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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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황
3. 가정 전투 이전의 전황
3.1. 가정 전투
3.2. 가정의 위치
3.3. 가정 전투의 중요성
4. 마속의 실패
5. 정리 - 마속은 왜 실패했나?
6. 공성계를 사용했다는 주장
7. 창작물에서
7.1. 삼국지연의




1. 개요[편집]


서기 228년[1]제갈량1차 북벌 중 가정에서 군과 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본 문서에서는 1차 북벌 전체를 서술한다.



2. 전황[편집]


가정 전투
街亭之戰

시기
228년
장소
옹주(雍州) 광위군(廣魏郡) 약양도(略陽道)
가정(街亭)
원인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핵심 요충지 가정을 두고 벌인 전투
교전
촉한(蜀漢)
위(魏)
황제
황제 유선
황제 조예
지휘관
마속(면죽현령·성도현령·월수태수·참군)
장합(우장군[2])
장수
왕평(아문장·비장군)
이성(장군)
장휴(장군)
황습(장군)
불명
병력
불명
5만
피해
왕평의 별군 1,000명을 제외하고 궤멸
불명
결과
촉한의 가정 방어 실패
영향
제갈량의 1차 북벌 실패, 군법에 따라 마속 처형



3. 가정 전투 이전의 전황[편집]


226년 조비가 사망하고 조예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위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촉한의 승상 제갈량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227년에 그 유명한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을 개시한다. 제갈량이 5년간 뼈빠지게 육성한 촉군의 규모는 생각 외로 상당했던 듯한데 후주전 주석 제갈량집에 실린 유선의 하조인 '벌위조'에서는 북벌군의 규모를 20만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한진춘추에도 제갈량이 언급하길 이 지역에서 촉군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각각 유선과 제갈량 본인의 언급인 데다 위략에도 당시 관중-농서 지방에는 촉군에 대한 방비가 거의 되어있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력상 촉군이 우위에 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거기에 벌위조에서는 양주의 여러 국왕들이 군대를 파견해 도왔다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말한 국왕들이란 씨족장들로서 훗날까지 위나라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힌 촉한과 이 지역 이민족인 강족과의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실제로 곽회가 이후 촉의 북벌에 호응하던 농서의 강족들을 격파한 사례가 있다.

이어서 228년 봄,[3] 미리 촉군 전체가 기곡으로 진출한다는 헛소문을 낸 이후 조운이 별동대를 이끌고 기곡으로 진출한다. 조운이 장안 등 옹주의 동쪽을 노리는 움직임을 취하자 옹주군 중 주력을 이끌던 조진의 본대가 즉각 조예의 명을 받아 미현으로 출동 조운과 맞선다. 하지만 이는 위군의 조진군을 돌리려는 훼이크였다. 그 사이 제갈량의 본대는 반대편인 서쪽으로 돌아 기산을 통해 옹주의 서쪽으로 진출한 것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4] 천수, 안정, 남안 3군이 이에 호응하여 순식간에 촉군에게 넘어가고 말았고 양주의 농서군도 동요하여 태수 유초가 한 달 내에 위나라의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관리와 주민들이 항복한다고 해버린 상태였다. 이로 인해 조운에게 붙잡혀 있는 기곡의 조진 서쪽으로 남아 있는 위군의 세력은 상규에 주둔한 곽회, 그리고 양주(서량)에 주둔한 서막만 남게 되었다. 당시 제갈량의 전략은 이렇다.
  1. 조운이 기곡에서 조진의 주력을 유인
  2. 제갈량이 기산으로 우회해 옹주 서부의 거점들을 점령
  3. 옹주 동부에 있는 위군 전력을 협격하여 격파
  4. 본래 위나라의 지배력이 강하지 않았던 관서-관중 지역 전체를 병탄
  5. 최종적으로는 장안으로 진격[5][6]

중국역대전쟁사의 설명에 따르면 조운과 등지는 기곡에서 방어전을 펼쳤다는 식으로 언급되어있는데, 후일 조운이 '적안의 군수물자를 보관하다가 겨울 하사품으로 삼으라'고 말한 촉한 영토 내 적안이 기곡 북쪽에 있다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역대전쟁사에선 여기서 기곡의 설명으로 포야도 중 태백령의 서쪽 언덕 또는 고개에 있다고 나와 있다. 이는 포야도(남쪽 포중에서 출발하여 븍쪽 오장원으로 나오는 길을 말한다고 이해하면 된다)의 포중 정북쪽에 위치한다. 즉, 저 적안을 기준으로 북쪽 촉과 위의 경계선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적안 기준으로 관중 방향으로 기곡 전투가 있다고 보면 된다.

제갈량이 기산에서 가정을 점거하려 했던 이유는 위군의 증원군을 차단함으로써 현지 위군과의 대치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촉군과 위군이 제대로 맞닥들일 수 있는 곳은 가정이 거의 유일하고 이 길목만 잘 지키면 그동안 제갈량의 본대가 옹, 양주를 확실히 점거할 수 있는 것. 여기에서 제갈량이 조운의 군대를 나눈 또 하나의 이유가 보이는데, 제갈량의 본대가 천수 등을 점령하는 사이 조진의 본대가 한중을 점거하는 뒷치기 상황을 예방하는 것이고 다른 이유는 조진의 본대가 미친 척하며 험한 산길을 통과해 천수로 향하는 변수를 모두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제갈량은 본인과 마속이 기산과 가정 소로를 막고 조운과 등지는 그 남쪽 루트를 막아 진창과 미성에 조진을 묶어둠으로써, 진창에서 기곡이나 야곡으로 내려와 기산 쪽의 무도군을 경유해 상규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제갈량 본진의 뒤를 치지 못하도록 방비함은 물론, 한중을 보호하는 완충 역할까지 떠맡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마속이 가정을 무사히 지켜내고 옹양주를 말끔히 평정하였다면 그 다음 순서는 진창과 미성이었을 것이다. 그 두 곳까지 빼앗길 경우 부풍군 바로 위쪽에 안정군이 위치하는 만큼 장안이 바로 코앞이어서 관동이 진동함은 물론, 위나라 전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제갈량이 천수로 가는 길이 기산도고 도로에서 군대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은 기산, 다음이 천수다. 게임처럼 그냥 길에다가 놔둔다고 군대가 있는 건 아니고 군대가 머무를 곳을 만들어야 하는데 1차가 기산이고 천수(상규)를 함락시키면 2차가 된다. 그 이후는 농서 쪽 서막 조지기부터 해서, 다지기를 해나갈 작정이었을 것이다.

또 제갈량은 가정이 장합을 상대로 버티고 있는 그 기간 동안에 기곡에서 조진과 맞서는 조운과 등지의 부대, 그리고 가정에서 장합과 대치하는 마속 군이 위군이 전투력을 유지하면서 천수에서 촉군과 대치하고 있는 위군과 합류하는 걸 방해하는 동안, 서쪽의 천수, 남안, 그리고 한 달 후에 합류할 농서 현지 3개 군의 호족과 강, 저 등의 이민족들이 모이고, 가정 북동쪽을 진수하고 있는 안정군이 버텨주는 사이 제갈량 본대 자체가 수비전에 대비하여 포진 및 상규 함락으로 기타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위군을 맞이해 싸워, 그때까지 점령한 지역을 비롯한 농우 일대, 양주까지 확고히 촉의 영토로 굳힐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위나라의 대응은 다음과 같았다. 조진은 조예의 명으로 야곡으로 나와서 조운이 미와 진창으로 치고 나오는 군사를 막았다. 그 사이 옹주가 촉한에 넘어가자 조예는 장합으로 하여금 5만의 보기 병력을 이끌고 가정을 지나 촉에 넘어간 3군, 특히 천수 일대에서 이 지역을 삼키려 하고 있는 제갈량을 격파할 것을 명령한다. 3군만을 탈환할 것이었으면 가정 위에 있는 안정군부터 공격해야 하나 장합은 가정을 통해 천수로 바로 진격하는 것을 우선했다, 천수에 있는 제갈량을 몰아내지 않고는 3군을 되찾을 수 없고 안정군은 제갈량에 호응한 세력이 장악하고 있어 저길 공격하면 제갈량에게 시간을 주는 꼴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안정군 탈환은 마속이 격파되고 제갈량이 퇴각하고 조운이 후퇴한 다음에나 미현에 있던 조진이 실행한다. 또 위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창에서 바로 서남쪽 밑에 있는 산관으로 병력을 보내 촉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위진은 제갈량이 퇴각한 이후에나 장안에 도착했으므로 이 출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안에서 진창도, 기산도의 분기점까지 도달하는 게 제갈량이 기산도, 진창도 분기점에 도달하는 것보다 멀고 밑에서도 나오지만 당시 제갈량이 진창으로 통하는 남쪽 길인 수양소곡으로부터 이쪽 지역에 순찰병을 드나들게 했기 때문에 위진이 출발했다고 해도 제갈량이 3군(+농서군)을 정리하고 이를 눈치채고 방어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7]

어쨌거나 제갈량 또한 가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시간적/지리적으로 이곳을 선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은 마속에게 군대를 주어 장합을 저지하게 하고, 예비대로 열류성에 고상을 파견하여 대비를 단단히 한다. 그리고 이것이 제갈량의 결정적인 패착이 된다.

3.1. 가정 전투[편집]


파일:한중고도.jpg
한중에서 옹양주, 관중으로 나가는 고도들과 각 지점을 정리한 지도

파일:위수확대.jpg
천수에서 흐르는 위수 지역을 확대한 지도

파일:1차북벌.jpg
1차 북벌 당시 전황, 단 가정의 위치는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후술한다.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제갈량이 내린 명을 따르지 않고 군을 부적절하게 운영하다 장합에게 패한다. 장합전에 따르면 그는 성을 점거하지 않고 산 위로 올라갔다고 한다. 선봉이었던 왕평이 여러 차례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정에 도착한 장합은 이를 보고 급수로를 끊은 후 들이쳐 마속을 궤멸시켰다. 열류성에서 가정을 백업하던 고상도 옹주 자사 곽회에게 진영이 격파당했고, 기산이 무너지자 기곡의 조운도 조진에게 패배하여 퇴각했다. 조진전에 따르면 조운의 의군을 상대로 미를 지키고 있던 조진이 마속이 가정에서 격파당한 후에 (조운과 대치하던 미에서) 안정 지역으로 움직여 월지성 등을 항복시켰다고 하므로 적어도 기곡 퇴각 시점은 가정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또, 조진전에는 그냥 마속 격파 이후 월지성으로 이동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 조운전을 보면 조진은 조운이 후퇴하자 곧바로 다른 쪽으로 이동한 게 아니라 조운군을 격멸하려는 자세를 취하나 조운은 잔도를 태우고 퇴각했다. 그 덕에 큰 피해는 입지 않았으나 강등되었고 조진은 자유로워져서 월지성까지 직접 출정하게된다.

