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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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야신(野神)?
2.2. 인천예수
2.4. 킬성근
2.5. 그 외



1. 개요[편집]


김성근의 별명을 담은 문서입니다.

2. 상세[편집]



2.1. 야신(野神)?[편집]


기자: 2002년 한국시리즈 직후 김성근 감독을 '야신'으로 치켜세웠지요. 지금도 '야신'이라는 칭찬이 유효한가요.

김응용 감독: 솔직히 얘기하자면, 승자는 패자를 보다듬어 줘야하잖아요. 그게 예의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이겼다, 그러면 죽은 사람 한 번 더 죽이는 거잖아.

- [김응용 감독 인터뷰] "야신 김성근? 패자 배려차원에서 한 말"


"야, 이게 말이야 내(김응용)가 야신이라고 그러면 사람들이 야구 신이다 그럴 것 아니냐. 그러면 그 사람(김성근)을 이긴 나는 뭐가 되냐. 나는 사실 그걸 노리고 한 말인데 성근이만 야신으로 떴어. 나는 뜨지 못하고" 그러고는 막 웃더라고요

- 하일성


'야구의 신' 혹은 줄여서 '야신'이라는 별칭은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응용 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우승소감 중 "LG 김성근 감독이 워낙 잘했어요 '신이 아닌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라고 한 발언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은 전해 들은 김성근 감독은 이 발언에 대해 "내가 신이면 나를 이긴 자기는 뭐가 되는 것이냐"라면서 웃어넘겼다.

김응용 감독은 이런 방식의 언론 플레이를 자주 했다. 강하면 비하하고, 약하면 과장하는 등. 김응용의 야신 발언은 우승한 후에 나왔기 때문에 상대를 띄워서 자신을 더 높이는 김응용 특유의 화술로 이해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립서비스.

KBS N sports의 '한국야구 레전드'에서 김응용 감독이 회상하기를 '신도 여러가지 신이 있다'면서 농담을 했다. 설마... 같은 다큐에서 김성근도 '내가 야신이면 자기는 우승했으니까 더 위 아니냐?'라고 인터뷰했다. 링크

김성근 감독은 포스트 시즌에서 김응용 감독과 맞붙어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태클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김성근이 1997년까지 해태 감독이었으면 10번 넘게도 우승했을거다' 내지는 '우승 많이 했다고 뛰어난 감독이면 김재박이 김성근보다 뛰어난 감독이냐', 심지어는 '약팀에 간 적 없는 김재박에 불과한 주제에 건방이 하늘을 찌른다' 등의 비아냥이 다수. 이러한 비아냥은 대개 김응용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는데다 1998~2000년의 해태 성적에서 기인한다. 마침 김성근이 쌍방울 레이더스를 이끌고 돌풍을 일으켜서 하위팀에 기적을 가져오는 명장 이미지를 굳힌 시기가 1990년대 중반이기 때문에 시기가 미묘하게 이어져서 대비된 효과도 있다.[1]

단기적으로는 팀 성적을 잠깐 끌어올리는 김성근이 돋보일지는 모르나 그가 맡은 팀마다 혹사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또 실제로 많은 선수들이 부상으로 신음하기도 했으며(주로 불펜 투수들, 신윤호, 김현욱, 전병두, 이동현, 그외 SK 왕조가 끝난 후에 여러 투수들 등등) 그로 인해 SK 시절을 제외하곤 오랫동안 왕조 건설을 못한 것을 생각한다면 긴 시간 동안의 리그 운용능력은 김성근보다 해태 왕조를 건설한 김응용 감독이 훨씬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해태가 가난한 구단인것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김응용의 전성기에는 김응용이 훨씬 뛰어난 감독이다. 해태 타이거즈의 가난은 해태 타이거즈 참조하면 된다.

