 박석민과는 2점차에, 공동 2위인 이범호, 최형우와 6점차, 8월 중순까지 12점을 올려 50점대 후반에서 여기까지 페이스를 올렸다. 물 건너 알버트 푸홀스도 그렇고 몰아치기에 재미들렸나 보다.

9월 들어 부진에 시달리며 2할 9푼대의 타율에 머물렀지만, 10월 2일과 3일 경기에서 안타 및 홈런을 몰아치며 귀신같이 3할에 복귀하였다.

2011시즌 130경기에 출장해 타율 .301, 안타 143, 13홈런, 91타점, 출루율 .392, 장타율 .444, OPS .836을 기록했다. 타율은 겨우 3할을 맞췄지만, 홈런과 타율이 둘다 부쩍 떨어진데다 출루율마저 떨어진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이 해엔 저 급락한 OPS로도 리그 8위를 찍고 리그 야수들중 WAR 11위를 달성하는 충분히 S급으로 평가받을 활약을 펼쳤지만, 2008년, 2009년에 보여준 엄청난 활약에 비해 해마다 성적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 아쉬움을 남겼다.


2.6. 2012 시즌[편집]


시즌 초 극심한 침체에 빠진 두산 타선을 거의 홀로 이끌며 기계의 귀환을 예고하나 싶었으나 3할도 못 치고 말았다.

4월은 좋았으나 5월 이후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져가고 있는 가운데 남은 두산 타선의 마지막 자존심. 클린업 김동주최준석이 모두 부진한 가운데, 삼진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문에서 꼴찌경쟁 중인 두산 타선에서 활약하는 유일한 선수이다. 6월이 다 가는 시점에서 3할을 충분히 넘고 있는 상위권 타자이며, 팀내 타점 1위(31타점)이다.

8월 13일 기준 타율 0.315로 리그 전체 4위, 타점은 57타점으로 6위를 기록하였다. 특히 득점권 타율이 0.447로 1위. 매년 문제로 지적된 좌투수 상대 타율도 나아지는 등 상당히 좋아진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다. 예년에 비해 장타율이 0.425로 떨어진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8월 14일 넥센과의 경기에서 1회초 한현희를 상대로 솔로홈런을 쳤으나, 이날 경기가 우천취소가 되면서 오랜만에 김첨지의 면모를 과시했다.

침묵하는 팀 타선에서 손가락 부상과[12] 발목에 뼛조각이 돌아다니는 부상을 견디며 분투하였으나 결국은 3할 타율을 넘기지 못하고 정규 시즌을 마무리했다. 사실상 데뷔 시즌이었던 2007년을 제외하고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고 말았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2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전 경기에서 선발 좌익수 겸 3번타자로 출장하여 17타수 7안타 2타점 2득점 2볼넷, 타율, 장타율 .412, 출루율 .474로 예전의 '포스트시즌의 김현수'와는 다르게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정작 팀은 1승 3패로 탈락했다.[13]


2.7. 2013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현수(1988)/선수 경력/2013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8. 2014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현수(1988)/선수 경력/201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9. 2015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현수(1988)/선수 경력/2015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든 두산에서의 마지막 시즌.

개인 통산 단일시즌 최다홈런, 최다타점 기록을 경신하며 메이저리그 진출 여론에 불을 지폈다.
또한, 14년만에 팀이 2015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달성하며, 메이저리그 진출 전 두산에서의 마지막일 수도 있는[14] 이 시즌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2.10. 두산에서의 기록[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장타율
출루율
2006
두산
1
1
.000
0
0
0
0
0
0
0
.000
.000
2007
99
319
.273
87
19
3
5
32
33
5
.398
.335
2008
126
470
.357
(1위)
168
(1위)
34
(1위)
5
(3위)
9
89
(5위)
83
(4위)
13
.509
(4위)
.454
(1위)
2009
133
482
.357
(3위)
172
(1위)
31
(3위)
6
(2위)
23
104
(2위)
97
(3위)
6
.589
(3위)
.448
(3위)
2010
132
473
.317
150
(3위)
29
(4위)
0
24
89
88
(3위)
4
.531
.414
(5위)
2011
130
475
.301
143
25
(5위)
2
13
91
(3위)
71
5
.444
.392
2012
122
437
.291
127
17
1
7
65
47
6
.382
.358
2013
122
434
.302
131
23
1
16
90
(5위)
63
2
.470
.382
2014
125
463
.322
149
26
0
17
90
75
2
.488
.396
2015
141
512
.326
167
26
0
28
121
103
11
.541
.438
(4위)

2.11. FA[편집]


2015시즌 전 우승을 한다면 두산에 잔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두산은 2015년에 삼성을 꺾고 정말로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 공약으로 두산에 남겠다고 했지만 그건 시즌 전 이야기였고 본인은 현재 신중한 상태이지만 MLB의 호평도 있고 김현수 MLB 관련기사 박병호 역시 해외 진출을 했기 때문에 미국행 티켓을 끊을 것이 유력해 보인다.

프리미어 12가 끝난 후 귀국 인터뷰에서 남는다면 다른 팀은 못 갈 것 같다는 말을 해서 두산 팬들을 안심시켰다. 팀을 떠나고 싶은 게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원한다는 내용이었기에 두산팬들은 안 가면 좋겠지만 가게 되면 잘하라는 응원을 보내고 있다. 김현수가 두산 팬들에게 보내는 편지

김현수, MLB 사무국으로부터 신분조회 요청 12월 1일 MLB에서 정식으로 신분조회 요청이 들어왔다. 김현수 본인은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일단 관심이 있는 팀은 분명히 있는 듯하다.