또한 위서 서막전에 따르면 서막이 부임하자마자 보낸 금성태수에게 남안의 병력은 패배했다. 촉군은 4곳의 전장에서 모두 패했으나, 사실상 마속의 패배와 동시에 제갈량의 1차 북벌은 끝났다.

어쨌거나 제갈량은 자신을 포함한, 본대 병력의 퇴로가 완전히 끊기기 전에 신속하게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정이 뚫리면 아직 점령도 다 하지 못한 천수에서 위군을 맞이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아직 천수지역을 촉의 영역으로 다지지도 못한 상태인 만큼 천수가 가정보다 수비하기도 어렵고 이미 선봉이 대파로 꺾여 사기가 떨어지고 장합의 대군에 농서에 남은 위군까지 협공에 가세한다면 단기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불리하기에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왕평전에서는 병사들이 산산히 흩어졌다고 하고 명제기, 장합전에도 모두 대파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정의 피해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곽충오사 중 곽충 4사엔 제갈량이 수천명을 약탈하고 강유를 사로잡아 촉인들이 축하했지만 제갈량이 정색하고 "널리 하늘 아래 한(漢)의 백성이 아닌 이가 없는데, 국가의 위력이 미치지 못해 백성들이 시랑(豺狼, 승냥이와 이리)의 주둥이에서 고통받도록 하고 있소. 한 사람이 죽어도 모두 나의 죄인데, 이 정도 일로 서로 축하한다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배송지에 따르면 제갈량이 퇴각하면서 서현[8]의 1천 가구를 뽑아(拔) 돌아왔음에도 이 손실을 보충하기엔 부족했고 제갈량이 이미 위를 병탄하려 함은 다 알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냐며 이 기록을 비판한다.[9] 다만 가정의 피해가 컸어도 그나마 수습이 가능했던 것은 왕평의 공이 컸는데 촉서 왕평전에 따르면 '군사들은 모두 산산이 흩어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 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 장합이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에 왕평은 천천히 여러 군영의 흩어졌던 (병사들을) 거두고 장사들을 인솔하여 되돌아왔다.'라고 적혀있다. 기곡에서는 조운이 몸소 부대의 후미를 막았기 때문에 병력이나 물자의 손실은 패배에 비하면 적었다. 대체로 전투에서는 큰 이변이 없는 한 퇴각할 때의 피해가 가장 심각하며 또 공격받기에도 좋다.

3군의 호응을 받았으나 데려온 것은 점령했던 천수군 서현의 인구 천여 가구밖에 없었다. 큰 패배인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제갈량은 스스로 벼슬을 깎아 우장군으로 강등된다. 그리고 군법에 따라 마속을 참했다. 삼국지연의 때문에 단순히 명령을 무시하고 패전한 책임으로 참수된 걸로 나오기에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사 기록에는 마속은 패배하자 도주하다가 잡혀서 죽게되는데 기록이 서로 상충해서 옥에서 죽은 건지 잡혀와서 처형을 시켰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사건이 바로 사자성어인 읍참마속의 기원이 된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은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오자, 이후 병사와 장수의 수를 줄였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일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촉의 1차 북벌은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북벌이었으나 결국에는 실패하고 만다. 결국 1차 북벌의 실패로 촉이 가졌던 기습의 이점은 사라지고 이후 제갈량은 매 북벌마다 위의 강력한 전략적 방어에 맞닥뜨린다.

이런 패배 중에도 제갈량에게는 강유라는 큰 인재를 얻는 소득[10]은 있었으나 아직 이 시점에서 강유의 위상은 옹주 3군에서 따라 온 여러 투항자들 가운데 제갈량에게 촉망받는 기대주 정도였다. 실제로 제갈량 사후의 직속 후계자 위치는 내정/군정 모두 장완이었고, 장완이 죽은 후 그 후임자는 비의였다. 그리고 비의가 253년 곽순에게 암살된 후 그의 후임자는 없었다. 내정에서는 그의 상서령직을 이어받은 진지가 있었지만, 그가 맡았던 대장군직은 256년까지 비게 된다. 강유가 대장군이 된 것은 256년, 적도 전투에서 왕경의 군사를 대파한 공으로 대장군이 된 것이다. 강유는 스스로의 힘으로 대장군이 된 것이지, 처음부터 제갈량의 후계자로 낙점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제갈량이 강유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계자인 장완 등에게 편지를 보내 훌륭한 인재라며 열심히 그를 칭찬해 항장인 강유가 촉한 정계에서 순조롭게 높은 위치에 편입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것은 강유를 당장 후계자로 삼는다는 것보다 장완 이후 촉한을 이끌만한 차세대 유망주 중 하나로 본 것에 가까울 것이다.[11]

3.2. 가정의 위치[편집]


파일:眞街亭.jpg
실제 가정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



이 동영상들은 일반 유튜버의 주장을 담은 것이지만 역시 해당지역을 답사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최진열 교수의 주장과 사실상 거의 같기 때문에 링크해둔다.
최 교수의 강의 동영상은 유료라서 나무위키에 올리기 부적절하여 대체하였다.
최 교수는 삼국지 본전의 손책전, 오주전(손권전) 시계열 오류와
제갈량의 오장원 전투 지명 비정 오류를 지적한 위진남북조시대 전문 동양사학자로,
최 교수의 가정 위치 비정을 유료로 살펴보고 싶다면 해당링크를 참고하라

오늘날에는 관중평원과 농서의 경계선인 육반산맥에 위치한 천수시 진안현 농성진(天水市 秦安县 陇城镇)이 옛 가정이라고 비정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특히 시진핑 중국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이 이곳을 가정이라고 인정한 덕분이 크다.[12] 그래서 오늘날의 농성진에는 '가정고전장'이라고 해서 시중쉰의 친필비석도 서 있다.[13] 본디 이 지역은 한나라 때부터 위진시대까지 약양군 가천정(略阳郡 街泉亭)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광무제외효의 전투, 오호십육국시대 독발오고 등이 싸운 옛 전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당나라 때까지는 이렇게만 알려져 있다가 801년 당나라의 두우통전 저술을 완료하고 통전이 이곳을 마속이 진을 친 가정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곳이 옛 가정이라는 설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다른 기록을 살펴봤을때 이곳이 과연 그 가정인지는 논란거리이며 한국의 동양사학자 최진열도 이곳은 가정이 아니라고 연구에서 밝혔다. 또한 중국에서도 이곳이 실제 가정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많다는 지적이 연이어 제기되고 있다.

최진열 교수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의 전장 상황을 비정해봤을때 기록상 제갈량은 상규와 위수를 넘어 북쪽으로 갈 수가 없었다. 상규에 옹주자사 곽회가 버티고 있고, 다른 곳에서도 촉군에 대한 저항이 있었으며, 천수군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는데 여길 넘어서 굳이 현대에도 시골인 이곳으로 마속을 보낼수가 없고 보낼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또 제갈량전 주석 원자의 기록에 따르면 제갈량 본대와 마속 본대는 불과 수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연의로 형성된 세간의 통념과 달리 제갈량이 가정에 직접 가 있었고 마속을 선봉에 보낸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가정은 제갈량 본대가 주로 머물렀던 위수 남쪽 기산 인근에 배정되어야 합당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후대에 가정의 비정을 잘못 해버리는 바람에 가정전투 전반의 전장상황 인식이 왜곡되었고 마치 제갈량이 북쪽으로 별군을 보낸것처럼 잘못 해석되어 연의 등에도 영향을 미쳤고, 대중이 인식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최 교수는 농성진 말고 다른 곳을 가정이라고 지목하고 있는데, 이는 현대 중국에서 농성진이 아니라 다른곳이라고 지목한 가정의 위치와 동일하며 현대에 농성진과 더불어 가정의 위치라고 지목되는 두 곳 중 하나다. 바로 위 가정 추정지역에 위치한 곳이자 고조우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지목한 가정의 위치인 천수시 맥적구 맥적진 가정촌(天水市 麦积区 麦积镇 街亭村)이 그곳이다. 이곳은 2012년 '중국전통마을'로 선정된 전형적인 중국 서부의 시골 마을인데 현대에도 아직 '가정(街亭)'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14] 맥적(麦积)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근방은 가정 전투보단 맥적산석굴(麥積山石窟)[15]로 매우 유명한 관광지인데 실은 가정고진(街亭古镇)이라고도 불린 이곳에서 가정 전투가 있었다는 것이 중국에서 농성진이 가정임을 부정하는 측의 주장과 최 교수의 판단이다.

일단 최진열 교수가 검토한 원자의 기록에 따르면 가정전투에서는 제갈량의 본대가 마속을 선봉으로 세워 가정에 이르렀다.

"제갈량이 처음 농우로 출병했을 때 남안, 천수, 안정의 세 군(郡) 사람들이 배반하여 제갈량에 호응했습니다. 만약 제갈량이 급히 진격했다면 이 세 군은 중국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나 제갈량은 천천히 행군하며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관병(官兵-위나라 군)이 농에 올라 3군을 회복하고, 제갈량은 척촌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이 기회를 잃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촉병이 가볍고 날랜 군사로 좋은 장수가 적었고 제갈량이 처음 출병했을 때는 중국(中國-위나라)의 강약을 알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의심을 품고 모험하지 않았던 것이오. 게다가 대거 모인 자들이 가까운 공을 탐하지 않아 진격하지 않았소.

그가 말했다,

"그가 의심했다는 것을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처음 나와 천천히 움직이고 둔영을 중복하고 그 뒤 항복한 뒤에도 진병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소. 제갈량은 용맹하고 싸움에 능했으나(勇而能鬪) 세 군(郡)이 배반해도 속히 이에 응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의심했다는 징표요."