감독에서 은퇴하고 삼성구단 사장에 취임한 김응용은 인터뷰에서 아직 현역으로 2연패를 이룬 김성근과 김응용 본인의 감독 현역 시절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에 자신이 소속팀을 10번 우승시키는 동안 김성근은 우승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즉 야신 발언은 승자의 관용이자 호적수에 대한 립서비스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김응용은 라이벌 의식이 있는 기업인 삼성그룹LG그룹한국시리즈에서 진 감독은 대부분 경질되는 것을 잘 알기에 김성근이 시리즈 후 경질될 것이고 나이가 60이 넘은 그가 다시 프로야구 1군 감독으로 복귀하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2] 따라서 젊어서부터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경쟁해오며 40년 세월 야구계에서 함께 지냈었던 동년배 경쟁자에게 진심어린 마지막 예우를 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그래서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그의 입에서도 적장을 '야구의 신'이라 부르는 최고의 예우가 나왔을 것이다. 보통 김성근을 지지하는 이들은 인천야구팬, 쌍방울, SK, LG 팬들인 경우가 많고 김응용을 지지하는 이들은 해태팬, 삼성팬들이 많기 때문에 이 문서와 김응용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서로의 지지자들은 사이가 매우 나쁘지만, 정작 본인들의 사이는 그런대로 양호한 편이며 프로야구판의 이슈에 대해서도 같은 의견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야신은 다시는 프로야구 감독을 못 맡으리라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2006년 SK 감독으로 복귀하고 야신의 명성을 굳혀나가게 된다. 그리고 김응룡도 2013년 한화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했다. 그리고 나란히 한화에서 흑역사를 썼다.

야신이라는 명칭 때문에 야신상의 모델이자 전설적인 골키퍼 레프 야신과 헷갈려 하는 사람이 있다. 2회 WBC에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김인식을 어떻게든 도와주겠다는 김성근 감독과, 김인식 감독이 같이 인터뷰를 했었는데, 도중에 야신이 김인식을 도와준다면 두려울 게 없다는 프레이즈가 등장했었다. 그러자 왜 축구 선수가 우리 김인식 감독을 도와주냐는 질문이 나와서 인터뷰 장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고, 김성근도 웃으면서 이러니까 야신이라고 좀 부르지 말라고 했다는 것. 그러나 SK를 맡은 뒤 보여준 엄청난 성과와 나이를 초월한 김성근의 언행 덕분에, 야신이라는 별명은 립서비스가 아니라 김성근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만큼 김성근을 상징하는 별칭으로 굳어졌다.

여담으로 야신의 유래를 다르게 해석하는 관점도 있다. 백종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이 2014년 11월 3일 스포탈코리아에 쓴 '(야구는 구라다2) 야신의 평생 열등감 - 김응용'에 나와 있다. 기사 말미 '에필로그 - 야신의 유래'를 보면 김응룡 감독이 김성근 감독을 야신이라고 한 것은 김성근 감독이 하도 작전이 많고, 변화가 심하니까 못마땅해서 비꼬아 한 소리라고 한다. 다만 그 칼럼의 전반적 내용은 김성근 감독을 높게 평가하는 내용이므로 백종인 칼럼니스트가 김성근 감독을 격하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니다. 스포탈코리아

참고로 백종인과 그가 쓰는 '야구는 구라다2' 자체도 2014년 잭 그레인키가 '개막전 호주에서 하기 싫다' 는 발언 이후 부상으로 가지 못하게 되자 잭 그레인키와 함께 커쇼를 묶어서 '야비한 놈들, 얍삽한 놈들' 이라 비하하고 류현진을 '우리 귀염둥이' '야비한 놈들이 꾀 쓰는 사이에 묵묵하게 일만하다 다칠까 걱정' 이라 하는 등 상태가 영 좋지 않은 칼럼이다.

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기 전에는 SK 와이번스 시절의 좋은 성적과 함께 언론과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좋은 이미지 매우 자주 불리던 별명이었고 2015시즌 중반까지도 자주 그렇게 불렸으나, 시즌 후반부터 보여진 독선적 운영과 투수 혹사논란이 불거진 이후로는 거의 불리지 않는 별명이 되어버렸다. 그 대신 킬성근, 곡성근[3] 등으로 불리는 경향이 매우 많아졌다.

2015년 한화 시절 이후에도 야신이라고 쓰이긴 하나, 지금 다시 이 별명을 돌아보면 그저 허상일 뿐이었다. 오히려 비꼬는 말로 변질되었고, 구는 쥐뿔도 모르는 병 혹은 바위의 처럼 노골적인 멸칭까지 나왔다.


2.2. 인천예수[편집]


SK 감독 시절 김성근에게는 인천예수라는 별명이 있었다.

