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쿤도 마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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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 제3대 대통령
호세 파쿤도 마차인 리칼데
José Facundo Machaín Recalde


출생
1845년 11월 26일
파라과이 아순시온
사망
1877년 10월 29일 (향년 31세)
파라과이 아순시온
국적
파일:파라과이 국기.svg 파라과이
임기
파라과이 제3대 대통령
1870년 8월 31일 ~ 1870년 9월 1일
배우자
클라라 리칼데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파라과이 제3대 대통령이자 파라과이 역사상 가장 짧은 대통령직 임기를 수행했다.[1]


2. 생애[편집]


칠레 센트럴 대학교에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가 1869년 아순시온으로 돌아와 정치에 입문했다. 정치인 모임인 그란 클루브 델 푸에블로(Gran Club del Pueblo)[2]의 회장이 되었고, 국회의원으로 선출되면서 1870년 제헌 국회의 핵심 일원이 되었다.

삼국동맹전쟁으로 수도 아순시온이 점령당한 후, 3국동맹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시릴로 안토니오 리바롤라, 카를로스 로이사가, 호세 디아스 데 베도야로 구성된 삼두정치를 펼친다.[3] 이후 1870년 5월 호세 디아스 데 베도야가, 1870년 8월 31일 카를로스 로이사가도 사임하면서 제헌국회는 임시 정부를 해산하고 새로운 임시 대통령으로 파쿤도 마차인을 임명했다. 표결에서 37대 5로 승리했지만 시릴로 안토니오 리바롤라가 불복하더니 다음 날 새벽 3국동맹군의 도움을 받고 쿠데타를 일으키며 마치인은 12시간만에 실각했다.

이후 1872년 대법관, 1874년 6월엔 외무부 장관직을 역임했다. 1876년 2월 3일 아르헨티나의 재무부 장관인 베르나르도 데 이리고옌(Bernardo de Irigoyen)과 협상하여 마차인-이리고옌 조약을 체결하고 파라과이는 공식적으로 미시오네스 주와 그란차코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였다. 또한 1876년 7월 3일까지 파라과이에서 3국동맹 점령군을 철수시키는 것으로 합의했다.

1877년 4월, 제6대 대통령인 후안 바티스타 힐이 암살당하자 피의자측 변호인으로 활동하다가 투옥되었고 1877년 10월 29일 32세의 나이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교도관들에 의해 살해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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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 12시간에 불과하다.[2] 지금의 콜로라도당의 전신이다.[3] 아르헨티나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심지어 아르헨티나 헌법이 사용되기도 했다.[4] 반정부 인사들이 단체로 투옥되었다가 살해된 사건으로 교도소 대학살(la matanza de la Cárcel Pública)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