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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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잉글랜드 국왕, 노르망디 공작, 앙주 백작, 멘 백작, 아키텐 공작, 가스코뉴 공작, 푸아티에 백작, 낭트 백작, 브르타뉴 공국 상위 주군, 스코틀랜드 왕국 상위 주군, 아일랜드 영주 등을 겸임하며, 잉글랜드와 프랑스 서부에 걸친 넓은 영토를 통치했다. 또한 그로부터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잉글랜드에서 331년 동안 이어졌다.
아버지는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Geoffroy V d'Anjou)[1] 였으며, 어머니는 헨리 1세의 유일한 적녀인 마틸다였다.[2] 헨리 1세의 외조카였던 스티븐 왕이 죽자 1154년에 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앉아 있는 동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의 혼인을 통해 오늘날 프랑스의 부유한 남프랑스 지방을 물려받아 영토가 크게 확장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며 플랜태저넷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로서 뒤를 이어 왕이 되었던 리처드 1세와 존 왕와의 갈등으로 결코 평탄치 못했다.[3] 젊은 시절부터 가정에 신경을 잘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인 엘레오노르 및 그녀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인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조프루아 2세 등과는 사이가 무척 나쁜 편이었다. 그 때문에 말년에는 권력 투쟁으로 얼룩진 가정사를 겪다가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의 대명사라고 할 만한 인물. 젊을 때부터 콩가루 집안의 징조가 보였는데, 부친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는 임종 당시, 헨리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게 된다면 동생인 낭트 백작 조프루아에게 앙주와 멘 백작위를 넘길 것을 당부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자신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헨리는 앙주와 멘 영지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해 동생에게 영지를 넘겨주길 거부했고, 부친의 시신을 매장하지 않았다. 결국 지인들의 설득에 부친의 장례만 치뤘다.
이 왕 때부터 영국 왕실에 다시 앨프레드 대왕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외조모인 헨리 1세의 왕후 스코틀랜드의 마틸다가 앨프레드 대왕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왕실 계보도> 참조.
2. 왕위에 오르다[편집]
마틸다는 잉글랜드 왕위를 놓고, 사촌인 스티븐 왕과 무정부시대라는 오랜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스티븐 왕은 자신의 상속자가 될 장자 외스타슈[4] 를 잃자 다 포기하고 마틸다와 화해, 윌링포드 조약으로 그녀의 아들 헨리 2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했다.
그 후 스티븐 왕이 실의로 일찍 죽자, 즉위한 헨리 2세는 어머니와 외당숙이 벌인 내전 탓으로 개판이 된 잉글랜드를 다시 안정화시키고, 혼란기 동안 잉글랜드를 넘보던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군주들을 데꿀멍 시켰다.
3. 업적[편집]
그는 결혼과 군사, 두 가지를 통해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헨리 2세는 19세에 결혼을 하게 되는데 아내는 자신보다 10세 연상이였던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전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였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왕비였던 시절부터 남편과의 불화와[5] 고향 아키텐과 프랑스의 정치적 갈등 등으로 루이 7세와의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렀다. 엘레오노르와 루이 7세는 교황에게 청해서 혼인무효[6] 판결을 받았다. 웃긴 건 엘레오노르와 루이 7세는 10촌[7] 이라 근친상간이라는 이유로 '혼인무효'가 되었는데, 몇 달 후에 결혼한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는 이보다 더 가까운 8촌 지간이었다.[8]
이미 결혼 전부터 정부가 있었고, 결혼 후에도 늙은 처에 만족하지 못하며 대놓고 바람을 피워서[9] 왕비와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와의 사이에서 5남 3녀를 두었는데, 그중 왕이 된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존 왕이 유명했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왕보다 영지가 넓다는 아키텐 공작의 상속녀였는데, 헨리 2세와 재혼하면서 푸아티에, 아키텐 지방이 잉글랜드 국왕에게로 넘어왔다. 여기에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 지방까지 합치니 잉글랜드 + 프랑스 서쪽 절반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의 군주가 되었다.[10] 그리고 엘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유럽 왕가와 혼인관계를 맺어 시칠리아, 독일, 카스티야의 영지를 획득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말콤 1세를 조져서 충성 서약을 받아내고 노섬벌랜드 등의 영토를 되찾았다.
