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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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전개
3. 방식
4. 정치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제1항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제2항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1]


교회는 가장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고자 정치 투쟁을 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국가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이성적인 토론의 길로 그러한 투쟁에 들어서야 하며, 그 정신적인 힘을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그러한 힘이 없으면, 언제나 희생을 요구하는 정의는 구현될 수도 없고 진보할 수도 없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교회가 아닌 정치를 통해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동선의 요구에 마음을 열고 의지를 불러일으키도록, 교회는 정의 증진을 위한 활동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2005.12.25., 28항 中

정교분리()는 국가가 종교적 중립성을 유지하여 권력과 특정 교단을 결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제정분리(), 정종분리()[2] 라고도 한다.


2. 역사적 전개[편집]


정교분리는 프랑스 혁명 이후 봉건왕조 체제의 종교의 국교 특권을 박탈하고, 특정 종교의 전횡을 방지하며, 근대 국가의 정책에 종교적 영향을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오늘날 프랑스식의 정교분리를 의도한 것은 아니며 앙시앵 레짐에서 프랑스의 국교였던 가톨릭을 공격하여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하고 사제수도자들을 학살하고는 교회에게 혁명정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한 전적이 있다.

국민의회 의원들은 가톨릭교회에 대하여 추호의 적의도 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교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분명히 표명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종래 왕권이 교회 문제에 관여했던 것처럼 자기들도 국민의 대표자로서 교회 문제를 규율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다.(중략) 세속적인 국가권력이 교회 문제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은 근대 시민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국민의회 의원들 머리에서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中, 노명식


그러나 프랑스 혁명정부는 종교 특히 국교 지위였던 가톨릭이 혁명의 장애물이 된다고 보았다. 실제로도 성직자의 시민 헌법(Civile Du Clergé)을 내세워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 재정을 장악하며 성직자를 통제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선서파와 선서 거부파가 갈라졌다.

‘인권선언’과는 반대로, 프랑스혁명은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박해했다. 혁명은 선서거부파는 물론이고 선서파도 박해했으며, 나아가 프로테스탄트교회, 유대교회 등 일체의 종교를 박해했다. 기존의 종교는 미신에 불과했고, 프랑스혁명이 계시이자 섭리이자 진정한 종교였다. 혁명과 가톨릭교회의 대립은 두 종교의 대립이었고, 당시 혁명가들이 말했듯이, 두 광신의 대립이었다. 프랑스혁명이라는 종교는 ‘다른’ 종교와 양립하기를 거부했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혁명은 구체제와 다르지 않았다.

김응종 충남대교수


그리고 선서파에게만 일부 관대해보였던 종교 조치는 1791년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대프랑스동맹이 결성되자 폐기 되었다. 이 과정에서 3천여명의 사제와 신도가 처형되었다. 그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 나서 교황청과 화해했고[3] 다시 왕정복고를 거쳐 국교의 지위를 얻었으나, 19세기 중반 왕정이 무너지고 프랑스는 세속주의 국가가 된 것.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의도하지 않았던 부산물로서 정교분리 개념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 등을 통해 종교적, 사상적 자유와 관용이 꽤 보장된 것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에서도 한때 이 주제가 불거졌었다. 주변국과 달리 법적인 국교를 정하진 않았다지만 스페인에서 독립하는 데 구심점이 된 칼뱅파 교회가 사실상의 국교 노릇을 했고[4] 가톨릭이나 알미니안 교회 등의 타 교단들은 공직에 등용되지 못하는 데다 공개적인 종교 활동도 금지당해서 다락방이나 지하에서 조용히 의식을 치루어야 했다.[5] 19세기에는 왕이 교회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교단이 분열되기 시작했고, 20세기 초까지도 네덜란드 사회는 완전한 공존이라기보단 '기둥화'(verzuiling, pillarization)라 해서 종교와 이념에 따라 학교, 정당, 방송국[6], 신문사 등 여러 시설이 분리되어 있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 갈등도 꽤 존재했다. 의외로 흔히 생각하는 네덜란드 사회의 자유주의적 이미지는 프랑스, 독일처럼 1960년대 후반부터 생겨난 것이다.

