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베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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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최악의 영국인 10명'을 선정. 다만 현직 정치인은 제외되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잭 더 리퍼
토머스 베케트
에아드릭 스트레오나
존 왕
리처드 리치 경
6위
7위
8위
9위
10위
타이터스 오츠
윌리엄 오거스터스
휴 디스펜서 더 영거
토머스 아룬델
오스왈드 모슬리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




성인명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축일
12월 2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캔터베리(Canterbury)
출생년도
1119년 12월 21일 혹은 1120년 초
사망년도
1170년 12월 29일

1. 개요
2. 생애
3. 매체



1. 개요[편집]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 1118년 ~ 1170년)은 중세 서방교회의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가톨릭성공회의 성인이다.


2. 생애[편집]


런던의 주 장관인 길버트 베케트(Gilbert Becket, 1090 ~ 1143?)와 캉[1]의 마틸다(Caen of Matilda, 1090 ~ 1141)의 아들로 태어난 성 토마스 베케트는 노르만족의 후손이다. 그는 런던에서 출생하여 서리(Surrey)의 머튼 프리오리(Merton Priory)수도회[2]수학했으며, 런던에서는 법률을 공부하고 파리 대학교에서도 그의 전문 과목을 계속 연구하였다. 부친의 사망으로 궁핍한 환경으로 내몰린 그는 1141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관으로 들어갔다. 이때 벡 테오발드 대주교(Theobald of Bec, 1090 ~ 1161) 대주교는 성 토마스 베케트가 이탈리아볼로냐(Bologna)와 프랑스의 오세르(Auxerre)[3]에서 법률을 공부하도록 조처해 주었다.

그는 1154년에 부제로 서품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테오발드 대주교의 명을 받고 로마(Roma)를 오가면서 중요한 일들에 관여하였다. 1155년 성 토마스 베케트는 헨리 2세에 의하여 잉글랜드(England)의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국왕 다음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헨리 2세를 수행하여 프랑스 툴루즈(Toulouse)로 원정을 나갈 때에는 부대장도 맡았다. 1161년 오브 벡 테오발드 대주교가 서거하자 헨리 2세는 성 토마스 베케트를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물론 그는 이 직책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1162년 그는 수상직을 사임한 후 사제품을 받고서 대주교로 착좌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엄격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1164년 영국에서는 성직자의 권한을 제한하는 클라레든 칙령을 통과시켰다. 성직자를 교회법이 뿐만 아니라, 세속법정에도 세울수 있게 한 법안이다. 이 법은 교회 법정에서 행해야 할 성직자의 권리와 교황청에 호소하는 권리를 부인하는 악법이었다. 베케트는 처음에는 마지못해 법안을 수용했다가, 대주교로서 교회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생각되어 1166년 '클라렌든 칙령'을 거부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성 토마스 베케트는 프랑스로 축출되었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이 사실을 교황에게 상소하였지만헨리 2세와 반목하기를 원치 않았던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 교황은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 이처럼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케트가 반목하고 있을 때, 성 토마스 베케트는 교황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 퐁티니(Pontigny)[4]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1166년 헨리 2세가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지역에서 모든 시토회 회원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할 때, 성 토마스 베케트는 상스(Sens)[5] 교외의 성 콜룸바(Columba) 수도원으로 가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Louis VII)의 보호를 받았다. 루이 7세의 노력에 의해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케트는 평화 협정을 맺었고, 비로소 그는 잉글랜드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정치적인 사건 때문에 그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무참히 살해당하였다. 베케트는 종교재판관을 맡아서 재판을 진행했는데, 이 때 헨리 2세가 원하는 수준보다 온건하게 죄인들을 처벌해서 심기를 건드렸다. 이로 인해 헨리 2세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한 것. 이게 헨리 2세가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인지, 아니면 부하들의 '과잉 충성'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사건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사망 즉시 순교자로 선포되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자 헨리 2세는 공적으로 잘못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유해가 모셔진 성 토마스 베케트의 경당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모이는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남긴 다음의 말은 아주 유명하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기꺼이 행하였다."

하지만 그의 수난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으니 1531년, 수장령을 선포하며 교회와 연을 끊고 막 나가기 시작한 헨리 8세가 뜬금없이 360년 전에 죽은 그를 역모 혐의로 기소(...)해버렸다. 그러면서 항변을 할 게 있으면 30일 간의 기한을 줄 테니 법정에 출두하라고 했지만, 당연히 이미 저승 간 양반이 부활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백골이 진토 된지라 재판정엔 나타나지 않았다. 이 궐석재판에서 헨리 8세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뒤 캔터베리 성당에 모셔지던 그의 유골을 불태우고, 조문객들이 바친 헌금을 싸그리 털어갔다.

영국의 시인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은 그를 소재로 "대성당의 살인"을 썼다.

하지만 21세기에 와서 그의 행적이 재평가되면서 정교분리 원칙을 깨뜨리고 '영국 왕권을 교황권에 종속시키려 했던 가톨릭 광신자'라는 악평도 늘어나게 되어, 2006년 영국 BBC에서 선정한 최악의 영국인 여론조사에서 2위로 뽑히는 등 최근에는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3. 매체[편집]


이우혁의 소설, 퇴마록의 등장인물 박신부엑소시즘을 행할 때 베케트의 십자가를 사용한다.
켄 폴릿의 장편소설인 대지의 기둥의 최후반부를 장식하는 대목이 이 살인사건이다. 당시 사회상을 잘 드러낸 소설로 강직하지만 지나치게 고지식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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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 서북부 바스노르망디 칼바도스에 있는 도시[2] 머튼 프리오리 수도회와 수도원 건물은 런던에 있는 머튼구에 있었는데 헨리 8세가 수도원 철폐령으로 사라지고 현재는 슈퍼마켓이 그 터를 차지하고 있다.[3] 현재의 부르고뉴 욘주의 주도[4] 현재의 프랑스 부르고뉴 프랑 슈 콩테에 있는 작은 도시[5] 프랑스 부르고뉴 욘주에 위치한 작은 도시[스포] 마지막에 헨리왕의 불평을 확대해석해서 살인을 계획하고 쳐들어온 햄리 일당을 필립 수도원장이 저지하고 서둘러 도망가자고 하는데 주교성당을 떠나는 걸 거부할뿐만 아니라 일단 일과를 지키자고 이동하는것도 느릿느릿 걸어가니 초반에 묘사로 호의를 가진 독자 입장에선 답답해 미칠 노릇. 그래도 최후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은 숭고하게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