그는 내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능한 재판관 토마스 베켓(Thomas Becket)을 등용해 행정과 사법 제도를 정비해 봉건 군주국에서 관료 군주국으로 잉글랜드를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충신이었던 토마스 베켓은 헨리 2세가 주선해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자 그와 대립했다. 이 시기는 잉글랜드 왕국 내 교회의 영향력을 두고 왕권과 교황권이 격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는데, 내 편 해달라고 기껏 임명한 놈이 뒤통수를 거하게 때려버린 셈이니...
"헨리 2세가 얼마나 베켓을 싫어했냐?"면, 당시 교황이었던 알렉산데르 2세에게 베켓을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에서 해임하라고 협박하는 편지에서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이슬람으로 개종하겠다."라고 협박할 정도였다.[11][12][13][14] 그러나 교황은 그의 협박에 굴하지 않았고, 끝까지 헨리 2세와 베켓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불화가 커져서 헨리 2세는 베켓과 크게 다투고는
라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발언[15] 을 했고, 그 말을 들은 부하 넷이 즉시 대성당으로 가서 안에 매복해 있다가 베켓이 나타나자 토마스 베켓을 쳐죽였다. 하지만 헨리 2세는 그의 부하들이 베켓을 죽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는데, 베켓이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당황했고, 교황청에서 토마스 베켓을 성인으로 시성해버리는 바람에 큰 낭패를 보고 말았다.[16][17][18]"저 말썽쟁이 성직자를 내게서 없애줄 이는 없단 말인가?"
4. 말년[편집]
헨리 2세는 자신의 생각대로 영지를 분할하고자 했었다. 2남인 청년왕 헨리[19] 에게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3남인 리처드에겐 아키텐을, 4남 제프리에겐 브르타뉴를[20] 물려줄 생각이었다. 아일랜드 정복 전까지 존은 상속분이 없었고, 이것 때문에 훗날 결지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헨리 2세는 존을 많이 아껴 그에게 물려줄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아일랜드를 침공해 영지를 획득했다.
왕은 청년왕 헨리를 잉글랜드의 왕위에 앉히고, 공동으로 순회를 도는 등의 행보를 보이며 후계를 탄탄히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헨리 2세는 결코 아들에게 실권을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청년왕 헨리는 자신의 기사들에게 제대로 봉급조차 주지 못했고, 아버지의 계속된 간섭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권력에 대한 욕구가 점차 부자간의 갈등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잉글랜드를 꺾고 싶었던 루이 7세는 청년왕 헨리를 꾀어서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려고 유도했다. 사실 이 꼬드김보다는 어머니인 엘레오노르의 부추김이 더 컸다. 당시 엘레오노르는 남편인 헨리 2세와의 좋지 못한 결혼 생활과 남편의 바람기, 정치적 갈등으로 헨리 2세에게 상당한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엘레오노르는 청년왕 헨리 뿐만 아니라 리처드와 제프리에게 권력 분배를 빌미로 반란을 일으키라고 부추겼다. 그런 상황에서 루이 7세까지 끼어들자 3명의 불충한 아들들은 프랑스의 궁정으로 갔고, 곧 아버지를 향한 반란을 개시했다.
헨리 2세는 아들들의 반란에 충격을 받고, 분개하면서도 노련하게 대응했다. 노르망디를 향해 세 갈래로 몰려오는 반란군을 모두 격파하고는 오히려 세 아들들 모두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헨리 2세는 여기서 멈추며, 아들들을 사면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제안했고, 결국 3명의 아들들은 항복했다. 또한 루이 7세는 쓴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엘레오노르는 이 반란 중에 헨리 2세에게 붙잡혀서 감금당했는데 헨리 2세가 사망하고서야 풀려나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형제들 중 가장 어렸다는 점도 있겠지만, 어쨌건 막내아들 존만이 이 대반란에 합류하지 않고, 헨리 2세의 곁을 지켰다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헨리 2세는 자식들 중에서도 마지막까지 존만을 편애했다. 물론 결말은...