(중략)

"제갈량이 가정(街亭)에 있고 전군(前軍)이 대파되었을 때 제갈량의 둔영이 수 리 떨어져 있었으나 구원하지 않았소. 관병과 서로 접전했으나 또한 천천히 행보하니 이는 그가 용맹했다는 것이오.

제갈량전 주석 원자


원자에 따르면 우선 제갈량은 농서의 남안, 천수, 안정 3군이 배반할때 빠르게 진격해서 이곳들을 바로 차지하지 않았고 둔영을 계속 세우면서 천천히 움직이며 꾸물거릴 뿐, 나가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촉군의 주력이 가벼운 경무장 보병인데다가 촉나라 장수들의 군사적 재능이 위나라 장수들을 이길 수 있는 수준인지 의구심을 품어, 촉군이 위군을 이길수 있을지 걱정하고, 의심을 품고, 모험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거 모인 자들이 가까운 공을 탐하지 않아 진격하지 않았소.'라는 부분을 보면 비단 제갈량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촉군 전체에 약간 앞서서 공을 세우는걸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당시에 "제갈량이 신속하게 진격해 농서를 장악했더라면 위나라는 결국 농서를 빼앗겼을 것이다"는 평가는 원준에게 질문한 사람이건 원준이건 부정하지 않으므로 이런 평가는 이미 당대에 널리 퍼진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보면 당시 제갈량은 굉장히 안전주의적으로 움직이다가 패착을 맞은 거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제갈량과 싸워봤던 사마의는 제갈량의 군사능력을 보고

"제갈량은 뜻이 크나 기회를 살피지 못하고, 꾀가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하고, 용병을 좋아하나 임기응변이 없으니, 비록 10만 군사를 이끈다 한들 내 계획 속으로 빠져들 뿐이라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

진서 선제기

라고 평가했는데 냉정하게 이건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쳐 발려서 열등감을 가지고 뭐 그런게 아니라 그냥 제갈량이 북벌에서 보여준 군사 운영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신속한 기동전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허허실실의 귀재였던 사마의가 보기엔 제갈량은 그냥 안전하게 진을 굳히고 싸우는데 치중해서, 정작 중요할때 기회를 노려 요지를 선점하지 못하며, 상황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대담하게 진격하지 못하는 장수였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가도 가정에서 제갈량이 장합의 5만 군대를 이길수 있었다면 빨리 진군해서 3군을 차지하고 이곳을 백그라운드로 하여 싸우지 않았던 것을 만회할 수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원준이 제갈량이 싸움에 능했다고 실드치는 부분이지만 자세히 보면 제갈량 본인도 장합과의 교전에서 이기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제갈량전 본전에도 나오듯이 제갈량은 마속을 선봉으로 내세웠다.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왜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어겼고 장합에게 격파되었다. 문제는 당시 가정에 마속만 있었던게 아니라는거다. 제갈량 본인의 본대도 있었다. 원준이 증언했듯이 제갈량군 자체가 가정에 있었고 마속은 그 중 선두에 있는 부대를 이끌었을 뿐이어서 제갈량에 비해 몇 리 앞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들이닥친 장합군에게 제일 먼저 격파된 것일 뿐인 것이다.

최진열 교수는 원자의 촉군과 장합군의 교전을 토대로 마속의 군대가 대파되고 제갈량이 이를 구원하지 못하고 역시 기습을 당해 후퇴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즉 최진열 교수의 의견에 따르면 여기서 제갈량은 격파된 마속을 구원하지 못했고 제갈량 역시 장합을 이기지 못했다. 원준은 제갈량의 군대가 안정적이고 굳고 단단해서 후퇴할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결국 제갈량 본인조차도 장합의 군대와 싸워서 마속을 구하지도 못하고 그저 병력을 건져서 천천히 후퇴했을 뿐이라는 말을 좋게 말한거 뿐이다.

물론 패한 상황에서도 군대를 간수해서 무사히 한중에 돌아왔다는 부분에서 일반적인 패장들보다야 군사적 재능이 있다고 평가 할 수도 있겠지만 가정 전투에서 제갈량에게 긍정적인 평가는 거기까지이다. 애초에 촉나라에 좋은 장수가 없다고 고심했다면 촉군 주력 본대의 선봉에는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추천한대로 마속 대신 숙장인 위연이나 오의를 넣었어야 했을텐데 그러지 않은 거 부터가 실수였다.[16]

다만 장합이 이후에 제갈량을 상대했을때 발언을 보면 "병법에 따르면 너무 상대를 궁지에 모는건 위험하다"라는 식으로 평가하고 있는것을 알 수 있는데 그래서 제갈량의 후퇴가 좋았다라는 부분만은 원준의 평가가 맞는 것일 수는 있고, 장합의 그런 평가의 원인은 이때의 경험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면 막아내기만 한다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보급 문제에 시달릴 제갈량과 굳이 싸워 피해를 볼 이유는 없다고 판단한 것일수도 있겠고. 실제로 장합이 가정에서 촉군을 격파한 후의 행보를 보면 반란을 일으킨 삼군의 반란군 쪽으로 이동해 이들을 소탕하면서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쨌거나 마량전에 달린 마속전에 마속이 격파된 후의 서술에

"제갈량은 진군하려 해도 나아갈 곳이 없어 군대를 퇴각시켜 한중으로 돌아왔다."

촉서 마량전

라고 쓴 것의 이유도 여기서 분명해진다. 선봉인 마속이 격파되어 병력이 산산히 흩어지고 제갈량 본인도 장합을 뚫지 못하니 큰 피해를 입은 촉군은 더 이상 진격이 불가능했다는 얘기인 것인것이다.

그러니까 가정전투의 진실은 장합이 촉군의 선봉 마속을 격파하고 제갈량이 위군을 이기지 못해 후퇴한 싸움으로 제갈량이 장합에게 정면으로 붙어 대패한 싸움인 것이다. 다만 이 중에서도 마속이 제갈량의 군령을 듣지 않고 싸우다가 패하고 도주했기 때문에 마속은 특히 처벌한거고 제갈량 본인도 장합과 싸우다가 패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도 강등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가정 전투는 제갈량군의 선봉 마속이 진을 잘못 잡아서 패하고 같이 있던 제갈량군 본대조차 선봉이 붕괴되는 와중에 선봉을 구하지 못하고 장합에게 패배한 전투고, 그냥 일방적으로 장합의 위군이 제갈량의 촉군을 격파하여 후퇴시킨 전투라는 게 최진열 교수의 판단이다.

다만 이곳이 가정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도 최진열 교수의 의견을 무조건 따르는 것은 아니다. 가정에서 촉군 전반이 격파되었을때 제갈량의 부대가 안전하게 후퇴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마속이 격파되는 동안 제갈량이 마속 놔두고 먼저 철수해서 장합이 마속 처리하는 동안 후퇴했다는 입장도 있다. 제갈량 본대가 마속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원자의 서술대로라면 이 서술이 더 일리가 있다. 어쨌던 기본적인 큰 틀에서 촉군 전반이 가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만은 일치하는 부분이다.

또한 이런 가정 위치의 비정은 다른 사료의 증언으로도 잠작할 수 있다.

태수(太守)는 촉군(蜀軍)이 거의 당도하고 여러 현들이 (촉군에) 향응(響應,호응)한다는 말을 듣고는 (강)유 등에게 모두 딴 마음(→배반하려는 마음)이 있을 것이라 의심하였다. 이에 밤중에 달아나 상규(上邽)를 보전하였다. (강)유 등은 태수가 떠난 것을 알아채고 뒤쫓았으나 늦어서 성문(城門)에 도착하니 성문은 이미 닫혀있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강)유 등은 서로 이끌며 기(冀)로 돌아갔는데 기(冀)에서도 역시 (강)유를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강)유 등은 이에 함께 제갈량(諸葛亮)에게로 나아갔다. 때마침 마속(馬謖)이 가정(街亭)에서 패하자 (제갈)량이 서현(西縣)의 천여 가(家) 및 (강)유 등을 뽑아서 거느리고 (촉한으로) 돌아가니 이 때문에 (강)유는 마침내 모친과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촉서 강유


태화(太和) 연간에 제갈량(諸葛亮)이 농우(隴右)를 습격하자, 백성들이 동요했다. (중략) 곧 백성들이 성을 굳건히 지켰다. 곧 남안(南安)의 병사들이 촉병들과 함께 농서를 공격하려 했다. 유초가 적이 도달했다는 소리를 듣자, 곧 장사(長史) 마옹(馬顒)에게 성 앞에 나가 진을 지키게 하고는, 자신은 성루각으로 올라가, 촉나라 장수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위서 유초


우선 강유전의 기록에 따르면 천수군의 태수는 강유를 의심하여 강유를 버리고 상규현을 지켰으며, 이에 강유는 기현으로 가지만 기현에서도 강유를 받아주지 않았다. 촉에게 배반하려는 마음이 있는(의심되는) 강유를 상규현과 기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기현과 상규현은 촉군의 영역으로 볼 수 없고 제갈량이 점령 못한 곳이다.

또한, 강유가 제갈량에게 항복한 시기는 마속이 가정에서 격파당한 시기와 거의 동일하고, 제갈량이 후퇴할 때도 기산 인근에 있는 서현의 민가만을 약탈해갔으므로 마속이 가정에서 장합에게 패퇴하는 그 순간까지(=제갈량이 1차 북벌을 포기하는 순간까지) 상규현과 기현은 줄곧 촉에 대한 방비를 굳게하고 있었다고 봐야한다. 따라서 촉군이 상규현, 기현에 이르지 못했다면 당연하게도 우리가 원래 알던 위수 이북 산맥의 가정 위치 비정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상규현과 기현이 있는 천수군의 위수 물길을 뚫지 못했으니, 가정은 자연스럽게 위수 이남 어딘가로 추정하는 것이 올바르게 된다.