사실 호의적인 뜻에서 시작된 별명은 아니다. SK 감독 시절 김성근은 온갖 비매너 플레이로 타팀팬들의 비난을 수시로 받았는데, SK갤러들이 김성근에 대한 비판에 대해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일방적으로 김성근을 찬양하자, 이를 혐오하는 타팀 팬들이 SK 와이번스 갤러리를 중세갤이라 부르고 김성근을 예수라며 비꼬면서 생긴 별명이었던 것. 애당초 인천예수라는 말을 처음 만든 것도 SK갤러들과 싸우던 두산 팬이다.

그러나 태평양 시절을 기억하는 올드 인천팬들에게는 김성근이라는 인물 자체의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에 예수라는 별명 또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컸고, 최근에는 오히려 SK 팬들이 앞장서서 인천예수라는 말을 사용하며 김성근 감독 팬질부흥의 새 역사를 쓰고 있으니 아이러니. 그 때문에 만수성님은 유다만수로...

그런데 올드 인천팬들에게 김성근의 이미지가 좋다는 김성근 감독팬들의 주장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반론이 있다. 태평양 감독 시절 김성근은 태평양과 남아있는 계약을 파기하고 삼성으로 가기 위해 임호균 각서 파동까지 일으켜 가며 프런트와 마찰을 빚었고, 경질된지 며칠만에 삼성 감독으로 선임되었기 때문에 인천 올드팬인 도원아재들은 김성근에게 배신감과 환멸을 느끼고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김광현결혼식 때 한 말이 많은 칭송을 받았다. 그가 한 말은 포기하지 마라. 이 위기를 넘겨야 진짜 강해지는 것이다. 괴로워하지 말라. 나중에 그들이 무릎꿇게 만들면 된다.

이러한 발언과 모순되게 김광현에게 147구 벌투를 시켰다(2011년 6월 22일). 이 날 김광현의 성적은 8이닝 147구 13피안타 8실점. 팀 에이스를 자기 입맛에 맞게 만들기 위해서 혹사도 마다하지 않는, 징벌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행위였다. 현대야구의 흐름을 거스르는 이러한 지도방법에 힘입어 이 해 김광현은 74이닝을 소화하는 데 그쳤다. 물론, 전후관계[4]를 따져봤을 때 무조건 이 것 하나만으로 악화되었다고 탓하기는 힘들지만, 에이스에게 147구를 던지며 완투패를 시켰다는 상징성 때문에 이 사건이 많이 언급된다. 애초에 그런 상태의 선수한테 실전에서 147구를 던지게 한 자체가 문제인 건 분명한 사실이기도 하고. 이후에 상술된 주례사를 비롯해 지금까지도 종종 연락한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김광현 선수 개인에게 앙금은 없을 것으로 보이나, 이러한 사례들이 야구팬들에게 모순된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김성근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인천예수란 별명은 더 이상 쓰지 않기 때문에 사장된 별명이라 봐도 무방하다. 대전예수


2.3. 가네바야시 세이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세이콘 드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재일교포 시절 김성근 감독의 일본 이름.


2.4. 킬성근[편집]


감독 생활 중 하도 굴려 선수 생활이 힘들어지거나 다시는 야구를 할 수 없게 된 선수가 많아 붙여진 별명이다. 다음은 그 동안 김성근 감독이 혹사시킨 선수들 목록이다.

OB 베어스
  • 박철순: 김영덕 감독 시절 OB의 투수 운용을 책임졌던 이는 김성근이었다. 같은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과 김성근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5] OB 베어스 창단 당시 일본통이었던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은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과 김성근을 각각 코칭 스태프로 영입했다. 박용곤 회장이 김성근을 과묵하고 사실은 한국말을 잘 못해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면서 매우 아꼈기 때문에 김영덕 감독도 김성근 코치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김성근은 OB에서 투수 운용을 책임지게 되었다. 한번은 김영덕이 김성근이 올린 투수를 교체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김성근이 곧바로 가방을 싸들고 나간 것은 당시 매우 유명한 일화다. 박철순의 혹사에 관해서는 김영덕 감독이 거의 욕을 먹고 있지만 사실 박철순의 혹사의 진정한 책임자는 투수 운용권을 쥐고 있었던 김성근이었다. 김성근은 허리 부상을 달고 다니던 박철순을 거의 2경기에 한번꼴로 등판시켰다. 박철순은 원년에 총 80경기 중 36경기(선발 19경기)에 출장하여 224.2(2위)이닝을 던지게 했다.[6]그해 박철순은 24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1.84, WHIP 0.97이라는 괴물같은 성적을 올렸지만 시즌이 끝나고 허리디스크가 악화되어 1983년 0승, 1984년 0승, 1985년 1승, 1986년 5승, 1987년 2승, 1988년 0승, 1989년 1승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이어간다.