대반란 이후 청년왕 헨리는 여전히 권력 분배가 되지 않고, 아버지의 간섭을 받으며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다시금 반란을 준비했다. 하지만 곧 병에 걸려 사망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버지에게 사면을 구했다. 헨리 2세도 아들의 마지막 부탁은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청년왕 헨리는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병사했다.
리처드 또한 이 대반란으로 상당히 찍힌 것으로 보인다.
어쨌건 그렇게 화해하고 난 뒤에도 아들들끼리 신나게 쌈박질을 해댔다. 서로 부유한 아키텐 땅을 둘러싸고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가 각각 리처드와 신나게 싸워대다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청년왕 헨리는 이질로 급사해버리고, 제프리 또한 병으로[21] 사망했다. 이렇게 되자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헨리 2세가 아키텐 땅을 둘러싸고 리처드와 또 다투게 되었는데, 리처드는 "아키텐은 어머니가 물려주는 건데, 아버지가 왜 간섭이냐?"라며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특히 아키텐은 리처드가 자란 고향인터라 그는 이를 소중히 여겼는데, 헨리 2세가 이를 멋대로 존에게 주겠다고 선언하자 리처드가 반발한 것이었다. 리처드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 2세는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이번 싸움에서는 헨리 2세 쪽이 수세에 몰렸다. 결국에는 어찌어찌 화해했지만 문제는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선포되자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는 대립을 멈추고, 십자군 참전을 준비하려 했으나 의견 차이로 휴전은 결렬되었다. 어쨌건 양국은 대립과 함께 참전 준비를 하는데...
아키텐을 둘러싸고 헨리 2세와 3남 리처드는 계속해서 충돌하고 있었다. 헨리 2세는 가장 사랑하는 막내 아들인 존에게 아키텐을 물려주려 했고, 리처드는 아키텐의 지배권을 꽉 쥐고 헨리 2세의 후계자로 등극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또 아마 예전부터 쌓인 것들이 터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22]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었고, 헨리 2세는 그들의 협공에 쫓기며 패배가 기정사실이 되어가던 즈음, 그에게 마지막이자 가장 큰 충격이 찾아왔다. 바로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막내아들 존마저 휘하의 부하 기사들과 함께 리처드의 편에 선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크게 상심한 헨리 2세는 가뜩이나 궤양으로 건강이 나빴는데 홧병으로 악화되었다.[23] 헨리 2세가 이 사건으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죽기 직전에 주변 사람들이 하느님께 기도할 것을 권하자
라며 버럭 화를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정말, 정말 내 아들 존이란 말이더냐? 내 아들들 중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이란 말이더냐? 내가 지금까지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던 게 누구 때문인데, 그 존이 나를 배신했단 말이더냐? 더 이상 아무 말 말라. 이제는 모두 내려놓겠노라. 짐은 물론,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이제는 마음 쓰지 않겠노라."
결국 1189년 7월 6일에 풍운아 헨리 2세는 시농에서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죽어가는 헨리 2세의 곁을 끝까지 지킨 사람은 서자인 제프리[24] 와 충성스런 심복 윌리엄 마셜뿐이었다.[25] 전설에 의하면 리처드 1세가 아버지의 시신을 보기 위해 방안에 들어서자, 갑자기 헨리 2세의 시신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헨리 2세가 리처드를 저주하며 죽어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5. 자식들[편집]
자식들이 하나 같이 웬수들이었다. 다만 이는 아들들이고, 딸들과는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헨리 2세 자신이 자초한 면도 컸다. 국정을 열심히 하고 워낙 바쁘게 돌아다닌데다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잉글랜드에 자주 오지를 않았기 때문에[26] , 자식들 대부분은 성장기에 아버지 얼굴 한번 보기가 힘들었다. 보다못한 캔터베리 대주교가
라면서 자식들 좀 자주 보라고 권할 정도였다. 이러니 장성한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별 애정이 없고, 자주 보던 어머니와 친했던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가정에 무심하고 바람기로 인해 아내와 사이가 나쁜데도 화해하지 않고, 반란 이후 아내를 감옥에 가두고는 풀어줄 생각을 하지 않으니 아들들이 아버지를 좋게 볼 수 없었다. 특히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아들들에게 직책만 주었지 권한을 주지 않았기에 이는 아들들을 힘들게 만들었고, 아들들의 영지 분배도 독단적으로 하여 이는 아들들과의 불화를 커지게 만들었다. 청년왕 헨리에게는 노르망디, 리처드에게는 아키텐, 제프리에게는 브르타뉴, 막내 존에게는 아일랜드의 통치권을 약간씩 주고, 처리하기 힘든 안건을 도와주는 식으로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면 아들들의 불만은 훨씬 줄었을 것이다."아무리 비정한 부모라도 폐하보다는 나을 겁니다."
