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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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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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봉황(鳳雛)
龐統
방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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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정후(靖侯)
작위
관내후(關內侯)[1]
최종직위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
성씨
(龐)

(統)

사원(士元)
생몰 기간
179년 ~ 214년
고향
형주 양양(襄陽)[2]

1. 개요
2. 정사
2.1. 초기 생애
2.2. 유표 휘하
2.3. 손권 휘하
2.4. 유비에게 임관
2.6. 너무 이른 죽음
3. 연의
4. 평가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군사는 덕행이 지극한 인물로 풍이한 기질이 빛난다. 영명한 군주에게 목숨을 바치고 가슴으로부터 충성을 다했다. 이 인의를 근본으로 삼아 몸을 죽이면서 은혜에 보답했다.

《계한보신찬》

후한 말의 전략가. 유비 휘하의 모사. 자는 사원(士元).

형주 양양군 양양현 사람으로서, 자는 사원(士元). 시호는 정후(靖侯)[3]다. 동생은 방림, 아들은 방굉, 숙부는 방덕공, 족제는 방산민. 제갈량의 누이는 방산민과 결혼했으므로 와룡과 봉추는 친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비에게 출사하기 전부터 명망이 높던 선비였으며, 육적, 노숙, 제갈량 등 당대에 이름난 인물들이 하나같이 그를 높게 평가하며 유비에게 권하였는데 이때부터 유비를 따르게 된다. 여기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바로 '백리지재'[4]. 이후 유비군의 군사중랑장으로서 유비가 촉을 얻기 위해 공격할 때 모든 기초전략을 설계하여 유비 세력이 나아갈 대전략을 제시했다.

형세가 불리해도 주군의 뜻이 완고하다면 쉽게 거스르지 못했던 제갈량과는 달리 조운, 법정처럼 아닌 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하여 주군을 제지할 수 있는 강직함과 올곧은 성정을 지녔으며, 이 덕분에 유비는 방통을 제갈량에 버금갈 정도로 후하게 대우했다.[5] 현대의 창작물에선 《삼국지연의》에서 그려진 제갈량에 버금가는 책략과 천재적인 면모, 비록 추남이지만 속은 누구보다 맑고 깊었던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여담으로 제갈량의 이명인 복룡(伏龍)은 엎드린 용이란 뜻이며, 방통의 이명인 봉추(鳳雛)는 새끼 봉황이란 뜻이다. 둘 다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 재주가 무척 뛰어난 훌륭한 인재를 이르는 말이다.


2. 정사[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아버지의 이름은 알려진 바가 없고 맏이일 가능성이 크다. 자에 원(元)이 들어가는 점, 형이 언급되지 않고 형제는 동생뿐이라는 점 등이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양양기에 따르면 제갈공명(제갈량)은 와룡, 방사원(방통)은 봉추, 사마덕조(사마휘)는 수경이라 했는데 이는 모두 방덕공이 말한 것이다. 방통은 방덕공의 조카인데, 어려서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덕공만이 그를 중히 여겼다. 나이 18세 때, 사마덕조에게 가 뵙게 했다.

방통전에 따르면 어릴 때 박둔(樸鈍)[6]하여 그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영천 사람인 사마휘는 청아하여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안이 있었다. 방통이 약관의 나이 때 사마휘를 찾아가 만났는데, 사마휘는 나무 위에서 뽕잎을 따며 방통은 나무 아래에 앉아있게 한 채 낮부터 밤까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세설신어(上권 언어편)에 따르면 남군 방사원이 사마덕조가 영천에 있다는 말을 듣고, 2천 리나 찾아가 기다리다 뽕을 따고 있는 사마덕조를 만나게 되었다. 방사원은 수레 속에서 말했다.

나는 대장부가 세상에 살며 마땅히 고관이 돼야 한다고 들었는데, 어찌 혼란한 세상을 되돌릴 역량이 있으면서 길쌈하는 지어미의 일을 하겠습니까?

사마덕조가 말했다.

당신은 우선 수레에서 내리시오. 당신께서는 참 샛길이 빠른 줄만 알지, 길을 잃고서 헤매게 될 것은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어찌 화려한 집에서 살고 살찐 말만 타고 다니며, 시녀가 수십 명인 다음에만 기이하다 하겠습니까.


방사원이 말했다.

내가 변방에서 나서 자라 대의를 본 일이 적은데, 만약 한번 큰 종을 두들겨 보지 않고 우레 같은 북을 쳐보지 않았더라면, 그 울리는 소리를 알지 못할 뻔했습니다.


양양기에 따르면 덕조가 같이 얘기를 나눠 보고는 잠시 후 감탄하며 말했다.

덕공은 실로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이 아이는 참으로 크고 훌륭한 덕을 가졌다.


사마휘는 그를 매우 남다르게 여기고 방통이 응당 남주(南州) 선비의 출중한 인물이라 칭찬하니 이로 말미암아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상랑전 주석 양양기에 따르면 상랑은 젊어서 사마덕조(사마휘)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서원직(서서), 한덕고(한숭), 방사원(방통) 등과 친하게 지냈다.


2.2. 유표 휘하[편집]


그 뒤 군(郡)에서 명하여 공조(功曹)로 삼았다. 당시 조조가 형주를 평정한 뒤 남군의 북쪽을 갈라 양양군을 새로 설치했으므로 방통을 양양 사람이라 했는데 앞에서 방통이 공조로 복무했다는 ‘군’은 시기로 볼 때 실제로는 ‘남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조란 하급 관원들의 임용을 관장하고 근무실적을 평가하는 인사 담당자다. 그 성정은 사람을 견줘보는 것(人倫)을 좋아하고 길러서 양성하는데 부지런했다. 방통은 매번 사람들의 장점을 지나칠 정도로 칭찬했고, 반면 단점을 비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얼마나 칭찬을 남발해 댔던지 당시 사람들이 대체 왜 그러느냐고 괴이쩍게 여겨 물을 정도였다.

방통이 대답했다.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바른 도가 쇠퇴하니 선인이 적고 악인이 많습니다. 바야흐로 풍속을 일으키고 도업(道業)을 기르려 하는데, 그 칭술하는 말을 아름답게 하지 않으면 명성이 흠모하며 따르기에 부족할 것이고, 흠모하여 따르기에 부족하면 착한 일을 하는 자가 적을 것입니다. 이제 열을 뽑아 다섯을 잃는다 해도 오히려 그 절반을 얻는 것이고, 세상의 교화를 높이고 뜻있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힘쓰게 할 수 있으니 또한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즉, 지금은 천하가 난세이기 때문에 일단 장점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데려다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일단 사람들을 모을 수 있고, 또 그렇게 모인 사람들 중 설령 절반이 쭉정이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머지 절반은 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표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부손은 사람보는 안목이 있었다. 방통을 보고 절반쯤 영웅이라고 생각했으며, 배잠이 끝내 청렴한 행실로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고 증명했다.

제갈량전 주석 양양기에 따르면 유비가 사마덕조(사마휘)에게 세상일에 관해 물었다. 덕조가 말했다.

저 같은 유생 속사가 어찌 시무를 알겠습니까? 시무를 아는 자는 준걸 중에 있으며 이런 준걸에는 복룡과 봉추가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유비가 묻자 덕조가 말했다.

제갈공명과 방사원입니다.