  • 윤석환: 잘 알려지지 않은 최악의 피해자 중 하나. 1984년도에 1군 데뷔를 했다. 김성근 감독이 OB감독을 맡은 1984년부터 88년까지 5년간 마무리투수의 자리에서 540이닝 이상을 던졌다. 공교롭게도 김성근이 OB 감독을 맡은 첫 해와 마지막 해에 각각 심한 혹사를 당했다. 데뷔 첫 해인 1984년에 57경기에 등판, 146이닝이나 던질 정도로 워낙 혹사당했기에 이후로는 신인 때만큼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1984년의 팀당 경기수는 100경기였다. 1988년 다시 마무리 투수로서 13승(모두 구원승), 14세이브을 올려 구원왕이 되었다. 이후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져 몇 년 못 가, 1991년에 8년간의 짧은 선수생활을 마치고 은퇴하게 된다. 다행히도 은퇴 이후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태평양 돌핀스
  • 박정현: 김성근 감독 밑에서 89년도 242.2이닝을 던지고[7] 이듬해 191.1이닝을 던진 후 끝없는 재활을 반복하다가 1999년 다시 한번 김성근 밑에서 선발, 구원 다 나와서 124이닝씩 굴려졌고 결국 2000년 은퇴한다.

  • 최창호: 박정현보다는 조금 못했지만 2년 연속 200이닝을 찍을 뻔했다.

  • 정명원: 역시 신인시절 전천후로 굴려지다가 1990년 부상을 당했다. 이듬해 복귀하지만 다시 부상 재발, 이 역시 김성근의 지분이 상당하다. [8] 이후 1994년 마무리로 전향하면서 재기에 성공, 2000년 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삼성 라이온즈
  • 김성길: 1991시즌 삼성에서 마무리로 전향한 후 김성근 감독을 만나 선발포함 52경기 188이닝을 던졌고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살벌하게 혹사당해 김성길이 죽는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왔으며, 밥숟가락 들 힘도 없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1992년에 당연히 부진했고 1993시즌 끝나고 은퇴했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주유소 직원, 택시 기사 등을 전전했다고.

쌍방울 레이더스
  • 김현욱 : 전무후무한 구원 20승. 이후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후에도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2004년 부상으로 시즌아웃 된 후 재활에 실패.[9] 36살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로 은퇴했다.[10]

  • 최정환: 1996년쌍방울에 입단한 투수로 1997시즌에 50경기에 나와서 108이닝을 던졌다. 결국 쌍방울의 해체와 동시에 소리없이 은퇴했다.

LG 트윈스
  • 신윤호: 2001시즌 김성근 감독 대행의 지도 아래 70경기 144.1이닝을 던져 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활약을 보였으나.[11] 다음해 바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명백한 혹사지만 본인은 어쨌든 자신을 주목받게, 돈 벌게 해준 스승으로 김성근 감독을 존경하고 있으며 기량쇠퇴는 본인의 관리 책임이라 말했다.[12]

  • 이동현: 2001시즌에 고졸로 입단해 선발 로테이션을 돌며 가능성을 보였지만 2002시즌 불펜으로 전향, 무려 78경기 124.2이닝을 던지는 등 133이닝을 던진 2009년의 전병두, 2015년 112이닝을 던진 권혁을 뛰어넘는 혹사를 당했고 보너스로 포스트시즌까지 준출근 상태로 뛰었다.[13] 물론 이동현의 경우는 부상 상태에서 당겨쓰려고 했던 이순철의 지분도 큰지라.[14] 순수하게 김성근이 박살냈다는 평은 적지만 당시의 등판기록을 보면 절대로 옹호할수 없는 지독한 혹사로 망가져 길고 긴 재활을 거쳐 2009 시즌에야 복귀할 수 있었다.