프랑스의 왕 루이 7세나 필리프 2세가 정치적인 이유로 부자들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막내아들인 존 왕과 딸들을 빼고는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27] 다만 막내 존 왕은 아버지를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헨리 1세부터 부지런히 모은 프랑스 쪽의 영토를 날린 일등 공신이었다. 리처드 1세의 공격을 받은 헨리 2세의 주변에 남은 아들은 오로지 서자 제프리 뿐이었다고 한다. 헨리 2세는 제프리에게
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그놈들은 후레자식들이고 너만이 내 진정한 자식이다!"
그래도 차남이었던 청년왕 헨리를 많이 사랑하여 그가 반란하다 급사했을 때
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하지만 4남 제프리 2세의 급사 소식을 들었을 때 웨일스의 제럴드는 헨리 2세가 슬퍼한 이유가 차남인 청년왕 헨리의 죽음을 다시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호버든의 로저는 막내 존만 찾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회를 신나게 즐겼다고 증언했다."나를 많이 괴롭게 만들었지만, 나를 더 괴롭혀도 좋으니 그가 살아있기만 하면 좋겠다."
6. 사적인 면[편집]
- 전술처럼 그야말로 '영웅호색을 실감케 했던 자'로서 생전 공공연한 간부로 불렸다. 개중에서 유명한 정부는 잉글랜드 출신인 미녀 '클리포드의 로자문드'로, 아내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를 연금했을 때, 대놓고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머리색은 아주 훌륭한 붉은색이었고, 나이가 든 탓에 머리가 다소 희끗했다. 키는 중간이고 작은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크게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큰 사람들 사이에서 작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머리는 둥글다. (중략) 평화로울 때의 눈빛은 완전하고 정직하고 비둘기 같았으며 분노했을 때는 불길로 번들거렸다. 기수의 휜 다리, 넓은 가슴, 복서의 팔은 모두 그가 강하고 재빠르고 용맹한 사내임을 증명했다. 대머리의 조짐은 없었지만 머리를 짧게 깎았다. 얼굴은 크고 네모지고 사자를 연상시켰다.
블루아의 피터
1,000번이라도 돌아와 다시 보고 싶었다. 중간을 약간 넘은 키에 훌륭한 팔다리와 잘생긴 얼굴로 축복받았다. 신체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다른 자들은 못하는 묘기를 언제나 성공했다.
월터 맵
안색이 붉고 거무스름한 데에다 주근깨투성이고, 머리가 크며 둥글다. 눈은 회색이고 충혈되었으며 분노로 번들거렸다. 표정이 강렬했다. 목소리가 약간 떨렸고 목은 짧고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하지만 가슴이 드넓고 팔은 근육질이었다. 살집이 좋은 체구였는데 배가 거대하게 튀어나왔다.
웨일스의 제럴드
- 아버지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는 미남 백작으로 불릴 만큼 미남으로 유명했고, 헨리 2세 본인도 앙주 가문 특유의 붉은 머리를 물려받았다. 생애 내내 온갖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다이어트에 열중했고, 그만큼 엄청난 운동량을 자랑했는데 살을 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고 한다.
7. 필리프 2세를 향한 호의[편집]
헨리 2세의 부친이었던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는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프랑스 왕 루이 7세와의 결혼 생활에서 낳았던 장녀 마리를 헨리와 결혼시켜 프랑스 왕으로 옹립하려 했었지만 루이 7세가 이를 거절했다.