2.3. 손권 휘하[편집]


오의 장수 주유가 유비를 도와 형주를 차지하고 이로 인해 남군태수를 겸했다. 본래 남군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던 방통은 그대로 남군태수 주유의 휘하에서 일하게 되었다. 주유가 죽자 방통은 상여를 운구해 오에 이르르는 역을 맡았는데, 당시 시대상에서 장례가 얼마나 중요시되었는지를 감안하면 방통의 지위나 명망이 상당했다는 뜻이 되겠다. 실제로 오인(吳人)들이 그의 명성을 많이 듣고 있었다. 방통이 서쪽으로 돌아가려 할 때 함께 창문(昌門)에서 모였는데, 육적, 고소, 전종이 모두 참석했다. 방통이 말했다.

육자(육적)는 굼뜬 말이라 이를 만하니 매우 빠른 발의 힘을 지녔고, 고자(고소)는 굼뜬 소라 이를 만하니 능히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까지 갈 수 있습니다.


오록에 따르면 어떤 이가 방통에게 물었다.

그대가 보기에 육자(육적)가 가장 낫다는 것입니까?


방통이 말했다.

굼뜬 말이 비록 빼어나지만 한 사람을 감당할 뿐입니다. 굼뜬 소는 하루에 3백리를 가니 어찌 한 사람을 중함에 비하겠습니까!


고소가 방통의 숙소로 찾아와 대화하다가 물었다.

경은 사람을 알아보기로 유명한데, 저와 경을 비교하면 누가 더 낫습니까?


방통이 말했다.

세속을 도야하고 인물을 품평하는 것에는 제가 경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제왕의 비책을 논하고 의복의 요체를 파악하는 데는 제가 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고소가 그 말에 만족해하며 친근히 대했다.

전종에게 말했다.

경은 베푸는 것을 좋아하고 명성을 흠모하니 여남의 번자소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비록 지력이 많지는 않으나 또한 한 시대의 뛰어난 인물입니다.


육적, 고소가 방통에게 말했다.

천하가 태평해지면 응당 경과 더불어 천하의 선비들을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동오로 간 방통은 전종, 육적, 고소 등 동오의 유력 호족들과 안면을 트고 친교를 맺은 후 돌아온다.

육적전에 따르면 우번은 옛날부터 명성이 있었고, 방통은 형주의 유명한 선비로, 나이는 차이가 많았지만 모두 육적과 우의를 나누었다.


2.4. 유비에게 임관[편집]


유비가 형주를 다스리게 되고 남군이 유비소유가 되자 방통은 졸지에 다시 유비의 부하가 되었다. 유표에서 손권을 거쳐 유비가 된 것인데, 방통의 벼슬살이도 꽤나 파란만장했던 셈.

유비는 방통을 종사[7]로 삼고 계양군 뇌양현의 현령을 맡게 했는데, 현에 있으면서 제대로 다스리지 않아 면직되었다. 이게 연의 상의 묘사처럼 유비가 방통을 무시해서 촌구석에 처박았고 그에 반발한 방통이 그냥 놀고 먹었던 건 아니다. 공조가 현령이 되었으면 승진한 셈이니까. 물론 뇌양현이 워낙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었기에 연의에서처럼 불만을 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 유비는 방통과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눠본 적이 없었다. 방통은 형주 일대는 물론이거니와 손오까지도 명성이 자자하게 퍼진 사람이었지만 유비는 허정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헛된 명성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방통이 현령 자리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자 헛된 명성이었다고 여기고 그냥 잘라버린 듯하다.

오의 장수 노숙이 유비에게 서신을 보냈다.

방사원은 사방 백 리를 다스릴 재주가 아닙니다(非百里之才).[8]

치중·별가 등의 임무를 맡겨야 비로소 그 뛰어난 재능을 충분히 펼칠 것입니다!


치중(治中)은 간단히 설명해서 주목(州牧)의 보좌관 중 2위다. 그리고 별가(別駕)는 1위. 즉 형주목 유비의 부하들 중에서 첫째나 둘째 가는 자리를 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제갈량도 나서서 또한 방통을 이를 말하며 추천했다. 유비가 방통을 만나 얘기를 나누어보고 크게 평가하여 치중종사로 삼았다.

강표전에 따르면 유비는 방통과 함께 풍족히 연회를 열어 대화를 나누었다. 방통에게 물었다.

경이 주공근(주유)의 공조였을 때 내가 오에 갔었소. 듣기로 이 사람이 은밀히 중모(손권)에게 말해 나를 머물러 두게 할 것을 권했다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소? 주인에 속해 있을 때는 그 주인을 위하는 법이니 경은 숨김없이 말해 보시오.


방통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유비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그때 위급하여 응당 요청할 것이 있어 이 때문에 갈 수 밖에 없었는데, 하마터면 주유의 손을 벗어나지 못할 뻔 했구려! 천하의 지모 있는 선비들은 그 소견이 대체로 같소이다. 그때 공명이 내가 가면 안 된다고 간언하며 그 뜻이 홀로 독실했으니 또한 이 일을 우려한 것이었소. 나는 중모(仲謀)가 방비하는 곳은 북쪽이니 응당 내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 때문에 오로 갈 것을 결심하고 의심하지 않았소. 실로 위급한 지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만전의 계책은 아니었소.


친밀히 대우함이 제갈량에 버금갔고 마침내 제갈량과 함께 군사중랑장으로 삼았다. 즉 모든 면에서 제갈량과 동등한 대우를 해 주었다는 뜻이다.


2.5. 유비입촉[편집]


구주춘추에 따르면 방통이 유비를 설득했다.

형주는 황폐해져 사람과 물자가 고갈되었고, 동쪽으로 오의 손권이 있고 북쪽으로 조씨가 있어 곤란합니다. 지금 익주는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강성하여, 호구수 백만에 사부 병마로 나오는 바가 잘 갖춰져 있으니 지금 임시로 빌려 대사를 정할만 합니다.


유비가 말했다.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하면 나는 너그럽고 조조가 사나우면 나는 인자하고 조조가 속이면 나는 충직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지금 사소한 이유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방통이 말했다.

역리로 취하되 순리로 지키어 의리로 보답하고 대사가 이룬 뒤 대국(大國)에 봉해 준다면 어찌 신의에 위배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끝내 남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9]


유비가 마침내 이를 행했다.

제갈량은 남아서 형주를 진수하고 방통은 유비를 수종해 촉으로 들어갔다.

요립전에 따르면 유비가 촉으로 들어가고 제갈량이 형주 지역을 지키고 있을 때, 손권이 사자를 보내 제갈량에게 우호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선비들 중에서 누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을 도울 수 있는지 질문했다. 제갈량이 대답하여 말했다.

방통과 요립은 초나라의 우수한 인재로, 후세에 전해질 제왕의 사업을 보좌하여 일으킬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익주목 유장이 유비와 광한군 부현에서 만났다. 방통이 계책을 올렸다.

지금 이 모임을 틈타 유장을 붙잡는다면 장군께서는 용병의 수고로움 없이 앉아서 한 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유비가 말했다.

이제 막 다른 나라로 들어와 은혜와 신의를 아직 드러내지 못했는데 그리 할 수는 없소.


방통은 평생 행정 업무만 맡아보았지만 유비를 수행하면서부터 이른바 모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방통은 본격적으로 의견을 내놓기 시작하는데 위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같이 몹시 급진적이었다. 방통의 화끈하고도 직선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장이 성도로 돌아간 뒤 유비가 유장을 위해 북쪽으로 한중을 정벌하려 했다.

팽양전에 따르면 마침 유비가 촉나라로 진입하여 장강을 따라 거슬러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팽양은 유비가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유세하기 위해 곧바로 방통에게 가서 만났다. 방통은 팽양과는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으며, 또 마침 빈객이 있었는데, 팽양은 줄곧 방통의 침대 위에 누워 방통에게 말했다.

손님이 오면 응당 그대와 충분히 담소로 나눠야 합니다.