제갈량전 원자의 기록에서도 제갈량이 불과 수 리 바깥에 있는 마속을 구원하지 않았다 하는데, 만약 가정이 정말 북쪽 산맥 어딘가에 있었다면 제갈량의 본대 역시 상규현으로 진출이 되어있어야 정상이다. 다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갈량의 본대는 기산에 묶여있었고, 당연하게도 마속과 가정은 기산 근처 수 리 어딘가로 봐야하는 것이다. 유초전에 따르면 촉군이 남안군, 농서군에는 직접적인 공세를 가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마 제갈량은 가정에서는 본인과 마속이 장합을 틀어막은 뒤 농서 진출을 우선시 했을 수도 있다. 다만 유초가 이를 막아냈고 곧 가정에서의 패배로 인해 촉군은 물러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가정의 위치를 재추론을 해보자면, 가정의 위치는 기산과 상규현, 기현을 잇는 길목, 혹은 위수 이남 거점 어딘가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따라서 관중농서의 통로인 보계와 천수 사이의 가정촌, 가정고진을 가정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군의 구원군을 요격하는데 실패한 가정에서의 패배로 촉군의 위수 장악 시도는 결국 좌절되었고, 제갈량 역시 상규로든 농서로든 더는 공세를 이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중국 측의 의견도 비슷하다. 중국에서 농성진은 결코 가정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하는 입장 측은 농성진이 있는 육반산맥 넘는 길들 설명하면서, 양 군의 식량 상황도 비교하며 "어떻게 마속이 위수 도하해가면서 보급로 끊기기 쉬운 약양 쪽에 가서 장합을 막을 수 있겠느냐, 가정을 위수 북쪽에 비정한 건 위수 남쪽에 길이 없다는 편견 때문이었는데 그 쪽에 불상(맥적산석굴)도 있고 진나라에서 만든 도로도 있다. 심지어 과거 장합하후연 밑에서 위수에 인접한 그 길 따라가서 마초군 잡은 적도 있다. 여기도 남산이랑 북산 있고 수로를 끊을 수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천수보계(옛 진창)을 잇는 중요 도로에 위치한 가정촌 가정고진이야 말로 진짜 가정이다."(해당글 출처)라고 주장하고 있다. 해당 기록은 위서 하후연전에 하후연이 장합을 시켜서 진창의 길로 들어가게 한 것을 뜻하는 것인데 이를 보면 장합이 굳이 돌아가는 농성진으로 갈 이유가 없이 위수 남안으로 쭉 이어지는 이쪽 길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쪽으로 빨리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마초 역시 이 당시 기산으로 진격하여 제갈량과 거의 같은 루트로 진군했고 장합과의 전투로 후일의 제갈량과 유사한 방식으로 후퇴해 버렸으니 이는 분명해진다.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와 기산(祁山)을 포위했다. 강서 등이 급히 구원을 요청했는데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기를 태조의 절도(節度)를 기다리자고 했다. 하후연이 말했다, "공(=위공 조조)께서는 업에 계시니 왕복하는데 4천리 길이오. 회답에 따르려 하다가는 강서 등은 필시 패할 것이니 급히 공격해야 하오."

마침내 이를 실행해 장합에게 보기 5천을 주어 선두에 서서 진창(陳倉)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게 하고 하후연 자신은 군량을 감독하며 후미에 있었다. 장합이 위수 가에 도착하자 마초가 강족과 저족 수천 명을 이끌고 장합에 맞섰다. 싸우기도 전에 마초가 달아나니 장합은 진군하여 마초군의 무기를 거두었다. 하후연이 도착했을 때는 여러 현들이 이미 다 항복한 상태였다.

위서 하후연전


3.3. 가정 전투의 중요성 [편집]


위 사료를 종합해 볼때 가정 전투는 단순하게 '마속 vs 장합'이 아닌 '제갈량의 선봉 vs 장합'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래 자료에서도 마속을 '제갈량의 선봉'이었다고 쓰는 사료가 많다. 이는 작전상 기산 진출 → 상규의 점령 → 가정에서 직접 대치 후 타군으로 지역 다지기(또는 위 대군과의 결전)이어야 하나 예상보다 빠른 장합의 도착으로 상규 점령을 이후로 미루고 장합과의 대치를 먼저로 본 것이라고 보여진다. 결과적으로는 가정의 패배로 의지할 장소가 없이 퇴각했다는 것은 상규를 점령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주어졌다면 설령 가정이 돌파 당하더라도 상규에서 위수 방어를 통한 대치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는 것.

자치통감을 보면 마속에게 제군(여러 부대)를 감독하게 하여 선봉으로 가정에서 싸우라고 보냈다고 한다. 즉, 제갈량은 동쪽 가정을 통해 오는 위나라의 군세를 마속의 선봉대[17]를 가정에 투입해 처음부터 싸우게 할 작정이었고 실제로 장합은 다른 길이 아니라 가정길로 가는 것을 선택했으며 이는 제갈량의 판단이 들어 맞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거의 모든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언이며 마속이 장합과 맞서는 선봉으로서, 위군이 추가적인 진출을 시도할 때 결전의 장소로 촉한 수뇌부와 위나라 수뇌부 양측 모두 예측하고 있던 가정에 와서 성을 점거하지도 않고, 물을 버리고 산에 올라 부적절한 운용으로 패배했던 것도 모든 사료에서 교차 검증된다. 제갈량은 자신이 남긴 저술인 병요에서 "무릇 군대가 행군을 하고 진영을 구축할 때는 먼저 심복(지혜와 언변을 갖춘 간첩)이나 향도(그 마을 사람을 사용하는 것)를 보내 전방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라고 신신당부 했다. 따라서 촉군의 선봉이 제갈량의 병요에 맞는 충분한 군 운용을 했다면 이런 정찰을 통해 제갈량이 보낸 목적지 가정이 적의 진출방향인 것을 알고 장합군이 넘어오려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제갈량은 마속이라면 가정에서 충분히 싸울 수 있으리라 봤던 것으로 보이는데, 주위에서 추천하던 인물이 위연이나 오의와 같은 촉군 최고위급 장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속에게 주어진 임무는 기본적인 전술적 우위를 토대로 기초적으로 주어진 절도를 준수하면서 적군의 움직임에 따라 자주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해야 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갈량이 따로 절도까지 마련해서 준 것도 이런 기본적인 논의에 바탕을 두고 마속이 그 일을 해주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촉군의 인재상황이나 병력 규모상, 정확히 시키는 대로만 하는 편장 하나를 보낸 것이 아니라 마속 휘하에 왕평 이외에도 여러 부장을 딸려 보낸 것도 그 일원이었을 것이다. 조운조진군을 막아주고 있는 사이, 가정과 그 인근도 틀어막고 혹시라도 장합이 다른 도로를 이용해 우회하면 뒤를 끊으면서 고사시켜 버리고, 제갈량은 그 사이에 상규를 함락해 천수 다지기를 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해야할 마속의 역할은 아주 뚜렷했는데, 바로 기곡에서 조운/등지가 했던 그 역할이다. 최대한 전면전을 피하고 요지를 점령해 제갈량이 옹양을 안돈할 때까지 시간을 끌며 가정부터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후방까지 이중, 삼중으로 지연방어를 하든가, 대치 상황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장합이 혹시나 다른 길로 이동하려고 하면 먼저 가서 방어를 하든가 그 뒤를 후려치는 역할이다. 즉, 가정성 진수는 길을 막을 때 제갈량의 절도를 따라서 끊임없이 정보를 취득하여 각 지역에 올 수 있는 위군 병력을 예상하고 능동적으로 막아야 하는데다 상황에 맞춰 장합군을 격파하거나 유격하는 등의 전술적 변화를 유연하게 실시간으로 판단하여야 했으므로 흔히 오해하듯 아무 장수나 시켜도 되는 쉬운 역할은 아니였다.

가정에 마속이 있는 이상 다른 길은 거리상 별동대의 보급 및 연락 체계 모두 위험도가 높아 진군루트가 가정에 있는 마속 정면 격파로 고정될 수밖에 없었는데 가정의 길은 다른 길과 달리 규모가 어찌되었던 '성'이라는 방어적 이점이 있었다. 또 장합이 알았을지는 의문이지만 청수현 북쪽 열유성에선 고상이 백업을 하며 아랫쪽 길을 막고 있어 아래쪽으로 갈 수도 없다. 사실 마속이 가정에서 장합 상대로 시간을 끄는 사이 열유성에서 고상이 나와 장합의 뒤를 끊을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18] 장합의 가정 진군도 안전하지만은 않았다는 게...장합이 5만 병력을 그대로 가정성으로 진군시킨 것은 여러 가능성을 상의해보고 마속의 선봉군이 살아있는 한 계속 시간을 지연시키러 들 것이니 우선 마속의 가정군을 전력으로 격멸해야 한다고 판단해 결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촉군 측에서 준비했던 것이었으니 마속 측이 '정상적인' 대응을 했다면 이 공성전 또한 시간을 끄는 것이 되었겠으나...

게다가 가정까지 산맥을 넘어 곡선을 그리며 진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급하게 움직이는 이 군대는 치중에 신경쓰기보단 빠르게 천수를 구원하기 위해 신속한 기동을 우선하면서 직선거리로 가지 못하고 산맥을 넘어 돌아서가기 때문에 보급선에 문제가 생겨 보급에 취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속이 성에서 버티거나 의지하면서 5만이나 되는 보병과 기병이 합쳐진 대군의 식량과 마초의 보급이 잘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지연작전을 폈다면 장합 입장에서도 난감했을 것이다.


4. 마속의 실패[편집]


제갈량은 마속(馬謖)에게 선두에서 제군(諸軍)을 이끌게 해 가정(街亭)에서 장합과 싸우게 했다.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명령, 지휘통제)를 어기고 거동(擧動)이 실의(失宜-부적절함)하여 장합에게 대파당했다.

제갈량전


건흥(建興) 6년, 참군(參軍) 마속(馬謖)에게 소속되어 선봉(先鋒)이 되었다. 마속은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지형이) 행동하기에 번잡하였으므로 왕평은 계속 마속에게 규간(規諫, 옳은 도리로 간함)하였으나 마속이 이를 쓰지 못하여 가정(街亭)에서 크게 패하였다.

왕평전


제갈량의 장수인 마속(馬謖)과 가정(街亭)에서 맞붙었다. 마속은 험한 남산에 의지했고, 내려와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 장합은 그 급도(汲道-용수로)를 끊고 들이쳐 마속을 대파했다.

