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두리/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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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차두리의 클럽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프로 이전[편집]


출생 당시 아버지의 소속 팀 연고지였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아버지가 레버쿠젠으로 이적하자, 바이어 04 레버쿠젠 유겐트 유소년 보급팀에서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 아버지 차범근이 독일에서 현역 은퇴 후 국내로 들어오면서 차두리 또한 국내로 이주하였다.

이후 아버지 차범근이 1991년 현대 호랑이 現 울산 현대 감독으로 부임하자, 본인도 울산양정초등학교로 편입하였고, 울산현대중학교에서 2학년을 마칠 때쯤 아버지가 현대 호랑이 축구단에서 경질 당하자 서울로 상경해 배재중-고등학교를 거치게 됐다.[1] 배재고 3학년 당시엔 팀 창단 첫 전국고교축구선수권 대회 결승에 올리는 등, 고교 무대에서도 바로 두각을 보이면서 고려대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고대 감독이었던 조민국 감독 아래서 1학년부터 주전으로 뛰었으며, 최전방 공격수 혹은 처진 스트라이커로 주로 뛰었다. 그러나 1학년 가을에 피로골절 부상을 당했고,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독일로 넘어가 수술을 받는 등, 2학년 2학기에는 거의 뛰지 못했다. 그러다 3학년 1학기를 앞두고 복귀했다. 당시 고려대의 최전방 투톱은 이천수최성국이었고, 차두리는 김정우와 함께 주로 2선에서 뛰었다.

그리고 4학년이 되었던 2002년에, 대학신분임에도 당시 히딩크호에 파격 선발된 차두리는 여름 방학 기간에 2002 한일 월드컵 멤버로도 선발되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4강 신화를 함께 쓴 멤버가 되었다.

이후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대회가 끝난 직후 독일 분데스리가 구단인 레버쿠젠의 정식 러브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연고전 출전과 더불어 여전히 유럽 이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국내 시각으로 인해, 고려대에서 이적동의서 발급을 차일피일 미루는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였다.[2]

이에 차두리는 당시 고대에 서운한 감정을 나타냈었다고도 하며 결국, 졸업까지 한 학기를 앞두고 미뤘던 차두리는 2006년이 돼서야 졸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3. 바이어 04 레버쿠젠(02.8~04.6)[편집]


이후 한국시간 2002년 8월 8일 새벽에, 아버지 차범근이 선수 생활 말년을 보냈던 바이어 04 레버쿠젠과 계약기간 5년에 연봉 300만 유로(한화 약 36억원)의 계약을 체결하여 바로 독일 무대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레버쿠젠으로 바로 합류하진 않고 같은 분데스리가 소속의 하위권 팀인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로 약 2년 간 임대로 경험을 쌓고 계약 3년차에 레버쿠젠으로 복귀하여 잔여 계약기간을 채우는 조건으로 입단하였다. 또 이 과정에서 만일 임대기간 내에 빌레펠트가 2부리그로 강등되면 차기 시즌에 바로 레버쿠젠으로 복귀하고 계약기간을 4년으로 변경하는 사항을 추가하였다.

이날 레버쿠젠과 계약을 마치고 곧바로 빌레펠트로 이동하여 입단식을 치루며 등번호 7번을 받았는데, 당시 차두리는 11번을 원했으나 이미 주인이 있어 구단에서 추천해준 번호를 달게 된것이라고 한다.


3.1.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임대, 02.8~03.6)[편집]


파일:imago0000588247s.jpg

그렇게 상당한 기대를 받으며 분데스리가 데뷔 및 첫 프로무대 데뷔전을 빌레펠트에서 하게 되었고, 2002년 8월 1일 DFB 포칼 1라운드 1. FC 자르브뤼켄과의 경기에서 후반 중반 라데 보그다노비치와 교체되며 자신의 프로 첫 경기를 소화하였다. 하지만, 주로 하위권에서만 머물던 팀이여서 그런지 시즌내내 생각보다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첫 시즌 27경기 2골 1도움으로 마치게 되었고, 2002-03 시즌 팀도 리그 16위로 2부리그로 강등당하여 첫 프로무대에서 바로 강등을 당하는 경험을 겪게되었다.[3]


3.2.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임대, 03.8~04.6)[편집]