방통은 빈객이 떠난 후에 팽양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앉았다. 팽양은 먼저 방통에게 식사를 요구한 연후에 함께 얘기를 했다. 이렇게 남의 집에서 묵으며 며칠이 지났다. 방통은 그를 높이 평가했고 법정은 이전부터 팽양의 재능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와 함께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유비 또한 팽양을 기재가 있는 인물로 평가하고, 팽양으로 하여금 군사 명령을 전달하여 장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도록 여러 번 명령했다.

방통이 다시 설득했다.

  • 상계(上計): 은밀히 정병을 뽑아 밤낮으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가 곧바로 성도를 습격하십시오. 유장은 굳세지 못한 데다 또한 평소 대비가 없어, 일거에 평정 할 수 있습니다.
  • 중계(中計): 양회, 고패는 유장의 명장으로 각각 강병들을 거느리고 관문을 점거해 지키며, 듣기로 여러 차례 유장에게 장군을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간언했다 합니다. 형주에 위급한 일이 있어 되돌아가 구원하려 한다고 하며 되돌아가는 것처럼 하십시오. 이 두 사람은 장군이 떠난다는 것에 기뻐하여 필시 경기병을 타고 만나러 올 것이니, 장군께서 이 틈을 타 그들을 붙잡고 진격하여 그 군사를 차지하고 이내 성도로 향하십시오.
  • 하계(下計): 백제(白帝)로 물러나 형주와 연결하고 서서히 돌아와 도모하는 것입니다. 만약 망설이며 거행하지 않으면 장차 오래지 않아 큰 곤란을 겪을 것입니다.

유비는 중계(中計)를 옳게 여겨 양회, 고패를 참수하고 군사를 되돌려 성도로 향했고 지나는 곳마다 번번이 이겼다. 방통이 상계(上計)로 꼽은 건 정예병을 뽑아 즉시 성도로 진격하여 유장을 습격하자는 것이었다. 최단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적의 우두머리를 치자는 것이니, 예전에 그 자신이 제안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과격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유비는 이번에도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가 채택한 건 방통의 중계(中計)였다. 즉 먼저 양회와 고패를 제거하고 이후 주위를 평정하면서 성도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유비는 본래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우선시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고, 영토 내의 호족과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민족들에게조차 널리 은혜를 베풀면서 호의를 얻었다. 그렇게 유비라는 이름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천하에 각인되었다. 서주에서는 미축을 비롯한 호족들이 앞장서서 그를 주목으로 추대하였으며, 형주에서는 무려 십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조조를 피해 그를 따라갔고, 익주의 유력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끌어들일 정도였다.

그렇기에 유비는 처음부터 급박하게 유장을 공격할 마음이 없었다. 그보다는 시간을 들여가며 천천히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을것이다. 그래서 장로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북진했으면서도, 막상 장로를 공격하는 대신 오히려 은덕을 베풀면서 익주 사람들을 천천히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다소 과장되게 말하자면 익주가 스스로 자신에게 바쳐지기를 원것. 그건 비록 느리지만 그만큼 뒤탈이 없고 안정적인 방식이었다.

반면 방통의 방향성은 주군인 유비와 정반대였다. 그는 일단 눈에 보이는 성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확실한 성과를 내면 그 후에 뒤따라오는 부작용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과거에 인재들을 지나칠 정도로 칭찬한 것도 찬밥 더운밥 가릴 것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인재를 발탁하여 일단 머릿수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그렇게 인재를 모은 후에야 비로소 옥석을 가려도 늦지 않는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유비가 보기에 방통처럼 과격한 방식은, 당장은 효율적일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번이나 방통의 계책을 물리친 것이다.

부현에서 큰 모임을 열어 술을 차리고 음악을 연주케 했다. 방통에게 말했다.

오늘 모임이 가히 즐겁구려.


방통이 말했다.

남의 나라를 치고 즐거워하는 것은 어진 이의 군대가 아닙니다.


유비가 술에 취해 있었는데 노하여 말했다.

무왕이 주(紂)를 치며 그 앞뒤로 노래 부르고 춤췄는데 그도 어진 이가 아니었단 말이오? 경의 말이 맞지 않소. 속히 일어나 나가시오!


이에 방통이 머뭇거리며 물러났다. 유비는 곧 후회하고는 되돌아오도록 청했다. 방통이 다시 예전 자리로 돌아왔으나 돌아보고 사죄하지 않으며 태연자약하게 먹고 마셨다. 유비가 말했다.

조금 전의 논의에서 누가 잘못한 것이오?


방통이 대답했다.

군신(君臣)이 함께 잘못했습니다.


유비가 크게 웃으며 당초처럼 술자리를 즐겼다.

이에 습착치와 배송지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무릇 패왕(霸王)은 필히 인의(仁義)를 갖추어 이를 근본으로 삼고 신순(信順)에 기대어 이를 근원으로 삼으니, 한 가지라도 갖추지 못하면 그 도가 어그러지는 법이다. [10]이제 유비가 유장의 땅을 습격하여 빼앗고 권(權-권도, 권의)으로 일을 이루니, 신(信)을 저버리고 정(情)에 어긋나 덕의(德義)가 함께 잘못되었다. 비록 이로 말미암아 공(功)이 융성하다 하나 의당 크게 상하고 패한 것으로, 비유컨대 손을 끊어 몸을 보전한 격이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방통은 이 말이 누설될까 두렵고 그 주인이 필히 깨우칠 것임을 알아 이 때문에 뭇 사람들 속에서 그 실수를 바로잡으니, 늘 겸손함의 도를 갖추지 않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기탄없이 간언함의 기풍을 다하였다. 무릇 위에서 잘못했을 때 능히 바로잡을 수 있으면 이는 신하가 있는 것이고, 나은 것을 받아들여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치에 따르는 것이다. 신하가 있으면 섬돌이 융성하고 당이 높아지고 이치에 따르면 여러 모책들이 모두 거행된다. 한마디 말로 세 가지 선(善)이 겸하여 밝혀지고 잠시 간언하여 백대에 걸쳐 의를 밝히니 가히 큰 줄거리에 통달했다 이를 만하다. 작은 손실을 아까워하여 큰 이로움을 폐하고 지나친 말을 조심하여 스스로 직언을 끊고 멀리하면서 능히 대업을 이루고 일을 성공시킨 자는 일찍이 없었다.
습착치의 주

유장을 습격하도록 꾀한 것은 그 계책이 비록 방통에게서 나왔으나, 의로움을 거슬러 공을 이루고 본래 궤도(詭道-부정한 방법, 속임수)에 말미암은 것이라 내심 꺼림칙하여 즐거운 마음은 절로 그치게 마련이니, 이 때문에 유비가 즐거워하는 말을 듣고 무심결에 경솔하게 대답한 것이다. 유비가 술자리를 한창 즐긴 것은 시의에 맞지 않아 그 일은 화를 즐기는 것(樂禍)과 같은데, 자신을 무왕에 비교하며 더더욱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유비의 잘못이고 방통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군신이 함께 잘못한 것'이라 말한 것은 아마도 (유비에게 향할) 비방의 말을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습착치의 견해는 미루어 넓힌 말로 문장이 막힘없이 유창한 말을 한 것에 가깝다.
배송지가 덧붙인 주


2.6. 너무 이른 죽음[편집]


진격하여 광한군 낙현을 포위했다. 방통은 군사를 이끌고 성을 공격하다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으니[11] 그때 나이 35세였다. 유비가 몹시 애석하게 여겨 하니 말할 때 눈물을 흘렸다. 방통의 부친을 의랑으로 삼고 간의대부로 승진시켰으며 제갈량이 친히 임명했다. 낙성 전투는 213년에서 214년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방통이 죽은 해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자치통감에 따르면 214년에 죽었다고 한다.