  • 장문석: 신윤호와 이동현의 압도적인 혹사포스에 짓눌리는 감은 있지만 장문석도 2002시즌에 101.2이닝을 던지는 범상치 않은 혹사를 당했고, 1점대 방어율에 10승까지 한 것은 덤이다. 그 때문인지 2003년부터 내리막길을 걸었고, 2009년 KIA에서 은퇴한다.

  • 김민기: 김민기름이라는 별명이 있던 방화신기의 일원으로 2001년에 45경기 108이닝 방어율 5.08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2002년에는 선발로 뛰며 99이닝을 던졌다.[15] 그렇게 거의 2년연속으로 100이닝씩 소화한 결과 2년 동안 잠잠하다가 2005년에는 8점대 방어율을 찍기도 했으며, 2006년에는 그나마 좋은 성과를 올렸다.[16] 2007년에 69경기에 등판해서 88이닝을 소화한 결과 완전히 퍼져서 2010 시즌 중 은퇴하게 된다.

  • 이상훈: 김성근이 폐급 선수를 잘 쓴다는 주장에 대한 완벽한 반례. 이미 데뷔시즌인 1993년 150이닝에 3점대 평균자책점으로 혜성같이 LG 선발진에 등장한뒤 1994년 18승, 1995년 20승으로 2년 연속 다승왕을 먹고 [17]한일 슈퍼게임까지 나간다. 이 혹사의 여파로 발병한 혈행장애때문에 1996년 중반부터 마무리로 투입돼서 41경기 99이닝, 1997년 57경기 85이닝으로 혹사당했다. 이상훈이 LG에서 뛰던 시기는 LG의 최전성기로 포스트시즌에마저 등판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덤으로 일본 진출 2년차인 1999년에도 95이닝을 던지며 마구잡이로 굴렀다. 커리어자체가 혹사로 점철된 투수를 미국에서 복귀한 2002년 5월부터 스프링캠프 없이 다시 마무리로 나서기 시작해서 정규시즌에만 52경기 82이닝 18세이브를 거두었다. 그 뒤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에도 장문석, 이동현과 함께 출첵야구를 했고 한국시리즈도 매일같이 등판한다.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6차전 9대6의 상황에서이승엽의 동점 쓰리런이 터지고 강판. 이 해를 마지막으로 LG는 10년동안 가을야구를 못 가고 15년[18]째 한국시리즈를 못 가고 있다.

SK 와이번스
  • 채병용: 2000년대 후반기에서 이승호를 이은 SK의 2대 에이스라고 찬양받을 정도로 리즈 시절을 보냈으나 2009년 팔꿈치 부상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과 한국시리즈에서 롱릴리프로 무리하게 던진 결과 아직까지도 예전 구위를 보여주지 못한채 현재까지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있다.[19]

  • 전병두: 킬성근하면 떠오르는 대표 선수. 2011년 부상 이후 혹사 여파로 5년간 재활만 하다가 32세의 나이에 은퇴하게 되었다. 해당 문서 참조.

  • 이승호: 신인 시절부터 강병철 감독에게 미친듯이 굴려졌고, 재기에 성공한 SK 왕조 시절 역시 김성근 감독에 의해 필승조 및 마무리로 굴려졌다.결국 롯데를 거쳐 NC로 이적 후 1군에 거의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16시즌 후 은퇴했다.

  • 김광현 : 김성근이 벌떼 야구를 실현했던 SK에서 유일하게 고정으로 나오는 선발이었기에, 경기당 이닝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20], 프론트라인 선발투수를 최대한 많이 사용하기 위해 3~4일 휴식후 등판으로 풀타임을 뛰었다. 경기당 이닝이 상대적으로 적어보여도 시즌 끝나고 이닝 순위가 높았던데에는 이유가 있던 것. 2009년에는 전반기만 뛰고도 규정이닝을 채우는 기행을 보여줬을정도. 당시, 풀타임을 뛰었다면 203이닝 페이스였으니 차라리 시즌 아웃당한게 다행이라는 말이 웃어넘길게 아니다. 2010년에는 팔꿈치가 부어오르는 증세로 인해 시즌을 조금 늦게 시작했고, 중간에 2군으로 한번 내려갔음에도 최다이닝 1위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기어코 문제가 터졌다. 2011년 가뜩이나 2010년에 200이닝[21] 가까이 소화해서 휴식이 필요했는데, 뇌경색으로 인해 휴식도 제대로 못취하고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146구 벌투를 던진 뒤 어깨부상이 심해져 재활에만 매진하다가 2012년 중반 돌아와 괜찮은 모습을 보이고는 있으나 부상 이전 최전성기를 달리던 시절에 비해서는 조금 아쉬운 모습을 보이다가 2017년 토미존 수술을 받은뒤 2019년이 되어서야 기어코 전성기 기량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고양 원더스