장합전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작전명령)를 어기고, (군사)행동이(擧措) 매우 번거롭고 어지러웠으며(煩擾),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니, 내려가서 성(城)을 점거하여 (지형의) 이점(利點)을 다투지 아니하였다. 비장(裨將) 왕평(王平)이 힘써 간하였으나 (마속이) 쓰지 않으니, 마침내 대패(大敗)하여 사졸(士卒)이 모조리 궤멸(潰滅)하였다.

소상(蕭常) 속후한서


마속은 제갈량의 절제(節制-작전명령)을 어겼고, (군사)행동이 번잡스럽고 어지러웠으며,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니, 내려가 성을 점거하지 아니하였다. 장합이 그 급도(汲道-물을 수송하는 길)을 끊고 이내 공격하니, 마속은 패주하고 사졸은 흩어졌다.

학경(郝經) 속후한서


마속에게 여러 부대를 감독하여 선봉에 서도록 하면서 장합과 가정에서 싸우게 하였다.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를 지키지 아니하면서 행동거지(舉措)가 번요(煩擾-번거롭고 어지러움, 혹은 혼란스러움)했으며, 물을 버리고 산을 올라, 아래에 있는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 장합이 그 급도를 끊고 공격해 대파하니 (마속의) 병사들이 이산(離散-구성원이 헤어져 흩어짐)되었다.

자치통감


마속은 뜻밖에 (제갈량의) 절제(節制)를 일부러 어기고 산 남쪽을 의지하고 아래의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 장합이 그 급도를 끊으니 마속의 진중에는 물이 없었고 이로 인해 대패했다.

중국역대전쟁사

제갈량의 바람과 달리 제1차 북벌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마속을 가정 전투로 보낸 것이다. 남만 정벌 당시에 마속이 제갈량에게 남만은 군사적 점령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조언을 제갈량에게 했고 제갈량도 이에 호응했다는 기록이 마속전에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마속은 나름대로의 능력이 있었고 이에 제갈량도 마속을 나름대로 총애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 마속의 나이도 30대 후반이며, 각종 행정, 참모 경험도 있어서 절대 풋내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로서는 마속은 나이를 충분히 먹었다. 당장 마속의 선배격인 방통이 낙성에서, 친형인 마량이 이릉에서, 각각 유비와는 독립적으로 부대를 이끌다가 전사했을 때, 그들의 나이는 마속보다도 적었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으니 위연, 오의, 조운[19]등을 보내라고 하는 것이지,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참모로만 활동하고 지휘관으로서 기회를 안 주는 게 더 이상한 일일 수도 있다. 당장 촉한에서 비슷한 사례로 당시 기곡에서 조운과 고생 중이던 중감군, 양무장군 등지의 예도 있었고 말이다.

가정으로 파견할 장수로 거론된 인물은 위연, 오의 등이였지만, 제갈량은 마속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거라고 판단한건지, 아니면 본대에 위연, 오의를 남겨서 후방을 빨리 정리하는게 더 낫다고 판단한건지, 마속을 선택했다. 그리고 마속이 지휘경험이 없음을 고려해서 왕평[20]을 포함해 부장을 4명이나 붙여주고, 백업으로 열류성에 고상을 주둔하게 하고, 행동 방침(절도)까지 가르쳐주며 가정으로 보냈다.[21] 그런데 설마 유능하고 전략에도 밝아 기대를 가지게 했던 마속이 실패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어처구니 없게 실패할 줄은 제갈량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갈량전과 왕평전, 장합전을 조합하면 제갈량이 명령한 게 장합과 가정에서 맞붙을 때 산에 올라서 장합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이 때문에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옳은 도리가 아니라며 왕평이 간했다는 사실, 물이 있고 지형을 지킬 수 있는 성을 점거하는게 지시 목적임을 알 수 있다. 마속이 내려와 성을 점거하지 않고 산에 의지하자 장합이 용수로를 끊은 것이 패배의 원인이며 왕평도 마속의 산을 점거하는 전략이 아니라고 규간하였는데 여기서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겼다고 나온다. 그럼 결국 장합이 가정으로 진입할 시 물이 흘러 보급을 받을 수 있는 평지에 위치한 가정성을 점거하고 진을 튼튼히 해 버티라는 게 제갈량의 의도이자 명령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마속 본인 문서에도 나오지만 전군을 위로 올리지 않고 일부 부대만 기각지세로 산위에 올리고 협공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만했다. 어쨌거나 그랬다면 성, 산지라는 요충지, 유리한 지형과 물의 보급이라는 군사운용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전부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굳이 제갈량의 절도를 어긴 것 외에도 기본적인 식수의 공급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한 것, 굳이 군사를 운용하기 번잡한 곳에 전군을 몰아넣은 것, 전투가 대패로 끝나자 도주한 것 등 그동안 마씨오상의 일원으로서 준걸이라고 평가받았던 인물이 이렇게 일선 지휘관으로서 전술적인 면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을 보면 참으로 아쉬운 부분.

마속을 보낸 이유는 요지를 막고 구원군 장합을 최대한 가정 인근에서 지연시킨 다음 숙장들을 이용해 바로 옹양주 일대를 빠르게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최훈은 삼국전투기에서 이 의견과 비슷하게 기산을 지키면서 제갈량이 미에 있는 조진 등을 치려고 했다고 보았다. 실제 제갈량의 편군이었던 위연과 오의는 2년 후 각각 양계와 남안에서 곽회와 비요를 털어버린다. 곽회야 농서 붙박이였고 비요의 본군이 농서군이나 관중 지원군이냐가 애매하지만 이를 볼 때 관중군의 지원이 없는 농서군은 제갈량과 휘하 장수들의 역량으로 충분히 제압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양계와 강중은 양주 쪽 영토고 남안은 가정 쪽인데 편군이 여기까지 진출해 승리를 거뒀으니 1차 당시 제갈량이 있던 본군이 있던 곳이야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래서 관중군을 마속이 막는 것이 중요했는데... 양주를 통제할 인물로 서막이 있다고는 하나 이 사람은 군사적인 재능보단 행정 분야에 특화된 인재라고 보여지고 양주 역시 농서군의 예처럼 제갈량의 진군에 흔들리고 있었다. 즉 장안에서 대규모의 지원이 없는 한, 옹양의 겸병은 충분히 가능했다는 것이다. 마속은 남중 정벌 당시에도 전략적 식견을 보여준 적이 있으니 제갈량이 이 의미를 이해할 만한 인재라고 봤던 듯하다. 가정 수비와 장합군을 붙들어 놓는것은 1차 북벌의 핵심이며, 조운과 나눈 군대에서 최소한 2개 군대가 위나라에서 올건데, 장합이랑 병력수를 예측 못할 수가 없고 또한 남의 나라땅을 갔는데, 그 길을 그 군대가 모를 수가 없다.

전술하였듯 마속의 역할은 분명했다. 최대한 전면전을 피하고 요지를 점령해 길을 막고 시간을 끌며 대치상황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장합이 가정말고 다른 길로 이동하려고 하거나 가정 대치 중 다른 길로 이동하려 들면 그 뒤를 후려치는 역할이다.[22]

그런데 위군보다 먼저 가정에 도착해 장합이 가정으로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마속은, 길을 막으라는 제갈량의 지시를 따르는 대신에 가정의 정상으로 올라가 진을 친다. 부장이었던 왕평은 가정 산지의 지형이 복잡해 병력 운용이 까다롭다는 이유로 마속에게 여러 차례 반대했으나 마속은 왕평의 진언을 무시한다. 결국 왕평은 군사 1,000명을 이끌고 따로 진을 쳐서, 이후 촉군이 위군에게 패퇴할 때 위군을 제지하여 시간을 벌고 군사들을 수습하는 공을 세워 승진하게 된다.

'왜 산에 올랐는가'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대답은 확실한 전과를 올려 장합이라는 까다로운 상대를 속히 제거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것으로 보인다. 원래 장합이 가정으로 오면 그곳을 지키고 만에 하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장합의 뒤를 후려치거나 끊어버리며 장합을 묶어두는 게 마속의 제1작전목표였으나, 단지 지키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전과를 늘리기 위해 산 위에 자리를 잡고 장합이 오면 고지를 점령한 기세를 타고 쳐서 장합의 부대를 격멸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풀이 된다.

촉군 입장에서 1차 북벌은 제갈량의 전략부터가 기곡에 의군을 보내 적의 총사령관을 묶어두는 기책을 쓰고 옹, 양주를 석권하는 완벽한 기습이었으니 마속 역시 이를 보고 특출한 기책으로 장합의 군세를 격멸하여 큰 공을 세우고자 욕심이 들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5만이나 되는 백전노장 장합의 군대를 붙잡아 두는건 계속해서 상대방의 병력 이동을 체크하고 품이 많이 들고 지난한 군대 통솔과 전술적 수고가 들어가는 반면, 장합을 여기서 격멸하면 손쉽게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마침 마속 자신이 있는 가정의 지형은 촉군에게 전술적 우위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면 나름 유혹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제갈량의 판단은 마속의 욕심과는 달랐다. 냉정하게 전황을 보고 '기책으로 기습을 성공시켰으니 이제는 진지하게 나올 위군 상대로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는 대 논리였다. 그러나 제갈량의 의견을 믿고 따른 게, 아직 부장급이었던 왕평 뿐이었던 것이 비극이었다.

반면 장합 입장에서 본다면, '천하의 제갈량이 상대인데 가정을 지키는 병력이 하나도 없다?' 당연히 어딘가 복병이 있을 거라 예상했을 것이다. 장합이 지형이 번잡한 산에 매복한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도망갈 곳이 없으니 들킬 경우 리스크는 어마어마할 것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장합군의 기병을 의식하고 산에 올라 기병을 막으려 했다는 설도 있지만, 애시당초 장합의 부대는 기병만 있는 부대가 아니라 보병과 기병이 섞인 부대라고 분명히 사서에 나온다. 기병이 산을 오르지 못한다면 기본적인 물 보급도 안 되니 보병으로, 산을 오를 필요도 없이 포위해서 말려 죽이면 그만이다. 역시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가정이 넓은 벌판도 아닌 이상, 기병을 의식했다면 성을 점거하고 기병이 힘을 못 쓰는 공성전으로 가는 방법도 있었다. 산에서는 마속군도 똑같이 번거로울 뿐더러 보급에도 난점이 많았다. 몽땅 올라갈 필요 없이 일부만 산에 올려 견제만 해도 된다. 단순히 '기병'만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에 대응한답시고 전군을 물 보급도 금방 끊기도 움직이기도 어려운 위치에 있는 산 위로 올라간 거라면 기본적인 정찰이나 지형파악, 적군의 상황파악도 못하는 머저리라고밖에 볼 수 없다. 설령 장합군이 기병만 있었다고 해도 똑같이 산 아래에서 물 보급을 끊고 고사할 때까지 기다려도 되는 상황이다.