계한보신찬 주석에 따르면 장존은 평소 방통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방통이 화살에 맞아 죽었을 때, 유비가 방통을 찬미하는 말을 하자, 장존은 이렇게 말했다.

방통은 비록 충성을 다하여 아까운 인물이지만, 위대하고 아정한 도의를 어겼습니다.


유비가 노여워하며 말했다.

방통은 자신의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 사람입니다. 다시는 그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장존의 관직을 파면시켰다. 오래지 않아, 장존은 질병으로 죽었다.[12]

방통은 항상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대범하게 들이밀었다. 그게 주군의 생각과는 전혀 다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기에 유비에게 있어 방통은 더욱 더 소중한 존재였다. 게다가 신중한 제갈량과 급진적인 방통은 서로를 보조해줄 수 있는 좋은 조합이기도 했다. 제갈량 역시도 자신과 함께 유비를 모시며 대업을 이룰 만한 인물을 잃고 말았다. 이는 비단 방통 한 사람만의 죽음이 아니라 유비 세력 전체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일대 사건이었다.[13]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군사(방통)는 덕행이 지극한 인물로, 풍아한 기질이 빛난다. 영명한 군주에게 목숨을 바치고, 가슴으로부터 충성을 발했다. 이 인의를 종주로 하여 몸을 죽이고 은혜에 보답했다.

방통전에 따르면 방통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정후(靖侯)라 했다. 후주전에 따르면 260년 가을 9월,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죽고나서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가 내려진 것인데 방통의 시호는 정후(靖侯)라고 했다.

동생 방림은 방통 사후에도 유비 밑에서 일하다가 이릉대전 때 황권과 같이 위를 견제하다가 유비가 패하고 퇴로가 끊기자 위에 항복했다.


3. 연의[편집]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 서서와 친구 사이로 나온다. 정사에서는 외모가 추하다는 묘사가 없는데[14] 연의에서는 외모가 추하다는 설정이 붙었다.[15] 사마휘가 유비에게 "와룡봉추 중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제패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과장되었다.

적벽대전에서 연환계로 조조군의 배를 묶은 이야기는 연의에서 새로운 캐릭터 등장을 위한 창작으로 정사에서 조조군의 배는 애초부터 묶여있었다. 주유는 조조군의 군선에 화공을 할 생각이었으나, 한 척에 불을 지펴도 다른 배는 도주하여 불이 번지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된다. 방통은 장간을 속여 조조의 군영에 잠입하여 조조와 만나 북방인의 약점인 배 멀미에 대한 대책으로 배들을 쇠사슬로 연결하라고 진언하였다. 또 오로 돌아가면서 조조의 신하가 된 친구 서서가 화계에 휘말리지 않도록, 적벽과 정반대편에 있는 서량이 뒤숭숭하다는 헛소문을 퍼트리고 스스로 그 진압대가 되라고 계책을 주었다. 이후 불이 붙어도 조조군의 군선은 흩어지지 않았고 조조군은 화공으로 대패했다.

방통은 주유의 장례식 때 문상을 하러 건너온 제갈량과 만나 이미 유비를 섬긴다는 선약을 하고 추천장을 받았다. 노숙은 방통의 공을 언급하며 손권에게 그를 등용하도록 권유해서 손권이 방통과 대면해본다.

손권은 먼저 심드렁하게 주유를 들먹이면서 "그대의 재주가 주유에 비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라며 은근히 비교하자 방통은 거만하게 대답한다. 손권은 그의 볼품없는 외모와 태도에 질려서 그를 내쳤다. 방통이 손권의 대답에 성의 없이 대답한 걸 보고 노숙은 방통을 따라와서 사과하다가 그의 태도를 떠올리고는 애초부터 손권을 따를 마음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방통이 그렇다는 반응을 보인 뒤 조조에게 가볼까 한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하자 노숙은 화들짝 놀라서 차라리 유비를 섬기라고 권유하여 동오와의 화친을 다져 달라고 부탁한다. 방통도 흔쾌히 받아들인 뒤 노숙의 추천장을 받고 유비에게 갔다.

방통이 유비의 휘하로 들어왔을 때, 유비는 방통의 추한 외모[16]를 보고는 그에게 뇌양현이라는 작은 마을의 현령 지위를 맡겼는데, 방통은 거기서 업무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지방관으로 보냈더니 탱자탱자 놀기만하는 방통을 혼내주러 장비가 가게 된다. 여기서 장비의 성질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곧바로 방통의 목을 치지 못하게 손건을 붙여 보냈다. 또한 당시 뇌양현의 술맛이 너무 좋아 시찰 온 장비가 본분을 잊고 술독에 빠질까봐 술 대신 물을 팔라고 명을 했다.

물론 장비도 그 동안의 경험으로 참을성이 생겼는지, 방통의 꼴을 보고서도 냅다 드잡이를 하는 대신 "형님이 그나마 널 믿고 이런 자리를 줬는데 이것마저도 못하냐"고 짐짓 디스부터 걸고 보았다. 방통은 이를 듣자 "내가 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고 맞받아치더니, 다음날 관리들을 시켜 밀린 사안을 가져오게 한다. 장비가 입회한 자리에서 방통은 귀로 민원을 듣고 눈으로 서류를 보며 입으로 결정을 말하는 동시에 손으로 결과를 작성하는데, 반나절만에 밀린 작업을 모두 해치웠지만 그 판단에 반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17][18]놀란 장비가 곧장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사죄하자, 방통은 그제서야 제갈량과 노숙의 추천서를 보여준다. 이에 장비가 "왜 이 글을 진작 보여주지 않으시고...?"라고 묻자 방통은 "그러면 그 글에 의지하고 온 것 같아서 싫었다. 나는 내 능력으로 인정받고 싶었다."라며 사실을 밝힌다. 유비 역시 뒤늦게 장비에게 모든 사실을 전해듣자 탄식했고, 그제서야 제갈량과 노숙의 추천서를 읽고 다시금 탄식하고는 방통을 중용했다고 한다.[19] 하지만 사실 정사에서 방통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면직된 것이고 실제 행정 업무에서 능력을 보여 중용했다는 기술은 없다. 정사에선 유비가 다시 방통을 만나 면접을 해보고 그를 높게 사 등용했을 뿐이다. 다만 정사에서도 제갈량과 노숙이 그의 군사, 정략적 재능을 높이 추천한 것은 사실이다.

이후 파촉정벌전에서 유비를 따라 선발대로 가는데, 양회와 고패를 죽이는 장면은 그들이 먼저 유비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죽이는 걸로 바꿔서 유비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다. 정사에서는 사실 죄없는 양회와 고패를 죽인 것이다.

