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라 키릴로브나 여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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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의 왕자비
키라 키릴로브나 로마노바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Кира Кирилловна России


파일:Kira Kirilovna.jpg

이름
키라 키릴로브나 로마노바
(Кира Кирилловна Романова)
출생
1909년 5월 9일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
사망
1967년 9월 8일 (향년 58세)
프랑스 브르타뉴 생브리아크쉬르메르
배우자
프로이센의 왕자 루이 페르디난트 (1938년 결혼)
자녀
프리드리히 빌헬름, 미하엘, 마리 체칠리에, 키라, 루이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지기스문트, 크세니아
아버지
러시아의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어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공녀
형제
마리야, 블라디미르
종교
러시아 정교회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결혼
2.3. 말년과 사망
3.1. 조상
3.2. 자녀



1. 개요[편집]


러시아의 프린세스/여대공이자 호엔촐레른 가문의 당주인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의 아내로 현 당주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의 할머니다.

러시아 제국의 대공이자 작위 요구자인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과 빅토리아 여왕의 친손녀인 빅토리아 멜리타의 차녀다. 부계로도 모계로도 알렉산드르 2세의 후손이며[1] 빅토리아 여왕의 모계 후손이기도 하다.[2] 로마노프 황가의 현 수장인 마리야 여대공의 고모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파일:빅토리아 멜리타와 딸들.jpg
빅토리아 멜리타와 마리야와 키라. 어머니에게 안겨있는 아이가 키라다.

1909년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에서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과 빅토리아 멜리타의 1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빅토리아 멜리타는 헤센의 마지막 대공인 에른스트 루트비히와 결혼해서 딸 하나 낳고 이혼해서 빅토리아 멜리타에게는 셋째 딸이다. 태어난 나라가 러시아가 아닌 프랑스인 이유[3]는 부모 키릴과 빅토리아 멜리타가 1905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결혼했고, 이에 니콜라이 2세가 둘을 해외로 추방해서, 망명지에서 키라를 낳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사촌간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고[4], 특히 니콜라이 2세의 부인인 헤센의 알릭스가 멜리타의 전 남편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여동생이였던 게 문제였다. 알릭스의 입장에서는 오빠와 이혼한 전 올케가 자기 남편의 사촌과 재혼하는 거였기 때문에, 빅토리아와 키릴의 혼인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키라가 태어나고 이듬해 니콜라이 2세가 키릴부부의 결혼을 허락하면서 1910년 5월 러시아로 돌아갔다.[5]

파일:어린시절 키라여대공.jpg
어린 시절 모습.(1912년)

이후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혁명을 거치며 1917년 핀란드로 이주했고, 핀란드에서 남동생 블라디미르가 태어난다. 이후 독일 코부르크를 거쳐 프랑스 생 브리악 쉬르 메르로 이주했다.

원래 키라는 여대공이 아닌 프린세스였다. 이는 알렉산드르 3세가 황족들의 지위 개편으로 황제의 친손자녀까지만 대공, 여대공 칭호를 쓸 수 있게 제한되면서 증손자녀부터는 프린스, 프린세스 호칭을 썼다. 때문에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친손자였던 키릴은 대공이였지만, 키릴의 자녀들은 증손주로서 프린스와 프린세스였다. 그러다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니콜라이 2세헤센의 알릭스 일가가 모두 총살되자 1924년 키릴은 자신이 생존한 러시아의 황족들 중 제일 서열이 높으니, 로마노프 가문의 적법한 수장이자 러시아의 황제라고 칭하며 자신의 자녀들에게 대공과 여대공 칭호를 부여하면서 키라는 여대공이라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러시아 제국은 멸망한지 한참 지났고 여대공은 그저 이름 뿐인 지위였으며 가지고 있는 재산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 키릴은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된 후 가장 먼저 러시아 임시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다른 로마노프 황족들에게 황제를 배신했다고 비난받았으며, 당시 니콜라이 2세의 모후 덴마크의 다우마도 살아있어서 현실적으로 제위를 주장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키릴의 황제 선포에 대한 로마노프 일족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키라는 육촌이였던 스페인의 아스투리아스 공 알폰소[6]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까였다.

이후 키라는 루마니아의 귀족인 콘스탄틴 슈초 공을 만났고 그를 좋아했었지만 루마니아 왕 카롤 2세[7]는 정치적 문제로 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계속 혼담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20대 후반까지 노처녀(...)로 있었다. 1936년에는 어머니 빅토리아 멜리타가 사망했고, 1938년에는 아버지 키릴 대공도 사망했다.


2.2. 결혼[편집]


파일:루이스 페르디난트와 키라 키릴로브나의 결혼식 사진.jpg
그러다가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를 만났고 둘은 사랑에 빠져 1938년 결혼했다. 루이 페르디난트는 마지막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장남인 빌헬름 폰 프로이센의 차남이였다. 그러나 루이 페르디난트의 형 빌헬름이 귀천상혼으로 결혼하여 계승권이 박탈되면서 대신 호엔촐레른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다.