한화 이글스
  • 살려조 : 2015년 김성근 감독 휘하의 한화 이글스에서 나온 역대급 혹사 계투진. 흔히 알려진 5명의 투수를 포함[22], 번외까지 약 11명의 투수가 전천후로 굴려졌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


  • 김민우 : 2015년 한화에 입단한 뒤 마구 굴려지고[23] 그 다음 2016시즌 제 상태의 몸이 아닌 상태로 5게임만 뛰고 2군에 내려간 후 7월까지 소식이 없다가 8월 22일 엠스플 뉴스에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어깨 관절와순 손상'이 심각하다고 한다. 입단전 토미 존까지 받은 상태여서 잘 관리하며 등판시켰어야 했는데 감독의 그놈의 커리어 욕심으로 인해 망가져서 앞으로 제대로 회복할 기약이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김민우 본인이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현시점에선 매우 암울해 보인 줄 알았으나 2020년부터 팬들의 기대를 부흥하기 시작하면서 정우람을 이은 김성근식 혹사에서 살아남은 두번째 투수가 되었다.

  • 권혁 : 김성근의 최대 죄악. 한화의 살림꾼이자 살려조 리더 권혁은 이적 후 거의 노예에 가까운 투구를 이어나갔다. 4연속 등판은 물론 지든 이기든 무조건 권혁이 올라왔다. 권혁은 2015년부터 2년 사이 무려 144경기를 등판해 207⅓이닝 3752구를 던졌다. 웬만한 선발투수가 아닌 최정상급 투수도 기록하기 힘든 이닝과 투구수를 무려 불펜투수로 소화하였고 금강불괴 같았던 권혁은 부상으로 무너졌다. 팔꿈치 통증으로 2016시즌 8월 24일 1군 말소가 되어버렸다. 한화팬 포함 전구단 팬들이 김성근을 맹비난한건 덤.

곽동호 객원필진이 야구리포트(KBReport)에 기고한 글에 전반적인 김성근 감독의 투수 혹사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다. 참고로 여기에서는 정우람을 김성근에게 혹사당한 투수들 중 현재 제 기량을 발휘하며 금전적 성공을 거둔 유일한 케이스라고 하고 있다.(한화 투수들은 2016년이 되어야 기량 저하 여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제외) 2015년 12월 20일 네이버-케이비리포트 '(프로야구) 야신의 그림자 혹사논란 연대기'

여담으로 류중일하고 늘 비교되고 있다. 첫번째 베플을 보자.


2.5. 그 외[편집]




  • SK 왕조 시절, SK 갤러들은 송도큰형이라는 별명을 많이 썼다.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해서 '인천 할아버지'[24]는 별명이 어떠냐 묻자, '인천 사는 건 맞는데 할아버지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본인은 아직 젊다고 생각하며 손자도 없는데 할아버지, 노인 이런 말 싫다고. 감독으로서의 자기 철학과도 관계가 있다고 밝혔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오냐오냐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을 훈육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선수들은 자기 자식들과 다름없는 존재이기에 할아버지가 아닌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25] 이에 이기광이 '인천 큰형'이라고 하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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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 [26]
  • KBS에서 SK 2군 선수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할 때 후드티청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등장, 예미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실제로 사적인 자리에서의 패션을 보면 여든을 앞둔 춘추라고는 볼 수 없을만큼 젊은 패션감각을 보여주기도 한다.[27] 심지어, 자기관리도 매우 철저하기에 이 패션이 더 두드러진다.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은 아니지만, 그 흔한 똥배 하나 없을 정도. 춘추를 감안하면 확실히 탄탄한 편이다. 아무리 운동선수였다고는 하지만 여든이 다되어가는 고령인데도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를 하루에 100개 이상씩 하고, 식단관리도 하며, 한화시절에도 선수들이 받을 수준의 펑고를 직접 치는건 보통 관리로는 불가능하다.