한편 방통의 죽음은 정사에 이런저런 살을 붙여 극적으로 진행되지만, 약간 비하하는 내용이 되었다. 위에서 유비가 양회와 고패를 죽이고 곧 성도로 쳐들어갈 준비를 하다가 "혹시 형주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하여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답장편에 "천문을 보니 안 좋은 징조가 있으므로 부디 조심하시죠"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유비가 진군을 망설이자 방통은 재촉했고, 유비가 제갈량의 이름을 거론하자 자신보다 그를 더욱 믿는다 여겨 더욱 센 어조로 채근한다. 결국 유비는 방통의 말대로 출진하는데 방통은 샛길에는 매복이 있을 테니 자기가 그 쪽으로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이에 유비가 응낙했으나 공교롭게도 출발할 무렵에 방통의 말이 놀라 방통이 말에서 떨어지자, 유비가 이를 보고 다시금 망설였지만 방통은 "거 말이 놀란 거 가지고 확대해석하시는 거 아닙니까"라고 넘겼다. 이에 유비는 자신이 평소 타고 다니던 하얀 말은 순할 거라며 말을 바꿔 탈 것을 권했고 방통도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20] 그러나 못내 마음에 걸린 유비는 샛길로 가는 방통을 눈물로 배웅했고, 방통도 이에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21]

그렇게 앞서가던 방통은 문득 스산한 기운을 느끼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다가 같이 가던 부하[22]에게 이 곳의 지명을 물었는데, "낙봉파"라는 대답을 듣는다. 그 순간 낙봉파는 봉황이 떨어지는 계곡이란 뜻인데 내 호가 봉추이니 곧 내가 죽을 곳임을 깨달았으나, 이미 매복해 있던 장임의 군사들이 백마를 탄 방통을 유비로 착각하고 날린 화살에 맞아 죽는다. 뒤따라가던 유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고, 형주에서 주군을 대신해 연회를 주최하던 제갈량도 큰 별(파군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방통이 죽었다며 슬퍼했다. 관우를 비롯한 아랫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곧 유비의 서신이 도착한 뒤에야 알고 슬퍼한다. 이에 제갈량은 관평이 서신을 가지고 온 것에서 유비의 뜻을 헤아려 형주를 관우에게 맡기고[23] 유비에게 가면서 파촉정벌전의 전황은 완전히 뒤집혀 유비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정사에서 방통이 죽은 곳은 낙봉파가 아닌 낙성이며 장임은 유비에게 연전연패만 하다가 방통보다 먼저 죽었다. 장임이 처형당하고 그 이후 전투에서 방통이 전사한 것. 현재 쓰촨성에 가보면 낙봉파라는 관광지가 있고 그 근처에 방통의 묘도 있다. 이 무덤은 방통의 몸은 없고 옷만을 묻은 의관총으로, 방통이 전사할 때 입었던 피묻은 옷만 묻혀있다고 해서 혈묘라고 불린다.


4. 평가[편집]


방통은 평소 인재를 견줘보는 것과 경학(經學), 사모(思謀-모책을 생각함)를 좋아하니 형(荊), 초(楚) 땅에서 그를 고준(高俊)이라 일컬었다. 위나라 신하에 견주자면 방통은 순욱의 중숙(仲叔-형제, 막상막하)이고, 법정정욱, 곽가의 주려(儔儷-견줄만한 짝, 동류)이다.

진수


군사는 덕행이 지극한 인물로 풍이한 기질이 빛난다. 영명한 군주에게 목숨을 바치고 가슴으로부터 충성을 다했다. 이 인의를 근본으로 삼아 몸을 죽여서라도 은혜에 보답했다.

《계한보신찬》


제갈량이 정석을 기반으로 한 완벽하게 승리할 수밖에 없는 정파같은 전략을 세운다면, 방통은 대담하고 훨씬 유동적인 상황 변화에 따른 전략을 세우는 데 능해 마치 사파와 같은 전략을 많이 세웠다. 진수는 방통을 두고 평가할 때 조조가 "자신의 장자방"이라 일컬을 정도로 위나라 개국공신 1순위인 순욱과 막상막하라고 평했다. 또한, 진수는 법정에 대해 정욱, 곽가에 비견된다고 하였는데, 제갈량과 함께 방통과 법정은 익주시기 유비 진영의 핵심 참모, 모사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었으며 진수는 방통과 법정을 같은 전에 두어 두 사람을 동류로 보았으나 그가 비교한 대상을 비교해보자면 방통 쪽을 좀 더 높게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다시 말해 법정은 계책을 잘 짜내는 모사로서 인정한 것이고, 방통은 순욱처럼 나라 전체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대신의 위격으로 본 것이다. 와룡과 봉추의 비유처럼 두 사람은 서로 뒤떨어짐이 없는 천하의 기재인 셈이다.

관직에 출사하기 전, 방통에 대해 높이 평가했던 것은 방덕공사마휘였고 이들은 방통에 대해서 제갈량과 쌍벽이라고까지 말했다. 방통은 형주와 양주의 이름있는 선비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쌓았는데 그럼에도 임관한 뒤 주유와 유비 밑에서 시시한 관직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뛰어나다고 일컬어지던 유비가 노숙과 제갈량의 추천으로 직접 방통을 대면함으로 인해 방통의 인생은 피게 되었다. 유비는 사마휘, 방덕공과 마찬가지로 그의 능력이 최소 행정 능력을 배제하고 전략적인 면모와 포부 및 재능만 보면 제갈량과 비견된다고 파악하여 제갈량과 버금가는 대우를 하였고, 그를 제갈량과 나란히 군사중랑장으로 임명하였다. 방통이 살아있었더라면 이미 당시에 제갈량과 동급인 군사중랑장 대우를 받은 데다가 촉 정벌에 뒤따른 군공까지 추가되었다면 제갈량과 나란히 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오히려 제갈량 이상 가는 대우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

제갈량이 방통과 엮어서 평가한 요립은 이후 서민으로 강등되었고, 방통의 천거를 받고 승승장구하던 팽양을 좌천시켰기에 방통에 대한 제갈량의 평가를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요립과 팽양이 좌천된 것은 제갈량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과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립은 자신의 재주와 명성이 제갈량 다음간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유비의 사후 중용되지 못하고 이엄의 수하의 위치가 되자 조정에 불만을 제기하다 유배당한 것이고, 팽양은 역모를 꾸민 혐의가 있어서 좌천된 것이다. 애시당초 제갈량과 방통은 서로 사마휘를 통해 연결되어 있었고 노숙이 유비에게 방통을 추천하자 제갈량 역시 그에 동조했던 만큼 제갈량은 방통을 높게 보고 있었다. 게다가 적어도 저 둘과는 달리 방통은 유비와의 연회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주의 심정을 능란하게 파악해 냉각된 분위기를 푸는 분위기메이커로서의 능력도 정사에 보인다, 성품면에서도 저들과 비교가 불가한 수준인 것. 실제로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 방사원을 찬(贊龐士元)하길, '군사(軍師, 방통)는 덕행이 지극한 인물로, 풍아한 기질이 빛난다. 영명한 군주에게 목숨을 바치고, 가슴으로부터 충성을 발했다. 이 인의(仁義)를 종주로 하여 몸을 죽이고 은혜에 보답했다.' 라고 평하고 있다.

군사에 뛰어난 것은 방통이며, 정치와 국가적 발전에 뛰어난 것은 제갈량이라는 설이 있다. 남중 평정 이전까지 군권을 맡은 적이 2차 증원군으로 익주에 들어왔을 때 1번밖에 없는 제갈량에 비해서 방통은 들어오자마자 서촉 정벌군의 참모이자 실질적인 군의 수뇌부가 되었기 때문. 그가 군을 이끌고 서촉을 정벌할 때 거듭하여 큰 군공을 세운 점을 감안하면 신빙성이 있는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방통이 유비에게 올렸다는 헌책들은 매우 뛰어난 기책들이었는데, 유장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유장을 사로잡아야 한다든지 또는 정예병을 뽑아 수도를 급습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들이었다. 이는 정략에 가까운 책략인데 주로 정공법을 토대로 하고 여기에 간간이 군사적 기만책을 섞는 방식을 선호하였던 제갈량과는 다른 병법 운용이다. 이는 유비 사후의 촉한에 또 다른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방통이 즉각적인 실효를 낼 수 있는 전략, 전술에 더 능하고 제갈량은 큰 그림을 그리고 기반을 다져 천천히 목표로 나아가는데 더 능한 것으로, 축구에 비유하자면 방통은 갖가지 시도를 통해 부진한 성적을 반전시켜 곧바로 승리를 가져오는 데 능한 유명 클럽 구단 감독 같은 인물이고, 제갈량은 당장 효과는 안 나와도 지속적으로 선수들을 발굴하고, 강하게 훈련시켜 어떠한 상황에서도 꾸준히 성적을 내는 하나의 팀을 만들어내는 국가대표 감독과 같은 역할에 능했다 할 수 있다.