02-03 시즌을 마치고 원 소속팀 레버쿠젠과 빌레펠트의 사전 합의에 따라 차두리는 한 시즌 만에 레버쿠젠으로 복귀해야 했으나 여전히 차두리의 자리는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 차범근이 전성기를 보낸 팀이자 자신의 고향팀이기도 한 프랑크푸르트로 다시 한 시즌 임대를 가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이전 빌레펠트와 마찬가지로 하위권에 머물던 팀이여서 그런지 차두리의 활약은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결국 시즌 31경기 1골 3도움으로 또다시 부진한 활약을 이어나가게 되고, 프랑크푸르트도 03-04 시즌 결과 16위로 2부리그로 강등당하여 2년연속 분데스리가 강등을 겪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당시 독일에서는 차붐의 아들이란 것과 팀의 운이 잘 안 따르는 선수로 유명했는데, 차두리는 독일 리그 내 모든 공격수를 대상으로 한 집계 랭크 17위에 기록되고도 팀의 성적부진으로 주목을 못 받거나 팀의 1부 리그 승격에 주춧돌이 되었으나 팀의 경영 문제로 트레이드 대상이 되어버리는 등의 일이 많았다.[4]


4.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04.6~06.5)[편집]


파일:cha_koe8-1424336014.jpg

결국 원 소속팀 레버쿠젠에서도 차두리의 기량에 계속적인 의문을 가진 상황에서, 당시 2부리그로 강등된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차두리를 계속 품고 가고 싶어했기에 이 두 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게 되어 그렇게 2004년 6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로 완전 이적하였다. 그리고 2004-05 시즌 분데스리가 2부리그에서 차두리는 당시 팀의 주포였던 알렉산더 마이어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공격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시즌 32경기 9골 7도움을 터뜨려 데뷔이래 첫 맹활약을 펼치게 되며 바로 팀의 1부 리그 승격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그러나 1년만에 다시 1부리그에 복귀한 2005-06 시즌에는 차두리 특유의 우당탕탕 뚫어내는 플레이가 1부 리그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으면서 시즌 30경기 3골 2도움으로 또다시 만족스럽지 못한 저조한 활약을 보였다. 그래도 잠시 오른쪽 풀백으로 종종 출전하기도 하면서 팀의 DFB-포칼 준우승에 공헌하긴 하였다.[5]


5. 1.FSV 마인츠05(06.5~07.6)[편집]


2006년 5월 주전 확보를 위해 당시 2부리그에서 막 승격한 1. FSV 마인츠 05로 이적하여, 이때 마인츠 감독이었던 위르겐 클롭의 제안으로 포지션을 완전히 라이트백으로 변경하였다. 여담으로 이때 차두리의 마인츠 입단 동기중에 후에 K리그에 진출하게 되는 에두가 있기도 했다.[6]

시즌 초반에는 주전 풀백이었던 크리스티안 데미르타스가 부상당하여 주전 풀백으로 발돋움하였지만, 이후 팀이 리그 최하위를 면치 못하며 기존 선수들로 안정된 경기 운영을 펼칠 수밖에 없었으며 차두리 또한 부상이 겹치는 등의 불운으로 결국 시즌 총 12경기 출장밖에 확보하지 못하는 등 안좋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2006-07 시즌 결과 팀은 16위로 한 시즌만에 다시 2부 리그로 강등당하여 커리어 사상 3번째 강등을 겪게 되었다.


6. TuS 코블렌츠(07.6~09.6)[편집]


독일 리그 초기엔 뛰어난 피지컬에 비해 떨어지는 개인기와 좁은 시야를 계속 지적 받으며 여러 팀을 떠돌았으나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인 2007년부터는 분데스리가 2부리그 코블렌츠로 이적해서 풀백으로 완전히 포지션 체인지에 성공.[7][8] 공수전반에서 대활약을 펼치며 주축 선수로 성장하면서 소속팀에서 2년간 62경기 3골을 넣는 활약을 펼치며 2008년에는 팬들이 뽑은 베스트 플레이어에서 2위에 랭크되기도 하였다.


7. SC 프라이부르크(09.6~10.6)[편집]


2009년 6월 분데스리가 SC 프라이부르크로 이적하여 2년 만에 다시 분데스리가 1부로 복귀하였고, 리그 후반기에 부상으로 아웃되기 전까지 윙백자리에서 주전으로 활약하였다. 이 시즌 샬케 04와의 경기에서 라이트백으로 출전해 환상적인 오버래핑으로 당시 마누엘 노이어를 상대로 기록한 골은 프라이부르크 시절을 대표하는 장면이기도 했다.[9]


8. 셀틱 FC(10.6~12.6)[편집]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좋은 활약으로 분데스리가에서 스코틀랜드의 셀틱 FC로 이적하면서 커리어 처음으로 독일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 A매치 출전 기록이 모자라 취업비자 발급을 위해서 보증인을 세워야 했는데 이 보증을 무려 독일 축구 레전드인 프란츠 베켄바워가 해줬다. 2년 계약을 맺으면서 당시 이미 셀틱 소속이었던 기성용과 같이 팀에서 뛰게 되었고 셀틱 이적 후, 팀 적응 문제로 힘들어하던 기성용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차두리 본인은 첫 시즌에는 16경기, 두 번째 시즌에는 15경기를 뛰며 확실한 주전이라 보기에는 조금 애매한 출전 수를 기록했다. 그래도 분데스리가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리그 우승을 경험하게 되면서 큰 의미를 겪게되었다.[10]