이후 헨리 2세는 루이 7세와 이혼한 엘레오노르와 결혼해서 여러 자식을 얻었고, 그중의 차남인 청년왕 헨리를 (여전히 아들이 없던) 루이 7세와 카스티야 공주 콩스탕스 사이의 장녀 마르가리트와 결혼시켜 다시금 프랑스 왕위 획득에 도전하였다. 비록 여성의 영지 상속을 금하는《살리카법》이 상황에 따라 프랑스 왕국에 잔존하고 있었으나, 잉글랜드의 여군주 마틸다의 장남으로서 헨리 2세는 앙주 제국의 힘으로《살리카법》정도는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끝내 수포로 돌아갔으니, 루이 7세가 샹파뉴의 썩은 백합[29] 아델과의 사이에서 기어이 아들 필리프 2세를 얻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가장 유명한 사건이 있었는데 "파리 전체가 불바다에 휩쓸린 것처럼 보였고, 파리 신민들은 온 성당의 종을 울리며 거리로 뛰어나와 횃불을 켜고, 주먹을 휘두르며 '이 아이가 잉글랜드 국왕의 망치가 될 것'이라고 소리쳤다." 헨리 2세도 사악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필리프 2세의 생년월인 1165년 8월(아우구스투스)에 2개의 혜성이 잉글랜드 서부와 북부 지역에서 각각 관측되었고, 잉글랜드의 왕실 점술가들이 일제히 예언하길 헨리 2세의 파멸과 앙주 제국의 패망을 뜻하는 것이었다.
보통 알려진 것과 반대로 필리프 2세의 치세 초반부터 1188년 초까지 헨리 2세는 그의 오만방자한 언행을 참아 주고 각별히 보호했다고 여겨지며, 그런 헨리 2세의 이 ‘새로운 태도’는 노망이 의심스럽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수준으로 당시 대륙과 잉글랜드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필리프 2세를 데리고 다니며 봉신들 앞에서 연장자의 능숙함을 보여주었고, 심지어 평생 터득한 지혜와 정치적 비책들을 전수 해 주었으며, 소년은 이 연장자의 가르침에 자신을 온전히 복종시켰다. 웨일스의 제럴드는 헨리 2세가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이혼 이전부터 상위 주군의 아내를 빼앗을 속셈을 품었다고 비난하면서도 필리프 2세가 플랑드르를 중추로 한 북프랑스 반란을 종식할 수 있었던 이유는 헨리 2세의 지속적인 원조와 보호가 상당한 것이었음을 짤막하게 인정했다.
차남 청년왕 헨리가 인생의 낙이었던 마상창시합을 제쳐두고 필리프 2세의 보호에 열중했을 때 잠시 떼어놓기도 했지만 반란에 관한 의심 탓이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들이 재반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허구한 날 들락날락한 곳이 필리프 2세의 거처였을 뿐만 아니라 정황도 다분했음에도 헨리 2세의 보복의 칼날은 필리프 2세에게 향하지 않았다. 프랑스 신부에 의하면 헨리 2세가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같은 해에 필리프 2세의 영지에 사냥터 마련을 돕겠다는 명목으로 선물 공세를 아낌없이 퍼부었다고 한다.[30] 두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4남 제프리 2세가 3남 리처드를 제치고 필리프 2세와 끈끈한 동맹을 맺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판국에도 병에 시달리게 되자 필리프 2세를 자신의 거처에 며칠 묵게 하고는 위로를 받고자 하여 그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필리프 2세가 헨리 2세와 아들들 사이를 이간한 것을 논할 때 필리프 2세와 헨리의 아들들 중심으로 서술하고 그 결과의 양상이 필리프의 공적으로 주로 흡수되는 경향에 따라 헨리 2세가 베풀었던 이유 모를 수수께끼 같은 행적은 상대적으로 적잖이 논외가 되곤 한다.