보통 제갈량의 군사능력에 진수의 '임기응변의 장략' 떡밥을 물고 늘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미 1차 북벌의 조운의 의군으로 조진의 본군 묶기-본대 기산 급습공격 플랜이나 2차~3차 북벌연계로 무도-음평 탈취, 5차북벌의 허를 찌르는 오장원 둔전 및 북원 공격 등 대국적인 군 운용에서라면 기만적인 운용을 상당히 많이 선보인게 제갈량이다. 다만 제갈량은 튼튼한 민정을 통한 군비확충, 그리고 그렇게 준비한 군비를 바탕으로 팔진도로 대표되는 정석적인 전군 통솔력에 군사적인 능력의 기반을 두고 있다면,[24] 현재 조건을 가지고 상대의 틈을 노려 모험적인 시도도 불사하는, 저런 허를 찌르는 정략, 기책, 책략류는 확실히 방통의 것이었고 이는 분명 제갈량과 대조적이었다. 물론 이릉전의 대패로 그동안 애써 키워왔던 신진 유망주들과 병력 군수물자들을 말아먹은 상황에서 안전을 고집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도 제갈량의 군사운용에 영향을 줬으나, 그게 아니더라도 행정 중심, 명분주의적 장기 플랜을 감안하는 전반적인 전시 상황 속 재상으로서의 제갈량의 성정을 감안하면 기습이나 납치, 협박같은 정략적인 기책은 총참모장에 가까운 방통의 전문분야에 더 가깝다.[25]

하여간 이릉대전에서의 대패로 많은 인재를 통째로 날렸을 때 얼마 전에 죽은 법정의 부재만으로도 탄식한 제갈량이다. 자기와 비견된 방통의 급작스러운 전사에 아쉬워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제갈량이 익주 전선에 투입된 것은 방통이 죽기 전의 일이다. 더구나 방통(책략+뛰어난 용병술)과 제갈량(약간의 책략+정석적인 용병술+내정)은 능력의 성격 자체가 달라 서로 대체할 수 없는 인물이기에 새로 유비의 본거지가 된 익주 전체의 내정 관리를 담당할 인물은 제갈량밖에 없다. 순욱의 역할을 순유, 정욱, 곽가, 가후가 대체 불가한 것과 비슷하다. 제갈량은 방통이 죽기 전에 이미 입촉을 하였고 형주보단 익주가 메인이니 제갈량은 익주에서 군비를 확충해 유비 및 법정 황권이 공격 전술을 담당하고 형주에 방통과 마량, 마속 형제가 같이 투입되어 전반적인 내정과 전술을 준비할 수 있다. 또한 방통의 형주 방가는 형주에서 최상위 가문이기에 유력 호족들의 협력을 얻기도 편해졌을 것이다.

방통의 죽음은 파죽지세였던 유비군의 방심과 조금 앞서 있었던 양주에서의 마초 세력 완전 축출로 인한 초조감이 겹쳐 벌어진 비극으로, 유비 입장에서는 크나큰 실책이자 상처일 수 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때까지 온갖 생고생을 하면서 가족은 잃어도 어떻게든 핵심 참모 집단은 어떻게든 잃지 않았던 유비 입장에서는 서주 탈출이나 장판 같은 생지옥도 아니라 자기 측이 공세였던 유리한 전장에서, 장수도 아닌 책사를 전사하게 만든 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고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장존의 눈새 발언에 대해서도, 뜬금없이 장존이 방통을 디스했다기 보다는 바로 그런 충격적인 사건에 의해 유비가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책망하고 분위기가 나빠지는 것을 막으려다 서로 엇갈린게 아닌가로 추측하는 이가 있을 정도. 여기서 또 새삼 재평가 되는게 바로 법효직이다. 제 한 쪽 날개가 되어줄 봉추를 허무하게 화살에 잃고 끊임없이 후회하던 유비 입장에서 그 후임격인 책사가 대뜸 화살비 앞으로 달려 나가면 당연히 트라우마 스위치가 켜질 테고,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을 터 방통과는 함께 익주 공략의 브레인으로서 협업했을 테고, 어떤 의미 그 후계적 자리를 꿰찬 인물이기도 한 법정이 이런 유비의 심리에 대해 몰랐을 리가 없는데 이놈은 아예 의도적으로 자기 목숨까지 걸고 그 트라우마를 자극해 제 목적을 이룬 셈이며 참으로 지랄맞은 그 성격이 베어나오는 지략이었다.

이런 걸 보면 참 법정의 캐릭터가 끝내준다 싶으면서도 그렇게 '방통처럼 떠나보내지 않으려' 했음에도 결국 얼마 안 가 그를 잃고 만 유비, 그리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유비를 제지할 수 있었던 그의 부재를 아쉬워 한 제갈량의 심중에 대해서도 또 새삼 촉빠들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5. 여담[편집]


  • 방통이 전사하지 않고 살아만 있었더라도 이릉대전[26]에서 뭔가가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이릉대전까지 살았다고 해도 방통은 제갈량보다 겨우 두 살 많았을 뿐이니 이제 겨우 40대 중반밖에 안되는 나이였다. 게다가 개인적으로서도 방통의 숙부 방덕공의 아들 방산민이 제갈량의 작은 매형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 인척관계이기도 했고 방덕공의 집에 제갈량이 자주 찾아갔고 방덕공이 방통을 아꼈으며 방덕공을 중심으로 제갈량, 방통, 그들을 유비에게 추천한 사마휘까지 친분들을 다진 정황이 포착되니, 오랜 지기이자 인척, 동료를 잃어버린 셈이 된 제갈량 입장에선 그 아쉬움만큼이나 슬픔이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 전장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실제 정사에서 제갈량은 행정능력이 대단하지만 군사적 실무능력은 방통, 법정 등의 인물이 더 뛰어나 야전사령관 역할을 맡았다는 서술과, 방통 특유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즉흥적인 성격에서 우러나오는 임기응변도 겸비했을 것이라는 가설에 기반해볼 때 제갈량-방통 콤비라면 대국적인 군사전략 전반은 제갈량이 맡고 대전략을 전략 단위로 소화하여 책략과 첩보를 통한 적의 교란을 노리는 방통의 결합은 분명 촉한의 북벌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도움이 안되었을 리가 없다. 전술면에서 거의 도통한 수준인 법정이야 자연사로 추정되니 어쩔 수 없다지만 방통은 병사가 아니라 전사라는 점에서 하다못해 제갈량만큼만 살아줬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고 실제로도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제갈량급의 인재가 하나 더 있어서 서로 다른 분야를 맡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니 제갈량도 역사에서보다 업무 부담이 줄어들어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란 기대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방통이 계속 살아 제갈량과 함께 이후 촉한의 북벌을 이끌었다면 어땠을지 아쉬워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 이릉대전 빼고도 촉한 인재풀이 너무 일찍 사라졌다면서 언급되는 사람들이 주로 세명이 있는데 45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법정과 36세에 전사로 세상을 떠난 방통, 그리고 54세에 과로사로 추정되는 사인으로 세상을 떠난 제갈량이다. 이들이 1~20년만 더 살아 줬다면 판도가 바뀌었을 거란 말을 하는 삼덕들도 많고, 당장 조선시대의 선비들도 그렇게 보았다.[27]

군자와 소인 중에 누가 요절하는지 장수하는지를 보면 세도(世道)가 비색(否塞)한지 통태(通泰)한지를 점칠 수 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54세로 그쳤고, 법효직(法孝直)은 겨우 45세를 살았으며, 방사원(龐士元)은 가까스로 36세를 살았다. 나이 70을 넘긴 자는 글을 받들고 가서 항복을 빌었던 초주(譙周)였을 뿐이니, 하늘이 과연 한(漢)나라의 덕에 싫증을 낸 것인가.