9. 포르투나 뒤셀도르프(12.6~12)[편집]


셀틱에서 2년간 활약한 뒤, 2012년 독일 뒤셀도르프로 이적하며 다시 분데스리가에 복귀하였으나 이번에는 가족과 관련된 문제로 인하여 소속팀에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는 등 계속해서 특별휴가로 국내를 오고가고 하다가 결국 전반기를 마치고 상호 협의 하에 계약해지를 하면서 독일 생활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11]


10. FC 서울(13.3~15.10)[편집]


그렇게 팀을 다시 구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며, 2013년 3월 말 갑작스럽게 국내 FC 서울 영입설이 뜨면서 많은 축구팬들의 환영하는 분위기와 동시에 신빙성을 의심받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언론에서도 입단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3월 25일 서울 유니폼을 입은 공식 사진이 배포되면서 입단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정식 입단 발표는 3월 27일이 되었고, 등번호는 5번을 배정받았다.


10.1. 2013 시즌[편집]


4월 14일 슈퍼매치에 선발 출장하여 K리그 클래식 데뷔전을 치렀다.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체력이나 실전감각 문제는 없었지만, 역시나 전술한 장점과 단점을 고스란히 노출한 모습을 보였다. 고요한과 짝을 이룬 오른쪽 라인의 파괴력은 뛰어났고, 수원의 스테보와 피지컬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면서 지난 2년간 윤성효가 서울을 농락한 수단이었던 스테보 - 라돈치치 트윈 타워를 앞세운 롱볼 전술에 유효한 대비책이 되었다. 그러나 후반 막판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에서 수비 위치 선정에 미스를 범하면서 라돈치치를 무방비 상태로 놓치며 동점골을 허용하는 우를 범했다. 2013 시즌 최종 기록은 30경기 3어시스트. 경쟁자 고요한, 최효진을 가볍게 제압하며 주전 자리를 꿰찼다.


10.2. 2014 시즌[편집]


14시즌에는 명실상부 K리그 최고의 오른쪽 수비수로 자리 잡았다.

전성기보다는 피지컬이 좀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 떨어졌다는 피지컬로 내로라하는 K리그 공격수들을 압도했다. 수비력만 따지면 최효진보다 떨어졌지만 14시즌 서울이 3백을 주포지션으로 쓰면서 윙백으로 많이 출전했기에 단점을 상쇄할 수 있었고 최효진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피지컬과 스피드, 공격가담으로 압도적으로 꾸준히 최효진을 앞지르고 주전 출장했다. 물론 스리백에서만 우수 했던건 아니고 가끔 사용한 4백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비력이 약한 건 사실이지만 그간의 경험을 허투로 먹진 않아서 옛날 뉴캐슬 3B 같은 폼은 절대 아니고 파트리스 에브라조제 보싱와같은 유형의 선수가 되었다.[12] 이 활약을 인정받아 14시즌 MVP 후보에 올랐으며 K리그 클래식 베스트 일레븐에 당당히 선정되었다.


10.3. 2015 시즌[편집]


2014 시즌이 끝난 후 은퇴 이야기가 나왔다. 이미 동년배인 박지성[13]도 은퇴한 마당이라 은퇴를 생각할 나이기는 하지만 만 33에 은퇴한 박지성은 잦은 대표팀 호출로 인한 장거리 비행과 혹사가 겹치면서 얻은 고질적인 무릎부상 때문에 요즘 선수치고 은퇴를 꽤 빨리한 편이고, 30대 후반까지 현역으로 활약하는 선수가 많다는 걸 생각하면 차두리가 은퇴하기엔 아직 이르다며 더 뛰어주길 바라는 의견이 많았다.

시즌이 끝난 뒤, 시상식에 참여해 2015 호주 아시안컵이 끝난 뒤,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할 것을 선언했다. 단, 현역 은퇴는 아니라고 한다. FC 서울과 1년 재계약을 맺으며 2015시즌을 함께하게 됐다. 하지만, 대다수의 네티즌들은 국가대표팀 은퇴를 만류하는 목소리도 높다.나이만 놓고 보면 은퇴하는 게 맞는데 아직도 그 피지컬을 대체할 선수가 없다[14]

그리고 2015 시즌이 끝난 뒤, 현역으로도 은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시즌 중, 부상을 당한 고명진을 대신하여 팀의 주장이 되었다. 말년에 주장 해보는 차미네이터