당시 촉군은 가정의 중요성을 알고 이 지역에 대해서 자세히 살폈다. 일단 기만술로 위군의 방어가 허술한 지역을 재빨리 찔러 옹주를 순식간에 장악한 다음 충분한 논의와 계획, 넉넉하게 방어 진지를 구축할 시간을 가지고 가정을 먼저 선점해 그에 대한 대비를 단단히 하려 준비했던 대목이 정사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

우선 가정에 병력을 보낼 때 제갈량이 휘하 장수들과 계속 논의를 하여 결국 마속을 파견하는 것으로 의견을 정했고, 제갈량은 이 과정에서 특별히 가정에 도착하면 마속 부대가 장합부대를 상대해야 할 때 쓸 전술적인 세부 지시까지 자세히 당부할 정도로 신경을 썼으며, 열류성에는 따로 고상까지 파견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이후 가정에 도착한 마속 부대가 가정에서 산 위에 진을 치는데, 이 과정에서 왕평이 마속이 옳은 도리를 들어서 (제갈량의 전술 지시를 어기는 것을) 수차례 지속적으로 반대하면서 간언했으나 마속이 듣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즉 마속의 부대가 가정에 도착하고 나서 진을 설치할 때까지 어떤 군사적 행동을 취할 것인가 마속과 부장들 간에 꽤 지속적으로 회의가 벌어졌음을 뜻한다. 또 마속은 비교적 좁은 길에서 막을 있는 성과 요지를 버리고 산 위에다가 진을 치는데[23] 상식적으로도 군대가 평지에 진을 치는 것보다 군장을 매고 이런 산 위에 올라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더 오랜 시간과 힘을 들여야 한다는 건 명백하다. 심지어 마속이 구축한 진지엔 그 산악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급도까지 있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런 준비 상황이라면 원래 제갈량의 명령대로 일을 진행했다 가정 했을 시 더욱 탄탄한 진지가 더 일찍 구축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촉군에게는 위군을 방어할 시간적, 전술적인 우위가 있었는데 마속은 이를 내다버린 것이다. 공격보다 방어가 쉽다는 것은 필연적이고 촉군 입장에서 가정은 공격보단 방어지점으로 적당한 곳이었다.

제갈량의 명령이 "장합군 방어하라, 장합이 가정으로 오면 가정에 주둔후 거기서 방어하라" 정도였다면 왜 하필 마속만 이렇게 콕 집어 기술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당장 바로 열유성의 고상도 곽회한테 패배하였음에도 말이다. 이는 제갈량의 지시가 단순한 방어지시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는 방어, 차선으로는 지연, 만약의 경우 유격이라는 더 큰 전술적 목적을 부여하였기 때문이며,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다른 곳에 진을 치고 싸웠는데 너무나 쉽게 격파되어 시간도 끌어 주지 못하고 패전하였기 때문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즉 보통의 패전이 아닌 군령을 어긴 패전이었고, 그마저도 어떠한 전술적 목적마저도 달성하지 못한 완벽한 참패. 항상 군기와 상벌에 엄정했던 제갈량을 가까이서 봐왔기에 그 자리에서 패닉이 오고 탈영한 것일 터이다. 맨 처음에 말한 대로 제갈량의 이 명령은 한중에서 제갈량이 1년을 머물고 3군의 함락 뒤 나왔을 것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불확실한 정보 토대위의 명령이라고 보기가 힘들다.

실제로 마속이 어처구니없이 대파되고도 왕평의 천 명 군사가 북을 두드리고 공습을 준비하는 듯한 페이크 모션을 취하자 장합이 쉽게 진군하지 못하고 주저했으며, 이를 틈타 왕평이 대파된 군세를 수습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그만큼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의 스페셜리스트인 왕평이 가정 인근의 지리와 제갈량의 절도를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장합에게 자신의 군세가 쉽게 발각되지 않는 지역에 진을 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수만의 군사를 거느린 장합 역시 가정의 지리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해 왕평의 불과 천 여명에 불과한 군사를 발견하는 데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마속의 본군을 격파하고도 혹시나 모를 복병에 대비해 함부로 대군을 이끌고도 공격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달리 생각하면, 마속이 전체 군세를 가지고 했다면 충분히 방어가 가능했다는 것. 그만큼 전투를 말아먹은 상태에서도 양측의 전술적, 지형적인 상황 파악면에서 촉군이 위군에게 앞섰기에 가능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제갈량이 적은 군대를 딸려 보낸 것도 아닌 것이 당시 마속에게 붙여준 부장들이 왕평을 비롯해 4명 정도 되었는데 왕평은 주장인 마속의 명을 거부하고도 부장의 권한으로 천여 명의 군사를 따로 동원해 다른 곳에 진을 칠 수 있었다. 따라서 주장인 마속이 이끄는 부대는 최소 그 몇 배는 된다고 봐야 한다. 1차 북벌에서 촉군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 가정인데 '왕평이 패잔병을 수습하고 제갈량이 후퇴하면서 서현의 1천여 가(家)를 한중으로 데려 왔음에도 완전히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다'는 배송지의 기술이 있을 정도다. 이는 그만큼 제갈량이 마속에게 붙여준 군세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의미한다. 마속은 심지어 이 패배를 수습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도주까지 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줬고 이는 다른 부장들도 매한가지 상황이었다. 왕평이 정말 냉정하게 판단해 이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고 각 진영에 있던 패잔병을 일일이 무사히 수습했으니 망정이지[24] 그게 아니었으면 가정 전투는 촉군에게 더욱 끔찍한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산악전의 특성상 적군 도주 시 추격하더라도 생각보다 사상자가 많이 나오는 경우가 드문데 산으로 뿔뿔히 흩어지면 적을 완전히 섬멸하기에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정 전투는 대파당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각 부대 간 이동이 산에 막혀 있어서 도주 및 퇴각로로써 상당히 불리했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군사를 움직이기 번잡한 곳에 진을 세웠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가능성이 높다. 물론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저 남산에 고립된 채 있다가 물 공급이 끊겨 최후의 항전으로 일제히 치달아 내려왔다가 학살당했다는 패턴도 가능하지만, 이러면 마속의 평가는 더욱 어두워진다. 물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은 짧고 즉각적이다. 그만큼 치명타이며 단기간 빠르게 싸울 기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큰데 마지막 기력을 짜내서 항전했다면 이건 안 봐도 비디오다. 거기에 모두 도륙났는데 정작 본인은 장억처럼 전장에서 죽지도 못하고 도주까지 했다. 답이 없는 것이다.

결국 마속이 패퇴하고 가정이 뚫리면서 천수, 상규 방면에 본진을 두었던 제갈량의 북벌 본대는 후퇴한다.


5. 정리 - 마속은 왜 실패했나?[편집]


본대와 꽤 거리 있는 가정에 마속을 주둔시킨 이유는 역시 장합군 저지말고 없다. 그리고 그 저지는 대치국면, 장기전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곽회전을 참고하면 마속을 백업하기 위해 고상군이 열유성에 주둔한다.

마속의 임무는 장합군 저지 및 장합군이 가정 인근을 벗어나지 못하게 최대한 붙들어 놓음이 틀림없으며 제갈량은 227년부터 1년동안 상주하여 직접 북벌을 기획하였고 이 과정에서 처음엔 주력이 상용과의 연계였더라고 천수, 안정, 남안 등 량주의 군사 이동경로, 현재 군사 배치 파악을 소홀히 하였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다 3군이 제갈량에게 항복한 상황에서 아무리 서량이 위나라 홈그라운드라도 촉 역시 준비한 1년과 서량 현지 지역 세력의 항복으로 최소한 대군이 이동할만한 경로, 위나라 중앙군 지원 경로에서만큼은 위나라에 비해 정보가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조진이 이끄는 부대라면 모를까 장합이 이끄는 부대는 중앙군이 다수라고 볼 수 있는 측면에서 더더욱 그렇다.

이미 전투 시작전부터 고저차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선봉 부장이 말했다. 왕평전을 통해 우리는 이미 전투가 시작하기 전부터 마속이 왕평을 통해 지형이 행동하기에 번잡하였다고 직언했다고 알 수 있다. 이 행동하기 번잡하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유추하는 마속이 산을 올라간 이유인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여 장합군을 공격하는 포지션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지적을 받고 배수진 전략을 위해 마속이 강행했다면 정말 등산바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에 앞서 장합군이 우회기동하여 산에서 평지인 마속군을 공격할수도 없다는 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우회기동해봤자 산에서 평지로 내려와야 하는데 마속이 척후만 잘 배치한다면 결국 산에서 내려오는 장합군은 능히 막을 수 있다. 척후만 잘 된다면 장합군이 내려올 방향에 병사들을 배치하여 대기시킬 수 있다. 산에서 이동하는 것보다 평지에서 이동하는 것이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이 없어서 돌파해야 되는 마속군도 못 하는데 돌파하지 못하면 본진으로 돌아가면 되는 장합군이 돌파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마지막으로 애초에 주위 지형이 번잡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기 어렵다면 장비한테 털린 기억이 있는 장합이 그렇게 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인다.

성이 왜 거기 있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성은 방어 목적인 동시에 읍성의 기능 중 하나인 교통의 요충지라는 표식이기도 하다, 그 지역이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그나마 그 일대에서 교통로이기 때문에 방어를 위해 성이 있다. 그러므로 장합전의 기록인 '마속은 험한 남산에 의지했고, 내려와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는 길목과 방어의 이점을 버리고 산으로 기어올라간 마속을 묘사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굳이 촉서에서도 언급하지 않은 성을 언급한 것은 길목을 지키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것을 표현하였다고 봐야 한다.