- 조선, 이유원


  • 촉한도 강유, 요화, 장익, 동궐, 유은, 황충 등 노장들이 많긴한데 아무래도 진짜 기반 아무것도 없던 유비를 천하의 한축에 올린 3대 책사라고 할 수 있는 제갈량, 방통, 법정의 임팩트가 너무 컸다. 특히나 법정과 제갈량의 이른 죽음[28]과로를 원인으로 보는 현대의 시각이 많아 그들의 과중한 업무를 방통과 나눌 수 있었다면 다들 조금 더 오래 살지 않았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도 가능하다. 제갈량은 군정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던 사마의와는 달리 북벌부터 내정까지 치러야할 업무가 지나치게 많았다.[29] 촉나라의 작은 인프라로 대륙 세력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효율적인 시스템 구축을 위해 스스로를 갈아넣었으며 그렇게 군비를 충실히 확충하면서 결정적인 한 수를 노렸던 제갈량마저도 마속의 대형 실책으로 인해 북벌의 가장 중요한 전력요충지인 가정을 도로 빼앗겨버려 북벌이 더더욱 어렵게 되었다. 만약 제갈량, 방통, 법정이 저들처럼 70을 넘겼다면 각각 250년, 247/248년, 245년까지는 버텨준다는 얘기다. 당장 이들 또래인 사마의가 251년까지 살았다. 만약 제갈량과 방통, 법정 3인방이 저때까지 살았다면 사마의와 위나라 입장에선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제갈량 1명을 상대하기 버거워 견벽거수하며 수비만 한 사마의를 상대로 저 3인방이 촉한의 북벌을 지휘했다면 어떠했을지 생각해보라.

  • 청성잡기의 저자인 조선의 선비 성대중은 '제갈량이 (사마의처럼) 살아있었다면 서쪽을 막느라고 정신없어 어찌 정권을 찬탈하였을 시간[30]이나 있었겠느냐?' 평가한 바가 있는데 괜스레 나온 평가는 아닌 셈이다. 하물며 방통과 법정까지 있었다면, 하다못해 방통이라도 추가되었으면 더할 나위가 없었으며 사마의 시대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익양대치랑 형주 공방전에서 끝난 게임일지도 모른다. 제갈량이나 방통이 형주를 지키고 번성을 공격하는 관우를 지원했다고 생각해보라. 관우는 정치력이 다소 부족한 인물이였기 때문에 결국 부하 단속과 후방 유지에 실패해서 패사했는데 그 일들을 제갈량이 맡았으면 훨씬 나았을 가능성이 높다. 미방 같은 자들이 두 마음 먹지 않게 잘 관리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결국 여몽이 형주에 쳐들어올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관우의 부재라는 호재에도 쉽게 쳐들어가지 못해서 내응자의 도움을 받고도 기습까지 해야했던 그 여몽이 말이다. 참고로 245~250년이라면 한참 뒷세대인 강유비의의 '우리는 제갈승상만 못하다.' 드립을 들으면서 그가 제한을 건 병사 1만만 가지고 농서에서 곽회와 하후패, 진태, 등애와 드잡이질을 하며 고군분투하던 시기다.[31]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당시 비의 대신 촉한 군부 상층에서 강유의 상관으로 존재했다면 강유의 고군분투 역시 본 역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32]