  • 한화에서 와서 100kg가 넘는 한화 선수들의 살을 엄청나게 뺐고 새로 트레이드한 허도환에 대해서도 곧바로 체중 감량을 지시해 야구계의 숀리, 긴숀근이라는 드립이 터져나왔다. 한때는 김태균이 살빼서 포텐이 다시 터진거라는 해석이 나왔으나 현재는 김태균이 늘 그렇듯이 후반기 체력이 부치는 모습을 보이고 넥센의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이 재조명 받으면서 구시대의 잔재임이 드러났다.

  • 야구 내적으로는 이런저런 구설수가 많으나, 팬 서비스는 좋은 편이다. SK 와이번스 구단에 지금도 있는 팬서비스 거절시 벌금이라는 규정을 만든 게 김성근. 여튼 이래저래 잡음은 많아도 팬 서비스 하나는 끝내줬다고. 아직 팬 서비스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 훌륭한 팬서비스는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선수한테도 야구 외적인 부분에선 평이 좋은 편인데, 특히 김광현 결혼 당시의 주례와 선수협 사태에서의 도움 등이 있다. 그래서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야구계에서 유독 감독의 열렬한 팬이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1] 다만, 1999~2000년의 해태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1998년에는 피타고리안 승률로는 쌍방울(0.471)에게 뒤지던 해태(0.463)가 6위 쌍방울보다 4위 OB에 가까운 5위를 기록했다. 당시 해태는 이종범을 비롯하여 이순철, 조계현이 빠져나갔고 쌍방울은 박경완이 시즌 시작 전, 조규제가 7월에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되었다.[2] 실제로 김응용 본인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했다.[3] 유래는 해당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 출신 외지인에서 왔으며, 김성근 감독이 재일교포 출신이라는 점과 투수 혹사를 비롯한 독불장군식 운영으로 인해 팀이 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해서 붙은 별명이다.[4] 일단, 인터뷰상으로는 뇌경색 문제로 인한 안면마비와 전반적으로 몸이 뻣뻣해진 상태였기에 힘을 빼고 던지는 걸 체화하라는 의미였다고는 한다. 단순 투구연습 개념으로 살펴보면 틀린말이 아니긴 하다. 문제는 실전과 연습은 어떻게 해서든 주는 힘의 차이가 다를수 밖에 없고, 그에 따른 부하도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이후 김광현을 올시즌 1군에 안올리겠다는 뉘앙스까지 말했다. 이 이후에, 부상이 악화된데에는 김성근의 과와는 별개로 후임인 이만수 감독이 회복이 덜된 김광현을 포스트시즌에 무리하게 당겨쓴 것도 컸다.[5] 특히 1978년 청소년 국가대표팀 감독과 코치였을 때 서로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6] 이게 어느 정도의 혹사인지 감이 안잡힌다면, 이해 일본프로야구에서조차 박철순보다 더 많은 이닝을 던진 선수는 키타벳푸 마나부(히로시마, 26경기 267.1이닝), 에가와 스구루(요미우리, 31경기 263.1이닝) 니시모토 다카시(요미우리, 37경기 262이닝), 오바나 타카오(야쿠르트, 42경기 246이닝), 엔도 카즈히코(타이요, 38시합 221.1이닝)의 5명뿐이었고, 게다가 이 투수들은 대부분의 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뛰었다.(키타벳푸 35시합, 에가와 31시합, 니시모토 33시합, 오바나 32시합, 엔도 34시합) 비록 혹사긴 해도 박철순처럼 확고히 정해진 보직 없이 마구잡이로 굴린 건 아니었고 오히려 어느 정도 이닝 이터로 봐줄 만한 면모가 있었다. 근데 왜 전부 세리그[7] 데뷔 2년차이자 풀타임 1년차였고, 또한 아직 신인왕의 자격도 갖고 있었다. 이 시즌 혹사로 인해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했고 신인상을 받았다.