분명히 험하다고 나온 산까지 식량을 옮기고 진채를 세우고 용수로를 팔 시간이면 길목에 주둔하여 이중, 삼중 방어망을 구축할 수 있다. 식량과 화살 등 병장기를 다 끌고 올라가면서 용수로를 팔 시간이면 아무리 평지라도 비교적 좁은 길목에서 해자를 파고 이중 삼중 방어선을 치는 것을 못 할 것이 없다. 거기에다가 마속이 용수로를 잃자마자 속절없이 고립되어 힘을 못 쓴 것을 보면 그 용수로를 위군이 한눈에 보기 쉽게 해놓았을까? 나무판자를 가리고 흙을 덮든 해서 위장을 하였을 것이다. 물론 마속이 배수진을 쳐서 위에서 아래로 장합군을 공격하여 격퇴를 생각하였다면 용수로를 정말 전투전 사용목적으로 쓸 목적이라면 그냥 노출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시 고저차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한다고 지적받았다는 점에서 바보짓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산이 그나마 방어하기 좋아서라면 용수로를 사서에는 없지만 최소한의 감출 노력은 했을 것인데 이 전략이 어디봐서 장수의 선택에 맡길 문제라고 보여지는가? 정말 이정도의 노력을 길목에서 분지에서 했다면 장합군에게 속절없이 패배했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최소한 지연만큼은 제대로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길목방어는 제갈량의 명이었다고 유추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마속의 탈영과 제갈량전의 '절도를 어겼다.'는 서술을 보자면 제갈량의 명이 길목을 지키라로 봐야 한다. 정사 삼국지에서 절도라는 말 자체는 많이 나와도 제갈량전처럼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명령, 지휘통제)를 어기고 거동(擧動)이 실의(失宜-부적절함)하여 장합에게 대파 당했다.' 라는 식의 기록은 이 기록이 유일하다.

마속에게는 장합이 가정에 오면 길목 방어라는 제갈량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 타당하고 자신이 현장 도착 후 생각해낸 등산은 왕평이 반대했다. 물론 그 상황에서 길목 방어했다고 장합군을 상대로 승전했을 것이다라고 장담은 못하지만 최소한 전투는 마속의 실제 전투보다는 더욱 길어질 것이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다. 적어도 한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더라면 양주의 농서군이 항복해왔을 거라는 점이나 천수군의 치소 기현의 주민들이 제갈량을 영접하기도 전에 장합이 가정을 돌파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갈량의 예상보다 너무나도 일찍 뚫렸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 행동의 번잡함
고지대를 선점한 가장 큰 이유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형세,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파죽지세로 들이치는 것 또한 급도가 끊긴 이후의 상황을 봤을 때 말할 것도 없는 오판이었다.

장군 마속을 가정까지 파견하고, 고상은 열류성에 주둔하도록 했다. 장합이 마속을 공격하였고, 곽회가 고상의 진영을 공격하여 모두 격파시켰다. -곽회전-


  • 상황에 따라 가정을 지원 할 수 있는 포지션을 맡긴 것 같은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마속에게도. 상황에 따라 열류성을 지원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전체적인 흐름이 열류성과 가정성에서 길목을 틀어 막으면서 서로간의 연계플레이로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는 게 제갈량의 절도였을 거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마속은 대패를 했지만 패전 처리 과정에서 실수를 만회하려는 조금의 노력이라도 보여줬어야 했는데 가정전투는 참전 장수 대부분이 처형 및 중징계를 받았고 패전의 과정은 명령위반에 그로 인한 부대 궤멸은 물론 뒷수습도 제대로 못한 엄청난 졸전이었다.

승상 제갈량은 마속 및 장군 장휴(張休), 이성(李盛)을 주벌(誅罰)하였고 장군 황습(黃襲)등의 병사를 박탈하였으나 왕평에게는 특별히 공적을 높이 드러내[崇顯] 주었으니[見] -왕평전-


명령위반, 급도 미비, 가정성 유기, 행동제약, 패전 수습과 탈영까지 가정 전투에서 마속의 패전은 총체적 난국 그 자체였다.


6. 공성계를 사용했다는 주장[편집]


촉지 제갈량전에 주석으로 달린 곽충삼사[25]에서는 제갈량이 양평관에서 공성계(空城計)를 썼다고 나와 있다. 사마의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양평관 인근에 도달했는데 이때 촉군의 주력 병력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러자 제갈량은 군사들이 함부로 진영을 나가지 않도록 하고 성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이하듯 준비했다. 그러자 의심이 많은 사마의는 오히려 복병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병력을 후퇴시켰다. 이후 뒤늦게 안 사마의는 제갈량에게 당했다며 크게 후회했다. 두우가 저술한 통전 153권 시강(示強)편에도 이 일화가 실렸다.

이 공성계에 대해 배송지는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당시 사마의는 형주 도독으로 완성(宛城)을 진수하고 있었고, 제갈량과 충돌할 일이 없었다. 또한 곽충의 말대로라면 사마의는 당시 촉군의 규모 자체는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복병을 우려했다면 잠시 공격을 멈추고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정도로 족하지 곧바로 후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제갈량의 공성계 일화가 정사에 기록되긴 했어도 배송지는 거짓이라고 반박했고, 곽충삼사에서는 공성계를 실행한 시점이 1차 북벌을 실행한 직후로 나왔다.


7. 창작물에서[편집]



7.1. 삼국지연의[편집]


연의에서는 95회와 96회에 걸쳐 다루며, 군담소설인 만큼 극적 재미를 위해 이런저런 점들이 바뀌었다. 제갈량이 어느새 유비의 경고를 잊고 신뢰하는 마속에게 선봉을 맡긴 것이 대표적이다. 읍참마속 또한 마속이 책임의 무게를 통감하고 스스로 몸을 묶고 와서 죄를 청했는데도 법도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며 참수형을 명하면서도, 가족을 부탁한다는 마속의 마지막 부탁만큼은 들어주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바뀌었다. 처형하고 나서도 제갈량이 '선주(유비)의 말씀을 따랐어야 했다'면서 마속의 죽음이 아닌 유비의 믿음을 저버린 것에 대해 탄식하는 마무리는 덤이다.

덕분에 가정 전투에서 마속이 저지른 삽질이 희석되긴 했지만, 그래도 (연의에서 추측해 서술한) 마속의 전략을 읽다보면 왕평이 얼마나 답답하고 열이 뻗쳤을지 그대로 느껴진다. 아래는 김홍신 평역판 기준.

마속 : 허, 답답한 말씀. 길에 어떻게 영채를 세운단 말이오. 저 옆의 산은 둘레로 이어지는 산도 없고 나무도 무성하오. 이야말로 천혜의 요해[26]

요. 저 산 위에 진을 치고 군사를 머무르게 하는 것이 좋겠소.

왕평 : 그것은 잘못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이 길에다 진을 치고 나무를 베어 높이 울타리를 만들어 놓으면 비록 10만의 적군이 온다 해도 단 한 사람도 뚫고 지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요해지를 버리고 산 위에 진을 세웠다가 위군이 불시에 나타나 사방을 에워싸면 도저히 버텨내지 못합니다.

마속 : 공의 소견이 마치 여자와 같구려. 병법에도 '높은 데에 의지하여 아래를 보면 형세가 대를 쪼개는 것같이 쉽다(憑高視下,勢如破竹。)' 하였소. 위군이 온다면 나는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소!

왕평 : 나는 여러 차례 승상을 따라다니며 영채 세우시는 걸 보아 왔소. 승상께서는 이르는 곳마다 영채 세우는 까닭을 가르쳐 주셨소이다. 지금 이 산을 보니 바로 절지(絶地, 도망갈 곳이 없는 땅)입니다. 만약 위군이 와서 우리가 물을 길러 다니는 길만 끊어 놓는다 해도 우리 군사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마속 : 그대는 여러 소리 하지 마시오. 손자도 말하기를 '죽을 곳, 즉 사지에 든 후에야 산다(置之死地而後生)' 하였소. 만약 위군이 우리의 물길을 끊는다면 우리의 군사들은 목숨 걸고 싸울 것이오. 그렇게 되면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 낼 것이 아니겠소. 나는 일찍부터 병서에 통달하고 있어서 승상까지도 일이 있을 때마다 내게 물으시곤 하시었음을 그대도 알지 않소? 그런데 공은 어찌하여 내가 하는 걸 막으려 하시오.

(중략)

한편 본진으로 돌아온 사마의는 장수들에게 가정을 지키는 장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마량의 아우 마속입니다."

그 말에 사마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간혹 실수할 때가 있다는 말이 있지만,[27]

공명도 사람을 잘못 쓰는 일이 있군. 마속은 헛된 이름만 있을 뿐 용렬한 인물이다. 북 소리 한 번에 그를 깨뜨릴 수 있겠다."


병서에 통달했다고 큰소리 치다가 대패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이 연의에서의 하후무와도 비슷하다.[28] 심지어 앞서 한중 공방전 중 정군산 전투에서 법정이 사용한 계책인 '붉은 기를 휘두르면 내려가서 싸워라'도 그대로 나오지만 정군산 전투에서는 한중 공 위아래가 같이 적을 칠 수 있었던 반면, 여기서는 (따로 부대를 마련한 왕평을 제외하면) 거의 전군이 산 위에 있어서 오롯이 공격하기가 애매했고 그마저도 돌아가는 길이 오르막길인데다 식수가 끊겨서 사기가 바닥을 쳤다. 마속이 저렇게 주워섬기는 손자병법에 그 유명한 지피지기 백전불태가 있는 걸 감안하면 마속의 병법지상주의, 더 정확히는 병법을 핑계삼아 그릇된 판단을 고집하는 행태를 까려고 의도적으로 정군산 전투와 비슷하게 서술한 듯하다.

극적 재미를 위해 곽충의 주장을 차용해 제갈량의 1차 북벌에 사마의도 참전한 것으로 각색했으며, 가정의 패배 후 촉군이 한중으로 총퇴각하면서 물자와 백성들을 이동시키던 도중 제갈량이 있던 서성(천수, 남안, 안정으로 가는 길목)에서 일어난 일로 묘사한다. 여기서 제갈량이 성루에서 홀로 거문고를 연주하는 유명한 장면이 등장한다.