  • 삼국지 공명전을 플레이해온 촉빠들은 방통이 살아 있었다면 방통의 원군이 맥성을 구원해서[33] 도원종언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방통/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사후에 추봉됨.[2] 현대의 샹양[3] 시법에 따라 해석하면 "올곧음으로 절개를 지키다.", "깊이 헤아려 대의를 이루다." 등의 뜻이 있다. 방통의 시호는 사후 수십 년 뒤에 추증되었으며 유비가 방통의 죽음을 슬퍼할 때 "방통은 죽음으로 인의를 관철한 자다." 라고 말했던 기록의 영향으로 정후로 추증된 것으로 추측된다. 공교롭게도 똑같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위나라의 전략가 곽가와 시호가 같다.[4] 사방 백 리에 걸친 마을을 다스리는 능력이라는 의미로, 고사성어의 한자 해석만 본다면 '크게 특출나지 않은 범상한 인물'이란 뜻이지만 이 백리지재라는 표현은 오나라 대도독 노숙이 유비에게 서신을 보내며 "방통은 백리지재(한낱 백 리 땅을 다스릴 인물) 따위가 아니라 국가의 대업을 맡겨야 할 인재입니다."라며 유비를 설득한 데에서 유래했기에 백리지재라는 고사성어의 실제 뜻은 재능이나 포부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커서 중대한 일을 맡길 수 있다는 뜻이다.[5] 방통 사후에도 그가 남긴 족적은 지워지지 않아 유비는 방통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6] 국내에 퍼진 번역본에서는 '투박하고 둔하여'로 번역되었다. 박둔이란 칼이나 검의 무딤을 표현하는 말로, 방통이 천성부터 날카롭고 번뜩이는 영민함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다는 뜻이다.[7] 주 자사를 보좌하는 관직으로 주로 문서담당.[8] 이 일화에서 백리지재(百里之才)라는 사자성어가 유래되었다.[9] 즉 서천을 취하는게 전체를 봤을 때 더 인의를 위하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셈이기도 하다.[10] 여기서 말하는 패왕은 문장으로 보아 순자가 말하는 패도(覇道)의 군주를 말하는것 같다. 이는 '덕이 온전치 못하고 의가 완전치 못하나 대체로 천하의 도리가 모여있음. 형벌과 포상이 매우 분명하여 천하와 뭇 신하들의 신임을 삼. 한번 선포한 정령을 바꾸지 않으니 백성을 속이는 일이 없음. 한번 협약을 맺는다면 동맹국을 속임이 없음. 옛날의 패자들은 이같이 하였으므로 변방의 나라이면서도 천하를 호령했고, 강대하여 중원을 위태로이 하였음. 이른바 '신信이 우뚝 서면 패자가 됨'은 이를 가리킨다.[11] 방통의 생사여부와 상관없이 낙성 전투는 무난하게 유비의 승리로 끝났다. 다 이긴 전쟁에서 화살에 맞아 허무하게 죽은 것이다.[12] 장존은 기록이 짧지만 능력은 있던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그런 사람을 인재를 아끼는 유비가 파면시킬 만큼 방통의 죽음을 애석하게 본 모양이다. 그것 이외에도 자신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다 전사한 핵심 인재를 잃은 것을 애도하는 상황에서 고인을 폄하하는 발언을 그냥 용인하면 군의 전체 사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고 기강을 잡는 의도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13] 당장 윗 문단의 말을 보듯, 방통은 언행을 행함에 있어 거침이 없었고 주군일지라도 당당히 간언하였다. 유비는 그것을 노여워하지 않고 당장의 화가 일었을지라도 금방 깨우치고 본뜻을 헤아림으로써 되려 유비와 방통의 사이는 더더욱 긴밀해졌다. 이처럼 이 둘의 사이는 물과 물고기가 만난 것과 같았으니 방통의 죽음은 유비 입장에서는 더욱 애석한 일이었다. 제갈량은 매사에 신중하고 꼼꼼했으며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으나 그것이 되려 느리고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다. 방통은 전략을 짬에 있어 급진적이고 기만적이었으며 빠르고 서둘렀다. 둘의 성향이 이처럼 정반대였지만 둘 모두 사람됨이 올바르므로 그렇기에 이 두 전략가가 서로 의논하여 일을 처리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방통이 익주 정벌 이후까지 살아남았다면 익주에 방통, 형주에 제갈량이 남아(혹은 그 반대로) 손오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조를 칠 수도 있었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이는 유비 세력은 한중 정벌 때 최고점을 찍었으며 형주의 관우는 부족한 인재풀에도 번성을 공략하고 허도를 위험에 빠뜨렸으며 조조가 겁먹고 천도를 고민하게 만들고 조위의 모든 장수들이 번성에 집중되도록 만든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있다.[14] 국내에 퍼진 방통전 번역본에서는 '어려서 투박하고 둔하여'라고 적혀있어서 외모가 투박했다는 기록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원문은 상술했듯이 '박둔(樸鈍)하여'로 외모가 아닌 성격 이야기다.[15] 묘한 건 손권도 유비도 방통을 처음 봤을 때는 추한 외모 때문에 꺼리는데 조조만 아무 거리낌 없이 방통을 대환영했다. 연의 묘사상으로는 조조만이 방통의 외모를 차별하지 않고 대했는데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된다. 이때 방통에게 데인게 트라우마가 돼서 이후 장송이 찾아왔을 때 문전박대한 이유가 됐다는 드립이 나올 정도였다.[16] 요코하마 미스테루의 전략삼국지에서는 추한 외모로 그려지진 않고 나름 미형인데다가 조조나 손권에게 갔을때는 이런 이야기는 일절 없었지만, 유비는 보자마자 외모에서 오만방자하고 거만함이 묻어 나온다고 말했다. 즉 간단히 말해 '싸가지 없게 생겼다'고 별로 탐탁치 않아했다.[17] 사실 그동안 놀던 게 진짜 놀기만 했던 건 아니고 미리 어느 정도 머리 속에 업무 해결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해결했으면 유비가 안 알아봐 주고 변방에서 조용히 지낼 것이고, 그렇게 자신의 명성과 그에 상반되는 행동을 하여 시찰까지 오게 되자 시찰 온 사자에게 임팩트를 주기 위해, 일부러 보여주기 식으로 모든 일을 하루 만에 처리한 척 했을 가능성이 높다.[18] 사실 이 이야기는 정사의 장완에게도 있다. 방통은 현령으로 딱히 성과를 못 내자 노숙이 '백리지재 아님'이라고 커버쳐줬고, 장완은 근무시간에 술 먹다 걸려서 빡친 유비한테 죽을 뻔 했는데 제갈량이 '백리지재 아님'이라서 커버쳐줬다는 이야기인데, 나관중이 이 둘을 짬뽕시킨 거다. 재능낭비하는 비백리지재가 둘이나 있는 유비군[19] 노숙이 보낸 편지 내용은 정사와 거의 같다. "방사원은 사방 백 리나 다스릴 재주꾼이 아니니(非百里之才), 치중·별가 등 특별한 임무를 맡겨야 비로소 그 뛰어난 재능을 충분히 펼칠 것입니다." 김홍신 평역판에선 몇 줄이 더 붙었다. "외모만 보고 중책을 맡기지 않아 일을 그르쳐 방사원이 다른 사람에게 가 버린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될 것입니다."[20] 유비가 방통에게 양보한 말이 주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적로였다는 추측이 있는데 그 말은 단순히 백마로만 묘사되어 있고, 적로는 말의 이마에 흰 점이 박혀있다는 뜻이라서 백마가 아니다.[21] 일부 책에서는 백마가 아닌, 그저 자기가 타고 있는 말을 주기로 했다고 나온다. 이는 형주에 있을 때부터 나온 복선으로, 유비가 적로를 타고 채모에게 쫓길 때 강에 이르렀는데 채모의 군대 소리에 놀란 적로가 강에 뛰어들었다. 유비는 적로를 보며 자신을 죽일 것이냐 외쳤는데 이때 적로가 높이 뛰어올라 강의 반대편에 안착했으며 유비와 채모는 모두 어안이 벙벙하였으나 유비는 그대로 말을 몰아 해매다 사마휘를 만나게 된다. 이후 돌아오던 유비는 서서를 만났으며 서서에게서 적로는 주인을 해하는 말이니 타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으나 유비는 이미 앞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며 괜찮을 것이라고 답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적로는 입촉 때 방통에게 넘겨지고 결국 방통이 적로와 함께 기습당하여 결국 주인을 해한다는 그 내용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으로 어찌보면 떡밥회수다.[22] 판본에 따라선 위연이라고도 한다.[23] 이 때 관우가 "형님을 위해 '목숨을 지켜서라도' 지키고 말겠다"라며 대답하자, 중책을 맡은 몸치고 목숨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고 생각하여 "조조와는 맞서되 손권과는 친하게 지내라"라는 팁을 주고 떠난다. 이는 훗날 관우의 죽음에 대한 복선이 된다.[24] 원래 정치와 군사는 다른 방면같지만, 전략가의 관점에서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라고 본 적이 있으며, 강한 군대는 원래 튼튼한 산업과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 근면한 국민들의 기풍, 꾸준한 신무기 개발, 공정한 상벌을 바탕으로 갖추어지는 것이다. 제갈량은 전투의 승리는 전술보다는 전략적인 관점에서 판가름난다고 보았고, 그렇기에 전쟁준비 단계인 민정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정책을 수립했던 것이다. 현실에 대입해봐도 아무리 뛰어난 장군진과 많은 병력이 있어도 그걸 뒷받침하는 민정 시스템이 갖춰지지 못하면 아무리 작전을 잘 짜도 실전에서 무기도 식량도, 훈련도도 부족해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비근한 사례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러시아가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도 효과적인 전력을 구축할 수 있는 민정 시스템이 망가져 있기 때문이다.[25] 심지어 그래서 '방통이 살아있었다면 거의 내놓은 계책수준이 자살행위 수준에 불과한 위연의 자오곡 계책도 뭔가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게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하는 헛된 기대마저 하는 삼덕들마저 아직 있을 정도니. 물론 방통이 비슷한 상황에 임했으면 공명이 추진했던 양동작전을 더 공세적으로 돌려서 최단시간으로 위군을 안쪽으로 유인해서 일거에 주력을 분쇄하고, 바로 적의 거점을 급습하는 전법으로 갔을 것이다.[26] 그보다 전인 형주 공방전 때 제갈량 방통 둘 중 하나라도 남아 관우를 도와 형주를 빼앗기는 일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27] 장수 중에는 46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마초가 대표적이다.[28] 사실 제갈량은 50대까지 살았으니 요절한 것은 아니었지만 천수를 누리지 못한 것은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29] 유비나 관우, 장비가 살아있었다면 자신은 내정과 대전략을 짜는데 집중하고 야전은 유비나 관우, 장비에게 맡기면 되었겠지만 그 셋이 죽고 북벌에서 큰 몫을 해줄 수 있는 황충과 마초마저 죽었기에 제갈량이 맡아야 하는 업무가 엄청나게 과중되었다.[30] 고평릉 사변이 249년의 일이니 확실히 일리있는 얘기다.[31] 물론 비의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의가 북벌이 무조건 소극적인 인물은 아니었다.[32] 사실 촉한 군부의 노익장화야 이미 250년대에 상당히 진행된 상황이니 여기에 이 나이대의 제갈량, 방통이 들어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것은 아니다.[33]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조조가 맥성을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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