[8] 사실 최창호, 정명원은 후임 감독 박영길의 책임도 있긴 하다.[9] 1997년 시즌이 끝나고 무릎 수술을 하였는데 재활이 되기도 전에 다음해부터 다시 굴려져, 이 무릎 부상은 김현욱의 커리어 내내 따라다니게 되었다.[10] 다만 김성근 감독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는 게,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서정환, 김응용도 무지막지하게 굴렸다. 세감독의 합작품이라고 보면 될듯.[11] 2할7푼 대의 홈런왕인 이승엽을 누르고 정규시즌 MVP도 수상할 뻔했다.[12] 사실 혹사에 둔감한 게 꼭 감독에게만 해당되는 법은 없다. 더군다나 신윤호는 김성근 감독을 만나기 이전엔 상황이 워낙 안 좋았고, 김성근 때 비로소 빛을 본 케이스다.[13] 2002년 이동현은 132경기 체제에서 124.2이닝을, 2009년 전병두는 133경기 체제에서 133이닝을, 2015년 권혁은 144경기 체제에서 112이닝을 던졌다. 전병두의 경우에는 SK가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포스트시즌 엔트리에서는 제외되며 그대로 시즌 마감, 권혁의 경우에는 팀이 아예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동현은 정규리그에서만 124.2이닝을 던지고 당시 4위로 시즌을 마쳐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갔던 LG에서 준PO-PO-한국시리즈까지 거의 출근도장을 찍을 정도로 나온 탓인지 전병두, 권혁보다도 더많이 굴려진 셈.[14] 이 당시 순페가 남긴 명언이 '재활은 마운드에서 하면 된다'.이며, 결국 이동현은 같은 시기 병역비리와 3번의 수술이 겹쳐서 재활기간도 길어졌다. 그나마 이동현이 제 기량을 찾은 것은 2010년의 일이다.[15] 방어율이 3.18이며 22경기 7승 5패[16] 2006시즌은 김민기, 진필중이 3점대 방어율을 찍고 심수창이 10승을 거두는 등 LG 투수진이 이상하게도 생각보다 잘 굴러갔다. 당시 LG 성적은 최하위. 하지만 2006년의 경우 프로야구 역사상 유례없는 투고타저 시즌이었다는걸 감안해야 한다.[17] 특히 1995년엔 시즌 후반기에 김태원의 부진을 메꿀 생각을 안 하고 이상훈-정삼흠-김기범-박철홍의 4인 로테로 돌렸다. 당연히 당대 최고의 이닝이터인 이상훈이 그 짐의 대부분을 떠맡았다.[18] 2017시즌 기준[19] 사실 채병용의 경우에는 전임 감독들이었던 강병철-조범현 시절에도 전천후로 굴려졌던 경력도 있고 수술까지 받은 적 있던 선수였다. 그런 선수를 관리도 못해줄망정 다시 굴렸으니...[20] 류현진에 비해 적었다는 것이지 경기당 평균 6이닝을 먹어주는 에이스 요건에 부합하는 투수였다. 류현진이 경기당 7이닝을 먹는 괴물이었을뿐.[21] 정규 191이닝+한국시리즈 6이닝.[22] 권혁, 박정진, 윤규진, 송창식, 김민우[23] 굴려진 걸로 끝이 아니라 그 사이에 특투까지 했다고 한다.[24] 상술한 '인천예수'가 어느 정도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던 만큼 방송용으로 순화한 것으로 보인다.[25] 이 점에 있어서 또 정반대인게 김응용인데, 김응용은 기본적으로 훈육하는 아버지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선수들의 사생활은 앞가림만 잘한다면 적당히 못 본 체하면서 뒤에서 지켜보는 할아버지 타입이다. 각각 일장일단이 있는 타입.[26] 2011년 5월 15일 방영된 다큐멘터리 3일 <나는 프로다 - 프로야구 2군 선수단>에서의 한 장면. 이 방송을 실시간으로 보던 야구 커뮤니티들은 저 장면에서 전부 다 빵 터졌다.[27] 실제로는 60이 넘기 전까지는 일반적인 중년 노년 아저씨들처럼 입고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선수들이 훈련하러 올 때 사복으로 청바지를 입고 들어오는 것도 금지했다고 한다. 환갑이 넘은 뒤에야 일상생활에서 청바지를 입어보고 편하다는 것을 느껴서 청바지를 자주 입게 되었다고 한다. 패션잡지도 틈틈히 보면서 연구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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