한편 미국수정헌법 제1조가 정교분리에 해당하느냐의 여부를 두고 근본주의 개신교에선 국가 설립 당시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던 건국의 아버지들의 뜻을 곡해한다고 주장하고, 반기독교 진영에선 건국의 아버지들은 전부 반기독교였다고 주장하는데 둘 다 어느 정도 사실을 왜곡한 면이 있다. 수정헌법 제1조는 어디까지나 청교도들이 주장한 대로 영국 국교회처럼 특정 기독교 종파를 나라에서 국교로 정하고 다른 교파[7]를 탄압하는 것을 금지하는 취지였지 기독교와 완전히 분리된 사회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이신론 성향이었는데 이것이 당시 가톨릭 중심의 서유럽개신교가 주류인 북미에서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도 세례만 받았다면 이신론 성향은 그다지 탄압받지 않았고 무신론이나 기독교 내 이단과는 전혀 다른 취급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장 자크 루소볼테르는 이신론자였으나 종교 문제로 탄압받지 않았고[8], 오히려 지식인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명목상 프로이센 개신교의 수장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불가지론자였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도 이신론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그들의 정치관과 윤리관은 청교도들의 칼뱅주의 사상이 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처럼 반기독교적 색채를 띈 것은 아니다.[9]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혁명정부가 사제들에게 교황 대신 혁명정부를 따르라고 요구해 영국에서 처음 성공회가 생겼을 때처럼 탄압이 이루어진 바 있는데, 프랑스 계몽주의는 종교와 이성이 충돌한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비롯한 건국 이념이 종교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기독교인도 아니었으나 퇴임 고별사에서 이렇게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치적 번영으로 이끄는 모든 자질과 관습 중에서 종교와 도덕은 없어서는 안 되는 지주가 됩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한 이 커다란 지주, 인간과 시민의 의무를 가장 확고하게 떠받치는 이 지주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리 애국의 공덕을 외치더라도, 공염불로 끝날 것입니다. 순수한 정치가들은 성직자에 못지않게 종교와 도덕을 존중하고 소중히 해야 합니다. 종교, 도덕과 개인 및 국민의 행복 간의 모든 연관관계는 한 권의 책으로도 다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단히 따져 봅시다. 만약 법원의 심리 방편이 되고 있는 선서에서 종교적 의무감이 영원히 작용하지 않게 된다면, 재산과 명성과 생명의 안전을 어디에서 구하겠습니까? 도덕이 종교 없이 유지될 수 있다는 가정을 허용할 때는 신중히 해야 합니다. 특이한 재능을 갖는 사람들에 대한 차원 높은 교육의 모든 영향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이성과 경험은 종교원칙을 제외한 국민도의의 앙양을 기대할 수 없게 합니다.

번역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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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all the dispositions and habits, which lead to political prosperity, Religion and Morality are indispensable supports. In vain would that man claim the tribute of Patriotism, who should labor to subvert these great pillars of human happiness, these firmest props of the duties of Men and Citizens. The mere Politician, equally with the pious man, ought to respect and to cherish them. A volume could not trace all their connexions with private and public felicity. Let it simply be asked, Where is the security for property, for reputation, for life, if the sense of religious obligation desert the oaths, which are the instruments of investigation in Courts of Justice? And let us with caution indulge the supposition, that morality can be maintained without religion. Whatever may be conceded to the influence of refined education on minds of peculiar structure, reason and experience both forbid us to expect, that national morality can prevail in exclusion of religious princi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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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조지 워싱턴 1796년 9월 17일 대국민 고별사에서>