그리고 12월 15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비트 라이터 댄 코널리의 트윗에 따르면 오리올스가 김현수에게 2년 6~8M의 오퍼를 날렸다고 한다. 같은 날 미국 '볼티모어선'은 '볼티모어가 김현수와 협상을 벌이며 2년간 연평균 300만~400만 달러 수준을 제의했다'라고 알렸다. 제의가 사실인 것으로 보여 오리올스와의 계약이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피츠버그 샌디에이고에서도 관심이 있는 듯하다. 일본의 소프트뱅크 호크스, KIA 타이거즈NC 다이노스가 FA 거취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기사도 떴다. #

그리고 12월 17일 오전 메디컬 테스트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2년 7M 노옵션 계약에 합의했다는 트윗이 떴다! 국내의 리코스포츠가 김현수의 에이전트 역할을 맡아 주도적으로 움직였는데, 김현수의 이해관계와 딱 맞는 좋은 계약을 이끌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메디컬 테스트가 끝나고 주말이 지났음에도 정식입단 발표가 나지 않아 고질적인 뼛조각 부상 때문이 아니냐는 의혹이 인터넷에 잠깐 돌기도 했다. 그러나 현지 기자의 주장에 따르면 크리스 데이비스 계약과 연동되어 늦어지는 것이라면서 이는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예전부터 저질러온 짓거리라 한다.

그리고 한국 시각으로 12월 24일 새벽 공식 입단이 발표되었다. 등번호는 25번. KBO 리그 최초로 FA를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야수이다. 배리 본즈의 번호라는 에이전시의 권유로 25번을 달았다고.[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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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7 04:59:25에 나무위키 김현수(1988)/선수 경력/두산 베어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심지어 입단 1년차인 2006년은 1군에서 단 한 경기 출전이 전부이므로, 사실상 1군 경력 2년차라고 보는게 맞다[2] 바깥쪽 아래로 절묘하게 빠져나가는 슬라이더였는데 자세가 무너지면서도 끝까지 공을 따라가 중견수 앞에 타구를 만들어냈다. 전성기 김현수의 엄청난 컨택능력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3] 물론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구리엘이 친 병살타는 6-4-3, 김현수는 4-6-3이다.[4] 심지어, 김현수의 병살타 장면에 허구연 의 아앍! 따불푸레이더블플레이! 더블플레이!" 하는 베이징 올림픽 결승전 샤우팅을 합성한 플짤마저 돌았다. 완벽한 싱크로에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문제의 영상(...) [5] ISO 0.152[6] 이 해 김태균은 절대장타율만 0.298을 찍고 OPS 1.039을 기록하며 엄청난 타격을 보여주었다. 다만 파크팩터 고려 시 wOBA가 김현수보다 낮고 잔부상으로 인해 경기를 자주 걸러서 누적스탯인 WAR, wRC 등에서는 김현수에 밀렸다.[7] 사실 김현수의 첫 1군 풀타임 시즌은 2007년으로 2008년이 소포모어인 셈이다. 하지만 이 시즌 수위타자를 먹었다.[8] 김상현의 스탯은 겉보기에는 김현수보다 좋아 보여도, 실제로는 12경기 덜 출전한 데다 규정타석 타자 중 삼진 7위, BB/K 비율이 뒤에서 3위일 정도로 삼진을 수도 없이 당해서 생산성이 낮았다. 홈런을 36개 친 덕에 장타율은 리그 1위를 찍었지만, 출루율, 장타율 모두 3위를 기록한 김현수와 달리 김상현은 0.379로 리그 19위를 기록해 합산인 OPS는 더 낮았다. 장타율이 OPS처럼 과대평가되지 않는 wOBA, wRC 등을 사용하면 아예 리그 6위, 7위 수준으로 내려간다. 물론 이 성적도 휼륭한 성적이긴 하나 리그 MVP급 수준은 절대 아니며, 제대로 평가되었다면 MVP는 커녕 3루수 골든글러브도 김동주에게 빼앗겼을 것이다.[9] 5월 2할대 후반 타율을 기록할 때는 확실히 부진하다 할 만하기는 했다. 그러나 9월에 맹타를 치며 준수한 평균 성적을 기록.[10] 2010시즌 출루율 5걸 중에서 유일하게 BB/K 비율이 1.2를 넘어간다.(BB/K 1.31)[11] 이로써 3년 연속으로 150안타 이상을 쳤다. 이는 1999~2001년의 이병규, 2001~2003년의 장성호에 이어 역대 세 번째다.[12] 당시 손가락 통증 탓에 네 손가락만으로 타격한다는 기사가 나왔다.[13] 미디어데이에서는 3전 전승에 세 경기 모두 완봉승이 될거라고 예상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게 다 홍삼작가커피고자 때문이다[14] 이 말은 사실이 되었다. 2017시즌이 끝나고 KBO 복귀를 타진할 시점에 친정팀 두산 구단이 모기업의 자금난으로 인해 프런트와 팬들 모두 복귀를 바랬으나 김현수에게 오퍼를 하지 못하고, 단독 오퍼한 LG로 이적하게 되면서 두산에서의 마지막 시즌이 되어버렸다.[15] 참고로 이 당시 25번을 달고 활약했던 거포로는 배리 본즈뿐만 아니라 마크 맥과이어, 라파엘 팔메이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문제는 셋 다 도핑 전적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 번호를 단 선수 중에는 짐 토미마크 테세이라앤드류 존스도 있었던 만큼 완전히 약물로 더럽혀진 번호는 아니다. 결정적으로, 이 번호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영구 결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