내용은 대충 곽충이 말한 공성계 일화와 비슷하게 나온다. 제갈량은 꾀를 써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루로 올라가 금을 연주했다. 의심이 많은 사마의는 매복이 있을 것이라 염려하고 퇴각한다. 다른 판본이나 2차 창작물 중에서는 이후 제갈량이 비운 성을 사마의가 점령하고, 그제서야 제갈량이 공성계를 썼음을 알아챈 뒤 '이번 싸움은 내가 이겼다. 하지만 지략에선 아직도 제갈량에 못미치는구나.....'라고 탄식하는 장면도 나온다.


7.2. 대군사 사마의[편집]


후편인 사마의 : 최후의 승자에서는 사마의가 주인공인 작품답게 단순히 제갈량에게 속아서 튄 게 아니라 제갈량이 현금을 타면서 조예가 의심이 심하고 종친은 능력자를 견제하는 상황인데 "나 여기서 죽고 촉 망하면 전쟁도 끝났는데 네가 돌아가서 무사할 것 같냐? 너야 이름을 남긴다 해도 니 아들들은 어쩔?"이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이에 사마의가 아직은 촉을 멸망시킬 때가 아니라 판단해 복병 핑계를 대며 철수하는 것으로 각색했다. 조위 정권이 사마의에게 가한 수많은 견제와[29] 이에 대한 사마의의 뒤집기를 공성계와 버무린 재해석이라 하겠다.

[1] 촉 건흥 6년.[2] 좌장군의 오기라는 말도 있다.[3] 위서 명제기에 따르면 228년 정월. 맹달이 사살된 그 시점이다.[4] 타임라인을 생각해보면 맹달의 예에서처럼 사전작업이 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5] 제갈량의 북벌은 천수와 안정을 발판삼아 진창 → 미 → 장안 으로 가는 계획으로 최소한 진창을 확보해야 북벌 성공이라 볼 수 있다. 진창의 위치를 보면 평야지대 + 강으로 둘러싸인 방어의 요충지이다. 또, 1차 북벌 성공해서 장안을 먹고 나면, 상용의 가치는 떨어진다. 굳이 한중에서 상용으로 진출할 필요없이, 장안에서 완을 먹어버리면 상용은 샌드위치가 된다. 또한 완을 촉이 공격하는 시도만해도 오나라는 자기들 이익을 위해 형주에서 북벌을 당연히 하게 된다. 장안 → 완 → 번성 vs 강릉 → 양양 → 번성 식으로 촉나라와 오나라의 양공을 위나라는 이겨내야 한다. 여기서 완을 공격하는 이유는 제갈량의 북벌에, 형주에서 양양 → 완을 치는 계획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며, 이를 다시 재현하고자 할 것이다. 또한 장안 → 낙양이 아니라 완을 친다면 허창과 낙양을 동시에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제갈량이 1차 북벌을 성공해서 장안까지 확보하면, 완을 함락시켜 형북에서의 세를 늘리고, 낙양과 허창을 동시에 견제했을 가능성이 크다.[6] 한편으로는 성공했으면 서북방선을 조위와 끊어버리고 서량강족과 유대관계를 가지며 기마보급과 함께 장안 북쪽으로 진격로를 잡을 수도 있는 좋은 거점이 마련되는 수였으니...장안 북쪽으로 돌아가면 병주 지나서 업성이 나온다.[7] 대군이라고 호칭될 정도니 적은 수의 병력은 아니었을 거고, 따라서 제갈량은 옹양주 각지에 병력을 파견함과 동시에 자신은 기산에 머물면서 한편으로는 눈앞의 천수를 공략하고 만에 하나 있을 보급로 습격에 대비한 것으로 보여진다. 산관에 위군이 넘어오면 제갈량은 뒤가 위급하다. 물론 넘어온 군대도 한중에서 오는 군대에 갇힐 수도 있어 난전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위에서 나오듯이 의군인 조운/등지군이 그래서 나뉜것(각각 진창과 미를 견제하기 위해, 유사시 한중을 통해 산관에서 오는 병력의 뒤를 끊기 위해)이라는 의견이 있다. 아마도 제갈량에게 있어 기산은 지리적으로, 무도, 음평과 천수, 기현, 그리고 별동대로 파견한 조운군 및 위의 조진군, 혹시나 내습할지도 모를 산관 쪽의 위군까지 모든 지역을 굽어보고 제어할 수 있는 머리(headquarters)에 해당되는 요지로 보인다. 제갈량이 기산으로 두 번이나 진출한 건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던 것이다.[8] 제갈량이 주둔한 기산과 서한수 일대의 바로 북쪽 인근이다.[9] 다만 이 일화는 제갈량에게 아부를 하려던 촉나라 사람들을 보고 제갈량이 엄중하게 아부를 막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10] 제갈량이 강유를 얻은 직후 그를 칭찬하는 편지를 장예장완에게 보낸 것만 봐도 제갈량 개인도 인재를 얻었다고 여긴 듯하다.[11] 강유의 투항 경위를 촉서 강유전과 위략을 교차 검증 및 절충하면 천수 지역이 촉에 투항 의사를 알릴 사자로 강유를 제갈량에게 보내 이후 일을 의논하려고 했으나 강유가 촉군에 도착한 이후 장합이 마속을 격파해 촉군을 몰아내자 천수는 항복 여론을 없던 걸로 하려고 꼬리자르기로 강유를 버려 돌아갈 길이 막막해진 강유가 촉에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12] 시중쉰은 섬서성 출신이라 섬서와 감숙을 잇는 이 근방을 살펴보다가 현지 주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공산당 1세대 원로인데다가 현 중국 최고권력자인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한 일이라 앞으로도 중국 학계가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13] 게임에서도 중국 정부의 고관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이곳을 가정이라고 비정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삼국지 시리즈의 가정은 대체로 이 근방에 위치한다.[14] 독사방여기요에 따르면 현대의 농성진은 오호십육국시대의 전진후진의 전투가 있었던 곳에 불과하다.[15] '마이지산 석굴'이라고도 불리며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곳으로 윈강석굴, 막고굴, 룽먼 석굴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4대 석굴로 유명하다. 톈수이시(천수시) 문서 최상단에 위치한 석굴 사진이 바로 여기며 청나라 때까지의 지어진 수많은 석굴이 있어 톈수이시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손꼽힌다.[16] 반론 : 하지만 대안이 없었다. (기곡에서 등지와 함께 조위군 총사령관 조진을 유인 중인 조운이야 애초에 제외하고) 위연이나 오의를 투입하면 곽회서막을 상대하면서 동시에 관서 전역을 평정해야 하는 훨씬 더 어려운 임무를 마속이 (설령 남은 한 명과 분담할지라도 어쨌든) 맡아야 한다. 차라리 가정에서 장합의 발목만 붙잡고 물고 늘어지면서 제갈량의 본대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게 첫 출전으로서는 그나마 해볼만 했다.[17] 당장 기산과 기곡에서 위군보다 병력이 많았으며 제갈량이 촉군이 대군(大軍)이었다고 증언하고 있고 그곳의 여러 부대를 통솔하게 했다는 점에서 결코 적은 병력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며 대군의 선봉인 만큼 병사들의 양과 질도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속의 상대 장군인 장합조차도 중요 부장으로 비요만 확인되는 정도인데 마속은 이름이 확인되는 부장만 4명이다.[18] 물론 장합이 아랫쪽 길로 가면 그 반대도 가능했다.[19] 이미 언급되었다시피 당시 조운은 나름 중요한 임무를 받아 기곡에 있었고 가정전투는 시간싸움이었으므로, 애초에 조운을 보내자는 건 비현실적인 이야기이다.[20] 또한 당시 왕평은 낙양까지 다녀오는 등 실제 지휘관 중에 한중 산 넘어 북쪽을 경험해본 사람이라, 선봉 부장의 보좌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후일 강유를 중용한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이었을 것이다.[21] 마속이 점거한 가정은 남안, 천수, 안정에 도달할 수 있는 제갈량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였는데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근거지가 없어서 퇴각했다고 나온다. 이러한 근거지를 지키는데 조운의 의병이나 열류성과 같은 곳에 주어지는 병사들보다 마속의 군이 더 정예병이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마속이 제갈량의 절도를 지켜 가정을 사수해 시간을 벌었다면 장합이 가정을 뒤늦게 돌파하더라도 준비만만의 제갈량의 본대와 맞붙을 수 있는 상황은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22] 이 사이 위연, 오의, 조운 같은 숙장들이 '망치'가 되어 집중해서 다른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할 수 있고 여차하면 이들을 산관 쪽으로 내려올 수도 있는 위군을 요격하러 보낼 수도 있다.[23] 사실 마속이 진을 친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들은 그리 높지 않아서 오늘날에는 꼭대기까지 논밭이 들어서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일부 병력만 산에 올려 감제고지만 하고 산 밑에서 주둔하고 있는 주력군과 연계하는 방법도 가능했다.[24] 기록에는 마속이 여러 부대를 이끌고 출정했다고 나오는데 왕평 역시 천천히 여러 군영의 패잔병, 장수와 병사들을 수습한다고 나와 마속의 군이 제갈량이 모아준 여러 부대의 모음이라는 기록이 교차검증됨을 보여주고 있다.[25] 곽충이 언급한 세 번째 일(郭沖三事)이란 뜻으로, 정확히는 제갈량의 알려지지 않은 장점 다섯 가지 중 세 번째이다. 자세한 것은 곽충 문서 참고.[26] 要害. 요새의 오타가 아니라, '지세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을 뜻한다. 즉 '요충지'와 같은 뜻이다.[27] 막상 사마의도 이렇게 마속을 박살내놓고 후술할 공성계에 당해서 도망간다.[28] 정사에서의 하후무는 1차 북벌 중에 고발당해서 장군직을 내려놨기 때문에 제갈량과 싸울 일 자체가 없었다.[29] 다만 실제 역사에서 조위정권이 사마의에게 견제구를 날리기 시작한 건 조방 치세 초기 조상이 사마의를 견제할 마음을 품고부터이다. 이 드라마는 사마의의 고평릉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마의에게 지속적으로 견제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 조비-조예 치세에 사마씨 일족은 엄청난 혜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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