19세기 이후 근대 국가들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영향으로 법체계가 정비되며 전통적 국교는 지니나[10] 점차 세속주의 성향을 띠게 된다. 제1, 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며 유럽의 왕정들이 붕괴되자 현대국가들은 헌법상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명시하게 된다.
  •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영국의 경우 아직도 성공회잉글랜드에서 국교로 규정되나,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지위일 뿐 정치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상원에 성직자 의석이 있긴 한데 찰스 1세 시절 성공회 주교들을 거수기로 뽑아서 비판받았고 1688년 명예혁명 이후엔 영국 국교회에 속하지 않더라도 영국 국교회 <39개 신조>에 위배되지 않는 기독교 종파의 차별은 금지되었고,[11] 현재에도 국왕의 성직귀족 임명 권한은 매우 형식적이다.
  • 덴마크의 경우 공식적으로 개신교 루터교회가 국교다. 그러나 국교의 권위는 형식적이며 세속화 되어 국가적 행사나 왕실의 관혼상제에나 출현하는 용도일 뿐, 국교의 지위라기 보다는 전통적 문화적 관습으로 여기고, 루터교 신자라 하여 타 종교인과 비교하여 혜택이 전혀 없다.

2차대전 이후 수립된 제3세계 국가에서도 이들 근대화된 국가들의 헌법의 영향으로 기본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바이며,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제2항에도 마찬가지로 규정되어 있다. 튀르키예오스만 제국 때부터 시작되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때부터 본격화된 철저한 정교분리 정책으로 유명한 세속 국가다.[12] 비록 에르도안 집권 시기에 와서 조금 위태로워졌지만, 여전히 주변 이슬람 국가들과 비교하면 정교분리 원칙이 비교적 잘 지켜진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를 중심으로, 지금도 권력과 교단이 분리되지 않은 나라가 존재한다. 호메이니가 제창한 벨리야테 파키(Veliyat-e-Faqih) 이론에 따라 신권 정치로 이슬람 성직자(아야톨라)가 최고 지도자를 겸하는 이란이 대표적이며[13], 신정이 아니더라도 사회 전반에 걸쳐 특정 종교 문화를 강요하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국가들이 있다.

몇몇 나라에서는 종교의 이름을 내걸고 정당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독일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같은 기독교 기반 정당이 있다. 한국 역시 지속적으로 이와 같은 시도가 있어 왔는데, 기독당, 기독사랑실천당, 기독자유민주당, 한국기독당 등이 나섰지만 줄줄이 실패했다. 그 외에도 다른 종교들도 불심으로 대동단결 간간이 시도하긴 했는데, 통일교 역시 한 정당을 지지하였으나 똑같이 말아먹은 사례가 있다.[14] 참고로 이런 종교정당의 경우 프랑스 같은 극단적 케이스를 제외하면 정교분리 원칙에 위반되는 것은 아니다. 자세한 건 후술.

한국의 경우 조선시대의 기본 통치철학은 유교, 성리학에서 비롯되었다.[15] 실질적으로 조선의 통치는 유학을 이념으로 하지만 법가식 통치였단 평을 받기도 한다. 하여튼 기본적으로는 유교의 논리를 바탕으로 정치가 이루어졌다.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논의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천인감응이니 하며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 유교 성리학이 국교의 지위로 종묘와 사직에 제사가 왕실은 물론 국가의 중요한 의례였으며, 지방관들은 고을별 명산대천에 사시사철 제사를 지내야 했다.