8. 평가[편집]
국왕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나고 통치는 잘하긴 했다. 그의 치세 아래서 스티븐과 마틸다의 내전 이래로 피폐해진 왕국의 체제가 복구되었고 부유해졌으며,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 시스템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평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그의 왕권 확대 정책은 아직 수면 위로 올라오지는 않았으나, 서서히 귀족들과 교회의 불만을 사기 시작했고, 이는 후대에《마그나 카르타》사건으로 정점을 찍는다.
또한 그는 가족들에게 너무나 무신경했다. 수많은 정부들과 바람을 피워 엘레오노르와 그 소생의 자식들과 관계가 멀어졌고, 여러 아들들 가운데서도 막내아들 존만을 편애했다. 이 때문에 아내 엘레오노르와 존을 제외한 다른 아들들, 특히 리처드 1세와 제대로 척을 졌다. 그와 아들들의 불화는 끝을 모르고 커지다가 급기야 폭발하여 골육상쟁의 내전으로 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다른 많은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헨리 2세를 좋게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특히 그 지경까지 가 놓고서도 신을 원망하고 운명을 한탄할 뿐, 정작 자기가 한 짓은 반성하지 않고 끝까지 본인은 잘못이 없다고만 했으니, 아버지로서나 남편으로서는 결코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한마디로, 치국은 잘 해 놓고도 수신제가를 전혀 못 해서 파멸에 이른 왕이라 하겠다.
9. 가족 관계[편집]
9.1. 자녀[편집]
10. 여담[편집]
- 34년 재위 중에 그가 잉글랜드에 체류한 건 14년 정도였다. 어찌 보자면 아들 리처드 1세와 비슷한 기록. 마틸다가 헨리 1세의 임종 당시 잉글랜드 국내에 없었던 탓에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 자리를 강탈당한 것처럼, 잉글랜드의 왕이 가지고 있는 프랑스 영지는 프랑스 왕의 신하라는 미묘한 위치[34] 때문에 프랑스에 있었던 시간이 길어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쪽에 더 가까웠던 듯하다.[35]
- 앨프레드 대왕의 후손이기도 하다. 헨리 2세 때부터 영국 왕실에 다시 고대 웨식스 앵글로색슨 왕들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다만 윌리엄 1세의 왕비인 마틸다 역시도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이어서 노르만 왕가도 앵글로색슨 왕가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11.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겨울의 사자(The Lion in Winter)》라는 희곡 / 영화는 헨리 2세와 아내, 자식들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명작이라고 하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 번씩 보는 것도 좋다. 영화로도 2차례 만들어졌는데, 1968년판과는 달리 2003년판은 텔레비전용 영화이다. 두 작품 모두 캐스팅이 화려하다. 주인공인 헨리 2세부터 당대의 명배우인 피터 오툴[37] 과 패트릭 스튜어트가 각각 맡았으며, 히로인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또한 당대의 명배우인 캐서린 헵번과 글렌 클로즈가 열연했다. 1968년판에서는 안소니 홉킨스가 헨리 2세의 차남 리처드 1세로, 티모시 달튼이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로 출연했다. #
- 《대지의 기둥》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의 어머니 마틸다가 모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헨리가 태어난 후, 모드는 헨리를 데리고 스티븐을 피해 프랑스로 도피한다. 잠깐 모드가 우세를 점해 잉글랜드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다시 프랑스로 도망갔다가 장성하여 역공을 걸어 스티븐의 아들인 유스타스를 죽여버리고 왕위에 앉는다.
-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한마 유지로로 패러디되어 권왕님이 되어버린 아들과 대립한다.[38] 그의 2남인 헨리, 4남 조프리, 5남 존 등은 각기, 토키, 켄시로, 쟈기로 패러디되었다. 엄창난 포스를 풍기며 아들과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쳤으나, 실제 역사대로 점차 수세에 몰리다가 누구보다도 믿었던 막내아들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 19세기 미국의 소설가로 로빈 후드 민담을 정리한 '하워드 파일'의《로빈 후드의 유쾌한 모험》에서 잉글랜드의 왕으로 등장한다. 궁술 대회를 열어 자신이 총애하는 기사들에게 상금을 주려 했으나 엘레오노르 왕비가 데려온 로빈 후드 일행이 상금을 싹쓸이하자 로빈 후드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왕비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을 돌리고 로빈을 살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