파일:루이 페르디난트와 키라의 장남.jpg
루이 페르디난트와 첫 아이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함께 찍은 사진.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2.3. 말년과 사망[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가족들이랑 브레멘으로 이주했다.

파일:말년의 루이페르디난트와 키라.jpg
말년의 루이 페르디난트와 키라 여대공.

1951년 시아버지 빌헬름 황태자가 사망했다.

1952년 시어머니 체칠리에 황태자비의 권유로 6촌언니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을 사칭한 아나 엔더슨을 만나본 적이 있다. 체칠리에 황태자비는 아나 엔더슨이 아나스타샤라고 믿고 있었지만, 키라는 아나 엔더슨을 만나보고 그녀가 아나스타샤가 아니라고 말했다.

1954년 시어머니 체칠리에 황태자비가 사망했다.

키라는 나이가 들면서 살이 찌고 고혈압 등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는 가족력이었다. 하지만 키라는 식단을 조절하는 이런 삶에 대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이후 장남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1967년 8월 귀천상혼을 하자 실망스러워했다.

1967년 9월 브르타뉴에 있는 동생 블라디미르 대공의 집을 방문하는 동안 키라는 컨디션이 좋았고 잘 먹었다. 키라는 커피에 설탕 몇 스푼을 넣으며 "신이시여, 제가 건강에 좋은 것을 먹는 것을 금지하소서!"라고 말했던 그날 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호엔촐레른 가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러시아의 키라 키릴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Kira Kilirovna of Russia)
러시아의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Grand Duke Kirill Vladimirovich of Russia)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Grand Duke Vladimir Alexandrovich of Russia)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헤센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여공작
(Duchess Marie of Mecklenburg-Schwerin)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Frederick Francis II,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
로이스쾨스트리츠의 아우구스테 공녀
(Princess Augusta of Lois-Köstlitz)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공녀
(Princess Victoria Melita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Alfre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Maria Alexandrovna of Russia)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헤센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3.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
(Prince Frederik William)
1939년 2월 9일
2015년 9월 29일
발트라우트 프레이다그
슬하 1남
에렌가르데 폰 레덴
슬하 2남 1녀
시빌 크레츠머
2남
미하엘 왕자
(Prince Michael)
1940년 3월 22일
2014년 4월 3일
유타 요른
슬하 2녀
브리지테 폰 달비츠
1녀
마리 체칠리에 공주
(Princess Marie Cecilia)
1942년 5월 28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올덴부르크[8][9]
슬하 1남 2녀
2녀
키라 공주
(Princess Kira)
1943년 6월 27일
2004년 1월 10일
토마스 프랭크 리프스너
슬하 1녀
3남
루이 페르디난트 왕자
(Prince Louis Ferdinand)
1944년 8월 25일
1977년 7월 11일
도나타 폰 카스텔뤼덴하우젠 여백작[10][11]
슬하 1남 1녀[12]
4남
크리스티안 지기스문트 왕자
(Prince Christian Sigismund)
1946년 3월 16일

니나 폰 레벤틀로 여백작
슬하 1남 2녀
3녀
크세니아 공주
(Princess Xenia)
1949년 12월 9일
1992년 1월 18일
페르 에드바르트 리탄더
슬하 2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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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 키릴 블라디미로비치는 알렉산드르 2세의 친손자, 어머니 빅토리아 멜리타는 알렉산드르 2세의 외손녀다. 즉, 키릴과 빅토리아 멜리타는 사촌간 혼인.[2] 어머니 빅토리아 멜리타가 빅토리아 여왕의 친손녀였다.[3] 언니 마리야는 태어난 나라가 독일이고, 동생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제국이지만 현재의 오리지널 러시아가 아닌 러시아령 핀란드에서 태어났다.[4] 오촌 이상부터 결혼이 허용돼서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인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과 당숙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은 별 문제없이 결혼할 수 있었다.[5] 왜 혼인이 허락됐나면 당시 니콜라이 2세의 유일한 아들인 알렉세이는 혈우병 환자였고 살아있는 유일한 남동생 미하일은 귀천상혼을 해서 3순위 계승자인 키릴대공이 황위를 계승해야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6] 알폰소 13세의 장남. 아스투리아스 공의 어머니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왕비가 키라의 어머니 빅토리아 대공비의 고종사촌이기에 육촌지간이었다.[7] 이모 에든버러의 마리의 장남으로 키라의 이종사촌오빠이기도 했다.[8] 올덴부르크 대공국의 마지막 대공세자인 니콜라우스 폰 올덴부르크의 4남이다.[9] 마리 체칠리에와 이혼한 이후 처남댁인 도나타와 재혼한다.[10] 최초의 슈탄데스헤어 출신인 호엔촐레른 가문 수장의 아내다.[11] 남편과 사별한 이후 아주버니였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올덴부르크 공작(마리 체칠리에의 전 남편)과 재혼한다.[12]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