종교정당의 활동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기독교 우파를 표방한 기독자유민주당 같은 비현실적 구호를 내세운 사례가 있지만, 이것은 미국의 경우에도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한국은 종교인들의 외면을 받고 있을 뿐이지만, 미국에서는 정말로 진지하게 호응을 얻는 것 같다. 『지상의 위험한 천국』의 저자 크리스 헤지스는 이를 두고 기독교 파시즘이라 불렀고, 『신의 이름으로』의 저자이자 종교학 교수 존 티한은 권력은 기독교 내의 폭력성을 실현시키는 수단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국가가 특정 교단을 편드는게 아니라면 종교정당 역시 민주정과 공존이 가능하며, 기독교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독일 기민련, 기사련의 사례에서 보듯 현실에서도 분명 사례가 있다. 이것이 한국의 상황에서 실현 가능하냐는 의문과는 별개로, 종교정당이란 개념 그 자체를 민주주의 훼손 요소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근본주의, 전통주의 등 종교 내 (극)보수 성향에서는 겉으로든 속으로든 정교분리의 원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데, 정교분리의 원칙은 종교의 예언자직 수행을 방해하는 요소로 보기 때문. 보수파일수록 특정 종교의 사회교리를 세속법률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는 사고가 팽배하다. 가령 가톨릭 보수파에서는 낙태 및 이혼 절대금지를 세속법률에 반영해야 한다는 식이다. 특히 동성애, 동성결혼, 낙태 등과 같이 종교/종파, 이데올로기마다 찬반이 갈리는 일부 분야에 대해서는 특정 행위를 죄악으로 보고 금지시키는 사회교리를 세속법률에 반영하려는 종교 보수주의와 특정 종교의 사회교리가 세속법률로 침투하려는 시도를 저지하려는 세속 자유주의 간 충돌 여지가 크다.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정교분리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에 속하며, 종교의 자유 역시 이와 비슷한 선상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한국 역시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보장함의 전제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이다.

사실 삼권분립보다 훨씬 먼저 실시되었다. 동양의 경우도 승려가 정치에 관여하는 나라는 고작해봐야 일본 정도에 불과했으며 조선의 경우 이른바 사또라 하여 지방자치단체장 + 지휘관 + 판사를 겸직하긴 했어도 성직자까지 겸직하진 않았다. 심지어 구약성경에서조차 정교분리의 원칙이 존재하여, 사울이 이 정교분리의 원칙을 깨고 '왕' 신분으로 오직 '제사장'만 가능한 제사를 직접 드리다가 사무엘에게 적발되어 사무엘이 사울을 버리고 새로운 왕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또한 웃시야는 당시 무난한 성군이었지만 대제사장만 출입할 수 있는 성궤가 모셔진 지성소에 멋대로 들어가려다 나병에 걸려 사실상 폐위당했다.

다만 구약성경의 경우 정교분리의 원칙은 엄밀히 말하면 왕(정치)에만 강요되었다. 구약에는 왕이 종교에 간섭하는걸 금하는건 있어도 성직자가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금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구약에서 정교분리는 사실상 잘못된 것 취급을 받는데 구약에서 인간 왕을 세운 것조차도 그렇게 경고를 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의 뜻을 믿지 못한 것이기에 죄악으로 취급받는다. 모세, 여호수아, 판관기의 판관들만 봐도 순수하게 죄악이 아니라고 평가받는건 오히려 성직자가 정치에까지 관여하는 제정일치에 가깝다.

3. 방식[편집]


정교분리는 구체적 적용 방식에 있어 국가마다 그리고 개인마다 해석 차이가 크게 존재한다.

1번째 유형은 국가와 종교 교단이 분리되어 있으며 특정 교단에 특별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 형태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국가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독일, 아일랜드, 한국 등이다. 미국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당선자 개인의 종교와 연관시켜 선서 등을 할 수 있으며, 조지 W. 부시가 2002년 9월 11일 9.11 테러 1주년 당시 "미국의 이와 같은 이상은 모든 인류의 희망입니다. ... 그 희망이 아직도 우리가 갈 길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둠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라며 요한복음 1장을 살짝 변형한 연설을 한 바 있다. 독일은 기독교민주연합그리스도교 계열 정당이 나름의 탄탄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다. 이런 형태의 정교분리는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분리가 아니라 정부와 교단들의 분리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아예 종교 기념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는다.