15시즌 22라운드 포항전에서 드디어 K리그 데뷔골을 넣었다!해당 장면정조국이 찬 슈팅을 신화용이 제대로 잡지 못하고 흘린 공을 동점골로 연결시켜 1 : 1로 만들었으나, FC서울은 후반전에 내리 두 골을 실점하며 1 : 3으로 패배. 경기 하이라이트

그리고 9월 19일 슈퍼매치에서 자신의 시즌 2호골을 집어넣었다. 이때 수원팬들 앞에서 신명난 세리머니를 한것도 덤. 해당 경기 하이라이트

10월 31일 FA컵 결승전에서 인천에 3대1 승리후 은퇴를 했다. 해당 경기 하이라이트


11. 현역 은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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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 FA컵 결승전 FC 서울인천 유나이티드를 꺾고 우승하였고 경기 직후 차두리는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남은 K리그 클래식 경기는 더이상 뛰지 않고 현역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시즌 막판 발바닥 부상을 당했지만 참고 뛰었다고 한다. 기사

파일:external/cdn.mydaily.co.kr/201511071614402239_1.jpg

FA컵 우승을 확정 지은 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5년 11월 7일 FC 서울과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슈퍼매치 더비에서 클럽 소속으로도 공식적인 커리어 마침표를 찍는 은퇴식이 진행 되었다. 본인의 의지와 K리그 클래식 경고 누적으로 인한 출장정지로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FC 서울과 서로 앙숙인 수원 삼성의 서포터즈 그랑블루조차 차두리의 은퇴를 기립박수로 축하해주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 이루어졌다.[15]

차두리 은퇴식


[1] 여담으로 이때 유명한 배재중, 고교 동기로는 개그맨 출신의 노우진이 있었다.[2] 여담으로 당시 고려대학교 내에선 차두리의 해외 진출이란 주제를 두고 아예 설문조사를 진행하기까지 했다(...).[3] 당시 차두리의 기량이 아직 부족했던것도 있었지만 사실 이때 계속 하위권팀이었던 빌레펠트 또한 차두리 같은 공격수들이 좋은 모습을 보여줄 환경 또한 되지는 못했다.[4] 단 집계 랭크 17위는 2003년 분데스리가 데뷔 당시 초반 잠깐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의 점수이다. 사실 피지컬은 당시 독일에서도 뛰어난 수준이었고, 풀백으로 전환하기 이전에도 간혹 좋은 크로스를 올리며 공격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풀백 전환 이후라면 몰라도 공격수 시절 국대에서의 모습만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수준 하지만 그것만으로 성공하기에는 개인기와 시야 문제의 단점이 너무 컸다.[5] 이 시기 소속팀에서 우측 윙, 공격수, 윙백 등등 팀내에서 계속 애매한 자리를 잡지 못하여 당시 대표팀에 새로 부임한 아드보카트 감독의 신뢰를 얻지못하는 등 국대에서도 멀어지게 되어, 결국 2006년 월드컵 승선에 실패하였다.[6] 또 공교롭게도 에두는 당시 차두리의 아버지 차범근이 감독을 맡고 있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입단하여 K리그 경력을 시작하였다.[7] 이미 마인츠 시절에 풀백 포지션 변경을 제안 받았으나, 바로 완전 자리 잡지는 못하고 윙과 풀백을 번갈아가면서 보기 했다.[8] 이 시기에 3백의 우측 센터백으로도 몇 경기 나왔다.[9] 당시 한국인 최초로 노이어에게 득점한 선수로 남게되었다.[10] 참고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시절 DFB-포칼 결승까지 진출했던 전적이 있다. 다만 결승전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패해 우승하지는 못했으나 다음 시즌 UEFA컵 진출권을 따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차두리는 그 다음 시즌 마인츠로 이적해 UEFA 컵 무대를 밟지 못했다.[11] 당시 전 아내가 계속되는 해외생활로 힘들어 했다는 해외 언론들의 보도가 있기도 했다.[12] 에브라와 보싱와 둘 다 수비력으로 정상급인 선수는 아니었으나 발이 빠르고 공격력이 우수해 맨유와 첼시라는 리그 정상급 팀에서 주전으로 뛰었다.[13] 박지성이 빠른 81년생이기에 둘 다 99학번이라 사실상 동갑으로 봐도 무방하다. 실제 동년배라 둘은 친구로 지낸다.[14] 사실 다른 선수들이 무조건 차두리보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윙어 출신이기에 수비력이 떨어지는 편인 차두리에 비하면, 사실 현재 K리그 국대급 라이트백 중에 차두리보다 수비력이 떨어진 풀백은 드물다. 문제는 그 만한 공격력, 그리고 그만한 피지컬을 가진 선수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지만.[15] 수원팬들 또한 차두리의 아버지 차범근이 수원 삼성에서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어느 정도 실적을 올렸기 때문에, 아들인 차두리를 라이벌 팀 선수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마냥 비난할 순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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