2번째 유형은 공공부문에서 일체의 종교 활동을 배제하는 형태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나라는 프랑스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프랑스프랑스 혁명 때부터 이어져 온 계몽주의 정신과 여기서 비롯된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분리 방식인 라이시테(laïcité)를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정교분리를 택하는 다른 나라들보다도 공공부문의 종교 활동에 더 강하게 대처하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공공장소의 종교 상징 노출 금지나 특정 종교를 암시하는 행위 금지 등이 있는데, 공립학교에서 무슬림 여학생들의 히잡을 금지하여 논란이 되었을 정도로 공공부문에서 종교 활동을 엄격히 배제한다. 히잡 착용뿐만 아니라 공립학교 내 십자고상 비치도 금지하고 있다. 프랑스는 헌법 제1조에서 프랑스를 "비종교적, 민주적, 사회적, 불가분적 공화국"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현재 프랑스는 이슬람교와 특히 큰 마찰을 빚고 있으며 이슬람교를 풍자하고 희화화했다는 이유로 만화가들이 대낮에 사살을 당한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프랑스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터키아타튀르크 이후 프랑스식 엄격한 정교분리를 지향했으나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이 장기 집권하면서 바뀌어 더 이상은 프랑스식 엄격한 정교분리를 지향한다 할 수 없다. 터키어로 세속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프랑스어에서 빌려와 Laiklik 이라고 부르는데, 좀 더 나가자면 전통적인 이슬람 문화권에선 세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모든 인간은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고, 특히나 이슬람교에서는 사제와 평신도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율법이 민법의 역할도 맡았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는 율법이 법적인 효력을 갖는다.

그래서 현대 아랍어나 페르시아어에서도 세속주의는 모두 외래어를 차용해 사용하고 있으며, 이슬람주의자 또한 "세속화는 서구 기독교적 개념이지 우리랑 맞지 않는다."며 세속주의를 반대한다. 터키에서는 한때 공공장소에서의 히잡착용조차도 엄격하게 처벌했지만, 21세기 초반에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영미식 세속주의와 정교분리를 도입한다며 종교의 자유 이름으로 이러한 제약들을 거의 해제했다.

3번째 유형은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분리하고 서로의 독립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경합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정교조약(concordat)을 체결하여 상호관계를 처리하는 형태이다. 과거에 가톨릭이 공식적 국교였던 국가들이 세속화되는 과정에서 세속정부와 교회권력(교황청) 간의 정교협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가톨릭 교회법의 세속적 효력이 일부 인정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부부가 교회법원에서 혼인무효 판결을 받으면[16] 세속에서도 이혼 내지 혼인무효 판결받은 것으로 인정된다는 것. 여기에 해당하는 국가로는 이탈리아, 폴란드 등이 있다. 이탈리아 헌법은 제7조에서 “국가와 가톨릭교회는 각각 자기 영역 내에서 독립적이며 주권을 가진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라테라노 조약으로 정한다”고 밝힌다. 폴란드는 헌법 제25조 4항에 “폴란드 공화국과 가톨릭교회 간의 관계는 교황청과 체결된 국제조약과 법률로 정한다”고 선언한다.

소련, 중국, 북한, 옛 알바니아처럼 공산권 국가가 국가 무신론을 주장하며 종교 자체를 탄압하는 것은 정교분리를 넘어 '무신론 원리주의'에 가깝다.

4. 정치[편집]


한국미국독일에 가까운 정교분리를 채택 중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종교와 연관지어 정치적 신념을 밝히는 행위는 적어도 한국과 미국, 독일 기준으로 정교분리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마틴 루터 킹 목사,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등은 스스로의 종교와 정치적 신념을 연관시켜서 공적으로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교분리는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을 분리하라는 의미이지, 종교인이 정치를 하거나 정치인이 종교를 가지는 것을 금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행위는 특정 종교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참정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된다.

정교분리에 대한 또 다른 흔한 오해는, 이것을 마치 "종교의 정치화", 즉 종교가 정치를 잠식해 들어가는 상황에 대한 방어권으로만 이해한다는 점이다. 정교분리는 이뿐만 아니라 "정치의 종교화", 즉 정치인에 대한 신격화 내지 정치권력의 우상화를 막는 근거로도 활용될 수 있다[17].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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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헌 헌법 때부터 명시되어 있다.[2] 지금은 사어화 되어 잘 쓰이지 않는다.[3] 교회 재산 문제와 세속주의 교회 수도원의 교육기능 복원 문제 때문에 교황청에서 거절했으나, 종교에 관심이 없었던 나폴레옹이 "또 한번 교회와 사제들 공격할 수 있다"고 으름장놓고 "칼뱅파로 개종하고 프랑스개신교에 봉헌(?)해 버릴까?"라고 협박하여 교황청에서 굴복했다.[4] 네덜란드 공화국 시절부터 개혁교회의 목사는 국가에서 직접 월급을 받는 등 준 공무원에 가까운 지위를 누렸지만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부모가 아이에게 세례를 줄지 말지를 알아서 선택하도록 해주었다는 점에서 타 국가의 국교회와 달랐다. 그래서 국교회가 아닌 '국민교회'(volkskerk)로 불렸었다.[5] 지금도 'schuilkerk'라 불리는 가톨릭 및 재세례파, 루터교도의 비밀 집회장소가 문화재로 남아있다.[6]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은 합쳐진 KRO-NCRV가 각각 가톨릭 방송과 개신교 방송이었다.[7]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잉글랜드 왕국에서 탄압받던 비국교도 복음주의자, 재세례파, 침례회 성향이 많았다.[8] 루소는 스위스 개신교도였는데 프랑스에서 활동하느라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는 했다.[9] 알리스터 맥그래스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에 대하여>[10] 대표적으로 영국성공회, 프로이센은 루터교, 러시아 제국정교회.[11] 1689년에 시대의 지성이었던 바로 그 존 로크가 관용의 기치를 들고 이에 맞선 바 있다. 그의 저작인 『관용에 관한 편지』에서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존 로크는 스튜어트 왕조 시절 박해받던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청교도식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가톨릭과 유니테리언 차별은 1840년대까지 이어진다.[12] 그나마 이것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군부를 장악한 상태에서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슬람 성직자들의 반발을 억누르면서 정교분리 정책을 강행했기에 가능했다. 개혁을 이루려면 개혁을 추진하는 주체들의 도덕성이 아니라, 개혁을 강요할 힘이 필요한 것이다. 다만 아타튀르크는 군부를 장악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군부를 장악하게 된것도 이교도들인 영국이나 프랑스 ANZAC 군을 격파하면서 나오게 된 권위이다. 실제로 아타튀르크도 초창기에는 온건한 이슬람에 기초하여 외세 타도를 부르짖었던 것이고, 이슬람적으로도 보면 이교도로 부터 무슬림세계를 지켜낸 가지(이슬람 전사)라고도 볼 수 있다.[13] 하지만 시아파 성직자들 중에서도 성직자의 정치 참여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상당하다.[14] 한국의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신자로서 종교인들을 존경하는 것과 유권자로서 정치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철저하게 분리해 생각한다. 그래서 당장 교회나 절 등지에서 종교인들을 존중하거나 심지어는 숭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투표에서 신앙을 기반으로 한 정당을 찍어주지는 않는다.[15] 동양사회에서 敎, 學, 道의 구분은 엄밀하지 않았다. 성리'학'이라고 해서 종교성이 없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도교도 마찬가지고, 기독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 서학이라 한 것은 서양 학문이란 의미가 아니라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마테오 리치가 쓴 천주실의였으며, 사실 불교도 조선시대 불도로 불리는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16]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몇 가지 경우 혼인무효는 가능하다. 자세한 이야기는 혼인성사 참조.[17] 『한국헌법론』(개정 9판), 허영, p.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